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5 장

2

 

봉국은 폭신한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해빛이 잘 드는 방안에 홀로 앉아있었다. 외국려행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잠시 집에 들렸다가 무역성으로 나갔다. 그간의 사업정형을 보고하러 간다고 하였다. 방안은 고요했다. 봉국은 비행장에서부터 시내로 들어오는 동안 내처 얼굴이 흐려져있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난날에는 외국려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유럽의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들과 세계시장에 새로 내놓은 최신기술제품들에 대하여 즐겨 말해주군 하던 어머니였다. 그러면 아직 가보지 못한 그 세계가 신기루처럼 봉국의 눈앞에 떠오르군 했다. 여러 나라를 돌아보며 세계문명과 접촉하는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할가. 봉국은 현재의 어머니에게서 자신의 래일을 찾았다. 어머니처럼 앞으로 무역일군이 되여야지. 이것은 오늘에 비로소 가슴에 새긴 희망이 아니였다. 오래전부터 머리속에 그려온 포부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외국류학을 하려는것도 경제학자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경제를 아는 무역일군으로 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늘 무엇때문인지 화려한 꿈을 키워주던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먼 려로에 지친듯도 하고 근심에 잠긴듯도 하였다. 그 까닭을 묻고싶었으나 곁에 무역성의 다른 일군이 앉아있었기때문에 그럴수 없었다.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리자 봉국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서 깨여났다. 학급에서 누가 찾아오지 않았을가? 피끗 그런 추측이 떠올랐다. 오늘은 생산실습이 시작되는 첫날인것만큼 학급에서는 결석생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쓸수 있었다. 봉국은 켕기는 마음을 다잡으며 하는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출입문의 창유리너머로 방문객의 얼굴이 보이였다. 예상밖으로 송금석부학부장선생이 찾아왔다. 안도의 숨이 절로 나갔다. 공연히 제발이 저려서 마음을 조인것이 허구프게 생각되였다. 봉국은 반기며 문을 열었다.

《잠들었댔소?》

송금석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봉국은 황황히 대답했다.

《어머니는 계시오?》

《성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인차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송금석은 일순 망설이는듯 하더니 방안으로 들어섰다. 봉국은 그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송금석은 유심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 집에 여러번 걸음을 하였지만 언제나 정인화의 방에 들렸을뿐 봉국의 방에 들어와보기는 처음이다. 류달리 시선을 끄는것은 벽에 걸린 미술작품이였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쑤리꼬브의 작품인 《귀족부인 모로조바》였다. 경찰에 체포되여가는 주인공 모로조바와 그를 동정과 반감의 서로 다른 표정으로 바라보는 군중의 모습이 생동한 필치로 묘사되였다.

《어머니가 쏘련에 갔을 때 선물로 받아온 그림입니다.》

송금석의 시선을 따르던 봉국이가 설명했다. 송금석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쏘련사람들이 정인화에게 쑤리꼬브의 작품을 선물한 까닭이 리해되는듯 했다. 인민의 편에 서서 종교개혁을 지향하여 짜리제도에 항거했던 로씨야녀성의 형상은 조선의 녀성간부에게도 특별한 감명을 주리라고 생각했을것이다.

《모로조바!》

송금석은 저도 모르게 까닭모를 충격을 느끼며 나직이 중얼거리였다. 그림속의 녀주인공의 모습우에 다른 한 로씨야처녀가 솟아올랐던것이다. 그 처녀의 이름도 모로조바였다. 숱많은 금발머리, 파란 눈동자, 크고 상큼한 코날, 얇고 윤기나는 입술, 풍만한 가슴… 잊을수 없는 용모가 생생히 재생되였다. 대학시절에 한학급에서 공부하던 처녀였다. 모로조바는 2학년때부터 송금석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모로조바를 은근히 련모하는 남학생들은 많았다. 남자들의 이목을 끌만큼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런데 그가 송금석을 사랑한것은 학급에 한사람뿐인 동방남자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껴서인지, 혹은 제일 공부를 잘했던 그에게 자기의 장래를 의탁할수 있다고 여겼기때문인지 그것은 알수 없었다. 아무튼 처녀의 사랑은 열렬했다. 송금석의 젊은 가슴은 처녀의 정열에 이끌리여 세차게 타올랐다. 다정히 팔을 끼고 처녀의 따뜻한 체온과 향기로운 체취에 취하여 공원과 거리를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던 나날은 꿈같이 흘렀다. 송금석은 어느날 미술상점에 들려서 첫사랑의 선물로 《귀족부인 모로조바》의 모사화를 샀다.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모로조바에게는 그 그림이 류다른 기쁨을 주리라고 생각했다. 아닌게아니라 그림을 받은 처녀는 감사의 정을 이기지 못해 송금석의 목을 담쑥 껴안고 숨막히도록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이완, 나는 이 그림을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후날에 결혼을 하면 우리 방에 이 그림을 걸어놓자요. 그리고 오늘을 영원히 추억하자요.》

