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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14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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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중순 어느날 리효는 한통의 소포를 받았다. 대마직으로 포장한 소포의 한쪽 겉면에는 《서울 계동 고려약국 리배윤》이라고 보낸 사람의 주소 성명이 씌여있었다. 아버지의 필체였다. 매듭마다 꼬부랑꼬부랑한 라틴문자의 표식이 적힌 소지오리로 봉납을 한 포장법 역시 너무도 낯익은 아버지의 솜씨였다. 벌써 여러해째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그리운 모습이 눈앞에 서물서물해졌다. 평생 아들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고 그 아들이 요구하는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주려고 애면글면하던 아버지였다. 시대의 풍운아가 되고싶은 구름같은 욕망으로 하여 독립운동의 회오리가 가장 맹렬하게 타래치고있는 간도땅에 가서 나라를 찾는 싸움에 한몸 적실것을 마음속으로 서약하였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소행에 대하여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결심을 돌려세울수는 없었다. 리효는 그후 서약대로 관전땅에 가서 독립군에 입대하였고 거기서 다시 아버지의 친구인 최동오의 권고와 협력을 받아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리효는 급히 포장을 헤치였다. 소포속에는 인삼이라는 표딱지가 붙은 널곽이 들어있었다. 오랜 약국업자인 아버지는 허약한 아들의 건강을 념려하여 뻔질나게 고가약들을 보내여왔다. 때로는 매식을 하라면서 돈도 부쳐왔다. 널곽밑에는 잡지묶음이 있었다. 리효의 관심은 인삼곽보다도 그 잡지들에 먼저 쏠리였다. 그는 우정국의 한구석에 놓여있는 장의자에 소포를 내려놓고 그곁에 앉아서 《개벽》의 기사들을 읽기 시작했다. 우정국의 하루치고는 꽤 한가한무렵이여서 마음놓고 책을 뒤적거릴수 있었다. 리효의 눈에 맨처음으로 걸려든것은 리광수의 《민족개조론》이였다. 그는 자기가 가장 숭배하는 문사의 저술을 서두르며 읽어내려갔다. 《…첫째로는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게. 둘째로는 공리공론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게. 셋째로는…》 리효는 글줄을 놓치였다. 누구인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던것이다. 그는 머리를 쳐들었다. 우표가 붙지 않은 편지봉투를 손에 든 김성주동지께서 그의 앞에 서계시였다. 《강반석》이라고 쓴 수신인의 이름이 또렷이 보이였다. 무송의 어머님께 보내는 편지가 틀림없었다. 다른 한장은 최창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상스럽게도 리효는 소포를 찾을 때마다 이 우정국에서 그이와 마주치군하였다. 그런데 용무는 매번 서로 달랐다. 그는 우편물을 받았고 그이께서는 부치시였다. 서로 상반되는 용무였지만 그로 인한 접촉은 김성주동지와 리효를 퍼그나 접근시키였다. 《소포가 또 왔군. 오늘도 인삼인가?》 김성주동지께서는 소포무지를 굽어보며 장의자에 걸터앉으시였다. 《그저 보는바와 같이…》 리효는 두손으로 눈언저리를 비비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제 아버지한테서 부쳐오는 보약이라고 하지만 그는 그 인삼을 받을 때마다 매번 이상스럽게 보이지 않는 눈들앞에서 주위가 살펴지고 어쩔수 없는 속박감에 사로잡히군하는것이였다. 빈고농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있는 의숙의 가난한 학우들앞에서 인삼따위의 고가약을 들고다니는 행위자체를 일종의 범죄라고 생각하는것이 리효의 솔직한 심정이였다. 그는 유산자의 아들이라는 뒤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유산자라면 눈을 모로 세워가지고 보던 때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아, 잡지들도 있구만.》 인삼곽우에 놓인 출판물을 살펴보시던 김성주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리효는 그이의 앞으로 잡지뭉테기를 밀어놓았다. 《이건 지난해에 나온 <개벽> 일부 호들이구…》 《그래 재미나는 소식들이 좀 있던가?》 김성주동지께서는 손에 잡히는대로 한권을 집어드시였다. 《뭐 그저 만날 보는 그러루한 기사들이요. 그런데 <개벽>에 리광수선생의 <민족개조론>요지가 실렸소.》 리효는 잡지뭉테기속에서 《개벽》 한권을 골라 김성주동지께 드리였다. 《민족개조론》에 대한 그이의 견해를 듣고싶어서였다. 그는 한때 이 문제를 가지고 동무들과 치렬한 론쟁을 벌린적이 있었는데 그 론쟁에서 《리광수의 그림자》라는 딱지를 벌었다. 리광수와 면식이 있는 최동오숙장조차 그의 《민족개조론》에 대해서는 싸지않게 대하였다. 《선독립》, 《후개혁》을 정치적리념으로 삼고있는 그에게 《민족개조론》의 진부한 주장이 접수될리가 없었다. 숙장은 어느때나 자기의 주장을 이 계선밖으로 확대한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주, 자본가들을 상대로 하는 무산계급의 투쟁도 반대하였다. 계급투쟁은 민족의 내적인 분렬을 가져오므로 《선독립》의 리념에 저촉된다는것이였다. 《글쎄 일리가 있는 주장이긴 하네만 이건 너무 시기상조란말이야. 그리구 고리타분해. 조선사람이 뭐 청결을 잘못해서 독립을 성취 못하나, 거짓말을 잘해서 독립을 성취 못하나? 왜놈들을 몰아내야 무슨 청결도 있고 저축도 있고 경제적독립도 있을게 아닌가!》 그때 최동오는 론쟁에서 당한 참패를 인정하지 않고 그 론쟁에 대한 교원들의 객관적평가를 요구한 리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리효는 이런 타격을 받은후에도 자기의 착오를 선뜻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하였다. (《민족개조론》의 본질은 민족을 문명하게 하자는것이다. 