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1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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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에 접어들자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처럼 평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러 오는 사람들이였다.

련석회의를 며칠 앞두고있을 때였다.

남측대표들과 수행기자들을 태운 특별렬차가 평양역에서부터 남행길을 달리고있었다. 차창으로는 밝은 아침해빛이 눈부시게 비쳐들었다. 지금 대표일행은 황해제철소로 찾아가는 길이였다.

모든 차칸들에선 녀성렬차방송원의 친절하고 고운 목소리가 다정히 울리고있었다.

《존경하는 대표선생님들, 지금 이 렬차에는 선생님들의 황해제철소참관사업을 보살펴드리기 위해 북조선인민위원회 허정숙선전국장과 리문도 산업국 부국장 겸 전기처장이 동행하고있습니다. 문의할것이나 요구하실것이 있으면 3호렬차칸에 찾아가시면 됩니다.》

렬차방송을 듣고 대표들이 불시에 놀라며 수선거리였다. 그도 그럴것이 요즘 남조선의 일부 신문과 방송들에서는 리문도가 전기간첩사건으로 극형을 받게 됐다는 특대소식을 련속 보도하였던것이다.

특별렬차에는 남조선 건민회 위원장의 직함으로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러 온 경제학자이며 어학자인 리극로도 앉아있었다. 그는 김일성장군님의 존함인장이 찍힌 남북련석회의 초청서한장을 받은 남조선의 인사들중에서 제일먼저 북으로 들어온 대표였다. 리극로도 렬차방송을 듣고 처음에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고 다음에는 허위보도를 한 남조선의 어용출판보도계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마살을 찌프리였다.

리극로는 중간석 차창가에 앉아있었다. 차창으로 바라보이는 넓은 전야에서는 후치질이며 써레질을 하던 농군들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면서 지나가는 려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있었다.

리극로는 생각깊이 차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그의 손에는 1946년 1월 1일부 《정로》신문 한장이 쥐여져있었다. 2년전의 그 신문에는 김일성장군님의 신년사 《신년을 맞이하면서 전국인민에게 고함》과 함께 해방전부터 리극로가 잘 알고있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법학부장인 김광진의 경제론문 《조선경제의 건설을 위하여》가 실려있었다.

리극로는 장군님의 신년사와 김광진의 론문을 여러번 정독했었다. 그가 이 짧은 론문에 류달리 관심을 가지고있는것은 한때 자기가 쓰려다가 포기해버린 론문제목과 신통히 비슷하였기때문이였다. 그가 쓰려다 그만둔 론문제목은 《조선경제의 발전을 위하여》였다.

유명한 화학자 로씨야의 멘델레예브는 생의 후반기에 로씨야의 산업부흥을 갈망하는 애국심으로부터 자기의 전문분야인 화학을 돌려놓고 산업경제에 대한 연구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일찌기 베를린종합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증을 받은 리극로는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전문분야인 경제학을 옆으로 밀어놓고 어학연구에 온 정력을 다 바치게 된 과학자이며 사회활동가였다. 리극로는 베를린종합대학 재학당시부터 민족어연구에 깊은 심혈을 쏟게 되였다. 도이췰란드류학이전에 벌써 로어, 중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나라 언어를 소유하고있은 리극로의 풍부한 어학밑천은 민족어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으로 되였다.

외국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곧 어학자들을 선동하여 《조선어학회》를 조직하고 조선어사전편찬을 비롯하여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의 연구와 보급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였다. 첫걸음부터 장애로 된것은 경제난이였다.

그는 어학회를 운영하기 위해 가산을 다 팔아먹고 나중에는 안해의 결혼금반지, 비녀, 금귀지개까지 모조리 다 팔아버렸다. 그는 입을 옷도 변변한것이 없이 당시 신문에 《헌 두루마기에 꿰진 편리화를 신은 리박사》라는 기사가 실린적도 있었다. 리극로가 일찍부터 여러 나라 언어를 소유하게 된것은 조선을 구원해줄 위인들을 찾아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기때문이였다. 레닌, 뜨로쯔끼, 손문, 텔만 등 위인이란 위인은 다 만나보았으며 지어는 아인슈타인, 큐리부인과 같은 자연과학자들에게까지 찾아가 나라잃은 설음을 하소연하며 눈물을 지었었다.

