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 1 장

3

 

누가 지었는지 불꽃이란 혜춘의 별명은 불같은 그의 성미며 차림에 신통히 어울렸다.

불꽃은 일할 때마다 머리에 늘쌍 새빨간 머리수건을 쓰고 다녔는데 그는 대바르고 무척 열정적인 처녀였다.

그는 발음하기 까다로운 혜춘이란 이름대신 어디 가나 불꽃으로 불리웠고 그자신도 불꽃이란 자기의 별명을 이름처럼 생각하게 되였다.

불꽃은 은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업장에서 중대부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불꽃은 은하를 보자 기뻐 어쩔줄 모르며 깡충깡충 뛰였다.

《언니!》

불꽃은 새된 소리를 지르더니 쓰러질듯 달려와 은하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는 은하를 붙들고 빙빙 도는가 하면 두발을 구르며 깡충거렸고 은하의 가슴에 마구 얼굴을 비벼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의 머리에선 고추처럼 새빨간 머리수건이 나풀거렸다. 오랜 기간 집을 떠나있다 이곳 철길건설장에서 은하를 보니 불꽃은 친언니라도 만난듯 한 기분이였다.

너무 기뻐 눈물까지 글썽해지는 불꽃을 보자 은하도 가슴이 뭉클해왔다.

《잘있었니?》

은하는 불꽃의 두손을 어루만지며 다정스레 물었다.

마주쥔 손에서는 굳은 장알이 알리는게 남자들 못지 않게 묵직하면서도 꽛꽛한 촉감이 들었다.

《잘있지 않구요, 그런데 어떻게 왔어요?》

불꽃은 이슬머금은 머루알같은 두눈에 영채를 담고 은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오긴, 너 보고싶어왔지!》

《정말이예요?》

불꽃의 두눈엔 금시 웃음이 남실거리였다.

《정말아니구.》

《아이, 언니…》

불꽃은 은하의 손을 잡은채 다시 동동 발을 굴렀다.

《너의 어머닌 늘 네 걱정이시란다.》

《아이, 내가 뭐 어린애나?… 정말, 할머니랑 잘계시지요?》

할머니란 은하의 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불꽃한테는 할머니가 없었다. 불꽃은 할머니가 그리워 은하의 할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랐다.

《그럼, 우리 할머닌 아직 정정하셔.》

《아이, 할머니가 보고싶네, 아버지랑…》

은하와의 상봉은 그사이 잠시나마 잊어버렸던 집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아오게 했고 부모형제들에 대한 살뜰한 정을 사무치게 불러일으켰다.

서로 떨어져있은 그 기간의 집소식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하며 두사람은 마주쥔 손을 놓지 못했다.

《전보라도 치구 오지요, 마중나가게… 언니 혼자 오느라 정말 고생했겠네.》

한참 집안식구들 이야기를 하고나서 불꽃은 생각난듯 이렇게 말했다.

《고생은 무슨 고생… 너는 여기서 살며 일하는데…》

《이젠 습관되구 단련돼서 일없지만 처음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여기선 차타구 다니기가 걸어다니기보다 힘들어요. 토끼뜀뛰듯 하니까요. 길이 이만저만 험하지 않아요.》

은하는 자기를 생각해주는 혜춘이 그저 귀엽기만 했다.

《정말, 짐은 어디 뒀어요?》

《중대부에…》

《오늘 저녁엔 우리 천막에서 저하구 자요.》

《그러자꾸나.》

《자, 그럼 짐가지러 가자요.》

두사람은 서로 손을 쥔채 중대부로 향했다.

걸어가던 불꽃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언니,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불꽃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뭔데?》

《들어주겠대야 말할래요.》

《들어주지 않구.》

《정말이지요?》

《정말아니구.》

은하의 말에 불꽃은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죽여가며 나직이 말했다.

《언니, 내가 리발두 하고 미용두 했다는걸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건 왜?》

《리발하랄가봐 그러지요 뭐.》

《한다하는 고급미용사가 리발하랄가봐 겁나니?》

《리발이나 하려구 돌격대에 나왔나요 뭐?!》

불꽃은 얼굴표정이 시뚝해지였다.

《하긴 그래.》

은하는 불꽃의 말에 동의했다.

《절대 말하지 않지요?》

《그래, 말 안하마.》

《여기 와서 누구한테 아직 말 안했지요?》

《말할새가 있었니?》

《그럼 됐어요. 난 여기 와서 돌격대명단 직업란에 후방부 로동자라구 적어넣었어요. 뭘했느냐고 물으면 재봉했다구 그럴라구요. 여기서 재봉일을 하라고는 않을테니까요.…》

그러고나서 불꽃은 제 꾀가 스스로도 재미난다는듯 사르륵하고 재봉침 돌아가는 소리와 시늉을 하며 깔깔 웃었다.

