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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23 회 )
22
《군자금》으로 토지를 사고 약혼식을 차리는 그 천추에 씻을수 없는 죄행을 저지른후 길림에 잠시 체류했던 마인택은 화전의 어느 료정에서 무송시절부터 이미 낯을 익힌 상해《림시정부》 남만담당 파견원을 만나 《림정》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팔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것은 매우 리행하기 힘든 부탁이였다. 사람들은 갓 조직된 《정부》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듯이 그 《정부》가 찍어낸 공채에 대해서도 의혹을 가지고 대하였다. 독립된후 5~30년이내에 상환금을 돌려준다는 독립공채조례의 제2조에 밝혀진 약속은 사람들에게 막연하다는 인상만 주었을뿐이다. 피천 한푼없는 백성의 궁핍이 또한 공채를 외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공채는 재무부의 금고속으로 되돌아갈 운명을 지니게 되였다. 백성의 피눈물이 배인 막대한 의연금을 술과 계집질과 연회와 무익한 사대구걸외교에 탕진한 《림정》은 돈의 부족을 타개할 비상대책을 세웠다. 그 조치중의 하나가 바로 재무부의 금고속에서 좀이 쓸고있는 독립공채를 팔아버리는것이였다. 그래서 파견원은 배가 불룩한 말가죽가방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남만땅에 나타난것이다. 파견원은 마인택이 자기의 부탁을 리행하는 경우 그에게 보수로 교환금액의 5할을 지불해줄것을 약속하였다. 오늘 마인택은 화전에서부터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져있는 삼밭골에서 공채를 팔기로 하였다. 그가 삼밭골을 무대로 삼은것은 여기에 소작농보다 자작농이 더 많다는 사정때문이였다. 이고장 사람들은 인심도 류달리 좋았다. 포수덕의 약혼녀네 집에 본거지를 두고있는 그는 점심식사를 마치자 대원들과 함께 삼밭골로 향하였다. 산 하나를 넘고 개천 하나를 건느면 삼밭골이다. 마인택은 그 산고개에 이르자 옆으로 호위원을 불렀다. 키는 그닥 크지 않으나 몸집이 박달나무처럼 탄탄한 귀밀눈의 사나이였다. 《어느 집부터 시작하면 좋겠소?》 마인택이 마을을 굽어보며 묻는 말이다. 《개울옆에 있는 첫집부터 합시다.》 호위원은 별로 생각을 짜내는 기색도 없이 선뜻 대답하였다. 《그 집은 살림형편이 어떻소?》 《밥술이나 먹는 자작농입니다. 염소도 있고 면양도 있지요. 소는 두말할것도 없구요.》 마인택은 흰자위가 유난히 두드러져보이는 그 가늘즉하고 차디찬 눈으로 산아래를 굽어보았다. 《저 개울이 참 맑구만… 강호에 파묻혀 고기를 낚아 천렵이나 하고 표주박으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시조나 읊으며 생을 마치고싶소.》 《우리 당대에 그런 날이 있겠습니까?》 《허, 그게 무슨 소리요.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나는 어쩐지 그 속담이 미덥지 못합니다. 고생끝에 락을 찾은 사람이 조선동포들 가운데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왜 많지. 중추원 참의벼슬을 하는 금광쁠로까 최창학이두 뭐 처음부터 부자였는줄 아는가.》 《하긴 뭐 중대장님이야 벌써 락을 찾은걸요. 토지를 장만하고 약혼까지 했으니 그이상 큰 락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야… 나같은거야 버러지같은 인생이지요.》 마인택은 그 말을 듣자 껄껄거리며 웃었다. 《너무 락심 말라구. 자네한테두 이제 땅이 생기고 색시가 생길테니까.》 그는 졸지에 찾아온 자기의 락을 두고 감개무량한 생각에 잠기였다. 무송의 옛성터에서 길재의 시조를 읊조리던 그때까지만해도 그의 넋을 지탱하고있은것은 병들기는 했으나 완전히 부패되지는 않은 허약한 독립의식이였다. 그런데 그지간 마인택의 인생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독립의 전도도 암담한데 제살구멍이나 파야겠다는 철면피한 리기심이 그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한것이다. 미구에 그의 주머니는 돈과 재물로 가득 들어찼다. 그 원천은 《군자금》이였다. 그는 반석에서 돈을 긁어들이고는 재빨리 화전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며 다시 화전에서 돌아치다가는 안도의 산재부락들을 훑으며 돈주머니를 불구어나갔다. 돈을 내기 싫어하는 농민들이나 토호들앞에서는 으름장도 놓고 총도 휘둘렀다. 눈을 모로 세우고 금이발(그사이 그는 은이발을 금이발로 바꾸었다.)을 번쩍거리며 한번씩 엄포를 놓으면 없던 돈도 스스로 나오고 무뚝뚝한 접대도 살뜰한 환대로 바뀌여졌다. 이제 《독립공채》가 잘 팔리는 날이면 그의 재부도 더 늘어나게 될것이다. 지금 그가 들고가는 말가죽가방에 가득 들어찬 공채가격의 5할이란 황소 다섯마리도 왔다갔다하는 거액의 돈이다. 마인택은 불원간 성취되고야말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흐뭇한 기분으로 비탈길을 내리였다. 맨 선참으로 찾아간 집은 염소도 있고 면양도 있다는 자작농의 집이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인 중년의 농사군이 안해와 함께 콩마당질을 하고있었다. 낯선 손님들이 울밖에서 언뜻거리는것을 보자 그 주인은 도리깨질을 멈추었다. 마인택의 낮익은 모습을 알아본 그는 《중대장님, 들어오시우다!》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림시정부>의 부탁을 가지구 왔수다.》 같이 간 대원이 주인의 귀전에 스칠듯이 입을 바투 가져다붙이고 속삭이는 말이다. 주인의 눈빛은 생기를 띠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렇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탈곡을 하시느라고 수고합니다. 소출이 어떻습니까?》 마인택은 점잔을 빼며 마당안에 들어섰다. 《쑬쑬합니다.》 주인은 첫인상에도 말수더구가 적은 사나이라는것이 알리였다. 이삭을 채 자르지 않은 조짚단을 마인택의 발치에 가져다놓았다. 마인택은 그 짚단우에 위풍있게 걸터앉았다. 안주인은 부엌문앞에 멀찌감치 비켜서서 크고 순한 눈을 느리게 껌벅거리며 호기심 절반, 불안 절반의 시선으로 마인택이 앉아있는쪽을 자주 돌아보았다. 며칠전에도 《군자금》을 받아갔는데 오늘은 또 무슨 돈을 긁어가려누 하는 눈치였다. 《식구는 모두 몇입니까?》 한참만에 마인택이 다시 물었다. 《여섯입니다.》 《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조반석죽으로 살지요. 잘살지는 못하지만 죽도 없어 못먹는 소작농들에 비하면야 부자인셈이지요.》 주인은 솔직한 사람이였다. 마인택은 용건과는 별로 상관도 없는 시큰둥한 말을 한참 늘어놓다가 십분쯤 지난 다음에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인님은 공채라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들어는 봤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저 몇해전에 <정부>파견원이 이 마을에 와서 공채를 팔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그렇다면 차라리 잘됐습니다. 내 오늘 <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를 팔려고 삼밭골에 왔습니다.》 마인택이 눈길질을 하자 대원이 가방에서 공채묶음을 꺼냈다. 알량한 중대장은 그 공채중에서 몇장을 뽑아 주인앞에 내밀었다. 《보십시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독립공채라는겁니다.》 