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2

부소산에 소나무 설레이다

2

 

패강의 영안포는 이 지방 사람들이 바다로 드나들던 옛 포구로서 그 문이 열린것은 단군천제시기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땅에 고고학적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욱 뚜렷하게 전해지는것은 고구려시기부터이다.

영안포의 서쪽으로는 패수의 거친 물결이 남으로 흐르며 남쪽은 서해물이 출렁거리는 해안이다. 그러나 밀물때에는 바다물이 사방을 에워싸 고독한 섬마을인듯싶은감을 주며 서쪽의 강물조차 바다로 되고마는 곳이다. 마을은 40메터높이의 나지막한 산우에 있는데 둘레에는 1 500메터정도의 옛성이 있다. 밀물때는 바다요, 썰물때는 강과 바다라 봄가을에는 조기배가 항구를 뒤덮고 칼치와 숭어, 뱀장어, 복어는 물론 사발보다 더 큰 조개와 게도 넘쳐나는 곳이다.

한편 성밖으로 보이는 동쪽지역은 원래 바다였는데 그 너머에 벌판이 있어 곡창지대로도 소문이 났었다. 그 동남쪽의 야산에 구릉골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구릉이란 곧 구씨의 릉이라는 의미이다.

릉이라면 예로부터 왕이나 그 못지 않은 인물들의 묘지를 가리키는 이름이니 세월이 하도 흘러 구릉이란것이 하나의 동산처럼 보이고 누구의것인지조차 모르게 된 이 구릉은 과연 누구의 릉이란 말인가?!…

그러나 흘러간 력사의 갈피를 하나하나 파헤치느라면 이 구릉이 부소고려의 대왕인 강충의 국구(임금의 가시아버지)였던 구룡산의것이라는것을 찾을수 있으니 여간 다행이 아닐수 없다. 다시말하여 부소고려 강충대왕의 부인인 구치의의 아버지묘로서 고려시기까지는 대단히 중시되여온 릉이였다.

 

영안촌주 구룡산은 키는 보통이였으나 붉은 얼굴에 검은 눈섭이 량옆으로 그어지고 우뚝한 코가 뚜렷하였으며 입술우에는 팔자수염이 멋지게 붙어있는 미남아, 쾌남아였다.

구룡산은 영안촌주라는 하급벼슬아치였지만 10여척의 배까지 가지고있는 고구려유민으로서 물고기잡이철에는 어선을 내여 물고기를 잡고 다른 시절에는 장사배를 타고 당나라는 물론이요, 남방의 수마뜨라도 거침없이 드나드는 선상이기도 하였다.

구룡산은 이 일대의 여러 군, 현백성들과 함께 호경을 부소고려의 대왕으로 천거한 후 재력과 지혜를 남김없이 바쳐온 사람으로서 고구려유민들이 일일천추로 소망하는 고구려재건의 날만을 바라고 살아왔다.

그는 부소지구에 일떠선 고려국을 목숨같이 귀중히 여기면서 그의 안전과 부강에 심신을 다하고있었다.

신라통치배들은 고구려남부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그곳 유민들의 반신라감정이 강한것으로 하여 일시적인 미소정책으로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고있었다. 그러므로 벌방이나 산골이나 할것없이 고구려유민들의 마음은 장악할수도 없었으며 얼핏하면 항거의 불길에 휘말려드는 판이여서 조심스럽게 군주나 촌주를 통하여 공물이나 받아들이는데 만족하고있었다.

구룡산은 영안촌주로서 어느해 가을 후기신라의 수도 왕경(경주)을 찾아가 공물을 직접 바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신라 31대임금인 성덕왕의 환심을 샀었다.

구룡산은 인삼상인이기도 하였던 관계로 촌주로서의 공물뿐아니라 개인명의로 인삼 50근을 왕에게 진상하였다.

성덕왕은 너무도 만족하여 구룡산을 대면하고 연회를 차렸는데 자기가 직접 참가하기까지 하였다.

어느덧 술이 몇순배 돌아가니 술기가 오르면서 성덕왕이 흉금을 터놓기 시작하였다.

《그대는 영안촌주로서 벼슬도 하찮은데 임금에게 올리는 충정은 높구나. 내 그것을 어떻게 갚아줄고?…》

《나라를 다스리는 주상께 충정을 다하는것은 백성의 도리가 아니겠나이까? 한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높이 알아주시니 한갖 백성으로서나마 그 성은에 보답할 도리를 찾을 길이 없나이다.》

《아… 아니다. 그대가 바친 인삼 50근으로 말하면 아무나 할수 없는 충의에서 나온것이노라. 내 그래서 신라 17품계중 열번째 등급인 대나마로 올려주겠노라.

허허허… 만족할테지. 자, 좋은 술이니 더 들거라.

