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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19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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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에서 돌아온 림소영은 부대에 잠간 들려 려장을 풀고 중대장과 인사를 나눈후 겹쌓인 로독을 털어버릴 사이도 없이 현성으로 향하였다. 그에게는 길림에서 받아안은 잔심부름거리들이 적지 않았다. 총관소와 화성의숙에 가져다주어야 할 편지만 해도 다섯통이나 된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어디까지나 실무적인 구실일따름이였다. 이런 구실보다도 더 다급하게 그를 현성으로 줄달음치게 한것은 벌써 두주일째나 만나보지 못한 박인석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안개낀 그날아침 송화강가에서 이루어졌던 그 짤막한 상면은 김리갑이들로 하여 생긴 화성의숙의 혼잡때문에 너무도 아쉽게 끝났었다. 비상소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박인석은 이상하게 짜증을 내며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림소영은 림소영이대로 제나름의 불안에 휩싸여 그를 학교로 부랴부랴 떠밀어보냈던것이다. 가장 인상깊은 날로 추억속에 아로새겨지리라고 예상했던 그날은 처녀에게 허전하고 어수선한 정서만을 남기고 바삐 지나가버리였다. 림소영은 오늘 어떻게 해서든지 그 상면에서 받은 아쉬움을 가셔버리고싶었다. 중대막사에서 현성으로 뻗은 길량옆의 풍경은 그사이 몰라보게 변모하였다. 싱싱하고 생기발랄하던 초목들에는 어느덧 의젓하고 원숙한 가을날의 색조가 깃들기 시작했다. 숲과 밭에서는 갖가지 열매들이 익어가는 들크무레하고 시큼시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9월은 마치도 따스한 해빛과 훈훈한 바람과 여름내 저장해두었던 땅속의 즙으로 온 전야를 통채로 발효시키기라도 하는것 같았다. 개천은 폭이 좁아진 대신 물빛이 선명해졌다. 건듯 들린 하늘조차 이전보다 별로 맑고 투명해보이였다. 현성에 들어서자 림소영은 곧추 화성의숙으로 말을 몰았다. 교문옆에서 한담을 하던 학생들이 그에게 길을 틔여주었다. 교정에 들어선 림소영은 운동장 한기슭의 스무나무기둥에 삼백을 비끄러매놓고 기숙사식당앞에서 어떤 낯모를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최동오숙장한테로 다가갔다. 숙장은 지금 그 사람을 상대로 농산물의 최근 시장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마차 한대가 서있었다. 학생들이 거기서 파며, 가지며, 홍당무며를 부리우느라고 법석을 놓았다. 숙장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그 손님이 끌고온 마차인것 같았다. 손님은 남새가격이 자꾸만 떨어진다고 불평을 토하였다. 최동오숙장은 동의의 표식으로 고개를 끄덕이였으나 그저 가격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시인했을뿐이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게 되는 손님의 처지를 가긍하게 생각하거나 동정해주는 빛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림소영이를 보자 손님과의 대화를 끊고 몇걸음 마주 걸어나왔다. 《오누만.》 숙장은 마치 그를 오래 기다리고나 있었던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하였다. 그래서 림소영은 오동진사령관이 자기한테 학교운영자금을 맡긴 사실에 대하여 숙장이 벌써 누구한테서인가 귀띔을 받은게라고 착각하기까지 하였다. 《숙장선생님, 그새 편안하셨습니까?》 처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목례하였다. 《나야 만날 편안하지, 이렇게…》 최동오는 손으로 번들번들 윤택이 흐르는 볼을 쓰다듬어보이고나서 물었다. 《그래 갔던 일은 다 잘됐소?》 《네.》 《박인석선생이 몹시 기다리는 눈치같더구만. 그런데 외출해서 어쩐다?…》 림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유, 숙장선생님두. 전 그래서 온게 아닙니다. 선생님께 전해드릴게 있어서…》 《아, 그런가?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구.》 최동오는 교원실로 림소영을 안내하였다. 방안은 텅 비여있었다. 림소영은 뭇눈길들의 구속을 받지 않아도 되게 된 이 조용한 분위기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면서 숙장이 손수 들어다놓은 의자에 마음놓고 걸터앉았다. 숙장과 이야기를 나누는동안만이라도 누구든지 제발 이 방에 나타나지 말았으면싶었다. 그는 아무개의 애인이라고 하면서 사나이들이 보내는 그 집요한 눈길을 언제나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였던것이다. 