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1 회 )

 

제  1  장

 

 

1

 

어둠에 묻혔던 길림시가는 아침해가 뜨자 말쑥해졌다. 은장같은 눈우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갔다.

김성주동지를 맞이한 오동진의 집에서는 안팎이 분주했다. 사랑방에는 여러명의 독립군 거두들이 모여들었다.

리갑무로인도 오고 며칠전 길림에 도착한 《참의부》의 거두 심룡준로인도 왔다. 《정의부》간부들인 고원암, 김사헌, 리웅, 장철하들, 북만지역에서 온 《신민부》의 젊은 간부들도 여러명 찾아왔다.

김성주동지와 마주앉은 그들은 모두 김형직선생님을 뵌듯 반가와했다. 심룡준로인과 리갑무로인은 자주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었다.

오동진은 밖으로 들락날락하며 안절부절 못해했다. 그는 퇴마루우에 나서서 물을 길어들이는 딸에게 뜰을 쓸라느니, 화분에 물을 주라느니 하고 소리쳤다.

《자네를 보니 자네 엄친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네. 하지만 자네가 이렇게 장성했으니 김선생께서도 유한을 풀걸세.》

리갑무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눈굽을 씻고는 다시 김성주동지의 영채가 비낀 눈을 건너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집에서들은 어떻게 사나? 어머님께서 몹시 고생을 하시겠지?》

《네, 고생을 하십니다.》

《음, 막막한지고.》

리갑무로인은 두어깨를 한번 들어올렸다내리며 후유 한숨을 지었다.

광범한 민족실력의 축적이라는 안창호의 리념에 받들려 한 반도에 《신민회》가 태여날 때 그 산파로 동분서주하던 어제날의 미청년 리갑무, 리왕궁에 대한 돌팔매질로 을사오적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의병의 총성으로 《한일합방》의 국치에 맞서던 이 충의지사의 머리에도 이제는 어느덧 백설이 하얗게 덮이였다.

《철주는 탈없이 자라나?》

이번에는 심룡준로인이 물었다.

《네, 잘 자랍니다.》

《음, 잘 자라야지. 형제가 굳건히 성장한다면 아버님의 뜻을 이어나가지 못하겠나.》

심룡준로인은 그이의 기상이 마음에 흐뭇해서 수염을 내리쓸었다.

밖으로 들락날락하던 오동진이 방안으로 들어와 김성주동지와 마주앉았다.

리갑무며 심룡준이며, 장철하들은 오동진에게 자리를 내주고 저편 구석에 앉아있는 김사헌, 리웅이들의 곁으로 옮겨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두손을 포개여 무릎우에 얹고 몸가짐을 바로 잡으시였다. 오사령의 적동색얼굴을 쳐다보며 정중히 말씀하셨다.

《선생님, 제 화전서 올 때 무송에 며칠 머물렀습니다. 저를 바랠 때 우리 어머님은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리라고 몇번이고 당부하셨습니다.》

《감사라니? 그건 무슨 소린가?》

《우리 집에 림소영누님을 보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누님이 그동안 우리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시고있는것 같습니다.》

《원,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생전에 자네 아버님이 내게 베푼 정의에 비해보면 그거야 새털같은 일이지.》

오동진은 대범하게 웃어넘기면서 화제를 인차 다른데로 끌고갔다.

《그런데 내 풍편에 소식을 듣자니 자네가 화성의숙을 다니면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그는 상아물부리에 담배를 꽂아물며 김성주동지를 쳐다보았다. 불그스레한 눈언저리와 초점을 모으려고 애쓰는 그의 눈동자에 이상야릇한 긴장이 떠돌고있었다.

《뭐 사회운동이라고 할만한것이 못됩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겸손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아니, 그래도 <ㅌ.ㄷ>라는 조직을 무어가지고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다던데…》

《네, 그런 조직을 무은것은 사실입니다.》

《일설에는 그 조직이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무슨 산하단체일것이라는 추측도 있던데 그 추측이 옳은가?》

《선생님, 그건 헛소문입니다. <ㅌ.ㄷ>는 그 누구의 산하도 아니고 지부도 아닌 독자적인 조직입니다. 자체의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있는 새형태의 조직입니다.》

《그럼 저 월파 조청산이나 김찬이같은 장발족들과는 인연이 없다는 말이지?》

《네, 그 사람들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조직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ㅌ.ㄷ》를 조직하게 된 취지와 《ㅌ.ㄷ》의 리념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였다.

오동진은 그제야 눈가의 긴장을 가시고 얼굴에 화색을 띠였다. 그동안 《ㅌ.ㄷ》의 결성소식을 듣고 남모르는 정신적고충을 느껴온 사령이였다. 더더구나 그 조직에 월파나 김찬이들의 이름이 껴묻어돌아가게 되면서부터 그는 더욱 큰 번민에 시달려왔었다. 김형직선생님의 지도와 영향밑에서 오래전부터 새사조를 동경해온 오동진이였지만 월파나 김찬이와 같은 시정배들의 이름과 결합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공감할수도 용납할수도 없다고 생각하는터였다. 그는 《ㅌ.ㄷ》의 강령이 무산혁명을 지향해오셨던 김형직선생님의 사상에도 부합된다고 간주하였다.

《운동을 시작한바에는 아예 크게 판을 벌리라구.》

오동진은 한모금 가득 삼켰던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뿜어올리고나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 화성의숙은 왜 그만두었나? 의숙을 중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린 여간 락망하지 않았댔네. 자네를 의숙에 추천해보낼 때 품었던 그 기대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는것 같더란말일세.》

김성주동지께서는 오동진의 그 인상적인 눈섭의 실룩거림을 바라보며 한해반전에 있었던 그와의 잊을수 없는 대화를 회상하시였다.

그날도 오동진은 저렇게 눈섭을 실룩거리며 그이의 어깨우에 철퇴같은 주먹을 얹고 《우리는 오직 너희들만을 믿는다. 너희들 세대만이 조선을 위한 옳은 경륜을 펼칠수 있고 대사를 치를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최동오숙장앞으로 보내는 소개신을 손수 써주었었다.

자기개인의 기대는 물론 지사들의 한결같은 소망도 담아 한획한획을 경건하게 써나가던 이 인정많은 사람앞에서 의숙의 중퇴리유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마음 한구석에 갈마드는 송구스러운 감정을 애써 묻어두시며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차츰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동진은 흥분으로 상혈된 얼굴을 쳐들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속절없이 흩어져가는 연기사이로 애수와 고뇌에 찬 지사의 눈망울이 바라보이였다.