그가 도이췰란드에까지 굴러가서 고학으로 굶주림을 이겨내며 대학을 다닌것도 이 나라를 구원해줄 위인을 찾을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 《조선어학회》를 조직한 초기까지도 조선을 구원해줄 위인을 어느 먼 나라에서 찾으려고 했었다. 그러던 그가 1930년 9월 5. 30폭동에 피해를 입은 조선동포들을 위문구제하기 위한 신간회대표단 성원으로 중국 동북지구에 가서야 비로소 《길은 가까이에 있는데 먼곳에서 찾는다》는 옛성인의 말을 자신이 걸어다닌 곡절많은 구국행각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보게 되였다. 그때 장춘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는 최일천을 통해 길림일대에서 태동하고있는 새로운 혁명세력의 지도자가 김성주라는 젊은 청년인데 그이가 바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였던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이시라는것을 알게 되였던것이다.

그로부터 6년후 1936년 9월 최일천이 서울 종암리 리극로의 집에 불쑥 찾아왔다.

최일천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작성하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놓으면서 동북의 모든 독립운동자들은 너나할것없이 조국광복회를 지지하고있다고 하였다. 고립무원한 지경에서 의탁할수 있는 희망의 기둥을 찾은 리극로는 너무도 기뻐 그의 손을 덥석 잡고 쌍수를 들어 조국광복회취지를 환영한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 곧 조선어학회의 헌장으로 되였다.

1940년경부터 서울을 자주 드나들던 최일천이 어느날 리극로에게 《농우》잡지묶음과 인찰지에 먹글을 깨알같이 쓴 문서묶음을 맡기였다. 그 자료는 조선민족의 재보로 후세에 남겨야 할것인데 동북의 정세로 보아 위험하기때문에 서울에 가져왔다고 하였다. 그것이 후날 온 세상이 알게 된 최일천이 피로써 쓴 《조선해외독립운동소사》였다.

경제난에 허덕이던 조선어학회가 그후 일제의 정치적탄압으로 만신창이 되였다. 어학회성원 대부분이 체포되였다. 리극로도 사상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여 함흥지방법원에서 8년형을 받고 3년 복역중에 해방이 되여 들것에 실려 감옥문을 나서게 되였다. 그는 감옥안에서 손톱, 발톱을 다 뽑히였다. 그의 육고가 얼마나 심했던지 감옥에서 나온 후 석달동안은 몸에서 썩은 송장내가 났다고 한다. 그가 병석에 누워 앓고있던 1945년 9월 어느날 최일천이 그전날에 맡겼던 《조선해외동립운동소사》의 자료를 찾으러 왔다.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리극로와 그의 가족들은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운동의 일단을 피력한 그 원고를 목숨처럼 귀중히 간수해두었다가 최일천에게 내놓았다.

《리선생,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은 손톱, 발톱을 다 뽑히우면서도 이것만은 끝내 지켜냈군요.》 하고 최일천은 인찰지에 먹즙으로 또박또박 쓴 원고묶음을 붙안고 흐느껴울었다.

리극로는 감옥에서 상처입은 병약한 몸으로도 해방전에 서울에 조직했던 조선어학회와 기타 민속회들의 후신이라고 할수 있는 건민회를 무어 운영하였다. 그러나 일제시기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이상으로 남조선에서는 정치적탄압과 경제난에 허덕거려야 했다. 정치적탄압과 경제난, 이 두 악마의 그림자는 수십년세월 리극로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런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버티여나갈수 있은것은 북쪽에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신다는 그 하나의 신념의 기둥이 그의 심장속에, 넋과 골수에 굳게 자리잡고있었기때문이였다.

