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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3 회 )
5
사실 강연회가 파탄된 사건은 권심이보다 채경이에게 타격이 더 컸다. 채경은 이때까지 길림에 살면서 느껴오던 실망이 인제는 완전히 환멸로 바뀌여지고말았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야 이 길림에서 이이상 더 무엇을 해보기 위해 애쓰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권심은 그래도 맑스주의학도로서 긍지를 가지고 여기서 무엇을 해볼것 같이 말하고있지만 그 말이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권심이같이 서재속에 박여앉아서 론문이나 써서 발표하는것으로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면 길림이 아니라 길림보다 더 혼잡한곳에 박여앉아서인들 그런 일을 못해내겠는가.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이라는것을 어떻게 그처럼 대중을 떠나서 대중의 호흡과는 관계가 없이 책이나 읽고 론문이나 몇편씩 써내는것으로 할수 있단말인가. 채경은 권심이 공산주의운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째 고리타분한 존재같은 생각만 들었다. 이런 채경이에게 오학천이 학교를 그만두고 어데로 떠난다는 소문은 더욱 큰 충격으로 되였다. 오학천은 민족주의편에 서있는 청년이기는 하지만 머리는 영민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기때문에 길림을 떠나겠다고 한다. 채경은 오학천과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학천은 강연회가 있은 뒤로는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만날수 없었다. 채경은 오늘도 어두운 그늘이 비낀 얼굴로 학교에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녀자중학에 다니는 누이동생 경주가 벌써 돌아와서 저녁을 짓고있었다. 바람기가 없는 날이면 불이 들지 않아서 누이동생은 늘 고생을 했다. 그래서 벌써 여러차례 오누이가 달려들어 구들을 뜯어고치기도 했으나 그식이 장식이였다. 연기가 가득찬 부엌에서 경주가 버치를 들어옮기는것이 보인다. 《원 구들이 어떻게 생겨먹어서 장 이 모양이냐?》 《오빠 왔어요? 사이문을 꼭 닫고 앉아계세요.》 그래도 누이동생은 오빠더러 연기가 차있는 정지방에 내려오지 말라고 갸륵한 심정을 보인다. 《내가 좀 도와주마.》 《글쎄 그만두구 어서 올라가요.》 경주는 부엌으로 내려서려는 오빠를 떠밀었다. 《네가 혼자 울게 있니? 나두 같이 울자꾸나.》 《호호호… 오빠두 참… 우는걸 나누어서 울 필요야 있어요. 혼자 울면 되지. 어서 올라가요.》 경주는 정말 행주치마로 눈물을 꾹꾹 찍어내며 말했다. 얼른 쳐다보니 눈물씨름을 해서 눈시울이 온통 벌거우리해졌다. 채경은 부득이 방으로 되밀려 올라왔다. 추워서 문을 다 열어놓지는 못하고 부엌문만 약간 벙글써 열어놓았으니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채경은 정지방에서 서성거리다가 웃방으로 올라왔다. 무언지 모르게 가슴을 도끼로 찍는것 같은 아픈 생각이 들었다. (너야말로 얼마나 불쌍한 아이냐. 너에게 이 고생을 안시키려 해도 어쩔수가 없구나. 이 오래빌 지청구라도 하려무나. 너는 왜 그렇게 량순하기만 하냐.) 채경은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났다. 아버지, 어머니중에서 어느 한분이라도 살아계셨으면 경주가 이렇게 고생은 안할것 같았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만주 어느 농촌에 와서 소작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채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길림으로 옮겨앉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또 길림생활을 한해도 못해보고 바로 이 비둘기장같은 집에서 아들딸의 손목을 잡고 운명했다. 이렇게 되니 오누이가 정말 비둘기같이 남아서 세파에 부대낄수밖에 없게 되였다. 그래도 오누이는 무섭게 이악스러운 탓에 이 집을 유지해가면서 공부까지 한다. 채경은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하고 경주는 그물을 떠서 송화강선창에 내다팔았다. 어떤 일요일에는 경주가 정미소에 나가서 쌀을 고르기도 하고 채경이 선창에 나가서 짐을 지기도 했다. 오누이는 밤을 꼬박 새워가며 그물을 뜨는 때도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오빠는 법정학교까지 다니고 누이동생은 녀자중학에 다닌다. 그들의 생활이란 그야말로 높은 벼랑틈새에 뿌리를 박고 수분을 빨아올리는 앙바라진 소나무의 그 모지른 힘과도 같았다. 그 어떤 세찬 바람과 찬서리도 이런 생활력은 쓸어눕히지 못할것이다. 경주는 밥을 다 잦혀놓았다. 부엌에서 연기도 다 빠져나갔다. 공기가 말쑥해지고 밥가마뚜껑새로 정갈한 흰김이 가늘게 솟아오른다. 그는 재티가 앉은 그릇들과 부뚜막을 한참 가시고 닦고 했다. 그리고는 래일의 아침거리를 준비하려고 물에 추긴 수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절구에 넣고 능그었다. 