《오동진선생이 보내는 편지입니다.》 처녀는 주머니에서 두툼한 편지봉투를 꺼냈다. 최동오숙장은 편지를 받아들자 그 자리에서 겉봉을 뜯고 속지를 꺼내였다. 《오동진선생은 일본령사관의 막후책동때문에 화성의숙이 장차 페교될 위험성도 보인다고 하면서 그럴수록 의숙에서는 마음을 크게 먹고 학교를 잘 꾸리고 실속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시였습니다. 그리고 수일내에 무기고에 비치할 보총들도 보내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니, 총도?… 박인석선생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뻐하겠구만. 만날 총이 없어 실탄사격도 못해본다고 투정이였는데…》 최동오는 림소영이 면구해한다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박인석의 이야기를 꺼냈다. 림소영은 속히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길림소식을 몇마디 더 이야기하고는 얼른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얼결에 창문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는 교원실쪽으로 걸어오는 어떤 녀인과 눈길이 마주쳤다. 허름한 토목저고리에 토목치마를 입은 40대의 녀인이였다. 해빛에 그슬린 검붉은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덮이였는데 그 눈길과 표정이 어찌나도 절망적이였던지 림소영은 부지중 창문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이기까지 하였다. 최동오도 그 녀인을 보자 같은 자세를 취하였다. 림소영은 숙장의 얼굴에 일순간 당황한듯도 하고 불안해하는듯도 하고 축은해하는듯도 한 이상야릇한 기색이 어리는것을 보았다. 《그새 소영이도 풍문을 통해 그 소식을 들었겠구만?》 숙장은 창문쪽에서 머리를 돌리며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식말입니까?》 《우리 의숙의 학생들이 국내원정을 갔던 소식말이요.》 《떠났다는 말은 들었더랬는데… 그래 원정대가 돌아왔습니까?》 림소영은 국내원정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대뜸 신경이 팽팽하게 죄여들었다. 그는 길림에 가서도 자주 이 문제를 두고 심사숙고하였다. 박인석이가 깊숙이 개입된 국내원정의 결과가 그에게는 몹시 궁금하였다. 최동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살을 찡그리였다. 《돌아왔소. 그런데 결과가…》 숙장은 말끝을 얼버무리고 얼굴에 돋아오르는 진땀을 훔치다가 국내원정이 조기영의 죽음과 리효의 부상으로 비참하게 끝났다는것과 지금 성주가 주동이 되여 리효를 극진히 치료해주고있다는것을 조용조용 이야기하였다. 림소영은 가슴이 덜컥 무너져내려앉는것 같았다. 아이들의 들놀이를 두고 이야기라도 하듯이 《사내들이 해볼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던 그 국내원정이 그런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다니! 그는 한방망이 얻어맞은것처럼 두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혀아래소리로 뇌이였다. 《정말 안됐구만요. 그래 전사한 그 학생의 부모는 그 소식을 알고있나요?》 《방금 본 그 녀자가 조기영의 어머니라오. <동아일보>에 게재된 아들의 비사를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겠소. 너무 가긍한 생각이 들어 시신은 못찾았지만 기영이의 장례식을 치르어주었댔소. 그 장례식에 참가하고는 며칠동안 어떤 기숙생의 집에서 운신을 못하고 누워있더구만. 저렇게 예고도 없이 이리로 찾아온걸 보니 아마 오늘은 집으로 돌아갈 작정인것 같소. 어참, 사람이 살다가 이런 불상사가 없어야 하는건데…》 최동오는 또다시 한숨을 몰아쉬며 채머리를 흔들었다. 그 심각한 동작은 국내원정에 대한 숙장자신의 견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하였다. 림소영은 조기영의 죽음과 리효의 부상으로 하여 박인석이 어느 정도의 곤경에 빠졌을것인가를 가늠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입문쪽을 지켜보았다. 그 출입문으로 마침내 조기영의 어머니가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방안에 들어선 그는 얼핏 머리를 들어 최동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할듯말듯한 눈치였으나 종시 입을 열지 못하고 기진한듯 머리를 떨구어버리였다. 부르튼 입술을 감빨며 고름끈을 매만지는 녀인의 초점없는 눈에 그만 눈물이 핑 고이였다. 눈물은 눈굽을 넘어 주름과 주름사이에 처량한 흔적을 남기며 하염없이 흘러내리였다. 그렇게 자꾸 눈물을 흘리다가는 가뜩이나 초췌한 녀인의 몸에서 넋도, 혼백도, 내장도 죄다 녹아서 없어지고 허울만 남지 않을가싶은 걱정도 든다. 