마침내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애오라지 백두산의 얼을 가슴에 안고 역경을 디디며 살아온 그에게 친히 존함인장이 찍힌 서한장을 보내여 남북련석회의장으로 불러주시였다. 하여 그는 지금 특별렬차에 몸을 싣고 황해제철소를 참관하러 가고있는것이였다.

1930년 그 가을부터 근 20년세월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르며 따른 김일성장군님! 이제 그이를 만나뵙는 영광과 행복의 자리에서 지나온 모든것에 대한 만단사연을 아뢰일 날은 머지않았다.

《선생님,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옆에서 울리는 상냥한 목소리에 리극로는 추억에서 깨여났다. 이번에 남조선수행기자 일행에 묻어온 《동아일보》사 경제담당기자 박천수가 다가와앉았다. 그를 보는 순간 리극로는 반사적으로 속안에서 열물같은 쓰거운것이 올리치밀어 낯을 찌프리였다. 박천수는 일제시기 친일어용단체인 《계명구락부》성원으로서 리극로에게 많은 고통과 피해를 안겨준 사람이였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종로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잡고있던 《계명구락부》는 조선어학회를 감시하고 파괴해온 일제의 간첩기구의 일종이였다. 어제는 친일적인 사회단체와 언론계에서 매국행위를 하였고 오늘은 친미반동언론인으로 날치고있는 박천수가 남북련석회의의 수행기자로 묻어온것은 자못 위험스러운 일이였다.

리극로는 하얀 얼굴에 상냥한 녀인처럼 노상 새죽새죽 웃음을 띠며 다니는 박천수가 남북련석회의를 파괴할데 대한 임무를 받은 미군청의 밀사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이번에 전기간첩사건과 관련된 리문도에 대한 허위보도를 하는데서도 박천수가 제일 극성스러웠다.

공교롭다고 할지, 라선형적인 인생의 반복이라 할지 리극로는 해방전 어느해인가 박천수와 한렬차석에 앉아 황해제철소를 찾아간적이 있었다.

그때 리극로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준비로 경제부문의 기술용어와 생활어휘들을 수집하러 이 나라의 여위고 기형화된 산업지역을 편답하고있었고 기자이며 《계명구락부》성원인 박천수는 신문편집과 반일단체색출을 위한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공장지역을 찾아다니고있었다.

그때는 황해제철소를 《겸이포제철소》라고 하였다. 이름부터가 식민지의 설음을 통감하게 했었다.

물맑은 대동강기슭의 아름다운 포구였던 이 고장을 고구려시기에는 약두치기현 또는 지섬, 삭두라고 했고 고려초시기는 송림현, 리조시기는 장단현이라 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서부지역에 풍부히 매장된 철광석을 략탈하기 위하여 1917년 교통조건이 유리한 송림에 기형적인 제철소를 차려놓고 철을 원료반제품으로 뽑아갔다. 그러다가 일본의 한 재벌인 《림겸이》라는자가 여기서 선철, 강철을 뽑아 치부할 야심으로 제철소에 야금설비를 대대적으로 확장한 다음 이 고요한 조선의 포구를 겸이포라는 자기 이름으로 고치고 제철소의 이름도 《겸이포제철소》라고 하였던것이다. 해방이 되자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치욕스러운 그 이름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고려시기에 쓰던 이 고장 이름인 송림이라는 민족적이름을 되살려주시고 제철소에는 황해제철소라는 이름을 친히 달아주시였다.

《리선생,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늘 또다시 겸이포제철소로 아니, 황해제철소로 한의자에 앉아 가고있으니 말이예요.》

박천수가 사뭇 감회로운 표정을 지으며 얇은 입술에 상냥한 웃음을 지었다. 워낙 무뚝뚝한 성미인 리극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앉아있었다.

《해방전 겸이포제철소로동자들의 생활은 참혹했지요.》

박천수는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였다.

과연 그때 제철소로동자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던가.