그런데 그 사랑은 졸업을 계기로 깨여지고말았다. 최우등생으로 대학을 졸업한 송금석에게는 모스크바의 어느 대학이나 연구소에 입직할수 있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즈베끼스딴에 있는 조선족 꼴호즈의 경영을 추켜세우는데 자기의 경제지식을 바치려는 결심을 가지였다. 조선사람들로 무어진 그 꼴호즈에는 아버지와 정든 동포들이 있었다. 조선족의 피가 체내에서 끓고있는 이상 자기를 겨레의 집단과 떼여놓을수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신념이였다. 조상대대로 물려오는 인습과 풍습을 고집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이 배운 선진과학으로 온갖 락후하고 진부한 민족적인습과 풍습을 가셔버리고 겨레들을 앞선 민족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것이 그의 지향이였다. 동포들이 있는 꼴호즈로 되돌아가려는 그의 결심은 확고하였다. 그 결심을 듣자 모로조바는 펄쩍 놀라며 모스크바에 남아있기를 애원하였다. 송금석은 그대로 자기와 함께 조선족 꼴호즈로 가자고 설복하였다. 모로조바는 눈물과 한숨속에 동요하던 나머지 결렬을 선언하였다.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던 송금석은 그 선언이 청천벽력같이 들리였다. 이럴수가 있는가? 제쪽에서 먼저 사랑을 고백했고 생활의 어떤 풍파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그 사랑이 변치 않으리라고 몇번이나 다짐하던 모로조바가 아닌가! 운명적인 리해관계가 전면에 나서자 그 모든 약속과 다짐을 저바리는 비렬한 배신자여, 쓰라린 상처를 이 가슴에 안고 떠나는 나는 죽어서도 너를 잊지 않겠다! 그는 남행렬차에 몸을 실으며 이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며칠간의 지루한 려행끝에 우즈베끼스딴의 수도 따슈껜트역에 내리였다. 홈에는 조선족 꼴호즈의 낯익은 사람들이 수십명이나 모여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이슬이 흐르는 생생한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군대에 나가는 젊은이들을 환송하려고 역에 나왔으리라고 송금석은 생각했다. 그런데 홈에 내려서니 그들모두가 자기에게로 몰려오며 그 꽃다발들을 아름이 넘게 안겨주었다.

《반갑네!》

《축하하네!》

《자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온 꼴호즈가 기뻐하네!》

그 축하의 인사말속에는 뜨거운 혈육의 정이 흐르고있었다. 송금석은 사람들의 뒤전에서 대견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팔자로 위엄있게 다스린 코수염을 쓰다듬고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모시두루마기를 입었었다. 오래전에 죽은 어머니가 지어준것이였다. 사람들의 사품에 휩싸였던 송금석은 나중에야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릴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잔등을 쓰다듬으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였다.

《장하다, 이녀석. 과시 배달겨레의 후손답다!》

송금석은 동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꼴호즈의 관리일군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쏘도전쟁이 터지자 전선으로 나갔다. 전쟁기간에 상부의 명령으로 제대된 그는 따슈껜트 어느 단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까지 그는 다른 녀성을 사랑해본적이 없었다. 해방후 조선에 나와서도 오래도록 독신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늦춘것은 첫사랑의 아픔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송금석은 금빛액틀속의 《귀족부인 모로조바》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나를 배반한 모로조바가 아직도 그 그림을 간수하고있을가 하는 야릇한 호기심이 움직였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미련도 가지고있지 않지만 그가 어떻게 사는지는 알고싶었다.

《선생님은 그 그림을 무척 사랑하시는 모양입니다.》

곁에 붙어선 봉국의 말이였다.