고구려사람들은 넓은 대륙의 성질을 닮아 통이 크다더니 그대의 주량이 높은것도 아마 그와 관련이 있겠다?》

《아니, 제가 마신 술이야 임금님보다 적은것으로 알고있는데?…》

《아니다, 나는 한항아리를 마셨는데 너는 한동이는 더 마신것 같아 하는 소리노라. 허허허!》

실상 구룡산으로 말하면 술이라면 몇동이를 마신다는 대주가였으나 그것을 끊다싶이 하고 한푼의 돈이라도 부소고려의 강성에 바치고있는 사람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술에서뿐만아니라 자기의 계책에서도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앞서고있었다.

《실상은 그 인삼을 사온것은 저이지만 돈을 낸 사람은 부소군 강충태수로소이다. 그러니 저는 심부름이나 한것이고 실지 주상께 바친 사람은 강충태수인즉 제가 어떻게 임금님께서 하사하는 벼슬을 받겠나이까?》

순간 성덕왕은 심각한 빛을 띠였으나 그것은 저 멀리에 얹어둔듯 머리를 끄덕이며 혼자소리같이 웅얼거렸다.

《그대에게 벼슬을 올려준거야 임금이 줄수 있는것이니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며 멀리로 바라보던 눈빛을 드디여 구룡산에게로 돌리였다.

《강충에 대한 말을 내 듣긴 들었노라. 아마도 동명왕의 후대요, 그 피줄이라 하였으니 출중한 인물일것으로 아노라. 하지만 임금도 나라의 법에서 벗어나기 힘든 경우가 있느니라.

신라의 법에 벼슬의 1등급부터 6등급까지는 경위라 하여 왕경6부에 사는자만이 해당되노라. 네가 고구려출신이기는 하다만 내놓고 말한다면 고구려출신관료들에게는 실상 자기의 등급보다 몇등급 낮추기는 하여도 올리지는 못하게 되여있느니라. 그러므로 강충에게 8등급의 상사찬벼슬을 준것이니 이것은 줄수 있는것을 다 준것이노라. 그러나 내 이제 생각하건대 강충이 동명왕의 피줄이라는것을 수용하여 우대하는 나의 뜻을 담아 경위 6등급의 아간벼슬을 제수하겠노라. 그렇지 않아도 동명왕의 후대인 강충을 우대해야겠다고 생각하던중이였으니 그에게 나의 의도를 전해주고 신라왕정을 하찮게 여기는 고구려출신관료들에게도 널리 전하거라.》

강충에게 있어서 신라의 벼슬은 없어도 되는것이였지만 아직은 고려국의 이름이 신라에 정면도전을 하지 않은 때라 적지 않은 경우에 신라의 태수로서의 역할을 하여야 하였던것이다.

그때마다 구룡산은 자기의 고려국임금의 얼굴에 흠을 내는것 같아 가슴이 쓰리였고 이웃군 태수들도 죄를 짓는 심정이였던것이다. 그러므로 부소군 태수로서 강충의 신라작위를 높이는것은 이웃군 태수들로 하여금 조정의 공식석상에서까지 자기들의 고려국임금에 대한 례의를 지킬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것으로 되는것이였다.

성덕왕도 구룡산 못지 않게 술수가 높은 사람이였다. 그는 푸르른 대접에 출렁이는 술을 단숨에 쭈욱 들이키며 구룡산의 손을 잡았다.

《연나라임금 모용황이 342년에 고구려군을 따돌리고 뒤길로 해서 환도성을 습격한 일이 있었노라. 그때 모용씨는 고구려군사가 몰려오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황히 도망쳐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지체하였노라. 그 리유가 무엇이였겠느냐? 그것이 바로 인삼때문이였느니라. 그때 모용황은 동진의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때이라 고구려의 불로초를 얻어다 다문 한근이라도 바치려 했느니라. 그런데 어느 한 신하가 창고에서 인삼 10근을 찾았다고 하였느니라. 모용황은 한근도 못 얻을가보아 조바심에 빠졌던중 10근이라는 바람에 너무도 기뻐 그것을 자기의 수레에 직접 싣고는 급한 정황속에서 겨우 빠져나갔다는것이다.

그는 진나라 황제에게 인삼 10근을 고스란히 바쳐 제후로서의 신임은 얻었으나 인삼을 한뿌리도 제가 먹지 못한것을 두고두고 가슴아파하였느니라. 허허허…

우리 나라 인삼은 보물이다, 보물! 불로초란 말이다.

하기에 그대가 바친 50근에 충의의 높이가 있다는것이니라.》

강충의 벼슬을 신라의 법도를 넘어 아간에까지 이르게 한것은 성덕왕이 고구려 동명왕에 대한 존대로 그 후대에게 베푼 도량이라고는 하였지만 인삼의 힘이 더 많이 작용한것은 사실이였다.

신라 왕경에서 돌아온 구룡산은 강충대왕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왕이 군, 현의 태수들과 함께 정사를 의논하고있었으므로 구룡산은 태후궁으로 먼저 들어갔다.

구룡산이 마루에 엎드려 례의를 표하자 태후인 박산신은 오히려 송구한듯 황황히 일어나 그를 일으켜세웠다. 태후는 누구에게나 려염집할머니가 이웃아낙네를 맞이하듯 친절하게, 또 어떠한 격식도 없이 대하는것으로 하여 모든 신하들이 찾아오고싶어했으며 심중에 있는 말을 터놓군 했다.

