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17 회 )

 

10

 

마차와 달구지들이 질서없이 서있는 대화정미소 옆골목으로 낯익은 공골말 한필이 불쑥 나타났다. 첫눈에도 림소영이 타고다니는 삼백이라는것이 인차 알리였다.

말옆에서는 고삐를 바싹 감아쥔 박인석군사교관이 삼백의 앞발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걸어가고있었다. 그는 문득 행길옆에 짐승을 멈춰세우고 어떤 마차 뒤꽁무니에 고삐를 감아맨 다음 상반신을 굽히고 삼백의 발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요일아침의 한가한 식전시간을 타서 한바탕 기마훈련을 할 잡도리인것 같았다. 림소영이 시내에 내려오면 교관은 매양 이처럼 삼백을 못살게 구는것이였다.

교관이 회파람을 짧게 한번 불자 삼백은 오른쪽 앞다리를 쳐들었다.

박인석은 그 앞다리의 편자를 손으로 한참 만져보다가 첫번째와 같은 길이의 회파람을 두번 연거퍼 불었다.

그러자 삼백은 왼쪽 앞다리를 들어 박인석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헐어빠진 <신>을 신고… 용해, 참 용커던.》

편자를 꼼꼼히 쓸어본 교관은 짐승의 갈기털을 어루만지며 소리를 내여 중얼거리였다.

《안녕하십니까?》

그리 멀지 않은곳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인석은 고개를 쳐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 리무성이와 함께 골목길 저쪽에 서계시였다.

박인석은 답례의 표식으로 자기 귀만큼 바른손을 쳐들었다가 내리였다.

《아, 벌써 나들이로군. 어디로들 가오?》

《총관아저씨네 댁으로 갑니다. 소영누이가 거기에 와있다기에…》

리무성이 앞질러 대답하였다.

(허참, 발없는 말 빠르기도 하다.)

박인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독립군대원들의 계몽자료를 구입하기 위해 길림으로 가게 된 림소영이 출발을 앞두고 간밤 총관의 집에 내려온것인데 어느새 벌써 화성의숙에까지 소문이 번져간것이다.

《그 누이가 지금 성주네를 기다리더구만. 무슨 부탁을 하겠다고 했다면서?》

《예.》

리무성은 무슨 말인지 더 하려다가 흠칫 입을 닫아맸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공골말의 곁을 그냥 지나치려다가 박인석에게 물으시였다.

《선생님, 학교에서 무슨 련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련락? 아니…》

《숙장선생이 아까부터 선생님을 찾으셨습니다. 지금 선생님들이 전부 모여 교원실에서 비상모임을 하고있습니다.》

《비상모임을 한다구? 무슨 일때문에?…》

갈기털우에 한쪽팔을 올려놓은 박인석은 말옆구리에 등을 기대고서서 약간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김성주동지와 리무성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전혀 뜻밖에 열린 그 변덕스러운 비상모임때문에 일요일아침의 흥취나는 기마산보가 깨뜨려지지 않나싶어 사뭇 초조해하였다.

《밤사이에 기숙생 네명이 의숙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모두들 국내원정을 떠났다고 추측하는데 지금 그 뒤수습을 하려고 숙장선생님이 모임을 열고있는것 같습니다.》

김성주동지의 대답이였다.

《국내원정이라… 허허, 간다간다 하더니 끝내 떠나갔군.》

박인석은 그닥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스레 뇌이였다. 그는 지어 턱을 건뜩 쳐들고 허공을 향해 껄껄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리무성은 고개를 찌붓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김성주동지와 눈길을 마주쳤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온 심신을 사로잡는 이상야릇한 반발을 느끼며 떨리는 소리로 물으시였다.

《선생님은 그들이 없어진다는걸 미리 알고계셨습니까?》

《알고있었소. 사흘전에 리갑이가 나한테 권총 빌리러 왔댔으니까…》

박인석은 여전히 무슨 나들이 이야기라도 하듯이 심상하게 말한다. 학생들이 떠나갔다는 소식까지 듣고 더 기분이 들뜬 교관은 아직 김성주동지의 음성에서 울리는 격렬한 흥분을 감촉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등자우에 한발을 올려놓고 량쪽으로 흔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괜찮은 친구들이야. 진짜 사내들이거던. 그래 성주나 무성이는 그런 원정에 참가하고싶은 생각이 없소?》

《왜놈들을 치는 싸움이라면 그 어떤곳에나 다 뛰여들고싶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야 배우러 온 학생들인데… 그런 싸움을 할바에야 독립군현역생활을 하는게 더 좋지 이 의숙에 와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

리무성이 말방울을 만지면서 선참 대답하였다.

《음, 무성이답지 않군.》

박인석은 못마땅한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김성주동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성주 생각은 어떻소?》

《저는 아직 그런 원정에 가고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생각해본적이 없다? 어허! 군관학교학생이 그런 지향도 없으면 어떡허나? 학교를 마치면 누구나 다 펄펄 나는 싸움군이 되여야 할텐데…》

《나라를 찾는 싸움에 한몸 바칠것을 결심한 이상 때가 되면 저도 스스로 왜놈들을 치는 결전에 뛰여들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배우고싶은 욕망뿐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자신의 이런 대답이 무훈과 모험을 주요한 남성미의 하나로 여기는 박인석의 기분에 거슬리리라는것을 잘 알면서도 거침없이 대답하시였다.