은하는 불꽃의 마음이 충분히 리해되고 남았다.

불같은 불꽃의 성미에 청년돌격대 작업장에서 미용이나 리발을 하는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리발과 미용이 사회와 집단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일이고 사람들의 용모를 아름답게 해주며 생활을 문화적으로 꾸릴수 있게 해준다는데 영예가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펄펄 뛰는 한창나이에 좀더 보람찬 일을 하려는 불꽃의 지향을 그르다고 할수 없었다.

은하는 불꽃과 함께 중대부에 들려 짐을 가지고 녀성숙소로 갔다.

처녀들의 천막은 알뜰히 꾸려져있었다. 천막정면에는 붉은 종이비로도판에 금판으로 장식해서 어버이수령님의 초상화를 정중히 모시였고 그밑에는 싱싱한 애솔이 나무화분에 소담히 심어져있었다.

한쪽벽에는 꼭같은 돌격대정복과 모자가 절도있는 생활과 집단의 면모를 말해주듯 규모있게 주런이 걸리고 모포와 베개, 배낭들은 군대병실식으로 정돈되여있었다.

그런가 하면 전등에는 산열매로 구슬같은 장식까지 해단 마분지등갓이 씌워져있었다.

큰 거울이 걸린 한쪽벽우로는 책꽃이식으로 만든 선반이 매여져있었다. 선반우에는 책들과 함께 모양도 각이하고 빛갈도 각이한 바느실곽들과 화장품통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천막안에는 일을 끝내고 들어온 처녀들이 여러명 있었다.

《우리 언니가 왔어.》

불꽃은 천막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큰소리로 은하를 소개했다.

책도 보고 옷도 손질하며 천막안에 앉아있던 처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제각기 자기식으로 은하에게 인사를 했다.

《수고들 많았겠어요.》

은하는 처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빙 둘러앉았을 때 은하는 옆에 앉은 처녀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퍽 순박해보이고 선량한 큰 눈을 가진 그 처녀는 대답에 앞서 어줍게 웃었다.

《평북 룡천서 왔어요.》

그 처녀는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이 동문 림수덕이라고 하는데 나보다 한살우예요. 돌격대에 나와 <말문제>가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한 동무예요. 너무 말을 안해 우리는 처음에 벙어린줄 알았어요.》

불꽃이 이렇게 덧붙여 소개를 하자 처녀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한시도 웃음없이 살수 없는 한창나이때다.

은하가 웃음머금은 눈길을 맞은편에 앉은 처녀에게 견주었을 때 체격좋은 그 처녀는 은하가 자기한테도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고 생각했는지 수덕의 대답과 불꽃의 보충설명을 본따서 쭈르르 말했다.

《전 개천탄광에서 일하다 왔어요. 이름은 태선이라구 해요. 불꽃과 동갑이예요. 난 돌격대에 오기 전에 <말문제>를 해결하고 왔어요.》

태선의 말에 처녀들은 또 웃었다. 이번에도 불꽃이 보충설명을 했다.

《이 동문 아버지, 어머니가 못다한 일을 하려고 왔대요. 부모들이 새 철길건설지구에서 싸우시다 전사했대요.》

부끄러움을 전혀 탈것같지 않은 태선이 얼굴을 붉히며 불꽃한테 눈을 흘기였다.

은하는 웃으며 자기가 가져온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속에서 먹음직한 닭알빵이 쏟아져나왔다.

은하는 과일구럭과 함께 다른 종이꾸레미를 또 꺼냈는데 그속에서는 과자와 기름사탕이 나왔다.

《어마나, 많이두 가져왔네. 이 무거운걸 가지고 오느라구 정말 혼났겠네!》

불꽃은 꾸레미를 펼치더니 기름사탕은 절반쯤 도로 쌌다.

《이건 남겨두고 나머진 다 먹자.》

《난 그거 누구 줄려는지 알지 뭐.》

태선이가 이죽거린다.

《복동이가 기름사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오활동무가 더 좋아해.》

《오활이한테 기름사탕을 다 줘?》

《그래두 오활동문 너만 보면 좋다구…》

《요건.》

불꽃은 태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줴박았다.

불꽃이 정말로 성을 냈기때문에 태선은 롱담을 더 하지 않았다.

