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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15 회 )
6
소뿔도 꼬부라든다는 삼복더위가 련일 폭양을 들붓고있던 어느날 오후였다. 관전중대의 채호국일행과 함께 화전에 도착한 림소영은 본부의 지령에 따라 림시로 배속될 안도선중대의 병영에 들려 중대장과 잠간 인사를 나눈후 삼백을 타고 시내로 내려왔다. 현성에는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았던것이다. 오늘도 첫 순서로 역시 김시우총관의 집이다. 화성의숙에 들려 김성주동지를 먼저 만나보고싶은 욕망이 무엇보다도 간절하였지만 마치 그리로 발길을 선참 돌리는것이 박인석이를 만나보기 위한 무슨 방편처럼 되는것 같아서 그 소원만은 강다짐으로 눌러버리였다. 총관만 만나면 그 다음은 그 누구와 마주서든 허물이 될것이 없다. 림소영은 울타리밖의 말뚝에 삼백을 비끄러매놓고 얼굴에 흘러내리는 줄땀을 손수건으로 닦은 다음 건듯 치켜쓴 대패밥모자를 벗어 바람을 켜면서 천천히 뜨락으로 들어갔다. 이 무더위에도 그는 여전히 온 남만사람들의 눈에 익은 그 황갈색바지를 입고있다. 우에 입은 옥색반소매가 그 황갈색에 받들려 한결 시원스레 보인다. 남새밭 가녁을 따라 일매지게 피여난 해바라기잎새들이 기분좋게 이마를 건드린다. 일각대문에서부터 부엌문쪽으로 곧추 뻗은 좁다란 통로는 아슬한 장대기들에 넌출을 지으며 기여오른 당콩잎새들과 강냉이잎새들, 아주까리잎새며 해바라기잎새들에 덮이여 자못 서늘하다. 더위에 후줄근해진 낯익은 검정개가 혀를 빼물고 그 그늘속에 비스감치 드러누워 느침을 흘린다. 짖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꼬리를 저으며 반기는양도 없이 짐승은 만사가 다 시들하다는듯한 표정을 담고 그저 무사태평으로 누워있다. 그러다가 무슨 충동을 받았는지 문득 표정을 바꾸어 의혹에 찬 눈으로 구면의 이 아릿다운 손님을 쳐다본다. 림소영의 신상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가 다 뜻밖이며 너무 현저해서 인차 알아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그사이 무슨 변고가 있었느냐고 캐여묻는듯한 눈길이였다. 림소영은 어쩐지 말은 못하나 그지없이 령리하고 예민한 이 짐승의 측은해하는듯한 시선이 언짢아졌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뜨락을 지나 토방에 올라섰다. 반쯤 열려진 정지문으로 집안을 들여다보니 방이 텅 비여있었다. 처녀는 잠시 어떻게 할바를 몰라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토방우에서 머뭇거리였다. 그러는데 저쪽 구새목이 있는 모퉁이에서부터 선화가 쪼르르 달려나와 김시우의 서재가 자리잡은 웃방문을 막아서며 《여긴 성주오빠 방이야!》 하고 오돌차게 소리쳤다. 림소영을 경계하는 계집애의 올롱한 눈은 자못 단호하고 위엄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순박한 철부지는 자기의 그 올곧잖은 선언이 상대방에게 어떤 유쾌한 암시를 던져주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있었다. 《선화야, 너 날 모르겠지?》 림소영은 어린애앞으로 한걸음 다가서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제야 선화는 눈을 깜빡거리며 처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지미!》 그 애의 입에서 이런 탄성이 가늘게 새여나왔다. 어린것의 말랑말랑한 기억력은 드디여 망각을 이겨내고 자기에게 타래엿을 사다주고 갑사댕기를 매여주며 설죽화이야기를 들려주던 살틀하고 고마운 《평안도아지미》를 알아본것이다. 선화는 자기가 그처럼 반가운 손님을 인차 알아보지 못하고 너무 쌀쌀하게 대한것이 몹시 창피하게 느껴지는지 한쪽 손가락을 입귀로 빨며 방시레 웃다가 뒤로 냉큼 돌따서서 웃방문을 사르르 열었다. 그 순간 방안을 들여다보던 림소영은 깜짝 놀랐다. 서가앞에 앉아 책을 읽고계시는 김성주동지를 보았던것이다. 문이 열려진것도 모르고 또 그 문앞에 선화의 보초선을 용케 통과한 손님이 서있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독서에 여념없으신 그이의 심각한 모습을 대하자 처녀는 대뜸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해져서 손으로 문설주를 꽉 짚었다. 김형직선생님의 묘지앞에서 터뜨리던 설음이 또다시 온몸과 넋을 휩쌌던것이다. 책장을 번지시던 김성주동지께서 마침내 머리를 쳐들고 림소영의 얼굴에 눈길을 멈추시였다. 깊은 탐색의 자취가 비껴있던 그이의 얼굴은 일순간 환한 웃음으로 덮이였다. 《누님!》 그이께서는 책을 덮으며 서가앞에서 환희에 넘쳐 몸을 일으키시였다. 《성주!》 림소영이도 마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문턱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그냥 한자리에 그루를 박은채 김성주동지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또한 무슨 말로 그이를 위로해야 할지 도저히 마음을 다잡을수 없었던것이다. 처녀의 비좁은 가슴에 태를 치며 통곡하는 처절한 애도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언어라는것이 너무도 무력하였다. 