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3 장

8

 

일은 참으로 공교로왔다.

밤이 깊어서야 평양역에 내린 광훈은 둘째누이가 어머니생일도 쇠고 친정에서 해산을 하려고 고향에 이미 내려가 누이네 집이 비였으리라는 생각에 역전려관에서 잠시 눈을 붙이였다.

광훈은 아침을 대충 치르고나서 옥주를 찾아떠났다.

옥주가 통신수업 왔다는 대학에 가서도 광훈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

옥주는 평양에 있는 친척네 집에 자리를 잡아 대학기숙사에 없었다.

함께 등교한 옥주네 학급동무들이 옥주가 가있는 집주소라면서 광훈에게 알려주는 주소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있는 둘째누이네 집이였다.

대학에 찾아갔다 허탕치고 새로 일떠서는 비파거리를 지나게 되고보니 광훈은 수도의 거리에서 유독 자기만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며 돌아다니는것 같아 죄스러웠다.

광훈은 북창화력발전소로 가기 전에 이미 하루밤 묵었던 누이네 집을 무슨 손님처럼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평양 둘째누이네 집에서는 전번에 광훈을 만났던 그 처녀가 광훈을 맞아주었다.

《어마나, 광숙언니랑은 그제 모두 고향으로 떠났어요.》

뜻밖에 다시 나타난 광훈을 보고 처녀는 이쁜 눈을 흡떴다.

《저… 여기 옥주동무라구…》

광훈은 처녀와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미안스럽게 물었다.

《네, 저 예요.》

처녀는 두눈을 더 크게 떴다.

《네? 그렇습니까? 전 동무를 찾아왔습니다.》

광훈도 옥주 못지 않게 놀랐다.

북창에까지 찾아갔다 못 만나고 돌아와 이렇게 누이네 집에서 옥주를 만나게 될줄이야…

잠시후 광훈은 누이네 집 안방에서 옥주와 마주앉았다.

《미리 인사를 나누었더라면 피차 서로 좋았을텐데… 전 옥주동무를 만나러 북창에 갔댔습니다.》

광훈은 먼저 이렇게 서두를 뗐다.

옥주는 광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줍게 웃기만 했다.

《대식동무라고 아시겠지요?》

《예?》

광훈의 물음에 옥주는 반사적으로 되묻더니 슬며시 외면했다.

무엇때문에 광훈이 자기를 찾아왔을가 하는 호기심에 지금까지 유지해오던 처녀다운 친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옥주는 단번에 얼굴빛이 달라졌다.

《전 대식동무와 함께 일합니다.》

옥주는 두눈을 내리깐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광훈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갈가 하는 궁리에 어색한 시간적공백을 메우려고 담배를 꺼내물었다.

광훈은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켰다가 내뿜으며 천천히 다음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대식동무와 옥주동무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대식동무가 옥주동무를 기쁘게 해주려고 남모르게 무척 애쓴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대식동무는 우리가 맡은 고미탄다리건설에 미끄럼식방법을 받아들일것을 발기했고 그의 노력은 이미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여러가지 재능을 가진 대식동무는 새 철길건설에 정말 훌륭히 이바지하고있습니다. 그 동무는 지금 우리 불사조청년돌격대 참모장 겸 중대장으로 사업하고있습니다.》

옥주는 다소곳이 머리를 수그린채 자기 옷고름만 매만지며 귀먹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두사람사이엔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후 옥주는 귀뿌리까지 빨개지며 고개를 들었다.

《저를 찾아 먼곳까지 다녀오셨다니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전… 전… 대식동무를…》

옥주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갑자르기만 하더니 다시 고개를 외로 틀었다. 아직 사랑을 체험해보지 못한 주제에 복잡하게 얽힌 남의 사랑에 끼여들자니 광훈은 이마에 진땀이 났다.

실례인줄 알지만 광훈은 어쩔수없어 무례하다할 정도로 따져물었다.