《자네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기대를 어겨서는 안되네. 우리의 기대를 어기지 않는것이 곧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받드는 길일세. 성주가 길림에 온건 정말 반가운 일이야. 여기엔 아버님 친구들이 많아. 이왕이면 이런 대처에서 활개짓을 해볼판이지. 여기서 온 조선이 다 듣는 에밀레종을 한번 만들어보라구. 단 한가지 걱정되는건 이 길림바닥에 연설쟁이들과 행세군들이 너무 많이 득시글거리는거네. 도정신을 하지 않다가는 어느 귀신한테 업혀가는지 모를 판국이네.》

김성주동지께서는 오동진의 암시속에 깃든 웃어른다운 우려를 얼른 알아차리시였다. 분명 그는 청년들을 그릇된 길로 유혹하는 김찬이나 월파와 같은 행세식 맑스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 공리공담쟁이들을 념두에 두고있는것 같았다.

《선생님, 안심하십시오. 저는 절대로 길을 헛들지 않겠습니다.》

그이께서는 정중히 대답하시였다. 짧은 대답이였으나 그 목소리며 몸가짐에는 스무살전의 청년이라고는 생각할수 없는 무게와 힘이 실려있었다.

화제는 종횡무진으로 흘러갔다. 무송소식이 이야기되다가는 화전소식이 전해지고 화전풍경이 그려지다가는 다시 길림생활의 세부들이 이것저것 언급되기도 하였다. 간도정세가 화제에 오르는가 하면 고국의 민족해방운동상황이 흥분속에 펼쳐지기도 하였다.

이야기가 리웅, 고원암 두 독립운동자의 상담으로 번져가자 김성주동지께서는 김시우가 보내는 소개신을 김사헌에게 드리시였다.

김사헌은 그 편지를 두번이나 곱씹어 읽어보고나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쪽지를 써줄테니 래일 육문중학교로 찾아가게. 가서 영어교원을 하는 김강선생을 만나라구. 그 선생의 주선이면 학교에 입학하는것은 어렵지 않을거네. 내 생각에는 육문중학교가 좋을것 같애. 사립학교지만 사상가들이 많고 또 교장도 량심적인 사람이니까.》

다른 독립운동자들도 그의 의견에 동감이였다.

오동진이네 집은 부엌과 정지방도 부산했다. 정지방에는 독립군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희생된 리봉진의 처 봉숙이 어머니도 와있었다. 그는 강반석어머님과 동서간처럼 지내는 사이라 김성주동지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었다.

봉숙이 어머니는 그이를 붙잡고 옥사한 남편 생각, 김형직선생님의 생각으로 한참동안 목이 메여 울었다. 아직도 그는 울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오동진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아드님을 보니 무송형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군요. 무송형님이야 맘성이 후해도 보통 후한가요. 댁의 살림이 그렇게 어려우면서도 늘 이웃걱정을 하시고… 난 무송에 살면서 그 형님 신세를 많이 졌는데 지난해 아주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가보지도 못했어요. 내가 무슨 사람이겠어요.》

봉숙이 어머니는 또 치마자락을 얼굴에 가져갔다.

《무송동서의 신세를 동서네만 졌겠소. 김형직선생님과 상관이 있는 집들에서야 다 그 동서의 신세를 졌지. 나도 령감이 북경에 가있을 때 한동안 내내 그 동서네 집에서 살았다오. 그 동서야 자나깨나 그저 독립운동만 생각했지 딴생각이야 있었다구. 조선이 독립되면 만경대에 나가서 같이 농사를 짓자고 하면서… 그게 소원이였지.》

오동진의 부인도 강반석어머님을 잊지 못해 두눈을 쪼프리고 앉아 옛일을 더듬으며 말했다.

두 녀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얼마후에야 사랑방에서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뜰을 거쳐 오동진의 아들 오학천이 거처하고있는 안채의 웃방으로 들어가시였다.

오학천은 사면벽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안에서 팔짱을 끼고 왔다갔다하고있었다.

그는 허리가 늘씬하고 얼굴이 흰 사람이였다.

《먼길을 와서 몹시 피곤하겠소.》

오학천은 책상앞에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지난밤에 벌써 피곤이 풀렸소. 학교에 나가지 않소?》

그이께서도 자리에 앉으며 말씀하시였다. 오학천은 법정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인제 나가겠소. 그런데 어떻게 돼서 이 길림으로 왔소? 밤새 생각을 해도 모를 일이요. 왜 화성의숙에서 나와 길림으로 왔는지…》

평범하게 던지는것 같은 그 물음에는 그 무엇인가 복잡한 생각이 숨어있는것 같기도 하였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꼭 화성의숙에서 해야 할 필요야 없지 않소. 첫인상이긴 하지만 나는 길림이 매우 마음에 드오.》

《길림이 마음에 든다구? 잘못 생각하는것 같소. 나도 화성의숙이 우리들과 같은 사람에게 적당한곳이라고는 보지 않소. 그런데 길림이란곳도 매한가지요. 우리는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해야 할 사람들인데 여기서 무엇을 배운단말이요. 암흑이요. 모든것이 몸부림을 치며 들썩 떠들어대고는 있으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소. 다 종말로 가고있단말이요.》

오학천은 눈가장자리가 파릿해서 부르짖었다. 확실히 무엇인가 고민하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얼마후 그는 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안을 빙빙 돌았다. 그는 뒤뜰쪽으로 나있는 유리창앞으로 다가가 들메나무 저편을 우울한 눈매로 내다보고있다.

《난 그래서 길림을 떠나자고 하오.》

오학천은 밖을 내다보며 혼자말같은 소리로 말했다.

《떠나다니? 나는 길림으로 오는데 길림을 떠난단말이요? 마치 계주경기에서 바통을 넘겨받아가지고 달아나는것 같구만. 허허허.》

김성주동지께서 웃으시는바람에 오학천도 낯을 붉히며 웃었다. 그이께서는 오학천도 이 시대의 청년들이 흔히 빠질수 있는 고민과 번뇌의 깊은 수렁에 빠져있다고 생각되시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오학천의 깊은 심정을 알아보려고 이것저것 잠간 물으시였다. 그러는데 화성의숙에서 헤여졌던 박두학이 문을 두드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야, 이거 얼마만이요? 학교로 나가다가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뛰여왔소.》

그는 달려드는길로 김성주동지의 손을 잡아 격동적으로 흔들었다.