민족의 문명을 이룩하며 나라의 진보를 이룩하자는 리론이 어째서 조선민족에 대한 모독으로, 배신으로 되는가?) 그자신도 물론 《민족개조론》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구국방안으로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전면 부정하고싶은 의사는 없었다. 《한때 이 개조론을 둘러싸고 세상이 술렁술렁 끓었지…》 글줄을 밟아내려가시던 김성주동지께서 조용히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나도 <동아일보>지상에 발표된 론전을 읽은 생각이 나오.》 리효는 화제가 깊은 곬으로 파고들자 활기를 띠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한쪽 눈가에 알릴락말락한 웃음을 지으시였다. 《어쨌든 그 리광수란 사람이 한동안은 바깥출입도 마음대로 못했다더구만. 어떤 사람들은 리광수의 머리를 까겠다고 삐루병까지 들고 다녔다지 않소. 민족을 모독한다는거지. 그의 두개골이 삐루병에 박살되는 날이면 어쩔번했소?》 《민족개조론》의 제창자를 동정하는것인지 비양하는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말씀이였다. 리효는 얼떨떨해졌다. 《조선에서 대문장가가 하나 없어지는셈이지. 련애소설에 미친 청년남녀들은 융희황제(고종의 아들)가 돌아갔을 때만큼 눈물을 흘렸을거요.》 김성주동지께서는 말씀을 그치고 《민족개조론》의 후반부를 읽어내려가시였다. 《…<여섯째로는 보통상식을 가지고 1종이상의 전문학설이나 기술을 배워 반드시 1종이상의 직업을 가지게. 일곱째로는 근검저축을 잘하야 생활의 경제적독립을 가지게. 여덟째로는 가옥, 의식, 도로 등의 청결 등 위생의 법칙에 합치하는 생활과 일정한 운동으로 건강한 체력의 소유자가 되게 함이니…> 음, 이 사람이 종로바닥에서 골이 깨지지 않은게 다행이지.》 그이께서는 읽던 책장을 손으로 덮고 머리를 흔드시였다. 실망이 아니라 환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감정의 그림자가 그이의 눈가를 언뜻 스쳐지나갔다. 《그러니까 성주 역시…》 리효는 이전날의 론쟁때처럼 심한 고독감을 느끼며 김성주동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 역시… <민족개조론>은 민족에 대한 모독이요. 말하자면 조선사람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것과 같소.》 김성주동지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였다. 리효는 머리를 찌붓해보이였다. 《물론 나는 <민족개조론>을 전적으로 두둔하고싶은 생각은 없소. 이 리론에는 조선사람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 고리타분한 요소들이 적지 않더란말이요. 그러나 민족의 문명개화를 도모하자는 총적인 지향이야 나쁘다고 할수 없지 않소.》 《그래서…》 김성주동지께서는 아무 론박도 하지 않고 그다음말을 재촉하시였다. 《민족을 개조한다는 론조자체에는 나도 불만이 많소. 그것은 조선사람이 렬등민족임을 전제하는 론조같아서 자존심을 건드리오. 이 면에서 필자는 실책을 범한것 같소. 차라리 <민족향상론>이라고 했더라도 그다지 큰 비난을 받지 않았을것이요. 하여튼 리광수는 리광수고… 나는 그의 리론과 관계없이 민족의 문명개화를 주장하고싶소. 우리 나라가 왜놈에게 먹힌것도 조선사람들이 문명하지 못했던탓이 아니겠소. 우리에게 영국이나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 수준의 기계문명이 있었더면 사태는 다르게 되였을것이요. 우리 나라는 강국이 되였을것이고 따라서 한방의 총소리도 없이 저 여우무리같은 섬나라 오랑캐들에게 국가주권을 강탈당하는 일도 없었을것이요. 렬강들은 우리 나라가 문명개화하지 못한 약점을 보고 그렇게도 기를 쓰고 달려들었던것이요. 이런 리치를 알고있기에 김옥균선생도 조선을 근대문명국으로 만들려고 그처럼 애쓴게 아니겠소.》 리효의 목소리가 높아가자 우정국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 편지를 부치려고 들어선 광명학교 학생 몇은 리효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날카로운 말마디들을 듣느라고 일부러 출입문곁에서 서성거리고있었다. 청중들가운데는 외섶옷을 입고 흰 넥타이를 맨 낯설은 멋쟁이도 있다. 리효는 자기가 십여명 되는 사람들의 주시속에 있다는것을 느끼자 소포꾸레미를 집어들고 얼른 한쪽구석으로 옮겨앉았다. 《만일 우리 나라가 문명국이였다면…》 하고 그는 인차 말을 이었다. 《왜놈들의 식민지가 된 오늘 싸움을 해도 이렇게 렬악한 상태에서 싸우지는 않을것이요. 우리에게는 대포도 있었을것이고 장갑차도 있었을것이며 화승총을 릉가하는 보총도 있었을것이고 군사를 아는 진짜 장군들도 있었을것이란말이요. 그런데 지금 우리 형편은 어떻소. 대포는커녕 보총 한자루도 변변한것이 없어서 전전긍긍하지 않소. 독립군 지휘관들이라는건 현대전법도 모르는, <닭의 다리>나 차고 거들먹거리는 바지저고리들이구. 우리 백성들은 또 어떻소. 나는 저 비탈밭에서 모지라진 호미강대기를 들고 감자를 파거나 김을 잡는 농사군들을 보면 막 기막힌 생각이 드오. 볕에 타고 가난에 쭈그러진 그네들의 얼굴에서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꼬물만치도 찾아볼수 없으니. 그렇게 계몽되지 못한 백성을 가지고 언제 가서나 나라를 독립할수 있겠는지. 나는 물론 그들이 제우스신이 어떤 신이고 루네쌍스가 무엇인가를 아는 그런 정도의 문명을 소유한 인민이 되는것은 바라지도 않소. 그러나 그들에게서 <내수외학>이나 <국민수복>을 위한 초보적인 문명은 보고싶단말이요!》 김성주동지의 안색은 점차 준엄한 빛을 띠시였다. 그이께서는 손에서 삽화들을 훑어보느라고 만지작거리시던 잡지를 접고 양복저고리의 웃단추를 벗기시였다. 《그러니까 리효는 어떻게 하고싶다는거요?》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 우리 민족을 문명한 민족으로 만들고싶다는거요.》 《리효 역시 리광수처럼 민족을 모독하고있소.》 《아니 내가?!》 리효는 펄쩍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였다. 《그렇소, 리효가…》 김성주동지께서는 눈길을 흐트리지 않고 정면으로 리효를 마주보시였다. 《민족을 문명케 하자는 주장인데두 민족에 대한 모독이란말이요?》 