그들은 시꺼먼 움막집에서 석탄덩이를 주어다 시래기죽을 쑤어먹으면서 두더지같은 생활을 하고있었다. 왜놈십장들은 마치 사나운 공골말을 길들이듯이 뜨거운 쇠물앞에서 헐떡거리는 로동자들을 사정없이 채찍으로 후려치며 마구 쳐몰았다.

리극로와 박천수는 그때 《최군마》라고 하는 젊은 용해공을 취재하였다. 얼굴도 이름도 잊혀지지 않았다. 키가 크고 두볼에 화상자리 같은 검버섯이 한벌 돋아있는 20대의 젊은이였다.

리극로와 박천수의 취재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물어보는 내용은 비슷하였다. 그에게 언제부터 제철소에서 일하는가고 물으니 자기는 원래 경기도 수원에서 농사를 짓다가 《겸이포제철소》에 가면 벌이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1925년에 왔는데 정작 일을 해보니 여기가 무서운 범굴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일터를 찾아가보니 참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만약 어느 화가가 천당과 지옥의 경계선에 놓인 련옥의 불가마에서 당근질을 당하는 저승의 인간들에 대한 상상화를 형상할 필요가 있다면 이 제철소 로동자들의 작업모습을 그리면 될것 같았다.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앞에서 땀을 흘리며 삽질을 하는 용해공들, 승마복에 채찍을 들고 서있는 왜놈감독… 이렇게 뼈가 녹아나도록 고역에 시달려도 함바의 밥값도 제대로 치를수 없는 로임을 타서 빚더미에 올라앉고 병들어 죽어갔다. 얼굴을 보니 최군마도 이미 병이 들어 맥을 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겸이포제철소》의 왜놈경영주들은 자기들의 전용식당에서 로동자들이 구경도 못하는 《기린》맥주와 《정종》술과 고기며 값진 해산물들을 배불리 먹고있었다.

리극로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겸이포》에 잠간 들려보았는데 그때는 《징용》과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조선 각지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았었다. 왜놈들은 마소와 같이 천대를 받으며 고역을 치르는 조선로동자들이 도망을 치지 못하게 사방에 군대를 풀어놓고있었다.

《리선생님, 최군마가 생각나십니까? 우리는 그 젊은이를 같이 취재했지요. 내가 1943년에 신문원고때문에 평양쪽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겸이포제철소에 들려 옛친구들(취재한 로동자들)을 찾아보았는데 대부분이 다 죽거나 병신짝이 되여 나갔더군요. 최군마도 페농양에 걸려 해고되고요.》

리극로가 갔을 때에도 최군마는 볼수 없었다. 아마 죽었을것이다. 그때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체 조선말신문들이 페간당하고 친일어용신문인 《매일신보》가 조만식, 리성수와 같은 일제에게 전향한 어제날의 《애국인사》들의 글을 연거퍼 발표할 때였다. 《동아일보》사에 있던 박천수는 《매일신보》에 옮겨가 변절자, 전향자들의 《훈시들》을 편집하느라 발이 닳게 뛰여다녔다. 바로 그무렵 리극로는 조선어학회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 체포되였다.

《지금은 제철소가 어떤지?》

박천수는 리극로의 기색을 살피며 중얼거리였다. 황해제철소는 리극로에게도 의문의 대상이였다.

리극로는 평양에 며칠 있는 동안 활성화된 북조선의 산업경제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방송으로 들은것은 280여종의 상품가격이 대폭 인하되고 교원들과 지하로동자, 고열로동자들의 로임이 인상된다는것이였다. 일부 우익정객들은 그것이 남측대표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선전이라고 빈정거리였다. 그러나 실지 아무리 돌아보아도 거지와 방랑고아들을 볼수 없었다.

더우기 속일수 없는것은 인민들의 얼굴빛이였다. 영양상태가 벌써 남조선인민들과는 확연히 구별되였다.