《그새 건강했소?》

《여부가 있소.》

《벌써 어느 학교에 든 모양이구만?》

《난 문광중학에 들었소. 인제 들어간지 한 일주일 되오. 야 참, 반갑소.》

박두학은 책보와 모자를 방구석에 놓으며 어찌할바를 몰라 쩔쩔 맸다. 길림에 와있는 사이 말씨도 더 빨라지고 볼살도 더 부얼부얼해지고 행동거지도 더 활달해진것 같았다. 느릿느릿하고 어리벙하던 지난날의 때묻은 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춘상싶었다. 단지 눈을 꺼벅거리는 그 버릇만은 변함이 없었다.

《길림바람을 마시더니 더 멀쑥해졌구만.》

김성주동지께서는 박두학에게 손을 내여맡긴채 그의 얼굴을 정겹게 바라보시였다.

《길가는 아가씨들이 자꾸 곁눈을 팔아서 야단이요.》

박두학은 이전날의 성미그대로 롱을 하였다. 오학천이 일어나 학교로 가자 그는 자제했던 기쁨을 고스란히 터치며 다시금 김성주동지의 손을 격정적으로 흔들어댔다.

《잘 왔소! 성주! 제때에 참 잘 왔소! 얼마나 안타깝게 기다렸다구. 리갑이랑, 최봉이랑 우리 셋은 모여앉기만 하면 성주동무 이야기를 했소. 그래, 무송에선 일이 잘되였소?》

그는 오학천이 나간 아래방미닫이를 흘끔흘끔 살피며 소리를 낮추었다.

《무송사업은 뜻대로 되였소. 거기서는 새날소년동맹이라는 소년조직도 내오고 반일부녀회도 내왔소. 이를테면 <ㅌ.ㄷ>의 외곽단체들이라고 할가…》

《판을 크게 벌렸구만. 그런데 난 그새 여기 와서 아무 일도 못했소. 헤여진지 한달이나 되는데 겨우 문광중학교에 입학한것밖에 없으니. 듣던 말과 같이 길림이란 정말 간단한곳이 아니요. 우리가 결심을 품고 달려올 때 같아선 하루아침에 이 도시를 들어일굴것 같았는데 그렇게 해낼수 없더란말이요.》

《하하, 혁명이 그렇게 쉽고 단순하다면야 얼마나 좋겠소. 이 백사지에 발을 붙인것만도 장한 일이지. 그래 최봉이랑 리갑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오?》

《그 친구들도 문광중학교에 들어갈려면 쉽겠는데 셋이 다 한곳에 들어가서야 어떻게 하오. 그래서 리갑인 복흥태정미소에 림시로 발을 붙였소. 돈을 벌어서 내 학비랑 대준다고 흰소리가 여간 아니요. 최봉인 나이도 있고 해서 직업학교같은데 편입할 생각을 하고있소. 어쨌든 성주보기가 부끄럽구만.》

박두학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피줄이 풀떡거리는 관자노리를 손으로 긁적거리였다. 이전날의 그의 생활에서는 한번도 볼수 없었던 숫적고 생소한 거동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의 그런 거동앞에서 불현듯 가슴이 뭉클해지는것을 느끼시였다. 까닭을 알수 없는 이상한 충격이 쿵ㅡ 하고 그이의 흉벽을 울리였다. 롱과 익살이 없이는 단 한시도 편히 지내지 못하는 박두학이 어쩌면 한달사이에 저렇게도 진지한 청년으로 되였을가. 자기를 허심하게 드러낼줄 아는 저 겸손성과 소탈성, 솔직성은 어디에서부터 생긴것일가.

그이께서는 생각하시였다.

(그 모든것은 《ㅌ.ㄷ》가 가져다준 변화이다. 《ㅌ.ㄷ》가 탄생한 다음부터 우리들사이에는 새로운 도덕과 륜리가 생기고 생활평가의 새로운 기준이 생긴것이다. 박두학은 지금 그 기준에 비추어가며 자기생활을 보고하고있는것이다.)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그 무엇이 김성주동지의 마음속에 새털처럼 자꾸 내려쌓이였다. 그이께서는 박두학이를 와락 그러안으며 그의 얼굴에 볼을 마구 비비시였다.

《부끄럽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처음부터 당장 하늘을 무너뜨리겠소? 한걸음, 한걸음 또 한걸음! 이렇게 톺아나가느라면 차차로 곬도 트이고 활동지반도 닦아질게 아니겠소. 그래, 최근의 이곳 형편은 어떻소?》

박두학은 한참 앉아서 길림시내의 형편을 이야기했다. 길림이란 학교가 많은 도시인데 지금 광범한 학생계가 공산주의냐, 민족주의냐 하는 갈림길에서 복닥거리고있다는것, 유일한 학생조직인 《려길학우회》가 완고한 민족주의계렬청년의 손에 거머쥐여있어 그 조직에 도무지 선을 박을수 없다는것, 판이 이러니 진정으로 혁명을 해보겠다는 청년들조차도 길림을 떠나겠다고 들썽거린다는것… 모두가 기막히고 답답한 소식뿐이였다.

박두학은 그사이 학생들의 모임에도 몇번 참가해보았는데 맑스주의에 대한 공격이 쏟아질 때에는 주먹이 찡찡 우는걸 겨우 참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열을 올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길림에서 혁명을 하자면 우선 방금 나간 저 고수머리 오학천을 눌러놔야 하오. 저게 뭐요, 저 벽을 좀 보오. 온통 부르죠아철학책들이 아니요. 저런걸 읽고는 제일 앞장에 나서서 맑스주의를 반대한단말이요.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말아야지. 사실 오동진선생이야 민족주의자이면서도 공산주의를 리해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요. 그런데 저 아들은 학우회 회장까지 하면서 새사조에 엇서고있거든. 저런 인물들때문에 맑스주의를 먹이기가 참 힘이 드오. 뭐니뭐니해도 저 오학천의 고집불통을 꽉 눌러놔야 하오. 찍소리도 못하게말이요.》

《허허, 눌러놓기전에 여기서 먼저 떠나겠다고 하던데…》

《떠난다, 참 떠나기만 한다면 제발 그러라고 바래라도 주겠소.》

박두학은 저녁때 최봉이와 김리갑이를 데리고 다시 찾아와서 길림형편에 대한 보고를 드리겠다고 하면서 학교로 떠나갔다.