경주는 학생티라고는 꼬물만치도 없다. 험한 로동에 부대낀 손은 사내들 손같이 컸다. 그 큰손으로 절구공이를 거머쥐고 쿵쿵 찧는다. 한참씩 찧다가는 공이질을 멈추고 박죽으로 수수를 우겨넣었다. 앞치마자락을 들어 이마를 닦기도 했다. 지친 일에서 오는 핼쑥한 빛이 숨겨지지 않았다. 사위가 어두워졌을 때에야 오누이는 밥상에 마주앉았다. 채경의 얼굴은 여전히 생각이 깊은 얼굴이였다. 경주는 오빠의 낯빛이 전같지 않아 주의깊게 쳐다보군했다. 둘이 다 무거운 기분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나서야 채경이 입을 열었다. 《경주야, 너는 내가 어데로 떠난다면 여기서 혼자 살수 있을것 같으냐?》 《그건 별안간 무슨 말씀이예요?》 《별안간이 아니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생각을 했다.》 《글쎄 제가 사는건 문제가 아니지만 오빠가 어데로 떠나요? 다니던 학교도 졸업하지 않구…》 《그까짓 학교를 졸업해서 소용이 있니? 인젠 필요없다는것을 알았으니 그만두어야지.》 《왜 필요가 없어요?》 《무슨 필요가 있니? 법정학교에서 배우는것이 우리들의 나갈 길과 무슨 상관이 있니? 아무 상관이 없는데 공연히 시간을 허비하면서 배울 까닭이 뭐냐?》 《그럼 학교는 안다닌다고 하더라도 꼭 길림을 떠나야 해요?》 《너도 생각해보아라. 이 길림에서 무얼 하겠니?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혁명을 하자고 하는데 길림거리에 이러고 있어서 어떻게 할테냐? 밤낮 학생들과 밀려다니며 론쟁이나 하구 세월을 보낼테냐? 그렇다고 저 김찬선생같이 파벌속에 휩쓸려들어가 피대를 세우고 돌아다닐테냐? 이 길림에선 할 일이 없을것 같다.》 《그렇지만 오빤 어째서 김찬선생같은분만 생각하세요. 권심선생같은분도 서울에서 길림으로 오지 않았어요. 그런분들과 함께 싸우면 안되나요?》 《난 권심선생처럼 될가봐 무서워 길림을 떠나야겠다. 책이나 읽고 신문에 글이나 몇편씩 쓰고… 그게 무슨 사회주의운동이냐? 전날도 권선생을 찾아가니까 위병으로 죽을 쒀자시구 나앉아서 자꾸 책만 읽더구나. 두눈이 움푹 들어가서… 그래서 활동무대에 좀 내세워보자구 강연회도 조직했댔는데 그만 실패하고말았다. 글쎄 맑스주의자라는 사람이 그 꼴을 하고 앉아있어서야 어떻게 자기의 리상을 실현해내겠니? 언제 사회주의혁명을 해보겠느냐말이다. 난 그렇게 살고싶지는 않다.》 경주는 말을 못했다. 놀라운 눈으로 오빠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권심을 존경하여 바로 그런 사람이 진정한 사회주의자라고 믿어오던 경주는 어쩐지 가슴이 무너지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빠의 말을 들어보니 역시 그 말이 옳은 말 같기도 했다. 《그래 오빠는 어데로 떠나자고 하세요?》 《어디로든지 가겠다. 혁명을 못할바에는 솔직하게 나앉아서 밥벌이라도 하는것이 옳을것 같다. 난 그래도 혁명을 하겠다고 너까지 이 고생을 시켰지만 그게 무슨 보람이 있느냐? 그렇다고 여기서 아는 사람들 얼굴을 아침저녁으로 대하면서 궁한 주제도 보이고싶지 않다. 넌 이왕 다니던 학교이니 여기서 그냥 학교를 마쳐라. 내 어디 딴곳에 가서 취직자리를 하나 얻어보겠다. 오학천은 상해요 어디요 하면서 딴데 가서 무슨 운동을 해볼 작정인 모양인데 내보기엔 다 부질없는짓인것 같다. 판이 글러먹었어. 난 차라리 여길 떠나서 남만쪽으로라도 가볼가 한다. 류하현 고산자에 가서 교편을 잡고있는 차광수한테 알아보고 거기 가서 교원노릇을 하던지 서사노릇을 하던지 하면서 사람들을 계몽이나 시켜보겠다. 차광수 그 친구도 서울에서 만주로 들어와 1년동안 헤매돌다가 거기 가서 자리를 붙인것 같다. 나도 그 사람을 따라가야겠다. 먼 후날의 혁명을 위해서 나는 이런 식으로 한무지의 거름이 될 각오이다.》 경주는 말이 없었다. 그저 잠자코 그릇들을 부시였다. 언제나 오빠의 말을 존중해오는 그였다. 더구나 이 문제는 자기의 소견으로써는 함부로 다칠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이것은 혁명에 관한 문제이고 오빠의 생애, 아니 자기자신의 생애에까지 그 어떤 갈림길이 그어질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경주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곳에서의 혁명운동이란 앞길이 묘연하였다. 모이면 서로 피대를 돋구고 싸우지만 무엇 하나 이루어놓는것은 없었다. 이런 틈바구니에 끼여들어 부대끼고 돌아가는것이 아무런 뜻도 없다는것은 그자신도 가끔 생각해보는 문제였다. 그럴바에는 먼 후날의 혁명을 위하여 거름이 되겠다는 오빠의 생각이 옳은것이 아닐가? 그것은 오빠의 눈물이 어려있는 슬픈 생각인것 같긴 했으나 또 한편 장한 생각이기도 했다. 경주는 오빠의 눈물겨운 생각에 대한 동정으로 하여 가슴이 저리였다. 이름 모를 슬픔이 그의 가슴에 은근히 자리를 폈다. 어머니 생각, 아버지의 생각, 오빠마저 잃는다는 쓰라린 생각, 이렇게 되지 않고는 혁명을 할수 없을가 하는 생각… 온갖 생각들이 서로 붙안고 뒤설레이며 좁은 가슴에 눈물을 채워주었다. 이튿날 채경은 학교로 나가지 않았다. 경주만이 경황없이 학교로 나왔다. 그러나 그도 하루종일 우울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교단에서 강의하는 선생의 말소리도 귀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문뜩문뜩 떠오르는것은 오빠는 자기더러 학교를 그냥 다녀야 한다고 했지만 십상은 이 학교를 못다니게 되리라는 생각이였다. 