박인석은 머리를 흔들며 연방 《음》, 《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한발을 등자우에 걸치고 말잔등에 날아오를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오르지는 않고 강한 손세를 써가면서 열정적으로 말을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싸움은 미래에 있고 용맹도 미래의것이다 그 말이구만. 성주, 싸움은 미래에 있고 현재는 배움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오. 용감한 매나 수리개가 되자면 어렸을적부터 발톱을 잘 길러야 하오. 물론 학교당국이 모르게 원정을 떠난건 잘못이라고 할수 있겠지만 그런 위법을 하면서까지 용약 싸움터로 돌진하려고 결심한 그들의 그 배심이야말로 얼마나 장한것이요. 그런 배심도 없이 일본과 같은 강적을 타승할수 있다고 생각하오?》

교관은 급소를 찔렀다고 생각하는지 히죽이 웃고있었다.

리무성은 덤덤히 서계시는 김성주동지를 안타까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발밑을 굽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성주가 저렇게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있는것은 분명 말문이 막힌탓이라고 단정해버린것 같았다.

《성주, 가자!》

그는 김성주동지께서만 들으실수 있게 나직한 소리로 속살거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며 도리를 흔드시였다. 한치의 양보나 후퇴도 용납치 않는 반석같은 담력이 그이의 기품에서 내풍기였다.

《물론 배심도 키우고 담도 키워야지요. 그러나 총이나 몇방 쏜다고 스스로 큰 싸움군이 되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찾는 싸움에서 기수가 되고 전위가 되여야 할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한생의 라침판이 될수 있는 새로운 시대사상과 새로운 투쟁전략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화성의숙에 와있는 우리 청년들은 우선 이것을 탐색하는데 첫째가는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봅니다. 옳바른 사상과 전략을 가지고있어야 우리모두가 조선청년구실을 잘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놈들과 싸워 나라를 찾겠다는 각오면 다지 거기에 또 무슨 사상이나 전략이 필요하단말이요?》

《선생님, 관할구역을 만들어놓고 <군자금>이나 거두러 돌아다니든가 몇명씩 패를 무어 적을 한두놈씩 쏴갈기는 수공업적인 투쟁방법을 이이상 더 답습할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2천만의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전민족의 항전으로 일제를 때려부실수 있는 그런 강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흡족해진 리무성은 공골말의 주위를 빙빙 돌아가며 회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박인석의 귀밑에는 붉은 반점들이 점점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의숙에는 생각하고 궁리만 하는 선비들이 아니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자들이 필요하오. 그래서 나는 리갑이한테 권총 한자루와 열다섯발의 실탄을 주었던거요.》

교관은 비난조로 한쪽입술을 우습게 일그러뜨리며 삼백우에 허궁 날아올라 등자에 발을 꿰였다. 가벼운 교예를 련상시키는 세련된 동작이였다.

짐승은 기수의 흥분을 알아차린듯 앞발을 쳐들고 대가리를 흔들다가 씩-하고 코김을 거세게 뿜어내쳤다. 눈은 질주의 욕망으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기름진 털로 뒤덮인 팽팽한 근육은 경련이라도 만난것처럼 푸들푸들 떨리였다.

박인석은 고삐를 바싹 나꿔채쥐고 약간 울혈이 된 얼굴로 김성주동지를 지켜보았다.

《어쨌든 며칠후에는 저 남쪽에서 리갑이네들이 쏴올린 총소리가 울릴것이요. 두고보오만 그 친구들은 이제 판을 크게 벌린다니까. 학교에 남은 동료들은 아마도 그들을 위해 큰 꽃다발들을 마련해야 할것 같소.》

교관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말을 구보로 몰아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밑굽에 구멍이 숭숭 뚫린 녹쓸은 양철쟁개비가 쨍그랑소리를 내며 말발통밑에서 튕겨달아나고 벌레를 쫓던 닭들이 화닥닥 홰를 치며 개바자우로 날아갔다. 솜털같이 가볍고 하르르한 닭의 부등깃이 빙글빙글 허공중에서 맴을 돌다가 삼백의 갈기우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답답하던 골목길은 인차 네거리의 탁 트인 신작로로 바뀌여졌다.

삼백은 길거리에 나서자 대가리를 휘저으며 연방 코김을 내불었다. 신선한 안개속을 급보로 질주하고싶은 사나운 충동이 못견디게 치밀어오르는 모양이였다.

그러나 박인석은 짐승의 그런 욕망을 감촉하고나서도 평보로 말을 몰아갔다.

말뚝에서 삼백의 고삐를 풀어가지고 김시우총관의 집앞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만 하여도 교관은 귀뿌리에서 회파람소리가 나게 대지를 한바탕 달려보고싶은 욕망을 느끼였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열망과 호기심은 급작스레 식어버리였다. 그는 말이 가는대로 고삐를 내여맡기고 어수선한 상념에 잠기였다.

삼백은 네거리를 지나자 서대가로 가는 길에 서슴없이 들어섰다. 령리한 짐승은 기수가 좋아하는 주행로가 어느것인지를 잘 알고있었다. 여기 이 네거리에서부터 독립군중대의 병영이 올려다보이는 들판까지는 박인석이 즐겨 골라잡군하는 질주코스였던것이다.

안개는 어느새 길바닥에서 자락을 들고 일어나 벌판쪽으로 밀려갔다. 시야가 환해졌다.

하지만 박인석은 빈 박차소리만 절커덕거리며 그냥 물레바퀴처럼 돌아가는 한가지 상념에만 옴해있었다. 그는 다른 학생도 아닌 성주나 무성이들이 자기의 립장에 반기를 들고나선것이 무엇보다도 가슴아팠다.

성주나 무성이는 그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들이다. 장차 화성의숙에서 《학생무장대》를 뭇기만 하면 성주나 무성이나 리갑이나 창걸이와 같은 학생들을 그 조직의 골간으로 삼으려고 계획했던 박인석이다. 이런 립장으로부터 출발하여 교관은 김리갑이 자기한테 찾아와 국내원정의사를 표시하였을 때에도 그의 성장을 바라는 의미에서 권총과 실탄을 아낌없이 넘겨주었던것이다. 만일 성주나 무성이가 그런 의사를 표시하였다고 하면 그는 미상불 더 적극적인 지원을 주었을것이다.