박두학이 나간 뒤 김성주동지께서는 방안을 거닐며 잠간 생각에 잠기시였다. 오학천이를 번뇌와 고민속에 집어던진, 벽장에 빽빽이 들어찬 책들을 바라보기도 하시였다.

(이 복잡한 도시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길림에 첫발을 들여놓기바쁘게 부닥치게 되는 복잡한 현실이 오히려 온몸에 힘을 뿌듯이 안겨주는것만 같은 느낌이 드시였다. 그이께서는 아까 오학천이 내다보던 유리창앞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시였다.

눈이 덮인 뒤뜰엔 해빛이 밝았다. 그렇게 들부시던 눈보라는 아주 잦아들고 조용한 대기속에서 참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이께서는 몹시 마음이 상쾌하시였다.

 

2

 

겨울날씨같지 않게 포근하고 따뜻한 아침해빛이 퇴마루우에 비쳐들었다.

처마끝에 드리운 고드름도 번지르르 녹았다.

하숙집 딸 봉숙이가 퇴마루우의 해빛속에 앉아서 소꿉장난을 하고있다.

어린 봉숙이는 모래가 소복이 담긴 분갑이며 병마개며 크림통 같은것들을 이리 옮겨놓고 저리 옮겨놓고 하면서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군했다.

《봉숙아, 이건 뭐게 이렇게 가지런히 놓았느냐?》

김성주동지께서는 마루에 걸터앉으며 봉숙이에게 물으시였다.

《가마지뭐. 이건 밥짓는 가마, 이건 국 끓이는 가마…》

《그담 이건?》

《그건 밥상이야.》

《허허허, 그럼 이건 저가락이구 이건 숟가락이구나…》

그이께서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봉숙이의 천진한 세계에 잠겨드시였다.

《아저씨.》

열심히 소꿉들을 차리고있던 봉숙이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던지 방문쪽을 할끔할끔 살피며 김성주동지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 얼굴은 어딘가 겁을 먹은듯도 하고 그런가 하면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는듯도 한 그런 표정이였다.

《내 재미있는 말 들려줄가?》

《무슨 말?》

그이께서는 봉숙이의 표정을 따라 진지한 안색으로 되물으시였다. 봉숙이는 방안에 있는 외삼촌이 듣는다고 살래살래 손을 저으며 눈짓을 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제야 눈치를 알만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아저씨!》

봉숙이는 그이의 곁에 바싹 붙어 기대앉으며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글쎄 어저께말이야, 우리 고양이가 쥐를 물고 막 달려들어왔지뭐. 이만치 큰걸…》

봉숙이는 얼른 두손으로 쥐의 크기를 가늠해보였다.

《그래서 어쨌느냐?》

《그런걸 우리 외삼촌이 필갑통을 들고 막 때렸어. 그러니까 고양이는 눈이 이만치 커져서 덤벼들었지뭐.》

봉숙이는 또 두손으로 량눈에 안경테같은 동그라미까지 만들어붙이며 속삭였다.

《저런, 물었댔겠구나?》

《물었어. 그리구 빡빡 할퀴구… 그러니까 외삼촌은 이크이크 하면서 문을 열구 달아났어.》

《허허허…》

《아저씨, 우리 외삼촌이 정말 고양이한테 질가?》

《그건 너의 외삼촌보구 물어보려무나. 아무도 몰래…》

《난 외삼촌하구는 말 안해. 밤낮 기집애 기집애 하구 욕만 하는걸뭐.》

김성주동지께서는 또 웃으며 아이를 품에 안아들고 일어서시였다.

《얘, 봉숙아. 노래나 부르자. 인젠 네가 혼자 부를수 있지?》

《다 까먹었어. 해해.》

봉숙이는 입에 손가락을 물며 눈언저리가 발깃해서 웃었다. 량볼이 사과알같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봉숙이의 볼을 다독다독 두드려주며 말씀하시였다.

《그럼 나하고 같이 부를가?》

《응.》

《입에서 손가락은 뽑구.》

《해해해.》

김성주동지께서는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으시고 함께 노래를 부르시였다.

 

시내가에 우거진 풀을 뜯어서

곱게곱게 작은 배 꾸며가지고

굶주리고 헐벗은이 모두 싣고서

눈물 없는 나라로 찾아갑니다

 

아이의 쨍쨍한 목소리와 그이의 은근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화음을 이루어 청신한 아침공기속에 퍼져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오동진의 집에 계시다가 육문중학교에 들어가신 뒤에는 이어 봉숙이네 집으로 하숙을 옮기시였다. 봉숙이네 집으로 오신 날부터 그이께서는 봉숙이를 무척 귀여워하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봉숙이를 책상앞에 앉히고 글을 가르쳐주시였다. 한참씩 글을 가르치다가는 노래를 부르게 하시였다. 그래서 인제는 봉숙이가 가갸거겨를 줄줄 내리읽고 노래도 곧잘 불렀다.

봉숙이는 한참 따라부르더니 노래가 입에 익자 그이의 품에서 벗어나 손바닥을 짝짝 치면서 혼자 노래를 불렀다. 그이께서도 손바닥을 쳐주며 노래를 받쳐주시였다.

이러는데 대문이 열리며 봉숙이 어머니가 콩나물버치를 이고 들어왔다. 그는 버치를 땅에 내려놓지도 못하고 서서 봉숙이가 노래부르는것을 한참 쳐다보았다.

《우리 봉숙이가 이젠 제법이구나.》

《해해해, 어머니 보문 난 안해.》

봉숙이는 기급하여 김성주동지께로 달려와서 꼭 숨었다.

《어이구, 못난것도 있지. 제 어미가 부끄러워서 저럴가?》

《허허허, 봉숙이가 인제 어머니앞에서도 노래를 잘 불러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겁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부드럽게 웃으시며 봉숙이의 사과알같은 볼을 어루만져주시였다. 봉숙이 어머니는 불시에 눈앞이 뽀얗게 흐리여왔다. 험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힘으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가자니 힘들고 서러운 고비도 많았다. 그때마다 남편을 생각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이의 뜻을 저버릴수 없다고 스스로 꾸짖고 위로하면서 강심을 먹고 살아왔었다. 그래도 누가 그 정상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김성주동지께서 그처럼 자기의 마음을 밝게 하고 기쁘게 해주시려고 일일이 마음을 쓰시는것이 고마운 생각과 함께 꼭 돌아가신 김형직선생님의 그 남다른 성품을 대하는것만 같아 가슴이 미여졌다.

