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20 회 )

 

16

 

최동오는 점심식사를 끝내자마자 오침도 하지 않고 의숙으로 향하였다. 숙장은 오늘 심사가 대단히 좋지 못하였다. 그의 기분상태가 이렇게 저기압으로 떨어지기 시작한것은 안해가 점심상을 차리는 사이 우편배달이 던지고 간 《대동민보》신문을 읽은 다음부터였다.

그 신문에는 며칠전에 박인석이 단행한 《공산당선언》압수사건을 타매하는 김찬의 신랄한 비판기사가 실려있었다. 그는 며칠전부터 강릉려관에 새 사조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려고 자주 찾아가는 박두학이를 통하여 군사교관의 비행을 알게 되였던것이다. 김찬은 이때야말로 자기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이곳 숙장이나 독립군운동자들의 보루에 화살을 퍼부을 기회가 생겼다고 은근히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돌로 두마리의 새를 잡는셈이였다.

그 기사가 세상에 나가게 되면 학생들이 자기에 대하여 또 다른 눈으로 볼것이 아닌가.

그는 서슴없이 붓을 들고 신성한 책자를 그 무슨 밀매아편처럼 압수하는 학교당국의 비렬한 행위에 대하여 《진리와 진보에 대한 파렴치한 도전》이라고 가차없이 내려쳤다.

《사람이 건강한 육체를 가지려면 여러가지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듯이 건실하고 세련된 인격을 갖추려면 동서고금의 다채로운 학문을 가림없이 섭렵해야 한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한 리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성의숙에서는 근대독일의 걸출한 사상가가 쓴 책자를 학생들에게서 빼앗았다고 하니 실로 놀라움을 금할수 없다. 말로써는 조선의 건아들을 길러낸다고 입이 닳게 자랑을 하면서도 행동으로써는 만인이 다같이 얼굴을 붉힐 용렬한짓도 서슴지 않으니 이에 의분을 누를수 없어 서슴없이 그 행위를 타기하는바이다.…》

이렇게 서두를 뗀 그 글이 어찌나 맵짜고 도전적이였던지 최동오는 점심도 변변히 먹지 못했다. 그는 기사를 쓴 김찬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기사를 만인앞에 서슴없이 공개한 신문발행인에 대해서도 다 같은 분격을 느끼였다. 더 괘씸한것은 김찬이였다. 박인석의 지기인 그가 화성의숙의 내부문제에 대하여 그처럼 가시박힌 험구를 하리라고야 누가 감히 상상인들 했겠는가.

교실을 수색하여 《불온서적》들을 색출했으면 좋겠다는 박인석의 제기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숙장은 그런 조치가 《진리와 진보에 대한 파렴치한 도전》이 된다는데 대해서는 털끌만치도 념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조치를 《공산주의역병으로부터의 민족정신의 수호》라고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 착상을 선뜻 지지해나섰다.

(흥, 싱겁기는… 제놈이 화성의숙하구 무슨 연고가 있다고 그렇게 콩팔칠팔이야. 우멍눈이같은놈!)

최동오는 화가 천둥같이 나서 온갖 상스러운 말을 다 꺼내며 속으로 줄욕을 퍼부었다. 그래도 가슴속에서는 울화가 그냥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박두학이가 《칼 맑스》를 읽었다고 문초하던 그날 김찬이를 화성의숙 울타리안에 들여놓은것이 못견디게 분하였다. 그날은 그래도 제놈이 박인석이와 면식이 있는 사이라고 하기에 그리 나쁘지 않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교관이 마련한 동석식사에까지 참가하여 술잔까지 마주찧었다. 박인석이도 화전주인으로서의 온갖 친절을 다 베풀어주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정수리에 갑자기 벼락을 들씌운것이다.

(에끼, 세상에 싱거운놈, 제놈이 맑스를 숭상했으면 했지 어쨌다구 남의 집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해!)

최동오는 입안이 소태같이 쓰거워나서 건침을 탁 뱉었다.

정구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희희락락하는 박인석을 보자 그의 분노는 더 크게 살아올랐다.

그는 교원실로 교관을 호출하였다.

박인석은 앞에서 무슨 변고가 자기를 기다리고있는지도 모르고 유흥기분을 가시지 않은채 싱글벙글 웃으며 숙장앞에 나타났다. 아마 경기성적이 몹시 좋았던 모양이다. 그는 림소영이 만들어준 그 빨간 테를 두른 손수건으로 한참동안 얼굴의 땀을 씻었다.

최동오는 그 손수건을 보자 눈살을 찌프리였다.