《정말 건달군같은거. 한번만 더 못되게 굴면 단단히 혼내줘야겠어.》

찧고까불며 다른 처녀들이 언거번거 야단일 때 수덕은 말없이 사과를 깎아들고 은하에게 내밀었다.

《그래두 우리 수덕이가 제일이구나.》

그러며 불꽃은 깎은 사과를 은하가 기어이 먼저 받도록 했다.

은하는 돌격대원처녀들이 동생처럼 생각되면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집에 있으면 아직 응석도 부려야 할 나이들이건만 개발지에서 장부들 못지 않게 어렵고 힘든 일을 얼마나 억척스럽게 해내고있는가.

《정말 수고들 많이 해요.》

은하는 불꽃과 태선, 수덕을 어떻게 치하해주고 고무해주어야 좋을지 알수 없었다.

《수고랄게 없어요. 건설장에 처음 왔을 땐 좀 힘들었는데 이젠 단련도 되고 습관도 되고나니 목도도 할수 있고 함마질도 할수 있고… 철길 놓는 일이란게 그저 그래요.》

태선은 인생의 쓰고단맛을 다 맛보았고 이제는 무슨 일이든 다할수 있다는듯이 제법 장부연했다.

태선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불꽃이 말꼬리를 잡아채듯 당겨 동을 이었다.

《처음 왔을 땐 정말 혼났어요. 우리는 처음에 림시로 로반건설을 맡았었는데 어디 잘데가 있어요? 천막이 미처 도착하지 않아 천막칠 자리를 대충 만들어놓고 솔가지를 덮었댔는데… 한밤중에 글쎄 비가 내리는게 아니예요. 옷이 홀딱 젖었는데 말리울데가 있나…》

《난 식량운반할때 제일 혼났어.…》

태선은 태선대로 자기의 체험이 있었다.

돌격대원들은 철길건설장에 처음 와서 식량운반때문에 적지 않게 고생을 했다.

자동차, 달구지길도 없어 돌격대원들은 식량을 몇십리밖에 가서 등짐으로 져다 먹어야 했다.

거리가 멀어 한사람이 한달분의 식량밖에 운반하지 못했다. 전체 인원이 모두 식량운반에 동원될수 없어 한개 중대씩 교대로 하였다. 쌀만 운반해서는 살수가 없었다. 간장, 된장, 소금… 남새에 이르기까지 날라야 할 부식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몇십명의 사람이 사흘에 한번씩 후방물자운반에 동원되여야 돌격대생활을 유지할수 있었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형님, 언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살아오던 처녀돌격대원들은 먹고 사는데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가를 너나없이 모두가 생생하게 체험할수 있었다. 왕복 100리가 넘는 험한 산길에 무겁게 짐을 지고 강행군하고나면 다음날엔 하루 쉬고싶은 생각뿐이였으나 이를 사려물고 일하러 나가던 돌격대원들이였다.

돌격대생활을 시작하던 때 누구에게나 시련이 컸던것만큼 그를 이겨낸 긍지와 기쁨 또한 컸다. 상봉의 해후와 지나간 나날들에 대한 추억으로 돌격대처녀들의 숙소는 무슨 명절이라도 맞은것처럼 흥성거리였다.

그날 밤이였다.

자정이 다되도록 은하는 잠들지 못하였다.

은하옆에 누운 불꽃은 불을 끄기 바쁘게 굳잠이 들었고 누군가는 코까지 골았다.

많은 사람들이 누운 천막안은 사람들 운김에 화끈 달아올랐다.

조용한 자기 방에서 혼자 자는데 습관된탓이기도 했지만 은하가 잠못 드는것은 그래서만 아니였다.

지금 자기가 맡고있는 연구과제에 대한 불안과 위구, 그로부터 생기는 조바심, 이미 잊어버렸던 미끄럼식다리건설에 관한 소론문과 그에 대한 예상치 않았던 반영, 광훈이며 불꽃과의 상봉…

은하가 이곳에 와서 하루동안에 받은 느낌과 인상은 컸다.

그중에서도 뜻하지 않던 광훈이와의 상봉이 은하의 마음에 안겨주는 충격은 강렬했다.

…은하가 광훈을 처음 알게 된것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였으니까 어느덧 십여년전 일이였다.

그때 은하네 학급에서는 지하리-평산철길건설장에서 위훈을 떨치는 건설자들에게 위문편지를 보냈었다.

학급초급단체결정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취미와 재간에 따라 꽃보라도 썰어넣고 그림도 그려넣고 성의껏 편지를 썼건만 그때 은하네 학급에서 회답을 받은 사람은 얼마 없었다.

 

《은하동무!