(성주나 무성이가 나에게 반감을 품을 리유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여직껏 나에게 호감만 표시해왔다.

그렇다면 반발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것일가?)

박인석은 미간을 한데 모으고 김성주동지께서 하시던 말씀의 매 마디들을 빠짐없이 상기하고 음미하기 시작했다. 교관은 거기서 무슨 실마리를 찾으려고 집요하게 애썼는데 종당에는 자기가 무익한 추리를 거듭하고있다는것을 깨닫고 스스로 화를 내였다.

반발의 원인은 명백하였다. 그것은 원정에 대한 상반되는 견해의 차이에서 온것이였다. 열백사람이 품고있는 생각이 물론 다 같을수는 없는것이다. 한 어머니품에서 태여난 형제나 자매들사이에서도 사상의 차이가 있고 지향의 차이가 있고 신념의 차이가 있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스승이 제자들에게 진리를 주입하는 학원에서는 사제간에 이런 차이가 존재하여서는 안되는것이다. 교단에서 하는 교원의 말은 법으로 되여야 하며 학생들은 이 법에 무조건 순종하여야 하는것이다. 교원의 진리가 다르고 학생의 진리가 다를수 없는것이다. 박인석은 지금껏 이런 리치로 길들여져왔고 또 교권을 틀어쥔 오늘에 와서는 이런 리치로 제자들을 길들이고있다.

그런데 방금전에 성주는 스승의 주장에 대립되는 다른 하나의 진리를 피력하였다. 그것은 의숙의 그 어떤 학생들에게서도 들어본적 없는 새로운 목소리였다.

성주가 내놓은 주장들은 의심할바없이 아직 조직은 되지 않았으나 조만간에 탄생하게 될 학생무장대의 사상적기초를 위협하는것으로 될지도 모른다.

박인석은 몸서리를 치면서 그 위험성을 감수하였다.

(언제부터 성주가 그런 이색적인 사고에 매여달리기 시작했을가? 이 의숙에 와서 사회주의서적을 몰래 탐독하는것 같더니 거기서 무슨 계시라도 받은것인가?)

성주야말로 실제생활에서 남의 구령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독자적으로 선택한 신념에 맞추어 걸어가고있는것이다.

화성의숙에는 숙장이나 군사교관의 리념을 축으로 하는 하나의 사상만이 있는것이 아니라 그 축에 대칭되는 성주의 사상도 존재하는것이다.

박인석은 괴로왔다.

어쩌면 그가 지나치게 신경이 예민해져서 방금전에 있은 그 마찰을 정도이상으로 불리하게 감수하고있는지도 모른다.

의견상이란 어디서나 있는법이 아닌가. 부모형제나 련인들사이에서도 때로는 뜻이 서로 통하지 않아 오해도 하고 티각태각 말다툼을 할 때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성주나 나사이에야…

박인석은 입가에 쓰거운 웃음을 담고 머리를 뻑 쓸어올린 다음 등자로 삼백의 옆구리를 슬쩍 다치였다.

기수의 결심을 알아차린 말은 슬그머니 평보로부터 구보로 걸음을 바꾸었다.

서대가 변두리를 지나 인가가 없는 들판길에 나서자 말은 더 빠르고 기운찬 속보로 달리였다.

기수의 몸은 점점 더 안장우에 바투 녹아붙었다.

냄새도 싱그러운 칠칠한 갈기털들이 선풍에 마구 흩날리며 박인석의 얼굴을 후려갈기였다. 굽을 바꾸면서 땅을 굴러칠 때마다 짐승의 온몸에 번져가는 탄력있는 률동이 기수에게도 그대로 옮겨져 박인석은 마치 자기가 말발통으로 땅이라는 거대한 타악기를 두드리면서 어떤 행진곡의 리듬을 연주하는것 같은감을 느끼였다. 귀전에서는 쉬쉬- 하는 회오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가슴은 풍선처럼 팽팽해졌으며 머리는 화끈 달아올라 열기를 훅훅 내뿜었다.

그대신 의식은 놀라우리만치 명료하고 깨끗해졌다.

박인석은 온몸이 땀에 푹 젖을 때까지 그렇게 질주하고나서 거리를 꿰질러 송화강기슭으로 빠져나갔다. 거기서 림소영이와 만나기로 약속하였던것이다.

그는 이 상면이 자기의 조급한 요구로 인해서 련인과의 사이에 생겼던 약간의 간격을 메꾸어줄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분수에 맞지 않는 남성의 성급한 주관이나 욕심이 경우에 따라서는 련인의 화를 돋굴수도 있고 노여움을 살수도 있으며 실망이나 혐오를 자아낼수도 있다는것을 깨달은 그후부터 교관은 자기의 체면을 회복시켜줄수 있는 오늘의 이 상봉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황갈색군복을 입은 처녀의 아릿다운 얼굴이 멀리서 그를 향해 웃고있었다.

박인석은 갑자기 심장이 활랑거리는것을 느끼며 말을 더 급하게 몰아 림소영이와의 간격을 좁힌 다음 모래불에 뛰여내리였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강기슭을 거닐기 시작했다.

강우에 서리였던 거대한 안개바다가 마침내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안개너울들사이로 푸른 하늘이 다가오고 령롱한 아침해살이 쏟아져내리였다. 크고작은 형형색색의 잎새들에서 이슬이 혹은 분홍빛으로, 혹은 비취빛으로, 혹은 하늘빛으로 반짝거리였다. 풀덩굴들과 떨기나무들의 가지에는 새뽀얀 거미줄들이 촘촘히 늘여져있다.

림소영은 시종 즐거운 웃음을 띄우고 강반의 아침풍경에 눈을 팔았다.

