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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 장편소설
김 정
( 제 13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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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이 도착할 때면 매양 그러하듯이 그날도 화성의숙은 명절처럼 흥성거리였다. 매사에 의의를 부여할줄 아는 숙장은 아침 첫 상학이 시작되기전에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이게 하고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인 말마디들을 골라 신입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는 환영인사를 하였다. 그런 다음 전체 학생들이 볼수 있게 대렬앞으로 신입생들을 불러내였다. 이런 절차가 끝난 뒤에는 그들앞에서 학생들의 분렬행진을 펼쳐보이였다. 이 모든것은 아주 규모가 있고 산뜻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였는데 아무리 감정이 무딘 신입생도 이런 의식앞에서는 자연히 의숙에 입학한 긍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친절한 식사당번들은 손수 마련한 식찬과 맛나는 음식으로 신입생들의 식탁을 푸짐하게 차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 입학하신 그날도 이 모든것이 관례대로 진행되였다. 기숙사의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김성주동지를 둘러싸고 앉아 이야기판을 벌려놓았다. 양지촌에 있는 고구려의 옛성터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새로 설립된 백산학교의 교재에 이르기까지 화제는 실로 무진장하였다. 결국 새벽 두시가 다 돼서야 학생들은 하나 둘 이야기판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새날이 다 밝은 지금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계시였던 김성주동지께서는 이 새벽에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더운 기운이 떠도는 방안에는 아직도 어둑시그레한 적막이 차있었다. 들창으로 비쳐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에 어수선한 방안의 정경이 점차 희끄희끗 드러났다. 맨처음으로 그이의 시야에 비쳐든것은 옆자리에 누워자는 리제우의 하얀 이불깃과 유난히 두드러진 코날이였다. 잠을 몹시 갈개는 그는 자기 이불은 김성주동지쪽으로 반쯤 밀어던지고 그대신 오른쪽에 누워있는 계영춘의 이불을 가로채여 다리에 휘감고 잤다. 계영춘은 리제우의 다리짬에서 자기 이불이 걸레짝처럼 녹아나는줄도 모르고 가슴노리에 두손을 가지런히 얹은채 셈평좋게 잠을 자고있었다. 코를 골지 않는 그는 명상에 잠겨 천정을 쳐다보는지 아니면 잠을 자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듯 숨소리가 고르롭고 자세가 단정하였다. 거의 모든 기숙생들이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 덩지 큰 김리갑이와 조기영이는 씨름이라도 하듯 서로 다리를 엇걸고 잤다. 그것을 바라보시는 순간 향수비슷한 저릿한 느낌이 김성주동지의 가슴속에 스미였다. 그이께서는 내심의 이 느낌을 확인이라도 하려는듯이 이미 눈에 익기 시작한 주위의 정경을 다시한번 휘둘러보시였다. 곁에는 철주도 없었고 막내동생도 없었다. 새벽마다 막내아들이 차던진 이불귀를 여며주시며 조용히 새날을 기다리시던 어머님께서도 계시지 않았다. 방도, 사람들도 모두 생소한것이였다. 지어는 방안에 떠도는 공기나 들창가에 어려오는 새벽빛조차 죄다 설어보이였다. 팔도구에서 림강으로 가신 첫새벽과 다시 림강에서 무송으로 가신 첫새벽에도 김성주동지께서는 지금처럼 이렇게 쓸쓸한 충격을 가슴이 저리게 받으시였다. 그러나 이 새벽에 받는 충격은 그보다 훨씬 더 쓰라리고 허우룩한것이였다. 아버님의 서거라는 크나큰 손실만 없었어도 의숙의 기숙사에서 처음으로 맞으시는 오늘의 이 새벽은 그리도 허전하고 서먹서먹한것으로 되지 않았을것이다. 새벽이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소남문거리에서 제일 먼저 새날을 맞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르시였다. 새벽동자질을 비쳐주던 등잔불빛에 오리오리 드러나던 어머님의 윤기도는 머리카락과 쌀함박우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던 부드러운 손도 눈에 선하시였다. (어머님께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계실가? 화전에 와있는 아들생각을 하실가? 어머님을 그리는 내 마음이 이렇게 쓸쓸한데 아버지도 안계시고 나도 없는 큰 방에서 철없는 동생들과 함께 계시는 어머님의 마음은 얼마나 처량하실가. 그저 집이 텅 빈것 같으시겠지.) 어머님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은 이어 어린 동생들에 대한 뜨거운 련민의 정으로 바뀌여졌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집에 나까지 없으니 그 애들이 얼마나 썰렁해할가?) 김성주동지께서는 리제우와 계영춘의 이불을 제자리에 끌어다 덮어주고나서 기숙사를 나서시였다. 6월이라고 하지만 화전의 새벽은 자못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밤새 식어버린 강반의 선기가 옷자락밑으로 스며들었다. 그이께서는 어제낮보다 별로 눅눅해진것 같은 운동장을 밟으며 교정을 나서시였다. 여름밤의 짧은 잠을 설친 새들이 스무나무우에서 깃을 치며 오락가락하였다. 단 한순간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싶은 청신한 고요와 달콤한 이 공기를 깨뜨리고싶지 않은지 새들은 용케도 입을 다물고있었다. 작은 발로 나무가지를 건드릴 때마다 잎에 맺혔던 이슬방울들이 소리없이 땅에 떨어졌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마에 떨어진 이슬방울을 손등으로 문대며 천천히 송화강반으로 향하시였다. 