《세계적인 명화니까.》

송금석은 스치는 말로 대답했다. 상대가 간격없는 동료였다면 사랑의 행복과 실련의 고통이 어떤것인지를 알게 하였던 자기의 첫사랑에 대하여 터놓을수도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제자에게 청춘시절의 성공 못한 사랑에 대하여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밖에서 자동차소리가 나더니 정인화가 들어섰다. 워낙 부한편이던 몸이 더 풍만해진듯싶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내처 정인화를 기다려온 송금석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인사를 했다. 쎄브기관지에 원고를 보낸 후로는 매일같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터였다.

《제 원고가 어떻게 처리되였습니까?》

송금석은 마주앉기가 바쁘게 물었다. 제일부터 묻는것이 례절에 어긋나는듯 했으나 위선적인 틀과 거짓을 싫어하는 그는 마음속 그대로 털어놓는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인화는 초조감을 드러내는 송금석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원고는 부탁대로 쎄브기관지에 정확히 전했습니다. 편집원들의 말이 최근 조선의 경제학자가 쎄브기관지에 기고하기는 처음이라더군요. 편집부에서 돌려보고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총장선생의 소개신도 전했습니까?》

《전했어요. 선생의 원고는 틀림없이 실릴겁니다.》

송금석은 느닷없이 가슴이 설레였다. 만일 모로조바가 지면에 발표된 나의 론문을 읽게 된다면?… 경제학전문가인 그 녀자는 어데서 무엇을 하든지 쎄브기관지를 읽을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청춘시절에 얼마나 재능있는 청년을 배신했는가를 깨닫게 될것이다. 그리고 겨레와 자신을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해 사랑마저 희생시킬줄 아는 조선사람의 의지를 두고 다시금 생각할것이다.

《송선생.》

한순간 그런 환상에 잠겼던 송금석은 정인화의 부름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웃음이 가셔진 정인화의 얼굴에 까닭모를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송금석은 달라지는 그의 낯빛을 이상스레 여기며 말없는 시선으로 뒤를 재촉하였다.

《송선생의 승인없이 그렇게 할수가 없었으니 말이지 나는 그 원고를 쎄브기관지에 주지 말가 하는 생각도 했댔어요.》

《아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송금석은 의혹이 어린 눈을 슴벅거리였다.

《나는 이번 걸음에 심각한 충격을 받게 되였어요.》

정인화는 자기 상념에 잠겨 말을 멈추고 이윽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도록 그렇게 앉아있던 정인화가 뒤말을 기다리는 송금석의 눈길을 느꼈는지 머리를 돌리였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인화는 강선제강소의 압연롤을 사오려고 쏘련의 경제일군들을 만났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줄잡아도 1년후에야 제품을 보장해주겠다고 하였고 값도 국제시장에서보다 비싸게 불렀다. 그런 조건으로 계약을 맺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쎄브에 의뢰해보기로 하였다. 쎄브에서는 만족스럽게 무역계약을 교섭해주리라고 믿었다. 과연 정인화의 제기를 받은 쎄브의 한 일군은 힘껏 노력해주겠다고 하였다. 며칠후에 정인화를 찾은 그는 두루 알아보았는데 마침 즉시에 보내줄수 있는 압연롤이 있다고 하였다. 정인화는 수행했던 전문가를 데리고 쎄브의 일군을 따라서 제품이 있다는 제강소에 가보았다. 압연롤을 살펴본 전문가는 그것이 그 나라 제강소에서 설비를 갱신하고 페기해버린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상대측에서는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이 비싼 값을 받으려고 하였다. 쎄브의 일군을 믿고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말해준것이 커다란 실책이였다. 상대는 우리가 압연기를 조만간 멈추게 되였으니 낡은 제품이라도 비싼 값으로 사가지 않을수 없을것이라고 타산했던것이다.

정인화는 참을수 없는 모욕에 분개하며 돌아서버렸다. 려관방에서 실망과 배신감에 모대기던 저녁에 그는 자기의 가방속에 《로동신문》이 들어있다는것을 상기했다. 그 신문을 발견한것은 조국을 떠난 다음날 아침이였다. 가방속에서 세면도구를 꺼내려다가 난데없는 신문이 들어있는것을 보고 이상스레 여겼었다. 누가 넣었을가? 의심쩍은 눈으로 신문을 펼쳐보니 첫면 웃단의 공백에 《정경과 1학년 1반》이라고 급히 휘갈겨쓴 글발이 있었다. 신문을 배포할 때 취급자가 쓴것이 분명했다. 그 학급 학생들이 보던 신문이라면 떠나던 날 집에 들렸던 선희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선희는 무엇때문에 이 신문을 내 가방속에 넣었을가?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야 알수 없었다. 아무튼 딴 사람이 아닌 선희가 넣어준것이여서 그냥 간수해두었다. 그 뜻은 알수 없으나 무엇인가 조국을 떠나온 자기에게 보내는 선희의 갸륵한 마음이 깃들어있는듯이 생각되였다. 헌데 이 저녁에는 얼핏 스쳐보았던 그 신문의 사설제목이 떠오르며 선희의 심정이 드디여 짐작되였다.