림소영은 녀인이 짊어지고있는 그 과중한 비애가 예리한 칼날이 되여 자신의 심장도 저며내는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동오숙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숙장선생님, 저는 오늘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동안 페를 끼쳐… 안됐습니다.》 조기영의 어머니는 머리를 숙인채 자기앞으로 다가오는 숙장을 향해 간신히 말을 떼였다. 그처럼 가슴아픈 손실을 당한 모성의 작별인사치고는 너무나도 범상하고 침착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오히려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괴롭히였다. 최동오는 입술을 꽉 짓물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비애에 떨리는 눈으로 땅바닥을 굽어보았다. 《왜 좀더 몸조리를 하시지 벌써 일어났습니까? 그 몸으로 장백까지 가대시겠습니까?》 《누워있기가 더 괴롭습니다. 빨리 돌아가서 그 애의 무덤이라도 찾아보고싶습니다.》 《정말 아주머니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말로 아주머니를 위로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좀더 잘 통솔했더면 불상사를 막을수 있는건데…》 《선생님들에게야 무슨 불찰이 있겠습니까. 스승들도 모르게 그런 길을 떠난 당자들이 불찰이지요. 그럼… 편안히 계십시오.》 조기영의 어머니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한 다음 옆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교원실을 나섰다. 최동오는 녀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림소영이는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나가는 녀인의 뒤모습을 깊은 생각에 잠겨 바라보았다. 그는 점차 그 녀인이 당한 불행의 원인속에 박인석의 몫도 있으며 따라서 자기자신도 그 녀자앞에서 떳떳할수 없는 존재라는것을 뼈아프게 느끼면서 마음이 괴로왔다. 림소영은 자책에 잠겨 숙장을 따라 교문밖에까지 나갔다. 《그럼 원로에 수고하시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최동오는 대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녀인은 두손을 치마자락에 꼭 가져다붙이고 답례를 표시한 다음 돌아서서 허둥지둥 나루터쪽으로 걸어갔다. 먼지길우에 맥없이 옮겨지는 뒤축이 무너져내린 짚신이 아프게도 눈을 끌어당기였다. 조약돌에 발을 걸채여도 금시 쓰러져버릴것 같이 비청거리는 형상이였다. 그러나 녀인은 이 화전에 와서 새로 꾸려가지고 가는 자그마한 보퉁이만은 손에 꼭 그러쥐고있었다. 생전에 아들이 사용하던 책들과 옷가지들이 들어있다는 꾸레미였다. 녀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보퉁이에서는 펜이며, 자며, 콤파스들이 필갑에 부딪치는 소리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고인의 말소리처럼 달그락거리였다. 강변에 나갔다 돌아오던 학생들의 한떼거리가 조기영의 어머니를 둘러싸고 나루터까지 밀려가는 광경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저 학생들을 보면 아들의 생각이 더 사무쳐오르겠지. 지금 저 어머니곁에는 차라리 아무도 없는게 낫지 않을가.) 림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녀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어쩐지 눈굽이 저절로 젖어들었다. 떠나가는 녀인에게 위안의 말 한마디도 따뜻하게 해드리지 못한 자기자신에 대한 민망스러움, 지금이라도 당장 녀인을 뒤쫓아가서 함께 붙안고 내 나라 어머니들이 당하는 수난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통곡이라도 하고싶은 처절한 욕망이 한데 막 어울려 처녀는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길이나 제대로 가대겠는지?… 아, 인석씨가 여기서 저 녀자를 바래준다면 얼마나 좋을가.) 처녀는 비로소 박인석의 행처가 궁금해났다.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살뜰히 녀인을 바래주어야 할 그가 이 자리에 없는것이 자못 아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남편은 리강년의 수하에서 싸우다가 돌아가구… 슬하에 남은건 유복자 기영이밖에 없었다는구만. 이제는 그 외아들마저 잃고 홀몸이 되였으니 저 녀자의 팔자도 참 기박하구만. 집에 가닿기도전에 재가 되여 중도에서 쓰러지지 않겠는지 모르겠소. 불쌍해서 못보겠구만. 우리 의숙이 정말 저 녀인앞에서 단단히 죄를 지었소.》 최동오는 녀인에게서 눈길을 떼고 그 어떤 회오에 잠겨 중얼거리였다. 림소영의 귀에는 그 말이 마치도 박인석의 잘못을 암시하는 소리처럼 들리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상기 돌아오지 않을가? 