《나는 물론 우리 민족이 문명한 민족으로 되는것을 반대하지 않소. 자기 민족이 문명해지는것을 달가와하지 않을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소. 앞으로 조국이 독립된 다음에는 나도 리효도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문명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게 될것이요.》 《그렇다면…》 리효는 급히 손을 들어 김성주동지의 말씀을 제지하였다. 《그렇다면 하나 좀 묻겠소. 근대문명국에로의 발전을 지향한 김옥균의 개화사상도 <민족에 대한 모독>으로 되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모독으로 될수가 없소. 조선이 아직 일제의 식민지로 되지 않았고 정치적자주권을 가진 당당한 독립국가로 존재하던 당시의 실정에서 락후한 봉건국가를 근대적인 자본주의문명국으로 발전시키려는 김옥균의 시도는 하나의 혁명이라고 볼수 있소. 그렇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소. 개화당이 근대문명국을 세우려던 조선땅에서는 봉건위정자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통치자로 군림한 일제가 주인노릇을 하고있소.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교육도 모두 왜놈들에게 빼앗겼는데 어떻게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진흥시킨단말이요. 왜놈들이 그것을 용납할것 같소?》 《…》 리효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침만 꿀꺽 삼키였다.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소. 지금 왜놈들이 조선사람의 <참정>이나 <자치권>을 떠벌이고있고 <문화의 향상>이니 <산업의 진흥>이니, <민족성의 개량>이니 하는 기만적인 언사를 쓰고있지만 그것은 조선사람들을 달개이기 위한 속임수라는걸 알아야 하오. 그런데 일제의 <문화통치>에 환상을 품고있는 개량주의자들은 이 기만성을 보지 않고 <무저항독립운동론>이나 <실력양성운동론>을 부르짖고있소. 조선사람은 힘이 약하므로 아무리 피를 흘려도 강대한 일제를 타승할수 없기때문에 무의미한 피의 랑비를 가져오는 헛된 폭력행위를 집어던지고 평화로운 <자아수양>을 하거나 <자치>운동이나 해야 한다는것이요. 우리 인민은 이것을 원하지 않소. 우리 인민의 념원은 일제통치하에서의 <산업의 진흥>이나 <문화의 향상>에 있는것이 아니라 조국강토에서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는데 있소. 이 념원에 거슬리는 개량주의적주장은 다 민족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것과 같소. 그것은 민족에 대한 배반행위라고 볼수 있소. 민족성을 <개조>한다는 말자체가 원래 언어도단이요.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맨처음으로 천문대를 세우고 철갑선을 만들고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슬기롭고 재능있는 민족이며 근면하고 용감하고 정의로운 민족이라는걸 잊지 말아야 하오. 자기 민족을 얕보는 사람은 진정한 애국의 길을 걸을수가 없소.》 사무탁우에 달려드는 파리를 쫓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코수염쟁이가 김성주동지께 우표를 내밀었다. 리효는 한대 얻어맞은것처럼 두볼을 감싸쥐였다. 어째서인지 그이의 말씀에 한마디의 반박도 할수 없었다. 그 말씀에서는 그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진실이 울리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자기자신이 리광수나 송진우따위의 인간들이 쳐놓은 개량주의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고있는듯한 불쾌감을 느끼며 활딱 달아오른 얼굴을 짓수굿이 숙이고 우정국을 나섰다. 발길은 의숙으로가 아니라 송화강쪽으로 향해졌다. 소포꾸레미를 들고 기숙사로 훌쩍 들어가버리기에는 김성주동지와의 대화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도 컸다. 《민족개조론》이 실린 《개벽》잡지를 그이앞에 내들 때만 하여도 리효는 패배당한 자기의 주장에 대한 동조동감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리효는 김성주동지의 뛰여난 통찰력앞에서 다시한번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어떻게 되여 나는 그런 개량주의의 포로가 되였을가? 성주가 말하는것처럼 내자신이 자기의 힘에 대한 신념, 자기 민족의 힘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탓일가?) 리효는 이런 생각에 잠기여 터벅터벅 강기슭을 걸어갔다. 그는 7월의 폭양을 피할수 있는 황철나무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또다시 소포꾸레미를 헤치고 인삼곽밑에 있는 편지, 김성주동지와의 대화로 인하여 읽을수 없었던 아버지의 편지를 개봉하였다. 그는 여라문줄 내려읽다가 와뜰 놀랐다. 전혀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희귀한 소식이 적혀있었던것이다. 그것은 며칠전에 서울에 왔다 간 서유필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리효를 미국에 류학보내지 않겠는가?》고 건의하더라는 달작지근한 소식이였다. 아버지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서유필의 말에 의하면 작금년간에 조선청년들속에서 미국류학에 대한 요구가 갑자기 팽배해져서 많은 청년들이 콜롬비아대학이니, 서북대학이니, 미시간대학이니 하는 대학들에 속속 입학한다더라. 시세에 빠른 사람들은 요즘 일본의 눅거리 대학들보다도 미국의 대학에 바싹 더 눈독을 들이는 모양이다. 미국에 건너만 가면 입학은 서유필자신이 주선하겠다고 장담하였으니 전후사를 잘 헤아려보고 다음번 편지에 너의 의향을 써보내거라. 너만 좋다고 하면 내가 화전에 가서 최동오숙장선생과 상론하여 문제를 소리없이 처리하겠다. 