한해반전부터 그이께서는 이 강과 인연을 맺으시였었다. 무심히 흘러가는 이 강물우에 실린 그이의 사색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검푸른 강물은 늠실늠실 소리없이 흘렀다. 그이께서는 물결이 출렁거리는 기슭에 서서 발밑을 굽어보시였다. 솔보굿을 파서 만든 장난감배 한척이 물이랑을 타고 기슭으로 떠내려왔다. 배 앞코숭이의 돛대처럼 서있는 수수대꼭대기에서는 꼬마바람개비가 돌고있었다. 그 바람개비의 무게때문에 배는 앞으로 자꾸 기울어지군하였다. (혹시 철주의 솜씨는 아닌지… 우리 철주가 저런 장난을 몹시 즐기였는데.) 김성주동지께서는 사랑하는 아우가 그 배우에 서서 강기슭을 바라보고있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접고 앉아 장난감배앞으로 손을 쑥 내보내시였다. 그러나 팔은 거기까지 닿지 못하였다. 배는 물결을 타고 그냥 아래로 떠내려갔다. 그이께서도 배를 따라 기슭을 걸어내려가시였다. 보면볼수록 무송의 동생들을 생각케 하는 그 앙증스런 장난감을 어쩐지 눈에서 놓아주고싶지 않으시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잊을수 없는 화폭이 불쑥 눈앞을 가리웠던것이다. 박도삼에게 가져다줄 오선주병을 안고 샘골로 가던날 우산밑으로 다가들던 동생들의 모습이였다. 애원에 찬 눈길로 형을 쳐다보던 철주의 검스레한 눈동자에서는 그때 벌써 이전날 그렇게도 형제들을 기쁘게 해주던 그 랑만에 찬 동심이 락조처럼 꺼져가고있었다. (철주가 언제 저런 배를 만들 경황이 있겠는가. 강가에서 모래터에 떠내려온 초리나무나 지저깨비를 줏지 않으면 다행이지.) 장난감쪽배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이께서는 한사코 아래로만 걸어내려가시였다. 뿌유스름한 새벽안개가 장막을 드리우고있는 강기슭의 후미에서 갑자기 그 무슨 시를 읊조리는 웬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는 게으른 흰구름이 돌고 땅에서도 고달픈 침묵이 가라진 오- 이런 날 이런 때에는 이 땅과 내 마음의 우울을 부실 동해에서 폭풍우나 쏟아져라- 빈다
나직나직 소리를 죽여 읊는 시였지만 음조만은 열정적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청년의 고조된 감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한자리에서 움직이시지 않았다. 후미쪽에서 마침내 목소리임자의 형체가 불끈 솟아올랐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토색샤쯔어깨에 세수수건을 걸친 등이 약간 구부정하고 키꼴이 후리후리한 청년이 량팔굽을 폈다굽혔다하면서 기슭을 거닐고있었다. 방금 읊조린 시의 여운이 온 마음을 사로잡은듯 그는 한곳에 우뚝 멈춰서더니 명상에 잠겨 강심을 들여다보는것이였다. 정열의 불꽃이 튕기는 그 시적인 눈이며 곱슬머리는 특이한 매력을 던져주었다. 턱을 건뜩 쳐들고 눈높이보다 약간 높은곳을 항상 쳐다보는 독특한 표정은 자존심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한테서 찾아보는 매우 인상적인것이였다. 《리효…》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계시였다. 한때 현장의 딸이 그에게 반하여 한달동안이나 의숙주위를 빙빙 돌아다닌적이 있다 한다. 상대방이 전혀 알은체를 하지 않자 그 처녀는 애간장이 말라서 본인에게 막대한 액수의 돈이 들어있는 련애편지 한장을 전하였다는것이다. 리효는 모욕감을 느끼고 《돈으로 비단은 살수 있어도 사랑은 살수 없을지라.》는 글구를 봉투에 적어 그 편지를 임자에게 돌려주었다. 이런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호젓한 강반에서 리효와 맞다든것이 못내 기쁘시였다. 아직은 정식으로 통성명은 하지 않았지만 어제 벌써 교실에서 서로 눈인사는 나눈터였다. 후미쪽으로 다가오시는 김성주동지를 보자 리효도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오, 성주로구만. 산보를 나왔소?》 《그렇소. 리효는?》 《나도 역시… 그래 기숙사가 불편하진 않았소?》 《아니, 괜찮소.》 김성주동지께서는 짤막하게 대답하시고나서 숨을 크게 쉬여 싱그러운 아침공기를 한껏 들이키시였다. 리효는 기슭의 섶나무에 걸어두었던 양복저고리를 집어 등에 걸치였다. 그리고는 모래터에 펼쳐진채로 놓여있는 수첩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수첩우에 란잡하게 적혀있는 지우고 다시 쓴 글줄들을 얼핏 눈여겨보면서 리효가 분명 남의 시를 앵무새처럼 읊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쓰기도 한다는것을 느끼시였다. 《울분에 찬 시로구만.》 그이께서는 수첩에서 눈길을 떼고 강심을 들여다보며 말씀하시였다. 《지난해에 발표된 네련짜리 시인데… 내가 제일 사랑하는 리상화의 대표작이요.》 리효는 시를 리해해주는 동무가 의숙에 나타난것이 무척 기쁘기라도 한듯 대뜸 환희에 흽싸였다. 시를 《청춘의 대명사》, 《혁명의 동반자》라고 곧잘 일컫는 그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그는 시를 리해하는 능력에 따라 상대방의 지성의 높이를 규정하였으며 그 인간에 대한 평가도 서슴없이 내리였다. 시가 없는 생활을 생활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시가 없는 심장을 심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가 구전민요를 잘 알고있는 최창걸이를 각별히 사랑하는것도 기실은 이런 까닭에서였다. 《리상화를 무척 숭배하는 모양이구만?》 《그래 존경하지, 그는 우리 20년대 시단의 첫째가는 자랑이니까. 독특한 심장을 지닌 시인이요.》 리효는 그 시적인 눈을 들어 려명속 멀리를 바라보았는데 그 진지한 눈빛에는 자기가 숭배하는 시인에 대한 경건한 감정이 불꽃처럼 번쩍거리고있었다. 《방금 리효가 읊은 리상화의 시에는 망국노가 된 조선사람의 울분과 폭풍우를 그리는 갈망이 잘 그려져있소. 현실에 대한 시인의 강한 비판정신이 마음에 드오.》 《그렇소. 그의 시줄들은 면도날과도 같소. 그것으로 이 현실의 종처를 사정없이 도려내거던. 그 칼끝에는 항상 모순덩어리인 이 사회의 종처에서 썩고있는 피고름이 묻어나온단말이요.》 