력사선생하구 같이 참외추렴을 간다고 했는데… 인석선생을 만나봐야 할테지?》 림소영은 대답대신 고개를 푹 숙이였다. 참외추렴이라는 말이 무서운 힘으로 그를 후려갈기였던것이다. 아들의 유물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녀인과 참외추렴, 이 엄청난 대조앞에서 처녀는 그만 자제력을 잃고말았다. (참외추렴이라니. 한 학생은 죽어서 갈대밭에 묻히고 다른 한 학생은 상한 몸으로 의숙에 돌아왔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태평스러울수 있단말인가. 국내원정을 그 누구보다도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인석씨가… 인석씨한테는 그래 수난당한 녀인의 슬픔을 덜어드리고싶은 한쪼각의 도리마저 없단말인가.) 그는 고까운 생각이 들어 저도모르게 입술을 꽉 짓물었다. 《숙장선생님, 리효라는… 부상당한 그 학생이 치료받고있다는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참후에 림소영은 최동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숙장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오?》 《부상자를 위로해주고싶습니다.》 《역시 소영이답군. 그 집은 저기 북대가막바지에 있소. 집곁에 발방아가 있었던것 같소.》 림소영은 곧 삼백을 풀어가지고 북대가로 향하였다. 박인석이와의 즐거운 상봉을 꿈꾸던 들뜬 감정은 그에게서 가신듯이 사라졌다. 그의 머리에는 그 어떤 불안스러운것에 대한 의식이 연기처럼 자욱히 서려있었다. (다른 만사를 제껴놓고라도 인석씨는 그 어머니를 바래드려야 하는건데…) 그는 이런 생각에 잠겨 북대가막바지의 방을룡이네 집근처에까지 내처 걸어갔다. 개천가 버들가지에 삼백의 고삐를 비끄러매고 울바자너머에서 뜨락을 들여다보느라니 씁쓸한 초약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도끼질소리가 텅텅 막바지의 정적을 두드렸다. 뜨락 한구석에서 리무성이 저고리앞자락을 활짝 열어제끼고 나무를 패고있다. 톱으로 그쯘히 자른 통나무들이 모태우에서 두토막으로 보기 좋게 갈라졌다. 산골태생의 솜씨치고도 이만저만 숙달된 솜씨가 아니다. 그는 매번 《받아라!》, 《옜다! 또 받아라!》, 《천만에!》하는 군소리까지 먹이여서 그 신바람나는 률동때문에 보는 사람조차 성수가 나게 하였다. 뜨락 반대켠 구석에서는 김성주동지께서 풍로앞에 마주앉아 약탕관에 초약을 달이고계신다. 그이께서는 뚜껑밑으로 뿜어져나오는 김을 바라보며 그 어떤 깊은 사색에 골똘하고계시였다. 그이의 모습은 보름전보다 퍽 숙성해보이였다. 날을 따라 깊어가는 사색과 탐구의 자취는 그이의 입모습이며, 눈매며, 몸가짐까지를 죄다 변모시켜주는듯싶었다. 그이께서는 이따금씩 토방쪽을 돌아보시였다. 얼굴이 병자처럼 해쓱하고 영민하게 생긴 고수머리청년이 그 토방우에 앉아 책을 읽고있었다. 림소영은 바로 그가 국내원정에서 부상당한 몸이 되여 돌아온 리효일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언제인가 박인석이 의숙에 《하이네》가 있다면서 여담으로 화제에 올린적도 있어 처녀에게는 구면이나 다름없이 되여버린 리효였다. 가을잠자리가 소리없이 날아도는 이 자그마한 뜨락에서 새로운 생활, 뜨거운 우정과 탐구로 얽혀진 웅심깊은 생활의 단면과 마주친 림소영의 가슴속에서는 억제할수 없는 감격이 북받쳐올랐다. 그 감동적인 화폭은 그로 하여금 화성의숙에서부터 줄곧 그를 괴롭혀온 지긋지긋한 상념에서 벗어날수 있게 하였다. 림소영은 길림에서 사가지고 온 소책자와 소설들을 성주네가 보면 얼마나 기뻐할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오른손의 책보퉁이를 흐뭇이 내려다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울바자너머에 나타난 림소영의 모습을 보자 사립문쪽으로 걸어나오시였다. 《아, 오셨구만요! 언제 길림에서 돌아왔습니까?》 그이께서는 림소영의 손을 잡아 뜨락으로 이끄시였다. 그이의 목소리에 리효가 읽던 책우에서 머리를 들었고 리무성이 환성을 지르며 사립쪽으로 달려나왔다. 《왔구나, 왔구나, 누이가 왔구나!》 리무성이 《학도가》곡조에 맞추어 《왔구나》소리를 련발하는바람에 림소영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였다. 《무성이는 그저 여전하구나. 여든살쯤 되면 좀 의젓해질가.》 《누이는 아직 덜렁거리는 무성이만 봤지 의젓한 무성이는 보지 못했구만. 내가 <공산당선언>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한번 구경하겠소?》 리무성이 이렇게 뽐을 내자 림소영은 또 웃었다. 토방우의 리효도 소리를 내여 웃었다. 림소영은 그동안 길림에서 보고들은 소식을 추려서 이야기하고나서 김성주동지께 귀속말로 물었다. 《토방우의 저 학생이 바로 리효란 학생이냐?》 《그렇습니다. 벌써 그 소식을 들었습니까?》 《숙장선생이 말씀해주시더구나. 내 방금 의숙에 들려 숙장선생을 만나고오는길이다.》 림소영은 지금 이 자리에서는 리효의 상처를 두고 이야기를 벌리는것이 자기가 할수 있는 최선의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김성주동지께 책보퉁이를 넘겨주고나서 토방앞으로 다가갔다. 