주인은 난생처음 보는 공채를 이모저모 유심히 뜯어보았다. 《이건 어떤데 쓰는겁니까?》 《돈과 같은거지요. 이걸 샀다가 차후 필요할 때 돈과 다시 바꿀수 있습니다.》 《저금통장과 비슷한건가요?》 《같다고는 볼수 없지만 돈을 찾는 증권이라는 의미에서는 비슷하다고 볼수 있지요.》 이때 안주인이 남편의 가까이에 와서 무어라고 소곤거리였다. 주인은 알겠다는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그래도 안해가 그냥 말을 이어대자 그는 눈을 흘기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밀었다. 《<정부>는 뭣하려고 이런걸 만들어내나요?》 《독립을 하자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많을수록 독립은 빨리 됩니다. 돈이 나라를 독립시키는 힘인데 <정부>금고에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걸 만들어가지고 돈과 바꾸는것이지요. 독립후 <정부>는 이 공채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한 금액의 돈을 돌려주게 됩니다.》 마인택은 공채라는것도 모르는 이 산골의 까막눈을 한바탕 되게 꾸짖고싶었지만 꾹 참고 근기있게 설명을 해나갔다. 대원이 마인택에게 책장크기만큼한 마분지장을 가져왔다. 마분지장의 한쪽면에는 독립공채조례를 렬거한 낡아빠진 인쇄물이 붙어있었다. 마인택은 그 인쇄물을 흘끔 스쳐보고나서 주인한테로 눈길을 돌리였다. 《그러니까 공채를 사는건 조선이 독립될 때까지 <정부>에 그만한 돈을 저금하는거나 마찬가지겠구만요?》 《그렇구말구요.》 《그런데 언제 가면 독립이 될가요?》 《불원간에… 내 소견에는 5년안팎이라고 보는데…》 《5년후에 독립이 된다면 그까짓 돈 받지도 않겠습니다.》 주인은 슬그머니 집안에 들어가서 돈지갑을 들고 나왔다. 《얼마쯤 사면 되겠습니까?》 《요구대로 하십시오. 있는 애국열만큼…》 《십원어치 삽시다.》 그 순간 키가 후리후리한 청년 하나가 《잠간만!》 하고 웨치며 울안으로 뛰여들어왔다. 또 한명의 몸매가 다부진 청년이 잇달아 나타났다. 키가 큰 첫번째 청년은 김리갑이였고 두번째 청년은 계영춘이였다. 그들은 군사교관의 명령으로 화성의숙의 무기고를 위한 기부금을 모으려고 아침부터 이 동네에 와 돌아다니고있었는데 마인택이 공채를 팔기 위해 아무개네 집에 왔다는 소문을 듣자 주먹을 부르쥐고 이리로 달려온것이다. 주인은 지페가 쥐여진 손을 아래로 내려뜨리였고 대원은 반사적으로 토방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인택 한사람만이 본연의 거드름스러운 자세를 조금도 허트리지 않고 짚단우에 태연스레 앉아있었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요?》 김리갑이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원은 가늘죽한 귀밀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노래를 부르는듯한 야유조여서 성미가 어지간히 급한 사람은 직판 그런 말이 새여나오는 입술을 밥주걱같은것으로 짓조겨주고싶은 욕망이 들게 할 지경이였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오!》 초면의 말대답치고는 자못 뚝뚝하고 퉁명스럽다. 《…》 대원은 김리갑의 말을 훌 무시해버리고 주인앞에 묵묵히 다가가 돈을 받아쥐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리갑은 주인과 대원 사이에 쐐기를 치듯 들어섰다. 《다치지 못하오. 한잎두!》 《당신은 뭐게 남의 일에 참견이요?》 대원은 옆구리에 두팔을 비틀어올려붙이고 도전적으로 모자채양을 밀어올리였다. 그것은 상대방의 약을 올려주기에 충분한 동작이였다. 《우리는 화성의숙에서 왔소.》 《아, 그렇소? 화성의숙의 손님접대가 기막히다고 소문이 났던데 듣던 소문보다는 너무 야박하구만.》 《야박하오. 하여간 그 공채는 여기서 팔지 못하오. 여러말 말구 어서 물러가시오.》 《이거 왜 이러우? 조심하는게 좋겠수다. 당신은 우리 중대장어른이 당신같이 버르장머리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안됐는걸, 안됐는데요.》 대원은 삼단같은 담배연기를 일부러 김리갑의 귀뿌리에 들씌웠다. 《뭐라구? 백성들을 우롱해도 분수가 있지. <군자금>으로 토지를 사고 약혼식까지 차리는 주제에 무슨 렴치로 또 백성들한테 찾아왔소? 부끄럽지도 않소.》 김리갑은 무엇이건 비위를 건드리는것이 있으면 마구 들부시고 짓밟아놓고싶은 사나운 충동에 휩싸여 연방 험한 말을 퍼냈다. 이즈음 그는 눈에 띄게 성미가 거칠어졌다. 그는 아무하고나 곧잘 성을 내였으며 지어는 자신에게도 자주 화를 내였다.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하였다. 기부금을 모으는 일이 잘 안된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져서 그러는지… 《화성의숙의 도련님들, 우리가 바로 <림시정부>의 위임을 받고 여기에 왔다는걸 명심해야겠습니다.》 대원은 여전히 귀밀눈을 째긋하고 근기있게 비양거리였다. 《여보시오, <림시정부>도 당신들과 같은 도적놈들이요.》 《어, 그 말을 <림정>의 법무총장이 듣지 못하는게 다행이군…》 대원은 아까보다 더 큰 연기뭉치를 또 한모금 김리갑의 면상에 내뿜었다. 저쪽은 반사적으로 대원의 입귀에 물린 담배대를 손으로 탁 쳐서 떨어뜨리였다. 대원은 입귀에 물린채로 있는 담배대의 나머지부분을 훅 뱉어버리고나서 마인택을 향해 눈을 찔끔하였다. 《중대장님, 이 개뼈다귀같은 자식이 아직 막걸리맛을 못본 모양입니다. 한잔 먹일가요?》 《막걸리가 아니라 청주를 먹이게.》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원의 주먹이 김리갑의 명치끝으로 날아들었다. 김리갑은 《윽!》 하는 비명과 함께 두손으로 배를 움켜쥐였다. 그 서슬에 먼발치에 서있던 주인이 두사람사이로 뛰여들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러지들 마시오!》 주인은 쇠장대같이 꿋꿋한 대원의 팔을 간신히 붙잡고 토방앞으로 끌고갔다. 숨을 돌린 김리갑이 잉그르르 달려와 대원의 사타구니를 들이찼다. 대원은 중심을 잃고 쓰러질듯이 비척거리였다. 《뭐, 막걸리가 어쩌고 어째?》 김리갑은 무섭게 씨근덕거리며 대원의 아래우를 사정없이 짓조기였다. 상대가 토방앞에 주저앉자 그는 마인택이앞으로 돌아섰다. 《이놈아, 너두 여기 토장맛을 좀 보겠니?》 순간 기회를 노리고있던 대원이 뒤에서 그의 잔등판을 발로 콱 내찼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계영춘이 마당에서 뽑아든 남새밭말뚝으로 대원의 어깨를 내리쳤다. 말뚝은 대원의 어깨에까지 닿지 못하고 마인택의 손으로 넘어갔다. 마인택은 그 말뚝으로 두 적수를 닥치는대로 두드려패기 시작했다. 말뚝끝에서는 살과 뼈가 이물리는 퍽퍽ㅡ 하는 매소리가 연방 울리였다. 게다가 대원까지 마당안을 돌아가며 펄펄 날뛰는바람에 울안에서는 살벌한 란투가 벌어졌다. 구경군들이 하나둘 울테밖으로 모여들었다. 《이새끼들아, 청주맛이 어떠냐?》 대원은 매질을 하면서도 쉴새없이 악다구니질을 하였다. 그러면 상대쪽에서 그보다 못지않은 험구가 터져나왔다. 그러는 사이에 마인택의 부하들이 달려와 그에게 합세하였다. 김리갑이와 계영춘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우박같이 쏟아지는 매와 주먹과 몽둥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졌다. 《집에 바가 좀 없습니까?》 마인택은 계영춘의 허벅다리우에 한발을 올려놓은채 집주인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새끼도 없습니까?》 《없습니다.》 마인택의 의도를 눈치챈 주인은 덮어놓고 같은 대답을 되풀이하였다. 그는 걷잡을길없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의 동정심은 패자인 화성의숙 학생들에게로 쏠리였다. 