《누님,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림소영을 마주보시였다. 석달만에 이루어진, 고대하던 상봉이 어쩌면 이다지도 서먹서먹할가싶다. 《아니다. 책을 읽고있는 너의 모습이 신통히도 김선생님의 모습과 방불해서 그런다. 어쩌면 그렇게두…》 림소영은 그제사 좀전의 심각하던 얼굴빛을 웃음으로 덮어버리며 그이의 손을 덥석 붙잡고 서재안으로 들어갔다. 그 무엇으로써도 지울수 없는 커다란 상실의 그림자를 읽을줄로만 알았던 김성주동지의 눈가에서 가슴을 긁어내리는 번뇌와 수심 대신 생활에 대한 불꽃같은 열정과 탐구의 기백을 찾아본 림소영은 눈물겹도록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처녀는 아직 크나큰 비애를 이겨내신 그이께서 이 화전땅에 발을 붙인후 자신의 넋을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끌어올리시였는지 다는 알수 없었다.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다렸습니다. 이 여름에는 누님이 더 못견디게 보고싶었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녀자의 손같지 않게 껄껄해진 림소영의 손을 놓지 않고 갈린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나두 네가 무척 보고싶었다. 그런데… 네 보기가 미안하구나. 장례식에도 못가고… 어쩜 나한테는 부고조차 띄우지 않았니?》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저 상해에 가계신다는데 상해 어느 골목에 계시는지 알수 있어야지요. 그래 전보를 치지 못했습니다. 썩 후에야 오동진선생님이 누님이 계실만한곳을 알려주시는게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그게 다 내 불찰이지. 행처가 변할 때마다 수시로 편지를 보내여 주소를 알렸으면 되는건데.…》 《다 지나간 일인데 자꾸 후회하시면 뭘합니까. 그 장례식에 오지 못한게 어디 누님뿐입니까. 만경대에 계시는 우리 조부모님들과 큰삼촌께서도 아버지와 직접 영결하지 못한것을 일생의 한으로 생각할것입니다. 그래 이 화전에는 얼마나 계시게 됩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마음속깊이 가라앉은 비감을 다시 덧굳혀주는 그 화제를 이어가기가 괴로와 얼른 말머리를 다른데로 돌리시였다. 《서너달 있게 될것 같다. 무송어머님곁을 떠가기 싫어 우물쭈물하고있었는데 어머님께서 어떻게나 재촉하시는지. <내 하나가 적적하다고 소영이까지 붙잡아두고싶지 않소.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떠나오.> 이렇게 등을 미시는바람에 그만 지고말았지.》 《정말 기쁩니다. 누님이 오셨으니 화전생활이 더 재미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고독스럽게 지내실 너희 어머님을 생각하면 자꾸 무송쪽으로 고개가 돌려진다.》 《어머니는 아마 고독스러울 사이가 없으실겁니다. 한뉘 손에서 놓지 못하시는 일이 어머님을 동무해드릴테니까요.》 《그래두…》 림소영은 석달전보다 몰라보게 달라진것 같은 김성주동지의 어른스러운 말투며 몸가짐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이께서 보시던 책표지를 넌지시 굽어보았다. 최근에 사회운동자들속에서 널리 읽히고있는 《공산당선언》이였다. 처녀는 다시한번 놀랐다. 소설책이라고만 추측했는데 여기에서 이런 사회서적에 눈을 돌리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송시절에 이미 《사회주의대의》라는 책을 읽으시는것도 목격하기는 하였지만 화성의숙이란데는 원래 공산주의를 무슨 불치의 병마처럼 여기면서 담을 쌓아놓고있는곳이였다. (저 말투나 몸가짐에서 생긴 무게는 이와 같은 내적인 지향의 변화에서부터 온것일가?) 림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깃드는 한가닥 의혹의 실머리를 건드리며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화전생활이 어떠냐? 화성의숙은 마음에 드니?》 《학과내용이나 교육방법에서는 별로 마음을 끌어당길만한 새것이 없습니다. 독립군간부를 양성한다는 화성의숙의 사명을 놓고볼 때 이 학교의 교육강령에는 마땅히 조선독립의 구체적인 방도나 전술 같은것이 밝혀져있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데 있습니까? 조선력사에도, 세계혁명사에도, 삼민주의에도, 군사학에도… 그저 온통 <독립하자!>, <격멸하자!>는 구호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력사교원은 김옥균선생을 친일파로 몰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지 못한걸 통탄하고있지요. 그래 누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호호, 그것참 대단히 명석한 판단이군.》 림소영은 겉으로 이렇게 웃고있었지만 김성주동지의 류다르게 번쩍이는 눈길에서 그 어떤 위엄과 새로운것을 발견하게 되여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움츠러뜨렸다. 《그러나 의숙의 모든게 죄다 마음에 안드는건 아닙니다. 