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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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호는 로동년한이 이미 지난데다가 신병을 앓고있는 관계로 대학동창생의 도움을 받고서야 서평양지구에 있는 담배공장에 적을 둘수 있었다. 경비성원이긴 해도 로년에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썩 나았다.

이날은 처의 제사날이여서 일찍 퇴근길에 올랐다. 하지만 갈래없는 생각에 쫓기다나니 지하철도를 갈아탄다는 노릇이 옛적의 습관대로 전우역 계단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지팽이에 몸을 의지하며 4. 25문화회관 앞광장에 들어설 때에야 그는 부지중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길을 헛들었다는것을 의식하는 순간에 온몸이 찬물을 끼얹은것처럼 오싹해졌다. 어둠때문에 자기의 당황한 몰골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것이 다행이였다.

(그래, 이사를 갔지.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생활하고있어.…)

오래간만에 들어선 회관광장을 얼른 뜨고싶지 않았다. 감미로운 추억에 잠기며 천천히 걸었다. 공연시작을 앞두고 울리던 조음소리가 귀가에 미쳐오는듯 했고 무대복을 들고 분주히 뛰여다니는 모습들이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회관으로 오르는 높은 계단이 합창대처럼 느껴져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이였다. 싸락눈이 날리고있었다.

문득 뒤쪽에서 승용차의 불빛이 비쳐왔다. 광장을 한바퀴 돈 승용차가 어중간에 멈춰서더니 서윤호가 서있는쪽에 불빛을 비쳤다. 차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서윤호를 향해 성급히 걸어왔다.

누구인지 자기를 알아본듯 했다. 초췌한 몰골을 보이고싶지 않아 얼른 등을 돌렸다.

《저, 말씀 좀 물읍시다. 서윤호동지가 아닙니까?》

하는수없이 돌아섰다. 전혀 낯모를 중년나이의 군관이였다.

《옳습니다. 뉘신지?…》

《얼굴이 좀 낯익기에… 공훈합창단에 계시지요?》

《허허,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은 담배공장에서 일합니다.》

《그러니 합창단에서 나왔는가요?…》

《예, 전 일이 바빠서 먼저…》

서윤호는 인사치레로 약간 목례하고나서 몸을 돌려세웠다. 인파가 끓는 유보도에 들어섰다. 승용차는 여전히 한자리에 서있었다.

(누굴가? 전혀 낯모를 군관이였는데…)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전동차에 오르자 곧 잊어버렸다. 집에 가서 제사준비를 해야 한다는 촉박감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예로부터 부모제상은 자식들이 차린다고 하지만 그런 례의에 구애되고싶지 않은것이 서윤호의 마음이였다.

중년상처에 대들보가 휜다고 처를 보낸 뒤의 고생이 적지 않았다. 홀아비살림을 하는 그를 보기 딱했던지 이웃들이며 가까운 친지들이 빨리 재취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는 먼저 간 처에게 죄되는 일을 하고싶지 않아 종내로 결심하지 못했다.

그럭저럭 애들이 다 커서 작은녀석이 군대에 입대하고 큰딸은 시집갈 나이에 이르렀다. 그 딸이 방직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총각과 혼사말이 오가고있는데 바로 애비때문에 성례를 치르지 못하고있다.

한다는 수작이 시집가면 어차피 남자네 집에 들어가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기에 결혼식을 뒤로 미루겠다는것이다. 이날이때껏 엄마사랑까지 합쳐 정을 부어준 아버지를 버리지 않겠다는 소리에 윤호는 눈물이 났다. 그래서 옛 전우의 처가 소개해준 녀자를 보기로 했다. 자식들을 다 세간내고 혼자 산다는데 만나보니 성품이 온화하여 리해를 도모할만 했다.

그런데 그 녀자를 만나는 날에 심각한 사건이 생겼다. 비판들은 정당했고 서윤호는 성의껏 접수했다. 새 안해?… 더는 만나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그저 로년에 애들의 뒤바라질이나 하는것이 제격이라고 속구구했다.

광복역에서 그닥 멀지 않은 선구자동에 그가 사는 아빠트가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리우며 싸락눈이 덮인 유보도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아빠트마당에 이른 그는 근심스러운 눈길로 불빛이 흐르는 창문들을 쳐다보았다. 안해가 살아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톺았을것이다. 텅 빈 집에 들어설 때마다 먼저 간 안해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을 이겨낼수 없어 마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현관에 들어서군 했는데 오늘은 별수없이 빨리 올라가야 했다.

《서동무가 맞지요?》

어느 왕년엔가 들어본 목소리여서 서윤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선생이 늦게 퇴근할가봐 걱정했습니다.》

음악가동맹 명예부위원장으로 일하고있는 한규일이였다. 다같은 음악가들이여서 면식은 있지만 그렇다고 집에까지 찾아다닐 자별한 사이는 아니였다. 아마 다른 사람을 만나러 왔다가 부딪치게 된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에 다 오셨습니까?》

《서동무를 만날 일이 있어서 걸음했습니다.》

《나를요?!…허, 나같은 페물한테 무슨 볼일이 있겠다구… 헌데 인사불성이군요. 홀아비집이라 올라가자니 부끄럽구…》

《별소릴 다 합니다. 눈내리는 밖이 좀 좋습니까.》

한규일이 장갑낀 손에 희뜩희뜩 날리는 눈꽃을 받으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서동무, 다름이 아니라 선생에게 일감을 하나 주고싶어 왔소.》

한규일이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어느 중앙기관에서 예술소조공연을 준비하는데 성악지도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구만. 서동무가 생각나더군요. 어떻소? 이모저모로 좋을것 같은데…》

고마왔다. 비록 합창대를 떠나긴 했어도 음악과 영원히 리별하지 못하는 심정을 알아준것이다. 하지만 선뜻 응하게 되지 않았다. 퇴근하던 이웃들이 그를 알아보며 왜 올라가지 않는가고 물었으나 알아듣지 못했다.

《한선생, 고맙습니다. 헌데 말입니다, 내 피치 못할 원인으로 합창단무대를 떠나긴 했어도 마음만은 무대에 남겼다고 할지… 내가 생활상 방조나 받자고 그런데 걸음한다면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만두겠습니다. 모처럼 걸음하신 선생님한테 미안하지만…》

규일은 다시 생각해보는것이 어떤가 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한규일은 이렇게 면전에서 거절당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서로가 의리를 지키는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일진대 자기의 크지 않은 성의에 고맙다는 인사로 대답할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방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어 언짢은 기색까지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만스럽지 않았다.

《참,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윤호가 어색한 공기를 느꼈는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베를린에 가셨댔다는데 인사가 늦어서 안됐습니다.》

서윤호는 과연 자기의 인사말이 가당할가 생각했다. 자기보다는 나이가 퍽 이상이면서도 음악계의 중진으로 명성높은 한규일에 비하면 서윤호라는 인간은 너무도 작고 초라했다.

이것저것 두서없는 이야기들로 대화가 이어졌다. 왕년의 공연활동과 음악선배들, 이즈음 음악부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화제에 올랐다.

규일은 래일모레가 자기 생일인데 꼭 와달라고 초청했다.

《가야지요. 거기만은 꼭 가겠습니다.》

서윤호는 쾌히 응했다.

대화가 점점 활기를 잃었다. 도간도간 침묵이 뒤따랐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상반되는 극을 안은 사람들이여서 이야기의 융합이 잘되지 않아 마침내는 동이 나고말았다.

서윤호는 울적한 기분으로 한규일과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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