그리 알고 심사숙고하여라…》 리효는 그이상 읽어내지 못하고 두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 순간 뉴욕의 한복판에 높이 솟은 마천루가 떠올랐다. (사람이 살다가 외국의 문명과 직접 접촉해보는것도 락인데.) 리효는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서유필의 그 주선에 자기의 장래를 떠맡기고싶은 용기는 없었다. 미국의 문명에 대한 달콤한 환상도 아직은 이 시대를 진감시킬 풍운아가 되려는 그의 야심을 이겨내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미련이란 집요한것이였다. 빨깍거리는 편지봉투의 감촉을 손바닥으로 느끼는 순간마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 잡지책에서 본 마천루의 형상이 검질기게 어른거리였다. 리효는 그런 심리적방황상태에서 잠시라도 자신을 해방하고싶었다. 그는 두손을 깍지껴 뒤통수에 붙이고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버지의 편지는 무슨 증표처럼 가슴우에 놓여있다. 설렁거리는 황철나무잎새들사이로 갈기갈기 찢긴 해살이 간신히 비집고 내려와 리효의 얼굴에 얼룩얼룩한 반점들을 그려놓았다. 그 반점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변덕스럽게 자리를 옮기였다. 그럴 때면 그의 속눈섭이 마음속의 파문처럼 파르르 떨리군하였다. 《여, <하이네>, 또 소포가 왔다면서?》 두툼한 소설책을 말아들고 리효의 앞을 지나가던 김리갑이 허드레소리로 말을 걸었다. 리효는 그 말을 듣자 편지부터 화닥닥 걷어쥐였다. 방황하는 마음속 동요의 한쪼각을 그 누가 훔쳐보기라도 한것 같아서 가슴이 덜컥했다. 《응, 왔어.》 《리효, 한가지 희한한 소식이 있네.》 김리갑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잔뜩 눈을 흡뜨며 리효를 쳐다보았다. 《뭔가?》 《저 삼포에 무성이라는 친구 있지 않나?》 《그래 있지. <채봉감별곡>을 뜬금으로 외운다는 익살쟁이말이지?》 《옳아, 글쎄 그 친구가 우리 의숙에 입학하였다네. 무송에서 가까이 지내던 성주가 의숙에 오자 그 친구도 부쩍 마음이 동했던가봐. 그러니 우리 의숙에는 제2의 박두학이가 나타난 셈일세. 아마 익살을 부리라면 짝지지 않을걸…》 김리갑은 방금전에 학교정구장에서 학생들이 리무성에 대하여 떠들어대던 이야기를 죄다 말하였다. 《소개는 누가 했대?》 리효는 못내 궁금하여 다시 물었다. 《성주가 힘썼다는 소문이 있네. 우리 숙장선생님은 성주의 부탁이라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테니까.》 그 말에 리효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였다. 방금전에 김성주동지와의 론전에서 받은 충격이 아직 그의 마음속에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그 어떤 비범한것에 대한 놀라움에 사로잡혀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럼 난 가네.》 김리갑은 리효의 얼굴에서 또다시 심각한 표정을 발견하자 쓰거운 미소를 지으며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리효는 생각에서 깨여나 인차 의숙쪽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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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에서의 학교운영자금모연공작은 옹근 두달만에야 끝났다. 새 교대가 도착하기 바쁘게 공작지를 떠난 최창걸이네 일행이 한주일의 겨불내나는 도보를 끝내고 화전경내에 들어선것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너머로 기울어지는 저녁무렵이였다. 그곳은 까치골이라고 부르는 화전시가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곳에 있는 아늑한 산촌이였다. 일행은 여기서 하루밤 묵어가기로 하였다. 아침부터 100리 남짓한 길을 걸어 다들 지쳐버린데다가 또 최동오숙장과 깊은 교우를 갖고있다는 의병출신의 이곳 촌장이 한밤 묵어가라면서 발목을 거머잡았던것이다. 화성의숙이라는 간판을 내대기만 하면 어디 가서나 독립군이상의 대우를 받던 시절이였다. 그것은 그 어떤 신임장이나 려권보다도 더 큰 설득력을 지니고있었다. 사람들은 가장 친절한 인사와 가장 맛있는 음식과 가장 인정이 도는 웃음과 가장 따스한 잠자리로 그들을 대접하군하였다. 그 저녁 역시 그들은 그런 환대를 받았다. 푸짐한 저녁상을 물리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여 숙소로 뿔뿔이 흩어져갔다. 다만 잠도, 피곤도, 물것도 덜 타는 그리고 무슨 화제이든 이야기라면 오금을 못쓰는 몇몇 학생들만이 덩그렇게 넓은 촌장네 집뜨락에 남아 모기들의 성화를 막느라고 종아리를 철썩철썩 때리면서 끝없는 한담을 펼쳐나갔다. 화제는 공작조 대장인 해룡중대출신의 키다리 박두학의 개원인상담으로부터 막을 열었다. 그는 화성의숙 축구팀의 왼쪽 날개였는데 비록 서거픈 왼발재기이고 왼손잡이였지만 발재간, 손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이야기도 구수하게 잘하였다. 별치 않은 화제도 일단 그의 입에 오르기만 하면 아주 그럴듯하게 윤색되여 웃음을 자아내고 감탄을 자아내는 명담으로 되는것이다. 그는 같은 《온달전》도 남이 십분동안에 말하는것을 이틀사흘씩 줄줄 늘구며 무슨 대장편처럼 엮어대는데 말할 때마다 그 줄거리나 세부들이 조금씩 달라지군하였다. 그러나 그를 이야기의 대가로 인정하고있는 학우들은 그런 장편속에 얼마간의 대포가 있다 하여도 모르는체하기가 일쑤였다.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까놓고 말해서》라는 군소리를 곧잘 끼여넣는 그의 말버릇에 대해서도 큰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 《거기엔 경찰서도 있고 <조선민회>도 있고 남만철도를 지키는 왜놈수비대도 있지요. 화전을 시골이라고 하면 거긴 도회지에 비길수 있으리만큼 번창한 고장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벌이가 괜찮은곳이지요.》 