선생들이 모두 친절하고 인정있는분들입니다. 박인석선생은 두말할것도 없고 숙장선생이랑, 학감선생이랑 다같이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고있습니다. 동무들보기가 송구할 지경입니다. 일요일이면 숙장선생이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우리들을 청합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숙장선생과 총관아저씨가 동시에 팔을 잡아끌기때문에 어느 집으로 가야 할지 난처할 때도 있습니다.》 《원래 이곳 숙장선생이 아주 상냥하고 인자한분이라더구나. 아마 타고난 교육자인가봐.》 《의숙에는 또한 좋은 동무들이 많습니다. 참 얼마전에 무성이도 의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래.》 《안타까운건 새것이 없는것입니다. 우리의 눈앞을 환히 트이게 해줄수 있는 새로운 과목,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스승들이 그립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아는것도 적지만 내 스스로 새것을 찾으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첫걸음으로 이 서재를 타고앉았습니다. 좋은 책들이 많습니다. 누님도 이 책을 읽으셨겠지요?》 김성주동지께서는 《공산당선언》을 눈짓하시였다. 《한번 얼추 훑어보긴 했는데 정독하지는 못했다.》 《아주 좋은 책입니다. 나는 여기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내용도 없는 텅빈 구호만 부르짖는 모든 사람들, 아직 세상에 <공산당선언>이라는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무산자들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소리치고싶습니다. 가만, 누님, 먼 려행에 피곤할텐데 내가 지나친 장광설을 늘어놓는게 아닙니까?》 《아니… 계속해. 슬픔에 주저앉지 않고있는 너를 보는것만도 나는 기쁘다. 그리구…》 《아닙니다. 누님, 누님은 지금 몹시 피곤해하고있습니다. 좀 누워서 쉬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 아니 왜 그렇게 얼굴에 수심이 꼈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림소영의 얼굴을 불안스럽게 살펴보시였다. 이전보다 살도 빠지고 눈까풀도 푹 꺼져내린 얼굴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도 즐겁게 해주고 황홀하게 해주던 생신하고 활달한 기상은 그의 모습에서 거의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었다. 그 매혹적인 눈만은 종전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생기를 띠고있으나 그것마저 자주 아래로 내리깔군하였다. 림소영은 앞가슴에 내려드리운 머리카락을 어깨뒤로 쓸어넘기며 쓸쓸히 말하였다. 《군세가 날을 따라 쇠약해져가는게 내 눈에도 알린다. 나자신 독립군에 대한 기대는 사라져가고… 그 불안때문에 내 얼굴이 이렇게 축가는지도 모르겠다.》 《누님, 그러시면 됩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신념을 잃는 한이 있어도 누님만은 꿋꿋이 품은 뜻을 안고 걸어가리라고 믿어왔습니다. 세상에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있고 조선민족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은 다시 조선사람의것이 되고야맙니다. 우리 새세대들이 나라를 찾고야말것입니다. 누님, 기운을 내셔야 합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쇠잔해진 림소영의 기맥을 북돋아주기라도 할듯 손바닥으로 《공산당선언》을 힘있게 내려치시였다. 그이의 눈에서는 불길같은것이 황황 타오르고있었다. 강반석어머님을 위로해드리려는 뜻을 이루려다가 제사 도리여 슬픔의 포로가 되여 어머님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던 무송에서처럼 림소영은 여기 화전에 와서도 이처럼 김성주동지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성주동지와의 상봉으로 저으기 기분도 명랑해지고 피로도 풀린 림소영은 잠시후 서재를 나섰다. 그는 토방우에 놓여있는 보따리를 들고 싸리바자앞에 걸어놓은 딴가마앞으로 다가갔다. 삼복철마다 총관의 집에서 하루 한끼씩 음식을 끓여내는 바깥가마였다. 덧매질을 해놓은지 오래지 않은 부뚜막은 터갈라진 자리 하나 보이지 않는데 떡이라도 굴릴수 있을만큼 매끈하고 정갈하였다. 림소영은 가마뚜껑을 들어 부뚜막옆에 있는 세면대우에 올려놓았다. 조심을 두어 하느라고 했는데도 나무판대기에 부딪치는 쇠소리가 뎅겅- 하고 징소리처럼 들리였다. 《누님, 쉬지 않고 오자바람으로 또 무슨 일을 합니까?》 김성주동지께서 《공산당선언》을 드신채 한손으로 문설주를 짚고서서 부뚜막쪽을 내다보신다. 《일은 무슨 일… 녀자로 생겼으니 그저 어데 가서나 가마뚜껑부터 열어보는게지.》 림소영은 서재쪽을 향해 실눈을 짓고 능청을 떨었다. 《어서 들어와 쉬십시오. 