리효는 예리한 말마디들을 고르느라고 미간을 자주 모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 날카로운 비유와 자극적인 표현들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조용히 웃음을 지으시였다. 《이렇게 만나 함께 공부하게 되니 참 반갑소.》 《나도 반갑소. 창걸이는 말끝마다 성주 칭찬이요. 우리 민족이 약소민족이 아니라 힘있는 민족이라고 했다는 성주의 말은 그 친구때문에 우리까지 알게 되였소. 우리는 조선민족이 약소민족이냐, 아니면 힘있는 민족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한바탕 론쟁까지 했댔소.》 김성주동지께서는 팔을 내저으시였다. 《너무 그러지 마오. 리효는 시공부를 많이 한것 같구만.》 《아니요. 아직 멀었소. 리상화의 높이에 이르자면 아직 멀었소.》 《그렇지만 리효는 그가 노래한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의 세계에 머물러있어서는 안되오.》 리효는 무슨 말인지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놀란 눈으로 김성주동지를 바라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어데선가 들려오는 여울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풀밭을 거니시였다. 그이께서는 허물없는 구면같이 정이 가는 이 학우에게 자꾸 무슨 말씀을 해주고싶은 충동을 느끼시였다. 《울분과 한숨만으로는 시대를 선도할수 없지 않소. 지금은 <시일야방성대곡>의 시대가 아니라 공산주의혁명이 일정에 오른 1920년대요. 오늘의 조선시단에는 사람들을 결사전에로 부르는 그런 시가 필요하오. 폭풍우를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폭풍우를 몰아오는 시인이 나와야 한단말이요. 그렇지 않소?》 《그건 그렇소. 에쩬 뽀찌에와 같은 시인이 나와야 하오.》 리효는 강심에 눈길을 박은채 무겁게 긍정하였다. 그는 황홀한 심정으로 덧붙였다. 《좋은 말을 해주어 고맙소.》 《그저 시를 사랑하는 한 동무의 심정이라 생각해주면 고맙겠소.》 김성주동지께서는 상쾌한 마음으로 강가를 뜨시였다. 그이께서는 모든것이 생소한 이 화전땅에서 리효와 같은 또하나의 열혈청년을 알게 된것이 무척 기쁘시였다.
3
그날 화성의숙에는 유난히도 많은 우편물이 배달되였다. 교원실 바깥벽에 걸려있는 장방형의 나무통에는 열한장이나 되는 편지들이 새로 꽂히였다. 수업중이여서 그 나무통주위에는 아직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다만 배달부가 왔다면 십리밖에서도 뛰여온다는 군사교관 박인석이만이 그앞에 다가가 수신인의 주소들을 낱낱이 살피며 그 편지들을 뒤적거리는것이였다. 교관은 그 열한통중에서 한통의 편지를 유독 깔끄러미 살피다가 슬쩍 뽑아쥐고는 밖으로 나갔다. 림소영이한테서 온 편지였다. 그는 아무의 눈에도 잘 드러나지 않는 스무나무그늘속에서 가슴을 울렁거리며 석달만에 받아보는 련인의 편지를 개봉하였다.
《존경하는 인석씨!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몸성히 지내셨습니까? 로모님께서도 건강하신지요? 저의 침묵이 너무 지루감스럽다고 많이 나무라셨을테지요. 하긴 석달이라는 긴 시간 저는 답장 한번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동안 상해에서 벌린 저의 무기공작은 걸음걸음 암초에 부딪쳤었고 따라서 저의 기분상태도 썩 좋지 못했습니다. 억지스러운 변명같기는 하지만 저는 거기로부터 오는 저기압이 글줄에 담겨지는것을 두려워했던것 같습니다. 자신의 침울한 기분으로 남들까지 침울하게 만드는 <정신전염>을 제가 얼마나 삼가는가에 대해서는 인석씨도 잘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인석씨! 오늘 저는 부득이 저의 울적한 심중을 인석씨에게 헤쳐보이려고 합니다. 비록 저로 하여 인석씨의 기분이 우울해지는 한이 있더라도말입니다. 저는 우리 독립운동선상에 그처럼 무서운 파국이 들이닥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의심할바 없는 재난입니다. 저는 김형직선생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그 가슴 떨리는 비보를 상해에서 퍽 뒤늦게야 받았습니다. 그날 저는 황포강기슭에서 석양이 다할 때까지 모래터에 엎드려 선생님 성함을 부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참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저녁의 황포강은 풍경조차 몹시 음산하였습니다. 광복전선에 몸을 던지고있는 우리모두와 독립운동전반은 물론 제 개인에게 있어서도 김형직선생님은 스승이시고 은인이시였습니다. 참으로 이제는 어데 가서 그 존귀한 모습을 다시 우러러보며 어데 가서 그 금옥같은 가르치심을 다시 받을수 있겠습니까. 다만 만고의 귀인도 몰라보는 운명의 그 가혹한 처사를 두고 저주를 보낼뿐입니다. 저는 무정하기 짝이 없는 제자신을 향해서도 저주와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상해로 가기 위하여 제가 무송을 떠날 때 선생님께서는 벌써 병상에 누워계시였습니다. 병세가 매우 중하였습니다. 그런 몸을 가지고서도 선생님께서는 저와 롱을 하시였습니다. 사위를 빨리 맞아들이고싶노라고말입니다. 그래서 백발이 될 때까지 시집은 안간다고 응석을 부리며 선생님곁을 떠났습니다. 아마 작별인사도 변변히 못드린것 같습니다. 그 순간은 그저 부끄럽다는 한가지 감정밖에 없었으니까요. 저는 선생님의 그 롱이 병마를 걱정하는 제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주기 위한 일종의 위로라는것을 퍽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무림의원>댁의 침상앞에서는 환자인 선생님께서 위로를 받으시는것이 아니라 항상 선생님으로부터 문병을 간 방문객들자신이 위로를 받군하였답니다.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보면 쓰디쓴 후회가 가슴을 파고듭니다. 작별인사라도 똑똑히 하고 미음 한술, 약 한보시기라도 제대로 떠드렸다면 이다지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을것입니다. 마지막 유언의 말씀 한마디라도 들었더면 얼마나 떳떳하겠습니까. 