룡산의 왕경방문소식을 천천히 귀담아듣고난 태후가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신라의 고위관리들앞에서는 부소지역의 군, 현태수들이 대왕에 대한 례의를 지키지 못하는것이 일각이나마 가슴쓰리다고 하셨는데 그때에조차 그들의 마음속에는 고려왕에 대한 경모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으니 무슨 걱정이겠소이까. 부소고려백성들속에 남아있는 그런 걱정을 없애기 위해서도 계림의 그늘속에 숨겨져있는 고려국을 하루빨리 천하에 내세워야 하며 그 당당함을 떨쳐야 하리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지나이다.》

잔잔하던 녀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여났다.

《촌주님, 따님소식은 왜 전하지 않사옵니까?》

태후가 관심하는 딸이란 구룡산의 외동딸 구치의를 가리킨것이였다.

아침해가 솟을 때 제일먼저 피여난 한송이의 해당화런듯 곱고 깨끗하고 대바르게 생긴 구치의, 하기에 영안포에 상륙한 한 외국사신이 구경군들속에 섞여있는 구치의를 보고 홍초속에 피여난 한떨기 백합이라며 걸음을 떼지 못했다는 말도 돌아가고있었다.

《태후마마의 승인없이 이번 바다려행길에 그 애도 따라세웠나이다.》

구룡산이 어줍게 웃으며 헛기침을 하자 태후의 눈에 놀라움이 어리였다.

《배를 태우다니요? 험한 날바다에 랑자를 내세웠단 말씀이오이까?》

굳어진듯 하던 녀인이 가볍게 머리를 들며 구룡산을 바라보았다.

《촌주님께서는 가슴이 넓으시오이다, 그런 결단까지 내리신것을 보면.…》

태후의 걱정어린 목소리에서 촌주는 이미 구치의가 자기 딸만이 아닌 래일의 왕후요, 태후의 며느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태후마마께서는 일찌기 그 시절에 녀인의 연약한 손에 창검을 드시고 화살을 날리시며 군마를 달려 적진으로 뛰여들군 하셨나이다. 오랑캐와의 결전장에서 승전의 공을 세우신 태후님슬하에 들여보내여 선왕의 혈통을 이을 대계가 앞에 있거늘 제 어찌 일점혈육이라는 생각만을 앞세워 방안의 화초로 만들수 있겠나이까.

제 생각에는 태후마마를 따라갈수는 없어도 강의한 기질을 조금이라도 심어주고싶어 풍랑속에 내세웠사오니 그리 알아주시옵소서.》

구룡산의 말에 리해가 가는듯 머리를 가벼이 끄덕이던 태후가 말하였다.

《바다는 사람의 의지를 키워주는 사생터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그것도 사나이들에게 해당한 말이겠건만 촌주님은 그 자리에 딸을 세우셨지요. 더구나 구치의에게 노군자리를 맡겨 줄곧 짠물을 뒤집어쓰며 노를 젓게 하였다니 강한 의지도 생기긴 하였겠지만 연약한 랑자가 얼마나 혼났겠소이까?》

박산신의 눈에는 사나운 파도를 헤가르며 힘겹게 노를 젓는 노군들의 모습이 방불히 안겨왔다. 산악같은 파도우에 솟구쳤던 배가 깊은 산골짜기같은 물곬으로 떨어질 때 정신을 잃은듯 눈을 감고 쓰러지는 구치의의 모습도 보이였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뜨니 파도의 밑바닥에 떨어진 랑자가 여전히 노대를 놓지 않고있으며 흩어진 머리칼을 추슬러올릴새도 없이 이를 악물고 노를 젓고있었다.

《아! 가엾은 랑자. 아니, 용타, 용해!》

그러나 구룡산은 박산신 자기가 전장에서 창검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가던 이야기를 앞세우고있지 않는가.

《옳다. 이 나라의 녀인들은 아직도 더 많은 험로를 헤쳐야 한다.》

이미 선왕이 생존해있을 때 태자 강충의 반려로 점찍어둔것이 영안촌주의 딸 구치의였다. 그가 랑자시절의 마지막언덕을 이룬 폭풍속의 바다를 배를 몰아 넘은것은 결코 무심히 볼수 없는 일이였다.

박산신도 혈전의 길을 창검으로 헤쳐 호경대왕을 다시 만났고 동명성제의 이름으로 빛나는 고구려의 대를 이어놓았었다.

며느리를 맞이하는것은 어느 가정에서나 필수적이고 생활적인것이였지만 박산신에게는 동명성제의 혈통을 고수하며 고구려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성업으로 떠오를뿐이였다.

구치의는 파도속을 헤쳐 3천리 바다길을 건너 해풍에 그슬리고 짠물에 절었으나 더욱 활짝 피여난 아름다움과 지혜를 안고 더 커진 심장을 울리며 강충대왕의 안해로, 왕후로 책봉되였다.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