《좋지요?》

하고 그는 박인석을 돌아보았다.

《좋습니다. 강반의 아침이란 늘 이렇지요.》

박인석은 지금 강반의 아침풍경에 전에없이 심취되여있었다. 기분도 전에없이 상쾌하였다. 련인과 함께 즐거운 아침산보를 하고있다는 달콤한 의식이 내내 그의 가슴속에서 은방울소리같은 노래를 울리게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한 순간에조차 박인석은 자기의 마음 한구석에 검질기게 웅크리고있는 막연한 불안과 우울을 걸음마다 감촉하며 괴롭게 발길을 옮기는것이였다.

《소영씨, 소영씨는 그 소문을 들었습니까?》

교관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속의 그 불안과 우울을 떼던지지 않고서는 못견딜 충동을 느끼며 느닷없이 물었다.

림소영은 상대방의 흥분을 감촉한듯 웃음을 가시고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문말입니까?》

《간밤에 화성의숙에서 실종생들이 생겼다는 소식말입니다.》

《아니 그런 소문은 못들었는데요.》

《그럼 김총관댁에서 성주네를 못만났던가요?》

《만났지요. 그런데 그런 소식은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길림에 가면 신간도서 몇권을 사다달라고 부탁하더구만요.》

《아, 그랬습니까? 학생 네명이 총과 실탄들을 휴대하고 학교당국도 모르게 국내로 원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소영씨는 그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렵니까?》

박인석은 바지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내여 뒤짐을 지었다.

림소영은 놀라는 표정도 없이 범상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평가라구요? 호호, 거참 흥미있는 일이군요. 원정을 떠나게 된 동기는 무엇이였던가요?》

《동기로 될수 있는 특별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단지 며칠전에 채호국씨의 무훈담을 듣는 모임이 있었을뿐입니다. 그 무훈담이 그들에게 자극을 주었을수 있지요. 하지만 가장 주되는 원인은 그들이 의숙에서도 가장 모험심이 강하고 영웅심이 강한 싸움군들이라는데 있는것 같단말입니다.》

《혹시 그들이 의숙의 공부에 싫증을 느낀것은 아니였을가요?》

《아니,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직 싫증을 느꼈다고 말하는 학생들을 하나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성주가 의숙의 교육내용에 좀 의견이 있어한다고 하는 말은 들었지만…》

림소영은 더 캐여묻지 않고 심중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먼 앞쪽을 내다보며 말했다.

《원정이란 사내들이 해볼만한 일이지요. 저는 그 싸움군들의 성공을 빌고싶을뿐입니다.》

박인석은 걸음을 멈추고 림소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설사 백명의 입이 그 원정을 비난한다 하여도 림소영이만 지지를 표시한다면 그는 그 비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수할수 있는것이다. 림소영의 말 한마디면 백명이 헤집어놓은 상처도 쉽사리 아물수 있는것이다.

박인석은 처녀의 손을 덥석 틀어잡았다.

《소영씨, 나는 소영씨가 응당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믿었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처녀의 손을 놓고 모래불에 털썩 몸을 던지였다.

강렬한 아침해빛에 이슬기가 사라져 모래불은 그지없이 포근하고 따스하였다. 거기서는 금빛으로 채색된 송화강의 물결이 발밑으로 굽어보이였다. 천만가닥으로 잘게 부서진 물이랑들에서는 이따금씩 수면이 흔들릴 때마다 쏘는듯한 반사광이 빛발쳐왔다.

림소영은 그 반사광의 한오리를 얼굴에 받으며 이마에 손채양을 만들어붙이고 박인석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처녀는 안개가 낀것 같은 눈으로 수상쩍게 련인의 상기된 얼굴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인석씨, 왜 그렇게도 흥분하십니까.》

박인석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솔직히 말한다면… 내가 그 원정에 조금 개입되여있습니다. 원정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권총과 실탄을 보장해주었지요. 이건 원정에 대한 내 립장을 반증해주는 물질적근거가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흥분하는 까닭을 리해할수 있지 않습니까?》

《네, 리해할수 있습니다.》

《소영씨, 길림에 가면 거기서 며칠이나 머무르게 됩니까?… 한주일이라구요? 그렇다면 오늘아침 우리 이야기나 실컷 합시다. 정치담이 아니라 부드러운 이야기, 이 아침 정서에 어울리는… 저것 좀 보십시오!》

박인석은 팔을 들어 강쪽을 손짓하였다.

등이 파랗고 배가 하얀 물새 한쌍이 수면우에 낮추 떠서 아침대기속을 사이좋게 헤염쳐가고있었다.

림소영은 그 광경을 보자 슬그머니 눈을 딴데로 돌리였다.

 

11

 

고달픈 정적이 사흘째 계속되였다.

화성의숙은 숨을 죽이고 떠나간 네 청년을 기다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쏘아보낸 화살처럼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로 부랴부랴 무어서 떠나보낸 수색조들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행여나를 바라던 실날같은 희망마저 꺼진지가 오래다. 쫓아도 뿌리쳐도 사라지지 않고 검질기게 달려드는 근심과 불안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먹물처럼 짙어간다.

최동오숙장도 요 며칠사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 불안과 괴로움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체험하였다. 자식을 둔 부모들이 곁에 아이들이 없으면 얼마나 허둥거리게 되는가.

학생들이 없어진 그날부터 숙장은 출근시간에만 마지못해 학교에 들렸다가 인차 시내로 빠져나가군하였다. 전에는 복통이 터지게 불쾌한 일이 생겨도 일단 학교에만 돌아오면 진정제라도 먹은것처럼 인차 기분이 호전되고 안정되였다. 그때는 불가피하게 생기는 고통과 번민을 학교에서 풀었다. 아무리 삭이기 어려운 감정도 일단 의숙의 지붕밑에 들어서기만 하면 스스로 풀리였다. 그런데 지금 의숙은 그의 고민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화만 돋구어주는것이였다. 멀리서 교사의 지붕만 보여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쓸쓸히 외면하군하였다.