《박선생, 내 하나 좀 물읍시다.》

숙장은 교관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않고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박인석은 그제사 최동오의 표정을 주의깊이 살피였다. 그는 이 순간처럼 심각한 숙장의 얼굴빛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것이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고깝게 생각지 마오. 도대체 김찬이와는 어떤 사이요?》

최동오는 울분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엄숙하게 물었다.

그러나 말소리는 흥분으로 떨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박인석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글쎄 묻는 말에 대답해보오.》

《그저 옛날에 좀 아는 사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격하셨습니까.》

《자, 이걸 좀 보우.》

최동오는 책상끝으로 문제의 그 《대동민보》를 밀어보냈다.

박인석은 신문을 집어들고 숙장이 손가락으로 쿡 찔러주는 2면하단에 눈길을 박았다. 거기에는 《교권은 새것에 저항하는 바리케트가 아니다》라는 이색적인 제목이 커다란 활자로 찍혀있었다. 기사를 읽어가는 교관의 얼굴은 주홍빛으로 타올랐다. 울대뼈는 흥분을 삼키지 못해 씰룩거리였고 두손은 분노때문에 부들부들 떨리였다. 그는 《김찬》이라고 씌여진 필자의 이름을 두번세번 들여다보았다.

(김찬이 이런 글을 쓰다니!)

박인석은 신문을 와락 꾸겨쥔채 꼼짝 않고 서있었다. 마치 무서운 악몽속에서 허덕이는듯한 심정이였다.

(어쩌면 이럴수 있단말인가.)

박인석은 입술을 꽉 짓물며 손수건으로 락수처럼 흘러내리는 얼굴의 땀을 씻었다. 그러다가 그는 숙장의 책상우에서 성냥곽을 끌어당기였다. 성냥살 한가치를 꺼내여 불을 일구었다. 그다음 담배를 찾았다. 그러는사이에 불이 꺼져버리였다. 교관은 땅바닥에 담배가치를 두동강으로 탁 꺾어던지고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분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 이놈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이자식이 이런 패덕한이고 독설가인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는 출입문을 걷어차고 바지가랭이에서 비파소리가 나게 밖으로 나갔다.

《인석선생, 어디로 가오?》

최동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강릉려관으로 갑니다. 내 그놈을 화전땅에서 쫓아버리겠습니다!》

《옳소, 그래야 하오!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숙장은 부추기듯 손으로 문턱을 두드렸다.

박인석은 단숨에 네거리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따라 강한 남서풍이 불어 송화강변의 모래가 뽀얗게 허공중에 떠돌았다. 거리의 남향집들은 모두 문을 닫아매였고 광주리장사들은 바람을 등지고 동북쪽으로 돌아앉거나 처마밑을 찾아 오구작작 밀려갔다.

교관은 입안에 씹히는 모래먼지를 연방 뱉어버리면서 북대가쪽으로 발길을 꺾었다.

《인석씨!》

우정국앞에서 누구인가 그를 불렀다. 무척 귀에 익고 부드러운 녀자의 목소리였다.

박인석은 혹시 환각속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나싶어 잠간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였다. 이 화전땅에서 그런 음성으로 그를 부를수 있는 녀성이란 림소영이밖에 없었던것이다.

《인석씨!》

그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가까운곳에서 들려왔다.

박인석은 소리나는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자그마한 손짐을 든 림소영이 우정국앞에 서있었던것이다.

교관은 다른 날처럼 사랑하는 처녀를 뜨겁게 대해줄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심장은 김찬이로 하여 일단 끓어오른 피를 림소영을 위해 인차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처녀의 눈빛도 저으기 차거워보이였다.

《인석씨, 어디로 가십니까?》

림소영은 박인석의 상혈된 얼굴을 넌지시 살피면서 볼의 먼지를 훔치였다.

박인석은 어째서인지 처녀의 그 눈길을 받아들이기가 겁났다. 그 눈빛으로 하여 김찬에 대한 분노가 식어버릴것 같아서였다.

《강릉려관으로 갑니다.》

《김찬씨를 만나려구요?》

《맞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박인석은 급소를 찔리운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물끄러미 림소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저주받을 《대동민보》가 안도선중대에도 배포될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맥없이 눈길을 떨어뜨리였다.

《꼭 그러실것만 같은 불안이 들더군요.》

《불안이라구요?》

《네, 불안이지요. 저도 김찬씨의 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구…》

림소영은 무엇인지 더 이야기하려다가 중도에서 말을 끊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눈길로 박인석이를 치떠볼뿐이였다.

《그런데 거기에 씌여진게 사실인가요?》

한참만에 그가 물었다.

《사실입니다.》

박인석은 주저없이 대답하였다.

림소영은 그 말을 듣자 눈섭을 파르르 떨었다.

《그렇댔군요. 그런데… 어쩌면… 그건 정말 인석씨답지 않은 지나친 행동이였더군요.》

처녀는 호- 하고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박인석의 마음속에서는 문득 이상야릇한 노여움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약간 비양거리는듯한 어조로 처녀에게 물었다.