《저… 상처가 좀 어때요?》 리효는 읽던 책을 덮어 표지가 밑으로 내려가게 뒤집어놓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완쾌된 셈입니다. 사날후이면 학교에 나가도 될것 같습니다.》 《그새 정말 고통이 많았겠어요.》 《네, 많았습니다. 그러나 동무들이 정성껏 돌봐준 덕분에 그 고통을 죄다 이겨냈습니다.》 풍로우의 약탕관뚜껑밑으로 거품이 밀려나오며 갑자기 불에 물이 떨어지는 치치 소리가 났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풍로앞으로 뛰여가 약탕관을 내려놓고 뚜껑을 잽싸게 열어제끼시였다. 리무성이 얼른 부엌에 뛰여들어가 대접 한개와 베천을 들고나왔다. 토방우에 대접을 내려놓고 그우에 베천을 펴놓은 다음 약물을 따를수 있게 량쪽으로 빳빳이 잡아당기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김이 문문 나는 약탕관을 풍로옆에 그대로 둬두었다가 그릇에 약을 따르기 시작하시였다. 흙빛이 도는 걸죽한 약물이 베천으로 슴새여들어가 쪼로록 쪼로록 소리를 내며 대접에 떨어졌다. 림소영은 녀자의 손을 기다리는 적합한 일거리가 눈앞에 놓인것을 보자 서슴없이 팔을 걷고나섰다. 리무성이를 한옆으로 밀어놓은 다음 그의 손에서 베천을 앗아쥐고 솜씨있게 비틀었다. 약물은 한방울도 남지 않고 고스란히 그릇에 담기였다. 그는 무직하던 마음속이 이상스럽게 개운해지는것을 느끼며 이마의 땀을 씻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약이 좀 식은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그릇에 꿀물을 풀어넣으시였다. 《아니 그건 또 뭣하려구 넣어?》 리효가 그이의 팔에 손을 얹으며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냥 꿀병을 기울이시였다. 《약물을 한모금만 마셔도 이마살부터 찡그리면서 뭘 그래.》 《아니, 인젠 자신있대두.》 리효는 대접굽도리에 종이를 싸쥐고 꿀꺽꿀꺽 약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는 장담한대로 그릇속의 탕약을 단숨에 먹어버리였다. 그의 이마에는 진땀이 즈르르 내배였다. 《내 정말 이 친구들의 신세를 톡톡히 집니다. 꿀도 약도 모조리 성주가 구해온겁니다.》 그는 입언저리에 발린 약물을 훔치면서 림소영이를 돌아보았다. 림소영은 즐거운 기분으로 그 말을 묵묵히 새겨들었다. (리효의 상처를 두고 누구보다도 걱정해야 할 인석씨는 그를 위해 얼마만큼한 지성을 기울이였을가?) 그는 부상자의 입에서 박인석의 이름을 들을수 없는것이 불안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였다. 만일 그가 교육자의 체면, 더우기는 배후에서 국내원정을 추동한 조종자의 체면을 다하였다면 리효는 그의 지성을 두고 침묵을 지킬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야 세 청년의 입에서 교관이 어쨌다든가 어떻다는 말은 한마디도 들을수 없었다. 《어때요. 원정에 갔다온게 후회되지 않아요?》 림소영은 리효의 파리한 얼굴을 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리효는 원정이야기가 또 나오자 눈살을 찌프리였다. 그러나 대답만은 공손하게 하였다. 《제발로 갔다온건데 후회해서 소용있습니까.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이렇게 부상까지 당한건 분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 대가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무슨 교훈이예요?》 《의병이나 독립군들에 의해서 수없이 반복되여온 그 산만하고 자연발생적인 투쟁방법으로써는 피값을 할수 없다는 교훈이지요. 조기영의 죽음은 새로운 로선이나 전략이 없이는 광복운동이 단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다는 교훈으로 우리를 깨우쳐준 셈입니다.》 림소영의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번져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화성의숙의 많은 청년들이 새롭게 눈을 떴습니다.》 묵묵히 리효의 이야기를 듣고계시던 김성주동지께서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씀을 떼시였다. 《조선의 새 진로를 탐색하려는 지향이 청년들속에서 바짝 움트고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지향을 안고 매일같이 새 사조를 연구하고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원정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고있는건 아닙니다. 의숙에는 조기영의 복수를 운운하면서 제2의 원정을 벼르고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저 총이면 다고 싸움이면 다라는것입니다. 