쉬기가 싫으면 앉아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상해에 갔다왔으니 무슨 화제거리가 많을게 아닙니까.》 《많지, 가만… 조금만 기다려라. 내 인차 들어갈테니. 그런데 이 집 주인들은 모두 어데 갔을가?》 《총관아저씨는 며칠전에 길림으로 가시고 아주머니는 강변에 빨래하러 나가신것 같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다시금 책에 파묻히시였다. 림소영은 우물에서 물 한동이를 제창 길어다가 가마속에 두어바가지 퍼넣고 그우에 시루를 얹은 다음 보따리를 끌렀다. 보따리속에서는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열대여섯개의 강냉이이삭들이 나왔다. 무송에서 가지고온 강냉이였다. 그 이삭들은 하나같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시루우에 강냉이들을 차례차례 들여눕히였다. 그 다음은 가마뚜껑을 닫고 때다 만 장작을 구새목에서 들어다가 아궁에 불을 지폈다. 이 모든 일은 어찌나도 재빠르고 률동적으로 진행되였는지 림소영이자신도 설겆이가 가져다주는 독특한 률조와 쾌감때문에 내내 흥겨운 기분에 잠겨있었다. 이마적에는 왜 그런지 《녀걸》이라는 별명을 지니고있는 그답지 않게 설겆이에 재미를 붙이였다. 녀성이라는 그 본능의 힘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림소영은 녀자의 손과 눈이 미쳐야 할 모든것에 점점 더 큰 주의를 돌리였다. 그는 아궁속에 마지막 장작가치 몇개를 칡끈과 함께 밀어넣고나서 서재로 들어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보시던 책장의 페지수를 얼핏 새겨두고나서 무릎우에 책을 내려놓으시였다. 그러고는 문턱앞에 놓인 법랑소랭이를 가리키며 권고하시였다. 《누님, 그 물에 발을 담그십시오. 발이 팅팅 부었구만요.》 림소영은 그제서야 자기의 발등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발은 정말 무슨 부증이라도 들었을 때처럼 험하게 부풀어올랐다. 화전까지 오면서도 발이 붓는것에 대해서는 한번도 관심한적이 없었는데 매사에 통이 크면서도 섬세하신 김성주동지께서 어느새 그것을 알아보고 물까지 떠다놓으신것이다. (참, 어쩌면 이렇게두 생각이 깊을가.) 림소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오른쪽손가락으로 부어오른 발등을 꼭 눌렀다. 손가락자리는 움푹 패였다가 한참만에야 제모양으로 돌아간다. 《어이구, 못나게는 부었네. 장참 말만 타구다니는데 왜 이모양일가?》 《무더운 계절이 아닙니까. 혈관이 확장되니까요. 그래서 무송현장은 삼복철마다 물대야에 발을 잠그고 집무를 본답니다. 어서 발을 잠그십시오.》 《고맙다, 잠그지.》 림소영은 찬물의 감각때문에 발을 가드라뜨리며 헉- 하고 진저리를 쳤다. 온 얼굴에 웃음을 함뿍 실으며 까르르 웃었다. 김성주동지께서도 즐겁게 웃으시며 그 모습을 바라보시였다. 그 다음은 어덴가 헛딴곳을 보면서 림소영에게 물으시였다. 《누님, 박인석선생님은 만나보았습니까?》 《아니, 아직…》 림소영은 약간 당황했으나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고 심상하게 대꾸하였다. 《그러시면 됩니까. 나를 못만나도 화성의숙에부터 먼저 가셔야지요.》 《차차 만나게 되지 않으리, 지금도 군사학을 가르치시더냐?》 《예, 군사학외에 수학을 더 배워줍니다. 병으로 자주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고선생을 대신하여 세계혁명사를 가르쳐주실 때도 있습니다.》 《원래 력사를 전공하려던분이니까. 그이의 아버지는 한때 리조망국사를 써서 경찰에 피검된적도 있는 사가라는구나. 아버지는 옥에서 나온후 인차 돌아가고 필자를 잃은 망국사는 볕도 보지 못하고 총독부 경무국의 서랍에서 휴지로 돼버렸다는게다. 이게 아마 그이가 독립운동에 나선 직접적인 동기인지두 모르겠다.》 《아, 그렇댔군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걸 들은바 있지만 그 지사가 바로 박인석교관의 아버지인줄은 알지 못하시였다. 《아버님은 그 유고를 완성시켜줄것을 아들에게 유언하셨다는구나. 그러나 박인석씨는 그 뜻을 이어갈수가 없었다. 물론 왜적의 간섭도 있었지만 애당초 그이는 학자나 사가로 될 생각은 없은 모양이더라. 원래 온화한 사람이 아니니…》 림소영이 말끝을 얼버무리며 싱긋이 웃어보이였다. 박인석에 대하여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해보기는 처음이였다. 이것이 다 자신의 신상에서 조심히 일어나고있는 변화의 한 표현이 아닐가 하는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구수한 냄새가 나는구만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책에서 눈길을 떼며 별안간 숨을 길게 들이그으시였다. 《아이, 이 정신 좀 봐!》 림소영은 황황히 젖은 발을 대충 문지르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아궁안에서 이글이글한 잉걸불이 뻘겋게 열을 올리는대로 가마전에는 이슬방울같은 물방울들이 송알송알 맺히였다. 뚜껑굽도리로는 하얀 실김이 소리를 치며 새여나와 천둥벌거숭이가 날아다니는 허공중에 하늘하늘 흩어져간다. 림소영은 다 익은 강냉이이삭들을 채그릇에 무드기 담아가지고 다시 김성주동지께서 계시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방안은 구수한 강냉이냄새로 꽉 찼다. 