박두학은 촌장이 내미는 한되들이 널담배통에서 잘게 썬 황색엽초를 듬뿍 집어 종이에 말아들며 인상담의 꼭지를 떼였다. 그는 담배도 늘씬한 자기 키처럼 길다랗게 말았다. 《그래 모연성적은 어떤가?》 촌장이 부시를 꺼내들고 박두학에게 물었다. 《밭이 좋으니 돈농사도 잘되는가봅디다. 벌이가 대단했습니다. 의숙이 생긴이래 최고의 모연성적을 올리였습니다.》 《하긴 시골보다야 대처에 돈이 더 흔한 법이지. 시골에 굴러온 엽전도 나중엔 다 도회지로 흘러가게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인심은 더 빡빡하겠는데… 어떻던가, 그렇지 않던가?》 《그거야 물론 그렇지요. 인심을 찾으려거든 촌에 가고 도적을 보려거든 고을에 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대처의 인심이라는거야 사흘 굶은 김서방네 덜렁수캐 사등뼈같지요. 그런 인심에서야 돈이 나옵니까.》 촌장은 박두학의 걸직한 비유에 의병시절부터 길렀다는 채수염을 비비꼬며 온 동네가 다 듣게 박장대소하였다. 그의 옆에 둘러앉은 화성의숙의 모연공작대원들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킬킬거리였다. 《거 우스개가 이만저만이 아니구만. 그런 우스개면 어디 가서 돈을 못구하겠나. 남원 변학도라도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놓을수 있을것 같은데…》 촌장이 박두학에게 불이 붙은 부시깃을 넘겨주면서 하는 말이다. 박두학은 그 부시밥을 마라초앞구멍에 다져넣고 탐스럽게 연기를 삼키다가 펄쩍 놀라는 시늉을 하였다. 《촌장님두 원, 변학도가 다 뭡니까. 대처의 깍쟁이들한테 그런 우스개가 통합니까. 돈을 가진 놈팽이들한테는 그저 으름장이 제일이지요. 그래 돈많은 부자놈들을 만나면 냅다 으르기부터 하였습니다. <너 이놈, 이 오관수개천같은놈! 네놈의 갈비대를 서른세등분 내야 정신을 차릴테냐? 이놈, 예순여섯번 벼락을 맞고 아흔아홉번 릉지처참을 당할놈!>…》 최창걸은 지금 마당 웃녁에 널려있는 새초무지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별들이 바글바글 끓는 하늘을 쳐다보며 잠을 청하고있었다. 몸이 녹시근해서 이야기판에 뛰여들고싶은 흥취가 없없던것이다. 그런데 박두학의 끈적끈적한 이야기가 종시 그의 잠을 앗아갔다. (제길할, 저 입은 일요일도 없는게로군. 굴레를 씌우든지 자갈을 물리든지 해야지.) 그는 속으로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참지 못하고 미소하였다. 사람이 《아흔아홉번》 릉지처참을 당하면 어떻게 될가 하는 얼토당토않는 생각이 떠올랐던것이다. 《그러나 이까짓 돈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창걸이라는 친구가 권총을 얻던 이야기는 더 재미납니다.》 박두학의 개원인상담은 계속되였다. 촌장은 《총》이라는 말에 귀가 벌쭉해졌다. 《총을 얻다니! 공으로 얻었단말인가?》 《그럼 공으로지요. 이건 본인이 말해야 실감이 납니다. 여, 창걸이!…》 최창걸은 대답하지 않고 자는체하였다. 그는 자기가 말을 하지 않으면 부득불 박두학이 또 자기를 대변해서 권총사건을 이야기하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제3자의 입을 빌어 한달전에 있은 그 사건을 다시한번 회고해보는것도 나쁘지 않는것이다. 《저 친구 벌써 곯아떨어졌군. 낮에는 장사인데 밤이면 저렇게 물먹은 솜이지요.》 박두학이 중얼거리는 말에 어지간히 등단 촌장이 그의 팔소매를 건드리며 슬그머니 재촉을 한다. 《그럼 자네가 이야기하게나.》 《네, 이야기하지요. 한번은 저 창걸이라는 친구가 어떤 타면업자네 집에 모연을 갔다오다가 변씨네 댁으로 왜놈수비대장교가 들어가는것을 보았습니다.》 《변씨네 댁이라니?》 《아, 그 소간이네 집이 있지 않습니까.》 《소간이네 집?》 《아, 이거 모르시누만요. 변소간말입니다.》 《오, 뒤간말이지. 그래서?》 《그 장교놈을 본 순간 창걸이는 부지중 주위를 휘둘러보았습니다. 엉큼한 궁리가 떠올랐으니까요.》 《음, 그래서?》 《그런데 주변에는 왜놈을 답새길만한 조약돌조차 보이지 않더라는겁니다. 개똥도 약으로 쓰자고 하면 바르다는격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 《머리를 썼습지요. 변씨네 댁앞에 있는 개장집으로 갔습니다. 방금 모연해온 돈 한줌을 꺼내주며 그 돈어치만큼 개장을 달라고 했다는겁니다. 주인아낙네는 손님의 요구대로 큼직한 소랭이에 설설 끓는 개장 다섯그릇을 퍼주었습니다. 그 소랭이를 들고 변씨네 댁으로 찾아갔지요. 촌장님이 만일 창걸이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나?… 나라면 거야 설설 끓는 개장국을 왜놈의 면상에 들씌워야지.》 《옳습니다. 창걸이도 바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놈은 바지도 입지 못하고 그 자리에 뻐드러졌습니다. 그 다음 허리춤에서 슬쩍 권총을 떼여냈지요.》 《허허허, 개장 다섯그릇을 주고 권총 한자루를 얻었다면 그거야 해볼만한 장사지.》 《저 창걸이가 생기기는 뚝박쇠처럼 생겼어두 골은 여간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말을 시킬수 있는 사람이지요.》 박두학은 잠시 말을 끊고 하품을 하였다. (싱검둥이같은 친구, 나발을 잘 부는군.) 최창걸은 또다시 미소를 그리였다. 과장기가 있으면서도 정확하고 게다가 해학적인 그의 이야기가 이상야릇한 쾌감을 자아냈던것이다. 모험심으로 온몸이 달아오르던 격렬한 그 순간들이 되살아오르는듯 최창걸의 가슴은 그때처럼 쿵쿵 걷잡을수없이 들먹거리였다. 그 권총 한자루때문에 그는 보름동안이나 모연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개원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의 어떤 막바지에서 놈들의 수배를 피하여 숯구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거, 창걸이라는 학생 통장머리가 보통이 아니구만!》 박두학은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주머니를 더 깊숙이 터쳐보이였다. 《사람이 원래 나기를 걸작으로 났지요. 독립군 5중대에 입대할 때두 부모들 몰래 집을 뛰쳐나왔다니까요. 집에는 동생이 하나 있는가봅니다.》 촌장은 대돌우에 장죽을 딱딱 두드리며 탄복하였다. 《하여튼 의숙에서 좋아하게 됐네. 