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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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템캘호프비행장은 피부색이 다른 각국의 관광객들로 붐비였다. 리착륙하는 려객기들의 날카로운 금속성이 역사의 대형유리판을 흔들고 대륙별비행시간을 알리는 안내원의 방송소리가 무리등이 번쩍이는 중앙홀에 울렸다.

침울한 날씨였다. 뿌잇한 연무가 드리운 거리에 눈꽃이 점점이 날렸다. 도시전체가 찌뿌둥한 얼굴로 다가오는 겨울을 근심스레 맞는듯 했다.

한규일일행을 배웅하려고 따라선 베를린예술계인사들은 정류장과 활주로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2층홀에 둘러선채 체류기간의 가지가지 일들을 화제에 올리며 리륙시간을 기다렸다.

일행과 좀 떨어져 안락의자에 앉은 규일은 역사밖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승용차행렬을 내다보며 자기에게 도전적인 눈길을 보내던 묘령의 처녀를 생각했다. 아니아니할수록 가슴을 파고들며 옛 추억을 붙러일으키는 모습이였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윤이상음악연구소의 대머리부소장이 건늬는 말이였다. 베를린음악인사들과 나눈 이야기의 여파로 좀 흥분된 기색이였다.

《예, 몸이 좀 무겁군요. 그러나 이번 걸음에 다소나마의 성과라도 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아니, 난 반대로 봅니다. 대단하지요. 많은 나라의 예술단체들이 우리와의 교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대표부에서도 조국에 확스를 보냈다고 합니다.》

규일은 미소를 짓는것으로써 긍정을 표시했다.

《참, 선생님은 그 처녀를 다시 만났는가요?》

부소장이 호기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한규일은 은발의 머리를 가로저으며 창밖에 흐릿한 시선을 보냈다. 바로 그 처녀가 베를린을 떠나는 규일의 심중에 암울한 그림자를 던지고있다고 말하고싶었다.

음악회를 마감짓는 날에 객석에 피끗 나타났던 처녀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만나지 않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처녀가 던진 얄궂은 미소만 눈앞에 어룽거렸다. 왜 그를 만났을 때 몸이 달아올랐을가?…

《쥬보브낀이라는 량반이 불쌍하더군요. 가정도 파괴되고 나라도 엉망진창이고…》

규일은 부소장이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있다는것을 깨달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돈의 가치에 대해 력설하니 사람이 신념이 없으면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생관이나 음악관의 차이이겠지요.》

한규일은 문득 류다른 촉감에 몸을 가벼이 떨었다. 테굵은 색안경을 낀 녀인이 2층의 라선형계단 란간에 기대선채 오연한 자세로 그를 응시하고있었다. 바로 그 처녀였다. 어스름이 덮이는 공원숲속에서 만났던 마지막음악회에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며 심혼속에 잔파를 던졌던 동포처녀였다. 깃이 높은 털외투에 두손을 찌른 처녀가 규일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규일은 속이 두근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색안경을 벗어든 처녀는 어깨에 걸멨던 진밤색의 손가방을 기계적으로 끄당기며 한손으로 감싸쥐였다. 진홍빛으로 물든 긴 손톱이 가방을 가락맞게 다독였다.

《그날 다시 만나려고 했지만 촉기빠른 기자들의 시선이 집중될가봐 그만두었어요. 좋지 않은 기사가 석간신문에 실리면 명예마저 잃을수 있으니깐요. 그러면 선생님께도 여러모로 좋지 않지요.》

서투른 조선말발음이였지만 이전처럼 자극되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을 꼭 만나야겠기에 무례한줄 알면서도 이렇게 비행장까지 쫓아왔답니다.》

베를린음악가들이 처녀와 구면인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베를린체류기간 일행을 안내했던 등이 약간 굽을사 하고 눈확이 움푹 꺼진 베를린예술대학의 슈토크하우젠교수가 처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흥미있는 눈길로 한규일을 바라보았다. 넓은 이마에서 무리등빛이 번들거렸다. 윤이상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흥행업과 음악활동에 종사해오는 인사였다. 말끔히 면도한 인중을 매만지며 규일을 향해 무엇이라 말했다.

《민아리랑이 규일선생과 어떤 사이인가고 묻습니다.》

일행을 바래주러 나온 대표부의 통역원이 하는 말이였다.

《글쎄 모르겠다고 하오.》

통역원이 번역해주자 슈토크하우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처녀가 무엇이라 친절히 설명해서야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모진 얼굴에 서로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처녀가 규일을 향해 돌아섰다.

《불편하지 않다면 커피라도 드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나요? 날씨관계로 리륙시간이 좀 지연된다고 하던데…》

구태여 마다할 리유란 없었다. 부소장에게 잠간 다녀오겠다고 이르고는 처녀를 따라 손님들이 둘러앉아 잡담을 펼치고있는 실내의 음료점으로 향했다. 윤이상음악단 연주가들이 규일이와 함께 들어서는 낯모를 처녀에게 다소 놀라운 눈길을 보내며 자리를 내주었다.

