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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21 회 )
18
해질무렵에 박두학이 김성주동지를 찾아 정구장으로 뛰여왔다. 그는 나타나자바람으로 구경군들틈에 서계시는 김성주동지의 손을 끌고 교문밖으로 걸어갔다. 울타리밖에서 손에 얄팍한 소책자를 든 최창걸이가 서성거리고있었다. 《성주, 우린 방금전에 강릉려관앞에서 김찬선생을 만났소. 일전에 <대동민보>에 기사를 썼다는 사람말이요. 서울에서 공산당창건에도 참가했다 하는데… 대단한 인물인것 같소.》 박두학은 늘 하는 버릇대로 한쪽바지주머니에 손을 지르고 주위를 휘휘 돌아보며 흥분된 어조로 운을 뗐다. 접촉을 극력 경계하고있는 학교측의 엄한 지시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도 김찬이 머무르고있는 강릉려관 뒤고방에 가서 세시간동안이나 맑스, 엥겔스에 대한 일화들을 들었으며 그가 직접 집필했다고 하는 소책자 《레닌주의와 조선청년》도 얻어가지고 왔다. 《성주두 한번 만나보지 않겠소?》 《나? 허허…》 석양무렵의 강렬한 해빛때문에 눈을 조프리고계시던 김성주동지께서는 서녘을 등지고 돌아서시였다. 《내 비록 성은 김가가 아니지만 그 선생하구는 특별한 연분이 있단말이요.》 박두학은 팔짱을 지르고 울타리밖에서 왔다갔다하는 최창걸이를 흘끔 돌아보며 우스개소리를 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저절로 웃음이 나가시였다. 《허허, 또 그 연분소리요?》 《그게 연분이래도 이만저만한 연분이 아니란말이요. 그날… <칼 맑스>를 읽다가 뺏긴 운수나쁜 날 그 선생때문에 내가 박교관의 욕을 세동이쯤 들을걸 한동이만 들었단말이요. 내가 한창 욕을 듣는데 김찬선생이 척 교원실에 들어서는게 아니겠소. 손님앞에서야 무슨 체면으로 나를 욕하겠소. 까놓고 말해서…》 《흥, 연분은 무슨 연분이라구…》 입을 꾹 다물고 박두학의 말을 참을성있게 듣고있던 최창걸이 한마디 퉁을 놓았다. 하기는 김성주동지께서도 그 연분이야기는 여러번 들으시였다. 그래도 박두학의 입담은 싫증을 주지 않았다. 들을적마다 매번 다른 감흥을 주군하는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그이께서는 미소를 머금고 수많은 전설과 야화와 패설을 퍼쳐놓은 그의 큰 입을 흥미있게 지켜보시였다. 《그래도 내 연분덕으로 이 친구는 그 김찬선생과 통성까지 하였소.》 《잘도 나발은 분다.》 최창걸은 이렇게 씨까스르면서도 씨물씨물 웃었다. 표정을 보니 박두학의 말이 지어낸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 선생한테 <칼 맑스> 책사건이야기를 했더니 앙천대소하질 않겠소.》 박두학은 다른쪽 바지주머니에 손을 갈아 지르며 말을 계속하였다. 《그리구 군사교관에 대해선 뭐라고 했는지 아오?》 《뭐라던가?》 김성주동지께서 그 말에 호기심이 끌리여 물으시였다. 《<참, 슬픈 사실이요. 칠년만에 만난 친구가 시대의 락오자가 되여 내앞에 나타날줄은…> 그 다음은 뭐랬던가?…》 박두학이 다음 말을 되살리려는듯 기억을 더듬자 이번에는 최창걸이가 입을 열었다. 《동경 류학시절에 친교가 있었던것 같소. 그때를 생각해서 자기는 그들과 합작할 용의를 버리지 않노라고 하더군.》 김성주동지께서는 한쪽 눈섭끝을 우로 치켜올리며 힐끗 최창걸이를 돌아보시였다. 그리고 약간 못미더워하는 어조로 물으시였다. 《합작이라구? 아니 김찬이라는 사람이 정말 그렇게 말하던가?》 《정말이였소. 다른 사람들은 자기네들과 민족주의자들을 물과 불처럼 보고있지만 자기는 그와 견해를 달리한다는거요.》 최창걸의 대답이였다. 《거참, 희귀한 일이로군. 그래서 김찬이 요즈음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그렇게 <정의부>칭찬을 했나?… 어쨌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합작할수 있는것으로 본다는거야 좋은 일이지.》 《그러게말이요. 요즘 숙장선생이랑 그들을 보고 <역적>이니 뭐니 하면서 적대시하고있는 때에 그런 협소한 주의관념에서 벗어나 대결이 아니라 통일단결을 부르짖는다는건 얼마나 다행한 일이요. 그바람에 나는 그 사람한테 호감을 품게 되였소. 그래 갈텐가?》 박두학이 말을 끊고 초조히 김성주동지를 바라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가겠소, 가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겠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품고있는지 알고싶소.》 날이 어슬어슬해지자 비밀독서회성원들은 김찬이가 와서 기다리고있다는 방을룡이네 집으로 향하였다. 언젠가 남만청총의 최봉이도 바로 그 집에 와서 화성의숙 학생들을 상대로 민족주의강연을 한적이 있었다. 최봉은 리론의 대가, 연설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였지만 그날의 강연에서는 이전날 얻던 그런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사이 학생들의 정치적식견에서 그만큼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던것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최창걸이와 함께 맨나중에 의숙을 떠나시였다. 방을룡이네 집 방앞에는 윤기가 즈르르한 김찬의 소가죽구두가 놓여있었다. 김찬은 문가에 들어서는 일행을 향해 환영의 표시로 두팔을 쭉 벌려보이였다. 그의 희멀건 얼굴은 땀에 푹 젖어있었다. 먼저 온 청년들앞에서 열변을 토한 모양이였다. 《어, 왔군!… 어서들 들어오시오! 나는 방금 농촌계몽의 중요성을 해설하던 참이였소. 내 이제 설명을 계속하겠소.》 김성주동지께서는 박두학이와 리무성이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주위의 청년들을 휘둘러보시였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김찬의 이야기에 대한 억제할수 없는 호기심이 비껴있었다. 놋쟁반에 참외를 무드기 담아놓은 두리반이 방한가운데 놓여있다. 쟁반옆에다가는 큼직한 목침을 모로 세워놓았는데 그 목침우의 사기등잔에서는 솜으로 탈아만든 두개의 심지가 동시에 타고있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농촌은 어차피 개척해야 합니다.》 김찬은 땀을 씻고 열변을 계속하였다. 그는 손수건도 량쪽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엇바꿔 사용하였다. 《<농민문제>라는 론문에서 엥겔스선생은 정치주권전취를 위해서 당은 우선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가야 하며 그리하여 농촌에서 유력한 당이 되여야 한다고 하였소. 