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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4 회 )
제 2 장
강남공원의 눈보라
1
3부통합회의를 앞두고 길림은 활기를 띠였다. 남북만에 할거해있는 민족주의단체들인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대표는 물론 동만교민대표, 청총대표, 북만교민대표들까지 꼬리를 물고 밀려들어 시내에는 전례없이 민족화합의 서기가 창일하였다. 3부통합은 원래 김형직선생님께서 소집하신 1925년 8월의 력사적인 무송회의에서 초보적으로 론의된 문제였다. 선생님께서 서거하신후 오동진을 비롯한 고인의 충직한 전우들이 각 단체 거두들과의 거듭되는 제휴로 결국은 3부의 완고덩이들을 통합실현을 위한 마당으로 끌어낸것이다. 이것은 《민족단체련합촉진회》의 결성으로 통일단합의 진일보를 실현한 무송회의정신이 이루어놓은 눈물겨운 수확이다. 려장을 풀기 바쁘게 각 단체 대표들은 숙소에서 예비회의들을 열었다. 《정의부》에서도 매일같이 간부들의 사전회의를 가지였다. 통합에 대처한 부의 전술문제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론담과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오늘도 리갑무로인을 비롯한 《정의부》의 거두들은 오동진네 사랑방에 모여앉아서 소득없는 토론으로 하루해를 보냈다. 진종일 맥이 쑥 빠지게 입씨름을 했는데도 화제는 역시 어제나 그저께처럼 령도권문제에 와서 좌절되고마는것이였다. 《어쨌든 이번 합작이 성공을 못하면 독립운동의 명맥이 아주 끊어진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기때문에 우리 <정의부>도 너무 자기 주장을 고집해서 통합회의를 난관에 봉착하도록 만들어선 안된다고 봅니다.》 회의집행자인 오동진이 좌중을 둘러보며 엄하게 경고하였다. 그는 자기 수하의 사람들과 측근자들이 말끝마다 《우리 부》, 《정의부》를 외우며 떠들어대는것이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을 모두 쥐여짜면 어떻게 하든지 3부통합회의에서 《정의부》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령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 립장을 바로잡아놓지 않고서는 모처럼 마련된 통합회의를 위기에 빠뜨릴수 있었고 합작과 단결의 따뜻한 분위기에 찬바람을 들씌울수 있었다. 오동진은 이것이 두려웠다. 《그러면 우리의 주장을 아주 양보하기라도 해야 한단말이요?》 리웅이 《정의부》의 2인자답게 거드름스럽고 담력있는 어조로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도전이나 항의에 가까운 물음이였다. 그는 혈색이 불깃불깃하고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윤기를 뿜는데 그 정력이 누구도 휘여낼수 없게 완강했다. 오동진은 마뜩지 않는 눈길로 힐끗 리웅을 일별하였다. 그러나 기상과는 달리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으로 그를 달래였다. 《일정한 원칙을 세우고 원칙에 복종하는 한에서는 우리도 양보를 해야지. <참의부>나 <신민부>도 의례히 자기 주장들을 가지고 나올텐데 그 주장들을 절충해가면서 저쪽에서 양보할것은 저쪽에서 양보하고 우리쪽이 양보할것은 우리쪽이 양보해야 할게 아니요.》 《오선생, 내 소견에도 령도권문제는 양보할수 없다고 봅니다. 그건 염통을 떼주는것과 같은건데 그래서야 안되지요. 염통을 떼주면 발쪽밖에 차례질것이 없습니다. 합작이 파괴될가봐 지나치게 겁을 먹으면 우리가 주도권을 잃습니다.》 고원암이 풍채좋은 몸집을 궁싯거리며 《정의부》수석의 고집을 견제하였다. 그는 리웅에 못지 않은 유력자이며 리론가이다. 그의 발언으로 장내가 또 웅성거리였다. 상좌에 앉아있던 리갑무로인이 그 소요를 보다못해 대통으로 구리화로 변죽을 두드렸다. 가슴팍에 드리워진 재빛수염을 흔들흔들 저으며 입을 열었다. 《오선생 의견을 참작하고 방침을 세우는것이 좋은줄로 아오. 