모연두 많이 했다지 권총도 얻었다지, 그러지않아두 요새 화성의숙에서는 무기고를 짓느라구 야단이더군. 우리 마을에서도 요전날 그것때문에 기부금을 냈네.》 (허참, 내가 마치 의숙의 무기고를 위해서 권총을 탈취한것처럼 말하는군. 어림도 없는 소리.) 최창걸은 무심중 권총이 들어있는 품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한달동안 생명을 내대고 애지중지 간수해온 그 철물이 주는 특이한 촉감이 기분좋게 피부에 마쳐왔다. 화성의숙의 무기고가 아무리 귀중한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처럼 소중한 모험의 대가를 거기에 희사할 의향은 없었다. 그러나 만일 박교관이 그렇게 할것을 요구한다면 그때는… 그 요구를 감이 거절해나설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는 마음이 불안스러웠다. 그 불안때문에 손이 저도 모르게 권총을 만지였는지도 모른다. 《촌장님, 의숙에 갔다오신게 언제입니까?》 박두학이 졸음을 쫓으며 묻는 말이다. 《한 사나흘 되네. 무슨 손님 맞을 차비를 한다면서 법석 끓더군. 박교관은 교련을 지도하느라구 목이 다 쉬구 숙장도 청결바람에 오종종한 얼굴이 새까맣게 탔더란말일세.》 촌장은 그동안 화성의숙이 어떻게 변모하였는가를 시시콜콜히 이야기하였다. 《의숙이 하는 잡도리가 달라. 다른 무관학교보다는 때를 쭉 벗은 셈이지.》 하고 촌장은 덧붙였다. 《촌장님, 그밖에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그저 그러루한 소식들일세. 그리구… 숙장선생이 그러는데 무송서 소학을 다니던 김형직선생 자제분이 얼마전에 화성의숙에 입학했다더군.》 최창걸은 그 말을 듣자 새초무지속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로인님, 그게 정말입니까?》 그는 멍석가를 향해 네발걸음으로 벌렁벌렁 기여나가며 다급히 물었다. 모두들 그 모양을 보자 입을 딱 벌리였다. 《아니, 저 친구 여태 자지 않고있었군.》 박두학이 나무라듯 쯧쯧 혀를 차며 그 걸이대같은 손으로 최창걸의 볼기를 철썩 두드린다. 《로인님, 정말입니까?》 최창걸은 얻어맞은 볼기를 손으로 만질 사이도 없이 재차 물었다. 《정말이 아니면 거짓말이겠나. 숙장선생은 화성의숙에 비범한 수재가 나타났다고 몹시 흐뭇해하였네. 아무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겠지.》 촌장은 잊을수 없는 추억에 잠긴듯 눈귀를 쪼프리고 장죽을 문 입귀로 담배연기를 쉼없이 내뿜었다. (성주가 화성의숙에 오다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는가!) 최창걸은 새로운 환희의 물결이 가슴속에 일렁이는것을 느끼며 박두학의 팔을 힘껏 잡아챘다. 《두학이, 나 좀 보자구.》 그들은 삽짝문밖으로 나갔다. 구름사이로 조각달이 얼굴을 내밀고 담장앞에 서있는 두 청년을 기웃이 굽어보았다. 《이 밤으로 화전에 가겠다는거겠지?》 최창걸이 용건을 꺼내기도전에 능청스러운 박두학이 먼저 속뽑이를 하였다. 《그래, 화전에 가야겠소.》 《이 칠칠야밤에 어떻게 간다구 그러오. 저 앞고개에선 밤마다 호랑이가 길목을 지킨다는데…》 《호랑이가 아무리 사납단들 왜놈들보다야 더 사납겠소. 그까짓건 무섭지도 않소.》 《젠장, 급하긴 의주파발 찜쪄먹겠다. 그러지 말구 래일아침 떠나라니까.》 《두학이, 더 막지 마오. 내 성미를 알지 않소.》 《원, 이렇게 눈치코치 없다구야. 온 동네가 잠을 못자고 우리를 위해 아침음식을 준비하고있는데 창걸이가 가면 저 사람들이 섭섭해하지 않소!》 박두학은 촌장네 집 아래집을 손짓하며 어성을 높이였다. 지금 그 집에서는 추녀밑에 외등을 내다걸고 마을아낙네들이 모여앉아 돼지를 튀하고있었다. 한쪽에서는 두리반우에 송편을 빚어놓느라고 야단들이다. 최창걸은 그쪽을 한참 돌아보다가 단연히 말을 꺼냈다. 《섭섭해해두 나는 가야겠소.》 《넨장, 이건 평양의 황고집보다두 더 고집불통이로군. 하루밤만 참으면 될텐데 뭘 그렇게 바빠서 안달복달이요? 》 《남의 심정을 모르면 훼방이나 하지 마오. 나에게는 그 성주라는 학생이 생명의 은인과 같단말이요!》 《그럼 마음대로 하오.》 박두학은 시끄럽다는듯이 손을 홱 내저었다. 최창걸은 그길로 촌장네 집을 떠났다. 물집이 생긴 발바닥에 딱총을 놓고나서 천천히 동구밖으로 향하였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줄곧 김성주동지의 생각만을 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이의 얼굴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일수록 표상이 선명치 못할 때가 많다고 한 리효의 해괴한 주장이 어찌 보면 일리가 있는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특이한 음성만은 또렷이 기억되였다. (그동안 몹시 변하였을텐데… 그 훌룡한 아버님을 잃고 얼마나 상심하였을가!) 최창걸은 먼 개원땅에서 김형직선생님의 서거에 대한 비보를 듣고 땅을 치며 통곡하던 달반전의 일을 회상하자 가슴이 쓰려났다. 그는 오늘밤만은 김성주동지의 앞에서 굳이 절통한 그 과거를 꺼내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호랑이가 길목을 지킨다는 우중충한 오동령이 앞에서 그를 굽어보고있었다. 최창걸은 머리카락이 쭈뼛하니 곤두서는것을 느끼면서 절뚝절뚝 령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였다. 《창걸이! 창걸-이-이!…》 먼 뒤쪽에서 박두학의 거쉰 목소리가 그를 멈춰세웠다. 《왜 그러나?》 최창걸은 (저 진득찰거마리같은 친구가 왜 여기까지 따라왔을가?) 하고 속구구를 놓으며 잔뜩 경계하는 태도로 물었다. 《저- 이걸 가지구 가라구.》 박두학은 어둠속에서 빨래방치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불쑥 내밀었다. 석유에 잠갔다 꺼낸 불망치였다. 《이 홰불이 길동무 한사람구실은 할수 있을거요.》 최창걸은 박두학의 그 누긋누긋한 성미속에 이처럼 뜨거운 인정이 배여있는것을 알게 되자 자기도모르게 목이 꽉 메여오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맙소, 두학이!》 《자, 이 성냥도 가지고 가오.》 《성냥?… 고맙소.》 《공짜라고 생각하면 안되오. 이제 값을 단단히 받아내겠소.》 《농마국수 다섯그릇이면 되겠지?》 《그건 너무 싸오. 저- 내가 바라는건…》 박두학은 지금까지의 롱조를 버리고 정색해서 자기의 요구조건을 내댔다. 