세상과 결별하시는 선생님곁에 제가 없었다는것을 생각하면 그 어떤 용서받을수 없는 죄의식으로 하여 피가 거꾸로 막 치솟아오르는것을 느끼군합니다. 그런 죄의식때문에 저는 정한 날자가 되기도전에 무송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방금 선생님의 무덤에 절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강반석어머님께서 저를 묘지까지 인도해주시였습니다. 이역의 산영에 솟아오른 말없는 봉분을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났습니다. 개미들이 기여다니고 찌르레기들이 울고있는 무심한 떼장앞에서 저는 무서운 비애와 허무를 느끼며 전률하였습니다. 과연 우리의 이 손실을 무엇으로 보상한단말입니까?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조선은 이 손실을 메꿀수 없을것입니다. 그저 모든것이 끝장이라는 한가지 절망감이 눈앞에 함정을 파놓고있을뿐입니다. 그런 암담한 감정때문에 건전하던 저의 넋은 페허처럼 황페화되였습니다. 어제날 선생님께서 환자들을 만나주시고 처방을 떼주시던 그 약방, 아이들을 위한 교과서와 강의안을 집필하시던 그 책상앞에서 저는 지금 이 편지를 쓰고있습니다. 눈앞이 자꾸 흐려와서 글줄을 제대로 이어갈수 없습니다. 글을 흘렸다고 나무라시진 않겠지요. 지금도 저의 눈앞에는 선생님의 무덤가에 피여나던 찔레꽃들이 어른거립니다. 바라건대 선생님의 혼령이 떠돌고있는 그 무덤가에 사시장철 온갖 꽃들과 열매들이 다투어 피여나기를, 추운 계절이 오면 청신한 백설의 꽃들이 만발하여 선생님의 혼령을 지켜주기를… 충심으로 빌뿐입니다.…》
박인석은 편지를 아래로 내려드리우고 눈굽을 훔쳤다. 눈앞에 안개가 낀것처럼 글줄이 마구 헝클어졌다. 림소영의 비애는 그처럼 강한 힘으로 이 무쇠같은 사나이의 심장을 흔들어놓은것이였다. 그 비애가 가슴에 와닿는 순간 교관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어느때든지 한번은 처녀에게서 이런 슬픔의 분출을 당하리라고 각오는 하고있었지만 그 슬픔이 편지에 고백한 그런 심도의 절망이나 허무감으로까지 번질줄은 미처 몰랐다. 선생님의 남다른 사랑과 은총을 받아온 림소영으로서야 응당 그럴수밖에 없는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누구보다도 민감한 심장을 지닌 녀성이 아닌가. 그보다 일찍 부고를 받은 박인석이자신도 그날은 얼마나 분해하고 비통해하였는지 모른다. 뼈를 에이는것 같은 슬픔에 눌리여 말없는 송화강물결우에 한방울 두방울 눈물을 실어보낼 때 그의 가슴속에서 울린 망국의 비가는 얼마나 애달프고 처량하였던가. 그는 텅빈 페허속에 들어선 심정으로 온종일 그 강기슭을 정신없이 헤매였다. 무송회의때 뵈온 김형직선생님의 그 거룩한 영상이 자꾸만 되살아올랐다. 선생님의 서거로 하여 조선민족이 당한 손실을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졌다. 먹고싶은 생각도 없없고 자고싶은 욕망도 없었다. 그 어떤 고초앞에서도 굽힘을 모르는 타고난 의지와 사나이의 완강성만이 그를 그 슬픔에서 헤여날수 있게 하였다. 그는 비관에 잠기지 않기 위해 무서운 정력을 가지고 일에 투신하였다. 한시라도 일손을 늦추는 때면 단단히 죄여들었던 마음의 나사가 풀어지고 뼈속까지 저려드는 상실의 아픔이 사정없이 온 넋을 침습하였다. 어느덧 그는 슬픔에 버릇된, 아니 슬픔을 이겨낼수 있는 강한 의지를 가질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오늘 림소영의 눈물로 하여 그 의지는 또다시 거세게 흔들리였다. (참으로 우리는 위대한분을 잃었구나!) 박인석은 한숨을 몰아쉬며 멀리 남쪽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밑에 선생님의 분묘가 있고 무덤가에 사시장철 백화가 만발하기를 바라마지않는 정다운 벗 림소영이 있다. 가까이에 있으면 그와 함께 슬픔도 나누고 절망에 잠기면 안된다고 타일러도 줄수 있으련만 그렇게 할수 없는 박인석의 심정은 안타깝기만 하였다. (림소영은 종시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락오자가 되는것이 아닐가?) 이런 섬찍한 예감이 언뜻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달갑지 않은 예감이였다. 아무리 림소영이 군인생활을 그만두고 녀성의 구실을 해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빌어온 그로서도 벗이 자기스스로 택했던 위업에 대한 신념을 잃고 타락되여 대오에서 물러서는것은 반갑지 않았다. 신조나 목적을 잃고 정신적으로 변질된 녀성은 시들은 꽃과도 같은것이다. 차라리 광복운동에 대한 신념을 간직한채 생기발랄한 꽃으로 림소영이 설자리에 들어선다면 그것은 싫지 않을것이다. 박인석은 어쩐지 그 다음부분을 읽기가 겁났다. 더 참담한 목소리가 들릴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눈은 어느새 글줄을 더듬어나갔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금에 와서 저는 저의 마음을 지탱해주던 정신적지주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손길이였습니다. 그 손길을 잃게 되자 저는 바람에 내불린 검부레기와도 같은 신세가 되였습니다. 만일 강반석어머님께서 저에게 제때에 아픈 매질을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제 한몸의 무게도 감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졌을것입니다. 어머님을 위로해드릴 사명을 띠고 <무림의원>댁에 나타난 제가 도리여 어머님의 부축을 받게 되였으니. 저는 그처럼 강의한 어머님을 처음 보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소영이가 그렇게 맥을 놓고 주저앉으면 성주아버지가 생전에 소영이를 위해 애쓴 보람이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저를 호되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신히 자기를 다잡을수 있었습니다. 인석씨, 이것이 제자신을 위해서도, 서거하신 김형직선생님의 유훈을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저에게 한줄기의 광명으로 된것은 선생님의 대를 이어갈 성주가 화성의숙에 입학했다는 사실입니다. 