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2 장

18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나라의 경제장성속도는 남계수에게 기업소의 경영방향을 갱신해야 한다는 확고한 결심을 더욱 굳혀주었다. 이미전부터 마음먹은것이지만 지방산업공장으로서 경쟁력을 가진 생산지표를 보유할 필요가 있었다. 큰 공장들을 무턱대고 따라갈것이 아니라 비록 생산규모는 작더라도 소형화되고 정밀화된 일용기계제품들을 많이 만들어내려는것이였다. 그 첫 단계로 작으면서도 가정들에서 쓰기 편리한 분쇄기 같은것을 만들수 있었다. 녀자들이 절구질과 망질을 하지 않게 하는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와 같은 분쇄기는 수동식으로 제작할수 있고 소형전동기를 설치하여 사용할수 있게 만들수 있다. 이렇게 첫걸음을 떼면 제품의 소형화, 정밀화에 익숙될수 있을것이며 국가지표를 독점적으로 받아물수 있는 수준에도 이를수 있는것이다.

남계수는 힘들어도 이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혼자서라도 짬짬이 합금로를 꾸릴수 있는 자재들과 절삭공구들을 모아들이였고 제손으로 앞으로 생산하려는 제품들의 도면을 작성하여 서류함에 보관해두고있었다.

자칫하면 공장을 떠나야 할 자기인지도 모르기에 남계수는 지금까지 생각해온것들을 기사장에게 물려주기로 마음먹고 그 준비에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였다. 정시홍이 자기의 구상대로 공장을 변모시켜줄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니 마음의 평온을 찾을수 있었다.

망국의 수난을 가셔내고 민족재생의 서광이 비껴오던 그 기슭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가. 인생의 새길을 찾은 눈물겨운 기쁨도 맛보았다.

적산으로 취급당했던 철공소가 다시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하자 남계수는 시국형편을 알자고 평양에 올라갔었다. 누이네가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했던것이다.

그는 이제 맞아줄 누이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터밭에서 가을남새를 솎던가 물레앞에 앉아있을것이다. 성미가 올곧은 남순진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라지만 눈에 거슬리는 행동거지를 보면 참지 못했다. 녀학교를 다니던 그는 자주 남계수의 공부를 가르치군 했는데 졸면 엄동에도 찬물을 떠다놓으며 막무가내로 세수를 시켰다. 지금도 뼈속까지 스며들던 찬 기운을 떠올릴 때면 몸서리를 치군 한다.

《사람은 배고프다고 남의걸 넘겨다보지 말구 먹는 자리에 앉을 땐 눈치가 밝아야 한다. 친지들사이엔 의리를 버리지 말아야 하고 돈에 눈을 밝히면 일생을 그르친다는걸 명심해야 해. 알았니?》

귀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셔대며 누이의 집 대문앞에 이른 남계수는 고삭은 지붕갓을 흘겨보고나서 대문을 밀었다.

젠장, 귀청 꿰질라. 기름을 바르지 않은 돌쩌귀가 성미 바르지 않은 녀석이 온다고 알리는 소리같아 애꿎은 문짝을 뒤발질로 닫아버렸다. 집안은 조용했다.

《누님 계시우?》

남계수가 큰소리로 찾아대자 마루에 나타나는 사람은 검은테안경을 낀 로정빈의 담담한 모습이다. 조선옷을 입었는데 옥색대님이 눈길을 끌었다.

《오래간만에 오는군. 처남!》

로정빈이 언제나 그러하듯 조용한 어조로 반기자 남계수는 누이의 마중을 받지 않는게 다행이라 제꺽 인사를 차렸다.

《안녕하셨습니까? 낮에 계실 때가 다 있군요.》

이때 등뒤에서 《오늘 왼눈이 가렵다 했더니 함경차사가 우리 집을 다 찾는구나.》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에크, 기어코 나타나는군, 방안에나 들어가 숨이나 돌린 다음에 나올게지. … 속으로 이런 푸념질을 하면서도 남계수는 딴전을 부렸다.

《누님, 편안하셨소?》

《서울장안까지 누비고 다닌다니 실로 쉽지 않아.》

칭찬인지 나무람인지 알수 없는 말에 남계수는 《내 어디 가든 누님 눈밖에서 살 재간이 있나요.》 하고 비위좋게 응수해버리고말았다.