《그럼 소영씨도 김찬의 그 기사에 공감이란말입니까?》

《인석씨,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실수 있습니까? 인석씨는 그래 그 기사가 인석씨 한사람만을 괴롭힌줄로 아십니까? 인석씨에게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는 일은 나에게도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된다는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영씨도 나와 함께 분노해주십시오. 나와 함께 김찬이를 미워해달라는말입니다.》

림소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민망스러운 눈길로 한참동안 련인의 어깨너머 어딘가를 쓸쓸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느덧 저물어가는 가을을 바래는 사람의 심경과도 같은 슬픔이 그렁그렁 고이였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처녀는 여전히 시가쪽을 구슬프게 바라보면서 목갈린 소리로 말했다.

《기사나 기사의 필자를 비평하기전에 먼저 자신의 행동을 심심히 돌이켜본다면 분노를 참을수도 있을거예요. 나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인석씨가 새것을 그렇게도 질시하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인석씨자신이 지난날 낡고 진부한것에 대해서 얼마나 혐오를 가지고 타매하셨습니까. 새것을 지향하는것은 하나의 시대적요구라고 볼수 있지 않을가요? 이 요구를 강권으로 막는다는건…》

림소영은 여기에서 문득 박인석의 표표해진 낯색을 보게 되자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박인석은 지금까지 늘 한대중으로 아량있고 사려깊었던,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자기의 심정을 깊이 리해해주려고 하지 않는 련인의 태도에 처음으로 강한 반발을 느끼였다. 다른 사람은 다 입을 비쭉거리고 우박같은 독설을 내뿜는다 해도 림소영이만은 자기를 두둔하고 비호해주리라고 생각하던 교관이였다.

《나한텐 그런 아량을 베풀만한 여유가 없구만요. 용서하십시오!》

박인석은 댕댕한 낯빛으로 이렇게 뇌이였다. 그리고는 분연히 발걸음을 뗐다.

림소영은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안됩니다. 가지 마십시오!》

《소영씨, 내 성미를 아시지 않습니까.》

《오늘만은 그 성미를 누르셔야 합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모욕했는데 어떻게 그걸 용납할수 있습니까? 나는 참을수 없습니다.》

《그래도 참으셔야 합니다. 신문에 씌여진것이 사실이라면…》

《또 그 소리군… 비켜주시오!》

박인석은 자기의 팔에 감겨드는 림소영의 손을 탁 뿌리쳤다.

그러자 처녀가 들고있던 보짐이 행길우에 나가떨어졌다. 박인석의 어머니한테 선물하려고 림소영이 손수 만든 버선이 들어있는 손짐이였다. 그 버선도 전하고 《공산당선언》압수사건과 관련된 조언도 줄겸 해서 시내로 들어온것인데 교관의 태도는 예상이외로 편벽하고 완고하였다.

림소영은 보짐을 집어들념도 없이 아연해서 박인석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박인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릉려관》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에는 림소영도, 보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문자로 갈겨쓴 넉자의 려관간판만이 김찬의 밉살스런 넋처럼 어지럽게 흔들거릴뿐이였다.

 

17

 

림소영은 발길이 어디에 닿는지도 모르고 향방없이 걸었다.

행길에 나가떨어진 버선꾸레미를 집어들 때 같아서는 주저앉았던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것 같지 않았었다. 모욕당한 그 먼지길에 꾸레미를 그대로 팽개쳐버리지 않고 건사할 궁리를 한것만도 기적같은 일이다. 박인석이와의 충돌은 처녀의 고요한 넋을 그렇게도 모질게 흔들어놓았던것이다. 사랑의 여운이 언제나 고요히 깃들던 잔잔한 마음의 호수에는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그 격랑에 휩쓸려가듯 처녀는 지금 무작정 앞으로만 걸어갔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얼굴에서 수치의 모닥불이 사위여질 때까지 그리고 심장에 가해진 동통이 사그러질 때까지 그저 어디로든지 자꾸 걸음을 옮기면 되였다.

지금까지의 박인석은 항상 침착하고 도고한 사나이로 림소영이앞에 나타났었다. 그는 편견을 멸시하였고 공정치 못한 사람들을 미워하였으며 조폭하고 점잖지 못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비난의 화살을 서슴없이 쏘아보냈다. 허심하지 못한것과는 등을 돌려대고 살았다.

그러나 오늘 림소영의 눈에 비쳐든 박인석은 그런 박인석이가 아니였다. 그것은 그가 념불처럼 뇌이던 지성도 체면도 다 집어던진 완고하고 과격한 사나이였다.

