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3

 

례년에 없는 왕가물이 들어 사람들의 간장을 애말리던 날씨가 그래도 장마철임을 잊지 않았는지 한줄금의 비를 도시상공에 쏟아버렸는데 오히려 무더위를 더해주는 격이 되였다. 온 거리가 한증탕이 되여버린듯 했다. 건듯 불어오는 바람조차 뜨거웠다.

조선인민군협주단 작곡가인 조혁은 고개를 짓숙인채 뜨거운 폭양속에 터벌터벌 걸음을 놓았다. 구리빛얼굴에서 번들거리는 땀이 가슴팍으로 흘러들며 속내의와 군복까지 화락하니 적셨으나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옆구리에 매달린 전투가방이 맥없이 덜렁거렸다.

정류소에 멈춰서는 무궤도전차에 힐끔 눈길을 던지던 그는 걷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땀에 젖었을망정 차림새만은 구김살없이 깨끗했다. 그래서인지 무궤도전차에 오르내리는 승객들은 산뜻한 군복차림새와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근심에 싸인듯 거무틱틱해보이는 젊은 군관의 얼굴에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인총이 붐비는 평양역사의 계단앞에 이르러서야 조혁은 한숨 돌리며 손바닥으로 목덜미의 땀을 훔쳤다.

퍽 상냥해보이는 안내원에게 만포행렬차가 언제쯤 있는가고 물어보니 세시간후로 예견된다고 알려주었다. 조혁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는 역전공원으로 향했다. 알뜰하게 꾸린 역전공원의 긴 수지의자에 물앉으며 바지주머니를 뒤져 볼품없이 구겨진 편지를 꺼내들었다. 낯익은 글체들이 이지러진 모양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로 그 편지때문이였다. 여의치 못한 가정사정이 제기되여 부모의 의향을 쫓아 다른 대상자를 만나 약혼했다는 이를테면 절교를 선언하는 《이전 애인》의 편지가 빌미가 되여 뜻하지 않은 려행길에 나서게 된것이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저 엉뚱한 장난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편지를 다시 뜯어보았을 때 장난으로만 스칠수 없는 엄연한 진실이 있음을 느끼게 되면서 속이 얼어붙었다. 이미 다른 사람과 약혼했으니 이제는 과거를 좋은 추억으로만 남기자는 낯설어보이는 글자들이 망막을 아프게 찔렀다.

《…전 랭담하게 자기를 돌이켜보는 과정에 사랑과 가정을 너무 경솔하게 대했다는것을 느꼈어요. 경망스러운 련애에 몰두하다가 인생을 파멸시킬수도 있다는걸 뒤늦게야 깨달았어요.

지금의 약혼자는 크게 난데는 없어도 소박하고 진실해서 마음에 든답니다. 그러니 절 깨끗이 잊어주기 바랍니다.》

글줄에서는 랭기마저 풍겼다.

조혁은 뇌수를 휘젓는 울기에 분별을 잃었다. 다짜고짜 실장을 찾아가 출장을 제기했다. 설명순실장은 강계에 그의 애인이 있다는것을 모르지 않는터에 리해는 하면서도 다소 내키지 않아하는 눈빛이였으나 종당에는 승인하고말았다.

그러나 정작 역사를 마주하고나니 자기자신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미 운명적인 선언을 한 처녀에게 무슨 말을 더 할수 있겠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서글픔을? 아니면 배반당한 사내의 분풀이를? 과거에 대한 추억을?…

어찌보면 처녀가 옳은 선택을 했을수도 있다. 창작에 몰두한다면서 편지조차 뜨음하게 보내는 총각을 두고 무슨 생각인들 안했겠는가. 궁극에는 다른 혼처를 바라는 부모의 지청구에 고민을 겪었을것이고 끝내는 그들의 의사를 따랐을것이다. 할지라도 조혁자신이 그처럼 신성시하고 장중보옥처럼 여겨온 사랑을 처녀가 그리도 쉬이 버릴수 있다는것이 좀처럼 리해되지 않았다.

병사시절 눈덮인 랑림산줄기의 깊은 산중에서 우연히 만났던 처녀, 가을철의 꽈리처럼 빨갛게 익어보이던 동그스름한 얼굴, 기타선을 짚어가던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손동작, 산중의 고요와 어울려 가슴을 울렁이던 아름다운 선률…

일년가까이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몇번이나 결심했다가 바쁜 창작사업에 다몰리다나니 끝내 시간을 낼수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안부를 전하는 편지만 한두번 부쳤을뿐인데 때마다 보내오는 처녀의 회답서신에서는 사랑의 입김이 진하게 풍겼었다.

처녀가 보낸 편지들이 다 위선이였는가? 결코 아니였다. 처녀는 음악을 사랑한것처럼 생활을 대했고 자기를 숨길줄 몰랐다. 하지만 결과는 배반으로 끝났다.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가?…

역사앞의 방송선전차에서 공훈합창단의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는 당의 호소를 받들고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투쟁하자는 녀방송원의 호소적인 목소리가 노래소리와 함께 고막을 쳤다.

조혁은 불현듯 심각한 낯색으로 자기를 쳐다보던 그리고 마지못해 출장을 승인하던 실장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일시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분별없이 행동한 자기를 비로소 돌이켜보게 되였다.

지난해 1월 위대한 장군님의 친필서한을 받아안은 군가집단은 이즈음 멸적의 노래포성으로 고난의 행군의 돌파구를 열어나가기 위해 낮에 밤을 이어 맹렬한 전투를 벌리고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조혁자신이 창작한 음악작품이 예술위원회에 제출된 상태였다. 그래서 성정이 부드러운 실장도 그의 출장제기에 불만을 감추지 않았던것이다.

선옥은?… 아직은 믿고싶지 않았다. 처녀가 분명 편지를 보내왔고 또 눈물에 얼룩진 글자뒤에 어떤 말 못할 사연도 은닉되여있는듯 하지만 결단코 부인하고싶었다. 편지를 쪼박쪼박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편지처럼 쪼각난 마음을 달래며 의자에서 성큼 일어섰다.

(당장 전보를 보내자. 그러면 선옥은 거짓이였다고, 한번 놀래본것이라고 회답할것이다.)

조혁은 억지스레 자기를 위안하며 해방산거리에 자리잡은 중앙우편국을 향해 걸음을 다그쳤다. 들어서기 바쁘게 반원을 그린 창구에 대고 전보용지를 요구했다.

《믿지 않겠음. 나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음.》

성급히 휘갈겨쓴 글자를 곱씹어읽다가 아직도 뭔가 부족되는것 같아 또다른 용지를 찾았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인차 떠나겠으니 기다리라고 못박아 또박또박 써넣었다.

우편국앞에서 어지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서야 거리에 나섰다.

지하전동차를 리용하여 인민군협주단청사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난 뒤였다. 점심을 건늬였으나 별로 먹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창작실에 들어서니 설명순실장이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범이 제 소리를 하면 온다구 방금전에 부단장동지와 동무이야기를 한창 나누는데 마침 동무가 들어서는게 창문으로 보이더구만. 어떻게 돌아왔소?》

《암만 생각해도 좀 덤빈것 같습니다.》

《혹시 이 실장을 곡해한건 아니요?》

《지금 작품의 운명문제가 론의되는데 그냥 떠난다는것이…》

조혁의 응대에 설명순은 실눈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돌아서길 잘했소. 그럼 부단장동지에게 예술위원회를 하자고 제기합시다. 준비하오.》

복도에 먼저 나서던 설명순이 뒤를 돌아보며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신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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