작은 일을 고집하다가 큰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소.》 고원암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우리가 령도권을 획득하는것외에 또 다른 큰일이 어데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가지고 독립운동을 추진시키는것이 큰일이 아니겠소.》 리갑무로인은 눈을 흘기며 준절히 꾸짖었다. 그는 과격하고 편협한 의견이 나올 때마다 3부통합이라는 큰 문제를 념두에 두고 《정의부》의 옹근 존재까지라도 제단에 바치는 심정으로 모색을 하자고 한마디씩 던지군하였다. 오동진은 담배연기가 뿌옇게 떠도는 방안을 둘러보다가 말석에 앉아있는 유상조더러 문을 좀 틔여놓으라고 일렀다. 담배연기도 연기지만 들뜬 숨결과 열기에 한껏 오염된 장내의 공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기때문이였다. 그는 혼자 고심해서 새로 내오게 될 통합체의 중앙기구를 어떻게 꾸리고 지방기구들을 어떻게 꾸려야 하겠다는 초안까지도 만들었는데 《령도권》주장이 어찌나도 격렬했던지 그 초안을 협의에 붙이지도 못하였다. (이놈의 독립운동이 기어코 권력쟁탈과 내분으로 망하는것인가!) 오동진은 암담한 기분에 휩싸여 한숨을 크게 몰아쉬였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그의 상념속에 파고들어와 그를 우울과 고독에로 몰아가는 생각이였다. 그 생각은 병마처럼 그를 줄곧 괴롭히고 그의 살을 깎아내고 그의 피를 말리였다. 그는 새삼스럽게 김형직선생님이 그리웠다. 사후에도 생전과 같이 늘 잊은적이 없지만 역경에 부닥칠 때면 더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시였다. 《대한청년단》과 《광제청년단》의 통합을 모색하던 관전회의때도 그랬고 《민족단체련합촉진회》의 결성을 가져온 무송회의때에도 분렬의 험악한 공기는 선생님의 로고로 제거되였었다. 선생님의 아량과 진지한 노력의 근저에서는 불순한 파심이나 대결심리는 감히 발을 붙이지 못하였다. 선생님께서 생존해계신다면 3부통합회의도 락관적인 결과를 기대할수 있을것이다. 《정의부》안의 분분한 론담도 쉽사리 평정될것이다. 그리고 오동진 자기는 지금처럼 이렇게 불안때문에 마음을 옹송그리지 않아도 될것이다. 아, 김선생, 이 막중한 대사를 두고 선생께서는 어이하여 그리도 빨리 가셨나이까. 선생께서 계시지 않으니 항우같다고 소문난 동진이도 바람받이의 고목같나이다. 그는 심기가 격해져서 눈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침울한 기분에 감염되여 급기야 입들을 봉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담배연기는 구름처럼 자꾸 밖으로 밀려나갔다. 텁지근하던 방안의 공기가 한결 맑아졌다. 유상조는 춥다고 몸살을 떠는 김사헌의 독촉에 못이겨 문을 닫았다. 그때 밖에서 누군지 그 문을 열고 신문 한장을 살짝 들이밀었다. 《안창호선생이 길림에 오신대요.》 이런 말과 함께 남복차림을 한 녀자의 모습이 문짬으로 언뜻거리였다. 《소영이, 그건 어디서 날아든 풍문인가?》 리갑무로인이 방금 뛰여나가기라도 할듯한 자세로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키고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신문에 났지요. 그 신문 사회란을 보십시오.》 그는 침착하게 대답을 한 다음 문앞에서 돌아섰다. 3부통합회의의 뒤치닥거리를 해달라는 오동진의 부탁을 받고 그는 사흘전에 도착했던것이다. 화전중대에서 대원들의 계몽으로 두달을 보낸 그는 다시금 무송의 강반석어머님 곁으로 돌아가 선배들로부터 받은 그 보은의 의무를 성실하게 리행하고있었다. 3부통합회의의 사전회의가 난관에 봉착했다는것을 알게 된 처녀는 안창호의 도착소식으로써 화끈 달아오른 거두들의 기분을 눙쳐주려고 타산하였던것이다. 과연 그의 타산은 적중하였다. 일동은 신문을 둘러싸고 법석 끓었다. 《도산선생이 북경을 거쳐서 길림에 온다는구만.》 사회란의 기사를 눈으로 얼추 훑어본 리갑무로인이 흥분한 나머지 큰소리로 웨쳤다. 로인은 돋보기를 끼고 기사를 소리내여 읽기 시작했다. 방안의 공기는 일변하였다. 《도산선생의 웅변을 들어본지도 아득하다.》 