아주 지당하고 명철한 말씀이요. 이것은 볼쉐위크들이 무엇보다도 로동계급의 가장 친근한 동맹자가 있는 농촌에 깊은 관심을 돌리며 자기의 적극적활동으로써 절대적지지를 받는 유력한 정치적지도자가 되여야 한다는것을 시사하는거요. 로동계급은 농민의 힘을 인입함이 없이 혁명에서 승리할수가 없소. 지난 시기 제2인터나쇼날에 속한 당들은 농민문제에 대해서 아주 랭담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소. 그러나 레닌주의는 농민문제를 프로레타리아독재의 전반적문제의 한부분으로 여기고있소. 로씨야에서의 세차례에 걸치는 혁명경험은 레닌주의의 이 정의가 전적으로 정당했다는것을 증명하였소.》 (그래, 그건 옳아.) 김성주동지께서는 농민문제에 대한 김찬의 해석을 긍정하시였다.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 우리 나라에서야 농민문제가 더욱 중요하지.) 좀 들뜬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김찬의 해설은 왕정복고시대니, 보나빠르트니, 남북전쟁이니 하는 부르죠아혁명사강의보다는 더 생신하고 흥미있었다. 김찬은 정교한 세공을 가한 금속제갑에서 가치담배 한대를 꺼내여 꼬나물고 절컥 소리가 나게 뚜껑을 닫은 다음 말을 계속하였다. 《한때 꼴챠크와 제니낀이라는 백파도당이 씨비리와 남방으로부터 쳐들어올 때 농민들은 반혁명의 편에서 백파들을 지지하고 옹호하였소. 그것은 볼쉐위크들이 자기들한테서 고정가격으로 곡물을 가져가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때문이요. 농민이 백파를 지지함으로써 볼쉐위크들한테는 아주 어려운 정황이 조성되였더랬소. 그러나 그후 농민들은 씨비리와 우크라이나에서 꼴챠크의 지배를 체험하고나서는 곧 볼쉐위크들의 편으로 넘어왔소. 왜냐하면 자본가의 편으로 넘어가면 자기들이 이전날처럼 지주들한테 팔리우리라는걸 알았기때문이요. 농민이 어느쪽에 서는가에 따라서 혁명은 이렇게 유리해질수도 있고 불리해질수도 있으며 지어 승리할수도 있고 실패할수도 있소.》 김찬의 코구멍에서는 굵은 연기타래들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그의 해박한 지식이 시위되는 이 방안에서는 어쩐지 그 연기타래조차 별로 신비스러워보이였다. 《혁명이라는게 참 리치가 묘하긴 묘하구만요.》 김찬의 자유분방한 구변과 지식에 심취되여 류달리 큰 그의 두개골을 줄곧 쳐다보던 박두학이 경탄조로 말했다. 《혁명도 하나의 거대한 예술이니까.》 리효가 그의 말을 시인했다. 그러자 입을 다물고있던 청년들이 참지 못하고 술렁대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고개를 쳐들고 김찬을 바라보시였다. 《선생님, 농민을 혁명에 인입함이 없이 로동계급이 승리자가 될수 없다고 한 선생님의 주장에는 저도 공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도 여러번 의견을 나누어보았습니다. 정치적동맹자, 혁명의 동력과 관련된것은 우리들이 가장 관심하고있는 문제입니다.》 《아, 그렇소? 아니 동무들의 맑스주의적소양이 벌써 그런 수준에까지 이르렀단말이요? 장하오. 대단하오. 내 오늘밤 동무들과 만나기를 잘한것 같구만. 공산주의를 질시하는 화성의숙에 이처럼 진보적인 볼쉐위크적후비집단이 있다는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요.》 김찬은 한입가득 삼켰던 마지막 연기뭉테기를 허공중에 뿜어내친 다음 참외를 한쪽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지없이 살틀한 표정으로 김성주동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동무들은 혁명의 동력과 관련된 어떤 문제를 토론해보았소?》 《어떤 계급과 계층이 로동계급의 동맹자가 될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론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 ㅡ그래 어떤 결론에 도달하였소?》 《동력문제를 론의하기전에 우리는 먼저 조선혁명의 당면과업에 대해서 토론해보았습니다. 혁명앞에 어떤 과업이 나서는가에 따라서 력량편성이 이렇게도 될수 있고 저렇게도 될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국강토에서 일제를 타도하는것이 조선혁명의 당면과업이라는것은 선생님도 잘 아시는 문제입니다. 그런것만큼 이 혁명에서는 일제를 치는데 리해관계를 갖고있는 모든 계급과 계층이 다 로동계급의 동맹자가 될수 있고 혁명의 동력이 될수 있다는 견해에 도달하였습니다.》 《아! 아! 그건 심한 탈선이요.》 김찬은 골을 흔들며 성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학생들의 견해대로 하면 최동오나 박인석이나 또 멀리로는 김좌진이나 원석봉이 같은 완고한 민족주의자들도 혁명의 동력으로 될수 있다는건데 그렇게는 될수 없소. 우리의 혁명대오를 꾸리는데서 비프로레타리아트적요소나 비볼쉐위크적요소는 용납될수가 없소. 우리는 오직 로동계급과 농민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우는 무산계급의 힘으로 혁명을 수행하게 될것이요.》 숨을 죽이고있던 장내가 갑자기 술렁술렁 끓었다. 《아니 그럼 그 말씀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량립할수 있고 합작할수 있다고 한 선생님의 본래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방 한쪽구석에 올방자를 틀고앉아있던 최창걸이 김찬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어스레한 등잔불의 조화로 이마의 허물자리는 더 깊숙이 패인것처럼 보였다. 김찬은 천정쪽으로 얼굴을 건뜩 치켜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창걸군은 그 말을 진정이라고 믿었소? 핫하하… 참 순진하구만. 벌써 일곱해전에 왜놈들앞에 투항한 부르죠아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어떻게 합작한단말이요. 그런 가능성은 지금도 있을수 없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것이요. 내가 합작할수 있다고 표방해나선건 화전땅에서 민족주의자들의 감정을 사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패를 마련하려는것이였소. 민족주의세력이 강한 이 고장에다가 공산주의적지반을 닦으려면 당분간 민족주의자와의 마찰을 피해야 한단말이요. 제군들, 그렇지 않소?》 만장은 침묵으로 그 물음을 받아들이였다. 다만 박두학이만이 찬탄의 뜻이 비낀 웃음을 담고 김찬을 쳐다보았을뿐이다. (이사람 역시 아버지가 이미 일생동안 걱정하셨고 또 내자신도 그것때문에 숱한 마음속고통을 느껴온 그 저주로운 분렬병, 파쟁병에 걸린 그런 류행식 맑스주의자가 아닐가? 