(혹시 내가 교육에 흥미를 잃은게 아닐가?)

최동오는 이렇게 자문도 해보았다. 그리고는 곧 도리를 흔드는것이였다. 소시적부터 꿈꾸어온 그 직업에 대하여 일조에 흥미를 잃어버릴 까닭이 없는것이다. 지난해 봄에 화성의숙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는 자진하여 화전땅으로 달려왔었다. 새로 발족한 《정의부》의 으리으리한 중앙기구안에는 그의 뛰여난 재질과 수완을 기다리는 요란한 편제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최동오는 그 모든것을 돌아보지 않고 길림에서 같이 일하자고 손을 끌어당기는 동료들의 진정어린 요청에도 유혹당함이 없이 흔연히 교단을 디디고섰다. 그때로부터 숙장은 빈터우에 세워진 이 학원에 장차 민족의 건아들을 수많이 키워낼수 있는 교육의 토대를 훌륭히 닦아놓았다. 그 1년은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이 류달리 투철한 숙장에게 있어서 생활의 진미를 그 어느때보다도 뚜렷하게 느끼면서 흥겹고 보람있게 살아온 의의있는 기간이였다. 관전중대 대원들까지 와서 학교를 돌아보고 별의별 찬사를 다하던 며칠전까지만 해도 생활은 그 궤도우에서 흘렀다.

그런데 예상치도 않았던 사건이 갑자기 그 궤도를 뒤흔들어놓았다.

학생들이 없어진 그날부터 모든것은 뒤죽박죽이 되였다. 화성의숙을 지배하고있던 평온하고 순탄한 호흡은 그 순간부터 깨뜨려지기 시작한것이다.

(그렇지. 그때부터…그때부터…)

최동오는 지금 이런 생각에 잠기여 서대가쪽으로 향방없이 걸어간다. 누구를 꼭 만나야겠다든가 무슨 일을 꼭 보아야겠다든가 하는 목적도 없이 발길이 닿는대로 구름처럼 떠다니는 맹랑한 걸음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찬바람이 썰렁거리는 쑥대밭과도 같은 마음속의 공허를 메꾸어보려는것이다. 따가운 해빛이 뒤덜미를 지지는 교원실 안락의자에 앉아 학감의 육중한 몸집을 보거나 시샘이 날 정도로 잘 생긴 군사교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것보다는 그래도 천태만상의 생활을 감상할수 있는 이 거리를 거니는것이 그에게는 한결 더 좋았다.

최동오는 서대가끝까지 갔다가 이어 돌따서서 북대가를 바라고 네거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빈마차 한대가 덜러덩덜러덩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곁으로 지나간다.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인 그 마부는 마부대에 앉아 멍에채밖으로 내려드리운 두다리를 건뎅건뎅 흔들면서 입이 미여지게 오이를 먹고있다. 머리꼭두에 열두벼락이 내려도 꿈쩍 안할 무사태평의 얼굴이다.

(저 사람한테도 걱정이라는것이 있을가?)

숙장은 그 감때사납게 생긴 사나이의 무사태평이 슬그머니 부러워났다. 한푼이라도 더 값을 받아내려고 아웅다웅하는 네거리의 저 가난한 광주리장사들도 다 자기보다는 셈평이 늘어진것 같았다.

(그래, 그때부터야!)

그는 다시금 본래의 그 생각에로 되돌아갔다.

돌이켜보면 학생들이 없어진 그날부터 박인석이와의 관계도 긴장되였다. 군사교관이 김리갑에게 권총까지 빌려주었다는 말을 듣자 숙장은 참지 못하고 학생들의 모험을 조장한것은 전적으로 박인석이였다고 호되게 추궁하였다.

박인석이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 기회에 교관은 그의 온건성을 서슴없이 공격하였다. 그는 의숙에서 용맹한 사자들을 키울 대신에 뒤고방 샌님들만을 키운다고 비난하였다. 이 충돌로 해서 최동오는 감당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았다. 가장 신임해온 사람이 반기를 들었다는것과 또 그 반기의 주되는 동기가 교육관에 대한 비판적태도에서부터 출발한것이라는데서 숙장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여태 자기자신의 신념이나 신조에 대해 의심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기때문에 화성의숙의 교육이 자기의 주관대로 진행되여나가는것에 대해서도 늘 응당한것으로 여겨왔었다. 교육뿐만이 아닌 생활의 다른 부면에서도 자기의 견해나 관점을 절대시하는데 습관되여왔었다. 그런데 이러한 숙장을 향해 박인석이 처음으로 싸움을 건것이다.

최동오는 자기의 교육관이 남들의 말밥에 오르내리는것으로 그 가치가 저락된것이 무엇보다도 가슴이 알알했다.

박인석은 또 들이댔다.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없어진것도 다르게 해석하면 화성의숙의 교육과 생활에 대한 굴절된 형태의 비판이며 비난인것이다. 학교의 교육이 마음에 들고 학교의 생활이 아기자기하다면 무엇때문에 그들이 딴꿈을 꾸겠는가. 교육이 마음에 없고 생활이 하도 따분하니 다른 우물을 파는것이다.