주인은 자기고장사람들을 해친 그 불한당들을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대원이 구새목에서 큼직한 새끼퉁구리를 들고 나왔다. 마인택은 새끼 두토막을 썩둑 베내여 대원에게 던져주었다. 《묶으시오.》 새끼로 꽁꽁 묶인 두 학생은 곧 배나무집헛간에 끌려갔다. 마인택은 공채와 바꾼 십원의 현금을 가방속에 집어넣고 주인에게 눈을 찔 흘기고나서 회파람을 불며 중농의 집뜨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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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이 좀 기울무렵 림소영이 삼백말을 타고 화성의숙으로 찾아왔다. 그는 정구장쪽에서 어정거리는 리무성이를 교문밖으로 불러내여 무엇인가 찔막하게 귀띔을 하였다. 그 소곤거리는 말소리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요란한 반향이 리무성의 입에서 환성으로 터져나오고 두눈에 눈물로 괴여올랐다. 새초덕에 다녀오신 김성주동지의 말씀을 듣고 김시우가 장차 무련이를 데려다가 양딸삼아 키우기로 결심했다는 감동적인 소식이였다. 《글쎄 성주의 이야기를 듣고 총관아저씨가 그렇게도 분해하시더라누나.》 림소영의 말이였다. 《성주가 새초덕에 갔다와서 무련이때문에 몹시 걱정했소. 너무 가슴이 아파서 아마 총관아저씨한테까지 이야기한 모양이구만.》 《그런데 성주는 왜 보이지 않니?》 《강변에서 책을 보구있을게요. 성주가 알면 정말 기뻐하겠네.》 리무성은 잠시 눈을 슴벅거리며 림소영의 앞을 왔다갔다하다가 발길을 우뚝 멈춰세우고 다시 말을 걸었다. 《누이, 내 청을 들어줄테요?》 《무슨 청인데?》 《거 있지 않소.》 리무성은 그래도 림소영이 좀처럼 알은체를 하지 않자 혀끝으로 딱소리를 다섯번 내였다. 《오, 그거.》 림소영은 그제서야 싱긋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권총탄알 다섯발을 꺼내여 리무성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런 다음 위협하듯 오른쪽 두번째손가락을 꼿꼿이 쳐들어보이였다. 《탄알을 망탕 쓰면 안돼.》 《걱정 마오. 누이, 그럼 내 성주한테 가서 얼른 소식을 알려주구 오겠소. 중대로 인차 돌아가겠소?》 《아니, 총관아저씨한테 가있겠다.》 리무성은 교문앞에서 림소영과 헤여져 송화강쪽으로 향하였다. 바로 그때 거리쪽에서부터 공골말 한필이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말우에는 방을룡이 앉아있었다. 《저… 큰… 큰일이 났소!》 말에서 뛰여내린 방을룡은 평소의 침착하고 다부진 그답지 않게 몹시 허둥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땀벌창이 된 이마밑에서 열기를 띤 눈이 이상하게 번쩍거리였다. 툭 불거져나올것처럼 한껏 커진 말의 눈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찍한 느침과 짐승의 배때기에 돋아오른 번질거리는 땀방울들이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사연의 심각성을 미리부터 짐작할수 있게 하였다. 《무… 무슨 일이요?》 리무성이도 방을룡의 열띤 기분에 감염되여 말을 더듬었다. 그는 놀라운 일을 당할적마다 늘 하는 버릇대로 팔소매를 성급히 걷어올리였다. 《삼… 삼밭골에서 싸움이 붙었소.》 《뭐 싸움이? 무슨 싸움말이요?》 《큰 싸움이요. 그 마을에 콩을 실으러 갔는데 어떤 집 울타리밖에 사람들이 하얗게 붙어서있지 않겠소. 그래 호기심이 나서 마차를 세우고 다가가보니 마인택이네가 어떤 청년들을 새끼로 묶어서 질질 끌고가지 않겠소. 한 청년은 리갑이였구 다른 한 청년은 계영춘이였소. 어떻게 된 판인지 골이 다 깨여졌더군. 사람들이 일러주기를 <공채>패들한테 모둠매를 맞구 그렇게 됐다지 않소. 배나무집 헛간에 두사람을 처넣더구만.》 방을룡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백지에 글을 쓰듯 무슨 말이나 또박또박 조리있게 하는 본래의 성미 그대로 삼밭골사람들한테서 대충 얻어들은 사건의 전말을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너무도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리무성은 한동안 말도 못하고 몸을 떨기만 하였다. 다른고장은 몰라도 부디 화전에서만은 그 신물나는 파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왔는데 종내 큰 불집이 터진것이다. (얼마나 맞았으면 골이 다 깨여졌을가?) 리무성은 속이 벌컥 뒤집히는것 같아서 침을 탁 내뱉었다. 《하마트면 나도 그 싸움에 말려들번했소. 무성이네 친구자 내 친구가 아니겠소. 그래 그 마가네 패들을 한 두어놈 제끼려다가 이리로 달려왔소.》 방을룡은 힘살이 툭툭 불거진 손으로 말고삐를 주무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였다. 리무성은 눈을 흘기며 가볍게 그를 나무랐다. 《싸움에 말려들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래서는 안되오. 성주가 그걸 제일 싫어한단말이요. 그따위 패싸움질에는 침을 뱉고 돌아서야 하오. 나나 을룡이나 다 새길을 걷기로 결심한 새 사람들이 아니요.》 《그래두 동무들이 매를 맞구 피투성이가 됐는데 가만있을수 없지 않소.》 《그런 소린 하지도 마오. 그러다간 더 큰 싸움이 터진단말이요. 창걸이도 그 너절한 파쟁때문에 죽다가 살아났는데…》 《그럼 창고에 갇힌걸 가만 내버려둔단말이요?》 《그거야 데려와야지. 가만있자, 을룡이, 지금 빨리 우리 학교에 가서 삼밭골소식을 좀 알려주지 않겠소? 그리구 이 말은 나한테 좀 빌려주오. 내 얼른 삼밭골에 갔다올테니 기다려주오.》 방을룡은 순순히 리무성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리무성은 등자를 디디고 두어번 몸을 실구다가 말잔등에 훌쩍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삼밭골을 향해 거리쪽으로 냅다 말을 몰았다. 뒤에서는 맥락이 닿지 않는 방을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을 등지고 달리는 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것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다급하게 뿜어대는 말마디들의 억양으로 보면 무슨 불만같은것을 터뜨리는것 같기도 하고 조심하라고 당부하는것 같기도 하였다. 십분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그는 삼밭골에 다달았다. 김리갑이네가 갇혀있는 배나무집뜨락에서는 두명의 마인택의 대원이 멍석에 퍼더버리고 앉아 호박씨를 까고있었다. 필경 그들의것인듯싶은 부혁이 너슬너슬해진 두자루의 보총이 바람벽에 삐뚜렁하니 세워져있다. 그들은 흥취가 도도하여 와자자하게 지껄여댔다. 《내 오늘 겪어보니 이곳 족속들이라는게 큰소리는 탕탕 잘 쳐두 쌈에 들어서는 암탉만두 못하더군. 화성의숙이라는데야 그들가운데서도 제일 팔팔하고 알쭌하다는것들을 골라서 모은데가 아닌가.》 몸이 빼빼마른 첫번째 대원이 하는 말이다. 그 대원은 사타구니에 재빛고양이를 끼고 앉아 짐승의 등줄기털을 비다듬고있었다. 《그 못난것들이 그런 주제에 관할구역은 노란자위만 가지고있으니.》 두번째 대원이 비양거리며 한입 가득 물었던 호박씨껍데기를 훅- 하고 내뿜었다. 《세상일이라는게 늘 그렇게 불공평하다네. 운수만 좋으면 바보도 룡상에 앉지 않던가.》 《하하하… 어쨌든 저치들이 오늘 우리 손맛이 어떻다는걸 톡톡히 봤을걸세.》 《우리 손맛이라는거야 북간도바람처럼 칼칼하지. 저런 맹물단지들에 비길텐가.》 반쯤 열린 문가에 빡빡깎은 중대가리 하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대원의 손에는 화투목이 들려있었다. 