오빠가 떠나서 홀로 고생을 하겠는데 자기가 이 길림바닥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야 학교를 그만두고 나앉아 자기도 벌이를 하는게 옳을것 같기도 했다. 경주는 정든 학우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은근히 한숨을 지었다. 《얘, 경주야, 너 어디가 아파서 그러니? 얼굴빛이 좋지 않구나.》 한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학생이 주의가 가서 이렇게 물었다. 《아프긴 어디가 아프겠니? 그저 그렇지.》 《그래도 얼굴빛이 나뻐.》 《본시 그렇게 생겨서 그렇지뭐.》 경주는 낯을 붉히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그는 여전히 떠나갈 오빠 생각을 하며 걸었다. 눈우에 석양이 비쳐내리고 마차들이 채찍소리를 울리며 거리를 부산스럽게 달리였다. 잎이 진 가로수들이 바람에 떨었다. 인제 오빠가 떠나가면 자기는 저 가로수들처럼 거리에 호젓이 서서 영원히 오빠를 기다리는 신세나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
어느날 저녁, 송화강가 언덕받이에 있는 권태일이네 집으로는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토방에 누워있는 강아지는 크게 짖지도 않고 사람이 올 때마다 고롱고롱하다간 도로 웅크리고 누웠다. 웃방에는 벌써 여러명의 학생들이 모여왔다. 모두들 학생모를 벗은 얼굴들이 불깃불깃했다. 권태일의 집에 처음 오는 학생도 있었다. 한 학생은 책상앞에 붙어있는 맑스의 사진을 쳐다보고는 빙긋이 웃었다. 웃을만한 래력이 있는것이였다. 권태일은 언제인가 책짬에 맑스의 사진을 끼워가지고 다니다가 학생들한테 들킨 일이 있었다. 그때 권태일은 그것을 어떤 물리학자의 사진이라고 우겨댔다. 어떻게 목대가 세게 우겨댔던지 어떤 학생은 그런가고 속기도 했다. 그 사진이 벽에 붙어있는것이였다. 《라마르떼느의 찬란한 불꽃이 까베냐크의 소이탄으로 변했다는것은 무슨 소리요?》 한 학생이 《6월혁명》을 읽다가 검은 눈섭을 쭝깃하며 물었다. 《빠리폭동의 경과를 말하는것이지. 시인인 라마르떼느가 집권할 때까지는 온건한 공화주의로 나가던것이 장군 까베냐크의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야수적인 폭압으로 넘어갔거던. 말하자면 계급투쟁의 무자비성을 말하는 소리야.》 다른 한 학생이 대꾸했다. 박두학이도 무슨 책인가를 열심히 읽고있다. 그의 곁에 앉아있는 권태일은 빙긋빙긋 웃으며 박두학의 록록치 않게 생긴 관자노리며 박죽같은 큰 귀를 바라보았다. 익살꾸러기인 그는 박두학이와 무슨 롱을 좀 해보고싶었으나 은근히 참았다. 제일 틀지게 앉아있는것이 최봉이였다. 그는 몸집이 크고 나이도 먹었다. 오늘밤 여기 모인 십여명의 학생들은 최봉, 박두학, 권태일이들과 손을 잡은 학생들인데 김성주동지께서 모이라고 해서 모여왔다. 최봉은 그새 자기의 희망대로 직업학교에 들어갔는데 지금 직업학교 학생도 한명 데리고 와앉아있다. 그도 최봉이같이 순박하고 몸집이 다부졌다. 정지방에서는 김성주동지께서 권성근이와 이야기를 나누고계시였다. 권성근은 턱수염이 담숭담숭 난 사람인데 자기가 철도기관구에 다니다가 다리를 상해서 해고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이가 한 십년만 젊었어도 기관구장놈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것이라고 했다. 《어이구, 못하는 소리가 없수. 그놈을 그대로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놈을 건드리군 뒤일을 처리해내겠소?》 부엌에서 그릇을 가시던 정씨가 남편의 말끝에 참견을 들었다. 그는 남편의 생김새와는 아주 대조적이였다. 남편은 꼭 아들 권태일이같이 키도 작고 눈알도 노란 사람인데 어머니는 키가 크고 두눈이 검실검실했다. 성미도 담찬 남편과는 달리 덜렁거리며 뛰는 성미같았다. 《아주 괘씸스러운놈들이네. 내가 로동재해를 입구 식구를 먹여 살리지 못하게 됐는데 그래도 경우가 있구 법이 있는 놈들이라면 아예 일자리에서 밀어던지진 않았을걸세.》 권성근은 마누라의 참견은 못들은척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 지금은 그 다리를 영 못쓰십니까?》 《무르팍을 굽히지 못하네. 종지뼈를 잘못 치료해서 아예 굽힐수 없게 되였네. 그래서 장 이렇게 버릇없이 뻗치고있질 않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전 아버님댁에 드나들면서도 아버님 다리가 그렇게까지 된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걸으실 때 보고 좀 불편하게 걸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을뿐입니다.》 《걸을 때 보구야 잘 모르지.》 김성주동지께서는 뻗친대로 놓여있는 그의 다리를 만져보시였다. 오랜 로동자의 다리라 뻗장다리가 된 지금도 무쇠기둥과 같이 실하고 육중하게 느껴졌다. 그런 다리가 이제는 제구실을 못하고 거치장스럽게 끌려다닌다고 생각하시니 여윈 다리를 보는것보다 오히려 더 가슴이 아프시였다. 《처음에는 정갱이가 아주 부러졌댔네. 와이야줄이 끊어지는바람에 허공에 달렸던 기관차바퀴가 떨어지면서 다리를 조겨놓았으니 부러질수밖에 더 있나. 그래서 병원에 실려갔더니 의사라는놈이 보고 하는 소리가 이왕 부러진바엔 아주 잘라버리자는거네. 기가 막혀서, 그래서 내가 성을 내니까 놈은 <좋아좋아>하면서 옥도정기를 한번 뻑 바르고는 판대기쪽을 덧대고 처맸네. 약은 그 옥도정기가 좋긴 하데. 시원한게 아주 막걸리맛이야.》 