우리의 혁명에서 모든 비프로레타리아적요소를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한 저 사람의 지론이 과연 얼마만큼한 현실적가치를 가질것인가? 그 주장이 조선공산주의자들 전부의 의사를 대변하는 리론이라면 우리가 그들에게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수 있을것인가.) 김성주동지께서는 암담한 생각이 드시여 한동안 머리만 쓸어넘기시였다. 김찬의 주장은 일본제국주의라는 강적과 맞서고있는 구체적인 조선의 산 현실, 민족의 각 계급과 계층의 지향을 무시하는 터무니없는 리론이였다. 그것은 맑스ㅡ레닌주의가 가르치고있는 혁명의 보편적원리에도 저촉되는 일종의 궤변이였다. 《선생님, 그렇다면 한가지 물어봅시다.》 그이께서는 숙였던 머리를 쳐들고 조용히 말씀을 하시였다. 김찬은 눈빛이 질리면서도 호기있게 대꾸하였다. 《물어보오.》 《내가 살던 무송에는 남태겸이라는 양조업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독립운동자들에게 자금도 여러번 대주고 학교후원도 특별히 잘하고있습니다. 조선에서 온천을 운영하다가 왜놈에게 그 경영권을 빼앗겼기때문에 일제를 미워하는 사상도 강합니다. 선생님의 견해에 의하면 이 사람도 비프로레타리아적요소겠는데 물론 로동계급과 한진지에 설수 없겠지요?》 《물론 그렇소! 그 양조업자도 일시적으로는 경향이 좋을수 있지만 혁명의 결정적시기가 도래하면 다 적의 참호에 어푸러질수가 있소. 조선독립을 가장 열렬히 고창하던 리광수나 최남선이와 같은 사람들의 운명이 이걸 실증해주고있단말이요. 양조업자가 아무리 군자금을 잘 내고 학교후원을 잘한다 해도 부르죠아는 어디까지나 부르죠아로서 남아있게 되는 법이요. 어쨌든 민족주의자들과는 한바리케트에서 혁명을 할수가 없소. 어떻소, 그렇지 않소?》 《그럴수 없습니다. 물론 민족주의자들가운데서 변절자나 개량주의자가 많이 배출된건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 놀라울것도 새삼스러울것도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변절이나 타락은 그들의 계급적제한성으로부터 스스로 초래되는 결과이기때문입니다. 원래 혁명과 반혁명의 사이에서 언제나 동요하는 립장에 서있는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흔들리여 개량주의로 굴러떨어지거나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되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하여 민족주의자전체를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무엇때문에 부등부등 밀어버리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무시할수 없는 애국적잠재력이 있습니다. 프로레타리아트는 응당 이 잠재력을 자기의것, 혁명의것으로 만들어야 할것입니다. 반일선상에서 독립의 날을 그리며 모대기는 애국적인 인테리나 상공인들이나 종교인들을 비프로레타리아트적인 요소라고 하여 반혁명의 편에 모조리 차돌릴수는 없지 않습니까?》 김성주동지의 말씀도 저으기 열기를 띠였다. 김찬은 완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성주군은 그 모든 잡동사니들을 프로레타리아트의 바리케트에 쓸어넣겠다는거요? 아니요. 그건 우리 혁명대렬내에 숱한 에쎄르(소부르죠아민족주의)들과 까제트(자유주의적부르죠아지)들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오. 레닌도 프로레타리아혁명의 결정적시기가 도래하자 쏘베트주권을 세우기 위하여 부르죠아지의 마지막 최좌파인 에쎄르들과 멘쉐위크들을 주권에서 몰아내였소. 조선혁명은 로농대중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수 있다는걸 알아야 하오.》 김찬은 이래도 반박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라는듯이 빙그레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락수물처럼 흘러내리였다. 그는 와이샤쯔깃을 터치고 넥타이도 목에서 아예 풀어내리였다. 그에게는 진종일 열변을 토해도 눈만 꺼벅거리는 저 버들골이나 삼밭골의 까막눈이 농부들보다는 반응도 예민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리해도 있는 이 청년들과 상대를 하는것이 훨씬 더 신바람이 난 모양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공허한 말마디들과 들뜬 숨결로 꽉찬 이 방에서 당장 뛰쳐나가고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저고리의 목단추를 터치시였다. 《선생님의 주장이 진리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민족주의자들이 운영하는 화성의숙에서 배우고있는 우리들하고는 무엇때문에 상종하십니까? 우리와 함께 공산주의적리상이나 로동계급의 위업에 대해 상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우리를 만나려고 결심하신것은 비록 민족주의자들이 운영하는 군관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지만 공산주의사상의 신봉자들이라고 보았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인테리니, 상공인이니, 종교인이니 하는 간판만 보고 <이것은 우리 편이 아니다.>하고 무작정 밀어놓을수 있겠습니까?》 《…》 김찬은 입을 다물고있었다. 김성주동지의 질문에 급소를 들이찔리웠던것이다. 그는 헤여날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였다. 과연 이 도고한 《리론가》는 무엇때문에 화성의숙학생들과 만나보기로 결심하였던가. 그들을 프로레타리아적요소라고 인정해서였던가? 아니면 그들의 준비정도를 가늠해보기 위한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던가? 도대체 그는 화성의숙청년들을 프로레타리아트나 비프로레타리아트라는 기준에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저 그 끌끌한 열혈청년들을 민족주의독아에서 떼내여 《화요파》의 세력권내에 흡수시키자는 종파적인 타산밖에 한것이 없었다. 결국 김찬은 자신의 행동으로써 이 방에 모인 학생들을 프로레타리아적요소로 인정한셈이다. 혼돈이다. 완전한 모순이다. 이 모순을 무슨 근거로 합리화할수 있겠는가? 