숙장은 괴로웠다. 결국은 이 모든것이 그의 교육에 흠집이 있으며 이로 해서 앞으로는 보다 더 큰 사건이나 동요가 일어날수 있고 따라서 숙장으로서의 그의 권위나 명성은 조만간에 빛을 잃게 될수도 있다는것을 실증해주는 증거로 되기때문이였다. 그는 참을성있게 박인석을 겨우 달래여놓았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자기의 신념에 대한 의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동오는 불현듯 자기가 디디고 서있는 땅이 서서히 꺼져내리는것 같은 착각을 느끼였다. 교육에 대한 애착,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한순간에 다 사라지는듯싶었다. 그는 화성의숙이라고 부르는 형체우에 생긴 깊숙한 파렬구를 커다란 공포를 가지고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의심할나위없는 파렬구였다.

(어떻게 되여 이런 파렬구가 생길수 있었을가?)

숙장의 생각은 끊임없이 넌출을 쳐나갔다.

벌써 네거리다. 어디선가 법석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릉려관앞에서 버들골쪽으로 무훈선전을 가는 채호국일행이 사람들의 환송을 받고있다.

최동오는 두눈을 지릅뜨고 그들을 쏘아보았다.

(바로 저들때문이 아닌가. 저들의 무훈담이 김리갑이네를 들뜨게 만들고 박인석에게도 강한 자극제의 역할을 논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저으기 마음이 개운해졌다. 화성의숙에 생긴 동요가 학교자체의 결함때문이 아니고 외부적인 작용에 의해서 생긴것이라면 그것은 그닥 고통스럽게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그리고 그런 동요는 그리 큰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가셔낼수 있는것이다.

《어, 이거 숙장선생이 이제는 인사도 안받는구려.》

옆에서 문득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오는 자감상태에서 깨여나 홀깃 소리나는쪽을 돌아보았다.

농립모를 쓰고 하얀 덧깃을 단 베돌찌를 입은 김시우총관이 부들부채로 바람을 켜면서 빈정거린다.

《총관어른이였구만. 제 생각만 하다나니…》

숙장은 어줍은 웃음을 그리며 사죄나 하듯 입안의 소리로 중얼거리였는데 자기와 그렇게 감정이 곱지 못한 총관앞에서 그런 저자세를 보인것이 스스로도 쓰거워서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건기침을 깇었다.

《그래, 그 녀석들은 돌아왔소?》

총관이 웃으면서 묻는 말이다. 없어진 학생들이 돌아왔는가 하는 뜻이다.

《아니, 아직…》

《그 리갑이랑 공부하기가 몹시 갑갑했던게로군.》

총관은 여전히 히죽벌죽이다.

《새매들을 조롱속에 가두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숙장의 말은 본의아니게도 없어진 학생들을 두둔하는데로 번져갔다. 의숙의 일이라면 늘 찌글써하게 대하는 총관앞에서 제자들 허물하기가 싫은것이다.

《이 삼복더위에 화성의숙교실안에 배겨있는것도 무던히 뻐근한 일이지.》

김시우는 그 비양거리는듯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최동오는 총관의 말에 아무 응수도 할수 없는것이 분했다. 그는 이 순간에야 비로소 온 거리의 사람들이 다 자기의 풀기 없는 꼴을 보고 뒤손가락질하거나 《무능한 숙장에 무법천지 의숙》이라고 수군덕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황황히 학교로 돌아왔다.

텅빈 운동장에는 그늘이 반나마 드리워있었다.

동네집 개 한마리가 눈을 감고 그 그늘속에 태평스레 드러누워있다. 잔등판에 까만 점이 박힌 딱정벌레가 잉- 하고 날아가 교원실창문을 성가시게 두드린다.

식당쪽에서 누구인가를 꾸짖는듯한 박인석의 열기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저렇게 어성을 높이는것은 드문 일이다. 불상사가 생긴 흉가에 욕설소리가 높다더니 그래서 교관의 음성도 저토록 높은것이 아닌가.

전같으면 《이게 또 무슨 변인가!》고 놀라서 그리로 무작정 발길을 돌렸을 다심한 숙장이지만 오늘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시들한 표정으로 교원실을 향해 걸어갔다.

어수선한 방안에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학감이 혼자 앉아서 무슨 회계를 맞추고있다.

《저기서는 왜 저렇게 고아대오?》

최동오는 안락의자에 앉아 손수건으로 땀난 이마를 문지르며 학감에게 물었다.

《글쎄요. 거야 누가 알겠습니까. 모두들 신경이 칼날같으니…》

경우가 대단히 밝으면서도 성미가 너글너글한 학감은 둥글넙적한 얼굴에 땀 한방울 흘리는 기색도 없이 열심으로 산판알을 튀긴다.

《란가는 란가로군.》

숙장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우편배달부가 내던지고 간 오늘호 《대동민보》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글줄은 하나도 눈에 밟혀오지 않고 잔뜩 팽팽해진 신경이 교관의 목소리를 향해서만 켕기여간다.

잠시후 그 목소리는 뚝 끊어졌다.

눈에 피가 지고 얼굴이 활딱 달아오른 박인석이 거칠게 문을 열고 나타나 숙장의 책상우에 부피가 그리 크지 않은 소책자 한권을 내놓았다. 그리고나서 자기 사무탁앞에 놓인 걸상을 한손으로 넌떡 들어서 숙장의 책상앞에 옮겨놓은 다음 거기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물었다.

《무슨 일이요?》

《그 책을 좀 보십시오.》

숙장은 후들후들 손을 떨며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제목도 씌여있지 않은 그 책의 뚜껑을 성급히 번져넘기였다. 그 순간 그는 대뜸 눈살이 꼿꼿해졌다. 그것은 의숙이 오래전에 금지령을 내린 《칼 맑스》란 소책자였던것이다.