《어이구, 그저 막걸리타령이군요.》 정씨가 또 참견을 들었다. 그래도 령감은 마누라의 말은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판대기를 풀지 못하고 몇달동안 집에 누워있었네. 그러니까 부러진데는 감쪽같이 붙었는데 이렇게 무릎이 뻣뻣해지지 않았나? 정갱이가 붙으면 됐지 무릎까지 붙을거야 무언가.》 《그러게 내가 애초에 무어라구 합디까? 그놈들 시키는대로 병원에 누워있으라고 하지 않습디까? 그런걸 기쓰고 나와서 집에 있다가 그 모양이 됐으니 인제 누구를 원망하겠소. 세상에 성미도 야단스럽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라구. 그놈들과 이어 손을 끊었게말이지 병원에 누워있었다면 치료비를 얼마나 물었을테야. 의사란 도적놈중에서도 상도적놈인데.》 권성근은 이번에는 마누라의 말에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부처간의 싱갱이질을 웃음속에 지켜보시던 김성주동지께서 슬그머니 말머리를 다른데로 잡아돌리시였다. 《어느 병원에 가서 그랬습니까?》 《철도병원에서 그랬지. 그저 이래저래 조선사람은 못살게 되는 판이네. 이렇게 하자고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하자고 해도 안되고 어떻게 살길이 없네. 하루라도 이놈의 가난을 면하고 살아봤으면 좋겠네.》 김성주동지께서는 권성근의 가슴에 연기처럼 끄슬리는 울분을 그대로 느끼시였다. 뻗장다리가 된 로동자의 다리- 오직 하나 로동력이라는 상품밖에는 팔것이 없는 로동자의 다리가 아닌가! 절렁거리는 계급사회의 무거운 철쇄를 끌면서도 억세게 대지를 뻗디디고 서야 할 그 다리가 부러지고말았으니 장차 이 거치른 세파를 어떻게 헤치고 나갈것인가? 《너무 상심을 마십시오. 나라를 깡그리 빼앗긴 민족인데 기가 막힌 말을 다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저의 집에도 할아버님이 계시는데 일생동안 남의 땅을 부치면서 손이 터갈리도록 일을 하십니다. 그 고생스러운 정상은 일일이 말할수가 없습니다.》 《음, 조부님께서 계시는군. 하긴 김형직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긴 했지만 아직 젊은 나이시니까 조부님께서 계실테지.》 《조부님이 계시면 할머님께서도 생존해계시겠군?》 정씨가 가마전에 행주를 치며 물었다. 《네, 할머님도 계십니다.》 《쯧쯧, 그러니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땅들을 쳤을가! 그 큰어른을 잃고…》 《평양근방의 그 척박한 땅에서 소작을 부쳐가지구 생도를 하신다면 고생이야 말할것 없을테지.》 정지방에서 한창 이야기가 벌어지고있는데 부엌문이 열리며 웬 신문지꾸레미가 불쑥 들어왔다. 《이게 무언가?》 《아저씨가 고등어를 좋아하시기에 침한 고등어를 한손 가지고 왔습니다.》 고등어꾸레미를 들이민 사람은 기관구에 다니는 최기준이라는 청년이였다. 기준은 얼굴도 들이밀지 않고 이런 소리를 하더니 권태일의 어머니더러 도끼를 내보내라고 했다. 《도끼는 해서 뭘하나?》 《글쎄 이리 주십시오.》 정씨는 부엌구석에 있는 도끼를 내밀었다. 《온, 령감이 일자리에서 밀려나더니 인제는 늘 저 사람들 신세를 지는군.》 정씨는 신문지꾸레미를 풀며 이런 소리를 했다. 권성근은 말없이 큰숨을 한번 내쉬였다. 밖에서는 쩡쩡 도끼질소리가 났다. 정씨가 달려나가며 추운 밤에 뭘 패느냐고 말리였다. 《그건 령감이 지난 가을 송화강에서 건져온 나무통이라네. 마른 담에 패겠다구 놔둔걸 왜 패나?》 《패놓으면 더 쉬 마를게 아닙니까?》 《어이구, 참 자네들같은 사람이 어데 있겠나?》 정씨는 말리다 못해 도로 부엌으로 들어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역시 로동계급답게 씨원씨원한 청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도 이 집에 출입을 하시면서 기준을 한번 만나보신 일이 있었다. 권태일이가 기관구에 다니는 청년이라고 하기에 이야기를 해보니 여간 서글서글하지 않고 무게가 있지 않았다. 기준은 자기 아버지가 한다 하는 돌쟁이로서 축항공사라면 안돌아다닌데가 없었는데 마지막에는 해소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어느 철도공장에 다니다가 파업투쟁에 휩쓸려 붙잡혀들어갔던 이야기도 하고 만주에 들어온 뒤 어머니가 팥죽장사를 하며 어렵게 살다가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맑스주의책을 더러 보았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그저 시물시물 웃을뿐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은근히 좋은 동무를 또 한명 만났다고 생각하시였다. 그래서 권태일에게 오늘밤 모임에 기준이도 참가시키라고 하시였다. 한참동안 쩡쩡 하는 도끼질소리가 나더니 이마에 땀이 번지르르한 기준이가 부엌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김성주동지께서 앉아계시는걸 보더니 덧이가 난 큰 입을 벌씬 열며 인사를 했다. 《저녁은 해먹구 왔나?》 권성근이 기준에게 묻는 말이였다. 《해먹지 않구요.》 《합숙에 들어가는게 낫지 않겠나? 딴 기관조수들은 다 합숙에 들어갔는데 궁상스럽게 자취를 해먹겠나?》 《합숙에 들어가면 제대로 먹나요? 힘들어두 자취를 해먹는편이 낫지요? 요새 금준이도 합숙에서 나오겠다고 한답니다.》 《그 말은 옳은 말이네. 그 날도적놈같은 <곰보>가 로동자를 갉아먹는덴 이골이 났는데 그판에 들어가서 돈어치를 얻어먹겠나?》 