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2 장

3

 

리당비서방에서 나온 김선영은 타래치는 돌개바람이 차디찬 눈가루를 달아오른 얼굴에 휘뿌려주자 얼른 솜옷털깃을 펴올렸다.

그리고는 털깃속에 목을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주머니에 두손을 찔러 넣은채 천천히 걸어갔다.

《기사장동문 이번 기회에 자기 검토를 해보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와 긴앞상을 마주하고 앉아있던 박수남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시금 귀가에 울려왔다.

내가 무책임하다구? 비서동문 너무해, 너무하단 말이야.

그는 속이 내려가지 않는듯 입안소리를 했다.

기사장사업을 할 때도 물론 그랬거니와 특히 관리위원장대리사업을 하는 기간 과학기술적인 문제들과 행정경제사업에서 제기되는 그 복잡한 문제들을 누가 도맡아안고 돌아가며 해제꼈는가?

일부 사람들에게서 이름처럼 《소심하다》느니 《전개력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말은 좀 들었어도 그는 자기가 맡은 일들을 책임적으로, 량심적으로 하느라고 애써왔다.

허연 입김을 거퍼 내불며 걸어가던 그는 그만 비죽이 내돋은 돌부리에 걸채여 허양 눈우에 나자빠지고말았다. 다행히도 주머니에서 날쌔게 빼낸 두손덕에 크게 다친데는 없는것 같았다.

일어서려던 그는 왼다리무릎이 새큰거려 주저앉고말았다.

젠장,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고 담배나 한대 피우고 가자.

후- 하고 한숨을 내불던 그는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김선영의 눈앞에는 정성희박사가 처음 농장을 찾아오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그날 아침 김선영이 관리위원장방 책상앞에 앉아 전화를 받으며 회계장이 들고온 전표들에 일일이 수표를 해주고있는데 두 늙은 녀인이 들어섰다.

앞서들어온 3작업반 농장원의 어머니는 땔감이 떨어져서 왔다고 말했다. 회계장에게 벼겨전표를 떼주라고 말한 그는 뒤따라들어온 수수한 솜옷차림인 낯선 늙은 녀인을 쳐다보았다.

농업과학원 연구사라고 자기소개를 한 늙은 녀인은 기사장을 좀 만나고싶다고 했다.

《내가 기사장입니다.》

《그럼 미생물비료도입과 관련하여 좀 토론하고싶은데요.》

《난 지금 관리위원장대리사업을 하고있는데…》

《그럼 더 좋구만요.》

《그런데 난 지금 군에 회의가야 합니다.》

그는 책상에서 삼면쟈크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후에 다시…》

다음날 연구사가 또 찾아왔다.

《엊저녁에 이 방에서 늦게까지 모임을 하기에… 기사장사업에 관리위원장사업까지 하시느라 정말 힘들겠습니다.》

《이거 새 관리위원장이 빨리 와야지 막 힘에 부칩니다. 그래서 그 미생물비료도입문제 말입니다, 새 관리위원장이 온 다음에 토론해봅시다.》

《예?》

잔주름이 많은 연구사의 눈이 커졌다.

《앞선 과학기술이야 기사장동무가…》

《그건 옳습니다. 우린 지금 종자처리를 류산철로 하고있는데 미생물비료는 아직… 어쨌든 새 관리위원장이 온 다음에 그 문제를 토론합시다.

지금은 내 혼자 결심하기가 힘듭니다.》

그의 이 말에 실망했는지 연구사는 이튿날 효정의 바래움을 받으며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

김선영은 새 관리위원장이 와서 연구사를 다시 데려오자고 했을 때 응당 죄책을 느끼고 평양으로 달려가 그에게 사죄했어야 했다.

그러나 연구사가 나가있던 농장에 가서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움직이겠다는 황당한 구실을 대며 관리위원장이 그를 데려올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위원장동문 기사장동무에게 손잡고 일을 잘해보자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일을 해서야 우리 농장일이 어떻게 잘되여가겠소? 기사장동무야말로 우리 농장에서 앞선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데서 제1선구자, 제1기수가 되여야 할 사람이 아니요. 이번 일을 놓고 생각해보니 기사장동문 책임지기를 꺼려하고 걱정만 하면서 보신주의에 빠져있단 말이요.》

뒤짐을 지고 천천히 방을 거닐던 박수남이 그를 향해 돌아서며 질책과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로 준절하게 타이른 말이였었다.

일군들은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가 제일 수치스럽고 가슴아픈것이다. 한것은 《동문 건달이요.》라는 말을 하기 거북하여 하는 말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김선영은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의 사업에서 무책임한 현상은 한해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농공정인 종자처리와 관련한 문제에서 더욱 우심하게 나타났었다.

한개 농장에서 소출을 최대로 내자면 리에서 해당 설비들을 그쯘히 갖추어놓은 현대적인 종자처리장을 꾸려놓고 통일적인 지휘하에 집체적으로 해야 한다는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농장에서는 오래전부터 물원천을 고려하여 리소재지에서 거리가 먼 9작업반을 비롯하여 몇개 작업반은 자체로 하게 하고 가까운 작업반들만 리에서 집체적으로 하고있었다.