동포처녀는 남자접대원이 날라온 적동색의 거품이 부그그 괴여오르는 뜨거운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약간 도드라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제가 정렬지라는분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과잉반응을 일으키셨지요? 에돌지 않고 말한다면 전 그분의 외손녀랍니다. 제 이름도 할머니가 지은거예요. 민아리랑… 이름이 마음에 드시겠는지 모르겠어요.》

규일은 가슴속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처녀의 모상에 비끼던 어떤 그림자를 체감하면서도 완강히 부인하던것이 완성된 실체로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는 충동에 얼굴근육이 쇠붙이처럼 굳어졌다. 탁우로 손을 내밀었다. 처녀의 랭랭한 눈길이 잔주름이 엉킨 손등에 와닿았다

《그러니… 가만, 실례인지 모르겠소만 그가 생존해있다는것으로 리해해도 되겠소?》

《예, 음악을 유일한 벗으로 삼으면서 여전히 고행의 길을 걷고있답니다.》

《그렇구만!…》

신음에 가까운 탄성이 입밖으로 새여나갔다. 규일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운명의 희롱인가? 이미 저세상의 혼이 되여 자기를 지켜볼것이라 생각했던 렬지가 살아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나에 대해 알게 된건…》

《오래전부터랍니다. 할머니의 옛말속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알게 되였지요. 어릴적엔 옛말로만 들었어요. 그러다가 언제였던지 할머닌 국영텔레비로 방영되는 평양예술인들의 공연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알아보았어요. 70년대말엔가 빠리에 가셨던적이 있지요?》

규일은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체음악예술이 대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에 그는 만수대예술단의 한 성원으로 수많은 대외공연무대에 나섰는데 빠리에도 몇번 갔었다. 바로 그 나날의 행복했던 규일의 모습을 렬지가 알아본것이다.

《그날 저녁 할머닌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우리가 웬일인가고 물어서야 옛 시절의 님을 보았다고 실토정했어요. 한규일이라는 성함도 그때 처음 들었어요. 그러다가 전 베를린필하모니에 오게 되였는데 거기에서 로씨야의 쥬보브낀선생을 알게 되였어요. 평양에서 울리는 군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에게서 우연히 선생님의 성함을 듣게 되였어요. 그래서 선생님에 대해 자상히 연구했던거예요.

선생님과 정을 나눈 할머니가 쪼각난 마음속에 그리움을 덧쌓으며 이국의 들가를 헤매일 때 선생님은 성공의 탑을 쌓으셨더군요. 할머니를 외롭게 만든 선생님이 미웠어요. 그러나 혹시 할머니가 기뻐할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날것을 결심했던거예요.》

규일에겐 아득한 옛말처럼 들렸다. 수십년이 지나 듣게 되는 소식이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신상에 부딪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페장에 흘러드는 따뜻한 혈연의 정은 어쩔수 없었다.

민아리랑이 가는 손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서울에서 전두환깡패가 철권을 휘두르던 때였는데 할머닌 오스트리아의 원에서 열린 해내외조선동포들의 민족악기전시회에 참가한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평양의 음악가일행을 만났답니다. 그들은 개량한 민족악기로 우리 나라의 민족음악뿐아니라 현대음악도 능란하게 연주해서 동포들을 놀래웠답니다. 그때 최덕신선생이랑 평양음악가들의 민족음악회를 보고 몹시 감동되였다는 소릴 들었어요. 할머닌 바로 그들을 통해서 선생님의 소식을 상세히 들을수 있었대요.》

그러니 오세안주에서 음악활동을 벌린다던 동포녀인에 대한 소문이 결코 뜬소문이 아니였다.

《…할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선생님은 다 모를거예요. 아마 선생님이 버리지 않았더라면 할머닌 그 타고난 재간으로 분명 성공했을거예요. 눈물겨운 이국살이도 하지 않았을게고… 홀로 어머니를 키우고 생활의 난바다를 헤치느라 모든걸 잃었어요. 이게 선생님의 죄가 아닐가요? 그래서 제 마음속엔 선생님에 대한 원망이 서리처럼 꽉 찼어요.》

규일은 눈앞이 어찔했다. 연보라빛수지의자등받이에 손을 뻗치며 몸을 다잡았다. 처녀가 급히 일어서며 규일을 부축했다.

《의사를 부를가요?》

《괜찮소. 나이탓이겠지.》

처녀는 규일의 얼굴에 화기가 도는것을 지켜보다가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정말 일없겠나요?》

《종종 이럴 때가 있소.》

눈녹은 물이 도랑을 이루고 을스산한 바람결에 재먼지가 일던 산골마을의 전경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물거리는 매운 연기, 청승맞게 울어대던 까마귀떼…

(아니, 내가 렬지를 버린것이 아니다. 아리랑은 오해하고있다.)