《<칼 맑스>라, 이 책은 어디서 났소?》

《박두학이한테서 났습니다. 교실청소를 시켰더니 학교 뒤뜰에서 이 책을 읽고있지 않겠습니까.》

《음…》

최동오는 비명같은 신음을 길게 내지르며 침통한 눈빛으로 창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화성의숙에 뚫어진 또하나의 파렬구를 본것이였다. 그것은 김리갑이나 조기영이들이 뚫어놓은것보다 몇십배 더 큰 파렬구였다. 그 어떤 모험이나 망나니짓도 그들에게는 공산주의라는 사조에 비하면 덜 위험한것이기때문이였다. 침투력이 강한 이 위험천만한 사조가 학생들의 얼을 좀먹는 날이면 화성의숙은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지게 될것이다. 무산자청년들에게 있어서 칼 맑스의 자유분방한 령혼은 그처럼 큰 매력을 지니고있는것이다. 아니, 무산자들뿐아니라 중산층에도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화성의숙학생들의 대다수가 가난한 로동자, 농민 자녀들이 아니면 중산층의 자녀들이라는것을 념두에 둘 때 역병같은 힘을 가진 공산주의사조의 침습을 경계하고 미연에 방비하는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런데 그처럼 경원시하던 《붉은 유령》이 어느새 화성의숙에 위험한 물을 들이기 시작한것이다.

《음, 화단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숙장은 아까보다 더 절통하게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온갖 감각이 죄다 마비되고 그저 세상이 노래지는것 같은 느낌만 남아있다.

《그러게말입니다. 축구밖에 모르던 저 량순한 박두학이 속으로 그런 수박씨를 까고있는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박인석은 분을 참을수 없어 꽁초끝에 또 새 담배 한대를 가져다 불을 붙인다.

최동오는 교관이 자기앞에 찾아와 그런 화속이나마 털어놓는것이 여간만 고맙지 않았다. 옹쳤던 노여움이 그 한마디 말로써 다 풀리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피해의식이 결국 금이 갈번했던 그들의 친교를 다시금 이어놓은것이다. 숙장은 비로소 자기가 교관에 대해 고까운 생각을 품었거나 교관이 또한 자기 의사에 도전해나선것은 다 일시적인 마찰이며 그 마찰은 쉽사리 풀리게 마련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게 가지였다. 종전까지 교관에게 품어오던 신뢰감과 의존심이 본래의 모양그대로 되살아올랐다. 그는 교관과 손을 맞잡고 한시바삐 화성의숙에 생긴 파렬구를 메꾸고싶었다. 그래서 전에없이 싹싹한 태도로 박인석에게 하소하였다.

《인석선생, 이거 정말 야단났소. 빨리 대책을 세워야겠소. 그 학생은 어디 갔소?》

《저 문밖에 있습니다. 두학이 들어오우!》

박인석은 출입문쪽으로 몸을 돌리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꺽두룩한 박두학이 늘씬한 허리를 꾸부정하고 문설주앞에 나타났다. 그는 동공이 뿌연 눈을 느리게 슴뻑거리며 모자를 주무르고있었는데 거동이나 얼굴표정을 봐서는 그가 정말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치사받을 일을 하였는지 하나도 가늠할수 없었다.

최동오는 손시늉으로 그를 사무탁가까이에 불렀다.

《두학이, 그래 이 <칼 맑스>는 어디서 난건가?》

숙장은 교관이 압수해가지고 온 책을 손에 집어들고 흔들며 직방 따지였다.

《개원에서 산겁니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박두학의 대답은 자못 태연하였다. 《칼 맑스》가 김성주동지께서 빌려주신 김시우의 책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는 리무성이나 최창걸이 만일 이 대답을 들었다면 아연해서 그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을것이다. 그리고 그가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처럼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따지고드는듯한 시선을 받아들이는데 대하여 탄복하였을것이다. 뿌옇게 생긴 그의 눈이 무슨 감정을 담고있는지 그것은 누구도 알수 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 책을 샀는가?》

숙장은 문초를 계속하였다.

《모두들 재미나는 책이라고 하기에 샀지요.》

《재미? 허허, 그래 재미가 나던가?》

《나다뿐입니까. 나뽈레옹이나 워싱톤에 대한 전기보다도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워낙 칼 맑스란 사람이 나기는 난 사람입디다.》

박인석이 불시에 주먹으로 책상을 탕 내리쳤다.

《정신이 있어? 그 칼 맑스가 누군지 도대체 알기나 해?》

《엥겔스의 사촌형님이지요.》

박두학은 두눈을 빤히 뜨고 우정 엉터리없는 소리를 줴쳤다. 이런 정황에서는 무식한체하는것이 오히려 사태를 무난하게 만든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책과 독서자체를 비밀에 붙여야 한다고 하신 김성주동지의 당부를 어기기는 했지만 이 능구렝이는 교관의 엄포앞에서 꼬물만치도 당황해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허참!》

박인석은 그의 《무식》앞에서 쓰겁게 입을 다시는데 숙장이 또다시 기염을 토한다.

《칼 맑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래 <칼 맑스>를 읽는단말이요?》

《알면야 구태여 뭘하려구 읽겠습니까. 모르니까 읽는게지요.》

《단단히 알아두오. 이 칼 맑스란 말하자면 공산주의시조요. 공산주의가 뭔지 알고있소?》

《알다뿐입니까. 그거야 만민이 다같이 잘살자는 사상이지요.》

《아니요.》

최동오는 엄하게 부정하였다.

《그건 네것 내것이 없이 이 세상의 모든것을 다 공동소유물로 만들어버리자는 사상이요. 물건이나 재산은 말할것도 없고 밥도 가족들끼리 먹지 않고 몇십명씩 식당에서 공동으로 먹는다는거요.》

《숙장선생님두, 그럴리야 있습니까. 칼 맑스가 아무리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두 물건들까지 공동소유로… 헤,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밥을 공동으로 먹는다면 그것도 참 야단이군요. 난 고실고실한 밥이 아니면 지금도 잘 먹지 않는데 나같은 입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그 공동식당이라는데서 특별히 따로 밥을 끓여줄수 있을가요?》

《그걸 어찌 알겠소. 칼 맑스한테나 물어보오.》

최동오는 박두학이한테 공산주의를 납득시킨다는것이 고역과도 같이 지긋지긋한 일이라는것을 깨닫자 더 말을 하기가 싫어졌다. 그대신 숙장은 그가 《칼 맑스》를 읽은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이나 환상에서부터 출발한것이 아니라 그 나이의 청년들이면 누구나 다 가질수 있는 맹목적인 호기심때문이라고 판단하고는 약간 안도감을 느끼였다.