하지만 리극로는 황해제철소만은 사정이 좀 다를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해방전 그 공장은 순전히 왜놈기술자들이 운영해나갔었다. 그때문에 왜놈들은 제철소설비들을 파괴해버리고 가면서 조선사람들은 몇십년 걸려도 제철소에서 철을 뽑아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리극로의 생각에도 왜놈들이 용광로의 쇠물을 뽑지 않은채 불을 끄고 달아났다니 로를 복구한다는것은 불가능할것 같았다. 그런데 북조선의 행사조직자들이 어찌하여 첫 참관대상지를 황해제철소로 정하는것일가? 남측대표들속에서 먼저 제철소참관을 요구했다는 말도 있었다. 혹시 박천수와 같은 극우분자들이 북조선산업의 약한 고리를 남조선대표들앞에 드러내보이기 위한 고약스러운 심보로 그런 요구를 제기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제철소가 어떤지? 내가 허정숙서기장한테 찾아가 물어보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제 눈으로 보면 스스로 알게 될것이라며 대답을 피하더군요.》

박천수는 또다시 리극로의 기색을 할깃 살피였다.

(제철소참관을 요구한 놈이 필시 이놈 같군!)

리극로는 치미는 분격을 누르고있었다.

특별렬차는 드디여 송림역에 도착하였다.

리극로는 차에서 내려 역전길에 나서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박천수는 눈이 동그랗게 되여 두리번거리였다. 일제시기에 본 송림과는 너무도 달라졌기때문이였다. 탄가루에 덞은 넝마옷을 걸치고 다니던 로동자들과 움막집들은 하나도 볼수 없고 활기띤 사람들과 비록 요란스럽지는 못해도 깨끗하고 아담한 주택들과 학교, 병원, 로동자구락부 같은 공공건물들이 주변에 가득 들어차있었다.

리극로는 제철소생산현장을 돌아보면서는 더욱 경이감을 금치 못하였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해탄과와 내화벽돌을 굽는 요업과를 거쳐 쇠물이 펄펄 끓는 제선과(그때에는 용광로직장을 이렇게 불렀다.)에 들어갔을 때였다. 쇠장대를 든 름름하고 건장한 젊은 로공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선생님! 선생님!… 오셨군요. 전 꼭… 오시리라고 믿었습니다.》

리극로는 어리둥절해졌다. 전혀 알지 못할 젊은이가 반가와 어쩔줄 몰라하기때문이였다.

《선생님들, 절 모르겠습니까. 최군마입니다. 왜정때 선생님들이 절 취재했지요. 그리구 떠나실 때 돈 2원을 주고요…》

《아니, 자네가 최군마야? 이런… 살아있었구만, 살아있었어…》

박천수가 소리치는 바람에 웬일인가싶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리극로는 창을 쥔 장수처럼 용광로앞에 쇠장대를 짚고 서있는 최군마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수수대처럼 가늘던 몸에 살이 붙어 체구가 름름한데 눈밑과 두볼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검버섯이 말끔히 가셔지고 둥실한 얼굴에 불깃한 혈조가 피여있었다.

그는 제3호용광로 로장이였다.

《저는 이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죽었을걸 우연히 귀인을 만나 살아났습니다.》

그가 페농양에 걸려 동무네 움막집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있을 때 조선인의사 한분이 볼일이 있어 《겸이포》에 왔다가 의지가지없는 조선로동자 하나가 병에 걸려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있는 자기 병원으로 데리고갔다는것이다.

《저는 석달동안 돈 한푼 내지 않고 치룔 받았습니다. 그때 선생은 징용보국대에 걸려든 많은 조선젊은이들을 중병자라는 진단서를 내서 뒤로 빼돌렸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봤는데 어떤 땐 장 한사발을 먹이고 징집자들에게 자, 이 사람의 눈을 보시오, 열병에 걸려 장열이 됐는데 어떻게 데려가겠다는거요, 가다가 죽습니다 하고 막아나섰습니다.》

최군마는 병이 완쾌되자 다시 제철소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제철소는 이미 군수공장으로 전환되여 《징용》, 《징병》에 걸려들 우려는 없었다.