《래일 우리가 화전에 도착하면 그 성주라는 동무에게 맨처음으로 나를 소개해달라는거요. 동의하오?》 《동의하오.》 최창걸은 기꺼이 약속하였다. 그가 화성의숙구내에 들어선것은 자정이 퍼그나 지난 때였다. 기숙사에도, 교원실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어찌나도 고요하고 괴괴한지 나무잎에 이슬듣는 소리까지 들리였다. 최창걸은 뒤축을 지르밟은 지하족을 아무렇게나 끌며 그 적막속을 다급히 걸어갔다. 그러다가 기숙사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춤거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 어느 호실에 계실것인가를 가늠해보는것이였다. 어쩐지 그이께서 자기네 호실에 거처를 정하셨을것만 같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자신있게 자기의 소속호실인 첫번째 호실로 걸음을 옮기였다. 문을 잡아당기자 감각도 생생한 텁지근하면서도 정다운 호실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두달만에, 그것도 무시무시한 삼십리 무인지경을 홀로 헤쳐 의숙으로 돌아온 그로서는 여간만 살틀하고 반가운 냄새가 아니였다. (내 집이로구나!) 최창걸은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것을 느끼며 문턱앞에 펄썩 주저앉았다. 두달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각이한 코소리가 탁한 공기속에서 승벽내기로 울린다. 입으로 푸푸- 소리를 내면서 풀무를 부는것은 리효이고 소나기 울음소리와 같은 드르릉드르릉 소리를 내는것은 김리갑이다. 그 불협화음속에서 유별나게 리제우의 잠꼬대소리가 뚜렷하였다. 최창걸은 그 소리를 듣자 빙긋이 미소하며 (이 친구, 또 잠꼬대로군.) 하고 입속으로 뇌이였다. 그리고는 그쪽을 향해 손더듬질로 조심스럽게 기여갔다. 리제우가 누워있는 그 어느 어름에 김성주동지께서도 계실것이라고 믿었기때문이였다. 그는 보짐속에서 개원에서 쓰던 초꽁다리를 꺼내여 거기에 성냥을 그어댔다. 검은 장막에 휘감겨있던 방안은 마침내 자기의 비밀을 낱낱이 드러내보이고야말았다. 그러나 응당 계시리라고만 믿고있었던 김성주동지께서는 그 방안에 계시지 않았다. 다만 학우들이 콩나물처럼 촘촘 누워있는 그 사이사이에 대여섯개의 빈자리가 보일뿐이였다. 그 자리마다에는 주인 없는 빈 베개들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리제우의 주변에도 그런 베개가 두개나 놓여있었다. 모두 모연공작에 동원된 학생들이 차지하고있던 자리들이였다. (우리를 기다리고있었구나!) 최창걸은 다심한 어머니나 친누이의 마음과도 같은 학우들의 뜨거운 정에 가슴이 왈칵 끓어오르는것을 느끼며 묵묵히 그 자리들을 둘러보았다. 어린시절 밤늦게까지 마을돌이를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따스한 아래목에서 그런 잠자리가 그를 기다리군하였던것이다. 그때는 어머니의 그러한 배려가 자식에 대한 사랑인줄을 미처 몰랐다. 그것은 매양 꼭같은 형태로 되풀이되는 배려여서 어린 창걸이는 마치 코로 공기를 들이키듯 그처럼 범상스레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것이였다. 하지만 천여리밖에서 두달동안이나 이집저집 숙소를 옮기며 부평초와도 같이 떠살이를 하다가 돌아온 지금 그는 새삼스럽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랑이라고 하는 모성애였음을 깨닫는것이였다. 그 모성애와 다름없는 학우들의 사랑이 어둠속에서 두팔을 벌리고 개원의 모연공작원들을 기다리고있는것이다. (우정이란 참… 고맙소, 동무들!) 최창걸은 이렇게 뇌이며 다음 방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그러나 다음 방에도, 그 다음 방에도 김성주동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창걸은 맥이 탁 풀리였다. (그 촌장이 허튼소리를 했을가? 아니, 그 령감은 그런 허풍선이가 아니던데… 그럼 어디로 갔을가? 혹시 개인집같은데서 하숙을 하고있는게 아닐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자기 호실인 첫 방으로 돌아왔다. 리제우를 깨워 그한테 물어보려는것이였다. 그가 막 호실문고리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누구인가 등뒤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거 창걸이가 아니요?》 《그렇소, 나요.》 최창걸은 소리나는쪽으로 홱 돌아섰다. 목소리의 임자는 보이지 않고 복도 출입문을 막아서는 고요한 인적기가 륙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눈총기를 모아 어둠속을 살피며 그 인적기를 향해 맞받아 소리쳤다. 《누구요?》 최창걸은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한해전보다 몰라보게 숙성하신 김성주동지께서 환히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에 다가오시였던것이다. 《성주!》 《창걸이!》 소용돌이치는 열풍속에 휘말려든것 같은 뜨거운 포옹의 순간 최창걸은 그만 꽁다리초를 떨어뜨리였다. 불꽃이라도 튕겨낼것 같은 거센 날숨만 어둠속에 서려오르고 주위는 한치앞도 가려볼수 없게 캄캄해졌다. 그러나 최창걸의 눈앞에는 초불빛에 드러나셨던 김성주동지의 정다운 모습이 력력히 보이는듯하였다. 그것은 무송의 나날 어느 하루도 자기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걱정스레 상처를 들여다보던 눈이였고 다정스러운 위로의 말씀을 해주던 입술이였으며 명랑한 웃음을 그려 보조개를 파보이던 볼이였고,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던 손이였다. 《성주가 정말 보고싶었소!》 《나도 창걸이를 몹시 기다렸소!》 어둠속에서 또다시 울리는 그 목소리들은 눈물에 젖어있었다. 《가만있소. 내 좀 초불을 켤게.》 최창걸은 비로소 김성주동지의 어깨에서 두손을 풀어내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의 팔에 손을 얹으시였다. 《초불을 켤게 있소. 밖에 나가서 시원한 공기나 마시지.》 