《무엇때문입니까? 대식동무는 좋은 사람입니다. 재간이 있고 열정이 있고 발전전망이 있고…》

한동안 옥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는 회피할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자 그한테는 돌연 대담성이 생겨났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깊이 사궐수록 그렇지 않았어요. 대식동문 너무나 들떠서 살아가요. 재간이 있는건 사실이나 그는 어느 하나도 해내지 못해요. 한때는 미장기계를 연구한다고 했고 나중엔 별의별걸 다 생각해냈어요. 어느 하나도 완성하진 못했고 생산에도 도입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한두번만 충고하지 않았어요. 대식동문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우리는 화력발전소건설을 같이 탄원했으나 그는 몸이 아프다는것을 구실로 그만두고말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가슴이 아프지만…》

옥주는 숨기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서 광훈은 옥주가 한때 대식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그리고 대식이 무엇때문에 미끄럼식의 위력을 한시빨리 나타내고싶어 그렇듯 애쓰는가 하는것을 지금에야 비로소 알수 있었다.

옥주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대식한테는 개인본위주의적인 립장에서 기분주의적으로 일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대식자신도 지난날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있기에 부끄럽던 자신의 지난날과 결별하려고 지금 그렇듯 아글타글 노력하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광훈은 자못 심중해졌다. 사람들의 운명과 결부되는 문제인것만큼 도움이 될만 한 진실을 말해준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옥주동무!》

광훈은 이렇게 불러놓고도 오랜 침묵끝에야 다음말을 이을수 있었다.

《저는 사랑에 대해 철부지입니다. 저는 옥주동무한테 한두가지만 꼭 이야기하고싶습니다. 옥주동무에게 무슨 충고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우리 시대 청춘들이 어떤 태도와 립장을 취하는게 옳겠는가를 같이 토론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우선 사랑에 대한 옥주동무의 태도와 립장에 찬성입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귀중합니다. 하지만 사랑자체에 절대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묻혀 결함을 보고도 눈감으며 이것이 마치 그 무슨 사랑의 표시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사랑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저는 옥주동무가 대식동무의 결함에 대하여 눈감지 않았으며 그와 타협하지 않은데 대해서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주어진 행복을 바랍니다. 작은 행복보다는 큰 행복이 차례지기를 바라며 또 자기 손으로 창조하려는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 찬성할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의 견해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행복을 자신들이 누리려고만 할것이 아니라 그 행복이 후대들에게도 차례지게 하며 그 행복을 더욱 큰것으로 만들어야 할것입니다. 아무리 산이 높아도 어머니등에 업히여 산에 오른 어린애는 그 산의 높이를 알지 못할것입니다. 제발로 한걸음한걸음 톺아오른 사람만이 산마루에서 그 산을 정복한 기쁨을 느낄수 있을것입니다.

저는 사랑에서도 리치는 같다고 봅니다. 사랑 역시 들끓는 벅찬 생활속에서 이루어진것이라야 참되고 값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주동무가 대식동무를 진정으로 사랑했었다면, 대식동무에게 품었던 그 감정이 참된것이였다면 난 옥주동무가 진실한 사랑의 빛과 열로 대식동무의 약점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대식동무에겐 아직 적지 않은 결함이 있습니다. 옥주동무가 외면해버리면 그것때문에 대식동무는 고민하면서 때로 그 고민에 지고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는 대식동무가 나라의 동서부를 새로 련결하는 벅찬 로동속에서 자신을 단련할것이며 그 과정에 참된 당원이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광훈은 여기서 이야기를 마치였다. 광훈은 사랑의 풋내기인 자신이 이렇게 사랑에 대해 론조를 세워 이야기한것을 다행으로 여기였다.

광훈의 말에 한가닥 공감을 느껴 자신을 자책해선지 아니면 극도로 자존심이 상하고 비위에 거슬려선지 옥주는 머리를 푹 숙이고앉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옥주는 한참만에야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말씀들이 모두 옳아요.》

옥주는 짧게 한마디 말을 하고 한참이나 동안을 두었다가 모두었던 숨을 내쉬며 크지 않게 담담한 목소리로 동을 이었다.