아저씨라고 불러준 동무의 편지를 받게 되고보니 마음이 이상하오. 나는 이 세상에 태여나 동무한테서 처음 아저씨란 부름을 듣게 되였소. 동무는 이 세상에서 나를 아저씨라 불러준 첫사람이요.

자신을 어리게만 생각해왔고 그 생각에 습관되다싶이 했던 내가 1고중학생인 동무한테서까지 아저씨란 말을 듣게 되고보니 기쁘기도 하고 어리뻥뻥하기도 하오.

나도 얼마전까지 동무와 같은 학생이였소. 사실 나는 남들의 축하편지를 받을만큼 해놓은 일도 없으며 건설장에 온지도 얼마 안되오. 얼마전에야 나는 인생의 첫걸음을 내여디뎠다고 할수 있소.

은하동무, 나는 일생을 철길건설장에서 살기로 결심했소.

한때는 나한테도 꿈이 많았소. 그 수많은 꿈들은 모두 한가지 문제와 결부되여있었소. 그것은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여야 나의 젊은 시절을 가장 참되고 보람있게 보내겠는가, 천만사람이 부러워할수 있게 나의 생을 빛내겠는가 하는것이였소.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한 잡지에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시수송을 보장하기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철길수리대원의 투쟁기를 읽게 되였소. 그때부터 나는 조국의 새 동맥을 늘이는 건설장에서 한생을 살기로 결심하였소.

길이 없으면 사람들은 다니지 못할것이고 우리의 모든 생활은 페쇄되고말거요. 생산을 하자고 해도, 건설을 하자고 해도, 적들과 싸우러가자고 해도 길이 있어야 하오.

하기에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먼저 길을 닦았고 어렵고 힘든 첫길을 열어놓은 사람들을 개척자라고 부르며 존경하였소.

나는 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길이 철길이라고 생각하오.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커다란 공적의 하나인 철길은 길중에서도 곧고 빠른 길이요. 위대하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철길이 가지는 중요성을 가르쳐주시면서 나라의 동맥이며 인민경제의 선행관이라고 말씀하시였소.

나는 이런 철길을 열어놓는 개척자로 한생을 살고싶소.》

편지로 알게 된 광훈을 은하가 직접 만난것은 청진-라진철길건설장에서였다. 은하는 아버지의 뜻을 이으려고 고중을 졸업한 후 철도대학에 갔다.

은하의 아버지는 재간있고 성실한 철길기술자였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조선인민군 철도사령부관하 기술군관이였던 은하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동해연선철길을 끊어버리려고 발악하던 미태평양함대와의 싸움에서 자기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희생된 후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였다.

대학생이 된 은하는 건설장에 실습을 갔었고 광훈은 그때 지하리-평산철길건설을 끝내고 그곳에 와서 일하고있었다.

은하는 그때 광훈네가 제기한 기술혁신안을 기술적으로 도와주게 되였었다.

일을 시작한지 며칠만에 은하는 열이 오르면서 감기를 앓게 됐다.

광훈이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작업장에서 근 십리나 되는 은하네숙소까지 찾아왔다.

주변협동농장에 가서 철이른 올사과를 한상자나 사서 지고온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렀다.

은하는 그 올사과를 한알도 입에 대지 못했다. 어렸을 때 올사과를 잘못 먹고 혼이 난 후부터 은하는 웬일인지 겁이 나서 먹을수가 없었고 먹으면 속이 나빴다.

《우리 일을 도와주다 앓게 됐는데 병문안도 미처 못 오구 정말 안됐습니다.…》

은하가 올사과를 못 먹는다는것을 알고 광훈은 미안해 어쩔줄 몰라했다.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까지 붉히는 광훈을 보았을 때 은하는 자기가 그의 성의를 무시하는것 같아 오히려 미안했다.

은하가 몸이 회복되여 자리에서 일어나던 날 광훈은 다시 찾아왔다. 광훈은 관람권 두장을 내보이며 오늘 철길건설자구락부에서 새로 나온 영화를 상영하니 바람도 쏘일겸 구경이나 가자는것이였다. 혼자 산보라도 나가고싶던 때여서 은하는 광훈을 따라나섰다.

합숙을 나선 두사람은 철뚝을 따라 걸었다.

저 멀리 하늘가에선 저녁노을이 불탔다.

은하는 자기를 위해주는 광훈이 고마왔고 전에 없는 친근감이 느껴지는것이였다.

《고향이 어디예요?》

《성천입니다.》

《부모들은 다 계셔요?》

《예-》

《무얼하시나요?》

《아버지는 교편을 잡구 어머니는 집에 있습니다.》

정말 광훈이네 가정은 부러워할만 했다.