인석씨가 계시는 화성의숙에말입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겠는지 상상되시지 않습니까? 저는 조선의 장래를 우려하는 민중의 한사람으로서 성주에게 큰 기대를 걸고있습니다. 김형직선생님은 저의 은인이시고 성주는 선생님의 뒤를 이어갈 자제분이니 원컨대 저의 몫까지 합치여 성주를 각근히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전도가 양양한 인재이니 특별한 관심을 돌려주세요. 인석씨! 수일간에 저는 화전으로 가게 될것 같습니다. 그곳 안도선 중대에서 대원들의 계몽을 위해 일군을 요구한것 같습니다. 그 적임자로 제가 뽑히였습니다. 아마 오는 가을까지는 화전의 밥을 먹어야 할가봅니다. 정든 사람들이 있으니 생활이 적적하지는 않겠지요. 국내에 나가서 천수덕주재소를 치고온 관전중대의 용사들이 저와 동행하게 될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무송땅에서 매일같이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무훈담을 펼쳐놓고있습니다. 그들은 화전에도 간다고 하는데 아마 화성의숙에서 첫 무훈담을 벌릴 계획인가봐요. 편지가 몹시 지루하지요?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오. 이 장문의 글월로써 저는 두차례의 회답을 회피했던 최근의 <빚>을 갚아드린 셈입니다. 여기에 백산학교 꽃밭에서 뜯은 봉선화잎을 넣어보냅니다. 인석씨가 보낸 꽃씨에서 자란 꽃입니다. 무송에서 300리밖에 안된다는 화전땅이 왜 이다지도 멀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몸건강하시기 바라면서 이만 총총히 붓을 놓습니다.…》
박인석은 비로소 후- 하고 숨을 길게 내뿜었다. 편지는 완전한 절망으로만 엮어진것이 아니였던것이다. 거기에는 절망에서 헤여나려는 몸부림과 미래에 대한 지향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흥분시킨것은 림소영이 화전땅을 밟게 된다는 소식이였다. 게다가 관전중대의 싸움군들까지 온다니 그이상 더 큰 경사가 어디 있으랴싶었다. (그런즉 무기고 꾸리는 일을 속히 마무리해야겠군.) 박인석은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속심은 총이 없는 빈 무기고를 보면 본부의 어르신님네들도 아닌보살을 하지 않을것이고 따라서 재정예산의 적지 않은 몫을 의숙의 총구입에 돌리리라는것이였다. 교관은 개원일대에 나가있는 학교운영자금모연공작조에 편지를 내여 총이 없는 무기고를 생각해서라도 더 많은 돈을 모아달라고 부탁하였으며 화전관내의 주민들에게도 원호금을 내라고 호소하였다. 그가 무기고를 꾸리는 진의도는 단순한 실탄사격이나 하자는데 있지 않았다. 최종적인 목표는 무장대를 무어가지고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벌려보려는것이였다. 물론 그것은 아직 머리속의 공중루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실현할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였다. 의숙에는 우선 무장대에 망라시킬수 있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총명하고 유식하고 날파람이 있는 시대의 총아들이였다. 박인석은 의숙에 찾아오신 김성주동지를 만나던 그날을 흐뭇한 마음으로 회상하였다. 그날의 인상은 그이의 모습을 매일같이 볼수 있는 교단과 훈련장에서 더 새로와졌다. 교관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청년들, 장차 자기의 손발이 되고 충실한 협조자가 되여줄 제자들을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리갑이, 창걸이, 제우, 학봉이, 영춘이, 두학이… 그래 그들은 리갑이의 말마따나 김응서나 서산대사와 맞먹는 의병장감들이다. 이들만 잘 키우면 조선팔도도 타고앉을수 있지.) 박인석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분후에 그는 상학을 집행하여야 하는것이다. 교관은 그 5분이 너무 짧은것을 약간 원망하면서 련인의 편지가 남긴 향기를 조용히 음미하였다. 역시 이번 편지에도 《사랑》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림소영은 《사랑한다》거나 《그립다》는 말을 한번도 쓴적이 없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고보면 거기서는 말없는 애정이 과일향기와도 같이 은은하게 풍겨오는것이였다. 그래서 그 편지는 더욱 귀하고 소중하였다. 마침내 상학종이 울리였다. 달콤한 환락의 세계에서 깨여난 박인석은 서둘러 운동장으로 향하였다. 최동오숙장이 교원실문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종끈을 쥔채 학생들이 정렬하는 모습을 내다본다. 원래 종은 학감이 치게 되여있었지만 군사훈련시간에만은 숙장이 자진하여 종을 치군하였다. 그만치 그는 이 과목을 중시하였다. 내려쪼이는 해빛에 그의 번대머리가 번쩍 빛을 뿜었다. 그것은 독립군간부들을 길러내는 이 학교의 존엄에 그 어떤 이름할수 없는 무게를 더해주는것만 같았다. 숙장의 입가에 드디여 느슨한 미소가 비낀다. 두부모같이 반듯한 대렬이 눈앞에 나타난것이다. 《쉬엿, 기착! 가운데로- 봣!》 학급장 김리갑의 목소리가 무슨 나팔소리처럼 열에 뜬 6월의 대기를 들었다놓았다. 박인석은 내장의 비밀까지도 죄다 갈라보는것 같은 예리한 눈길로 대렬을 단번에 훑어보고나서 엄엄하게 물었다. 《한명이 모자랍니다. 누가 없습니까?》 모두들 누구일가고 대렬을 돌아보는데 계영춘이 뛰여가서 책상우에 엎드려 쪽잠을 자던 리효를 데리고 나왔다. 리효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대렬쪽으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흥, 또 그 《하이네》로군. 저렇게 갱충머리 없다구야.) 박인석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의숙에서 그가 좀 멀리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것은 리효일것이다. 교관은 그가 무슨 쉴러요, 하이네요 하면서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지르고 다니는것이 갖잖아보였고 무슨 구상입네, 습작입네 하고 몽유병자처럼 노는 꼴이 가소로와보이였다. 