이런 경향이 적지 않은 청년들의 머리를 흐려놓고있습니다. 참말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그이께서는 망망한 하늘가 한끝을 바라보며 무겁게 숨을 몰아쉬시였다. 《참 답답한 노릇이지.》 잠자코 있던 리무성이 심드렁해서 한마디 하였다. 그는 토방밑을 내려다보며 숨을 씩씩거리였다. 림소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도무지 말을 할수가 없었다. 그는 김성주동지께서 념두에 두고 말씀하신, 《제2의 원정을 벼르고있는 사람들》속에 박인석이도 끼여있으리라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원정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권총을 주고 실탄까지 갖추어준 그가 조기영의 죽음이나 리효의 부상앞에서 어떤 립장을 취했겠는가 하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것이다. 교관의 립장은 그를 숭배하는 많은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전염되였을것이다. 이런것이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화성의숙에서 성주네의 건전한 지향을 저애하는것이다. 림소영은 성주나 무성이를 비롯한 화성의숙의 참된 량심들앞에서 뼈아픈 죄의식을 느끼였다. (그러니 내자신도 이들한테서 규탄을 받아야 해. 원정을 《사내들이 해볼만한 일》이라고 한 나의 립장은 결국 인석씨의 그릇된 립장을 부추기는것으로 되였고 나아가서는 조선의 새 진로를 탐색하는 성주네의 앞길에 장애물을 던진것이나 다름없이 되지 않았는가.) 《누님, 왜 그렇게 아무 말씀도 없습니까? 원정문제를 두고서는 누님도 생각이 깊을텐데… 누님은 어떤 교훈을 찾았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 림소영을 돌아보며 웃음을 지으시였다. 그러나 림소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아니, 좀처럼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그는 심한 자책에 잠겨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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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다른 때보다 수업이 일찍 끝났다. 학생들은 교실을 나서자바람으로 정구장을 향해 뛰여갔다. 공연히 모자를 공중에 집어던졌다가 껑충 뛰여가서 면바로 머리에 받아쓰고는 신명이 나서 껄껄거리는 학생도 있고 손을 땅에 짚지 않은채 교예사처럼 허공을 날아돌고는 《만점!》이라고 소리치면서 스스로 박수를 치는 익살쟁이들도 있다. 정구장에서는 벌써 패를 가르는 싱갱이가 벌어졌다. 모두들 첫 시합에 출전하고싶어 안달복달이다. 어떤 억지군들은 아예 그물앞에 퍼더버리고앉아 팔짱을 지르고 배포유하게 버티기를 한다. 정구경기의 고정심판원인 계영춘은 그런 억지군들을 들어일구느라고 진땀을 뿌질뿌질 흘린다. 어떤 장난꾸러기들은 서넛이 작당을 하여 그런 《개고기》들을 테두리선밖으로 끌어내갔다. 그런데 이런 소란도 잠시였다. 갑자기 예고도 없는 《모엿종》이 울리기 시작했던것이다. 학생들은 야단법석을 그치고 어리둥절하여 서로들 얼굴만 마주쳐다보았다. 틀림없는 비상소집신호였지만 그들은 그 신호를 선뜻 믿을수가 없었다. 점심전에는 대체로 이런 비상소집을 해본 전례가 없기때문이다. 그래도 종소리를 거역하는 도리는 없다. 학생들은 성가시게 두드려대는 그 종소리에 오만상을 찡그리면서도 터벌터벌 교사앞뜨락으로 내닫는다. 《제길, 공짜휴식을 한다 했더니…》 《공짜란건 그래. 늘 봐야 믿음성이 없거던.》 《차라리 잘됐지, 내가 첫 경기를 못하는바엔…》 그들은 뛰여가면서도 옆구리를 쥐여박으며 시시덕거린다. 종끈을 쥔 최동오숙장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빙긋이 웃는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야. 저것 보라구, 숙장이 웃고있는걸…》 시시더기들중 한 청년이 서렬을 맞추며 하는 말이다. 《그럴수도 있지.》 두번째 시시더기는 별로 시큰둥해서 중얼거린다. 대렬속에서는 별의별 억측이 다 돈다. 《또 다른 채호국이가 화전에 나타나지 않았을가?》 《글쎄… 길림에서 무슨 간부가 왕림했을수도 있지.》 《남만청총에서 최봉이 강연을 온다는 소문도 돌던데…》 숙장은 종끈을 놓고 교원실문을 닫았다. 이윽고 군복을 입은 박인석군사교관이 목에 호각을 걸고 운동장으로 걸어나왔다. 김리갑이 대렬옆에 나서서 재빨리 《기착!》 하고 소리친다. 각이한 감정을 담은 수십쌍의 눈들이 교관의 얼굴로 일제히 빗살쳐간다. 박인석은 평소의 그 랭랭하고 엄격한 표정 그대로 대렬의 인사를 받는다. 대렬속에서 키드득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어느 익살꾸러기가 귀속말로 입심을 부린 모양이였다. 웃음을 터친 학생은 당황하여 입을 싸쥔다. 《왜, 이십리 마라손을 하고싶어!》 리무성이 키드득거린 학생의 손등을 슬며시 건드린다. 운동장을 마흔바퀴 도는 벌을 받고싶으냐 하는 소리였다. 