김찬은 자기가 능히 이 혼돈을 수습할수 있으나 잠자코 있는것은 상대할나위도 없는 애된 청년들앞에서 일대일의 론전을 벌리기가 싫기때문이라는듯 자신을 위안하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론리에 궁해빠진 자기의 초라한 몰골앞에서 벗어날길이 없었다. 뜻하지 않은 우연이 그를 이런 난국에서 구원해주었다. 그가 적중한 대답을 찾느라고 연거퍼 담배만 빨아대고있을 때 손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였던것이다. 누구인가 상반신을 안으로 쑥 들이밀고 다급하게 웨치였다. 《친구들, 비상소집이요!》 너무나도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여서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가려볼 계제도 없었다. 청년들은 일제히 김성주동지를 쳐다보았고 그이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받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오로지 김성주동지께서만이 그 목소리의 임자가 김리갑이라는것을 감촉하고계시였다. 걷잡을수 없는 소요와 불안이 갑자기 온 방안을 휩쓸었다. 청년들은 김성주동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분전까지 론쟁의 분위기가 팽배하던 방안의 질서와 정숙은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되였다. 차라리 그렇게 된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자, 제군들, 래일 다시 이 방에서 만납시다!》 김찬이 문밖까지 따라나오며 이런 말을 했으나 김성주동지께서는 그 말을 듣지 못하고 벌써 뜨락을 나서고계시였다. 《그 선생이 왜 성주의 질문을 받고 아무 말도 못할가?》 댓걸음 뒤에서 들려오는 박두학의 말이다. 《왜는 왜야, 성주가 정통을 찔렀으니까 숨이 막혀 말을 못한게지.》 망치로 못대가리를 치듯이 오금을 짓누르는 리무성의 대답이다. 《그래두… 맑스주의를 통달했다는 그 대가가 말이 막힐수 있을가?》 《대가? 흥, 프로레타리아트와 비프로레타리아트밖에 모르는 대가! 래일아침이면 그 대가도 비프로레타리아트인 강릉려관에서 비프로레타리아 아주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비프로레타리아 숭늉으로 양치질을 할게요.》 《하긴 그 선생 리론이 너무 과격해.》 뒤에서 이런 말이 오가고있을 때 옆에서는 리효와 계영춘이 소곤소곤 불안을 나누었다. 《여, 영춘이, 무슨 비상소집일가?》 리효의 질문이였다. 《공산당선언》을 압수당한후 교원실에 불려가 박인석에게 졸경을 치른 그는 이 밤의 비상소집에 대하여 제일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있었다. 《글쎄…》 계영춘의 대답은 뜨뜨미지근하였다. 《혹시 우리가 김찬이한테 온걸 냄새맡고 비상소집을 한게 아닐가?》 《그럴수도 있지.》 《비상소집이라고 소리친건 누구야?》 《몰라.》 그다음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대가쪽으로 걸어가는 발자국소리만이 저벅저벅 어둠을 누비였다. (믿을것이 없구나. 박인석이도 그렇고 최동오도 그렇고…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김찬이까지 저런 망발을 하고있으니 이제는 우리 조선의 민중이 어떤 사람들의 입을 쳐다보아야 하는가?) 김성주동지께서는 숨을 길게 내그으며 허공을 쳐다보시였다. 별도 없고 달도 없는 캄캄한 하늘이 머리우에 무겁게 드리워져있었다. 별이 없는 조국, 달이 없는 조국, 향도성이 없는 조선의 1926년을 인정하신다는것은 사실상 괴롭고 슬픈 일이였다. 하지만 괴롭고 슬프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시지 않으면 안되였다. 차라리 그렇게 백지상태로 돌아가는것이 미래를 위해서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별도 없는 하늘, 빛이 없는 밤을 각오한 길손은 머리우에 눈을 팔지 않고 자기 손으로 어둠을 밝힐 홰불을 마련한다. (우리는 우리의 두뇌와 힘으로 조선이 나아갈 길을 찾을것이다. 그 어떤 때에도 물들지 않은 새세대들의 심장으로 조선이 쳐다볼 홰불을 만들것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캄캄한 밤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시였다. 심장을 아프게 잡아비틀던 절망이 서서히 가라앉고 마음은 이상스러울만치 가벼워지셨다. 화성의숙앞거리였다. 안개속에 머리를 풀어헤치고있는 스무나무잎사귀들사이로 기숙사건물이 희끄무레 들여다보이였다. 교실에서는 누르스름한 불빛이 가늘게 새여나왔다. 칠판앞을 성급하게 왔다갔다하는 그림자가 창문에 얼른거리였다. 《이쪽으로, 교실로…》 현관문앞에서 김리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김성주동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빠른 말로 속삭이였다. 《벼락이 떨어질것 같소. 김찬이한테 갔다고 야단들이요. 아마 누가 고자질을 한것 같소.》 그리고는 학우들을 앞세우고 바삐 교실로 들어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창문쪽의 이빠진 자리를 찾아 소리없이 앉으시였다. 학생들이 기침소리도 없이 교탁쪽을 주시하고있었다. 교탁우에서는 초가 석대나 타고있었다. 랭랭한 살기가 한가득 교실에 떠돌았다. 숙장은 교탁앞에 서있고 박인석군사교관은 창문턱에 기대여섰다. 초불빛에 드러난 숙장의 눈빛은 전에없이 댕댕하였다. 《리효!》 이마빡이라도 뚫을것 같은 그의 눈길이 마침내 리효의 얼굴에 멎었다. 리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찬이한테는 왜 갔는가? 누가 가라던가?》 숙장의 말투는 서늘하고 위압적이였다. 《제가 가고싶어서 갔습니다.》 리효는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거기 가서 뭣들 했는가?》 《시국강연도 듣고 어떻게 하면 조선독립을 빨리 하겠는가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독립이 빨리 된다고 하던가?》 《…》 리효는 말문이 막힌듯 고개를 숙이였다. 방안의 중압은 그에게로 쏠리였다. 그때 박두학이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리효의 대답을 대신하였다. 《우리보고 선생님들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많이 하여 훌륭한 독립군간부가 되라고 했습니다.》 《<아브로라>를 타잔 말은 안하던가?》 《그런 말은 안했습니다.》 그때 박인석이 박두학이쪽을 향해 꽥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 두학이, 나와! 