월지령총화모임과 작업반기술원모임에서 정보당알곡수확고를 높이기 위한 방도를 토론할 때마다 열을 올리며 론의되군 한것의 하나가 바로 종자처리를 리에서 통일적인 지휘하에 집체적으로 하자는것이였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러자면 현재의 낡고 협소한 건물을 허물고 새로 현대적인 종자처리장을 지어야 한다, 그 많은 자재와 설비를 어데서 구해오겠는가, 당장은 곤난하니 올해도 종전대로 하자고 굼때는 식으로 말하군 했었다.

그러면서 관리위원회 종자담당기술부원에게 종자처리장들에서 철저히 기술규정과 표준조작법대로 작업하도록 통제를 강화하라고 지시하는것으로 자기 사업을 대치하군 했었다.

이것이 바로 비서가 말한것처럼 당정책을 말로만 접수하고 패배주의에 빠져 우는소리나 하고 집행을 태공한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관리위원장은 말로써가 아니라 제 한몸 내대여 이신작칙하며 군중을 이끌어 현대적인 리종자처리장을 단시일내에 번듯하게 일떠세웠다.

그는 정열가로서 아는것도 많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줄 아는데다 손탁이 드세고 내밀성이 아주 강한 일군이다.

모름지기 그래서 당조직은 그를 우리 농장 관리위원장으로 보냈을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 너무나 젊은 관리위원장을 두고 얼마나 걱정했던가?

《왜 여기 앉아있소? 털모자를 두고 갔더구만. 저녁때가 되면 날씨가 더 맵짜지는데 어서 일어나오.》

박수남이 그의 머리에 털모자를 씌워준 다음 그를 일으켜세워주며 한 말이였다.

《왜, 내가 말해준게 잘 내려가지 않아서 그러오?》

솜옷에 묻은 눈을 털어주는 박수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아닙니다. 비서동무가 아니면 누가 나에게 그런 아픈 매를 들겠습니까.

난 이자 여기 앉아서 자기 검토를 해보았습니다. 확실히 난, 난…》

김선영의 목소리는 저윽 갈리였다.

《가면서 말하기요.》

서로 진심어린 말을 주고받으며 김선영이네 집 뜨락에까지 이른 박수남은 웃으며 왔던김에 장기나 한판 두고 가자고 말했다.

장기라면 오금을 못쓰는 김선영은 그를 앞세우고 방안에 들어서자바람으로 웃방에 올라가서 장기판과 장기쪽주머니를 가지고 내려왔다.

박수남은 장기판을 가운데 놓고 그와 마주앉아 장기쪽들을 제자리에 가져다놓으며 효정이가 지금 몇살인가고 넌지시 물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장기쪽들을 제자리에 가져다놓던 김선영은 올해 잡혀 스물여섯살이라고 대답했다.

《음, 시집갈 나이가 됐군요. 그래서 그 애한테 눈독을 들이고있는 총각들이 줄을 섰구만요.》

《무슨 롱담을 하는겁니까? 요즘 농촌에선 처녀들 스물넷이면 다 시집가는데 우리 애만…》

김선영은 허거픈 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오? 오늘도 끌끌한 제대군인청년이 리당에 찾아왔댔소.》

입에 문 담배대에 라이터불을 켜면서도 눈은 줄곧 장기판에만 팔고있던 김선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혼사라는거야 소개자를 내세워 집어른들이 서로 오가며 맺는건데 그 청년이 리당엔 왜요?》

《기사장동문 역시 생활에서도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만.

요즘은 대체로 처녀총각들이 련애결혼을 한단 말이요. 그 제대군인청년은 군사복무기간에 이미 효정을 알고있었고 이번에도 직접 만나보았다더군요.

그런데 효정이 자긴 그 누구의 동정도 받고싶지 않다면서 일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딱 잡아뗐다는거요.》

김선영은 《그래요?》하고 외마디소리만 질렀다.

《그래서 당조직의 방조를 받고싶어 리당에 찾아왔댔소.》

《그래서요?》

김선영은 호기심이 짙게 비낀 목소리로 다우쳐물었다.

《그래서 내가 동문 우리 효정일 데려가려고 하는가, 아니면 여기 와서 함께 살며 농사를 짓자고 하는가고 물었소. 그랬더니 그 청년은 자긴 효정일 업고 가서 꽃방석에 앉혀놓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으려 한다고 대답하더군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피를 바친 영예군인처녀는 그런 대접을 받을만 한 당당한 자격이 있다면서 말이요.》

《거 정말 쉽지 않은 제대군인청년이군요.》

김선영은 뜨거운것을 삼키며 탄복하여마지않았다.

《정말 훌륭한 청년이더군요.

위대한 장군님께서 나의 아들딸들이라고 제일로 사랑하며 내세워주시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사상정신세계가 높다는건 좋은 일이지요.

자, 먼저 떼우. 오늘은 절대로 물리지 못하오.》

《물리다니요, 누가 할 소릴… 자, 내가 먼저 떼지요.》

김선영은 《말》을 《딱.》 소리가 나게 옮겨놓으면서도 궁금증을 누를수가 없어 그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하라고 재촉했다.