고향에서 학교교장으로 일하는 그의 아버지는 이미 30년이나 교편을 잡아오고있었다. 삼십대의 맏형은 벌써 도의 어느 한 대학에서 강좌장으로 일하고있었다. 어느 군인민병원에서 소아과의사로 일하는 고모도 있었고 대학에 다니는 형과 누이들도 있었다.

유독 광훈이만 자기 형제친척들과 다른 길을 걷고있었다.

《왜 광훈동문 고중을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안 갔어요?》

《글쎄, 뭐라고 말해야겠는지… 난 남들처럼 잘 닦아진 큰길로가 아니라 험하지만 빠르고 곧은 지름길로 가고싶었습니다. 길이 없으면 내힘으로 개척하면서라도 말입니다.》

은하는 로동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려는 광훈이의 지향에 공감이 갔다. 은하는 광훈에게 무엇인가 생활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될만 한 좋은 말을 해주고싶었다.

《광훈동무, 동무의 지향을 리해할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기술혁명의 시대예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 공부를 해야 해요. 우리 청년들이 시대앞에 지닌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배우고 또 배워야 해요. 이런 의미에서 전 광훈동무에게 대학공부를 하라고 권고했다는 동무 누님들의 말에 공감이 가요.》

은하의 말에 광훈은 자못 심중한 낯빛을 지었다.

《은하동무말이 옳습니다. 금년에 저두 대학통신에 입학하겠습니다. 건설현장에 처음 진출했을 때 난 당원의 영예를 지닌 후 대학에 입학하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입당두 못하고 대학추천을 해달라기가 웬일인지 쑥스러워서…》

얼마후 은하는 광훈을 대학에서 만났다.

은하가 대학졸업반이 되던 해 광훈은 대학통신 1학년에 입학했다.

은하는 대학에서 광훈을 만났을 때 이렇게 물었다.

《왜 주간에 입학하지 않고 통신을 다니려 해요?》

《정든 일터를 떠나기 싫어서…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배울수 있지 않습니까.》

《광훈동무야 이미 입당을 했겠다. 주간대학을 졸업하면 당일군이 될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서 얼마든지 일할수 있겠는데…》

《어떤 위치에서 일하는가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발전의 척도는 사회적직위보다도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할수 있는 능력으로 측정되는것이 아닐가요.

또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있다고 해도 자기 지식을 무엇때문에 어디에 써야 하는가를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새 철길건설장은 우리 청춘들에게 자기의 젊음을 어떻게 빛내여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혁명화의 학교입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청춘의 돌격정신을 배우면서 통신으로 현대과학기술도 습득하고싶습니다.》

이때부터 두사람의 련계는 잦아졌다. 광훈은 은하에게 학습교재를 부탁하기도 했고 과학기술상의 문제들을 물어보기도 했다.

은하는 광훈이 부탁한 책을 소포로 보내주었고 그가 제기해온 과학기술상의 문제들에 힘자라는껏 해답을 써보내기도 했다.

두사람의 우정은 깨끗하고 순결했다. 그들의 사이는 상서롭게만 흘러오지 못했다.

은하가 졸업시험준비때문에 눈코뜰사이없이 바삐 돌아가던 어느날이였다.

질의응답을 끝내고 학급동무들이 모두 교실에서 쉬고있을 때 학급의 한 동무가 은하앞으로 걸어왔다.

《은하동무, 단단히 인사를 해야 편지를 주겠소.》

《저한테 편지온게 있어요?》

《애인한테서 편지가 왔소.》

《시시하게 놀지 말아요.》

은하는 처녀로서의 존엄을 지키려고 새파래서 돌아섰다.

문제의 그 편지는 광훈이한테서 온것이였다.

얼마 있다 광훈한테서는 또다시 편지가 날아왔는데 공교롭게도 이 편지도 그 익살군의 손에 들어갔다.

《은하동무, 한가지 좀 물어보기요.》

익살군은 교실에서 은하에게 다가와 일부러 정중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은하는 경계심이 없지 않았으나 그의 태도가 하도 천연스러워 또다시 속임수에 걸려들고말았다.

《은하동무, 아직 회답을 안했소?》

《누구한테 말이예요?》

《누군 누구야, 동무의 그… 광훈동무한테지.…》

은하는 얼굴이 빨개지고말았다.

은하가 어처구니없어 아무 말을 못하자 익살군은 편지를 내밀며 시를 읊조리듯 말했다.

《아, 젊음은 아름다운것이여라!》

이때부터 광훈은 은하네 학급동무들속에서 은하의 《애인》비슷하게 알려지게 되였다.