《여여, 너무 젠체하지 말라구. 이마빡에 닭알을 만들어가지구서두 큰소린… 그치들이 그런 맹물단지들이라면 우리 선무공작반이 뭣땜에 무송서 여기까지 쫓겨왔겠나?》 《경적은 필패라…》 얼굴이 희멀쑥한 다른 대원이 자기 동료의 어깨너머로 머리를 내밀고 제법 유식한 소리를 하였다. 《그렇게 그치들을 홋보다간 이제 그 사람들이 청천백일에 나무칼로 자네네 코를 베갈걸. 오늘은 실력이 아니라 수자로 이겼다는걸 알아야 해.》 (빌어먹을자식들, 하라는 쌈은 하지 않구 못된짓만 하는군. 기생충같은것들이…) 리무성은 가슴에서 태를 치는 의분때문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였다. 그는 가슴이 홧홧 달아오르는 분격에 떠밀리여 담장안에 허궁 뛰여내리였다. 두 대원이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바람벽앞에 달려가 총을 집어들고 격발기들을 떼내여 이웃집 지붕너머로 훌훌 팽개쳐버리였다. 총알은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너무도 급작스레 일어난 일인지라 멍석우의 병졸들은 손가락하나 까딱할수 없었다. 한참후에야 명태처럼 꼬장꼬장 마른 대원이 두눈을 곤두세우고 리무성에게 다가들었다. 《야, 이새끼야, 인마! 너 화성의숙이지?》 《그렇다.》 《쟈, 이새끼가… 어디서 이따위가… 인마, 너 죽구싶어서 그래?》 약이 바싹 오른 말라꽹이는 솔개발통같은 주먹을 돌멩이처럼 틀어쥐고 왈카닥 상대방을 덮치려 들었다. 리무성은 토방우에 냉큼 올라서서 무섭게 그자를 쏘아보았다. 《부잡스럽게 굴지 마오. 나살이나 먹은 사람이 창피하지두 않소?》 말라꽹이는 그의 눈독에 기가 숙어 더 어쩌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키였다. 화투놀이를 하던 그의 동료들이 우르르 문가에 모여들었다. 맨 뒤켠에 서있던 말상같은 상판이 슬며시 문가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리였다. 잠시후 그 상판은 권총을 뽑아들고 동료들의 어깨를 후닥닥 뛰여넘어 리무성이와 마주섰다. 《야, 이놈아, 너 어디서 왔니?》 하고 그자는 꽥 고함을 질렀다. 그만한 위세에 주눅이 들 리무성이 아니였지만 가슴을 겨누고있는 총구를 정작 보느라니 머리가 힝 내둘리였다. 《화성의숙에서 왔소.》 《화성의숙? 이마빼기에서 젖비린내가 몽콜몽콜 나는 자식, 말버릇두 더럽다. 인마, 너 왜 왔어? 우리하구 또 한바탕 겨뤄보려구 왔지?》 《아니오, 그런 너절한 싸움은 하지 않소. 우린 동무들을 데려가려고 왔소. 우리 친구들이 당신들한테 매를 맞구 골이 깨져서 헛간에 갇혀있다는데 어서들 내놓소.》 《흥, 어림도 없는 소리. 그건 포로야, 인질이란말이야.》 《인질? 그런 말을 하기가 부끄럽지두 않소? 어쩌면 그런 말을 감히 입밖에 낸단말이요. 오늘 여기서 벌어진 싸움은 아주 너절하고 추악한 싸움이였소. 나라를 찾겠다고 총을 잡고 나선 사람들끼리 서로 두드려패구 피가 터져 돌아가며 민족의 망신을 시키고있으니 이런 수치가 세상에 어디 있소!》 리무성은 두손바닥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말상은 약간 기가 죽어가지고 불만인듯 입을 비쭉거리였다. 《우리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패싸움으로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사람들의 원망을 사야 하겠소? 그래 이런 썩어 문드러진 파벌근성을 가지구 왜놈들과 대적할수 있다고 생각하오? 두번다시 이런 싸움을 한다면 우리들에게 밥을 주고 돈을 주고 믿음을 주는 인민이 그 싸움을 용서하지 않을거요.》 리무성은 말상의 얼굴을 쏘아보고나서 김리갑이네가 갇혀있는 헛간앞으로 다가갔다. 헛간문에는 소대가리같은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그는 헛간앞에 놓여있는 도끼로 자물쇠를 까기 시작했다. 말상의 총구는 때를 놓칠세라 그를 겨냥하였다. 리무성은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전률에 몸을 떨며 뒤로 홱 돌아섰다. 말상은 방아쇠를 당기였다. 거의 같은 시각에 담장밖에서도 《땅!》하는 총소리가 울리였다. 말상은 팔을 흠칫하더니 손에서 권총을 떨어뜨리였다. 그는 피흐르는 손을 움켜잡고 번개같은 이 일격의 주인공을 찾는듯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리무성이도 자기의 구원자를 찾으려고 담장밖을 바라보았다. 가라말과 나란히 서있는 삼백우에서 림소영이 총구를 불며 엄한 눈으로 담장안을 굽어보고있었다. 《총들을 넣엇!》 처녀는 말상과 그 주위에서 어물거리는 대원들을 향해 맵짜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리무성이쪽을 향해 헛간문을 열라고 눈짓하였다. 아마 그도 방을룡의 말을 듣고 이리로 급히 달려온것 같았다. 리무성은 또다시 도끼등으로 헛간 자물쇠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된 김리갑이와 계영춘이를 헛간밖에 들어내왔다. 류혈이 랑자한 그들의 덩지 큰 몸뚱이는 시신처럼 탄력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넝마가 되여버리였다. 때아닌 총성을 듣고 이골목저골목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리무성은 안주인이 떠다주는 물로 부상자들의 상처자리를 대충 씻고나서 한쪽눈을 비죽이 뜨고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김리갑의 얼굴우에 머리를 숙이였다. 피칠을 한 그의 몰골을 보니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김리갑이 안도선중대장의 말을 빌려타고 송화강반을 달리거나 군사훈련에 참가하여 교범의 요구에 맞는 절도있고 세련된 동작을 보여줄 때는 그 누구도 그에게 대적을 못할것 같았다. 그는 늘 힘의 과다증, 정열의 과다증, 욕망의 과다증에 걸려있었다. 그래서 국내원정도 시도해보았던것이다. 그렇게도 용감하고 활력이 강하던 김리갑이 지금 서리맞은 배추잎같이 되여 피투성이로 누워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판국인가. 리무성은 북받쳐오르는 분노와 련민의 정으로 가슴을 달구며 들이켰던 숨을 다급히 확ㅡ 내뿜었다. 그리고는 눈물이 글썽해서 김리갑의 손을 꽉 그러쥐였다. 《리갑이, 옆구리가 결리지 않아?》 《아니.》 김리갑은 자기의 대답이 상대방의 귀에까지 닿지 못했다는것을 감촉하자 결리지 않는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어디가 아파나는지 이마살을 찡그렸다. 《어디 뼈가 부러진데는 없어?》 《몰라. 네가 좀 만져보렴.》 리무성은 옷섶밑으로 손을 밀어넣어 량쪽 륵골들을 빠짐없이 만져보았다. 다행히도 뼈가 상한데는 없었다. 《리갑이, 안심해. 무사한것 같애.》 그는 옆구리와 가슴을 손짓해보이고나서 다른데로 눈길을 옮기였다. 《무성이, 내 얼굴에 물을 좀…》 김리갑은 소매죽지가 떨어져 거덜거리는 바른팔을 들어 손바닥으로 팅팅 부어오른 얼굴을 쓸었다. 볼이며 이마에 올랐던 피독이 아직도 말끔히 가셔지지 않은 모양이였다. 리무성은 주인집아주머니가 양철대야에 떠온 물을 김리갑의 얼굴에 몽땅 끼얹었다. 그제사 김리갑은 눈빛이 령롱해졌다. 《에익, 분해서 못견디겠어.》 《분해도 할수 없지. 그 몸으로는… 의원 신세나 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개자식같은것들, 저것들을… 음, 난 왜 이럴가? 국내원정을 해도 실패, 싸움을 해두 실패… 무슨 망조가 든것 같애.》 《모두 네가 잘못 생각하는탓이야.》 《무성이, 너까지 날 못살게 굴테야? 내가 뭘 잘못 생각한다는거야?》 김리갑은 리무성의 말에 약이 올라 얼굴을 푸들쩍거리며 몸을 뒤채였다. 《자식! 아직 밸은 살아있구나.》 《그래 살아있다. 목숨이 끊어지기전에 김리갑의 밸이 그리 쉽게 숙어질줄 알았냐?》 