그는 황황히 가방을 뒤져서 신문을 찾아들고 색연필로 여러 군데 밑줄이 그어진 사설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 당의 자립적민족경제건설로선을 견결히 옹호하자!》 사설제목이 새로운 의미로 안겨왔다. 마치 그 글자들이 종이에서 튀여나와 망막을 뚫고 흐려진 머리속에 박혀들며 뇌장의 세포들에 강렬한 빛발을 뿜어주는듯 하였다.

《그러니 쎄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돌아왔단 말이군요.》

정인화의 이야기를 듣고난 송금석은 의혹짙은 얼굴로 중얼거리였다.

《그래요. 난 이번에 쎄브가 진정으로 사회주의나라들의 경제기술적협조의 리념에 충실하고있는가를 의심하게 되였어요!》

《개별적일군의 소행을 보고 쎄브의 리념자체를 의심해서는 안되지요.》

송금석은 자기의 머리속에 상반되는 감정이 날카롭게 뒤엉키는것을 의식하며 눈을 번쩍였다. 쎄브의 사명과 기능자체는 어디까지나 숭고하고 정당하다는것을 주장하고싶었다. 녀성이란 역시 정인화와 같은 큰 간부에게서조차 개별적현상을 전체의 본질로 보는 사고의 협애성이 없지 않나보다. 하지만 그 개별적현상이 송금석자신에게도 민족적의분을 자아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조선사람을 어떻게 알고 그따위 비렬한짓을 한단 말이냐? 곁에 쎄브의 그 거간군녀석이 있다면 멱살을 거머쥐고 따귀를 후려갈겼을것이다.

《송선생, 나는 이번 걸음에 쎄브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난듯 한 느낌을 안고 돌아왔어요》하고 신음하듯 뇌이던 정인화가 표정을 바꾸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불쾌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점심이나 나누자요.》

송금석은 좀처럼 기분이 밝아지지 않았다. 쎄브에 환멸을 느꼈다는 정인화의 태도도, 쎄브일군이 하였다는짓도 어느것이나 다 차마 그럴수 없는 일을 목격한듯 한 불쾌한 느낌이였다.

이윽고 정인화가 점심상을 들여왔다. 그들은 감미로운 포도주를 몇잔 나누었으나 여전히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

하루실습을 마치고 돌아가던 선희는 봉국의 집에 들리기로 하였다.

첫날부터 생산실습에 빠진 봉국을 두고 동무들은 불만이 많았다. 선희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원망을 누를길 없었다. 어찌하여 그가 점점 그렇게 되여가는지 정말 모를 일이였다. 깊이 생각해보면 워낙 그는 그런 청년이였을것이다. 두루 읽은것이 많아서 세련돼보이는 언행과 무척 넓어보이는 견문의 너울속에 가리워진 그의 본색을 자기가 미처 보지 못하였을것이다. 선희는 입학초기에 봉국에게서 받았던 좋은 인상이 허물어져가는것을 한없이 괴로운 마음으로 의식하였다. 봉국의 일만 아니였다면 오늘은 더없이 즐거운 날이였을것이다. 난생처음 공작기계를 돌려볼 때의 그 흥분은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을상싶었다. 바이트날에서 쇠밥이 돌돌 말리며 깎이워나오는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자기의 의지대로 쇠가 깎인다는게 믿어지질 않았다. 아직은 모든게 신비롭기만 하였다. 그렇게 기쁘고 황홀한 감정에 휩싸였다가도 봉국의 일을 생각하면 어쩔수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봉국의 집앞에 이르자 콩크리트담장이 여느때없이 높아보였다. 선희는 마음을 다잡으며 열려진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록색승용차가 서있는데 마침 봉국이가 그안에 있었다. 조향륜을 잡은것으로 보아 차를 몰고 어데론가 떠나려는 모양이다. 그는 이따금 어머니의 승용차를 자기가 몰고 다니였다. 이쪽을 띄여본 봉국은 차문을 열고 급히 나왔다.