광훈이 보내온 편지에는 별다른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인차 평양에 출장가게 될것 같으니 전번 편지에 부탁했던 책을 이번에 가져갈수 있게 구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 씌여있었을뿐이였다.

은하는 웬일인지 이때부터 광훈이를 대하기가 어색해졌다.

광훈이 지금까지 자기를 각별히 대해준것은 사실이나 은하는 그것이 진실한 우정이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었다. 그가 자기에게 색다른 감정을 표현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은하는 지금까지 광훈을 그저 동무로 대하고 리해해왔을뿐이였다.

동무들속에서 자주 놀림을 받게 되고보니 은하는 광훈이 정말로 자기한테 남다른 감정을 품은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도 되고 처녀로서의 순정에 그가 무슨 흠집을 주기라도 하는것 같아 공연히 화를 내게 되는것이였다.

은하는 여러해동안 광훈과 사귀여왔지만 아직 한번도 이성문제를 그와 결부시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광훈은 성실한 청년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은하가 마음속에 그려오던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광훈은 너무도 평범했다.

은하는 생활의 기쁨과 시련을 함께 나누고 크고작은 모든 일에서 서로서로 부축하며 의지해야 할 자기 일생의 길동무는 모든 면에서 광훈이보다 퍽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왔었다.

높은 리성과 자기의 학구적인 세계가 있으며 문화적소양도 광훈이보다는 높은 청년과 은하는 자기의 일생을 함께 하고싶었다.

광훈이 자기한테 애정을 품고있다면 그것은 깨끗한것임에 틀림이 없겠으나 은하는 그 진정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은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자기의 충고를 성실히 받아들인 그를 보았을 때 자기가 한 로동청년에게 좋은 조언을 했다는 은근한 자랑을 품게 되였고 그래 자기도 그를 존중해주었을뿐이였었다.

광훈은 출장길에 은하를 찾아왔다.

기숙사 한호실 동무들은 은하에게 이상야릇한 웃음을 보내였다.

자존심이 상한 은하는 그가 부탁했던 책을 구해주지 않았고 바쁘다는 핑게로 그를 기숙사현관에서 바래주었다. 그후부터는 광훈이한테서 보내온 편지에 회답도 안했다.

그래도 은하는 한동안 마음이 산란했다.

대학기숙사 한호실에서 같이 생활하는 친한 녀동무가 귀속말로 조용히 물었다.

《너 왜 그러니?》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광훈이란 그 사람때문에 그러지?》

정통을 찌르고드는 말이여서 은하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한이불을 덮고 같이 자기도 하는 허물없는 사이여서 그 녀동무는 은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자기의 속생각을 주저없이 털어놓았다.

《난 광훈이란 사람은 잘 몰라도 그의 집안래력에 대해서는 좀 알지. 그의 가정은 한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소시민중산층가정이지.

그의 큰아버지는 일제때 개인병원을 차려놓았던 의사야. 옛날에 환자들한테 시달림을 받지 않으면서 돈을 벌려면 치과의사가 되라고 했다나.

아무리 이발이 쏴두 환자가 밤중에 의사를 찾아다니지 않거던. 그래서 그도 치과의사가 되였을거야. 해방후 도인민병원 치과과장이 됐지. 그의 세 자식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구 모두 의학을 공부했는데 의학자나 의학부문의 큰사람이 된 사람은 없구 그저 그러루하게 의료부문에 있지.

광훈이란 사람의 아버지는 해방전부터 교원을 했는데 지금도 교육부문에 있을거야.…

아버지네 3형제중 막내는 풍각쟁이노릇을 했는데 해방후 도립예술극장 부총장까지 됐다나 봐.

그런데 술도깨비구 바람쟁이여서 여러번 로동단련을 했다나 봐.…》

종조리새 열씨까듯 하는 동무의 말에 은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너 그 집 래력 어떻게 그렇게 잘 아니?》

《우리 오빠가 그 집 사위될번 했으니까… 광훈이란 사람의 누이와 한때 련애를 했어.

상대해보니 소시민냄새가 나서 관계를 끊어버리고말았대.

우리 집을 놓고보면 빈고농출신이거던. 할아버지는 머슴이였구 우리 아버진 알짜 빈농소작쟁이였으니까…

토지개혁때도 그랬고 협동화때에도 우리 아버진 농촌핵심이였지. 지금은 관리위원장이구…

아버지가 오빠를 공업대학에 보냈는데 오빠는 대학을 졸업하자 방향전환을 했지.