《흥, 그 밸을 어데다 써야 하는지 인젠 너도 좀 알아야 한다.》 리무성이 옷소매로 김리갑의 얼굴에서 물기를 씻어주며 한마디 더했다. 《자식! 날 위해 쓰지… 내 밸을 어데다 쓸가…》 《젠장, 말공부질은 그만하구 이젠 가자.》 리무성은 헛간문밖에 담벽을 치고 둘러선 마을사람들을 향해 두루거리로 물었다. 《이 사람들을 화전까지 실어가야겠는데 어느분이 달구지를 가져오겠습니까?》 《내가 가져옵지요.》 마인택이한테서 공채를 사던 그 자작농이 선뜻 앞으로 나섰다. 그 사람이 몰고온 달구지에 중상자들을 실었다. 김리갑이네 몰골을 본 마을사람들은 치를 떨며 웅성웅성 끓었다. 로인 하나는 리무성의 손을 잡고 턱을 덜덜 떨며 고소하듯 말했다. 《여보시오 군대어른, 이제는 저런 쌈질에 신물이 났수다. 다시는 저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잘 조처해주슈.》 《할아버지, 이 마을에 와서 다시 돈을 억지로 긁어가거나 패싸움을 하는놈들이 있으면 모조리 정갱이를 분질러놓으십시오.》 리무성은 로인의 손을 놓고 달구지채우에 넌떡 올라서서 방금전에 현장으로 달려온 마인택이를 손가락질하였다. 《여러분, 이 사람이 <군자금>으로 북만에 밭을 사고 자기 약혼식까지 차린 마인택이란 사람이요. 오늘저녁부터는 이 사람에게 밥을 주지 마시오!》 그는 말을 일단 끊고 마인택을 쏘아보았다.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너절해질수 있소. 무송에서는 장참 술만 퍼마시고 기생집에 붙어있더니…》 마인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뜨부럭거리였다. 그는 한해반전에 고구려의 옛성터에서 만난적 있는 그 애숭이농사군, 박도삼의 조카를 인차 알아보았으며 그때도 이 청년은 지금처럼 자기한테 곰살궂지 못하였다는것을 추억속에서 분한 마음으로 들춰내였다. (개자식, 네가 나를 꼼짝도 못하게 벌거벗기는구나. 두구 보자.) 리무성은 걸죽한 말로 몇마디 더 엄포를 놓고나서 소엉덩짝을 툭 걷어찼다. 중상자들을 호송하는 그를 엄호하기 위해 림소영이 마지막까지 배나무집앞에 남아 마인택이네 패거리들을 견제하였다. 달구지가 동구밖에까지 다달았으리라고 짐작되는 때에야 처녀는 마을을 떠났는데 짐작했던바 그대로 개암촌다리목에서 리무성이를 따라잡았다. 그를 말에 태웠다. 림소영은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모자를 벗어 땀에 푹 절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였다. 《누이, 몹시 놀랐소?》 《놀라다마다, 성주도 지금쯤은 삼밭골로 뛰여올게다.》 리무성은 삼백의 률동적인 편자소리에 박자라도 맞추듯 가락맞게 몸을 흔들거리였다. 방금전의 흥분은 벌써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래일이나 모레쯤 새 조직을 내오는 예비회의를 한다구 했지. 참, 성주가 어느새 그런 큰 궁냥까지 다 했을가. 《정의부》니 《신민부》니 《참의부》니 하는건 이젠 딱 질색이야. 새 조직! 에, 좋다!) 리무성은 삼백의 배허벅에 두발을 흔들흔들 맞부딪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의 무한한 물은 산곡간의 적은 물이 회합함이요 …
그리 멀지 않은 저 앞쪽길 굽인돌이에서 돌연 세개의 하얀 반점이 나타났다. 그 반점들은 점점 커져서 사람의 형체로 변하더니 행길을 힘있게 걷어차며 삼밭골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여오고있었다. 리무성은 맨 앞장에서 달려오는 박인석의 모습을 알아보자 말에서 뛰여내리였다. 땀으로 번질거리는 교관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그의 손에는 며칠전에 길림에서 가져온 보총이 쥐여져있었는데 그 금속부분에서 내비치는 반사광이 기름칠을 한 가는 실오리들의 묶음처럼 허공중에서 번쩍번쩍 하였다. 사람이 아니라 그 어떤 거센 회오리바람이 밀려오는것 같았다. 그 무서운 돌진력앞에서 마주가던 마소들은 한순간 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리였다. 김리갑이네가 누워있는 달구지앞에 이르자 박인석은 눈알을 핑핑 굴리며 부상당한 제자들을 이윽히 살펴보았다. 《선생님, 면목이 없습니다.》 자기의 스승을 알아본 김리갑이 모기소리만큼 가늘게 말했다. 승자가 아니라 패자가 되여 화성의숙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또 교관선생에게 울화와 수치까지 끼쳐드리게 되여 몹시 송구스럽다는 뜻의 말이였다. 《살기는 살았군. 멍텅구리같은것들!》 《흥.》하고 코방귀를 뀐 박인석은 비수같은 눈으로 삼밭골마을을 쏘아보았다. 《개새끼들, 내 오늘 그놈들을 씨다구채로 없애버려야지. 살아서는 화전에서 돌아못가! 가자구.》 교관은 자기의것과 꼭같은 기병총을 잡은 두명의 제자를 이끌고 쏜살같이 앞으로 뛰여갔다. 김리갑이와 함께 맨 선참으로 학생무장대에 가입한 학생들이였다. 제자들의 피를 본 박인석이 가해자들을 보복하지 않고 그냥 물러설수 있겠는가. 그 불같은 성미, 화약같은 성미에… (제길, 바늘만큼 시작된 싸움이 홍두깨만큼 커지겠다. 에이 더러운 파쟁!) 리무성은 그들의 뒤모습을 흘겨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성아, 왜 그러고만 섰니? 더 큰 싸움을 보고싶으냐? 어서 뛰여가거라. 가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발목을 잡아라!》 미처 박인석을 제지하지 못한 림소영이 달구지옆에 서있는 리무성을 향해 다급한 소리로 웨쳤다. 리무성은 흠칫 놀라서 림소영을 치떠보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박인석을 쫓아갔다. 《선생님, 선생니ㅡ임! 서ㅡ십ㅡ시오!…》 그러나 분노한 박인석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따당!》 하는 총소리가 리무성의 고함소리를 삼켜버리였다. 교관과 그 동반자들의 기병총이 드디여 입을 벌리기 시작한것이다. 박인석은 눈앞에 보이는 마인택이네를 향해 무작정 총을 란사하였다. 상대측에서도 맹렬하게 맞불질을 하기 시작했다. 리무성은 다시 웨치였다. 《선생니ㅡ임, 싸우지 마십시오! 서시오! 서라ㅡ아 섯!…》 갑자기 웨침소리가 뚝 멎었다. 림소영은 온몸을 싸늘하게 만드는 섬찍한 예감에 사로잡혀 피끗 앞을 내다보았다. 처녀의 입에서는 곧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는 행길바닥에 쓰러진 리무성이를 보았던것이다. 리무성의 옷섶은 벌써 피에 흠뻑 젖어있었다. 림소영은 얼른 반소매를 벗어 네가닥으로 찢은 다음 리무성의 가슴을 헤치고 상처를 틀어막았다. 형언할수 없는 공포와 당황과 비분으로 와들와들 몸을 떨며 그의 상처우에 눈물을 뿌리였다. 《무성아!… 무… 무성아!…》 리무성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떤놈이 쐈소?》 그는 혀아래소리로 몇마디 힘들게 뇌이고는 입술을 감빨면서 삼밭골쪽으로 머리를 돌리였다. 그의 시선이 미치는 들판끝에서 총을 쥔 마인택이 부락쪽으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 학우들과 함께 개암촌 다리목에 당도하신것은 잠시후였다. 리무성은 각일각으로 의식을 잃어가고있었다. 선혈이 쉬임없이 가슴을 적시였다. 말로써 다 표현하지 못하는 심각한 그 내면을 그는 마치 피로써 적고있는것 같았다. 수난 많은 20년대를 향해 절규하고싶었던 그의 마음속 웨침을 상처가 대변해주었다. 그 상처우에 머리를 길다랗게 늘어뜨린 림소영의 눈물이 방울방울 끝없이 흘러내리였다. 처녀는 숨이 차게 뛰여오는 김성주동지와 그이의 학우들을 보자 조용조용 소리를 내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무성아!… 무성아!… 무성아!…》 김성주동지께서는 무릎우에 리무성이를 반듯이 눕히고 눈에 이슬을 뿌리며 안타깝게 부르시였다. 그러자 최창걸이 부상자의 오른손을 잡으며 울먹거리였다. 