리웅이 뒤로 고개를 잔뜩 젖히고 깊은 감회에 잠겨들며 한마디 하였다. 그는 얼이 나간 사람처럼 천정의 한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원암에게 물었다. 《로형, 우리가 광화문 황토마루에서 도산선생의 성토연설을 듣던 일이 기억나오?》 고원암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혀를 찼다. 《기억나구말구. 검정무명 두루마기차림으로 단상우에 의젓이 서있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구만.》 《그날 온 서울장안이 충국애민과 자유민권을 부르짖던 선생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지.》 《그러게 도산 하면 누구나 그 청산류수같은 웅변을 생각하는게 아니요.》 그 누구보다도 큰 격정을 터쳐야 할 리갑무로인은 아무 말도 없이 입에 장죽을 문채 눈을 슴뻑거리며 덤덤히 앉아있었다. 고패질을 하는 기쁨을 억제하느라고 무진 애를 쓰는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 안창호는 동지이기전에 스승이였고 선배였다. 그가 《신민회》의 발기인으로 되여 독립운동무대에 나서게 된것도 기실은 도산의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승산없는 의병의 활동에 젊음을 고스란히 바치고 류혈이 랑자한 독립군의 전초에서 머리가 세여지던 나날 리갑무로인은 기억속에서 안창호를 지워버린적이 한번도 없었다. 《웅변도 웅변이지만 도산선생이 유명해진거야 청렴결백한 그 마음씨때문이지.》 잠자코 있던 김사헌이 말참견을 하였다. 《량심인이니까.》 장철하가 큰소리로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지난해말부터 다른 사람에게 무송중대를 넘기고 길림에 올라와 중앙호위대장이라는 새로운 직무를 맡고있었다. 《나는 상해<림시정부>가 조직될 때 그가 백옥같이 깨끗하고 투명한 인간이라는걸 알았소. 산파역은 자기가 하고서도 <대통령>자리와 <국무총리>자리는 다른 사람들한테 각각 떠맡겨준 그 양보심과 대범성을 보란말이요.》 일동은 고개를 끄덕거리는것으로써 장철하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분명 대경사로다!》 마침내 리갑무로인이 입을 열었다. 다 타지도 않은 대통속의 담배를 화로전에 뚝뚝 두드려 털어놓으며 그는 누구에게라없이 말했다. 《독립만 되면 대통령을 할 사람이니 특별히 영접을 잘해야겠소.》 로인은 흥분에 겨워 채수염을 후들후들 떨고있었다. 모두가 떠들고 모두가 기뻐하였다. 그러나 단 한사람 오동진이만은 그들의 기분에 말려들지 않고 아무런 흥심도 없이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그는 안창호의 외세의존사상을 무섭게 미워하는 사람이라 안창호를 칭송하는 리갑무로인까지도 좋은 감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안창호는 조선민족주의운동의 시조로, 령수로 자처하는 사람이였다. 독립협회에도, 만민공동회에도, 공립협회에도,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흥사단운동에도 그의 이름은 련결되여있었다. 진실정신의 배양을 근본사명으로 선포하고 태여난 대성학교의 설립도 자아수양과 인격향상을 제창한 안창호의 교육정신이 낳은 열매라고 한다. 합방전야에 이등박문은 조선민족의 인망이 높은 안창호를 한말 정부의 우두머리로 들어앉히려고 유혹했다. 그의 측근에서 뜻을 같이하던 지사들도 안창호내각의 출현이 일본의 부당한 압력을 견제하고 내정을 바로잡는 완충적역할을 하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정계진출을 한결같이 권고했다. 안창호는 이것을 단연히 거절하고 해외로 나갔다. 이러고보면 그가 청렴결백한 량심인이라는 평판을 듣는것도 타당한 일이라 하겠다. 오동진 역시 안창호의 인간상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호감을 갖고있었다. 그러나 인격향상이니 실력배양이니 하는 개량주의적사고방식과 외세의존을 기본으로 하는 그의 리념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있었다. 