기준이는 권성근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성주동지를 따라 웃방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권성근은 사이문을 꼭 밀어닫고 주머니에 담배갑을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에없이 엄엄한 표정으로 안해에게 일러두었다. 《웃방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리는것 같소. 가끔 밖에 나가서 살펴보우. 경무청순경보다 사복을 입은 일본놈의 앞잡이가 더 무섭소. 삽삽하게 구는 인간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대해야 하오.》 이런 말을 남기고나서 그는 밖으로 나갔다. 밤일을 가려는것이다. 요새는 선창에 일이 없어서 밤마다 목공창에 가서 벌이를 한다. 정씨는 령감이 그러지 않아도 오늘밤 웃방에서 무슨 중요한 모임을 한다고 아들이 귀띔하기에 바깥을 살펴보아줄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는 이어 덧저고리를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얼어붙은 얼음이 소리 안나게 조심히 걸으며 나루터쪽에서 내려오는 웃길목에 나섰다. 달도 없는 밤인데 그래도 눈빛으로 사방이 훤하게 다 보였다. 어데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목공창에서 나무켜는 전기톱소리가 들려온다. 령감이 목공창쪽으로 내려가는 얼음깔린 비탈길을 어떻게 내려갔는지 알수 없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지팽이에 실려 내려갔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찌르르해진다. 다시 마당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웃방에서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온, 어쩌면 저 심술꾸러기같은자식이 김형직선생님의 아드님과 같은 훌륭한 학생과 친해졌을가? 물도 곬을 바로 찾아야 큰 강에 든다고 했는데… 인젠 권성근의 아들도 제법 독립운동마당에 나서서 이 어미까지도 신역을 치르게 하는 모양이지.) 정씨는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는 하마트면 나루터에서 내려오는 길가의 나무가지를 보고 소리를 지를번했다. 아무래도 밖에서는 추워서 오래 서있을수가 없었다. 그는 도로 정지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베실이 담긴 채를 놓고 문구멍에 붙어앉아서 꾸리를 결으며 밖을 살펴보았다. 누구인가 사이문을 열고 정씨에게 랭수를 청하였다. 그 서슬에 문짬으로 《그건 적절한 분석이 못돼!》하는 아들의 열기띤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웃방에서는 아까부터 어느 신문에 난 소설을 두고 론쟁이 벌어진것이다. 소설은 어느 한 농촌에서 소작살이를 하던 농민이 땅을 떼우고 떠나는 이야기를 쓴것인데 주인공의 운명에 대한 작자의 절절한 련민의 정을 충분히 느낄수 있는 작품이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킨 점은 리향민의 운명에 눈물만 뿌려주고 항거의 불꽃은 왜 심어주지 못했느냐 하는것이였다. 어떤 학생은 작자가 굴종사상을 설교한다고도 했고 또 어떤 학생은 불철저하나마 계급의식은 가지고 썼는데 그게 잘못하면 박애사상과 같이 될수도 있다고 했다. 권태일이같은 학생은 박애사상이니 굴종사상이니 하는건 다 소설을 잘못보는 소리라고 힐난했다. 작품의 밑바닥에 숨은 절절한 호소성이 바로 계급투쟁의 불꽃을 심어주는것인데 이게 이 작품의 진정한 생명이라는것이였다. 격렬하게 부딪치던 말마디들이 가라앉고 방안은 점차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흥분을 가시고 기대와 열광이 이글거리는 눈길로 김성주동지를 지켜보았다. 정적이 몇초동안 방안을 휩쓸었지만 공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이 밤이 범연치 않은 밤이라는것을 그들은 다같이 알고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흐뭇한 심정으로 장내를 둘러보시였다. 《ㅌ.ㄷ》의 첫 고고성이 울리던 화전의 그 잊을수 없는 밤이 문득 그이의 추억을 맹렬하게 흔들었다. 그날로부터 《ㅌ.ㄷ》의 피줄은 산지사방으로 정녕 얼마나 넓게 뻗쳐나갔는가. 오늘은 그 억센 혈맥이 여기 길림에도 이어지련다.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거대하고도 신성한 유기체에 영양소를 공급해줄 또하나의 새로운 혈관이 바야흐로 뻗게 될것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치미는 흥분을 눅잦히며 미더운 시선으로 등불밑의 얼굴들을 둘러보시였다. 그동안 최봉, 박두학, 김리갑이들에 의해 선발되고 실천을 통해 이미 검증된 길림의 끌끌한 청년들이다. 세련의 부족으로 아직은 떫고 텁텁하나 순결하고 패기있는 열혈의 젊은이들이다. 그이께서는 석달전 화전의 김시우네 서재에서 《ㅌ.ㄷ》의 탄생을 기뻐하여 함께 얼싸안고 볼을 비비며 눈물을 흘리던 동무들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면서 조용히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이자리에 모인 동무들은 서로가 다 구면입니다. 