김찬이한테 갔던 학생들은 모두 나와!》 여섯명의 청년들이 동료들쪽을 마주 향해 교탁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군사교관의 눈총은 여섯학생들을 차례로 더듬다가 박두학이한테로 쏠리였다. 《박두학, 그렇게 스승들을 속이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 그는 김찬이한테 분풀이를 못한 몫까지 합쳐 재차 소리쳤다. 《저번날 <칼 맑스>책을 보다가 들켰을 때 우리가 얼마나 당부했는데 또 그 모양이야. 그때 관대히 용서해주었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그게 뭐야. 그 사람의 뒤꽁무니는 왜 줄줄 따라다니는가말이야! 대답해보란말이야!》 교관은 주먹으로 창턱을 쾅 쳤다. 박두학은 왕청같은데를 보며 눈을 꺼벅꺼벅하였다. 곤경에 처하거나 난처한 립장에 빠질 때면 꺼벅거리는 그 눈이 그의 감정을 잘 위장해주었다. 《무성이, 창걸이… 대답해보란말이야!》 박인석의 고함소리는 계속되였다. 《음,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최동오는 한숨을 쉬였다. 언제나 윤기가 꺼질줄 모르던 그 이마가 오늘은 재를 뒤집어쓴것처럼 뿌얘보인다. 불이 일던 눈빛도 뿌얘지고 낯빛도 뿌얘진다. 숙장은 자신의 몸을 지탱해주고있는 의지가 덜컹 빠져달아나는것 같은 허탈감을 느끼며 애꿎은 이마만 연송 쓸었다. 그는 어쩐지 세상만사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교원경력을 가지고있는 그는 오늘 또다시 자기의 믿음을 저버린 제자들과 맞다든것이다. 지금 교탁앞에 서있는 여섯 청년으로 말하면 숙장이 가장 아끼고 신임하는 의숙의 기둥들이다. 그들은 모두 한다하는 학생들로서 장차 문무를 겸비한 간부가 될수 있는 재목들이였다. 그런데… (이들이 왜 점점 이 모양이 돼가누?) 최동오는 교탁 한쪽모서리에 맥없이 팔굽을 얹었다. 그리고는 풀기없이 중얼거리였다. 《그래, 처벌을 받아야 정신들을 차릴텐가?》 여섯학생은 침묵으로써 그 물음에 대답하였다, 그때 교실뒤쪽에서 김리갑이 일어섰다. 《숙장선생님, 한번만 용서해주면 좋겠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 소리를 듣자 머리를 번쩍 쳐드시였다. (용서?) 그이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김리갑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하실수 있었다. 그러나 《용서》라는 그 말만은 용납하실수 없었다. 《리갑이, 그런 동정은 바라지 않소. 우리가 무얼 잘못했게 용서를 빈단말이요?》 그러자 최창걸이도 그이의 말씀에 이어 김리갑을 노려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 《용서받을 일도 없고 용서해줄 사람도 없소. 우리가 잘못한건 김찬이같은 사람한테서 무슨 유익한 소리를 들을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것밖에 없소.》 김리갑은 무엇인지 더 말하려고 헛되게 입술을 떨다가 팔을 홱 내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박인석이 뒤에서 김성주동지의 팔굽을 건드렸다. 《성주, 이리 좀 오우!》 교관은 두손을 옆구리에 얹은채 출입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김성주동지께서 말없이 밖으로 따라나가시였다. 《성주, 오늘은 내 성주에게 좀 이야기를 해야겠소.》 박인석은 교사건물에서부터 대여섯발자국쯤 떨어진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김성주동지를 돌아보았다. 심장의 박동소리도 가려들을수 있는 밭은 거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거칠게 몰아쉬는 교관의 목소리를 가늠해들으며 그의 어깨너머로 먼 하늘을 잠자코 바라보시였다. 《학생들이 저지경이 된데 대해서 성주는 책임을 크게 느껴야겠소.》 교관은 격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떼였다. 그래도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자코 계시였다. 가슴속에서는 노여움과 안타까움이 한데 엉켜 부글부글 끓고있었지만 그이께서는 꾹 참고계시였다. 교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를 다 들어보실 작정이였다. 박인석은 말을 계속하였다. 《성주가 화성의숙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기뻤더랬소. 내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친근한 감정을 품고 성주의 입학을 특별히 환영한 리유에 대해서는 성주도 잘 알고있을것이요. 지금도 나는 우리 학교에 성주와 같은 인재가 있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고있소. 그런데 어제날까지만 해도 독립 하나를 위해서만 매진하던 학생들이 성주가 온 다음부터 새 사조니 뭐니 하고 밀려다니면서 교풍을 어기고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있소. 바로 그 선두에 성주가 서있단말이요. 자기 동무들이 왜지밭으로 가면 가지 말라고 막아서야 할 성주가말이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어쩐지 숨을 쉬기가 가빠지는것을 느끼며 오른손에 들었던 모자를 왼손에 바꾸어쥐시였다. 그 언제건 한번은 꼭 오고야말리라고 예측했던 불안스러운 대결의 순간이 마침내 오고야만것이였다. 교관이 박두학이한테서 《칼 맑스》라는 책을 압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이께서는 처음으로 그런 대결을 예감하시였었다. 그가 비록 림소영의 애인이며 자기자신이나 리무성이를 그 누구보다도 극진히 돌봐주는 교원이긴 하지만 어차피 오늘의 대결은 피할수가 없는것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정신을 가다듬으시였다. 《선생님, 저나 저의 동무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구태여 숨기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마치 저때문에 의숙의 학생들이 새 사조를 따르는것처럼 말씀하시는데 그건 그럴수가 없습니다. 사상이란 원래 각자의 신념에 의해서 선택되는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모두다 자신의 요구와 결심에 의해서 스스로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있는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 시대적추세입니다.》 