아무리 빈고농이래두 로동계급은 아니거던.

혁명의 령도계급은 로동계급이야. 혁명의 핵심골간, 령도계급으로 살자는게 우리 오빠의 주장이지.

지금 당에서는 온 사회의 혁명화, 로동계급화의 구호를 내놓지 않았니. 아무리 빈고농이래도 로동계급의 모양대로 개조해야 할게 아니가.

개조하는 사람이 되자는거지.》

《넌 간부일군이 다 되였구나.》

《못될거 없지. 오빠의 주장에 공감이 가서 나도 지금 이렇게 기술을 배우지. 난 기술을 배우지만 녀성일군이 되자는거야. 당일군이 되면 더 좋구…》

은하는 동무의 견해에 모두 찬성할수 없었으나 그의 주장이 너무나 열렬하여 그한테 끌려가지 않을수 없었다.

《야, 넌 로동계급출신이 아니가. 로동자집안에서 태여났고 또 아버지는 공화국영웅이겠다, 광훈이 같은 사람하군 상대하지 말어. 녀자는 시집가면 어차피 남편따라가기마련인데 안팎이 모두 그쯘한 사람, 로동계급화된 혁명의 핵심골간과 상대해야지.》

은하는 동무의 견해가 너무 일면적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일이 있은 이후부터 광훈이와의 관계가 점점 더 벌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은하는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연구소에 배치받았다. 그가 광훈이며 통신생들을 직접 배워준것은 아니였으나 은하는 대학연구사라는 자기의 위치때문에 광훈을 통신생으로 범상히 대했고 광훈 역시 의식적으로 그를 피했다.

작년엔가 광훈은 통신을 졸업했다.

그 기간 은하는 대학구내에서 잠간씩 한두번 만났을뿐이였고 근래에는 만나지 못해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런 광훈을 여기 와서 다시 만날줄이야.…

 

밖에서는 강물소리가 쉼없이 들려왔다. 소란한 물소리는 한밤의 정적을 더욱 짙게 할뿐이다.

고미탄천물소리에 섞여 부엉이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천막안에는 깊이 잠든 돌격대원처녀들의 고르로운 숨소리가 차넘친다.

은하는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렸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고성기가 갑자기 무슨 발신신호를 하듯 빽빽거리기 시작했다. 끊어졌던 선이 어떻게 저절로 이어졌는지 아니면 중계소에서 지금까지 방송을 끊었다 스위치를 넣었는지 천막기둥에 매달아놓은 고성기에서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루방송이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이였다.

고성기에선 은근하게 애국가선률이 흘러나왔다.

이때였다. 한 처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앉더니 누구에게라없이 소리쳤다.

《얘들아, 애국가가 나온다.》

잠들었던 처녀들이 그 바람에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하는 천막안이 어두웠으나 방송에서 애국가가 나온다고 소리친 처녀가 개천탄광에서 왔다던 태선이란 처녀임을 알았다.

조용하던 천막안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쉿, 조용들 해요. 은하선생이 깨여나지 않게…》

왼켠으로 은하 다음다음에 누웠던 처녀가 자리에 일어나앉으며 나직이 말했다.

불꽃옆에 누웠던 그 처녀는 수덕이였다.

아직 깨여나지 못한 사람들을 깨우며 옷을 갈아입느라 천막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은하는 자기가 일어나앉으면 다른 처녀들이 미안해할것 같아 조용히 누워있었다.

《수덕이, 불꽃을 깨워.》

벌써 옷을 다 입었는지 태선이 신발을 신으며 수덕이한테 소곤거렸다.

굳잠든 불꽃은 깨여나지 못했다.

《나둬, 오늘은 은하선생이랑 같이 푹 자라구…》

불꽃을 깨우다말고 수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을 입기 바쁘게 처녀들은 천막밖으로 나갔다.

《얘들아, 왜 아직 이렇게 어둡니?》

천막밖에서 누군가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말이야, 날이 되게 흐린 모양이구나.》

누군가가 졸음기섞인 소리로 대답했다.

《흐릴게 뭐야, 저 별을 봐.》

《이상한데… 몇시야?》

아까 묻던 소리가 또 들렸다.

그러더니 잠시후 기겁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마나, 열두시구나.》

《뭐, 열두시?》

여럿이 놀라듯 다우쳐묻는다.

《다시 봐.》

《분명 열두시 오분이야.》

《이게 어떻게 된거야?》

《분명 애국가선률이 나오는걸 들었는데…》

은하는 이렇게 대답하는 애된 목소리의 임자가 태선이라는것을 알았다.