잠시후 《정의부》의 간부들은 회의장을 나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웬일인지 유상조만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뜨락에서 서성거리다가 리웅이 맨 마지막으로 사랑방에서 나오자 얼른 그의 곁에 붙어서며 소곤거리였다. 《리선생님, 이렇게 락관하다가는 안됩니다. 안창호선생이 길림으로 오는게 앞으로 열릴 3부통합회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회의를 돕기 위해서 오는줄 압니까? 안창호선생은 <흥사단>로선을 가지고 들어오는겁니다. 그래 이번에 나올 통일체가 <흥사단>로선을 접수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정의부>가 틀어쥐여야 합니다.》 리웅은 유상조의 말을 못들은척하고 덤덤히 걸음만 옮겨짚었다. 고조되였던 론쟁의 열기가 식어버린 뒤여서 그런지 그는 그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것 같았다. 유상조는 윤이 반들반들한 단장 중둥을 거머쥐고 재게 휘저으며 또 소곤거렸다. 《하긴 그까짓 안창호선생이야 오든말든 상관이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리갑무선생의 립장이 문제라고 봅니다. 무엇때문에 회의를 시작도 안했는데 <정의부>가 양보하는 립장에서 문제를 다루자고 자꾸 쓸데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해가지고야 어떻게 령도권을 장악합니까?》 《그게 뭐 내탓인가. 그런 말을 하려거든 오동진이나 장철하한테 하라구.》 리웅은 역하게 한마디 부르짖었다. 《그럼 <정의부>가 우선 그런 세력들을 배제해야지요. 어떻게 그런 세력을 그냥 두고 통합회의를 하겠습니까?》 리웅은 그 소리에는 대꾸를 안하고 걸어갔다. 《정의부》자체가 3부통합회의에서 령도권을 쥐기 위한 그 어떤 구체적인 대책이 없이 오직 통합이라는 목표에만 급급한것 같은 태도에 불만은 있지만 유상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는것이였다. 오동진이나 장철하를 배제할수도 없거니와 또 그런 중심인물들을 배제한다는것은 《정의부》자체를 무너뜨리는 일과도 같은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설핏해진 저녁거리를 걸어갔다. 유상조는 가끔 대모테안경속에서 눈알을 굴려 표표한 리웅의 옆얼굴을 훔쳐보군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할가 했으나 리웅의 표정이 자기 말에 그렇게 주의를 돌리는것 같지 않아서 입을 더 열지 않았다. 사실 이 대모테안경의 작자는 빛이 다른 작자이다. 이자는 《조선총독부》가 파견한 밀정이였다. 이자의 아버지는 한말 적신들의 그늘밑에서 요직을 지내면서 일제를 업어들이는데 한몫 논 매국노였다. 그래서 왜놈들로부터 막대한 은사금까지 받아먹었다. 유상조는 아버지가 친일매국을 한 덕분으로 일본에 건너가 호강을 하면서 대학공부까지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조선에 건너와 《총독부》에 취직을 했다. 그는 《총독부》에서 1년간 근무하고는 경무국장으로부터 길림에 들어가 조선독립운동을 내탐할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지금 이 독립운동자들의 대렬속에 기여들어와있는것이였다. 리웅이와 갈라진 유상조는 단장을 옮겨짚으며 송화강가의 길을 걸어내려갔다. 그가 권태일이네 집마당을 지나가려 하는데 권태일의 어머니가 돼지먹이를 한버치 이고 올라왔다. 유상조는 안경코를 치켜올리면서 입가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재빨리 굴리는 두눈알에 음험하고 능청스런 빛이 어리였다. 그는 왼쪽팔에 단장을 걸고 금시 일손을 거들어주기라도 할듯한 자세로 녀인의 곁에 다가갔다. 《허허, 수고를 하십니다. 내리여드릴가요?》 《원 선생님두, 옷이 더럽혀지지 않겠습니까?》 《옷이 더러워지면 어떻습니까.》 유상조는 단장을 토방에 눕혀놓고 버치를 닁큼 들어내렸다. 