《그는 법적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의 아들이예요.》

옥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법적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단단한 참나무방망이처럼 광훈의 얼굴을 면바로 후려갈기였다.

광훈은 맨발로 풀숲을 걸어가다 뱀을 밟기라도 한것처럼 가슴이 섬찍했다. 옥주와 대식의 사랑에 이런 심각한 사회정치적문제가 깔려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광훈은 대식의 마음속에 가슴아픈 상처가 있고 고민이 있는줄 꿈에도 몰랐다.

광훈은 남의 속내를 알지도 못한채 서둘러 외나무다리를 건느려다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신세에 처하고말았으나 옥주는 강기슭의 반석우에 서있는 사람처럼 자기의 립장과 자세를 조금도 형클어뜨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조국과 인민앞에 지은 잘못을 아들이 씻겠다는 립장은 나쁘지 않고 동정과 지지를 받을만 해요. 저도 그 점을 소중히 여기였댔어요.

하지만 대식동무는 아버지의 잘못때문에 자기 몸에 상처가 생기고 때가 묻은것처럼 여기면서 그것을 가셔내려는 조급성에 너무 허둥거리고있어요. 그 조급성때문에 대식동무는 무슨 일이건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요. 수고많은분에게 미안해요. 하지만 처녀의 사랑은 외곬이랍니다.》

밤은 벌써 퍼그나 깊었다. 텅빈 집에 이미 눈을 내려깐 처녀와 단 둘이 이렇게 온밤 마주앉아있을수 없었다.

누이네 집인것만큼 옥주보다도 광훈을 집주인이라고 할수 있었으나 광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광훈은 옥주와 작별하고 누이네 집을 나섰다.

래일은 철길건설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앙사로청에 올라왔던 려단지휘부 승용차가 래일 떠나니 그 차만 얻어타면 래일중에 대대에 도착할수 있다. 점심때 미끄럼식쟈끼는 이미 부쳤다.

어느 려관이나 숙소를 찾아가도 이밤은 도무지 잠들지 못할것이다.

번민속에 뜬눈으로 이밤을 보내고싶지 않았다.

광훈은 래일 아침 새 철길건설장으로 떠나기 전까지 수도의 이 한밤을 값있게 보내고싶었다.

광훈은 만수대대기념비건설장으로 향하는 전차를 타려고 정류소로 향했다.

퇴근시간이여서 정류소엔 사람들이 많았다. 전차에 오르는 사람이 많은것만큼 내리는 손님도 많아서 광훈은 두번째 전차에 선참으로 오를수 있었다.

불빛 환한 전차안으로 들어서던 광훈은 앞문으로 내리는 한 녀인의 뒤모습에 시선이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쩡하게 울리였다.

진한 회색양복에 굽높은 하얀 구두를 신고 한손에 빨간 손가방을 든 처녀의 뒤모습은 너무도 눈에 익었다.

의젓한 머리모양새며 세련되고 틀잡힌 몸가짐… 광훈은 웬 로인을 부축해주며 지금 전차에서 내리는 처녀가 은하처럼 보였다.

광훈은 은하를 찾으려다말고 전차에 오르기 바쁘게 앞문쪽으로 걸어갔다.

전차에서 내린 은하는 로인을 바래주고나서 자기뒤에 내린 한 청년과 작별인사를 하느라 전차쪽으로 돌아섰다.

전차안에서 환히 내비치는 불빛에 그의 앞모습을 보는 순간 광훈은 다시한번 놀랐다.

두 눈섭사이에 수수알만 한 검은 김이 있는 그 처녀는 은하와 비슷치도 않았다.