몸에 가리운 허울을 벗고 새로 태여난것 같은 련인의 모습앞에서 처녀는 그만 소스라쳐 놀랐다.

(바로 그것이 보태지도 않고 덜지도 않은 박인석 그대로의 모습일가?)

림소영은 자신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을 던지며 내짚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 대답을 찾기전에는 앞으로 그이상 걸어가기가 싫었다. 그는 방금전에 본 그 박인석이 본래의 모습과는 관계없이 우연적으로 나타난 한순간의 박인석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쯤은 그가 본래의 참다운 박인석이로 돌아갔을것이라고 애써 믿으려 하였다.

하나 심장이 이것을 용인치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시 걸음을 내디디였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독선적으로 행동할수 있단말인가? 손상당한 자존심때문인가?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기전에 그이는 먼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뒤돌아다보았어야 하지 않는가.)

림소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련인의 권고를 뿌리치면서까지 김찬이한테로 기를 쓰고 달려가는 박인석의 그 폭발적인 행위를 정의감에서부터 출발한것이라고는 볼수 없었다. 그의 행동속에 도대체 무슨 정의가 있단말인가. 자신을 위해서만 필요한 정의도 정의인가.

잡초가 무성한 북대가 교외의 들판이 어느새 발밑에 밟히였다. 무릎을 치는 풀잎들이 군복바지가랭이를 스륵스륵 스친다.

처녀는 들기슭을 휘우듬히 돌아간 도랑가에 해를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언제인가 최창걸이 새벽산보를 나왔다가 앉았던 그 도랑가였다. 마소와 면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있는 호젓한 들판은 림소영의 마음을 한결 가라앉혀주는듯하였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서는 복잡한 사색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분별없는 과단성은 오늘에 와서 비로소 나타난것일가? 아니면 이미부터 있었는데 내가 미처 느낄 기회가 없었던탓으로 그에게 마치 그런 흠이 없었던것처럼 보였던것일가?)

림소영은 혼자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앞에는 국내원정대에 나가 희생된 조기영 어머니의 불쌍한 모습이 진한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그우에 도도한 박인석의 모습이 겹쌓여 비쳐졌다.

림소영은 두손으로 관자노리를 움켜쥐고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희끗희끗한 그 무엇이 자취도 없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길다란 고삐가 달린 염소 한마리가 새김질을 하느라고 입을 오물거리며 처녀를 찬찬히 바라보고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의 그 눈에마저 애수가 깃들고 동정이 차있는것 같아서 림소영은 어쩐지 짐승의 얼굴을 살펴보기가 면구스러워졌다. 그는 염소를 등지고 물도랑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물속에서 머리를 움켜쥐고 골살을 잔뜩 찌프린 초췌한 처녀의 모습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림소영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기자신을 발견하자 노여움과 설음이 한데 북받쳐 물을 한웅큼 떠가지고 얼굴에 끼얹었다. 한웅큼, 한웅큼, 또 한웅큼…

얼굴은 모닥불에 휘감기듯 화끈 달아올랐다. 그 순간 처녀는 그 어떤 미련도 없이 물에 젖은 귀밑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면서 들판을 떠났다. 이길로 중대병영에 곧추 돌아갈 결심이였다.

그러나 네거리의 갈림길에 이르자 그는 결심했던 중대병영이 아니라 박인석이네 집이 있는 남대가쪽으로 발길을 꺾었다. 그 버선을 그대로 병영에 가지고가면 마음이 더 쓰릴것 같아서였다. 박인석이한테서 당한 화를 그의 어머니한테 넘겨씌울수 있으리만큼 처녀의 마음은 그렇게 모질지 못했다.

고추와 마늘을 심은 터밭가생이에 세포기의 다리야가 피고 밀짚으로 지붕을 올린 교관의 아담한 집은 이전날처럼 다정하고 가슴들레이는 정서를 처녀에게 안겨주지 못했다.

남향으로 앉은 그 집 방문들에는 갈로 엮은 문발이 드리워져있었다. 울타리도 없는 마당에 세워진 철봉대가 멀리서도 표가 나게 보인다. 모습도, 성미도 아들과 비슷한데라고는 전혀 없는 체소하고 얄팍하게 생긴 박인석의 어머니 리씨가 정지문에 드리워진 발을 들치고 뜨락을 내다본다. 유순하고 삽삽해보이면서도 표정이 생동하게 느껴지는 곱살한 녀인이였다. 래일모레면 쉰고개에 올라선다고 하지만 아직 머리에는 서리가 내리지 않았고 얼굴은 젊은이들처럼 반반했다.