《어이구, 정말 고맙습니다.》 《고마울게야 뭐 있습니까. 이웃간에서… 요새두 학생들이 모여와서 공부를 합니까?》 《네, 저 드문드문 모여오지요. 모여와선 그 무슨 소설책을 읽는다면서 떠들지요.》 《허허허, 그렇겠지요. 젊은 사람들이니까요.》 유상조는 토방에 눕혀놓았던 단장을 도로 짚고 점잖게 비탈길로 걸어내려갔다. (내가 잘못 대답하질 않았나. 저 사람이 전날도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가고 물어봤는데 또 그 소리를 묻는게 암만해도 이상해.) 정씨는 놋비녀를 뽑아물고 서서 낭자를 고쳐틀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안창호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석양녘에 길림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정거장앞뜰은 민족주의자들과 그들의 영향밑에 있는 시민들, 시내 여러 학교에서 모여온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들 출구쪽만 살피였다. 안창호는 홈에서 마중나온 지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뭇손님들이 다 사라진 다음에야 천천히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리갑무며 리선엽이며 심룡준이며 김좌진이며 《상해림시정부》의 재정부장 최활이들이 근엄하게 그를 옹위하였다. 전이 넓고 빳빳한 안창호의 검은 중절모가 류달리 높게 드러났다. 안창호의 뒤에 리선엽목사의 흰 얼굴이 붙어섰는데 그 얼굴은 안창호의 목언저리에밖에 오지 않는다. 출구를 빠져나온 안창호는 정거장앞뜰에 서있는 민족주의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였다. 그와 같이 온 청년 둘이, 한사람은 번들거리는 가죽가방과 트렁크를 들고 다른 한사람은 안창호의 모자와 단장을 쥐고 뒤를 따랐다. 안창호는 검은 외투에 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었다. 기름을 바른 머리는 왼가름을 타서 살짝 갈라붙이고 코밑수염도 이쁘장하게 갈라서 제꼈다. 그의 몸에선 강한 향수냄새가 풍겼다. 그는 민족주의자들과 악수를 하고나서는 학생들앞으로 왔다. 학생들앞에서는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저 손만 한번 쳐들어보이고는 물러섰다. 《존경하며 신뢰하는 여러분!》 그는 자기에게 시선을 집중한 사람들을 향해 역두연설을 시작했다. 리갑무, 심룡준, 최활, 리선엽이들이 그의 옆에 모자들을 벗고 서서 연설을 정중히 들었다. 수염을 눈언저리까지 비틀어올린 《신민부》의 거두 김좌진이도 한옆에 서서 연설을 들었다. 다들 표정이 정중하지만 그중에서도 리선엽목사와 최활의 표정이 제일 심각하고 정중했다. 리선엽은 공연히 밭은 기침을 하며 이따금 손수건을 눈언저리로 가져간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과 은덕으로 이번 미국에서 돌아와 각지를 력방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제가 이번 각지를 찾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숙원인 조선독립문제를 가지고 동포들과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는데 있습니다. 지금 세계만방엔 신생과 자유의 기운이 창일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전 인류의 리상이 저 유럽전란의 흔적과 같은것을 힘차게 씻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있다는것을 말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우리 조선은…》 《날씨가 몹시 추운데 말씀을 적게 하심이 어떻습니까?》 막 연설이 시작될만한 때에 리선엽목사가 곁에서 소곤거렸다. 안창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생들속에서는 리선엽이 공연한 소리를 한다고 혀를 차기도 했다. 