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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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왕성한 봄기운이 거리에 차넘친다. 나리꽃이며 살구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여나더니 그윽한 꽃향기가 거리에 진동한다. 봄물이 올라 파릿해진 공원의 잔디밭에서는 손에 딸랭이를 쥔 아기들이 해롱해롱한 웃음을 지으며 해맞이를 했고 봄날을 기다려 사랑을 무르익혀온 청춘들은 뭇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거리를 거닐었다.

태양절을 맞으며 진행되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준비사업이 더욱 활발해졌다.

축전준비위원회 위원인 한규일은 분주했다. 해당 나라들에서 온 예술단체들과 접촉하며 극장문제와 공연종목들을 련일 토론하다나니 언제 집에 들어갈 짬도 없었다. 장군님께서 믿음을 주신 민족수난기의 음악을 종합하는 도서집필도 거의 끝나가고있었다.

안해에게 전화를 거는것만은 잊지 않았다. 때끼를 번지지 말고 꼭꼭 식사하라고 재삼 당부했다. 할 때면 안해의 만족이 송수화기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듯싶어 마음이 후더분해진다.

이즈음엔 군인가족예술소조경연에 참가한 손녀가 가끔 집에 드나드는터에 로친이 별로 적적해하지 않는다. 막달을 잡아 배가 남산만 한데도 경연무대에서 아이를 낳겠는지 예술공연보장을 위해 뛰여다니고있다고 한다. 아무렴 어버이장군님의 사랑으로 독창을 하게 되였으니 자기 몸을 돌볼새가 있으랴. 그렇다고 해산이란 뒤로 미룰수도 없는노릇이여서 로친만 안달아한다.

옛말에 곶감죽을 먹고 엿목판에 어푸러졌다더니 선률이와 함께 군인가족사업을 맡아보는 선률의 어머니도 이번 경연에 올라왔다.

그런 가위에 규일의 생각은 가끔 이번 봄축전에 참가하겠다고 확스를 보내온 오스트랄리아의 정렬지와 민아리랑에게 가닿군 한다.

로친에게도 그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로친은 마치 건너집에 사는 친지들을 맞는것처럼 빨리 데려오자고 하면서 방안을 새로이 꾸리느라 야단법석을 했다.

동포음악가들만이 아니다. 로씨야음악가인 쎄르게이 쎄르게예위치 쥬보브낀도 로씨야군대협주단 일행과 동행하여 바로 며칠전에 평양에 도착했다. 아직은 베를린필하모니에서 연주생활을 하고있다면서도 로씨야군대협주단 성원들을 따라선것을 보면 인차 모스크바로 돌아갈 심산인듯 했다. 군가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돈의 힘을 역설하던 사람답지 않게 평양을 대하는 그의 기색은 자못 진중했다.

평양고려호텔에서 로씨야음악가대표단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전엔 미안했습니다. 당신과 헤여진 뒤에 괜히 객기를 부렸다고 후회했지요. 진심은 아니였습니다. 실패한 음악가로서 울분을 터놓고싶었지만 같지않은 자존심에 그런 식으로 자기를 변호했지요.… 때늦게라도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싶어 비행장으로 달려갔지만 만나지 못했던겁니다. 조선의 군가에 로씨야의 정객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이 쥬보브낀을 찾더군요.》

쥬보브낀의 말이였다. 그래서 로씨야군대협주단 일행과 동행했다는 소리였는데 다소간 음울한 기운이 가셔진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비껴있었다. 쥬보브낀은 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하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신심과 락관에 넘쳐있는것이 인상적이라면서 서방의 선전과 너무도 상반되는데 대해 놀라와했다.

로씨야음악가일행을 책임진 로씨야군대협주단 지휘자 릐바끄 역시 라지오를 통해 듣던 조선군가의 정신을 직접 목격하게 된것이 감동적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우리 로씨야에선 음악가들뿐아니라 정부의 위력자들과 국방성의 고위인물들도 조선의 군가에 대해 몹시 관심하고있답니다. 강력한 로씨야의 부활을 바라는 마음들이라고 할는지…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는 한시바삐 조선군대합창단공연을 보기 바란다고 했다. 그들뿐이 아닌 이번 축전에 참가한 다른 나라의 모든 음악가들과 예술인들도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공연관람을 기대했다.

고려호텔에서 그들과의 면담을 끝내고 음악가동맹에 돌아오니 또다른 류다른 소식이 규일을 기다리고있었다. 음악가동맹 위원장이 평양호텔에 가서 해외동포영접국(당시) 부국장을 만나라고 알려주었던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규일은 짜릿한 환희를 느끼며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일인가봅니다.》

모른다고 하면서도 어조는 밝았다. 류다른 흥분이 몸을 에워쌌다.