박인석은 성급히 손으로 공기를 내리그었다. 《아니요. 사상은 물론 각자가 선택하는것이지만 그것을 전파하는데서는 어느때나 선도자가 있는법이요. 성주는 지금 그런 선도자가 되고있단말이요.》 《설사 그런 선도자가 된다고 해서 나쁠것이야 없지 않습니까. 새 사상을 선도하는 일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박인석은 무슨 말인지 하려고 격하게 머리를 내저었으나 인차 입을 열지 못하고 《음》, 《음》하며 연방 신음같은 소리만 뇌이였다. 《알겠소, 알겠소, 음… 그러니 우리들은 이미 다른 길을 걷고있단말이지. 참, 유감스러운 일이요.》 교관은 이런 말을 남기고 씽하니 교실로 들어가버리였다. (그래,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있다. 갈림길을 걷는 사람들은 반드시 갈라지기 마련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창문으로 새나오는 숙장의 성난 목소리를 듣자 곧 교실로 들어가시였다. 교실의 공기는 더 살벌해졌다. 최동오는 마침내 여섯학생을 칠판쪽으로 돌아서게 하였다. 그런 다음 자기 말의 무게를 강조하려고 애쓰면서 쨍쨍한 고음으로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의숙이 지닌 본도로부터 출발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동족상쟁을 선동하며 민족의 불화를 추동하는 공산사상을 숭배하지 말것과 그와 접촉하지 말데 대하여 재삼 당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들은 오늘 <화요파> 거두의 한사람인 김찬이를 만나 그와 불측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전날 있은 <칼 맑스>책사건이나 <공산당선언>사건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학교측의 지시를 무시하고 이처럼 경거망동을 한 학생들에 대하여 부득불 엄정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처벌을 받은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것입니다. 제군들, 처벌을 받으면서까지 공산주의사조를 따르겠다는 학생들은 서슴없이 나서시오!》 최동오는 칼날같은 시선으로 여섯청년을 둘러보았다. 자기 말의 효력을 과신하는 사람들만이 가질수 있는 그런 시선이였다. 대렬은 잠잠하였다. 그러나 숙장자신도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학생들도 안도의 숨을 길게 내뿜고있을무렵에 교실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김성주동지께서 대렬 한발 앞에 나서시였던것이다. 대오는 걷잡을수 없는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리무성, 최창걸, 박두학, 리효, 계영춘, 리제우… 학생들은 련이어 김성주동지의 량옆에 어깨를 맞대고 나섰다. 최동오는 자기를 떠받치고있는 땅이 마구 뒤흔들리는것 같은감을 느끼며 정기가 날아가버린 눈망울로 멍청하니 교단앞을 굽어보다가 《좋소! 좋소!》 하고 맥락도 닿지 않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19
김시우총관은 집을 나오자 곧장 화성의숙으로 향하였다. 방금전에 화성의숙에서 벌어진 비상회의소식을 듣고 앉아있자니 분기가 치받쳐 견딜수가 없었다. 의숙에서는 조성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비상회의를 열고 《불온학생》들에 대한 처리대책을 토의하였다. 장시간의 옥신각신끝에 결국 출학을 당하더라도 새 사조를 따르겠다고 표명해나선 여섯 학생들을 일거에 집단출학시키자는 박인석의 제안은 보류되고 그들중에서 제일 말썽이 많은 리효에게 시범적으로 정학 3개월이라는 처벌을 주어 학교운영 자금모연에 내보내자는 숙장의 제의가 채택되였다. 또한 그 말썽 많은 책의 출처가 총관의 서재라는것이 반박할수 없는 사실로 확인되였을 때 최동오는 다름아닌 김시우가 《불온학생》들의 배후《조종자》라는 어마어마한 딱지를 서슴없이 붙이였다. 그는 격노하였다. 집에 《불온학생》들을 끌어들였다는것은 언어도단이다. 그의 집에 다니는 학생들은 다 품행도 단정하고 학과실력도 우수하고 나라를 찾으려는 정치적각오도 높은 학생들이다. 총관은 은근히 이런 학생들이 자기 집에 드나드는것을 자랑으로 생각해왔다. 그들에게 《불온학생》이라는 딱지틀 붙인다면 화성의숙은 온통 불량학생천지가 될것이다. 책으로 말해도 그렇다. 그 《공산당선언》은 김성주동지께서 손수 제목을 보고 서가에서 뽑아가신것이다. 총관자신은 《공산당선언》의 내용을 이야기해준적도 없고 또 읽으라고 추동질한적도 없다. 설사 읽으라고 권고했다면 또 뭐라는가? 읽으라고 찍어낸 책을 학생들이 좀 읽는데는 어쨌단말인가? 그 책을 읽은것때문에 조선독립운동이 당장 기울어질 형편이 되였는가? 화성의숙이 망했는가? 최동오가 망했는가? 그는 앞에서 누가 마주 걸어오는지도 모르고 강마른 표정을 이지러뜨리고 씽씽 걸음만 다몰아쳤다. 소책자 《임금로동과 자본》을 손에 드신 김성주동지께서 그의 앞에 다가오시였다. 새로운 사회주의서적을 빌리려고 그이께서는 총관의 집으로 찾아가시는길이였다. 《내 아네, 내 다 들었네.》 김성주동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기도전에 김시우는 밑도끝도없이 말했다. 《아저씨, 뭘 그러십니까?》 《숙장이 이번에는 <공산당선언>을 또 빼앗았다면서?》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리효에게 정학 석달이라는 처벌을 주어 모연공작에 내보낸다면서?》 《예? 처벌이라구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디까?》 《방금전에 들었네. 내 이제 의숙에 가서 그 최숙장과 좀 결판을 내야겠네.》 정맥이 퍼렇게 일어선 김시우의 관자노리에서는 금시 피가 뛰는 소리까지 들리는듯하였다. 《아저씨, 진정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판은 와자자하게 벌려놓았지만 우리를 꺾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에 강도가 많지만 사상을 강요하거나 억제하는 강도가 제일 파렴치한 날강도일세. 그 사람들을 내 그저 두지 못하겠네.》 김시우는 기가 돋아서 그냥 펄펄하였다. 《아저씨, 그만두십시오. 