그들은 그만치 안창호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들어보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있는것이였다. 안창호는 한 3분동안 역두연설을 하고는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속에서 따라온 청년이 내밀어주는 모자를 쓰고 단장을 정중히 짚었다. 리갑무, 심룡준 두 로인이 그를 대기하고있는 인력거로 안내했다. 인력거우에 오른 안창호는 잠간 손가락끝으로 이쁘장한 수염을 매만지며 저녁기운이 싸인 성안쪽에 시선을 보냈다. 뒤이어 리갑무, 심룡준을 비롯한 3부의 거두들도 모두 인력거에 올라탔다. 리선엽이 안창호를 태운 인력거군에게 조양문쪽으로 가지 말고 왜놈령사관앞거리로 달려가자고 소리쳤다. 독립군거두들이 다 그러하지만 그중에서도 리선엽목사는 지금 흥분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졸지에 조선독립이 이루어지는것 같고 안창호가 첫 대통령의 취임식전에라도 나가는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것이였다. 그래서 그는 이 당당한 위풍을 일본령사관놈들에게 보이고 놈들이 기절이라도 해서 넘어지게 만들고싶었다. 《괘씸한놈들! 조선민족의 위풍을 좀 봐라!》 리선엽은 점점 더 홍두깨같은 감정이 뻗쳐올랐다. 안창호가 탄 인력거는 맨앞에서 달리고 그뒤에 독립군거두들이 탄 인력거가 늘어섰다. 학생들만이 아무것도 타지 않고 법석 떠들며 걷는다. 인력거들은 조양문쪽으로 들어가는 십자거리를 지나서 왜놈거리를 저쯤 바라보며 내달아갔다. 독립군거두들은 흔들리는 인력거우에 앉아서 무서운 눈초리로 석양을 받아 번쩍이는 령사관의 유리창들을 쏘아보았다. 호랑이수염을 한 김좌진은 더욱 독한 눈으로 좌우를 쏘아보았다. 그는 공연히 탈려올라간 수염을 비틀어놓군한다. 안창호도 령사관우에 나붓기는 왜놈의 국기를 보자 기색이 좀 달라졌다. 미소를 머금었던 눈에 날카롭고 랭담한 빛이 어리였다. 다만 리갑무, 심룡준 두 로인만이 긴 수염을 후들후들 저으며 모든것을 못본척하고 앉아있다. 왜놈거리는 비로 쓴것 같이 사람의 래왕이 없다. 상점들도 문들을 꼭꼭 닫았다. 왜놈령사관앞을 지날 때에는 누구도 말 한마디 없었다. 다만 인력거 구는 소리, 길바닥의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뿐이다. 유상조는 환영군중들과 함께 이 모든 광경을 세세히 보았다. 그는 길림의 실태를 분석하고 종합한 장문의 비밀보고서를 상전에게 올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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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에서 길림으로 달려오는 특별렬차속에서는 《조선총독부》특파원 구니하라가 안락의자에 파묻혀앉아 유상조가 올려보낸 정보를 읽고있었다. 인찰지 두장에 길림형편이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이 적혀있었다. 3부통합회의가 무엇을 토의하며 어떻게 진행되고있다는것, 리갑무, 오동진, 김좌진, 심룡준, 최활 등 개별적인물들의 동향이 어떻다는것, 그중에서도 오동진에 대한 자료는 더 상세하였다. 유상조는 월파, 조청산이나 김찬이들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간명하였다. 제일 길게 렬거한것은 안창호의 길림도착소식이였다. 그는 이 인물이 길림으로 온것은 반드시 앞으로 열리게 될 3부통합회의에 그 어떤 긍정적영향을 줄수 있으니 그 회의를 파괴하려면 우선 이 인물을 처리해야 할것 같다고 자기 의견을 첨부했다. 봉천에서 이미 읽은 내용이여서 이 대목은 별로 구니하라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는 유상조가 마지막에 첨부한 자료에 주목을 돌리고 신중히 읽었다. 《지금 길림시내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있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자료라고 간주되기에 적습니다. 