《암, 잘 부르겠지. 자네가 가르쳐주는데 못부르겠나?》

봉숙이 어머니는 퇴마루우에 콩나물버치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동호는 방안에 있나?》

《네. 책을 읽고있습니다.》

봉숙이 어머니의 묻는 소리에 김성주동지께서 대답하시였다.

《어이구, 무슨놈의 책을 그렇게 밤낮 골독을 해서 읽나?》

《아주머니, 책을 읽는것이야 좋은 일이 아닙니까? 자꾸 읽어야 합니다.》

《나두 그걸 모르진 않네. 이 애 아버지가 꼭 저렇게 책을 읽었다네. 내가 시집을 오니까 열일곱살 자신이가 관을 쓰고 앉아서 밤낮 사서삼경만 읽고있지 않겠나. 내가 물그릇을 들고 들어가도 거들떠보는 법이 없었지. 어떤 땐 내가 들어갈가봐 문을 닫아걸고 앉아서 읽는데 그것도 지금 저 동호처럼 입속으로 읽는줄 아나? 종일 공자왈맹자왈 하면서 소리를 내여 읽었지…》

봉숙이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이미 저세상사람이 된 남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눈물이 어려있었다. 그이께서는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일부러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어깨도 흔들흔들하시며 읽으셨겠지요.》

《그럼, 옛날에는 글 읽는 법이 그랬다네. 그러다가 독립운동에 나서서 무송아주버니를 만나서는 신식글을 배운다고 하면서 무슨 책인가를 밤낮 들고다니며 읽었지. 그때는 신식공부가 돼서 그런지 소리는 내지 않구 지금 동호가 책읽듯 저렇게 눈으로만 읽었네.》

봉숙이 어머니가 무송아주버니라고 하는분은 김형직선생님을 말하는것이였다. 봉숙이의 아버지 리봉진은 김형직선생님께서 조직하신 조선국민회의 회원이였고 나라의 광복을 위해 열렬히 싸운 애국자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림강과 팔도구에 계실 때 키가 작고 몸이 다부지게 생긴 리봉진이가 아버님을 찾아오는것을 여러번 보신적이 있었다. 어떤 때는 리봉진이가 집에 와서 여러날씩 묵으면서 아버님과 이야기도 하고 밤이면 함께 어데를 다녀오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에서 왔다는 큰 상자 하나를 잎담배 실은 말파리 짐속에 넣어 어데론가 떠나보내는것을 보시였는데 그때 리봉진은 말파리를 감독하면서 갔다. 상자속에는 무기가 들어있은것 같았다. 이러다가 무송에 와서 사실 때에는 바로 리봉진네 집과 이웃을 하고 지냈다.

이렇게 되니 아버님과 리봉진이 사이만 가까와진것이 아니라 어머님과 봉숙이 어머니 사이도 아주 가깝게 되였다. 정말 그 사이는 동서간같이 다정했다. 그러다가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난해 봄 리봉진네는 길림으로 이사를 해왔다.

그런데 큰 불행은 두 집에 똑같이 닥쳐왔다. 바로 아버님께서 돌아가신지 한달후 리봉진이도 국내에 공작을 나갔다가 왜놈의 손에 붙잡혀 희생되였다. 불행은 두 집의 정을 더욱 가깝게 만들어 눈물젖은 위로의 편지가 여러번 무송에서 길림으로, 길림에서 무송으로 오고갔다. 이런 애틋한 정이 있어서 봉숙이 어머니는 오동진네 집에 계시게 된 김성주동지를 한사코 자기 집에 와계시게 한것이였다.

봉숙이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간 뒤에야 봉숙이 외삼촌 신동호가 문을 열고 퇴마루로 나섰다. 몸집이 둥실둥실하게 생긴 청년이였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 인차 뜰앞에 있는 철봉대에 매달려 한참 흔들어댔다. 굵은 다리를 하늘로 쭉 뻗치고 머리를 아래로 드리울 때면 봉숙이가 밑에서 손벽을 치며 웃었다.

철봉을 한참 하고난 신동호는 얼굴이 붉게 상혈해서 그제야 목에 수건을 걸고 세수를 하러 갔다.

길림이란 도시는 학생들의 도시다. 아침이면 학생들이 거리를 덮었다.

인력거와 마차가 달리는 큰 통로 량편에 하수도를 깊이 파고 그우에 널을 깐것이 인도인데 아침마다 이 인도가 학생들로 꽉 찼다. 학생들은 성안에서 나가기도 하고 성밖에서 들어오기도 했다. 신개문을 통해 성밖으로 빠져나가는 학생들이 어떻게 많은지 막혔던 물이 터진것 같았다. 북대가, 하남가, 통천가 할것없이 큰거리에는 어데나 학생들이 밀려가고있다.

그들은 활기에 차서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밤새 풀다가 못다 푼 숙제문제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책에서 읽은 명제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언제나 학생들을 흥분시키는 중심적인 이야기거리는 역시 시대에 대한 문제, 이 시대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청년학도들의 진로에 대한 문제였다. 간밤에도 어느 모임에서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있었다. 그 론쟁이 오늘아침 학교로 가는 길우에까지 연장되였다.

현시대를 문명의 시대, 진보하는 시대라고 론단하는것은 형이상학이며 현대문명은 인간을 퇴보시켰을뿐 인류사회에 기여한것이란 꼬물만큼도 없다고 우겨대는 학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가방의 배가 불룩하도록 무엇을 잔뜩 채워넣고도 모자라 옆구리에 두툼한 책을 몇개 더 끼고 가는 한 학생은 여드름자국이 불깃불깃한 얼굴을 쳐들고 맹렬히 웨쳐대였다.

《이 번민하는 시대, 이 통곡하는 시대,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새것을 내놓으려고 몸부림치는 이 태동하는 시대에 살면서 화랑정신이요, 애국명장이요 하고 옛이야기나 환상을 중얼거리고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리석은짓인가? 중놈이 불에 타죽으면서 념불로 비를 부르는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그럼 이 시대의 진정한 산파는 누구인가? 그것은 정치, 오직 정치, 참으로…》

그러나 여드름쟁이의 열변도 인차 다른 목소리에 삼키우고만다. 리론은 론쟁이 되고 론쟁은 모순을 낳았다.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린지 알수 없는 소리로 되기도 했다. 어쨌든 저저마다 꿈이 크다. 누구나 다 시대와 세계를 한손아귀에 쥐고 흔들것처럼 우기고 떠든다. 아직은 연약한 날개를 가진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그 날개의 연약한것에 대해서 비관할 필요는 없다. 장차 그것이 힘찬 매진을 통해서 시간에 닥달되고 공간에 출렁이여 굳어진 날개와 부추리로 마침내 새 세계의 문을 두드리며 시대의 창공을 훨훨 날으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우마항거리로도 많은 학생들이 밀려왔다. 성밖 덕승문쪽에서 들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여기서도 그렇게 떠들고 들끓으며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길이 메게 걸었다.