《이런, 강냉이구만요.》 김성주동지께서는 노랗게 변색한 오사리에서 피여오르는 김에 눈을 주며 유쾌한 어성으로 말씀을 하시였다. 《그렇게 강냉이를 좋아한다면서?》 《예, 무척…》 《그럼 오늘 실컷 들려무나.》 림소영은 방가운데에 채그릇을 내려놓고 그것을 김성주동지앞으로 밀어보냈다. 그리고는 멀찌감치 서재에 등을 기대고앉아 그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서 들어라.》 《누님도 같이 드셔야지요.》 《나는 천천히 들지, 어서 너나 들어라.》 《이 많은 강냉이를 나만 먹으랍니까. 어서 드십시오.》 림소영은 마지못해 여러문개 되는 강냉이들중에서 제일 작은것으로 한이삭 골라들었다. 그러나 먹지는 않고 따가운 오사리를 종이로 말아쥔채 김성주동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도 잡수시지 않고 다감한 표정으로 채그릇의 강냉이이삭들을 내려다보시였다. 《벌써 강냉이를 먹게 되였으니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합니다. 내가 화전으로 올 때 우리 집 뒤뜨락의 강냉이는 개꼬리도 나지 않았는데… 가만있자, 선화가 어디 갔을가?》 《방금전에 엄마한테 가겠다고 하면서 뜨락을 나갔다. 선화의 몫은 남겨두었으니 어서 들어라.》 《예, 먹지요.》 김성주동지께서는 강냉이를 잡숫기 시작하시였다. 한참 달게 잡수시던 그이께서는 고개를 들고 림소영을 향해 말씀을 건네시였다. 《풋강냉이가 참 별맛입니다. 누님덕분에 벌써 이런 별식까지 하게 됐구만요.》 림소영은 그 말씀을 듣자 갑자기 얼굴색을 흐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성주야, 그건 무송어머님이 보내신거다. 어머님께서 우리 성주가 강냉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뒤뜨락의 강냉이를 따서 보내신거다.》 《그렇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잡수시던 강냉이를 더 넘기지 못하고 창문밖으로 눈길을 보내여 가없이 비껴간 남쪽하늘을 바라보시였다. 그저 목이 꽉 잠기고 눈앞이 흐려와서 아무 말씀도 할수 없으시였다. 아버님의 병환때문에 심뇌하시던 그 봄 그이께서는 어머님께서 언제 뒤뜨락에 강냉이를 심었는지 알지 못하고계시였다. 며칠후 새로 생긴 밭이랑들에 생겨난 연록의 애어린 싹들을 보신 다음에야 뒤뜨락에서 일어난 변화를 감촉하시였다. 아버님의 병환때문에 빚어지는 과중한 정신적고통이 그 모든것을 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전에로의 출발을 앞두고 망설이던 그날 그이께서는 비바람에 흔들리던 뒤뜨락의 강냉이잎사귀들을 류다른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시였다. 개꼬리도 나오지 않았던 그 강냉이가 벌써 이처럼 여무진 이삭으로 되여 그이의 가슴을 아프게 긁어내릴줄을 어떻게 알았으랴. 《어머님은 성주한테 보낼것이 없다고 하시더니 이걸 싸주면서 말씀하시지 않겠니. <우리 성주는 풋강냉이를 좋아하오. 이것밖에 보낼것이 없구만… 하지만 성주가 달게 먹을거요…>》 림소영은 설음이 북받쳐올라 채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어머니두 참…》 김성주동지께서는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격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시였다. 림소영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그는 강냉이이삭을 쓰다듬고계시는 김성주동지의 손을 꼭 움켜잡더니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생활에서 간혹 웃을 일이 있을 때에두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 6월부터…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다음부터… 그 큰 설음을 용케 이겨가시는 어머님을 볼 때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못하고 눈물에 젖은 림소영의 손만 쓸어주시였다. 《누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인젠 지난 일보다 앞날을 생각하여 힘을 내야 합니다. 어머님도 그럴걸 바라지 않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갈린 음성으로 어깨를 들먹이고있는 림소영이를 조용히 위로하시였다.