그러니 구태여 통성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동무들과 낯을 익히고 오늘밤 또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게 되여 매우 기쁩니다. 나는 길림에 온지 며칠밖에 되지 않습니다. 듣던바 그대로 길림은 큰 도시입니다. 여기 와보니 화전은 시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년들은 길림 인상담처럼 들리는 김성주동지의 말씀에 심취되여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앉아있었다. 그이께서는 음성을 조금 높여 말씀을 이으시였다. 《지금 길림시는 여러 운동단체들과 사상조류들이 붐비면서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고있습니다. 제각기 헤매고있을뿐입니다. 옳바른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한걸음, 두걸음 실속있게 전진하지 못하고 론쟁과 아귀다툼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습니다. 그동안 강연회와 웅변대회에도 몇번 참가해보았는데 무슨 지침이 될만한 주장을 들어볼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사분오렬되여 갈팡질팡하고있는것이 오늘의 길림현실이며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의 현실입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밤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청년들은 몸과 마음을 옥죄이는 시대의 중압을 저저마다 느끼며 그 중압에서 헤여나오기라도 하려는듯 숨을 크게 몰아쉬였다. 우리에게 길을 달라, 이 시대의 혼돈된 현실속을 곧추 걸어나갈 방향타를 달라, 그러면 우리는 혁명을 위해 일사천리로 달려나갈것이다. 그들의 눈동자는 이렇게 부르짖고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 절절한 마음속 웨침을 죄다 듣고계시였다. 청년들의 그 절박한 요청을 심장으로 느끼시며 그이께서는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씀하시였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직을 내와야 합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머리우에 손을 높이 드시였다. 만장의 시선은 일제히 그이께서 높이 드신 손에 쏠리였다. 《길림에 <려길학우회>라는 청년학생들의 조직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건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밑에 있는 친목단체이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조직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자리에 모인 동무들로써 길림에 첫 혁명조직을 내오자는것입니다. 그 명칭은 타도제국주의동맹, 략칭하면 <ㅌ.ㄷ>입니다. 이 동맹은 지난해 10월 화전에서 결성되였습니다. 발족후 남만 각지에 줄을 뻗쳐 오늘은 여기 길림에까지 뿌리를 내리게 되였습니다. <ㅌ.ㄷ>의 강령은 당면하게는 일제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며 종국적으로는 우리 나라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고 나아가서는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하는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치를 높이 들고 갈팡질팡하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시 숨을 돌리며 도가니처럼 달아오른 장내를 둘러보시였다. 감격에 겨워 억세게 맞잡은 손과 손들, 눈물이 보석처럼 방울져 흐르는 홍안의 열에 뜬 얼굴들이 그이의 눈부리를 힘있게 끌어당기였다.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성주동무, 고맙소!》 권태일은 상체를 일으켜 맞은편에 앉아계시는 김성주동지의 손을 덥석 틀어잡았다. 손이 불돌처럼 뜨겁게 달아있었다. 최기준은 김리갑이와 박두학의 손을 하나씩 거머잡고 싱글싱글 웃고있었다. 환희의 회리바람이 폭풍처럼 온 방안을 휩쓸었다. 그 격류같은 공기를 타고 김성주동지의 음성이 다시금 청년들의 흉벽을 건반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ㅌ.ㄷ>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전위들이 광범한 청년학생들과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맑스ㅡ레닌주의 선진사상, 혁명사상을 적극 보급하고 조직을 빨리 늘여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혁명의 터전을 마련할수 있습니다. 사상적으로 각성되고 조직적으로 결속된 혁명력량이 없이는 조국해방의 리념도,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리상도 실현해갈수 없습니다. 