《아이유, 소영이 왔구만! 왜 그렇게 섰나? 들어오지 않구…》

녀인의 해반지르르한 얼굴에는 기쁨이 확 피여올랐다. 리씨는 며느리될 사람을 맞이하는 때에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기쁨을 걷잡지 못하고 덤벼치면서 토방으로 나와 처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림소영은 그 작은 손길에 이끌려 방문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는데 그 방문이 공교롭게도 바람에 몰려 탕 하고 닫기였다.

《이놈의 문이 오늘은 왜 이 모양일가. 손님도 몰라보구, 하긴 손님이랄수 없지… 쯧쯧.》

리씨는 문고리에 달린 노끈을 벽기둥의 대못에 단단히 비끄러매놓고 왜 그렇게 우물쭈물하느냐면서 처녀의 등을 떠밀었다.

림소영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부엌간과 정지간사이에 간벽을 두지 않은 함경도식 집이다. 저녁차비를 하던 참이였는지 가마목옆에는 쌀이 담긴 함박이며 마늘대가리가 놓인 칼도마며, 감자를 담은 나무모랭이가 놓여있다.

림소영이 자리를 잡기 바쁘게 리씨는 시렁에서 락화생이 가득 담긴 대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리갑이라는 학생이 삼밭골에 기부금 받으러 갔다가 사온거라네, 별맛이야.》

림소영이 올적마다 꼭꼭 이렇게 색다른것을 마련했다가 내놓군하는 리씨였다. 그 섬세하고 사려깊은 인정에서 처녀는 매번 친어머니와도 같은 사랑을 느끼군하는것이였다. 돌이켜보면 화전에 온후 그가 이전보다 더 걷잡을수 없는 힘으로 박인석이한테 끌리게 된것은 박인석의 뒤에서 비쳐오는 이 훌륭한 후광때문이였던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지니고있는 후더운 정이 은연중에 아들의 약점을 가리워주고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달랐다. 녀인이 상냥하게 굴면 굴수록 박인석의 흠은 더 커보였다.

림소영은 괴로운 심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그 이상 이 집에 더 앉아있기가 싫어졌다.

《어머니, 이 버선을 받아주십시오.》

처녀는 리씨앞으로 버선보따리를 살그머니 밀어보냈다.

《아니, 이게 웬 버선인가.》

《틈이 있길래 제가 좀 만들어보았습니다. 저의 성의로 여기고 신어주십시오.》

《아이구, 이런 일이라구야, 오는 겨울엔 자네덕에 버선을 신고 호강하게 됐구만. 정말 맵시도 있다.》

리씨는 꾸레미에서 버선 한짝을 꺼내여 얼추 살펴보다가 혀를 차며 탄성을 지른다.

《그저 한번 만들어본건데요.…》

림소영은 버선을 쌌던 보자기를 포개여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 전 그럼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리씨는 펄쩍 놀라며 처녀의 손을 끌어당기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 집에 왔다가 저녁도 먹지 않고 가다니, 꿈쩍 말고 앉아있으라구. 이사람도 오래지 않아 들어올텐데.》

녀인은 림소영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틀어쥐고 눈을 흘기였다.

《가봐야겠어요.》

《이거 무슨 망녕같은 소린가? 아야 이 집에 발길을 끊을라면 가게나… 원…》

림소영은 더 우기지 않고 그 자리에 도로 물앉았다. 그렇지만 락화생이나 까며 그저 멍청하니 앉아있기가 무료하여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속의 번민을 덜려는것이였다.

리씨는 못이기는체하고 가만 내버려두었다. 어떻게 하든 오래동안 눌러앉혀놓고싶은 심정이였다. 녀인은 부산스레 행주치마를 벗겨 앞에 두르며 림소영이를 따라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럼 아궁에 불이나 살구게나.》

리씨는 솔가리 한단을 안아다 부엌구석에 놓아주며 일렀다.

어느덧 가마를 부시고 쌀을 안친 리씨는 부지깽이를 들고 멍하니 앉아있는 림소영을 눈여겨보더니 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인석씨는 원래 그처럼 과격한 사람이였을가? 혹시 내 언행이 그의 비위를 건드린것이 아닐가? 아니면 그를 괴롭힌 또 다른 불쾌한 일이 있어서였을가?)

림소영은 솔가리를 한웅큼 끌어다 아궁안에 밀어넣고 부지깽이로 그것을 휘저어놓았다.

그러나 생각은 그냥 한곬을 타고 소용돌이처럼 맴도는것이였다.

뜨락에서 갑자기 구두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처녀의 얼굴은 북대가 교외의 풀발에서처럼 또다시 심하게 상혈되였다. 그는 가슴 활랑거리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문발밑으로 뜨락을 내다보았다. 박인석이였다. 그는 곧바로 토방으로 올라서더니 주저앉아 졸라맨 신끈을 풀었다.