《어떻게 왔소?》

선희는 반갑게 다가오는 봉국이와 말없이 마주섰다.

《내가 오늘 결석을 했다고 담임선생이 가보라고 했소?》

그렇게 짐작하는걸 보니 저도 속이 켕기는 모양이다. 선희는 무겁게 한숨을 쉬고나서 입을 열었다.

《내가 스스로 찾아왔어요, 동무와 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시간이 좀 있겠어요?》

봉국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선희의 쌀쌀한 표정과 랭랭한 어조가 심상치 않았던것이다.

《나는 지금 발레구경을 떠나려던 참이요. 참 잘 왔소. 동무도 함께 갑시다.》

《전 그럴 짬이 없어요.》

봉국은 선희에게 한걸음 더 다가섰다.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는데 무슨 이야기요?》

선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하고싶은 이야기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규정할수 있을가? 묵과할수 없는 그의 결함을 두고 속을 썩이는 애달픈 심정의 토로라고도 할수 있고 그의 새 출발을 간절히 바라는 절절한 호소라고도 할수 있을것이다. 아래입술을 꼭 깨물고 봉국을 잠시 지켜보던 선희가 물었다.

《동무는 오늘 실습에 나오지 않은 자신을 두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싶다는 이야기가 그거요?》

봉국은 히죽이 웃으며 반문했다. 무슨 변이라도 생긴줄 알았더니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심각하게 나온다는 태도였다.

《동무가 무엇때문에 결석을 하였는지는 알고있어요. 물론 외국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를 한시바삐 만나고싶은 동무의 심정도 리해할수있어요. 그러나 실습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만나도 되지 않았을가요? 어저께 학급에서는 이번 실습을 성과적으로 보장할데 대한 모임이 있지 않았나요. 동무는 집단의 결정에 그쯤한 사사로운 욕망마저 복종시킬 각오가 되여있지 않았던가요?》

선희의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하지만 거기엔 듣는 사람의 가슴을 흔드는 애끊는 진정이 있었다. 봉국은 어리둥절했다.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가셔지고 두눈이 초점을 잃고 허둥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선희동무가 그렇게 나올줄은 미처 생각못했소.》

봉국은 선희가 섭섭한듯 상심한 기색으로 중얼거리였다.

《바로 나이기때문에 동무에게 아픈 말을 하는거예요, 알겠어요?》

봉국은 선희의 되알진 말마디들이 총알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듯 하였다. 별치않은 일에 지나치게 흥분한다고 생각되였지만 자기를 두고 안타까와하는 그 심정만은 충분히 리해되였고 가슴이 뭉클한 자극을 주었다.

《미안하오.》

그는 구두코로 땅을 우비며 낯을 붉혔다. 머리를 숙인 귀가에 처녀의 압축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한숨엔 말로써는 다 표현할길 없는 괴로움이 실렸다. 봉국은 그의 마음을 달래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화제를 돌리였다.

《선희동무, 어머니가 동무를 꼭 만나겠다고 했소.》

《어머니가 지금 계시나요?》

선희는 표정을 바꾸며 현관쪽에 시선을 보냈다.

《지금은 없소. 어머니는 가방속에 넣어주었던 신문을 읽었다면서 동무를 여간 고맙게 생각하지 않소.》

《그래요?》

선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맙다고 한것을 보면 그 신문의 사설을 읽고 정인화는 느낀바가 많았던것 같았다.

《나도 래일은 실습장에 나가겠소. 래일 저녁 퇴근을 하다가 어머니를 만나오. 어머니는 동무에게 주려고 값진 만년필도 사왔소. 오늘 저녁은 나와 같이 구경을 가기요.》

봉국이가 선희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선희는 함께 구경을 가고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강심먹은 한걸음의 발자취가 마지막에 와서 허둥댄것으로 찍힐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희는 태연한 낯빛으로 말했다.

《할머니가 앓고계셔서 인츰 집에 가서 저녁을 지어야 해요.》

《그렇다니 할수 없구만.》

봉국은 아쉽게 선희의 손목을 놓았다.

《어서 혼자 가보세요.》

봉국은 차에 오르더니 다시금 정찬 눈길로 선희를 돌아보고 떠나가버렸다. 선희는 자기 집을 향해 걸었다. 봉국의 집을 찾아올 때에는 맵짜게 쏘아붙일 말들을 준비했으나 정작 그를 만나서는 그 몇십분의 일도 터놓지 못했다는것을 깨달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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