《저는 그분의 은혜를 잊을수 없습니다. 참, 그분은 련석회의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선생님의 성함은 리병남입니다. 그때 벌써 의학박사로서 서울에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리병남선생?!》

리극로와 박천수는 거의 동시에 소리쳐 반문하였다.

리병남은 리극로가 잘 알고있는 애국적인 의학자였다. 그는 해방후에도 남조선혁명가들에게 물질정신적후원을 많이 하였다. 해방전에 리현상이 체포되였을 때에도 리병남이가 병보석을 받도록 진단을 내려 빼돌렸다는 말도 있었다. 그의 맏아들은 지금 미제를 반대하여 지하투쟁을 하고있었다.

리극로는 최군마에게 리병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사이가 없었다. 대표들이 로장에게 용광로를 복구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기때문이였다.

하여 최군마는 리극로와 사담을 못하고 대표들에게 3호용광로를 복구하던 이야기를 하게 되였다.

《사실 힘들게 복구했습니다.》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쇠물과 함께 엉켜붙은 슬라크를 뜯어내는 작업이였다. 꽉 엉켜붙은 쇠더께를 까내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으나 로동자들은 《쇠를 뽑아야 건국을 한다!》라는 구호를 부르며 메질과 녹임질을 하여 기어이 해내고야말았다.

그다음은 내화벽돌을 만들어 로를 다시 쌓는것이였다.

《원래 왜놈들은 제 나라에서 만든 내화벽돌을 배에 실어다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체로 내화벽돌을 만들어냈습니다. 왜놈들은 조선사람들에게는 로축조기술도 배워주지 않았습니다. 일본기술자들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로축조작업도 우리 힘으로 해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2월 3일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첫 출선식을 했습니다.》

최군마의 이야기는 리극로에게 아니, 모든 남측대표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 마침 출선작업이 시작되였다.

붉은 쇠물이 출선구에서 홈곬을 따라 콸콸 흘러내리는 장쾌한 광경을 보고 대표들은 너무 기뻐 환성을 올리였다. 어떤 사람들은 두팔을 높이 쳐들며 만세 삼창을 부르기도 하였다.

리극로는 최군마의 손을 덥석 잡아쥐였다.

《장하오, 장해!… 최군마!》

《선생님은 경제학자라고 했지요. 그러니 더욱 기뻐하시는군요.》

최군마는 지금 여기서는 일본시대에는 만들지 못하던 철도레루가 생산되고있고 교량건설에 쓰는 강재와 강판, 선철, 강철외에도 류안, 나프탈린 같은 화학제품들까지 생산하고있다고 자랑하였다. 《동양에서 몇손가락에 꼽힌다는 제철소의 42개 직장이 단 한사람의 외국인감독이나 고문의 방조없이 우리의 손으로 움직이고있어요. 선생님들도 보신것처럼 일제시기엔 여기서 감독놈들이 채찍을 들고 우리 로동자들을 마소처럼 부려먹었지만 지금은 우리자신이 주인이 됐습니다.》

최군마는 쇠장대를 기발대처럼 쥐고 서서 쇠물빛에 황홀하게 물들어있는 작업장을 긍지롭게 둘러보았다.

《민주한독당》의 한 대표가 감동되여 소리높이 웅변을 하였다.

《우리는 오늘 참으로 위대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이 현실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것은 말이요, 우리 민족은 완전히 자주독립할수 있는 민족이라는것, 우리가 독립하는 길은 오직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이 길, 북조선이 가는 길뿐이라는것을 말해주고있지요.》

그는 최군마옆에 서있는 박천수를 아니꼽게 흘겨보면서 《여보, 박선생! 앞으로 서울에 돌아가서 거짓말을 쓰지 마시오! 이 사실을 쓰란 말이요. 당신이 북조선의 붉은 칼에 잘못됐다는 리문도씨는 지금 우리를 인솔하고 여기로 오지 않았는가.》 하고 격해서 웨쳤다. 그럼에도 박천수는 새죽새죽 웃으면서 《나는 거짓말을 안했어요. 우에서 내려보낸 자료를 믿고 신문에 냈을뿐이예요.》 하고 눈시울을 치켜올리였다.