《어서 올라오우. 집에서들은 잘 있겠지?》 하고 로정빈이 친근하게 묻는데 남순진은 돌아보지도 않으며 신발을 벗어내치고 마루에 올라섰다.

로정빈의 안내를 받으며 서재로 리용하는 방에 들어가니 누이가 어느새 초물방석을 놓아주고는 나가려 하기에 제꺽 만류했다.

《빈손 들고 온 사람이기로서니 좀 앉으시라구요. 내 서울 나갔다온 일을 알리리다.》

《나이들면서 늘어나는건 푸접머리다.》

그러거나말거나 남계수는 구일파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하고나서 로정빈에게 물었다.

《해방은 됐다지만 우리 같은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찾아들었수다. 매부가 아니면 철공소까지 적산으로 몰려 잃을번 했으니까요.》

로정빈은 알고있는지 조용히 웃을뿐이고 대답은 누이가 했다.

《사람은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걸 좀 일러주구려. 나라는 놈이 온전한 제정신을 가지고 살았나요, 허 참.》

로정빈이 물었다.

《언제 내려가려나?》

《별로 얻어들을 소리가 없으면 래일은 돌아서렵니다.》

《수일내로 평양에 입성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연설을 하신다니 듣고서 내려가는게 좋을듯 하오.》

남계수는 눈을 번쩍 떴다.

《그게 사실인가요?》

자기가 사는 동해기슭의 항구도시에서도 어느 한시도 민족의 전설적영웅이신 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다.

영명하신 그이께서 조국에 개선하셨단 말이지, 그래, 장군님이시야말로 내 나라, 내 민족을 이끄실 령수이시라는것을 겨레들모두가 굳게 믿고있으며 일구월심 그이만을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내 말을 귀담아듣고 기다려보오.》

《그러지요. 아무렴요. 내 평양바닥에서 동냥을 하면서라도 기다렸다가 장군님의 연설만은 기어이 듣고야 가겠수다.》

《허구한 세월 벌어들인 돈은 어떻게 하구 동냥하겠다니 말도 안된다.》

《그거야 기업을 하는 돈이지 제 배를 채우는건가요, 허허.》

남계수가 이렇게 누이의 집에 자리를 잡고 기다린것이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날 사람바다속에 휘감기다보니 멀리 떨어진 거리긴 했어도 영명하신 일성장군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직접 뵈왔고 그이의 육성을 들을수 있었던것이다.

장군님께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새 조선건설에 적극 이바지하자고 절절히 호소하실 때 그의 두볼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제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한다면 정녕 무엇을 아끼며 주저하겠는가. 그는 애국의 소중한 진리를 새겨주는 위인의 빛발을 보았고 모든 사람들을 가림없이 너그럽게 한품에 안아주는 거대한 우주를 보았다. 그는 그 품에 안겨 영원히 마름을 모르는 바다의 물방울이 되고싶었다. …

자리에서 일어난 남계수는 창문을 열고 산마루를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그가 세상리치를 새로운 눈으로 깨닫고 마음속에 굳게 언약을 새긴 그날은 과연 언제였던가.

 

남계수는 주체48(1959)년 10월 중순 어느날 너무도 뜻밖의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지도하시는 전국지방산업부문 및 생산협동조합열성자대회에 참가하게 된것이였다.

이 회의에서 수령님께서는 지방산업공장들과 생산협동조합들에서 자체의 원료기지를 튼튼히 꾸리고 부단히 기술혁신을 벌리여 생산장비들을 개건하며 생산물의 품종과 생산량을 늘이는 한편 질을 결정적으로 제고하는것과 함께 독립채산제를 옳게 실시하며 낡은 사회에서 물려받은 사상잔재를 뿌리뽑기 위한 투쟁을 심화시킬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더 놀라운 일은 그뒤에 있었다. 회의 쉴참에 어버이수령님께서 모범적인 일군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여 친히 담화를 하시였는데 그 자리에 남계수도 참가하게 되였던것이였다. 경리형태가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된 후 보잘것없는 작은 공장을 맡아가지고 크게 자랑할만 한 일을 한것이 없는 자기로서는 앞에 나설 체면이 없어 그는 뒤자리에 서서 그이를 우러렀다.