김성주동지께서도 바로 이 학생들속에 섞이여 걸어오셨다. 신동호도 걸어왔다. 그는 어제밤 쓰다가만 시 《자화상》을 입속으로 외워보며 걸었다.

 

번민하는 꿈의 호수가에

꺼진 정열의 하얀 이끼 쓰고

내던져진 너 호젓한 돌멩이야…

 

신동호는 이 복새판에서도 새로운 시상을 붙잡기 위해서 애를 썼다. 환상의 호수가를 걷고걸으며 풀과 속삭이고 물과 속삭여도 본다.

학교로 나오신 김성주동지께서는 정구장쪽을 바삐 지나 교실로 들어가시였다. 교실안은 조용했다. 강당 하나를 거쳐서 들려오는 운동장의 소요가 여기서는 한결 아득히 들린다.

청소를 깨끗이 한 교실은 먼지 한점 없었다. 마른걸레를 친 책상들이 알른알른했다. 어제 마지막 시간에 기하선생이 써놓은 피다고라스의 정리와 직각삼각형의 흔적이 칠판우에 어슴푸레 남아있었다. 걸상에 앉으신 그이께서는 잠간 무슨 생각을 하시다가 얼른 책보를 풀고 《자본론》을 꺼내 펼쳐드시였다.

그이께서 잉여가치학설사 한절을 막 끝내려고 하시는데 상학시간이 되여 학생들이 밀려들어왔다. 교실은 삽시에 떠들썩해졌다. 교실에서는 정숙해야 된다고 선생마다 잔소리를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쿡쿡 쥐여박기도 하고 어깨짓으로 밀치기도 하면서 웃고 떠들었다.

《오신다!》

한 학생이 손을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선생이 온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교실안은 가뭇없이 조용해졌다.

첫시간은 세계력사시간이였다. 수염을 짝 갈라붙이고 머리를 곱게 빗어넘긴 력사선생이 과정안 진도대로 고대조선의 력사를 가르치였다. 그는 두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교탁을 단정히 짚고서서 고조선인들의 신숭배사상으로 이루어진 생활을 설명했다.

《이렇게 고조선국가에는 뒤엔 백산이 있고 앞에는 아리수가 있어서 쳐다보나 굽어보나 천지간에 신덕이 꽉 차있었습니다.》

선생의 목소리는 크지도 않은데 확고부동했다.

《이 신악과 성수를 믿고 사는 그네들은 생활의 모든것이 신중심이였습니다. 그중에서 하나의 실례를 들어본다면…》

선생은 벌겋게 상혈한 뺨과 코등을 잠간 손수건으로 닦았다. 학생들은 선생의 얼굴을 주시하며 누구 한사람 자세도 흐트리지 않았다.

《그 실례를 든다면 1년에 한차례씩 있는 전 국민적명절에 대해서 말할수 있습니다. 이 명절날에는 온 나라가 경축과 환락을 즐기며 남자는 활을 쏘고 녀자는 길쌈을 하는 등 경기를 진행합니다. 중요한 국책이나 형옥과 같은 큰 국가적문제도 이날에 결재합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경축은 하느님께 감사의 정을 바칠뿐만아니라 부족들간에 우애를 두터이 하고 사회를 단결시킴에도 극히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주와 슬기를 겨루는 기회로도 되여 문화를 진보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목되는것은 이날에 진행되는 국가적심판이나 대경축을 모두 신을 모시고 진행하였던 이 시대 사람들의 정신적원동력입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신숭상에 의하여 생활이 정화된 시대였습니다.》

선생은 많은 사료를 인용하면서 진지하게 강의를 계속했다. 훌륭한 문학적형상으로 윤색해가면서 능란한 추리를 하여 보여주는가 하면 때로는 생생한 표상으로 이끌어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옛 조선인들의 생활과 그들의 재능을 눈앞에 그려볼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으로 넘어갔을 때 한 학생이 불쑥 일어섰다. 몸이 앙바틈하고 눈이 작은 권태일이였다.

그는 정의감이 강하고 새사조에 민감하였다. 《공산당선언》을 첫구절부터 마지막문장까지 뜬금으로 줄줄 외워 동료들을 깜짝 놀라게 한것도 바로 이 권태일이였다. 학우들은 그를 《독학가》, 《열정가》라고 불렀다. 무슨 시간에나 질문을 자주 하여 그의 존재는 교원들속에도 널리 알려져있다.

그는 육문중학교 학생들중에서 맨 처음으로 김성주동지와 통성을 하고 역시 맨 처음으로 그이와 의사소통을 한 청년이였다.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권태일은 약간 돌진하는듯한 자세로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선생은 교탁을 짚고 서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생님, 저는 오늘 강의에서 고대조선인들의 신숭배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보니 모를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신숭배생활이란 그 목가적인 생활이 과연 그렇게 훌륭한것이겠는가 하는것이 첫째 의문이고 만일 그렇다면 현대에 이르러 우리들은 왜 그 신을 우리 생활에서 내쫓아버렸는가 하는것이 둘째 의문입니다.》

《괴벽스러운 질문이로군. 신숭배의 생활이 훌륭했다는것은 단순히 력사기록을 더듬어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요. 인간은 자기 력사와 자기 조상을 찬미하는 정신에서 력사란 학문을 익혀야 하는데 바로 그런 정신밑에서 옛사람들의 생활을 생각해야 하오. 그런데 학생에겐 그런 정신이 전혀 없는것 같소. 그렇기때문에 오늘 우리의 생활에서 신을 내쫓았다는 그런 괴벽한 의문이 제기되오.》

《선생님, 그럼 오늘의 생활에도 신이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

《신을 신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생활정신으로 리해하는것이 필요할줄 아오. 우리는 아무리 복잡한 현실에 산다고 하더라도 력사를 타고 흘러온 옛사람들의 생활정신은 본받아야 하오.》

선생은 그 생활정신을 형용하듯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량손으로 그 동그라미를 고스란히 퍼담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는 권태일이 아닌 다른 학생을 향해 《본받아야 하오.》하고 되뇌이였다. 이것은 질문을 제기한 당사자뿐만아니라 교실안의 모든 학생들이 주의를 집중하여 교원의 대답속에 담겨져있는 알맹이를 제때에 파악할수 있게 하는 고유한 수법이였다.