이제 아저씨까지 가서 싸움판을 벌리면 저 의숙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선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싸움질로 민족의 망신을 다 시키고있는데 이국땅에서 조선사람끼리 싸우는건 정말 가슴이 아파서 보지 못하겠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김시우의 앞을 막으며 간절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김시우는 그제야 고집을 더 쓰지 않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였다. 《그러세. 내 그만두겠네. 나두 민족의 망신을 시키는건 원하지 않네.》 《아저씨, 그 일은 우리한테 맡겨주십시오. 책도 우리가 찾아내고 숙장도 우리가 만나겠습니다.》 《한번 만나보게. 그런 불의를 그저 받아들여서는 안되네.》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시후 총관네 집에 가서 《토지문제》라는 책을 빌려가지고 직방 화성의숙으로 향하시였다. 리효가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분이 치밀어 잠시도 견딜수 없으시였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것이 어떻게 죄로 될수 있겠는가.) 그이께서는 무거운 생각에 잠겨 걸음을 다우치시였다. 지금껏 숙장은 아량도 있고 인정도 있는 지성인으로 인정돼왔다. 사람을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크게 구분할수 있다면 최동오는 나쁜 사람의 계렬에 포함시킬수가 없을것이다. 하지만 오늘 김성주동지께서는 그 계선이 결코 인정이나 덕망만으로 그어지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시게 되였다. 숙장이 지금껏 보여준 호의란 민족주의라는 완고한 사상의 울타리안에서만이 허용되는 인정이였다. 오늘 그 썩고 병든 울타리를 건드리자 숙장은 딴사람처럼 돌변하였다. 박인석이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겉으로는 보이지 않던 사나운 발톱이 있다. 이미 그 발톱에 박두학이 긁히였고 리효가 긁히였고 림소영이 긁히였다. 다음 차례는 김성주동지자신과 리무성이나 최창걸이나 계영춘이와 같은 비밀독서회원들이다. 장차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의 넋이 그 발톱에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나는 그러한 인정의 포로가 되지 않을것이다. 우리의 사상은 인정의 멍에가 될수 없다. 사람에게서 가장 값지고 귀중한것이 사상인데 그 사상을 이단시하는 인정이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비록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지만 나는 저 사람들의 사상과 결별해야겠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단호히 교원실문을 열어제끼시였다. 최동오의 열에 뜬 얼굴이 서탁우에서 번쩍 쳐들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군사교관 박인석의 날카로운 눈길이 출입문쪽으로 날아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성큼성큼 숙장의 서탁앞으로 다가가시였다. 최동오는 초점없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그이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왔는가고 묻지도 않았고 어제일은 참 섭섭하더라고 화풀이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다가 괴로운듯이 외면을 하고 초들초들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추길뿐이였다. 측은한 생각이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선다. 그렇지만 김성주동지께서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결연히 말씀을 떼시였다. 《숙장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의숙에 입학한 저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항상 여기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어제일은 그게 뭐요? 그렇게 배은망덕한 법이 어디 있소? 성주가 그렇게 나올줄은 정말 몰랐소!》 최동오는 평소의 온건하고 조용한 숙장답지 않게 성급히 그이의 말을 가로채며 음성을 높이였다. 그는 어딘가 허튼곳에 눈을 박으면서 의자등받이에 모재비로 몸을 기댔다. 《정말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셈이지. 성주 일이 정말 섭섭하오!》 박인석이도 기가 막힌듯이 입을 쩝쩝 다시였다. 《설사 새 사조를 따를 마음이 있더라도 스승들의 교권을 보장해주는 의미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말았어야지.》 최동오가 재차 불평을 토했다. 《그렇지만 달리는 행동할수 없었습니다. 저는 새 사조를 따르는것이 배은망덕으로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배우는것이 죄가 될수는 없습니다. 원래 새것을 배워주는데가 학원이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 새것을 섭취하기 위해 화성의숙에 온 청년들입니다. 그런데 학교당국은 왜 그처럼 새 사조를 경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온몸의 피가 연소되여나오는것 같은 김성주동지의 절절한 말씀이였다. 최동오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총기있어보이는 눈에는 애원하는듯도 하고 달래이는듯도 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사람, 그거야 공산선전이 민족의 불화를 조장시키고 동족상쟁을 유발시키기때문에 그러는거라고 내가 몇번이나 말하던가.》 《선생님, 공산주의라는 사조가 들어오기전에도 우리 나라에는 동족상쟁이 있었고 계급들사이의 불화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인민들이 통치자들을 징벌하는 싸움도 있었고 통치자들이 인민들을 살륙하는 싸움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조선독립을 한다고 해도 인민들이 왜놈들과 한짝이 되여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파, 매국자들을 반대해서 벌리는 싸움은 피할수가 없습니다. 숙장선생님이나 교관선생님 자신도 독립군시절에 이미 많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지 않았습니까.》 