수령님께서는 이 자리에는 해방전부터 개인기업을 하였거나 수공업과 상공업을 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시며 허물없이 담배까지 권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오늘은 자신께서도 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누자고 생각했다고 하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 당은 해방후 나라의 경제실태를 깊이 연구한데 기초하여 개인기업과 수공업, 상공업을 낡은 경리형태로 보고 청산한것이 아니라 적극 조장하면서 발전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 그 정책이 옳았는가, 백번 정당했다, 개인기업가들과 수공업자, 상공업자들이 우리 당을 따라 건국사업에 적극 참가하였을뿐아니라 준엄했던 전쟁시기와 전후의 복잡다단한 시기에도 당과 운명을 같이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

남계수는 그이의 고귀한 말씀을 한마디라도 흘릴세라 심장속에 새겼다.

수령님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시였다가 계속 말씀하시였다.

오늘에 와서 어제날의 수공업자들과 상공업자들이 자기의 경력으로 하여 걱정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들이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헤치며 당만을 믿고 따라왔는데 우리 당이 그들을 믿지 못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동무들속에서 얼마나 훌륭한 일군들이 나왔는가, 동무들은 응당 당원으로, 로력혁신자로, 나라의 역군으로 당당히 애국의 대오에 설 자격이 있으며 그럴 권리가 있다. …

장내가 격동으로 몹시 달아오르는 순간 그이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시였다.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면 그런 말은 듣지도 마시오. 나는 동무들을 굳게 믿으며 힘을 합쳐 사회주의를 건설할뿐만아니라 동무들을 공산주의사회에까지 데리고 가겠소!》

참고참아온 만장의 격정이 끝내 폭발하고야말았다.

열광적인 박수와 만세소리가 진감하는 속에 참가자들은 두손을 잡고 깊이 고개를 숙여 그이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으며 너나없이 감동의 눈물들을 삼키면서 하해같은 믿음에 보답할 충정의 결의를 다지였다.

휴식시간이 거의 끝나갈무렵 자리에서 일어서시던 수령님께서 갑자기 우렁우렁하신 목소리로 이렇게 물으시였다.

《여기 남계수동무가 참가했겠는데 어디 있습니까?》

남계수는 자기가 어떻게 그이께로 다가가 인사를 올렸던지 지금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따뜻이 잡아주시는 수령님의 자애로운 손길에서 일생토록 받아보지 못한 어버이의 사랑을 한순간에 느끼면서도 변변한 대답조차 올리지 못했다. 한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였기때문이였다.

《남동무, 내가 일이 너무도 바빠서 동무를 오늘에야 만나는구만. 전쟁시기 전선원호에 앞장선 동무의 소행을 보고받고도 시간을 내지 못했소.》

수령님!…》

남계수는 한 일 없는 자기 같은 인간의 작은 일까지 헤아려주시는 다심하신 그이앞에 이 한마디밖에 아뢸수가 없었다.

《동무가 자기 수중에 있는 자산을 공장설립에 다 바쳤다는 사실도 알고있소. 누구나 쉽게 내리기 어려운 용단인데 동무는 자신을 이겨냈구만. 하하하!》

수령님께서 너무도 무랍없이 대해주시는 바람에 남계수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의 진정을 터놓았다.

수령님, 이 사람은 사실 졸장붑니다. 돈같지 않은 돈을 내놓으면서 무던히 갑잘랐습니다. 막상 결심을 실천하니 속은 후련했습니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개인기업가의 모자를 그냥 쓰고 살기가 싫었던것도 사실입니다.》

남계수의 솔직한 심정토로에 곁에 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수령님께서도 매우 만족해하시며 다정히 어깨를 두드려주시였다.

《동무의 그 성격이 마음에 드오. 나하구 손잡고 우리 인민을 위해 좋은 일을 더 많이 합시다. 망국의 수난과 눈물겨운 가난속에 살아온 우리 인민이 아니오.》

수령님!… 제 오늘의 말씀을 필생의 금언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소, 나는 동무를 믿소!》

수령님의 말씀은 심장의 메아리로 그의 가슴속을 쩡쩡 울려갔다. …

남계수는 깊은 회억속에 잠겨있었다.