《내 시계가 멎었나? 아니야, 분명 살았어.》

《너 방송 끝났다는 음악을 방송시작음악으로 잘못 들었구나.》

《글쎄, 그러면 그렇겠지… 오늘 별로 졸린다 했지.…》

아직 졸음기가 가셔지지 않은 다른 목소리가 받는다.

《정말 내가…》

당황해 어쩔줄 모르는 사람은 태선이가 분명했다.

그러더니 밖에서는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때아닌 한밤중에 처녀들은 좋아라 깔깔 웃었다.

《잘됐어, 작업장에 나가자.》

《그래…》

태선이 잘못 깨웠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처녀들은 어디론가 욱 밀려갔다. 잠시후 사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조용한 천막안에 불꽃과 단둘이 남은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둥그런 천막 통풍구로는 달빛이 흘러들었다. 은하는 일어나 통풍구로 다가섰다.

작업장은 바라보이지 않았으나 건설의 음향은 뚜렷이 들려왔다.

철판우에 자갈이 쏟아지는 소리, 쇠붙이와 쇠붙이가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 벨트콘베아가 돌아가는 소리… 숙소에서 작업장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였으나 한밤중이여서 지척에서처럼 들린다.

건설장은 이밤도 잠들지 않았다.

건설의 음향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 은하는 웬일인지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이곳이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인지경이였다고 생각하지 못할것이다.

강물소리며 바람소리만 들리던 이곳에서 그 무슨 교향악처럼 힘찬 건설의 첫 음향을 울린 사람들은 다름아닌 불꽃이나 수덕, 태선 같은 청년돌격대원들이였다.

은하는 철없게만 생각되던 그들의 가슴속에 얼마나 귀중하고 열정적인 감정이 맥박치고있는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러워지는것이였다. 그들은 온종일 일하고도 즐거움에 겨워 밤작업을 다시 나간것이다.

새벽 다섯시까지 아직도 다섯시간이나 잘수 있건만 잘못 깨웠다고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태선을 나무라지 않았다.

은하는 열려진 천막 환기창곁에서 오래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은하가 환기창곁에서 물러서는데 불꽃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깼니?》

은하는 웃으며 나직이 물었다.

《은하언니예요? 몇시예요?》

은하는 달빛에 손목시계를 비쳐봤다.

《열두시 반.》

《그런데 다들 어디 갔어요?》

불꽃은 텅 빈 천막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영문을 몰라 은하를 바라봤다. 불을 켜지 않았으나 흘러드는 달빛에 천막안은 초불을 켠것큼이나 밝았다.

《조금전에 다들 나갔어.》

《어마나, 어쩌면 좋아. 다섯시에 나가기로 했댔는데…》

《태선이가 먼저 일어나더니 다들 깨웠어.》

《아이참… 다섯시에 나가자구 하구선…》

불꽃은 자기를 깨우지 않고 저희들만 슬쩍 일하러 나간 태선이며 수덕을 한참이나 나무랐다. 그는 급히 옷을 갈아입더니 미안한듯 말했다.

《언니, 피곤하실텐데 주무셔요. 우리는 얼마전에 큰물피해를 입었어요. 갑작스레 불어오른 강물은 우리가 한달이나 땀흘려 일해놓은 모든것을 순간에 밀어갔어요. 그것을 봉창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부터 분발하기로 했어요.》

불꽃은 분한듯, 하지만 모든 괴로움과 아픔을 이겨낸 사람의 표정으로 절절히 말했다.

은하는 건설장형편을 아직 알지 못했지만 본격적인 장마도 아닌 고미탄천의 자그마한 《시위》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괴로움을 안겨주었으며 역경은 오히려 사람들을 분발시키고있음을 가슴뜨겁게 느낄수 있었다.

청년돌격대원들의 가슴에 차넘치는 열정의 불씨는 나라의 동서부를 련결하는 새 철길건설장에서 자기들의 청춘시절을 아름답게 빛내이려는 열망들이였다.

그러자 은하는 불쑥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광훈동무는 이미 당원의 영예를 오래전에 지니지 않았는가. 통신으로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는가. 그는 무엇을 바라고 돌격대작업장에서 십년나마 한본새로 살아오는것인가?)

은하는 아직 그것을 다 알수 없었으나 이번 현실연구기간 불꽃과 광훈을 힘껏 도와야 하며 고미탄지구 다리건설에 그 무엇인가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충동을 금할길 없었다.

《나도 같이 가자.》

은하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불꽃을 따라나섰다.

은하는 그를 총총히 따라서며 저도 모르게 《불꽃.》하고 그의 별명을 뇌이였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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