최동오는 서탁끝에 놓인 주전자를 끌어당겨 고뿌에 물을 따랐다. 물을 두어모금 마시고는 고뿌를 내리고 입술을 감빨았다. 그때 박인석이 대화에 끼여들었다. 《이것보, 성주! 숙장선생이 말하는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요.》 《그건 선생님들이 잘못 생각하고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의 모든 애국자들과 지사들과 인민들이 한뜻으로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해방된 조국땅에 착취와 압박이 없는 행복한 사회를 세우자는것이 바로 우리들의 지향입니다. 재산의 유무나 신앙의 차이, 당파의 소속이 조국광복의 위업을 이룩하는데 결코 장애로 될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어떤 당파의 성원이기전에 먼저 조선사람이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향과 념원 밑에 공산주의를 연구하고있을뿐입니다. 리효도 이런 립장에서 <공산당선언>을 읽었을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리효를 어떻게 처벌했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열정적으로 팔을 흔들며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대결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하시였다. 《그건 아주 경한 처벌인줄로 아오. 출학을 시키지 않은게 다행이지.》 박인석의 대답이였다. 최동오는 고집스럽게 입을 비쭉 내밀고 서탁우에 놓인 사무철에 눈길을 떨구었다.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 거기에는 의숙학생들의 명단이 씌여있었다. 어떤 이름자에는 붉은색연필로 둥글둥글하게 표식을 한 흔적들이 있었다. 그옆에 문제의 《공산당선언》이 놓여있었다. 최동오는 한참동안 그 학생명단과 《공산당선언》을 번갈아 굽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그림앞으로 다가갔다. 김성주동지께서 의숙에 입학하시던 날 김시우가 그렇게도 까근까근히 들여다보던 담채화ㅡ층암절벽에 붙어 비바람과 싸우면서도 억세게 자라고있는 소나무의 화폭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날 그 그림을 보면서 간고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꿋꿋이 자기의 절개를 지켜나가는 산 인간을 련상하시였었다. 그리고 이런 화폭을 즐기는 숙장의 취미를 아주 고상한것이라고 생각하시였다. 그런데 지금 그 그림앞에서 숙장은 오만상을 찡그리고 바람에 불리여 휘친거리는 소나무를 자기자신한테 견주어보고있었다. 얼마동안 움직이지 않던 숙장이 결패있게 서탁쪽으로 되돌아섰다. 《설사 공산주의가 옳은것이라 하더라도 리효에 대한 처벌은 합당한것이였소. 학교당국이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게 학생의 도리지.》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런 교권을 인정하실수가 없었다. 《처벌을 한다고 리효가 개심하지는 않을것입니다. 진리를 믿는 사람은 처벌이 두려워 그 진리를 쥐여뿌리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사상은 총칼이나 철쇄로써도 억누를수 없습니다. 지난날의 력사가 잘 말해주고있지 않습니까.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단두대에 오르고 교수대에 오르면서도 언제나 자기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설사 백번의 처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공산주의리념을 옹호하고 고수하는 길에서 물러서지 않을것입니다.》 《그만두! 나는 어쩐지 성주가 아버지의 뜻과는 다른 길로 나가고있다고 생각되오.》 최동오는 한숨을 푹 내쉬였다. 《선생님, 그런 우려는 마십시오. 아버지가 원하시던 길이 바로 이 길이였습니다. 저는 바로 이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숙장은 자기 손으로 《공산당선언》을 김성주동지의 앞에 밀어보냈다. 그리고는 담화가 끝났다는 표식으로 군사교관에게 무슨 실무적지시를 주기 시작했다. 박인석은 무슨 말인지 하려고 김성주동지를 치떠보다가 단념하고 머리를 돌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교원실을 나서시였다. 송화강쪽에서 리무성이 달려와 그이의 팔을 무작정 잡아끌었다. 《성주, 리효가 공작지로 떠나겠다오. 지금 나루터에서 기다리고있소.》 성남촌에서 모연공작기간을 마치고 온 학생과 교대하여 나가는 다른 한명의 청년과 함께 리효는 나루가에 서있었다. 방금 시내에 다녀온 박두학이 큼직한 호떡꾸레미를 그의 짐속에 꿍져넣고있었다. 무수한 리별과 상봉의 끊임없는 순환속에서 가슴아픈 쓰라림도 수없이 맛보고 기쁨도 희열도 수없이 맛보신 김성주동지이시건만 오늘의 리별은 그이에게서 류달리도 분하고 억울한 감정을 자아냈다. 《성주, 잘 있소. 동무들을 잊지 않겠소.》 리효는 눈물이 글썽하여 김성주동지의 손을 굳게 틀어잡았다. 《리효, 너무 쓸쓸해하지 마오. 앞으로는 이보다 더 모질고 쓰라린 리별도 각오해야 하지 않소. 성남촌에 가면 농민들속으로 깊이 들어가보오. 앞으로 새로운 혁명조직이 탄생하면 인차 뿌리를 박을수 있게 농민들을 잘 교양해야 하오. 돈이 나라를 독립하는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라를 독립한다는걸 잊지 말아야 하오.》 김성주동지께서는 리효의 오른쪽어깨와 왼쪽겨드랑이밑을 엇비스듬히 지나간 보짐끈을 꽉 죄여매주시였다. 《알겠소. 내 절대로 상심하지 않겠소. 새로운 조직을 무을 땐 날 불러야 하오.》 《물론.》 리효는 지그시 입술을 강물었다. 그는 기우뚱거리는 나루배에 발을 올려놓으려다가 뒤로 돌아섰다. 《성주, 우리 서로 모자를 바꾸지 않겠소.》 《리효가 소원한다면…》 즉석에서 모자가 바뀌여졌다. 리효는 또다시 청을 들었다. 《<개벽>잡지사에서 내 원고에 대한 회신이 오면 잘 간수해달라구. 그리구… 또 뭔가 부탁하려구 했는데 깜빡 잊었군.》 그는 몇초동안 골똘히 머리를 짜보다가 단념한듯이 손을 홱 내저었다. 《리효, 앓지 마오!》 김성주동지의 작별인사였다. 리효는 눈을 슴뻑거리며 그 말씀의 뜻을 음미해보다가 배가 떠나자 씽긋 웃으며 모자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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