윤이상음악당에서 평양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봄축전때마다 사업상련계를 맺게 되는 해외동포영접국의 면식있는 부국장이 초조한 기색을 짓고 호텔현관앞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선생님, 정렬지동포가족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규일은 드디여 렬지가 왔다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과연 몇십년만의 상봉인가? 그를 만날수 있을것이라고 상상이나 할수 있었던가.

부국장이 앞서가며 무엇이라 자꾸 설명했으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흥분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면담실에 들어서니 탁자앞에 그린듯이 앉아 조선화보를 펼치고있는 낯익은 모습이 시야에 비껴들었다.

차겁게 느껴지면서도 서글픔을 호소하던 눈빛, 수십년전의 추억을 부르며 피를 덥히던 목소리… 민아리랑이였다.

처녀가 인기척을 느끼며 규일이 들어서는 곳에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탄성이 보석을 뿌린듯 반짝거리는 도두룩한 입술사이로 새여나왔다.

베를린에서 만났을 때보다 퍽 예뻐보였다.

《선생님!》

《왔구만, 왔어. 그때 헤여지면서 다시는 못 볼줄 알았는데…》

처녀는 습관적으로 어깨우에 치렁거리는 긴 머리태를 옆으로 제끼며 창가림을 드리운 창문쪽에 눈길을 보냈다.

《어머니와 함께 왔답니다.》

《어머니?… 어머니도 왔단 말이요?》

단정한 기품이 엿보이는 초로년기에 이른 녀인이 옛시절의 아름다움이 고이 간직된 크고 어글어글한 눈으로 이쪽을 여겨보고있었다. 그 녀인이 바로 눈덮인 간도땅의 심산유곡에서 헤여졌던 정렬지의 일점혈육이라는것을 상기하는 순간 규일은 비수로 가슴을 쿡 찌르는듯 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니 분명 정렬지의 딸이겠소?》

《예, 한설님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음악을 밑천삼아 동포들을 가르치고 또 음악작품이나 연주를 두고 제나름의 비평도 쓰고있답니다.》

규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인이 내미는 손을 움켜잡으며 정신없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닌 우리 애가 베를린에서 선생님을 만나뵈웠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녀인의 눈가에 물기가 핑 고였다. 얼른 손수건으로 문지르며 웃으려고 애썼다.

《아리랑이 집에 가서 이 사람을 욕했겠구만. 뜻밖의 상봉이였소. 하지만 만나자바람으로 헤여졌지. 다시 만날 일이 아득해보였는데 이렇게 만났소. 헌데 어머닌?…》

한설님의 어글어글한 눈에 그늘이 졌다.

《선생님의 소식을 전해듣고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심장부담으로 끝내…》

《!》

규일은 몸을 비칠하며 의자등받이에 팔을 뻗쳤다. 설님이와 아리랑이 동시에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괜찮소. 이번에 꼭 만날줄 알았는데…》

《선생님도 알겠지만 어머니의 고향은 남쪽이랍니다. 그러나 너무도 큰 원한을 사게 되여 다시는 거기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살던 동해기슭의 작은 어촌마을을 자꾸 입에 올리면서 한번 꼭 가보겠다고 외웠어요.

사실 전 어릴적에 어머니가 왜 외롭게 사는지 다 몰랐어요. 이 철없는것이 어머니더러 자꾸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졸라대여 어머니를 꽤 괴롭혔던가봅니다. 후에야 알게 되였지요. 나라잃은 설음이 남긴 사연을, 어머니의 멍진 가슴에 새겨진 아픈 상처를… 어머닌 자기 유해를 꼭 선생님의 고향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답니다.》

한규일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잊을수 없는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미쳐오던 낯설은 이국땅의 살풍경이 뇌리에 떠올랐다. 앙칼진 바람소리, 썩은 곰팽이냄새, 문짝을 대신하던 덕석이며 쥐가 뜯어먹은 자리가 유표한 골풀로 엮은 돗자리, 쿨럭쿨럭 기침을 깇는 산전막포수가 비추이는 광솔불을 등대고앉아 처녀의 머리태를 얹어주던 그밤…

《내가 혹시 짐이 되지 않을가요?》

머리칼을 쓰다듬는 규일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속삭이던 가냘픈 목소리…

《아니, 우리 서로 의지가 되자구. 몸이 추서면 동해의 어촌마을에 가기요. 어머닌 아직 살아있는지… 거기서 우리 연주회를 벌리자구.》

《규일씨, 우리 헤여지지 말자요.》

그러나 처녀의 소원은 불타버린 산전막처럼 한줌의 재가 되여 날려갔다. 그의 모습은 수십년세월이 지났어도 희미해진것이 아니라 구슬픈 노래소리와 함께 가슴속에 생생히 새겨졌다.