《무성아, 이게 웬일이냐!》 박두학은 왼손을 잡고 부르짖었다. 《야 무성아, 정신차려라!》 머리맡에서도, 발치에서도, 량옆에서도 리무성이를 부르는 소리가 높아갔다. 커다란 담벽이 어느덧 두겹세겹으로 그를 에워쌌다. 마인택이네한테로 더 다가갈수 없게 된 박인석이 사격을 멈추고 리무성의 옆으로 뛰여와 그의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무성이, 죽지 말아, 죽으면 안돼!》 하지만 리무성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렇게도 윤기가 돌던 말랑말랑한 입술은 보풀이 거슬거슬 일고 뿌연 재가 내려앉았다. 그렇게 그는 이삼초동안 죽은듯이 누워 반디불처럼 깜빡거리는 심혼을 깡그리 가다듬고있었다. 상처를 틀어막은 옥색천우에 꽃떨기처럼 퍼진 피자국이 점점 더 커져갔다. 정기를 잃어버린 뿌잇한 눈망울에서 무슨 불꽃같은것이 확 피여올랐다가 서서히 꺼져내리였다. 그러자 량쪽 눈귀에서 피방울같은 눈물이 주르르 굴러내려 볼을 적시였다. 눈망울에 어리였던 10월의 산천이 그 이슬방울들에 고스란히 비껴들었다. 《무성아! 무… 성… 아!》 김성주동지께서는 다시금 비통하게 부르짖으시였다. 온 산천이 그 소리를 받아 애끊게 부르짖었다. 《무성아!…》 리무성은 그 소리를 듣자 무엇인가를 걷어잡으려는듯 손을 허우적거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얼른 그 손을 잡아쥐시였다. 《성주, 새 길을… 같이 가려구 했는데 그만…》 리무성은 숨이 차서 말을 끊었다가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보따리안에 코신을… 사둔게 있다. 무련이가… 오면… 내대신… 그 신을…》 그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맥없이 턱을 떨구었다. 《무성아!…》 김성주동지께서는 이 한마디를 간신히 뇌인 다음 그자리에 쓰러지시였다. 《무성아!… 무성아!… 네가 죽다니!… 나를 욕해다구. 너는 그래두 고비골에서 다 죽어가던 나를 업어다 살리였는데 나는 너를 살리지 못했구나. 래일은 무련이가 화전에 오는데… 동생도 못보고 죽다니. 무성아!…》 최창걸이 눈물을 좔좔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꺽꺽 막히는 갈범의 울음소리를 몇차례 되풀이하더니 그다음은 얼이 나간 사람처럼 퀭하니 길바닥을 굽어보았다. 그렇게 몇초동안 꼼짝 않고 쓰러져있던 그는 갑자기 모지름을 쓰며 땅을 차고 일어섰다. 사람들의 담벽을 둘러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우리 무성이를 누가 죽였소?》 대답이 없었다. 최창걸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격철을 절컥 울린 다음 림소영의 팔을 흔들며 재차 물었다. 《어느놈이 무성이를 죽였소?》 림소영은 리무성의 시신우에 얼굴을 틀어박은채 삼밭골쪽을 향해 바른손을 아무렇게나 들어올렸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공채를 사던 례의 중농이 서있었다. 《네놈이냐?》 최창걸은 그 중농의 가까이에 다가가 명치끝에 총구를 들이대였다. 《아… 아니요.》 중농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어느놈이 쏘았소?》 이번에는 여러개의 총구가 단꺼번에 그의 가슴을 겨누었다. 중농은 얼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데도 눈을 견주지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저기… 저기…》하면서 부락쪽을 손짓하였다. 그리고는 땅에 풍덩 주저앉았다. 동료의 시신을 둘러싸고있던 청년들은 박인석이를 앞세우고 《와!》 하는 함성을 터치며 일제히 삼밭골쪽으로 밀려갔다. 《살인자를 처단하라!》 군사교관의 노한 목소리가 하늘중천으로 날아올랐다. 학생들은 《죽여라!》 하는 함성으로써 그 목소리에 호응하였다. 그 순간 김성주동지께서 자리를 차고 일어서시였다. 금시 쓰러질듯 비척거려지는 몸을 삼백의 배허벅에 기대이고 행길 한끝을 바라보시였다. 그끝에서는 먼지가 뽀얗게 피여오르고있었다. 먼지속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거밋거밋한 형체들은 육안으로도 잘 보이였다. 싸늘한 전률이 또다시 온몸을 휩쓸었다. (아니다, 저래서는 안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렇게 뇌이며 몸을 날려 삼백우에 허궁 날아오르시였다. 그다음 등자로 짐승의 배를 힘껏 걷어차시였다. 후닥닥 공중으로 굽을 쳐들었던 삼백은 삼밭골쪽을 향해 질풍같이 달리였다. 무송에서 보시던 마인택의 얼굴이 불현듯 커다랗게 확대된 모습으로 그이의 눈앞에 육박해왔다. 고구려의 옛성터에서 선조들의 넋을 부르짖던 우국지사, 무송회의를 앞둔 지난해 8월에는 삿대질을 해가며 장철하와 언쟁을 하던 사나이. 그가 아무리 너절한 시정배로 전락되였다 해도 동족을 죽이는 살인자가 될줄이야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인들 했으랴. 말은 순식간에 대오를 따라잡았다. 그 대오우로 김성주동지의 웨침소리가 날아갔다. 《서라!》 그러나 복수열에 들뜬 청년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냥 앞으로 내달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들을 앞질러 대오앞에서 말을 멈춰세웠다. 땀에 번들거리는 육중한 말의 동체가 대오를 가로막았다. 《서라!》 그이께서는 먼저번보다 더 다급한 목소리로 구령을 내리시였다. 청년들은 비로소 달음박질을 멈추었다. 땀에 뜬 수십의 얼굴들이 삼백우로 의혹에 찬 눈길들을 보낸다. 총과 몽둥이로 무장한 대오였다. 《왜 그러나?》 누군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른 청년들은 숨이 막혀 씨근거리기만 하였다. 그 맨 앞장에 최창걸이와 박두학이 서있다. 그뒤에는 조학봉이와 계영춘, 리제우… 수없이 많은 얼굴들이 보인다. 배움의 나날 리무성이와 더불어 친형제처럼 지내던 학우들이다. 모두가 그 어떤 재변이나 불행앞에도 내던질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였다. 《총들을 넣소!》 김성주동지께서는 맨 선두에 선 학우들을 향해 엄하게 소리치시였다. 《못넣겠소. 말을 치우오!》 최창걸은 아까보다 더 높이 총을 추켜들었다. 《무성의 시체를 보고서도 그러오?》 《시체를 보았기때문에 그러는거요. 죽어서 시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성이의 원쑤는 갚아야겠소!》 총을 든 박인석교관이 대오앞으로 비집고 나왔다. 《성주, 막지 마오. 저 악귀같은 마가네 종자들을 모조리 멸족시켜야겠소!》 《무감정》이라고 소문난 랭랭한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번쩍거리였다. 《선생님, 안됩니다. 그러다가는 이제 무모한 싸움으로 더 큰 희생을 낼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 저런 무참한 죽음을 보고서도 참아야 한단말이요? 그 마가네 패거리들을 살려둬야 한단말이요?》 박인석은 버럭 어성을 높이였다. 총을 쥔 손이 흥분때문에 후들후들 떨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도 심정이 격해지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런 살벌한 마당에 와서까지 패관념을 고취하는 교관이 저으기 민망스러우시였다. 《참아야지요. 선생님, 무모한 싸움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이께서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달래이며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무모한 싸움이라구?