아직은 우리 성원들이 몇몇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열을, 열이 백을, 백이 천을 품어안는식으로 힘을 부단히 확대해나간다면 <ㅌ.ㄷ>의 피줄이 조만간에 온 길림과 길림주변의 농촌들로 급격히 뻗어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이께서는 청년학생들이 로동계급의 선진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독서회와 연구소조들을 조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러한 연구소조와 독서회들은 절대로 표면에 드러나서는 안된다. 우리 《ㅌ.ㄷ》의 성원들이 핵심이 되여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믿을수 있는 동무들을 하나씩하나씩 망라시키되 밑으로 스며들어가 손을 잡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식이다. 모두들 그이의 말씀에 넋을 빼앗기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기준이의 감동은 류달리 컸다. 그는 자기가 여러해전에 겪은 철도공장의 파업을 회상했다. 그때 나이 열여섯살밖에 안되였던 기준은 단야직장에서 일하며 로동공제회 간부들한테 비밀쪽지 나르는 일을 했다. 로동공제회 간부들은 하수도물이 빠져나가지 않아서 고무장화를 신고 다니는 궂은 거리 뒤골목 어느 집에서 어유등불을 켜놓고 앉아 로동자들에게 보내는 선전문을 쓰고 지시문을 쓰고 하였다. 관자노리가 솟고 두뺨이 훌쭉한 안경쟁이간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안경쟁이한테서 《로동조합이야기》라는 소책자도 얻어다 읽었다. 그들은 로동자들을 계몽시켜가지고 파업으로 들이몰았다. 수백명 로동자들이 일을 제끼고 들끓던 큰 공장을 공동묘지처럼 쥐죽은듯이 만들어놓았다. 그때는 신도 났었다. 로동자들의 힘이 크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그런데 이어 닥지닥지 붙어앉아있는 오막살이 거적문앞에 일본경찰들이 들이닥쳤다. 하루사이에 수십명 로동자들이 잡혀갔다. 그러자 남은 수백명 로동자들은 공장으로 달려가서 공장사무실을 들이부셨다. 바로 이날 기준은 공장 감독놈이 내리치는 몽둥이에 팔이 부러지면서 일본경찰의 손에 잡혔다. 류치장에서 보름동안 문초를 받다가 나오니 로동자들은 도로 공장에 다 끌려들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되였는지 로동공제회 간부라는 사람들은 다 없어져버렸다. 물이 절벅거리는 거리에 찾아가 물어보니 로동자들이 잡혀들어간 날 밤 모두 종적을 감추었다는것이였다. 기준은 이렇게 파업을 겪었으니 파업이란 아예 못할것으로 알았다. 그저 로동자들만 골탕먹는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길림기관구에 와서 오늘까지 일을 해보니 견딜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로동자란 의례 착취를 당하는것이려니 하는, 자기자신을 인간이하로 낮추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모르겠으나 조금이라도 자기자신을 사람으로 보고 사람이 왜 같은 사람한테서 이렇게 구박과 착취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면 매일매시각 분이 터져올라 견딜수 없었다. 그래서 권태일의 아버지가 해고를 당했을 때에도 들고일어나볼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매번 그런 분노가 터질 때면 류치장에서 놓여나와 부러진 팔을 엇메고 바다가 모래불에 엎어져 울던 생각이 덮치군했다. 그렇게 실패가 올것 같고 그렇게 로동자들만 피해를 입을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밤 이야기를 들으니 온몸에서 우직우직 힘이 생기는것 같았다. 바로 지금 김성주동지께서 말씀하시는것처럼 맑스ㅡ레닌주의로 로동자들의 눈만 띄운다면 그 단합된 힘으로 못해낼 일이 없을것 같았다. 지금 정지방에서는 정씨가 꾸리를 결으면서 끄떡끄덕 졸고있었다. 그는 또 밖에 나가보려고 했으나 고달픈 생활이 가져다주는 피로를 이겨낼수가 없었다. 졸음이 눈섭끝에서 덩어리로 떨어져내린다. 졸음만 오는게 아니라 꿈까지 어른거린다. 송화강에서 잡은 생선을 한버치 이고 어느 농촌길을 자꾸 걸어갔다.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워 짚신은 아예 벗어들었다. 무거운 버치에 눌려 목이 자꾸 휘청거린다. 그러나 그는 오늘로 이 고기를 다 팔아야 집으로 돌아갈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미끄러운 길에 발톱을 꼭꼭 박으며 걷는다. 《생선 사요. 펄펄 뛰는 생선! 수수도 좋고 좁쌀도 좋고 콩도 좋아요.》 걸걸한 목소리로 이렇게 웨치며 걷고 또 걸었다. 누구 하나 생선 사자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진 길에 다리를 펴고 앉아 울고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인기척소리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손은 여전히 꾸리를 겯고있다. 어머니는 머리칼밑으로 땀이 와짝 솟아올라서 새문을 뚝뚝 두드렸다. 이게 무슨 실수인가? 늙은것이 밖을 살펴보아준다고 하면서 졸다가 순경놈 오는줄도 몰랐으니… 그는 밖에 꼭 순경놈이 달려들었다고만 생각했다. 