얼마나 하늘같은 믿음을 받아안았던가. 그 금언을 하루한시도 잊지 않고 심신을 닦고닦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사람은 자기를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허물투성이나 같은 이 남계수가 제 처지를 망각하고 수양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탓에 발전하는 현실을 따라서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짐이 되고마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행위인가.

그는 참으로 후회막심하였다. 그에게 남은것이 있다면 한가닥의 희망을 성취하고싶은 생각뿐이였다. 마음속으로는 간절한 청원이 흐르고있었다.

그는 조용히 펜을 들었다. 마음속에 고패치는 세찬 격정을 아뢰이려는것이였다.

《… 사람이 나이 오십고개에 이르러 자기를 찾아보며 회오를 맛본다는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배운것이란 해방전 서울에 나가 중학을 마친것이 전부이고 그후부터는 기업병에 미쳐서 마음내키는대로 살아온 저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홀어머니손에서 막 자라고 철이 들어서는 제 마음먹은대로 되는대로 살아온 사람이 이 남계수입니다. 기업에서 수지타산은 할줄 알아도 생산이라는 인간의 로동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주인이 누구인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한개 기업소를 맡은 후로는 생각이 부족하다보니 여러가지 실책을 범하였습니다. 공장이 설립되여 5년이 되도록 로동자들의 로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변변한 대책 하나 세우지 못한것도 지배인인 자신에게 고질적으로 남아있는 낡은 사상관점의 결과입니다. 생산자대중을 일이나 시키는 사람들로 여겨오다나니 전횡이나 같은 독단은 일상적인 사업방법이였고 마음먹은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남의탓처럼 여기는 극단한 주관주의도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은 낡은 사상잔재의 부식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와서야 책임을 진다는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였으며 자기를 스스로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였습니다. 다만 남은 여생을 더는 후회없이 살고싶은 마음뿐입니다. 제가 오늘의 기로에서 청원하고저 하는것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총화지으며 스스로 찾은 삶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 진정이 어떻게 수락되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허물이 많은 자식이라도 부모는 탓하지 않으리라는 응석을 품고 감히 소청을 올립니다. 쉰살이라는 나이에 부끄럽다는것을 모르지 않지만 어머니품에 안겨 새 걸음을 떼고싶은 심정만은 누를길이 없습니다. …》

방송에서는 남성합창으로 《천리마 달린다》가 힘차게 울려나오고있었다. 남계수는 바위처럼 굳어진채로 앉아서 시대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끝없이 이어나갔다.

 

오늘따라 마당에 나와서서 기다리다가 맞아주는 안해가 이상하게 느껴져 남계수는 저으기 긴장해졌다. 학교일로 노상 바쁜데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공장에서 살다싶이 하다가 문뜩 나타나군 하는 존재여서 들어와야 오는가부다 여기는것이 례상사였던것이다.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니요?》

신유정의 목소리는 여느때없이 낮았고 조심스러웠다.

《누님이 오셨어요.》

손아래사람의 집에 웃사람이 오는거야 반갑고 응당한 일이지만 병원에 입원중인 남순진이 나타났다는것이 남계수에게는 례사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일이 없이는 빈 걸음을 하지 않는 누이의 성미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것이였다.

무슨 일인가, 이 나이를 먹도록 만났댔자 차례지는것은 욕이라는것을 체험했기에 겉으로는 별치않은듯 하지만 속에서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병원에 면회라는걸 가보지 않아서 노염을 탔는가. 이젠 나이도 있지 않은가. 아니야, 그런 분풀이라면 좋기나 하지. 노염이라는거야 정에서 나는지라 거기에서 생기는 분은 삭이기 쉽지만 다른 일로 화가 동하면 오늘 밤에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길것 같다는 예감을 품고 남계수는 안해와 함께 남순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허- 누님 오셨소?》

비위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니 맞아주는 눈길이 오래간만인데도 선뜩한감을 주었다.

《일이 바빠서 오늘래일 미루다 병원에 못 찾아갔수다.》

신유정도 남순진의 기상이 어려워 마주보지 못하며 마음을 한껏 조이였다.