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데… 무성의 복수를 해야 하오. 어서 저 마가네한테로 추격하시오. 추격하란말이요!》 박인석의 입에서는 목갈린 소리가 터져나왔다. 《안됩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이쪽을 겨누고있는 총구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총구앞으로 학생들을 내몰 작정입니까?》 박인석은 총을 놓고 맥없이 땅에 주저앉았다. 그사이에 몇명의 청년들이 삼백의 뒤꽁무니쪽으로 해서 앞으로 나갔다. 《서라! 섯!》 김성주동지께서는 말우에서 훌쩍 뛰여내려 두팔을 활짝 벌리고 그들의 앞을 막아서시였다. 《어디를 향해 함부로 뛰여드는거요. 이래선 안되오!》 리성을 잃어버렸던 청년들은 그제야 손에서 슬금슬금 몽둥이들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맨 마지막까지 권총을 들고 서있던 최창걸은 허공을 향해 한탄창이 다 없어질 때까지 탄알을 련발하였다. 그리고는 행길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무성이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하였다.
23
새벽에 잡아들자 바람은 더 기승스럽게 화성의숙의 문풍지를 울리였다. 10월치고는 꽤 사나운 바람이였다. 한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신 김성주동지께서는 동창이 푸름푸름 밝아올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의숙에 입학하시던 첫날새벽과 조금도 다름없는 정경이 그이의 주위에 펼쳐져있었다. 학우들은 코를 골고 잠꼬대를 하였으며 이불을 미당기며 갈갬질도 하였다. 다만 다른것은 번거로운 기숙사방안의 그 새벽소음속에 리무성의 이발을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것이였다. 최창걸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개구리가 운다》고 하였으며 그보다 더 롱질이 심한 김리갑은 《풍년아재비가 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새벽에는 잠귀가 옅은 동료들의 화도 돋구고 웃음도 자아내던 그 《풍년아재비의 울음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기숙사를 나서신 김성주동지께서는 뒤뜨락에 들어가 낮에 미리 마련해두었던 삽과 패말을 집어들고 교문을 나서시였다. 새벽마다 그이께서는 이렇게 기숙사를 나서시였다. 그것은 소학생시절부터 오래도록 굳혀오신 사색과 탐구를 위한 새벽산보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이께서는 이런 산보를 하시였었다. 미구에 탄생할 새 조직의 강령이 걸음마다 무르익어가는 상쾌한 창조의 새벽이였다. 그러나 오늘의 이 새벽은 그런 새벽이 아니였다. 그이께서는 지금 한 기숙사지붕밑에서 더는 함께 살수 없게 된 리무성의 무덤을 찾아가시는것이다. 총관의 집 근처에 이르자 걸음은 저절로 떠지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푸릿푸릿한 어둠속에 태연히 서있는 낯익은 그 건물에 얼핏 눈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리며 까닭모를 한숨을 푹 내쉬시였다. 그 집에 바로 무련이가 있었던것이다. 오빠가 죽은 다음날 무련이는 화전에 왔었다. 그는 무덤가에서 울음으로 해를 지우다가 림소영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김시우네 집까지 맞들려왔다. (그 불쌍한게 잠인들 제대로 잘가?) 김성주동지께서는 어스름속에 그린듯이 서서 한참동안 무련이가 누워있을 총관의 집 웃방 창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서대가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시가를 벗어나자 바람은 더 거세게 불었다. 한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자아내는 바삭바삭 마른 락엽들이 와슬랑와슬랑 행길을 휩쓸며 지나갔다. 락엽은 발밑에도 밟히고 발목에도 성가시게 휘감기였다. 어떤것은 볼에도 부딪쳤다. 나무잎이라기보다도 얼음쪼각같이 차고 선뜩선뜩한것이였다. 찬서리 내린 들판을 바라보시니 한평생 홑옷을 입고 살았다는 리무성의 모습이 김성주동지의 눈앞에 우렷이 떠올랐다. 그는 엄동설한에도 홑저고리에 홑바지를 입고 지냈다. 그래서 롱담삼아 늘 자기 살과 추위는 거리가 매우 가깝노라고 하였다. 리무성은 죽어서도 사방 어디에나 걸거칠것이 하나도 없는 바람받이에 묻히였다. 들판 한가운데 뎅그렇게 드러난 그 공지주변에는 개버들 한대도 서있지 않았다. 지금쯤은 묘지언저리에 멀리서 날아온 서리맞은 락엽들이 한벌 깔리였을것이다. 그 묘지는 화전시가지에서부터 서쪽으로 두어마장쯤 떨어진 교외에 자리잡고있었다. 검누렇게 퇴색하여가는 가을의 쓸쓸한 색조가 무덤가에 떠돌고있다. 고인의 애끊는 혼령을 담은것 같은 밤새의 울음소리가 온밤 이 들판에서 울렸었는데 지금은 잠잠하다. 다만 어느 돌짬에서 잠을 설친 귀뚜라미가 무덤가의 정적을 썰며 간단없이 울어댈뿐이였다. 무산혁명을 부르짖으며 이 시대의 앞장에서 줄기차게 걸어가던 열혈청년의 혼백이 이 무덤속에 잠들고있다. 차거운 이 세상 구천에 무수한 한을 남기고 리무성은 열여덟이라는 아까운 꽃나이를 이방의 땅속에 묻었다. 신작로를 벗어져 북쪽을 향해 한참 걸어가시던 김성주동지께서는 무덤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공지끝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묘지에서 들려오는 인적기를 느끼시였던것이다. 그이께서는 조용히 눈정기를 한껏 모아 앞을 바라보시였다. 누구인가 묘지앞에 쭈그리고앉아 땅을 파고있었다. 새벽의 고요가 하도 그윽하여서 흙덩이들이 풀잎에 떨어져 우실거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죄다 들리였다. 마침내 인적기의 임자가 땅에서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작달막한 형체가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오른다. 다른것은 다 미미하게 보여도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흰적삼만은 쉽사리 눈에 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섬광처럼 번쩍이는 이상한 예감때문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한자리에 그냥 움직이지 않고 서계시였다. 흰적삼은 다시 묘지앞에 꿇어앉아 땅을 파헤치였다. 파다가는 흐느끼고 흐느끼다는 파고… (무련이로구나!) 그이께서는 한걸음 두걸음 앞으로 걸어가시였다. 그래도 무련이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두손은 여전히 걸싸게 땅을 파헤집는다. 무덤가생이에 자그마한 구뎅이가 하나 생기였다. 무련이는 그 구뎅이속에 유지로 정성껏 싼 양말을 밀어넣었다. 언제인가 새초덕에 가시였던 김성주동지께 뜨다 만 한짝을 보이면서 다른 한짝은 주인집에 두었다고 하던 털양말이였다. 그렇게도 애를 써서 한코한코 떠왔건만 무련이의 그 정성은 종시 오빠에게 닿지를 못하고말았다. 그래서 무련이는 양말을 무덤가에나마 파묻으려는것이다. 살아서 신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신어보라는것이였다. 양말과 함께 뜨개바늘도 파묻었다. 오빠가 없는 세상에 뜨개감도 더는 생기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오빠 한사람을 위해 만든 뜨개바늘이였다. 