7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도 김시우네 집 식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를 찾는다면서 나가던 선화조차 통 돌아올줄을 몰랐다. 장마후의 송화강물이 어지러워서 최아지가 혹시 다른 개천으로 빨래임을 이고갔는지도 모른다. 림소영은 기다리다 못해 울밖에 나가서 삼백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구새목에 쌓여있는 건초로 요기를 약간 시킨 다음 물로 삼백을 씻어주었다. 그는 아무리 바쁜 때에도 이 절차만은 어기지 않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림소영을 도와 초롱에 물을 쉴새없이 길어오시였다. 송화강가에 나가있던 리무성이 림소영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총관의 집으로 뛰여온것은 바로 이무렵이였다. 그는 나타나자바람으로 림소영을 붙잡고 너스레를 떨었다. 《누이, 원로에 오시느라구…》 그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것은 지분거리기 좋아하는 리무성의 성미다. 그도 김성주동지와 함께 엇바꿔가며 초롱에 물을 날랐다. 《누이, 박교관선생님은 만나봤소?》 한참 물을 긷던 리무성이 말잔등에 비질을 하는 림소영이더러 물었다.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박교관, 박교관이다. 《아니, 만나지 못했다. 내가 왜 무성이두 만나지 않구 박교관부터 만나?》 리무성은 그 소리를 듣자 손벽을 딱 치며 펄쩍 놀라는 시늉을 하였다. 《누이두 참, 그렇게 차례를 헛갈리다니…》 그는 서둘러 김성주동지와 림소영의 손을 끌고 거리에 나섰다. 무더위에 땅땅 마른 땅은 행인들의 발밑에서 떡가루같이 부드러운 먼지를 풀썩풀썩 피워올렸다. 《가만 계십시오, 누님. 화성의숙에는 가시지 않아도 될것 같습니다. 저기 네거리쪽을 보십시오.》 행길 변측에서 걸어가시던 김성주동지께서 림소영의 팔을 다치며 서대가쪽에서부터 굴러오는 달구지를 손짓해보이시였다. 각재와 널판자들을 가득 실은 그 달구지에는 박인석군사교관이 앉아있었던것이다. 《저 선생은 언제부터 저렇게 <차부>로 일하니?》 몸가짐이 별스레 부자연스러워진 림소영은 이상하게 발걸음을 구속하는 긴장을 눙치려고 애쓰면서 태연을 떨었다. 《요새는 이따금씩 저렇게 말구지를 몰고다니군합니다. 저건 무기고의 총가를 만드는데 쓸 목재들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 이런 대답을 하시자마자 리무성이 끔뻑 뜻있는 눈짓을 하며 가재걸음을 했다. 《누이, 그럼 난 그만 실례하겠소. 누인 빨리 오작교에 가시구려. 가만있자, 향단이가 없어서 어쩐다?》 그는 짐짓 향단이가 없는데 대한 걱정이나 하는것처럼 머리를 싸쥐고 눈을 슴뻑거리다가 단념하듯이 손으로 허공을 홱 내리그었다. 《에라, 방자도 없는데 향단이가 있으면 뭘한다구.》 그다음은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골목길 저쪽으로 멀어져갔다. 멀리서 림소영을 알아본 박인석은 달구지우에서 훌쩍 뛰여내려 인사의 표식으로 손에 든 채찍을 공중에 휘저었다. 변함없이 활달하고 민첩한 손세였다. 림소영은 낯익은 그 손세를 보자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여 더 걸어나가지 못하고 거리 한옆에 멈춰섰다. 얼마나 만나고싶었던 그리운이인가. 그 그리움은 그가 겪게 된 비극적인 상실을 다른것으로 메꾸어보려는 눈물겨운 본능의 결과인지도 몰랐다. 오직 살틀한 인정과 그것을 대신할수 있는 사나이의 억센 품만이 그의 가슴속에 연기처럼 가득 서린 슬픔을 다소라도 덜어줄수 있는것이다. 《오셨구만!》 박인석은 행길옆에 치우쳐 마차를 세우고 림소영의 손을 잡았다. 볕에 검스레하니 그슬린 철색의 얼굴은 여전히 돌로 쪼아낸것처럼 탄탄하고 멀끔해보이였다. 훤칠하고 균형이 잡힌 그의 몸에서는 용수철같은 탄력과 건강미가 내풍기였다. 예리한 매눈이 무슨 흠집이라도 찾아낼것처럼 처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핀다. 《오래간만입니다.》 림소영은 사나이의 아귀센 손에서 손을 뽑아내며 짤막하게 말하였다. 무슨 말을 많이 할것 같았는데 정작 만나고보니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인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곁에 제삼자가 있어서 그런것은 아닌지.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전에 왔습니다.》 《그 관전중대사람들도 왔습니까?》 《네, 지금쯤 려관에 가있을겁니다.》 《아, 그렇군, 그럼 소영씨, 여기서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 내 얼른 이걸 부리우고 돌아오겠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 대신하여 학교까지 달구지를 몰고가겠다고 제의해나서시였으나 박인석은 무엇때문엔지 종시 동의하지 않았다. 《소영씨, 여기 있지 말구 차라리 강변으로 나가계십시오. 저-기 상류쪽이 아마 조용할겁니다.》 그는 달구지를 끌고가면서 림소영을 향해 덧붙이였다. 교관이 사라지자 김성주동지께서도 리무성이들한테로 가겠다며 네거리에서 떠나시였다. 얼마후 림소영과 박인석은 약속대로 송화강기슭의 모래터에서 다시 만났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상류쪽이여서 그곳은 매우 조용하였다. 나지막한 버들숲에 둘러싸인 그 모래터에서는 한낮의 해빛을 받아 들크무레해진 향긋한 야생초냄새가 코를 찔렀다. 박인석은 모래터에 반쯤 누운 자세로 홀린듯이 림소영을 쳐다보고있었다. 어쩌면 저렇듯 이쁘장한 녀자가 나의 련인으로 될수 있었을가 하는 표정이였다. 《그런바치고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소영씨가 화전으로 아주 조동하고마는걸 그랬습니다.》 그는 방금전까지 며칠전에 림소영이한테서 받은 편지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다가 상대방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림소영은 버들잎을 뜯어 잎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며 실눈으로 먼 앞쪽 어딘가를 내다보았다. 