웃방에서도 말소리를 뚝 그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한참 가슴이 풀무처럼 활랑거려 숨을 톺고있는데 부엌문으로 령감이 불쑥 들어섰다. 《에이구 참, 간이 떨어질번했소. 왜 마당으로 들어서는게 기침이라도 깇구 들어서지 못하우?》 령감은 대꾸를 안했다. 《어째서 벌써 돌아왔소?》 《일감이 없다고 들어가라우. 망할놈의 새끼들…》 령감은 울기가 올라서 방한모를 벗어 구석쪽에 던진다. 권태일이 새문을 열고 내려다보았다. 《얘, 어서 회의를 해라. 난 순경놈이나 일본놈앞잡이가 오는가 해서 문을 두드렸댔다.》 《아버지가 어데 갔다왔어요?》 《응, 목공창에 일나갔다가 일이 없대서 도루 들어왔단다.》 그제야 권태일은 얼른 문을 도로 닫았다. 방가운데 퍼더버리고 앉은 권성근은 후유 한숨을 쉬였다. 겨울동안의 일자리를 잡았는가 했는데 또 떼웠다. 아무리 생각해야 인젠 얼음이 녹고 송화강 선창으로 배가 드나들기전에는 어데 가서 일자리를 얻어낼것 같지 못했다. 그는 두어깨를 낮추고 앉아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물었다. 웃방에서는 박두학이 길림에서 맑스ㅡ레닌주의를 전파하려면 물론 연구소조를 조직하는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종파들을 경계하면서 민족주의영향밑에 있는 학우회를 해산시켜 없애버리는것이라고 제기해나섰다. 오학천은 어데로 떠난다니까 그까짓것은 문제가 안되지만 학우회역원이란것이 전부 민족주의계렬의 청년들인데 그것들을 그냥 두고는 길림의 학생세력을 자기들편으로 이끌어올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러니까 아예 학우회를 깨버리고 그 역원들을 타도해버리자는 주장이였다. 이 주장에는 권태일이도 가랑잎에 불달리듯 달려일어났다. 《그게 우물고누 첫수입니다. 이 길림에서는 그 집단이 암입니다. 그것만 없다면 모든 학생들이 다 맑스주의로 기울어질것입니다.》 《기울어지다뿐입니까. 지금 민족주의자들이 학우회를 발판으로 하고 학생들세력을 붙잡고있는데 저 조직이 깨져나가도록 우리가 공작해야 합니다. 타도해 없애야 합니다.》 권태일이와 박두학이 불고치고하였다. 그바람에 다른 학생들도 여럿이 그 의견에 공감이 가서 옳은 말이라고들 했다. 속이 깊은 최봉이나 기준이는 김성주동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우리는 일을 그렇게 급하게 서둘러선 안됩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두드려부시는 방법으로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들이 맑스ㅡ레닌주의를 철저히 배우면서 딴길로 들어선 사람은 이끌어 개준시키고 얼떨떨한 사람은 각성시키고 모르는 사람은 가르치고 해서 모두다 우리 품안에 휘여안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 우리의 힘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학우회도 깨먹을것이 아니라 그속에 스며들어가 그 조직도 그 사람도 다 우리의것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옳습니다. 저두 그 방법을 지지합니다. 그게 바로 월파나 김찬이들의 타도식방법과는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주동지의 말씀끝에 최봉이 한마디 했다. 그이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지금 학우회란것이 겉보기에는 민족주의세력이 틀어쥐고 무얼 하는것 같이 보이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벌써 머리가 똑똑한 청년들은 민족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다 깊은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오학천의 환멸이란것이 어데서 오는것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왜 맑스ㅡ레닌주의로 교양해내지 못한단말입니까?》 《얼마든지 교양해낼수 있습니다. 저두 바로 독립군편에 서서 애를 먹이다가 맑스주의로 돌아선 사람입니다.》 최봉은 눈을 크게 하고 이사람저사람 쏘아보았다. 약간 누르끼레한 큰 눈망울에서 불이 황황 타는것 같았다. 그제야 모두들 잠잠해졌다. 박두학이와 권태일은 큰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의 생각같아서는 당장 학우회라는 조직에다 벼락을 치고싶은 심정이였다. 그러나 역시 김성주동지의 말씀을 듣고보니 그런 방법이라야 할것 같고 더 소득이 있을것 같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또 한참 혁명을 어떤 방향에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해나갈것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였다. 과연 길림시내에 있는 《조선공산당만주총국》 집행위원들인 김찬이나 월파 조청산과 같은 사람들이 연탁을 치며 부르짖던 내용과는 다른 말씀이였다. 그럴뿐만아니라 권심이 주장하는 내용과도 달랐다. 누구나 다 조용히 머리속에 새기며 들었다. 그들은 인제 자기들앞에 그 무슨 새로운 길이 열리는것 같아 흥분에 휩싸였다. 무엇인가 자부심이 생기고 몸에 힘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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