시내 학생들속에서는 맑스ㅡ레닌주의 독서열이 급진적으로 팽배해지고있으며 여기저기서 맑스-레닌주의연구소조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있습니다. 이때까지 <조선공산당만주총국>산하에 있는 조청산이나 김찬이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여기에 상주해있긴 했으나 이런 본격적인 방법으로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한적은 없습니다. 탐문한바에 의하면 이것은 그 계통사람들의 움직임이 아니고 지난해 화전에서 <ㅌ.ㄷ>라는 공산주의단체를 조직한 운동자들의 활동에 의하여 빚어지고있는 적색화과정임이 명백합니다. 확실히 이 후자는 간과해서는 안될 위험한 세력입니다. 추후 그에 대한 자료와 그 지도자가 누구인가 하는것은 렴탐해서 보고하겠으나 나타난 자료에 류의하고 딴방향으로도 대책을 강구하여 일을 추진시킴이 좋을가 합니다.》 (《ㅌ.ㄷ》?…) 구니하라는 생각에 잠겼다. 어느 계통의 조직인가? 조선공산주의운동내부를 손금같이 틀어쥐고있는 구니하라이지만 《ㅌ.ㄷ》란 말은 처음 듣는다. 실상은 무슨 큰 조직도 아닌데 유상조라는 인간이 지나치게 과민해서 간과해서는 안될 세력이니 뭐니 하고 떠드는것은 아닌지. 《아끼다, 그 유상조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 그는 곁에 앉아있는 조선총독부 밀정 아끼다에게 물었다. 《네. 일본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총독부관리로 있다가 선발되여 들어온자입니다. 아주 열심히 활동하고있습니다.》 아끼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꾸했다. 구니하라는 껄껄대며 웃었다. 《열심히구 뭐구 이렇게 신경이 약한놈을 해서 뭘해?》 《그래두 그자가 자기 힘으로 3부통합회의를 파괴해버린다고 맹세하고있습니다.》 《야야, 조선속담에 맥도 모르고 침통 뽑아든다는 말이 있느니라.》 그 소리에 주위에 앉아있는 수원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끼다도 열적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우리 일행이 뿌리를 뽑자. 조선독립군이란게 뭐냐? 짚신감발에다가 화승대나 메고다니는 촌뜨기들인데…》 구니하라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안락의자에서 불쑥 일어나 창문앞을 왔다갔다했다. 작고 좀상스럽게 생겼으나 눈에 칼날같이 독한 기운이 배여있는 랭혈형의 사나이였다. 그는 일본공산당사건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다루어온 로회한 검사이다. 어떤 사건이고 잡아쥐기만 하면 그 진상을 발가내고야만다는 평판이 있는자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년전부터 이 구니하라를 데려다가 조선공산당사건을 다루게 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안창호를 비롯한 조선독립운동자들의 체포를 위해서 길림으로 파견하였다. 구니하라는 봉천에 도착하는 즉시로 이 거사의 실현을 위한 대책으로 장작림정권의 헌병대사령관에게 코밑진상을 들이밀며 일을 추진시켰다. 뢰물을 받아먹은 헌병대사령관은 마침 봉천에 체류중인 길림독군 장작상이와 협의했다. 그는 구니하라가 꾀여주던대로 장작상에게 안창호가 공산주의자이며 길림에 모여든 독립운동자들도 사실상 거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속였다. 이렇게 되자 장작상도 선뜻 응해나섰다. 그는 그 즉시로 안창호네들을 체포하라고 자기의 독군서에 명령을 하달하였다. 구니하라는 지금 그런 장작상을 암사슴 잡아가지고오듯 렬차칸에 태워가지고 온다.
안창호를 비롯한 조선독립운동자들의 운명은 이미 《조선총독부》의 올가미속에 들어가있는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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