《건 왜요?》 《소영씨의 존재를 항상 가까이에서 느끼고싶은 내 리기심에서이지요.》 림소영은 아무런 응대도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오늘은 이렇게 잠자코 앉아서 몇달째 들어보지 못한 박인석의 말을 끝없이 듣고싶었다. 그러면 가슴속에 생긴 상처가 다문 얼마라도 아물것 같았다. 그는 손에 모래를 한웅큼씩 쥐였다가 줌으로 흘러보내여 《산》을 쌓기 시작했다. 《또 말씀하십시오.》 처녀는 말했다. 《그래 소영씨는 그냥 듣기만 하고 나만 말하랍니까? 왜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나야 무송에서 이미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인석씨의 차례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뿐이였지요.》 박인석은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가볍게 랭소하였다. 《그렇다면 정치를 떠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요새는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림소영은 주머니에서 《상평통보》한잎을 꺼내여 손수 쌓은 꼬마모래산에 집어넣고 성냥살만큼한 굵기의 나무개비로 그 엽전의 구멍을 걸어당기는 놀음을 시작하였다. 구멍을 면바로 걸어당기면 운이 좋아진다는 허무맹랑한 놀음이였다. 지금 나무개비로 《모래산》을 뚜지는 처녀의 마음속에 그 무슨 운을 바라는 기대같은것은 없었다. 그것은 눈부신 해빛과 향기로운 풀냄새로 가득 들어찬 이 따뜻한 모래터에서 오래동안 번열로 시달려온 넋을 달래이기 위해 잠시나마 동심의 세계에 파묻히고싶은 단순한 욕망에서였다. 박인석도 나무개비를 찾아들고 인차 그 놀음에 합류하였다. 《최근에 내 머리를 지배하고있는것은 소영씨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앉으나서나, 자나깨나 내 눈앞에서는 소영씨의 얼굴만 서물거립니다. 한번은 소영씨와 함께 삼백을 타고 소영씨의 고향땅으로 가는 꿈도 꾸었습니다. 옛고향집앞에 있는 박우물의 물맛은 참 기막히더구만요.》 《꿈에라도 고국땅을 밟는다는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런데 나한테는 어찌하여 그런 행운이 한번도 차례지지 않을가요. 인제는 내 마음도 세월의 풍운에 터서 고삭아진것이나 아닌지…》 림소영은 입가에 서글픈 웃음을 담고 《모래산》을 굽어보았다. 박인석은 《상평통보》를 찾던 나무개비를 코앞에 흔들며 위혁하듯 말했다. 《소영씨, 정치담은 화제에 올리지 않기로 했지요.》 《아, 그랬던가요? 정치 없는 이야기를 엮자면 참 힘들겠습니다. 아니, 우리주위에 정치를 떠난 생활이란 있을수 있을가요?》 《왜요. 얼마든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주앉아 정치담을 하는것처럼 무미하고 싱거운것은 없지요. 소영씨, 소영씨의 존재로 하여 내 생활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충만돼있지요. 나는 지금 봄날의 꽃밭을 거니는 심정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갑니다. 단지 안타까운건 그 봄날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것이지요.》 《싫증을 느꼈는가요?》 《그렇게는 묻지 마십시오. 인생에는 가을이라는 계절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꽃을 가꾸는것입니다.》 《그거야 그렇지요. 봄이란 가을을 위해 있는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봄이 너무 길다고 탓할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열매를 기다리는 농사군의 심정은 봄보다도 가을에 가있는것입니다. 지금의 내 마음은 농사군의 그런 심정과 같습니다.》 박인석의 나무개비에는 마침내 《상평통보》가 걸려나왔다. 그는 뽐을 내듯 히죽이 웃고나서 그 엽전을 다시금 《모래산》에 찔러넣었다. 그는 어느덧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눈에 열기가 번져갔다. 림소영은 거칠어지는 사나이의 숨결을 불안속에 느끼며 말없이 《모래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희고 길다란 손가락들이 한동안 엽전을 찾아 헤매였다. 묵묵히 처녀의 거동을 지켜보던 박인석은 갑자기 《소영씨!》하고 부르며 그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영씨, 벌써 사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림소영은 박인석의 억센 손에 손을 내여맡긴채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가 화전에 오면 불피고 들으리라 짐작했던 말, 지금껏 이상야릇한 공포와 반감을 가지고 이럭저럭 회피했던 그 말을 교관은 지금 절절히 부르짖고있는것이다. 처녀의 얼굴을 안타깝게 응시하는 박인석의 눈에는 위태로운 불꽃이 벙긋거리였다. 