그는 리효를 사이비문학청년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리왕조의 썩어문드러진 유물 《문존무비》의 유령이라고 여기였다. 만일 그자신이 하이네나 쉴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문학문외한이였거나 림소영이 또한 문학애호가가 아니였다면 그는 리효에게 일찌기 교관으로서 줄수 있는 온갖 처벌을 다 적용하였을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용서가 없다. 《섯!》 박인석은 단발사격같은 구령으로 그를 멈춰세웠다. 《왜 늦었습니까?》 《…》 리효는 바지혼솔에 두손을 가져다붙이고 나뽈레옹이나 꾸뚜조브뿐만아니라 괴테나 스탕달에 대해서도 자기보다 못지않게 알고있는 엄격한 군사교관을 겁먹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늦었습니까?》 교관은 재차 따지고들었다. 《…》 역시 반응은 없었다. 《운동장 다섯바퀴!》 박인석은 마침내 의숙에서 적용되는 최고의 처벌을 선언하였다. 술렁거리던 대렬이 긴장해졌다. 리효가 운동장을 다섯바퀴 돌고 대렬에 들어섰을 때 교관은 다시 말을 붙였다. 《리효학생, 애국명장 김종서의 시를 알고있습니까?》 《압니다.》 《남이장군의 시는 압니까?》 《네.》 《리순신장군의 시는?》 《그것도 압니다.》 《류린석선생의 창의문도 기억하고있겠지?》 《기억하고있습니다.》 《좋습니다. 훌륭한 문장가들은 하나같이 뛰여난 명장들이였다는것을 기억하시오. 들어가시오!》 대렬은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엄하게 시작된 처벌이 부드럽게 끝났던것이다. 《학생제군들!》 박인석은 그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랭랭한 음성으로 오늘 상학의 내용과 취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통고한바와 같이 오늘은 산야횡단훈련을 하려고 합니다. 제군들가운데는 이미 이런 훈련을 해본 학생들도 있고 또 해보지 못했거나 말만 들어본 학생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훈련에서는 경험이나 체험에 관계없이 모두 산야횡단이라는것을 처음 당해보는 초학도의 심정으로 직심스레 상학에 참가하여야 하겠습니다. 왜냐 하면 체험이라는것은 게으름을 몹시 타거니와 또 일정한 시기를 지나면 어쩔수없이 령으로 되여버리기때문입니다.》 대렬속에서는 잔잔한 웃음소리가 퍼져갔다. 교관도 벙싯 웃었다. 그는 자기의 명쾌한 훈시가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사실상 교관은 이따금씩 묘한 비유나 과장을 곧잘 입에 올리군하였는데 그런 말의 약간의 희롱때문에 그의 딱딱한 교수용어는 학생들속에서 꽤 감칠맛이 있는것으로 평가되는것이였다. 《군인이 지니고있어야 할 4대비요란 무엇이겠습니까?》 박인석은 대렬을 둘러보다가 계영춘의 이름을 불렀다. 계영춘은 대렬앞으로 한발 나섰다. 뽈도 잘 차고 풍금도 잘 타고 이야기도 잘하는 팔방미인형의 랑만가이다. 푸접이 좋고 성미가 너글너글한 그의 주위에는 항상 동무들이 많았다. 《군인이 지니고있어야 할 4대비요란…》 계영춘의 대답이다. 《첫째로 나라에 대한 충성심, 둘째로 정확하고 능숙한 사격술, 셋째로 적을 단매에 쓰러뜨릴수 있는 힘, 넷째로 전진과 퇴각의 불가결의 요소인 속도와 인내성입니다.》 《잘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진행하게 될 산야횡단훈련은 그 4대비요가운데서 어떤 요소를 해결하려는것이겠습니까?》 《네, 속도와 인내성을 해결하려는것입니다.》 박인석은 만족한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현대적인 무력을 갖고있는 선진국의 군대에서는 비행기나 자동차 같은것이 군인들의 속도를 대신해주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비행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습니다. 이런 실정에서 매개 군인들은 속도를 높이고 인내성을 키워야 합니다. 재작년과 작년, 금년에 있은 압록강연안일대에서의 대소전투의 교훈이 이것을 실증해주고있습니다. 제군들, 오늘상학의 취지를 알겠습니까?》 《네.》 학생들이 일제히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그럼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산야횡단구간은 학교운동장으로부터 저기 뾰족산까지입니다. 훈련도중 락오자나 부상자가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기착, 앞으로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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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렬은 평보로 시가를 빠져나갔다. 서대가끝에 이르자 교관은 《달렷!》 구령을 주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리효와 함께 다섯번째조에서 달리시였다. 그 조에는 리제우도 끼여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모두 어슷비슷한 속도로 발까지 맞추어가며 신바람이 나게 달리였다. 군대에서 단련된 사나이들이라 이런 행군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다. 그렇지만 김성주동지로서는 이 훈련이 여간만 큰 시련이 아니였다. 경험이 없으면 한마장도 못가서 혀를 빼문다는 훈련이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두주먹을 부르쥐고 꾸준히 숨고비를 맞받아나가시였다. 앞에서 달리던 리효가 힐끗 뒤를 돌아다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서 달리기를 멈춘다. 그이의 얼굴에서 봄락수와도 같이 흘러내리는 구슬땀을 보았던것이다. 《힘들지?》 하고 그는 귀속말로 살틀하게 물었다. 《힘드오.》 《힘들면 내 손을 잡고 뛰오.》 《아니, 괜찮소.》 김성주동지께서는 리효의 손을 밀막으면서 얼굴의 땀을 훔치시였다. 그러는 사이에 여섯번째조에서 달리던 박인석교관이 그이의 곁에 이르렀다. 