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5 장

3

 

구들장운반전투가 있은 다음날 은하는 려단으로 돌아왔다.

려단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은하는 설계를 새로 시작했다.

한그람의 세멘트라도 더 절약하고 한시간이라도 공사를 앞당기기 위해 은하는 지금까지 애써 완성시킨 설계를 대담하게 뜯어고쳤다.

하나의 새 점을 치고 하나의 새 선을 긋기 위해 은하는 수십장 종이를 버려야 했다. 하루밤 자고나면 깨알같은 수자들과 계산으로 어지러워진 종이가 상우에 수북이 쌓이였다.

은하는 긴장된 사색에 언제 해가 지고 밤이 오는지 시간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온밤을 뜬눈으로 밝히는 때가 드문했지만 은하는 피곤을 몰랐다.

얼굴은 다소 축가기 시작했으나 그의 눈빛은 예지로 더욱 빛났다.

은하는 요즘처럼 탐구와 창조의 의욕을 강렬히 느껴본적 없었다.

막혔던 물목이 터진것처럼 새라새로운 여러가지 생각들이 꼬리물고 떠올라서는 나래펴며 훨훨 날기도 했고 막아선 절벽앞에 겁먹은 새처럼 돌진하지 못해 뱅뱅 맴돌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온종일 머리속에 맴돌던 오만가지 생각이 아무런 쓸모없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여러가지 단편적인 생각들이 하나의 의미와 뜻으로 련결되고 합쳐지면서 새로운 진리로 육박하기도 했다. 떠오른 참신한 그 생각들은 지체없이 종이에 옮겨졌다. 종이우에 새로 그려지는 그 점과 선들에서는 대담한 시도와 패기가 엿보였다.

떠오른 생각이 그 아무리 참신해도, 며칠밤 고생끝에 찾아낸 수치라 해도 더 좋은것이 있다면 은하는 그것을 주저없이 버리였고 다시 새로 일을 시작했다.

일이 잘 안되고 지칠 때마다 은하는 홰불행군을 생각했다.

캄캄한 밤에 가파로운 령길을 톺아오르고 사나운 고미탄천물결을 헤가르던 구들장운반전투그것은 단순히 집을 짓기 위한 작업만이 아니였다. 그것은 모든 생활을 정상적인 궤도우로 끌어올리고 긴장된 사업을 항구적이며 일상적인것으로 밀고나가기 위한 불굴의 투지와 노력의 시위였다.

대오의 앞장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어가던 광훈이, 대원들과 꼭같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두운 강물속에서 잃어버린 구들장을 찾았고 끝내 자기가 지고오던 구들장을 찾아들고 어린애처럼 기뻐하던 광훈이

그때를 생각할적마다 은하는 자기가 아직도 그 행군대오에 서있는듯싶었고 사나운 물결에 밀리우는 자기를 부축해주던 광훈이의 억센 손길이 아직도 자기를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떠밀어주는것 같았다.

은하가 일에 여념이 없을수록 그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관심은 커갔다.

돌격대려단군의소 준의는 은하에게 솔잎시롭과 오미자시롭 등 특별히 제조한 영양수를 공급했고 식당에서는 고사리며 도라지 등 맛좋은 산나물들로 은하의 구미를 돋구어주려고 애를 썼다.

은하가 바람을 쏘이러 잠시 방을 떴다 돌아오면 누군가가 감쪽같이 꽃병의 꽃을 갈아놓기도 했고 《돌격대식과자》(기름에 튀기여 사탕가루 뿌린 가마치를 돌격대원들은 이렇게 불렀다.)가 상우에 한가득 놓이기도 했다.

은하를 위해주고 도와나선것은 돌격대원들만이 아니였다.

대학교원들과 연구사들, 현장기사들도 매일처럼 찾아왔고 모여와선 밤도와 토론을 벌리였다.

계산기를 실은 자동차가 현장으로 찾아오고 과학잡지와 서적을 수없이 날라왔다.

오박사까지 당분간 체류하게 되자 새 철길건설지구엔 현지연구소분실이 새로 꾸려지는가싶기도 했다.

긴장된 탐구의 나날은 흘렀다.

은하는 드디여 완성된 새 도면을 려단참모부에 제출할수 있었다.

…조심조심 문을 두드리고 은하는 정우철려단장방에 들어섰다.

려단장방은 예나 다름없이 소박했다. 대체로 사무실들은 그 방주인의 책상과 손님을 위한 책상을 T형으로 놓는것이 상례였지만 정우철의 방은 그렇지 않았다.