무련이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리 손이 시리고 발이 시려도 뜨개질을 하지 않을것이다. 의지나 리성의 힘으로써는 감당할수 없는 강한 오열이 온몸에 번져가는것을 느끼며 김성주동지께서는 마침내 무련이를 부르시였다. 《무련아!》 무련이는 흠칫 놀라서 손동작을 멈추었다가 몸을 약간 움츠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포와 의혹이 엇섞인 눈으로 어스름속 소리나는곳을 응시하였다. 이 새벽에 오빠의 무덤을 찾아줄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가? 소녀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탄성이 새여나왔다. 《성주오빠!》 《무련아!》 김성주동지께서는 소녀의 이름을 재차 부르며 무련이를 왈칵 부둥켜안으시였다. 그러자 무련이는 《흑》 하고 옹쳤던 설음을 한꺼번에 터뜨려놓았다. 소녀는 엉엉 소리를 내여 울기 시작했다. 김성주동지의 눈에서도 뜨거운것이 하염없이 흘러내리였다. 지나간 한밤도 슬픔으로 지새우신 그이시였다. 종일을 울고 장밤을 울어도 눈물은 동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사람의 몸에 무슨 눈물이 그리도 많은가싶었다. 오늘과 같은 이런 비극, 이런 비극의 시대를 각오하고 인간은 태여나는 그 순간부터 눈물이라는것을 간직하는것인가. 잠들었던 분노가 그 눈물과 더불어 또다시 폭발하였다. 그이께서는 새새끼처럼 파들파들 떠는 무련이를 품에 꼭 끌어안으신채 눈물을 뿌리며 무덤을 굽어보시였다. 바람이 휙ㅡ 하고 불자 또다시 차디찬 락엽이 볼을 건드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눈물을 씻고 주먹을 불끈 틀어쥐시였다. 금이발을 한 마인택의 능글스런 모상이 불현듯 눈앞에 떠올랐다. 파쟁이라는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우는 민족주의의 질병을 근절하기전에는 누구도 조선의 독립운동에서 리무성의 죽음과 같은 동족상쟁의 비극을 청산하지 못할것이다. (파쟁이 결국은 무성이를 죽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입술을 아프게 깨무시였다. (파쟁이라는 그 더러운 질병에 이제 어느 무성이가 또 쓰러질지 모른다. 천벌을 받을놈들! 력사는 파쟁을 일삼는 모든자들의 죄악을 계산할 때가 있을것이다. 이제는 그 더러운자들과 영원히 결별하자. 그리고 새길을 걷자. 우리가 이미 자기의 신념, 조선의 신념으로 선택한 공산주의혁명의 길을 따라서 억세게 걸어가자!) 그이께서는 무련이와 함께 구뎅이를 메꾸시였다. 무덤앞에 의숙에서 가지고 나온 《고 리무성의 묘》라고 쓴 패말을 박으시였다. 목공창에서 얻어다가 손수 대패질도 하시고 먹글도 쓰신 패말이였다. (참, 성미두 불같더니…) 그이께서는 산 사람과 이야기라도 나누듯 마음속으로 뇌이시였다. 삽자루에 몸을 기대이고 무덤을 내려다보시니 지난날에 대한 가지가지 추억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가슴을 어여놓는다. 수많은 추억들중에서도 첫상봉의 밤에 대한 인상이 제일 강했다. 압록강가의 모닥불옆에서 만났던 무성이… 그 밤에 듣던 그의 목소리는 얼마나 푸수하고 유정하였던가! (무성아, 너는 꿈도 많았지. 그 많은 꿈을 다 쥐여던지고 어쩌면 그리도 빨리 갔느냐?) 김성주동지께서는 무덤가의 잔디떼장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고인과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우리모두가 소원하는 무산사회가 아직도 천리밖에 있는데 어쩌면 그리도 일찍 가버린단말이냐? 그러나 무성아, 네가 꿈꾸고 소원하던 모든것을 우리는 기어이 성취하고야말것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아까보다 더 다부지게 잔디풀들을 움켜잡으시였다.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이는 묵상의 몇초가 지나자 김성주동지께서는 공지변두리에서 삽으로 잔디를 뜨시였다. 무련이는 말없이 그 떼장들을 무덤가에 날라다 설핀 모퉁이를 따라가며 정성스레 입히였다. 어느새 사방이 희끄무레해졌다. 바람도 잦고 구름도 걷히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무련이와 함께 무덤가를 떠나시였다. 먼 앞쪽에서 김리갑이 그이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비감에 잠겨 무겁게 걸음을 옮기시는 김성주동지를 향해 느릿느릿 마주 걸어왔다. 얼굴에는 아직도 푸르끼레한 멍들이 그냥 남아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발길을 멈추시였다. 《왜 나왔소?》 《속이 너무 답답해서…》 김리갑은 다리를 절름거리며 김성주동지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 다음은 서대가어귀에 들어설 때까지 긴 침묵이 계속되였다. 김리갑이 먼저 그 침묵을 깨뜨리였다. 《나는 무성이가 성주하구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가를 잘 알구 있소. 우리들중 누구보다도 성주는 더 가슴이 아플거요.》 《가슴이 막 찢어지는것 같소.》 김리갑은 걸음을 옮기면서 또 말을 꺼냈다. 몹시도 힘들게 꺼내는 말이였다. 《나는 밤새 누워서 생각했소. 나도 성주한테 무성이와 같이 친근한 동무가 될수 없을가…》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 아귀센 손으로 김성주동지의 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그때에야 김성주동지께서는 비로소 눈길을 들어 김리갑의 얼굴을 똑바로 살펴보시였다. 새벽어스름이 아직도 대지우에 서려있었지만 그것은 김리갑의 눈에서 불길이 되여 황황 타오르고있는 뜨거운 열망을 가리우지 못하였다. 그것은 김성주동지께서 오래전부터 기다리시던 열망이였다. 지금 김리갑은 리무성이 섰던 바로 그자리에, 조선혁명의 첫기슭을 떠나 멀리 공산주의라는 리상향을 바라고 나아가는 참신한 새세대들의 대오에 당당히 서려는것이다. 아, 우리의 곁에 리무성이를 대신할수 있는 동지가 한사람 또 생긴다는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리갑이, 그렇게 된다면 정말 얼마나 좋겠소.》 《죽기전에 무성이도 나더러 생각을 바로가지라고 했소. 난 그때 그 말을 무심히 들었소.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자꾸 생각하게 되오. 지금까지는 내 넋이 허튼곳에서 방황하였소. 그래서 박교관만 줄줄 따라다녔소. 그게 옳은 길이 아니였소. 나는 무성이가 무엇때문에 죽게 되였는가 하는걸 온밤 생각하였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애를 볼 면목이 없소.》 김리갑은 무련이의 어깨우에 손을 얹으며 눈물을 지었다. 덤덤히 몇발자국 걸어가다가 격정이 북받쳐서 또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섰던 낡은 터전에다 침을 뱉고 돌아서겠소. 어디라도 좋으니 성주네하구 같이 가겠소.》 《고맙소. 리갑이! 나는 이런 날이 꼭 있을줄 알았소!》 김성주동지께서도 김리갑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으시였다. 동녘이 점점 더 붉게 타올랐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날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새형의 혁명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예비회의를 소집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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