《참, 사람두. 아깐 내가 효정이 혼사문젤 꺼냈는데도 시답지 않아하더니… 하긴 부모치고 다 자란 자식 장래문제를 놓고 마음쓰지 않는 부모가 어데 있겠소.》

박수남은 김선영이 안타까울 정도로 담배를 피워물면서 뒤말을 늦잡더니 얼굴에 밝은 웃음을 띄우며 계속했다.

《난 농장당조직책임자로서 그 청년에게 우리 효정이가 동무의 청혼을 왜 받아들일수 없었겠는가를 좀더 깊이 생각해보라고 했지요. 물론 제 처지를 생각해서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보다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거룩한 발자취가 뜨겁게 어려있는 이 고향땅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이 동무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렬할것이라는 나의 짐작도 참작하면서 말이요.

그랬더니 그 청년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자기는 얼마전에 당에서 부르는 중요한 초소로 탄원하여 그곳에서 일하고있기때문에 여기로 자릴 옮길 형편이 못된다고 사연을 설명하더군요.》

이 순간 김선영은 금시 손에 잡힐듯말듯 하던 고운 새를 놓쳐버린것만 같은 아쉬움에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이새로 내보냈다.

그런 미덕을 지닌 청년을 마다하다니…

너무 되바라진 효정이도 미웠지만 그렇게 돌려보내고만 리당비서도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갑자기 담배맛이 써서 재털이에 불을 꺼버린 그는 어서 장기나 두자며 《말》로 상대편의 《상》을 먹어치웠다.

《아, 그게 아닌데. 그것만 좀 물리기요.》

박수남이 아부재기를 치자 김선영은 물리지 못한다고 말한건 누군데 그러는가며 눈섭을 곤두세웠다.

《왜 낯색이 그렇소? 혹시 나 몰래 소태나무껍질을 씹어삼킨건 아니요? 허허… 너무 상심마시오. 인물 잘나고 마음씨 착한 효정이한텐 앞으로 더 좋은 신랑감이 꼭 나타날거요.》

박수남이 그의 속을 들여다본듯 웃으며 말했다.

《난 요즘 그 애 혼기를 놓칠가봐 속이 타는것도 있지만 보다는 당면한 영농공정추진때문에 더 골치아파 그럽니다. 3작업반 1분조에 좀 나가보십시오. 분조장이 요즘 돌격대대장까지 하다나니 무슨 일 하나 제대로 되는게 있는줄 압니까? 모판바람막이바자도 아직 채 다 치지 못하고있는 형편입니다. 방철갑일 새로 조직되는 보수반반장을 시키겠으면 그 자리에 누구든 빨리 앉혀야 할게 아닙니까.》

김선영은 이미 먹은 상대편의 《상》과 《차》를 재치있는 솜씨로 딱딱 소리가 나게 맞굴리면서 박수남을 면바로 쳐다보았다.

《옳소, 그 비판은 내가 받아들이고 고치겠소. 그런데 리당집행위원인 기사장동문 누굴 그 자리에 앉혔으면 좋겠소? 난 아직 방철갑의 후임을 고르지 못해서 그러오.》

박수남이 그를 마주보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글쎄요. 그거야 위원장동무가 다 생각이 있겠지요 뭐.》

그도 방철갑의 후임에 대해선 생각해본적이 없었으므로 애매한 소리를 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 대한 파악이야 위원장동무나 나보다도 기사장동무가 더 있을텐데…수일내로 맞춤한 사람을 한명 골라서 리당에 제기하오.》

박수남은 장기를 다 두고 돌아갔다.

이래저래 속이 타서 담배만 태우던 김선영은 부엌에서 나는 딸그락 소리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늦도록 어딜 다니오?》

《오늘은 쉬는날인데도 모두 나와서 방철갑이네 돌격대가 종합편의건물 대보수하는 일을 돕더군요. 그래서 나도 거기에…》

마누라가 미안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보수가 아니라 현대화요. 뭘 똑똑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역증어린 말에 안해는 웃으며 부드럽게 응했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오늘은 거기 얼굴도 내밀지 않으셨수? 관리위원장동지랑 리당에서랑 다 나와서 모두 성수가 나서 일합디다.

관리위원장동진 우스개소리로 일판분위기를 돋구고요. 리당비서 아주머닌 국수랑 떡이랑 해가지고 나와 후방사업으로 사람들의 사기를 돋구어주었어요. 쉴참엔 록음기를 틀어놓고 춤판을 벌렸댔는데 모두들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원.》

《당신도 추었소?》

《처녀때 당신과 추던 생각이 나서 나도 춤판에 뛰여들었지요.》

《됐소, 됐소. 효정인 어데 갔소?》

《그 애야 요즘 박사선생한테 가붙어 살지 않아요.》

《가만, 우리 집에 지금 닭알이 몇알이나 있소?》

《그건 왜요?》

《글쎄.》

《둬꾸레미 돼요.》

《그걸 모두 박사선생에게 가져다주오.》

《알겠어요.》

정성희박사에 대한 남편의 태도가 돌변한것이 반가운듯 녀인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피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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