려단장책상과 손님이 오면 마주앉는 책상을 일직선으로 놓아 어느것이 방주인 책상이고 어느것이 손님이 앉아야 할 응접상인지 구분할수 없었다. 아무것도 꾸린것이 없는 방이였지만 방안 구석구석에서는 안정감이 느껴졌고 자기네 려단장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수 있게 하는 소탈한 그 무엇이 있었다.

방안에는 정우철과 오박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오박사의 부드럽고 까만 머리는 기름을 안 발라도 늘 윤기가 돌았으며 오십이 훨씬 넘은 지금에도 그는 안경없이 책을 보았다. 무척 칼칼하게 생긴 그한테서는 과학자다운 엄격성과 정확성, 예리한 통찰력이 첫인상에 강하게 느껴진다.

《은하동무, 어서 들어오우. 그새 정말 수고많았소.》

정우철은 쓰기 불편한 한팔을 책상우에 올려놓고 한팔굽은 등받이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큰소리로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오박사는 말없이 가벼운 눈인사만 보내였다.

은하는 침착하고 웃음어린 오박사의 눈에서 정우철 못지 않은 치하와 고무를 읽을수 있었다.

《전 오늘 광훈동무네 대대로 내려가겠습니다.》

은하는 자기가 찾아온 리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광훈이라구?》

오박사는 이름이 귀에 익은지 머리를 기웃거리며 은하한테서 정우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원-홍원전기화공사장에서 선생님이 만나셨던 그 청년입니다. 욕심이 난다던…》

정우철이 기억을 일깨워주자 오박사는 생각이 난다는듯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였다.

《오- 그 동무! 전쟁시기 인연을 맺었다는…》

고원-홍원전기화공사장에 기술지도를 나갔을 때 오박사는 그곳에서 광훈을 만난적 있었고 정우철한테서 전쟁시기 사연을 이야기들었다.

오박사는 재능있고 열정적인 통신등교생인 광훈을 자기네 연구소로 끌어오려고 한때 욕심을 내기도 했었다.

《고미탄다리건설을 그 동무네가 맡았구만.…》

오박사는 새삼스레 머리를 끄덕이였다.

은하는 이 순간 기중기문제때문에 정우철을 찾아오던 때가 생각나면서 얼굴이 확 뜨거워올랐다. 두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정우철은 은하 자기보다 광훈과 인간적으로 더 가깝다고 할수 있었다. 그런데도 한때 자기는 정우철려단장이 아버지의 전우였다는것을 언덕삼아 광훈네 건설장에 기중기를 먼저 돌려달라고 억지를 쓰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자기 생각에 잠겨있던 오박사가 고개를 돌리더니 은하를 의미깊은 눈길로 바라봤다.

《선생님, 전 이제부터 당분간 고미탄지구에 내려가있겠습니다.》

은하는 그럴 필요를 설명하고싶었으나 그러지 않아도 되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오박사가 지지해나섰다.

《옳소, 잘 생각했소. 그러지 않아도 그 문제를 상론하던중이였소. 려단장동무는 은하동무를 려단참모부에 그냥 남겨두었으면 하지만 나는 반대요.

우리 과학자들은 현장에 들어가 청년돌격대원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그들의 일본새를 배워야 하오. 난 은하동무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이요.》

그의 눈에서는 늙은이답지 않은 정열과 패기가 넘쳐났다.

정우철은 볕에 그을린 얼굴에 옷음을 떠담고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그날 오후 은하는 완성된 설계와 자기의 짐보따리를 꿍져가지고 고미탄지구로 떠나갔다.

돌격대원들에게 공급할 간식과 부식물을 싣고 달리는 화물차는 몹시 들추었다. 들추는 자동차의 적재함우에 올라앉아 고미탄지구건설장으로 향하는 은하는 행복스러웠고 새로운 결의로 가슴이 끓어번졌다.

이제는 새 연구과제수행에서 신심이 생기였다.

다리건설에서의 속도제고이것은 결국 실정에 맞는 설계와 능률적인 일방법의 완성을 의미했다.

모든 연구론문과 모든 과학적탐구가 여기에 복종되여야 하고 그때에라야 그것이 진정 값있고 참된것으로 될것이였다.

자동차는 우거진 수림사이로 경쾌하게 달려갔다.

은하는 이전에 멀고 험하게만 느껴지던 고미탄다리건설장으로 가는 길이 별로 멀거나 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높아보이던 범산도 퍽 낮아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결의와 기대를 가지고 찾아갔으나 고미탄건설지구에서는 안테나식기중기를 세우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상서롭지 못한 소식이 은하를 기다리고있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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