권태일은 그이상 말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 물으시오. 모를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선생은 교탁앞을 왔다갔다하며 교실안을 둘러보았다. 질의응답을 통하여 이미 습득한 지식을 완전히 소화시키며 나아가서는 그 지식을 120%로 확대시키는것은 이 력사선생이 완강하게 실천에 옮기고있는 독특한 교수방법이였다.

이번에는 김성주동지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선생님, 제가 한마디 묻겠습니다.》

《어서 말하시오.》

《제가 알고싶은것은 고대조선의 국가통치기구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이 신숭배생활로 일관됐다면 당시의 국가체제에 대한 사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을것입니다.》

《국가통치기구? 물론 그런 사료들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아직 정연한 체계로 서술할만큼 풍부한 사료는 발굴되지 못했소. 그런데 학생은 무엇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오?》

김성주동지께서는 선생의 목소리에서 그가 긴장되여있다는것을 느끼시였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냥 지나쳐버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고대조선의 생산관계와 국가권력문제에 대해 학구적인 흥미도 없지 않으시였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신것은 선생이 자기의 관념론적인 사관에 기초해서 력사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을 학생들에게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 하는 그것이였다.

《제 생각에는 신숭배란 결국 당시의 통치자들이 인민들을 억압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리용한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기때문에 반드시 당시의 국가권력에는 신숭배와 관련된 직제들이 있었을것이라고 생각하는것입니다.》

《아니, 신을 억압착취의 수단으로 보다니. 그건 무슨 말인고?》

선생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시 선생의 변한 낯빛을 바라보시다가 침착하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선생님, 저는 옛사람들의 생활의 자취인 력사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생활자체를 모두 긍정해버릴수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력사속에 빠져있을수도 없습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이 그렇게 훌륭하고 아름답기만 했다면 무엇때문에 력사는 그 사회를 부정하였겠습니까? 제보기에는 있지도 않은 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기만하고 신의 권위를 빌어 사람들에게 복종을 강요한것 자체가 불의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생산이 발달하고 과학이 진보하자 신의 아들이요, 손자요 하는 통치자들은 견딜수 없게 되고 그대신 땅과 노예를 더 많이 가진자가 더 큰 폭력으로써 인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한것이라고 봅니다. 사료를 가지고도 이것을 보지 못하는것은 결국 력사를 귀중히 여기는 나머지 력사속에 빠져버린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력사속에서 졸것이 아니라 력사에서 정확한 사회발전법칙을 배워가지고 이 사회를 앞으로 전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신숭배생활에 가리워져있는 당시의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호상관계를 알고싶어서 국가통치기구를 물은것입니다.》

《음ㅡ》

선생은 신음소리같이 한마디 중얼거리고는 굳어져버렸다. 턱이 눈에 알리게 떨렸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국가의 본질에 대하여, 그것이 어떤 너울을 썼든 결국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착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따라서 국가를 절대시해서는 안된다는것을 말씀하려고 하시다가 선생의 기색이 방금 넘어질것처럼 질린것을 보고 자리에 앉으시였다.

아닌게아니라 선생은 졸다가 깨여난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함부로 대할수 없는 비범한 학생이 제자들속에 나타났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떠올랐다. 종소리가 울리자 그는 총총히 교수를 끝내고 허둥지둥 교실밖으로 나갔다.

이 력사선생은 호가 빙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력사를 전공한 사람인데 특히 아시아, 그중에서도 조선력사와 중국력사에 조예가 깊었다. 젊었을 때에는 황인종의 발달의 자취를 더듬어 아시아 여러곳을 대지팽이 짚신 신세로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대사에 대한 저술도 몇권 가지고있었다.

빙하가 교직윈실로 들어가니 체육교원 왕희동이 체육복을 입고 운동모까지 쓰고 서서 아령을 하고있었다. 첫시간에는 늘 체조가 없어서 왕희동은 교직원실에서 혼자 이짓을 했다. 왕희동은 키가 크고 앞가슴이 벌어졌는데 턱수염은 면도질도 안했다. 체중이 빙하의 갑절은 될듯싶었다.

《제일 먼저 나왔군요.》

왕희동이 여덟폰드짜리 아령을 거머쥐고 운동을 계속하며 말했다.

빙하는 피뜩 한번 돌아보았을뿐 별 대꾸를 않고 자기의 안락의자에 가서 깊숙이 주저앉았다. 그는 공연히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자꾸 닦았다.

도대체 그 학생은 어떤 학생인가?

질문도 보통 질문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것을 묻고있다. 무엇인가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보고있는것 같다.

《빙하선생도 이런 운동을 하십시오. 그래야 장수를 하십니다.》

《난 그걸 지고 일어서지도 못하겠소.》

왕희동의 소리에 빙하는 언짢게 대꾸를 했다. 웬일인지 교실에서 받은 충동이 왕희동의 체육복이 터질것 같은 육체에서 오는 불쾌감으로 뒤바뀌는것 같기도 하였다. 평생 잔잔한 늪같이 파문을 일으킬줄 모르던 빙하의 심정이 오늘은 왜 그런지 그 고정한 성품을 깨뜨리고 왕희동의 육체에 재털이라도 들어던지고싶어졌다.

빙하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았다. 김성주동지의 질문이 자꾸 날카롭게 머리를 들었다.

그 질문에 내가 왜 대답할수 없었던고? 나더러 력사속에 빠져있다고 하는 말은 내 일생을 얼마나 신랄히 비판하는 말인가. 일생을 력사연구에 바쳤으나 남의 기록을 더듬는데서 더 벗어난것이 무엇인가. 내가 자기 연구에서 《나》라는것을 세웠는가? 사관은 가끔 이원론적립장에 떨어져 오락가락하고… 이게 력사속에 빠져있은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빙하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안을 왔다갔다하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김성주동지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빙하는 쉬는 시간에 김성주동지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김성주동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확실히 비범한 인상이다. 다물고있는 입모습과 눈가장자리에는 웃음이 어려있다.