교관은 상학시간중의 규률위반행위에 대한 최악의 벌로 운동장을 마흔바퀴 도는 처벌을 새로 제정하였던것이다. 시시덕거리던 학생은 재빨리 손을 빼내며 엄살을 부린다. 박인석의 매눈이 이것을 놓칠리 없었다. 《리무성학생, 대렬앞으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교관의 구령소리다. 리무성은 대렬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별로 지은 죄가 없는지라 심상하게 서있었다. 그는 지어 시시덕거리던 그 동료를 향해 한쪽눈을 찔끔거리기까지 하였다. (허참, 이거 억울하게 걸려들었는데.) 하고 그 눈은 말하고있었다. 박인석은 그따위 수작질에는 아무 주의도 돌리지 않고 《우로 돌앗!》, 《뒤로 돌앗!》, 《앞으로 갓!》하면서 오분쯤 대렬을 닥달질하였다. 그는 한참만에야 《모엿!》종을 울리게 된 학교측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학생들을 갑자기 모이게 한건 다름이 아니라 점심식사전까지의 여유시간을 효과있게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간을 놀음으로 헛되게 보낼수는 없습니다. 점심식사시간이 될 때까지 시내를 돌면서 가창행진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조선동포들과 애국지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시내에는 길림과 무송에서 많은 독립운동자들이 와있다는걸 알아야 합니다. 행진을 통하여 화성의숙의 본때도 시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창행진은 학급장이 지휘하시오.》 《알겠습니다.》 김리갑이 대렬앞으로 한걸음 나서서 절도있게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시오.》 김리갑은 곧 출발구령을 주었다. 대렬은 노래를 부르면서 교문을 빠져나갔다.
사랑하는 우리 청년들 오늘날에 다시 만나니 반가운 뜻이 은근한중에 나라생각 더욱 깊었네
박인석은 거리쪽으로 멀여져가는 대렬을 잠시 지켜보다가 리무성에게 소리쳤다. 《이리 오우, 무성이!》 그리고는 교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리무성이도 그를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교관의 표정을 봐서는 무슨 꾸지람을 할 눈치같지는 않았다. 꾸지람은커녕 도리여 싱글싱글 웃기까지 한다. (오늘은 참 별나게 구는데…) 그는 별스레 마음이 뒤숭숭해서 흘깃흘깃 교관의 기색을 살피였다. 차라리 욕이라도 콱 해주었으면 얻어맞는 재미라도 보겠는데 이건 욕도 하지 않고 입을 철문처럼 닫아매고있으니 속이 답답해서 견딜수가 없다. 어쩐지 노여운 생각까지 들었다. 요전날 강의시간에 불손한 질문을 던진것때문일가? 그때 못한 욕을 오늘 조용한 틈을 타서 하려는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림소영에게 급히 기별을 띄워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러는것인지? 그로서는 그럴사한 가늠을 할수 없었다. 그는 교관의 옆모습을 힐끗힐끗 돌아보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굴리였다. 《무성이, 처벌로 나를 도와주어야겠소.》 박인석은 마침내 철문같은 그 입을 열고 웃으면서 리무성을 돌아보았다. 리무성은 그제사 화색을 띠고 씨무룩이 웃었다. 그는 비로소 아까의 처벌은 처벌이 아니라 자기를 대렬에서 떼내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그렇겠지. 박선생이 나한데 처벌을 줄수야 없지. 소영누이의 체면을 봐서라두…) 박인석은 교실을 잠시 둘러보다가 창문쪽 맨 앞자리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안의 책들을 꺼내오.》 뜻밖의 지시에 리무성은 어리둥절해졌다. 《뭘 꾸물거리는거요.》 리무성은 시키는대로 책상안에 손을 넣었다. 《동아일보》로 일매지게 표지를 해씌운 학습장들이 책상우에 쌓이였다. 《다음 책상!》 이번에는 교관이 턱으로 지시를 주었다. (수상한데, 어쩌자구 이런 수색을 시킬가?) 더구나 학생들을 다 내보내고 비법적으로 수색하는데는 저으기 기분이 언짢았다. 꼭 검열해야 할 사정이 있으면 학생들의 면전에서 정정당당하게 할수 있지 않는가? 그것이 교관의 법도에도 어울릴것이다. 림소영의 애인이라는 그 촌수를 보아 아무리 에누리를 하고 또 하여도 박인석의 행위를 옳은것이라고 볼수가 없었다. 리무성의 이런 심리에는 아랑곳없이 박인석은 빨리 다그치라고 또 손세를 쓴다. 그는 벌써 세번째줄 책상의 책들을 들춰보고있었다. 리무성의 머리에는 불현듯 얼마전에 있있던 조회장면이 떠올랐다. 그날아침 최동오숙장은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앞에 박두학이를 내다세워놓고 그한테서 압수한 《칼 맑스》책을 흔들어대면서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학도제군들, 제군들의 넋을 혼미하게 하는 이런 책들을 철저히 경계하시오. 만일 학생들속에 두번다시 이따위 불온서적을 들고다니는 경향이 있으면 그 누구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할것이요.》 