온몸을 단숨에 불사를것 같은 사나이의 뜨거운 체온이 맞잡은 두손을 타고 전류처럼 흘러들었다. 림소영은 두볼에 타오르는 모닥불을 느끼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가슴이 후두두 떨리고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이대로 몇초만 흐른다면 자기도 모르게 리성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소리없이 안기여 《그래요. 내 마음도 가을에 가있어요!》하고 속삭일것만 같았다. 그다음은 모든것을 망각속에 묻어두고 칠년세월에 쌓인 로독을 한순간에 풀며 즐거운 마음으로 사나이의 애무를 받기라도 할것만 같았다. 그 애무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얼마나 푸르를것이며, 물새의 노래는 얼마나 정답고, 이마전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날리는 강바람은 얼마나 부드러울것인가. 그것은 그자신이 그려보았던 꿈이기도 하였다. 《소영씨, 봄도 한철, 꽃도 한철입니다!》 박인석의 애끊는 목소리가 또다시 처녀의 가슴을 들쑤셔놓았다. 림소영은 그 말뜻을 잘 안다. 속담에는 《이성지합은 백복지원》이라는 말도 있고 《이십안 자식 삼십안 천냥》이라는 말도 있다. 지금 그 모든 교훈은 오로지 박인석의 소망만을 이루어주려고 생겨난것 같기도 하였다. 《소영씨, 때가 지나면 꽃이 지는건 자연의 법칙이지요. 인생에는…》 그 소리를 듣자 림소영은 이상한 내적반발이 불쑥 고개를 쳐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처녀는 해쓱해진 얼굴을 숙이고 얼마동안 입술을 씹고있었다. 그는 박인석의 손에서 손을 뽑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 박인석은 황황 타는 눈으로 한참동안 림소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수그리고 한숨을 쉬였다. 량볼을 불태우던 홍조와 눈의 열광은 서서히 꺼져내리였다. 그는 팔목시계를 흘끔 내려다보고나서 운동모를 집어쓰고 시적시적 화성의숙쪽으로 걸어갔다. 《교련시간이 돼서 먼저 가겠습니다. 저녁에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납시다. 기다리겠습니다.》 림소영은 교관의 손자욱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래산》앞에 꼼짝 않고 앉아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째서 내가 저이의 호소를 즐거이 받아들일수 없는것인가?)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자기한테 반한 남성들이 자기때문에 안달아하는 꼴을 보기 좋아하는 저속한 녀성들의 취미를 그는 누구보다도 경멸하였다. 그렇다면 모든 남성들로 하여금 자기 의사에 순종할것을 바라는 녀성의 허영이 또한 그런 일을 빚어낸것일가? 아니였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림소영은 집요하게 실마리를 찾아 헤매였다. 만일 박인석이 자기의 가슴을 짓물고있는 애수와 슬픔을 제때에 읽고 그것을 가셔줄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했더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것이다. 교관은 상대방의 그런 감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는 오직 《봄》이 지루하다는 권태감과 《가을》을 앞당기려는 조바심이 가득차있었던것이다. 림소영이 보낸 눈물에 찬 편지를 보고 그는 처녀가 자기 품에 한층 더 가까이 오고있다고 속단하였던것이다. 그래서 그 편지를 읽자 박인석은 《이제는 됐다!》고 무릎을 친것이 분명하였다. 지금 와서 그는 림소영을 하나의 녀성으로밖에 대해주지 않았다. 림소영은 그것이 서운하였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처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그 리기심앞에 광복의 위업에 바쳐온 반생을 송두리채 내던지기에는 너무나도 값비싼 과거였다. 비에 젖은 백양나무밑에서 어린 동생들을 떼여버리고 수수천리 험한 가시덤불을 헤쳐온 그 길우에는 참으로 얼마나 많은 선혈과 눈물이 뿌려졌던가. 리별의 괴로움에 가슴이 쪼각쪼각 찢어지던 음산한 그 가을을 생각하면 이 모래터에 앉아있는것조차 죄스러워진다. (그인 너무해, 어쩌면 그렇게두…) 림소영은 이렇게 뇌이며 의숙쪽을 돌아보았다. 어깨속에 머리를 파묻고 맥없이 걸어가는 박인석의 모습이 멀리로 사라지고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처녀의 마음속에서는 또다시 부드러운 련민의 정이 머리를 들었다. (《봄도 한철, 꽃도 한철》… 하긴 저이의 말이 옳은지도 몰라. 독립이 안된다고 일생동안 처녀로 늙을수도 없지 않는가.) 이래저래 림소영은 속이 상하였다. 돌아가신 김형직선생님 생각이 새삼스럽게 간절해졌다. 그는 왈칵 치밀어오르는 서러움에 못이겨 《상평통보》의 한쪽 굽도리가 비죽이 드러나보이는 《모래산》우에 소리없이 눈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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