최창걸은 복도에 떨어진 꽁다리초를 손더듬으로 집어들고 그이를 따라 운동장에 나섰다. 《성주가 없길래 몹시 실망했더랬소. 이 밤중에 어디 갔더랬소?》 정문을 나서자 최창걸이 물었다. 《좀 산보를 하더랬소. 돌아가는 소문이 개원에 갔던 사람들이 오늘밤 의숙으로 돌아온다지 않겠소. 그런데 열두시가 넘을 때까지 기다려도 감감 소식이 없더구만. 그래도 어쩐지 창걸이만은 이 밤중으로 의숙에 돌아올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지 않겠소. 그래 기숙사로 들어 안가고 지금 남대가를 빙빙 돌던중이요.》 최창걸은 그 소리를 듣자 더 감격하였다. 《기다려줘서 정말 고맙소. 나두 개원에서 성주가 입학했다는 소식을 진작 들었더면 불원천리하구 달려왔을것이요. 성주 소식은 오늘밤 까치골 촌장한테서 처음 들었소.》 《내 그럴줄 알았소. 며칠전에 창걸이한테 편지를 부치긴 했는데… 편지가 가닿기도전에 사람이 먼저 돌아오리라군… 가만있자, 무성이를 깨울가? 장참 <창걸이, 창걸이!> 했는데…》 《무성이라니?》 《허허, 그 친구도 의숙에 들어왔소.》 《야, 그 친구 늘 만나면 부러워하더니…》 최창걸이 소리를 지르며 당장 호실로 들어가려고 발길을 돌리자 김성주동지께서 그의 팔을 붙잡으시였다. 《가만 둬두오. 그러다간 온 의숙이 다 깨여나겠소.》 《하긴 그렇지. 막 환성을 올릴테니까. 가만 저쪽으로 가자구.》 김성주동지께서는 잡초에 파묻힌 소로길을 따라 송화강쪽으로 발길을 돌리시였다. 풀에 맺힌 밤이슬이 바지가랭이를 흠뻑 적시였다. 그렇지만 그이의 뒤를 따라가는 최창걸의 마음은 상쾌하기만 하였다. 물비린내가 풍겨오는 강반의 공기는 더욱 싱그럽고 청신하였다. 그는 코날을 벌름거리며 그 공기를 걸탐스레 들이키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새 또 다른 소식은 없었소?》 《많지, 우선 무성의 입학이 첫째로 꼽을 소식이고 다음은 그동안 차광수란 사람한테서 편지가 온것이 두번째 꼽을 소식이지. 서울에서 부친것 같더구만. 이 차광수란 어떤 사람이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안주머니에서 사흘째 간수하고 다니는 편지를 꺼내여 오른손 둘째손가락등으로 발신인의 주소가 적힌 부위를 툭 건드리시였다. 최창걸은 그 편지를 받아들고 겉봉의 글자들을 걸탐스레 들여다보았다. 《일본에 건너가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며 사회과학을 전공한 인테리인데 옳바른 운동선을 찾느라고 방황하는 모양이야. 삼원포에서 우연히 낯을 익혔지. 아주 고민이 많은 청년이더군.》 《왜 무슨 불우한 일이라도 겪고있던가?》 《아니, 사생활에서부터 오는 번민이라기보다 이 시대 모든 청년들이 품고있는 고통이라고 할가. 이를테면 옳은 진로를 찾지 못한데서부터 오는 그런 사회적고민이겠지.》 《방황! 고민! … 하긴 이것이 1920년대를 특징짓는 조선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매지구름이 설레는 음침한 하늘을 쳐다보며 나직이 뇌이시였다. 최창걸은 양복주머니에 편지를 집어넣고나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 의숙에 와보니 어떻소?》 김성주동지께서는 활기있게 강기슭을 거니시였다. 《교육내용은 별로 새것이 없더구만. 그러나 믿음직한 동무들이 많아서 그게 기쁘오. 리갑이, 제우, 영춘이 … 그밖에도 좋은 동무들이야 많지.》 《개원에 갔다오는 패들가운데도 멋진 청년들이 많소.》 최창걸은 박두학이 불망치를 주며 의숙에 도착하면 자기한테 제일선참으로 김성주동지를 소개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간단히 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사귀면 알게 되겠지만 괜찮은 동무요.》 《정말 그렇소. 모두가 지혜있고 정열이 넘치고 재능이 번쩍거리는 훌륭한 동무들이요. 창걸이, 그런데 내가 이런 동무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소?》 《무슨 생각을 했소?》 《그들의 힘, 그들의 건강, 그들의 지식, 그들의 슬기, 그들의 용감성, 그들의 조국애를 한데 합치여 이 세계의 암을 태워버릴 거대한 불길을 지펴올릴수 없겠는가 하는 생각이였소.》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정말 그렇게 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안도의 분파쟁이들처럼 패싸움을 할것이 아니라 우리 새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최창걸은 흥분에 겨워 그 다음말을 잇지 못하고 김성주동지의 손만 꼭 잡아쥔다. 가슴속에서 사품치는 격렬한 감정의 회오리가 그 손길을 타고 마디마디 뜨겁게 울린다. 그렇다. 새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할일이 얼마나 많은가. 온갖 주의와 주장이 범람하는 이 세계의 혼탁한 공기속에서 민족의 얼을 되찾고 2천만의 기발이 될 참다운 시대사상을 창조하고 그 기발밑에 온 나라 겨레를 불러 해방될 조국의 새날을 향해 매진하도록 해야 할 영광된 사명이 바로 우리들- 조선의 새세대들에게 지워져있지 않는가. 그 사명을 위해서라면 살을 베고 뼈를 깎고 피를 흘리고 목숨을 서슴없이 바쳐도 아까울것 같지 않았다. 최창걸은 김성주동지의 신념속에서 힘차게 태동하는 거창한 탐구의 맥박을 느끼며 오래지 않아 이 화성의숙에 펼쳐지게 될 전변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우리는 먼저 새 사조를 연구하며 조선이 나갈 진로를 탐색하는데서 힘을 합치자는것이요. 그래서 며칠전부터 공산주의서적들을 돌려보기 시작했소. 지금은 여기에 리효와 무성이, 리제우, 계영춘이들이 참가하고있소. 이 일때문에 나는 창걸이를 더 기다렸소. 이제는 창걸이까지 오니 정말 힘이 나오!》 김성주동지께서도 최창걸의 손을 꽉 움켜잡으시였다. 한시간후 최창걸은 벌써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는 김리갑이와 리무성이 자기 주머니에서 로획한 권총을 꺼내가지고 의숙에서 멀리 떨어진 북대가 교외에 나가 병깨기내기를 하는것도 모르고 오동령의 호랑이와 싸우는 꿈을 꾸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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