림소영은 또다시 아궁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불빛을 받아서 한층 붉어진 얼굴은 정처없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어머니!》

박인석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림소영은 그 소리에 몸을 옹송그리며 말없이 아궁속에 넣은 부지깽이로 솔가지들을 헤집기만 하였다.

《어머니, 물을 좀 주십시오.》

또다시 들려오는 박인석의 부탁이다.

그 목소리는 딴사람의 목소리처럼 상상할수 없이 부드러웠다.

림소영은 그대로 앉아있기가 난감하여 사발에 물을 떠들었다.

새문이 열리였다.

《아니… 소영씨가?…》

박인석은 문을 열어잡고 놀라 입을 벌리였다.

림소영은 아무 응대도 없이 조용히 눈길을 떨구었다.

물을 받아 한모금 마신 박인석은 그릇을 부뚜막에 놓고나서 부엌으로 내려섰다.

《여기에 오신지 오랩니까?》

박인석은 림소영의 옆모습에 소심스러운 눈길을 던지며 말을 걸었다.

《네, 조금전에…》

《어머닌 어데 나가셨습니까?》

《우물터에 가신것 같습니다.》

림소영의 말투는 저으기 랭담하였다. 처녀는 담배불을 붙이고있는 박인석에게 자리를 내여주었다. 그들은 잠시 아궁안에서 피여났다 사그러지는 불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물터에서 리씨가 돌아왔다. 녀인은 아궁앞에 앉아있는 아들을 보자 흐무진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 왔냐?》

《네, 어머니…》

《밥이 잦으면 인차 퍼서 둘이 같이 저녁을 들라구. 내 어디 좀 다녀오겠네.》

리씨는 마치 총망한 일이 생겨서 자기가 모처럼 찾아온 손님에게 허물없는 부탁을 하니 그쯤 알아두라는듯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총총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박인석은 어머니가 사라지기 바쁘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까는 내가 지나쳤던것 같습니다.》

《…》

《날 원망하셨지요?》

《…》

림소영은 여전히 함구무언이였다. 처녀는 고개를 짓수굿하고 앉아 두무르팍짬에 드리운 손으로 부지깽이를 만지작거리였다.

그는 김찬이와의 충돌이 어떤 결과로 끝났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필경 충돌이 있어도 요란한 충돌이 있었을것 같았다.

그런데 박인석의 기색을 보면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아무런 마찰도 없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박인석이 처녀의 그런 심정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듯이 묻지도 않는 말을 스스로 꺼냈다.

《다행이도 김찬이라는 사람이 려관에 없더구만. 그래서 내 그저 돌아왔습니다.》

만나서 혼뜨검을 내주지 못해 속이 풀리지 않는다는 소리인지 아니면 아무 충돌도 없었으니 안심하라는 소리인지 모호하였다. 그래도 림소영은 응대가 없었다.

박인석은 맥을 잃은듯 피우던 담배를 두토막으로 꺾어 아궁속에 집어던졌다. 사실은 화해하고싶은 심정이였는데 상대가 하도 랭랭한 태도로 나오니 그자신도 마음이 꼬부라지지 않을수 없었다.

《소영씨답지 않습니다. 노엽더라도 그 순간의 내 심정에 대해서는 리해해주셔야지요.》

림소영은 그제사 턱에서 손을 떼고 박인석을 쳐다보았다.

《인석씨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도 같은 말을 할수가 있습니다. 인석씨는 백주에 로상에서 남자의 앞을 막아서지 않을수 없었던 저의 심중을 리해하려 하셨던가요?》

《그래 소영씨가 만일 화성의숙 교원이라면 불손한 어떤 외인이 의숙을 헐뜯고 간섭하는데 대해서 용허할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은밀한 방법으로 학생들을 꼬드겨 그들의 깨끗한 얼속에 섭취해서는 안될 무서운 독소를 부어넣는데 대해서 참을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김찬이라는 그 사람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그렇게 무서운 독소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소영씨도 맑스주의자인가요?》

림소영은 대답대신 박인석의 옆모습을 얼핏 일별하였다. 두시간동안 줄곧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그 의문의 실마리가 드디여 풀릴것만 같았다.

(그렇지, 그거로구나.)

처녀는 생각하였다.

(자기가 고수하고있는 정치적리념이 타격을 받자 인석씨는 그렇게도 놀랐던거야. 자기의 사상을 공격하고 침해하는 다른 사상과 맞다들자 그렇게도 노했던거야. 바로 그런 까닭에 련인인 자기를 두둔하지 않고 이단자들의 행위를 정당한것으로 받아들인 소영이도 괘씸해졌던거야. 애인의 체면이나 사랑따위는 자신의 권위보다 귀중치 않은거지.)