대표자일행은 오후 2시경 배가 출출할 때 제철소 구내식당으로 안내되였다.

왜놈들이 《기린》맥주와 《정종》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던 구내식당에서 지금은 일반로동자들이 나라에서 공급해주는 영양제고급식사를 하고있었다.

대표들의 식탁에도 푸짐한 식사와 맥주, 소주가 올랐다.

무대우에서는 제철소 취주악대가 대표들을 위해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였다.

리극로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박천수는 웬일인지 밥은 먹지 않고 소주만 연거퍼 들이켰다. 그는 분명 무슨 임무를 받은 미군정의 밀사같았다.

대표들은 점심을 먹고 로동자들의 주택을 돌아보았다. 그전날 움막집에서 살던 로동자들이 지금은 아담한 주택에서 웬간한 살림살이는 다 갖추어놓고 삼시 때거리걱정없이 살고있었다.

이해에 들어와서도 고열로동을 하는 로동자들의 로임이 두번씩이나 인상되고 반대로 물가는 인하되였다.

이들은 시장가격에는 대비도 될수 없이 눅은 가격으로 식량을 공급받고있고 로동자, 사무원들은 무상치료의 혜택을 받고있으며 아무리 아이들이 많아도 학교 보낼 근심을 모른다고 하였다.

(무엇이 이렇게 2년반사이에 북조선과 남조선을 하늘과 땅의 차이로 만들었는가? 어떤 경제법칙이 작용했는가?)

자기가 알고있는 기존경제학으로는 풀수 없는 그 무엇이 여기에 있는것 같았다.

대표들은 오후 4시경에 송림역을 떠났다.

정거장근처의 로동자가족들인 늙은이들과 녀인들, 귀여운 어린이들이 창문을 열고 떠나가는 렬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집마당과 길가에 서서 《조국통일》, 《자주독립》이라는 표어판을 높이 들어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머리가 하얀 백발의 늙은 녀인 하나는 길가에서 두팔을 벌리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었다.

평양으로 뻗은 백리 철도연선마다에서 어른들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학생들은 모자를 벗어흔들고 논밭을 갈던 농민들은 수건을 풀어 흔들어주었다.

(아, 아, 좋은 세상이구나. 평화로운 대지로구나!)

리극로는 차창을 내다보며 목메인 탄성을 올리였다.

며칠후 4월남북련석회의가 열리였다.

많은 이야기를 남긴 남북련석회의!

4월 23일 련석회의 마지막날에 장군님께서는 전체 대표들의 일치한 지지찬동밑에 채택된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이란 제목의 격문을 리극로에게 랑독하도록 하시였다.

하여 리극로는 북남조선 56개 정당, 사회단체대표 695명이 모여앉은 대회장에서 수십년세월 가슴속에 응축되였던 애국의 격정을 터치였다.

 

전조선동포에게 격함

 

상호부동한 정견을 가진 여러 정당들과 제 단체대표들이 어찌하여 호상 분쟁을 중지하고 우리 조국의 유서깊은 고도 평양에서 일당에 회합하게 되였는가? 산명수려한 금수강산 삼천리 우리 조국의 운명을 념념불이하는 우국의 충정을 참지 못하여 우리는 남북에서 여기에 모였노라.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3천만 우리 민족의 의사를 대표하여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 모였노라.

다시 고하노니 우리 조국과 민족을 또다시 암흑과 참화속으로 몰아넣으려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마수가 머리우에 박두하였음을 누구나 통감하였기때문에 우리는 분연 이 자리에 달려왔노라.

리극로의 목소리는 의분에 떨리고 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었다.

만장의 가슴을 치는 이 격문의 서문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필하신것이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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