《잡다하게 찾아오구 가는걸 난 질색하네.》

남순진의 목소리가 대뜸 첫마디부터 핀잔조여서 남계수는 은근히 속이 뒤틀린채 고개를 쳐들고 쓴입만 다시였다.

《평양서 예까진 멀다지만 소문이란 바람같다는걸 알아야지. 이젠 다 늙어버린 로친네로 여기는건 아닌가?》

일상적인 노여움이였으면 했건만 누이의 입에서 료량할 길 없는 말마디가 튀여나오자 남계수의 눈이 커지고 곁에 약간 비켜서 앉은 신유정의 어깨가 알릴듯이 떨리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나타나 서슬을 뿌리는가. 두눈만 끔쩍거려대며 남계수는 누이를 마뜩지 않게 흘겨봤다.

《무슨 일인지 알아듣게 욕을 하시구려.》

신유정이 남편의 옷자락을 조심히 당기며 자제하라고 한다.

《욕을 하재도 입이 더럽혀질가봐 그런다.》

남계수는 화가 치밀었다.

《당초 그건 무슨 소리요?》

남순진이 앉음새를 고치며 무릎우에 놓았던 손을 바닥에 떨구었다.

저 손에 회초리를 들고 공부를 시키지 않았던가. 엄동설한에 찬물함지에 들여놓고 글을 외우게 하면서도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남계수는 등골으로 소름이 돋는것을 느끼며 눈치를 살폈다.

기막힌 일이다. 나이 쉰고개를 넘긴 부처간을 앉혀놓고 저 손으로 방바닥을 두드려대며 된욕을 퍼부으면 개코망신을 당하는 판이 아닌가.

남순진의 얼굴이 얼핏 신유정에게 돌려지며 약간 가라앉은 소리로 묻는다.

《나한테 뭘 감추고 사는게 없나? 그새 병원에 여러번 와서 낯을 봤는데 얼굴에 낀 구름은 어찌된건가?》

신유정이 놀란 눈길을 쳐들었다. 녀자들의 감각은 류다른것인가부다.

남순진은 이윽고 마주보던 눈길을 접어내리더니 한숨을 내쉬는데 자기로서는 알길없는 말을 대신하는것 같았다.

남계수는 수그러들지 않는 누이의 기상에 필경 사연이 있다는것을 알아채고 애꿎은 턱만 쓸어댔다.

《사람은 솔직해야 되네. 한세상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이쯤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분명 말할 상대들이 아니지.》

남순진은 찾아온 리유를 직방 말하지 못해 속을 끓이고있었다. 그는 원체 눈에 거슬리는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하건만 자기가 알고 온것은 입으로 옮겨놓기가 거북하기 이를데없는것이였다.

병원에서 한달가까이 입원생활이라는걸 해보니 여기서야말로 세상풍문을 다 들을수 있었다. 한다하는 간부들의 앞뒤생활은 물론 일개 상업기관 판매원의 품성까지도 뛰여난 유모아적감각으로 가공되여 화제에 오르는것이다. 바람같이 흘러다니는 랑설속에서 남순진은 오랍동생인 남계수의 희한한 도덕생활을 듣게 되였다. 이웃침대에 자리를 잡은 녀자는 마흔살이나 넘긴듯 한데 말거리를 찾아다니는 전형적인 인물이고 소식통이였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시간엔 이 녀자가 환자들의 수면제나 같았다. 자기는 지구계획위원회에서 일하기때문에 남계수지배인을 잘 알뿐만아니라 자주 만난다면서 생김새와 성격을 주어섬기는데 신통히도 동생이였다. 남계수지배인의 장끼는 자기가 교제한 녀자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것이라고 하여 폭소를 일으켰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남순진은 밤새 뜬눈으로 새웠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병원에 면회오는 신유정의 얼굴에 류달리 눈길이 가서 이렇게저렇게 녀자들이면 말귀를 알아듣고도 남을 소리로 찔러보았지만 후련한 대답이 없어서 속은 점점 더 타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날 입원실에서 오늘 남계수의 안해가 누구의 면회를 온걸 봤다면서 얼마나 바빠맞았으면 녀자가 제 남편이 몰래 만든 딸을 알아보려고 찾아 안 다닌데가 없다는 소리까지 퍼져 참지 못하고 이렇게 나타난것이다.