상학때마다 허리를 자주빛 가죽혁띠로 꼭 졸라매여 입군하는 교관의 황갈색저고리는 단추들이 목밑까지 다 채워져있었다. 빨간 수실로 테를 두른 목달개의 가장자리가 양복깃우로 드러나보인다. 구리로 만든 혁띠고리는 팔을 저을 때마다 눈을 시그럽게 하는 황금빛 반사광을 사방에 휘뿌린다. 《성주, 이런 훈련이 처음이겠지?》 교관은 김성주동지와 발을 맞추며 다정스레 물었다. 야외상학이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물음이다. 《예, 처음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공손하게 대답하시였다. 《몹시 힘든게로구만, 얼굴이 활딱 달아오른걸 보니…》 교관은 김성주동지의 모래주머니끈이 제대로 매여져있는가를 세심이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견뎌낼수 있습니다.》 《지나친 장담이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걸음을 많이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견뎌보오.》 박인석은 흐뭇이 웃으며 김성주동지의 어깨를 두들겼다. 혁띠밑에 포개여넣었던 하얀 손수건을 그이의 손에 쥐여드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옛소. 땀을 씻소.》 림소영의 편지를 받은 다음부터 박인석은 남들의 눈에 뜨일 정도로 각별하게 김성주동지를 보살펴드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군사교관의 그러한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한계이상의 관심앞에서는 매번 열적은 심정을 맛보시군하였다. 표가 나는 후원의 덕을 입는것이 싫으셨기때문이였다. 남들과 꼭같이 자기 힘으로 생활을 개척하고싶으신 자립에 대한 욕구는 그이의 마음속에서 털끝만한 의존심도 발붙일수 없게 하였다. 그이께서는 한번도 땀을 씻어본것 같지 않은 교관의 그 깨끗한 손수건을 주머니에 집어넣으신 다음 50m쯤 앞서나간 대렬을 따라잡으려고 빠른 속도로 달리시였다. 조국의 험한 산발을 타고 만경대에서 팔도구로 향하시던 한해반전의 겨울이 문득 그이의 추억속에 되살아올랐다. 부르튼 두발을 힘겹게 끌며 한걸음한걸음 북으로 향하던 그 암담한 나날에도 그이께서는 언 강낭떡으로 시장기를 달래며 하루 백리라는 먼길을 걸어내시였다. 그것은 이 의숙은 물론 조선의 어느 청년도 겪어보지 못한 오직 그이께서만 겪으신 귀중한 체험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런 나날들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자신의 의지와 힘을 굳게 믿으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락오자가 되지 않으리라!) 리효는 50m앞에서 그냥 보란듯이 달리고있었다. 그는 달리다가도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히죽히죽 까닭없는 웃음을 보내군하였다. 참 별일은 별일이였다. 몸이 노곤하다고 쉬는 시간에도 잠을 청하고 수업시간에도 졸음에 몰려 허덕지덕하던 그가 저처럼 힘을 들이지 않고 쉽사리 달릴수 있다는것은 암만 생각해도 모를 일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 비결을 반시간후에야 알아내실수 있었다. 새초풀이 우거진 뾰족봉의 산릉선에 다달은 대렬에 휴식구령이 내리자 리효는 그이의 팔을 끌고 으슥진 수풀속으로 들어갔다. 관목들로 둘러막힌 자그마한 공지였다. 그는 공지의 한쪽에 벌렁 사지를 내뻗치고 드러누웠다가 무엇때문엔지 용수철에 튕긴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성주, 모래주머니를 좀 보기요.》 김성주동지께서는 모래주머니를 벗어주시였다. 주머니의 끈을 끄르고 속을 들여다보던 리효는 무슨 못마땅한것이라도 본것처럼 돌연히 큰소리로 혀를 찼다. 《하하, 참 고지식하구만.》 《왜 그러오?》 리효는 대답대신 자기의 주머니를 헤쳐 속에 든것을 풀밭에 와르르 털어놓았다. 주머니속에서는 모래가 아니라 벼겨가 쏟아져나왔다. 《자 보오, 어떤 <모래>가 들어있나… 그런데 성주는 진짜 모래를 넣고 뛰였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소! 에, 참 답답하다구야. 머리를 안쓰면 두다리가 고생한단말이요.》 그는 꺼내놓은 벼겨가운데서 절반만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풀밭에 그대로 내버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이 그가 하는양을 바라보시였다. 그러시다가 리효가 털어낸 벼겨의 절반마저 풀밭에 내던지는것을 보자 더 참지 못하고 말씀하시였다. 《자신을 위한 훈련인데 그렇게 오그랑수를 쓰면 되겠소?》 리효는 태연하게 웃었다. 《오그랑수? 아니요. 이건 정당방위요.》 《허허, 오그랑수가 정당방위로도 되는구만. 도대체 무엇을 방위한다는거요?》 《무익한 힘의 랑비에서 자신을 지켜낸다는거요. 나는 애당초 이런 중세기적훈련방법을 인정하지 않소. 현대전의 견지에서 보면 너무 초라하고 무지막지한 방법이란말이요.》 《그런 소감을 학교당국에 비쳐본적이 있소?》 《없소. 고백한들 뭘하오. 또 김종서장군의 시나 읊으라고 할걸. 어쨌든 의숙은 아직 촌때를 벗지 못했소. 모든게 고리타분하고 답답하단말이요.》 《그렇다면 고리타분한 생활을 즐거운 생활로 바꾸어라도 놓아야지 않겠소. 생활이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거요. 누가 만들어주리라고 생각해선 안되오.》 《내가 도대체 무슨 생활을 만들어낼수 있겠소. 기껏해야 시나 끄적거렸지.》 《그렇게 자신을 과소평가하는건 좋지 않소. 혼자서 안되면 둘, 둘이 안되면 셋, 넷, 다섯… 이렇게 여럿이 힘을 합치고 정열을 합쳐서라도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보잔말이요. 의숙에는 좋은 동무들이 많지 않소. 동무들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수 있소!》 김성주동지께서는 리효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간절한 눈매로 그의 얼굴을 돌아보시였다. 그이께서는 정말로 이 화성의숙에서 새로운 생활을 창조하실 결심이였다. 