처녀는 이때껏 자기 련인에게서 볼수 없었던 그 모든것을 지금 이 순간에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것만 같아 속이 저려났다.

《인석씨, 그렇게는 묻지 말아주십시오.》

림소영은 가마뚜껑을 열고 물을 한돌개 뿌린 다음 아궁의 잉걸불을 국가마쪽으로 모조리 돌려놓으며 말을 계속하였다.

《저는 아직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민이 복락을 누릴수 있는 공평한 리상사회를 지향하는 그런 사상이라면 맑스주의라고 해서 반대할 리유야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누구나 지금의 기울어지는 운명을 건지기 위해 새로운 힘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가요. 그런 힘을 찾아낼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주의든말이예요. 저는 새 사조를 연구하는 성주네 행동도 그런 지향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박인석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영씨는 잘못 생각하고있습니다. 김형직선생님의 생전의 뜻을 존중시해서라도 소영씨는 성주가 그런 길로 나가는걸 간과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소영씨는 지금 어떻게 하고있습니까?》

《존중시하기때문에 성주네를 지지하는겁니다. 김형직선생님자신이 생전에 공산주의에 대해 몹시 동경하였고 또 무산혁명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성주가 하는 일을 의심하고싶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길을 가든 성주는 조선이 가야 할 진리의 길을 찾아 어김없이 걸어갈테니까요. 저는 제자신을 믿듯 성주를 믿을뿐입니다.》

《그러니 인제는 성주도, 소영씨도 모두 내곁에서 멀어지고있단말이지요. 소영씨, 너무 그렇게 성주를 두둔하지 마십시오. 내 이제껏 소영씨의 립장을 고려해서 이 말만은 삼가해왔는데 성주는 새 사조요, 새 진로요 하면서 너무 내 체면을 깎아내리고있단말입니다. 벌써 그는 리갑이네가 국내원정을 떠난 그날 아침에 내 견해에 반발해나섰습니다. 그리고 원정이 끝난 오늘에 와서도 역시…》

《나는 한번도 성주가 인석씨의 체면을 깎아내린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는데요.》

박인석은 고집스럽게 손을 내흔들었다.

《아니, 깎아내리고있습니다. 원정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내전투를 시도한 학생들의 담력자체는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런 실패를 맛보는 과정에 종당에는 성공도 오고 승리도 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성주는 원정의 쓴맛을 본 학우들을 위로하고 고무해줄대신에 그런식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동무들의 주의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가고있으니 원정을 비호하고 조종한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주는 결국 지금 내 주위에서 숱한 학생들을 떼내고있는셈이지요. 나의 가장 충실한 방조자, 지지자가 되여야 할 처지에 있는 성주가말입니다.》

박인석은 말을 마치자 숨을 씩 몰아쉬였다. 그는 한쪽 입술을 이지러뜨리고 눈을 찌프리였다. 흥분이 정도이상으로 되여 감정을 걷잡기 어려워질 때 이따금씩 그의 표정을 사로잡군하는 특징들이였다.

(어쩌면 인석씨의 입에서 이처럼 편협한 목소리가 울려나올수 있을가?)

림소영은 모닥불이라도 뒤집어쓴것처럼 얼굴에 울기가 화끈 치밀어올랐다. 처녀의 심장은 실망과 무서운 혐오감으로 하여 아프게 비틀리였다. 며칠동안 마음속에서 줄곧 소용돌이쳐온, 그러나 련인앞에서 좀처럼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수 없었던 불만이 거침없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인석씨, 그건 지나친 편견인것 같습니다. 성주는 원정에서 돌아온 학우들을 그 누구보다도 살틀히 보살펴주고 깨우쳐주고있습니다. 인석씨가 참외추렴을 간 그날도 성주는 무성이와 함께 풍로앞에서 리효의 탕약을 끓이고있었습니다. 알고보니 조기영의 장례식도 성주가 발기한것이라는데… 이것이 과연 인석씨의 체면을 깎아내리는것으로 된단말입니까. 그래 인석씨는 리효의 상처를 위해 얼마만큼 품을 들였고 조기영의 어머니의 슬픔을 덜어드리기 위해 얼마만큼한 지성을 바치셨던가요? 원정에서 교훈을 찾고 새로운 길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 성주의 견해에는 나도 동감입니다. 새것을 지향하는 성주의 행동이 인석씨의 체면과 무슨 상관이 있단말입니까?》

박인석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도전하듯 림소영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동감이란말입니까? 소영씨자신도 원정문제에서는 내 견해에 동감이 아니였습니까?》

《네, 그때 나는 사내들이 해볼만한 일이라고 하면서 공감을 표시했지요. 평상시 싸움은 하지 않고 공리공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것만큼 부질없는 말공부보다 실전을 더 중시하는 타성이 나로 하여금 그런 립장을 취하게 했던가봐요. 그러나 그후 나는 성주의 말을 듣고 내 견해가 정당치 못하다는것을 점차 깨닫게 되였습니다. 나는 성주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박인석은 림소영의 어조에서 울리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느끼자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어뜨리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 담배가치 하나를 또 꺼냈다. 림소영이 꺼내주는 잉걸불에 천천히 불을 붙인 그는 서너모금 연기를 깊이 들이키였다.