《난 할머니가 잘못된줄로 알았소.》

《호, 그때 할머닌 왜놈들에게 끌려가다가 어느 산간마을에 이르러 구사일생으로 도망칠수 있었대요. 놈들이 술놀이를 하는 사이에 손톱이 모지라지도록 헛간의 산자벽을 뚫었다는거예요.》

규일은 후- 하고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민아리랑의 목소리가 얼마간 차분해졌다.

《할머닌 놈들이 쫓아올가봐 죽을 고생으로 밀림속을 헤매였답니다. 죽어도 조국땅에 가서 묻히겠다고 모진 마음을 먹고 그냥 기여갔답니다. 그러다가 산간오지의 어느 귀틀집앞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마침 그집 늙은 내외가 인심이 그리 박하지 않은 조선사람들이여서 목숨을 건지고 눌러앉게 됐나봐요. 거기서 몇달 보내는 사이에 할머니의 몸에선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몸을 풀었답니다.》

규일은 마음이 서글퍼졌다.

《할머닌 일생 시집가지 않고 우리 어머닐 키웠어요. 정전된 이듬해엔 어머니를 데리고 서울에 갔다가 간첩혐의를 받고 감옥살이까지 했답니다. 정말 고생고생하면서 목숨을 연명하다가 박정희의 이민수출에 걸려 오스트랄리아까지 흘러갔어요.…》

《이름이 아리랑이라지?… 할머니만이 손녀의 이름을 그렇게 지을수 있을거요. 내 할머니에게 죄를 지었소. 만나고싶구만.》

민아리랑이 문득 감동어린 미소를 지었다. 서슴서슴하며 탁자우에 겹놓인 규일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가 무척 늙었겠지?》

규일은 김이 빠진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도 옛모습은 남아있답니다. 선생님과 함께 지었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을 위로한답니다.》

《아마 <아기의 신세>라는 노래일거요.》

처녀가 이새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오늘도 한낮이 기울었는데 배고파 우는 아기 울고있어요 엄마는 부자집의 아이젖먹이…》

규일은 눈을 감으며 뒤련을 이었다. 구슬픈 추억이 가슴을 아릿하게 했다.

《고맙소.》

처녀의 심장에도 더운 피가 흐르고있었다. 타향살이에 이지러진 마음일지라도 혈연의 정만은 고이 간직되여있기에 이렇게 만날수 있는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이번에 평양악단의 음악회를 보면서 많은걸 배웠어요. <에네르기>음악이 범람하고 음악을 수자적인 계산으로 몰아붙이는 <전위>음악이 홍수처럼 터지는 때에 신선한 선률을 들었다고 할가요? 여기서는 모든걸 은행표의 소절수와 련결시키지 않으면 생존할수 없답니다. 저도 물론 례외가 아니구요.

하지만… 저에게도 동경할 음악의 세계가 생겼다는게 참으로 다행스러워요. 남쪽은 안돼요. 민족음악말살에 음악말세이거던요.》

민아리랑은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외우며 정이 넘치는 눈길로 규일을 쳐다보았다.

《윤이상음악단의 공연을 보면서 조선사람이 된 긍지를 느꼈다고 할가요, 베를린음악애호가들은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평양의 음악을 찬양했어요. 얼마나 기쁘던지…

전 이번에 민족의 정신이 살아숨쉬는 음악회를 보고나서 힘이 생겼어요. 할머니에게 좋은 소식이 될거예요.》

규일은 벙글써 웃었다.

《아리랑에게 힘이 되였다니 기쁘오. 윤이상선생의 현대음악이 생명력을 잃지 않는것도 거기에 민족의 넋이 배태되였기때문이지. 할머니에게 전해주오, 민족의 넋을 잃지 말라고… 언제건 꼭 만날 날이 있을거요.》

비행기시간을 알리는 방송원의 상냥한 목소리가 홀에 울렸다. 일행이 규일을 찾고있었다.

헤여져야 했다. 만나자마자 리별하기란 괴로운 일이였다. 규일은 민아리랑의 자그마한 손을 꼭 잡았다. 눈시울이 더워났다. 처녀도 애틋한 웃음을 지으며 도두룩한 입술을 으깨물었다.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전지대에서 다시 돌아섰다.

처녀는 여전히 한자세로 서있었다. 눈길이 부딪치자 가슴우에 손을 올려 가벼이 저어보였다. 천정의 무리등빛이 처녀의 눈동자에 반사되여 번쩍거렸다. 울고있었다.

규일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손을 저었다.

출입구쪽에서 누구인가 초조한 기색으로 달음박쳐오는것이 보였다. 민아리랑의 곁에 멈춰서더니 난색한 표정을 지었다. 쥬보브낀이였다.

습관적으로 두팔을 쩍 벌려보이더니 규일을 향해 손을 저었다. 무엇이라 소리쳤으나 소음때문에 알아들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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