《고정하십시오. 그래도 어머닌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답니다. 성공한 선생님을 보는것이 소원이였다면서…》

《그렇겠지, 그럴거요.》

규일은 기계적으로 응대했다.

음악에 대한 렬지의 사랑은 참으로 열렬했다. 하지만 이국살이에 그의 재능은 속절없는 인생과 함께 스러졌다.

《만나지 못하고 끝내 그렇게 떠났구만. 환생의 기쁨을 나누고싶었는데… 어머니의 부탁을 꼭 들어주자구.》

《아버지…》

설님이 조용히 불렀다. 연하게 화장한 얼굴로 눈물방울이 또그르르 굴러내렸다. 정을 부르는 소리였다. 초로년나이에 이르도록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 번지지 못하고 성장한 녀인이, 혈연의 정이 그리워 상상속에 아버지를 그려보았을 녀인이 이제껏 잠재우고있던 정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내 딸아!…》

규일은 품에 안기는 설님을 꽉 그러안았다. 그렇다, 녀인은 분명 규일의 딸이였고 한번 구실한적 없는 한규일자신은 설님의 아버지였다.

매정한 세월이 남긴 수난의 흔적이 오늘로 이어져 비로소 혈연의 정이 맺어진것이다. 민아리랑도 할아버지의 손을 쓸어만지며 눈물짓고있었다.

《아마 너희들은 어떻게 되여 평양에 오게 되였는지 다는 모를게다. 우리 장군님께서… 장군님께서 부르시였다. 베를린에서 아리랑을 만난 뒤에 내 장군님을 뵙게 된 일이 있었지. 그때 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부끄러운 과거사를 장군님앞에 죄다 터놓았구나.》

《그러니 정일총비서님이 할아버지를 아신단 말이예요?》

민아리랑이 미덥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허허, 알고계시지. 아시다뿐이겠니?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장군님과 혈연의 정을 맺고있다. 그이의 손길에 이끌려 나도 음악가로 성장했다.》

규일은 정면벽에 모신 김정일동지의 초상화를 우러렀다.

어버이장군님께선 그게 왜 선생의 부끄러운 과거이겠는가, 나라잃은 민족의 설음이고 상처라고 하시면서 모두 평양에 불러 가족음악회를 열게 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우린 영문도 모르고 그저 좋아만 했군요.》

설님이 두손을 가슴우에 포개며 조용히 뇌이였다.

《설님이,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이 어떤것이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음이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이 아니겠니.

우리 민족이 왜 그런 수난을 강요당해야 했니? 민족을 구원하고 이끌어줄 령도자를 모시지 못했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불행한 민족은 구세주를 부르는 애달픈 호소를 서글픈 선률에 담았지. 오늘은 우리 음악가들이 위대한 령도자를 모신 조국의 영광을 노래하고있다.》

설님의 두릿한 얼굴에 환희의 빛이 어렸다.

총비서님, 정말 고맙습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이런 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가정의 수난이 끝나는 날입니다.》

모녀는 김정일동지의 초상화를 우러러 허리굽혀 절을 올렸다.

《자, 오늘 저녁엔 모두 우리 집으로 가자. 집사람도 무척 기다리고있다. 전에 내 베를린에서 아리랑을 만난 소릴 했더니 당장 데려다가 함께 살자는게다.》

《예, 만나고싶습니다. 다같이 가정연주회도 하고싶구요.… 사실 이번에 아리랑의 아버지도 함께 오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하던 일을 마무리지어야겠고 또 펼쳐놓은 자그마한 기업도 있고 해서 시간을 내지 못했어요. 박정희의 이민수출에 걸려 서부베를린에서 청부를 하던 사람이예요. 애아버지의 이름이 민정직이라고 성미가 후더분해요. 남쪽땅과 결별하고 베를린에 영주했답니다. 동포음악회에서 서로 얼굴을 익히고 가정을 이루었어요.》

설님은 규일에게 가정사를 다 이야기하는것이 바로 딸의 의무라도 되는듯이 자상히 설명했다.

《아버님, 이번 봄축전에 내놓을 노래는 어머니가 지은거예요. 가사도 쓰고 곡도 지었답니다.》

《들어보자구. 다같이 인민군공훈합창단 공연도 관람하구. 아리랑이나 설님인 공훈합창단음악을 듣게 되면 조국을 더 잘 알게 되리라 보네.》

《할아버지, 우린 아닌게아니라 그것도 일정에 넣었답니다.》

민아리랑이 맑고 쟁쟁한 소리로 응대했다. 규일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설님이도 시름이 가셔진 웃음소리를 울렸다.

그날 저녁 집은 명절처럼 흥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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