광훈은 너무도 엉뚱하게 사람을 헛보았다고 생각하니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그 처녀가 전차밖에서 같이 퇴근하던 사람인듯싶은 청년과 주고받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오늘 밤에 가지요?》

《식사하고 곧 가겠소.》

《그럼 건설장에서 만나요.》

두눈섭사이에 수수알만 한 김이 있는 그 처녀는 청년에게 생긋 웃어보이고나서 경쾌하게 걸어간다.

광훈은 이들 두사람이 지금 만수대대기념비건설장으로 함께 나갈것을 약속한다는것을 깨달았을 때 웬일인지 마음이 이상야릇했다.

광훈은 상점들을 장식한 붉고 푸른 네온등빛과 높다란 가로등에서 쏟아져내리는 수은등빛속에 점점 멀어져가는 처녀의 모습을 전차창문너머로 한참이나 바라봤다.

광훈은 잡초우거진 고미탄천기슭에서 은하와 헤여지던 때가 새삼스레 눈앞에 떠올랐다.

《미안해요.》

이 한마디 말을 남긴채 그때 은하는 불러도 대답없이 건설장을 떠나갔다.

광훈은 려단에까지 가서 애써 교섭해준 기중기를 받지 않아 미안하다고 사과한 자기의 말에 은하가 그때 왜서 그렇게 창백한 낯빛을 지었는지 그리고 그 무슨 심한 모욕이라도 받은것처럼 건설장을 떠나간 이후 오늘까지 전혀 소식조차 없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 없었다. 서로 알고지내게 된지는 오래였으나 상대방에 대한 리해는 너무도 부족했다.

현실연구차로 건설장을 찾아왔을 때 사업과 생활을 잘 돌봐주지 못한것때문에 은하는 지금 무엇인가 짧게 생각하고 오해하고있음이 틀림없었다.

광훈은 자기앞에 빈자리가 놓여있었으나 전차안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광훈은 이곳 평양에 왔던 길에 은하를 한번 만나볼가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이제 전차에서 내려 곧바로 대학에 찾아가면 퇴근전에 그를 만날수도 있을것이다. 오늘 밤엔 못 만난다쳐도 래일 아침에 연구소로 가도 평양을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날수 있다.

광훈은 자기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찾아드는 유혹을 물리치듯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가 지금 생각하는것처럼 은하는 짧게 생각하지도 오해하지도 않을수 있었다. 설사 그 무슨 오해가 있어 건설장을 노엽게 떠났다 해도 오해는 언제나 진실앞에 밝혀지기마련이였다.

광훈은 불쑥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옥주는 아버지의 허물을 상처로 안고있는 대식을 외면했고 자기는 은하의 아버지때문에 그한테 마음끌리는것은 아닌가. 은하의 아버지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영웅이였다.

광훈이 지금 은하한테 일종 이성의 감정을 느끼는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아직 사랑이 아니였다. 나이먹어가는 총각으로 저도 모르게 품게되는 일종의 호기심이라고 할수 있을는지… 그 어떤 리해타산때문에 이루어지는 이성의 결합은 공고할수 없고 참된 사랑도 아니였다.

광훈은 은하에 대해 아직 너무도 몰랐다.

그의 지향과 마음속에 품고있는 고심조차…

광훈은 은하를 통해 새 철길건설에서 기술적으로 걸린 문제들에 대한 방조를 받고싶었고 존경하는 정우철려단장과 인연깊은 처녀여서 진심으로 대해왔을뿐이다.

사사로운 일로 이곳 수도를 찾아온것이 아닌것만큼 불같은 이 세월에 광훈은 자기 개인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싶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도 돌격대원들은 속도전을 벌리느라 차거운 물속에서 굳은 암반과 싸우고있을것이였다.

(오늘 밤 만수대대기념비건설장에서 일하고 래일은 나의 일터로 돌아가자.)

광훈은 결심을 다지듯 입속으로 저 혼자 뇌이였다.

열렸던 문이 절컥 하고 닫기더니 전차는 수도의 밤거리를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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