자기가 들은 소리를 대충 말한 남순진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숙진이 어떤 녀잔가? 과히 귀에 설지는 않겠는데…》

신유정은 낯이 뜨거워나는 자린지라 고개를 숙이고 남계수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견이라도 했는지 듣기가 거북할 정도로 코투레질을 해댔다. 기가 막히는지 고개짓까지 했다.

《왜, 금시초문인가?》

《알아도 너무 잘 아는 녀자가 돼서 그러우다.》

《정이 철철 넘치게 잘 아는 녀잔게구만.》

《이거 화를 돋구지 마오. 사람들을 웃기는 험담은 살아있는 나때문에 생겨났을테지만 세상에 없는 녀자의 깨끗한 얼굴에 때를 입히는게 가슴이 아프외다.》

《그러니 죽은 사람을 놓고 이런 소문이 생겨났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남순진은 제 동생의 말을 부정할수 없기에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오늘은 단단히 신칙을 하리라 벼르고 왔는데 일이 맹랑하게 된것이다.

《허- 나같이 살아온 놈에게야 뒤집어씌운들 할 소리가 없는 험담이외다. 그래서 버선목 뒤집어보이듯 할수도 없는게구요.》

《허어- 괴변이다. 임자가 무슨 딸인가를 찾아다닌다는것도 헛소문인가?》

남순진의 눈길이 마주쳐오자 신유정이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건 제가 체신머리없이…》

《제 서방이 의심쩍었길래 한 걸음이겠지?》

《하도 소문이 잦아들지 않기에… 사실이라면 애를 찾아서 데려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남씨의 피를 받은 자식이 아닙니까.》

남순진은 신유정의 마음이 하도 갸륵하여 고개만 끄덕이다 동생에게 눈길을 돌렸다.

《들었나? 제 처의 성정이 어떤지. 헛눈 팔면 죄된다는걸 알게. 아무리 남자래도 어쩌면 그리두 덜퉁맞은가. 집안에 자식이 몇이구 뭘 먹고 입으며 크는지 알기나 하나? 예로부터 조강지처라고 일러오네. 동생이 그 조강을 입에 넣어보기라도 했나 말이네. 내 말을 새겨듣기나 하나?》

《귀구멍에 신작로를 내구 들으니 걱정마우, 젠장.》

남계수의 편에서 화가 나서 말하자 남순진은 마음이 좀 풀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유정이 밤도 어지간히 깊었는데 쉬고 래일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큰 봉변을 면한 남계수는 안해와 함께 누이를 바래려고 정류소까지 나왔다.

뻐스에 오르는 남순진을 바래고나서 남계수는 중얼거렸다.

《오늘 밤엔 종아리를 맞는줄 알았군.》

신유정은 소리없이 웃으며 따라걸었다. 그도 남순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어지간히 놀랐고 당황했던것이다.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집앞에 이르자 남계수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보, 세상에 안 땐 굴뚝에 연기나는걸 본 일이 있소?》

《예?…》

남계수는 어둠속에서 안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있었다.

《누이앞에선 벼락이 내릴가봐 륙갑을 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일도 아니요.》

《솔직해선가요 아니면 솔직한척 하는건가요?》

남계수는 주숙진을 알게 된 사연에 대해 처음으로 말해주었다. 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그가 숨겨주어 적들에게 붙들리지 않고 한달가까이 녀자의 집에서 숨어산 이야기를 있은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돈을 군기기금헌납금으로 바치면서 보니 녀자의 나이와 꼭같은 32만원이였다는 누구도 모르는 사실을 말할 때에는 목소리마저 갈려났다. 외롭게 홀로 음식장사를 하며 산 녀자가 무엇을 알았기에 그런 마음을 남기였는가.

《내가 솔직하지 못하면 그 녀자를 욕되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오.》

《그런 녀자라면 열명이 더 있대도 탓하지 않겠어요.》

신유정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더는 없소. 이건 사실이요.》

《일없어요. 아무렴, 내 사랑을 대신하겠어요?》

남계수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안해의 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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