박인석은 상학때 숙장이상으로 강경하게 《불온서적》을 멀리하라고 력설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안에, 아니 민족은 고사하고 우리 학원안에 무서운 불화와 혼란이 생길터이니 의숙의 본도에 맞지 않는 모든 사상은 역병처럼 멀리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였다. 김리갑이네의 국내원정이 실패로 끝난후 김성주동지를 선두로 하는 비밀독서회성원들의 영향밑에 많은 학생들이 새 사조와 접촉해나서고 따라서 학생무장대 구상에 대한 인기가 점점 떨어지게 되자 교관은 더 그악스레 선진사상과 맞서나갔다. 그러고보면 오늘의 수색이 무슨 목적을 노리고있는가 하는것은 너무나도 명백한것이다. 박인석이 갑자기 학교안의 뒤숭숭한 공기에서 무슨 계시라도 받고 수색을 시작한것인가? 리무성은 교관이 학생무장대 가입을 신청한 한 학생의 귀띔을 받고 수색을 하기로 결심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수 없었다. 리무성은 불쾌감때문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그는 두다리를 뻗디디고 교관의 뒤모습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갑자기 불안감이 마음속에 엄습해왔다. 첫 휴식시간부터 내내 《공산당선언》을 꺼내여 읽던 리효의 모습이 떠올랐던것이다. 리효의 책상은 리무성이 수색하기로 된 두번째줄에 있다. 리무성은 줄에 관계없이 망탕 책들을 꺼내는척하면서 리효의 책상으로 재빨리 접근해갔다. 어떤 수를 써서든지 교관이 눈치채지 못하게 《공산당선언》을 빼돌리려는것이였다. 그는 급급히 책상속에 손을 밀어넣었다. 반질반질한 유지가 손끝에 마치였다. 《공산당선언》의 뚜껑이였다. 김시우총관의 집에서 나온 모든 사회서적은 이렇게 유지로 하나같이 표지를 해씌웠다. 이 책이 교관에게 들장나는 날이면 책주인인 총관도 말밥에 오르고 책을 빌려내다가 동무들에게 돌린 김성주동지도 핀잔을 들을수 있다. 리무성은 《공산당선언》을 그대로 두고 나머지 책들만 책상우에 꺼내놓았다. 그 순간 박인석의 큼직한 손이 그 책상안으로 불쑥 날아들어갔다. 《<을지문덕전>이라…》 교관은 표지의 제목을 심상스레 읽고나서 책을 집어넣으려다가 리무성이와 눈을 마주치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도로 꺼내여 후르륵 책장들을 번져넘기였다. 그의 예리한 매눈은 그만 어느 한 페지에서 독을 품고 굳어졌다. 《<하나의 유령이 구라파를 어슬렁거린다…>흥, 훌륭한 <을지문덕전>인걸!》 박인석은 코방귀를 뀌며 리무성을 힐끗 흘겨보았다. 《이건 왜 그냥 두었지?》 《깊이 있어서 그만…》 《리효가 처벌받는걸 원치 않았을테지?》 《…그렇습니다.》 《흠… 정직하군.》 박인석은 책장에 눈길을 박은채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수색을 끝내자 교관은 찬바람을 일구며 씽하니 교실에서 사라졌다. 리무성은 책상속에 책들을 모조리 집어넣으라고 하던 교관의 지시도 잊어버리고 의자우에 쿵- 하고 주저앉았다. 불의의 타격을 받은 때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두손을 우들우들 떨었다. 난생 처음 이런 순간을 체험해보는 그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퍼런 대낮에 눈을 펀히 뜨고 눈알을 떼운것 같은 분하고 억울한 감정때문에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게다가 교관에 대한 섬찍한 인상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리무성은 입학후 처음으로 박인석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건 너절해. 가창행진을 시켜놓고 교실을 수색하다니!) 그는 입속으로 《너절해! 너절해!》하면서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자꾸 도리를 흔들었다. (모를 일이거던, 참 모를 일이야. 공산주의를 그렇게까지 두려워할수 있을가? 소영누이는 동정하는데… 모를 일이야. 사랑이란건 그래도 이루어지는 모양인가?) 생각은 왕청같은 곬으로 번져갔다. 리무성은 리해할수 없는 모순점에 봉착하자 《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였다. (박선생이 물론 남자답기야 하지. 그렇지만 너무 옹고집이라고 할가… 완고하거던…) 생각이 이런데까지 미치자 그는 어쩐지 마음이 더한층 불안해졌다. 박인석이 가만 있을것 같지 않았다. (소영누이한테 찾아간다?…) 가창행진을 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의 노래소리가 의숙쪽으로 가까와오고있었다. 리무성은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속에 책들을 걷어넣기 시작했다. 가창대렬이 《헤쳤!》 구령을 받고 식당으로 흩어져갈 때 그는 김성주동지의 손을 끌고 슬그머니 교문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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