그것은 물론 투쟁과 전진을 위한 생활, 조국과 민족 앞에 지니고있는 청춘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한 의의있는 생활로 될것이였다. 그렇지만 리효는 아직도 그이의 가슴속 깊은곳에서 어떤 불길이 타오르고있는가를 보지 못하였다. 《정말 새로운 생활이 그립소. 앞으로 나를 많이 도와주오.》 그는 가둑나무잎을 뜯어 훌훌 바람을 일구다가 나무그늘속에 벌렁 나가군드러졌다. 그리고는 양복주머니에서 습작중에 있는 시작품을 꺼내여 중얼중얼 읽기 시작했다. 김성주동지 역시 심한 피로를 느끼고계시였다. 갑자기 얼굴에 울기가 오르고 온몸이 노곤해지시였다. 이대로 풀밭에 누우신채 한잠 푹 자고싶은 생각까지 드시였다. 그이께서는 눈을 감고 이마우에 손채양을 붙이시였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기분이 몹시 어수선하시였다. 모래주머니에서 벼겨를 덜어내던 리효의 모습을 보신탓이라고 할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숙의 군사교육에 대한 그의 불만을 들으신탓인지도 모른다. 그이께서는 군사학을 비롯한 여러 과목들의 교육강령이 그닥지 마음에 드시지 않았다. 의숙의 교육내용에는 열혈청년들의 피를 끓게 할만한 참신하고 현실적인 세계가 없었다. 이러한 실태가 리효의 기분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산릉선쪽에서 학급반장 김리갑의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자- 다들 들으십시오. 교관선생님의 지시입니다. 십분후 호각소리가 울리면 모두 지난 주일에 해놓은 원목더미앞으로 모이시오. 다들 들었습니까?》 수풀속 여기저기서 각이한 음색들이 시큰둥하게 혹은 시원스레 혹은 늘척지근하게 《네!》 하고 대답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김리갑은 그 대답소리들이 미타하게 들렸던지 같은 말을 먼저번보다 더 큰소리로 되풀이하였다. 그리고는 김성주동지께서 누워계시는 공지로 터벌터벌 걸어오는것이였다. 생김새도 서글서글하고 목소리도 칼칼하지만 걸음걸이 또한 여간만 활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이 온통 여드름투성이여서 정력이 더 넘쳐보이였다. 《여, 리갑이, 원목더미앞에는 또 왜 모이라는거요?》 습작품을 음미하는데만 옴해있던 리효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약간 짜증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통나무를 한대씩 메고가자는게지. 그래야 무기고를 빨리 지을게 아닌가.》 김리갑은 상대방의 시뿌둥한 기분은 못느끼는척하고 리효가까이에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리효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기고? 흥, 총두 없는데 집부터 짓는단말이지?》 《총이야 차차 생기지 않으리.》 《군관학교라는게 너무 시시하단말이야. 신흥무관학교에는 <백산대대>라는 무장단체까지 있었다는데 화성의숙에서는 총 한방 쏴볼수 없으니…》 《저 친구는 늘 시만 붙들고있으면서도 그저 총타령이라니까. 모래주머니에 벼겨를 넣고다니는 주제에…》 리효는 아무 항변도 못하고 씩- 하고 웃어버리였다. 그 《벼겨》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입을 다물고 꼼짝을 못하는것이였다. 김리갑은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소리없이 미소하시는 김성주동지와 뜻있는 눈길을 마주친 다음 리효의 손에서 습작품을 앗아들었다. 《여, 보지 말라구. 미완성품인데…》 리효는 몸을 반쯤 일으켜 원고를 돌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김리갑은 들은체를 하지 않고 감정까지 돋구어가며 그 시를 읊었다. 《<사람들, 우리를 열혈이라고 부르오. 그렇소. 우리는 열혈!…> 빌어먹을것, 경치게는 잘 썼다!》 김리갑은 부러 심술을 부리는듯한 표정으로 손에 쥔 종이장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위혁하듯 주먹을 내흔들었다. 《여, 친구! 그렇지만 훌륭한 문장가들은 하나같이 뛰여난 명장들이였다는것을 기억해야지.》 리효는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그 반대라고 봐야지. 훌륭한 명장들은 하나같이 뛰여난 문장가들이였으니까.》 김리갑은 그 말을 귀등으로 흘러보내고 말씀은 없이 웃고만 계시는 김성주동지께 말을 건네였다. 《성주, 야외상학이 어떻소? 힘들지 않소?》 《힘드오.》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요. 훈련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두 진땀을 뽑았소. 숨구멍이 한 열개쯤 있으면 좋을것 같은 생각이 날 때두 있더란말이요. 병실에 들어와서도 그냥 앓음소리를 냈소. 젠장, 그때는 왜 그렇게두 힘이 들던지. 독립군이구 뭐구 싹 그만두구싶은 생각이 나지 않겠소. 그런데 저 박교관선생이 요구하는 훈련강도는 현역군인때의 세곱이나 되니… 어떻소. 의숙에 온걸 후회하지는 않소?》 《아니, 아직은 그런 생각이 나지 않소.》 김성주동지의 대답이였다. 김리갑은 그이의 눈빛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의기양양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우리 의숙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게요. 박인석선생이 그러는데 래년쯤에는 학교건물을 새로 짓고 학생수도 두어배쯤 늘인다고 하더구만. 의숙에서 인기가 없는 교원들은 본부로 데려가고 길림에서 뜨르르한 교원들을 새로 선발하여 우리한테 보낸다는거요. 그리구 이전날 신흥무관학교에 있었다던 <백산대대>같은 학생무장단을 무어가지구 국내에 나가서 전투도 벌리겠다고 합데. 그쯤되면 우리 의숙이 아주 번창해질거란말이요.》 그는 눈을 쪼프리고 파랗게 트인 여름하늘을 흥겨운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그 하늘에서 의숙에 펼쳐질 신기루라도 그리는것처럼. 그 꿈처럼 아름다운 구름송이들이 느릿느릿 6월의 대기속을 헤염쳐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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