《학생은 력사를 얼마나 공부했소?》

《별로 공부한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력사를 많이 알고있는것 같은데?》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열심히 배우자고 하는 생각뿐입니다.》

《배워야지. 그런데 앞으로 어떤 과목을 전공하려고 하오?》

《아직 무엇을 전공하겠다고 확정한것이 없습니다.》

《음…》

빙하는 여전히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래 학생은 오늘 내가 고대조선인들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신숭상을 많이 말했는데 원시종교도 포함해서 종교일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오?》

《별로 달리 생각하는것이 없습니다. 전 선생님께서도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놓고 강의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력사를 소중히 하는 립장에서 사료에 있었던 사실을 말씀하신것으로 리해합니다. 종교란 몽매한 시대의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할 힘이 없고 자연앞에서 자기들의 무력을 느낄 때 정신적인 의지로 삼자고 만들어낸것이 아니겠습니까.》

《옳소. 바로 그것이요. 나도 그렇게 알고있소! 옳은 말이요.》

그이께서는 그저 빙긋이 웃으시였다.

《그래 요즈음은 무슨 책을 읽소?》

《책을 구할수가 없어서 별로 읽지 못합니다.》

《어떤 책을 구하오?》

《우리 청년들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유익한 책이면 어떤 책이든지 읽고싶습니다.》

《우리 집으로 오오. 내 장서가 좀 있는데 볼것이 있을는지 모르겠소만…》

《선생님. 고맙습니다.》

얼마후 김성주동지께서는 사무실에서 나오시였다. 빙하는 그이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며 꼭 집으로 책을 가지러 오라고 재삼 말했다. 좀전까지 그처럼 진정되지 않던 마음이 인제는 봄날의 늪같이 잔잔해지고 넓어졌다.

김성주동지께서 사무실에서 나오시니 권태일이 기다리고있다가 빙하선생이 어째 부르더냐고 물었다.

《별 말씀이 없었소. 자기 집에 장서가 있으니 책을 빌려다 읽으라고 했소.》

《글쎄 그러면 그럴테지. 빙하선생이 아까 내 질문에 좀 불쾌해하는 낯빛을 보였지만 질문한것을 가지고 시비할 사람은 아닌데. 아주 좋은분이라오. 너무 고지식한게 좀 탈이긴 하지만 어쨌든 인력거를 한번도 타본 일이 없다는 선생이요. 왜 인력거를 타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런걸 타면 사람에게 라태와 안일이 생겨서 못쓴다는거요. 인간은 발을 놀려 걷고 손을 놀려 일하는것이 천부의 의무라는거요. 체육교원 왕희동이 박쥐라고 하면 빙하선생은 두루미라고 할수 있소. 참, 그 왕가를 조심하오. 경무청에서 박아넣은 밀정이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웃음을 띠우고 권태일의 작달막한 몸집을 바라보시였다. 그는 방금 보탑을 쥐고 밭을 갈다가 달려온 농촌청년같이 순박해보였다. 작고 노란 눈에서는 미소가 떠날줄 몰랐다.

《왕희동이 밀정인줄 어떻게 아오?》

《그걸 왜 모르겠소? 학생들이 맑스주의책을 읽는가 해서 밤낮 뒤를 감시하고있다오. 박쥐같은것이 아무리 감시한들 새 사조의 침투를 막아내겠소?》

권태일은 흘끔흘끔 주위를 살펴보며 떠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가 맑스주의책을 읽고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상경향이 좋은 학생이라고 생각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학업을 필하신 뒤 권태일과 함께 거리로 걸어나오며 그가 어떤 학생인가 하는것을 좀더 깊이 알아보시였다. 권태일은 그이의 곁에 붙어서 걸으며 자기 집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길림철도국에서 로동자로 오래 일을 했는데 해고를 당해서 송화강 선창가로 일자리를 옮겼다는것이였다. 생활이 가난하여 권태일은 소학교를 마치고는 공부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뒤를 댈테니 중학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서 육문중학교에 들어왔다는것이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꾸짖던 흉내도 냈다.

《야, 이놈. 벽돌아,(권태일의 아명이다.) 네가 중학을 가고싶지 않다는것은 무슨 소리냐? 지자는 막여부라 했는데 네 속은 나도 모르겠구나. 네 애비가 일생을 까막눈으로 사는것이 후회막급인데 고작 소학교를 마치고 그만둬? 이 애비한테서 땀이 밴 지게를 물려지고 마소처럼 살고싶으냐? 그게 소원이라면 어서 래일부터라도 선창으로 나가 장작짐을 져라 져.》

권태일은 주먹질까지 하며 흉내를 냈다. 그 익살에 김성주동지께서는 소리를 내여 웃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은근히 좋은 동무를 하나 만났다는 생각을 하시였다.

《권동무는 독학가, 열정가로 소문이 났던데 맑스주의서적을 많이 읽었겠구만?》

김성주동지께서는 영민하게 돌아가는 권태일의 눈을 다정하게 살피며 나직이 물으시였다.

권태일은 입가에 겸허한 웃음을 띠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많이야 무슨… 뒤골방에서 돌아가는 책을 그저 몇권 읽었을뿐이요.》

《이 길림에 맑스주의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소?》

《많은것 같소. 진수를 파악 못하고 남들이 읽으니까 덩달아서 행세식으로 읽는 친구들도 있지만 어쨌든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 아니요. 맑스나 엥겔스처럼 장발을 하고다니는 멋쟁이들도 더러 보이더구만.》

《무슨 조직같은건 나와있는게 없소?》

《아직 조직은 없는것 같소. <려길학우회>라는 단체가 하나 있기는 있는데 그건 민족주의세력이 거머쥐고 앉아서 좌지우지하고있소. 하는 일은 별로 없이 말공부질로 세월을 보내고있는것 같더구만. 여하튼 그 민족주의세력때문에 새 사조가 기를 펴지 못하고있소. 색채가 다른 조직을 내오기도 힘들구…》

권태일이와의 대화로 하여 김성주동지의 눈앞에는 길림의 전모가 더욱 뚜렷이 그려지는것 같았다. 뜻을 같이할수 있는 또 한명의 생신하고 진취적인 동무를 알게 된것이 기쁘시였다.

그이께서는 권태일의 팔굽을 힘있게 그러잡고 정깊은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앞으로 우리 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공부도 하기요. 서로 모를것이 있으면 토론도 하고… 그래서 시대의 진로, 민족의 진로를 탐구하는 길에서 힘과 지혜를 합치자구.》

권태일은 그 말씀에 미소로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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