림소영은 지금껏 한길을 걸어오던 박인석과 자기자신은 서로 다른 두 갈림길에 서있음을 직감하였다. 오래동안 변함없는 심정으로 련모하여온 그와 자기는 바로 그 갈림길의 어구에서 결별의 순간을 맞이하고있음을 느끼였다. 박인석의 사상이 새것에 저항하는 장애물이라는것을 알게 된 이상 처녀는 그와 운명을 같이 할수 없으며 그런 낡은 사상의 노예로 될수가 없었다.

림소영은 이것이 의심할바 없는 결별의 감정이라는것을 느끼자 피가 나게 입술을 씹었다. 그 결별은 오래동안 한 사나이를 위해 순정을 바쳐온 그에게 있어서 일생의 상처로 남아있게 될것이며 그는 생활의 매 고비마다에서 그 상처로 하여 줄곧 고통을 받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고통을 받더라도 그렇게 결별하는것이 자신을 위해서는 의로운 길일것이라는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였다. 오직 그 길에서만 림소영은 애국의 한길에 일생을 바치기로 한 자기의 초지를 빛내일수 있고 참되고 성스러운 행복을 누릴수 있는것이다.

만일 태동하는 새 시대사상을 외면하고 무작정 박인석의 품에 뛰여든다면 그 순간부터 혁명을 저버린 림소영의 생은 빛을 잃게 될것이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무서운 일이였다.

비록 일생을 홀몸으로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림소영은 결코 그런 퇴락의 길에서 자기의 미래를 찾지 않을것이라고 굳게 확신하였다.

잠시후 처녀는 박인석의 집을 나섰다.

석양의 어설핀 락조가 뜨락에 긴 그림자를 던지고있었다. 그것은 이웃집 뜨락에서 와슬랑거리는 백양나무의 그림자였다.

처녀는 그 그림자앞에서 흠칫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씻었다. 지금 이 순간만 지나면 어쩐지 이 집에 다시 오지 못할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것이다.

(이것이 4년동안 지속되여온 우리들의 련정이 가져온 종말이란 말인가. 그이를 그리며 변함없이 가슴을 불태워온 그 4년은 정녕 이렇게 끝나는것인가?)

림소영은 박인석의 불타는 시선을 등뒤에 느끼며 천천히 앞으로 발길을 옮기였다. 커다란 결별의 가슴터지는 아픔을 묵새기고있을 그의 컴컴한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듯하였다. 이제라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서서 다하지 못한 작별의 인사를 따뜻이 보내고싶었다.

그러나 림소영은 이를 악물고 그 유혹을 참아냈다. 이제 다시 박인석이와 눈길이 마주친다면 그자신이 마음이 약해져서 눈물을 왈칵 쏟뜨리며 그의 손을 부여잡고 《인석씨!》 하고 부르짖기라도 할것만 같았다.

처녀는 휘청거리는 몸과 마음의 평형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선들선들한 저녁바람이 휘익 하고 뜨락을 지나갔다. 그러자 백양나무 잎새들은 일제히 몸을 떨며 수선스럽게 설레이였다. 와슬랑거리는 잎새들의 속삭임소리는 림소영의 마음속에서 어린 동생들과 헤여지던 그 비내리는 가을날에 대한 잊을수 없는 추억을 자아냈다. 그날도 고향의 동구앞 산등성이에서는 백양나무가 저렇게 설레였었다. 자기의 살점과도 같은 두 아우가 그 나무밑에서 리별의 서러움에 목메여 흐느끼고있었다. 두고온 고향과 고국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수난당한 내 나라의 상징처럼 구슬프게 떠오르는 처량한 그 정경… 생활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곡경에 부닥칠 때마다 처녀는 매번 그 백양나무를 회상하군하였다. 그러면 중첩되는 시련도 두렵지 않았고 천근의 무게를 가진 마음속 번민도 쉽사리 가셔지군하였다. 비에 젖은 백양나무밑에서 오돌오돌 떨며 울던 사랑하는 동생들의 모습이 그로 하여금 만난을 무릅쓰고 고향의 언덕받이에서부터 시작된 애국의 한길로 변함없이 걸어가도록 해주었다.

림소영은 어느덧 남대가를 지나 병영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귀전에서는 백양나무잎새들의 설레임소리가 그냥 들리는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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