숙장의 입심이 점점 김빠지는것을 느낀 박인석이 이번에는 그를 대신하여 열을 올리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나라를 로국에 팔아먹으려는 역적들이고 민족내부에서 동족상쟁을 일으켜 류혈을 보고싶어하는 불한당들이야. 생각해봐. 아직 나라가 독립두 되지 못했는데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허황한 리론을 내놓고 계급투쟁에로 민중을 부추기고있으니 이게 왜놈들 면전에서 민족을 분해시켜 나라를 영영 망하게 하자는 수작이 아니고 뭐야. 우리 민족이 지금 <수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리상사회를 생각할 때가 됐어? 그러기는커녕 죽도 없어 못먹는 형편이 아닌가. 그 허망한 리론때문에 지금 사람들의 얼은 완전히 혼란상태에 빠지고있단말이야. 우리 민족은 먼 래일에 받을 분배라든가 살림걱정이 아니라 오직 독립 하나만을 생각해야 해. 그러니 칼 맑스의 령혼을 경계해야겠는가 안해야겠는가? 공산주의란 <공>자만 봐두 외면해야 해. 다른데 가서 <칼 맑스>를 읽겠으면 읽고 <일보 전진 이보 퇴각>을 읽겠으면 읽고 그건 마음대로 하란말이야. 그러나 이 울타리안에선 아무것도 용납할수 없어. 두번다시 이런 책을 읽다가는 화성의숙에서 쫓겨날줄 알란말이야. 알겠어?》

교관은 대답을 들을수 없었다. 박두학이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요란한 손기척소리가 들려왔던것이다.

때에 약간 절은 캡을 쓰고 수수한 양복차림을 한 젊은 신사 하나가 출입문가에 나타났다. 신사의 양복은 찌물쿠는 여름철에 어울리는 연회색의 천으로 지은것이였는데 양복색갈과 잘 조화되지 않은 넥타이의 한쪽가닥을 늦추고 와이샤쯔의 웃단추를 터치여 그가 젊잖은 옷차림이나 신사의 틀을 차리는것보다는 무더위의 구속에서 해방되는것을 더 중시하고있음을 보여주었다. 약간 두드러진 언덕이마와 곧고 부리부리한 눈매, 선이 날카로운 코와 호감을 주는 큼직한 입 그리고 억센 턱… 이것이 신사의 간단한 초상이다. 그의 인상에는 새 사조의 물결을 타고 전진하는 1920년대의 발랄하고 약동적인 사회운동상이 그대로 반영되고있었다. 신사는 레닌모를 벗고 넥타이를 매만진 다음 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방안을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교원실의 분위기는 돌변하였다. 《피고석》에 서있던 박두학은 가도 된다는 최동오의 손시늉을 보자 슬그머니 밖으로 사라졌고 숙장은 손님을 주시하면서 사무탁우의 《칼 맑스》를 빼람속에 슬그머니 집어넣었으며 박인석은 의자에서 일어나 신사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이거 김찬씨가 아닙니까!》

《박인석씨!》

신사도 교관 못지않게 흥분된 얼굴로 상대방의 손을 잡아흔들었다.

그들은 무언속에서 오래동안 서로 잡아쥔 손을 놓지 못하였다.

《우리가 도꾜에서 헤여진게 아마 1919년 4월이였지요. 나도 도꾜 대지진이 있은후 인차 고국으로 돌아왔댔습니다. 인석씨가 만주에 와서 활동한다는것은 먼 풍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김찬이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씻으며 먼저 대화를 이었다.

박인석의 예리한 매눈에도 감회가 실리였다.

《김찬씨를 처음 만났던 재일조선인류학생총회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인석씨는 <독립선언서>를 랑독하였지요.》

《김찬씨는 <결의문>을 랑독하구요. 돌이켜보면 정말 보람있는 시절이였지요. 이렇게 다시 이역에서 만나는구만요. 반갑습니다.》

《당분간 나도 이 만주땅에서 청춘을 소모해야 할것 같습니다.》

《만주에서요? 물론 공산주의운동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하긴 김찬씨가 <화요파>중진의 한사람으로 공산당창건시에도 활약이 컸다는 소리는 나도 들었습니다. 가만 있자, 이거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다보니… 인사하십시오. 우리 숙장선생님이십니다.》

박인석은 김찬의 손을 끌고 최동오의 사무탁앞으로 걸어갔다.

《숙장선생, 도꾜류학시절에 사귄…》

최동오는 《알겠소.》 하고 교관의 말을 가로채며 김찬의 손을 잡았다.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인사였다. 그는 아까 박인석의 질문속에서 《공산주의운동》이라는 말이 튀여나올 때부터 이 자리를 피하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더구나 그가 파쟁의 왕초집단인 《화요파》중진의 한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는 속이 메슥메슥해지기까지 했다. 숙장은 김찬에게 의자를 권한 다음 두사람에게 교원실을 내여주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는 또다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칼 맑스》책이 나타나자 《화요파》가 나타나고, 《화요파》가 나타나자…)

최동오는 지붕꼭대기에 날아와 까욱거리는 까마귀를 쳐다보며 모든것을 절망에 내여맡긴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음, 조짐이 심상치 않군. 불길한 징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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