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2 장

6

 

선희는 거울앞에 무릎을 깔고 앉아서 머리를 빗고있었다. 명절인데도 방안은 여느때보다 더 조용하였다. 할아버지는 서재에 들어가시더니 도무지 기척이 없다. 요사이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색이 내처 흐려있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통 말이 없었다. 할머니는 아침을 잡수시고 식곤이 오는지 아래목에 누워 잠드시였다.

생의 희열과 부푸는 희망으로 가슴설레이는 선희는 설을 한껏 즐기고싶었다. 어제 밤에 감은 머리카락은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듯 손맛이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빗살을 깊이 박고 가리마를 탔다. 머리카락에 가리웠던 얼굴이 거울속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부드러운 선이 곱게 휘여내린 갸름한 얼굴에는 한창 피여나는 처녀의 생기가 흘러넘쳤다. 버들잎같은 눈섭밑에서 잔잔히 빛나는 눈은 황홀한 그 무엇을 그려보는듯 했다. 선희는 빗질을 서둘러 끝냈다. 그는 봉국이와 예술극장앞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여있었다. 봉국이와 각별히 다정한 사이로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대학입학시험을 칠 때 그들은 잇달린 수험번호를 받게 되였다. 선희는 157번이였고 봉국은 158번이였다. 그러다보니 한책상을 마주하고 나란히 앉게 되였다. 둘 다 평양시에서 추천되여왔지만 서로 다른 고중을 다닌 그들은 전에는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감히 마주보지도 못했다. 대학에 입학을 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엄숙한 감정이 어색한 기분을 곧 지워버렸다. 첫날시험이 끝났을 때 그들은 벌써 무랍없는 사이가 되여서 서로의 답안을 맞추어보고 둘 다 시험을 잘 쳤다고 함께 기뻐하였다.

입학시험결과가 발표되던 날이였다. 대학청사의 앞벽에 합격자들의 수험번호가 나붙었다. 그앞에 모여 설레는 학생들속에서 한숨과 환성이 엇갈리며 터져올랐다. 선희도 제 이름을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키가 큰 남학생들이 몇겹으로 막아서서 아무리 키돋움을 해도 볼수가 없었다. 하는수없이 뒤전에서 서성거리며 가슴을 조이였다. 그때 뒤설레는 학생들의 사품을 헤집고 봉국이가 나왔다. 맨 앞에서 이미 광고를 보고 나오는것이 분명했다. 땀에 뜬 그의 얼굴은 환희로 빛났다. 선희는 다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붙었어요?》

《붙었소!》

《내 수험번호는?》

《157번과 158번, 우린 둘 다 합격했소!》

《똑똑히 보았어요?》

《물론.》

선희는 숨이 칵 막히면서 온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듯 한 환각을 느꼈다. 형언 못할 기쁨에 휩싸였다. 잠시후 진정을 했을 때 그는 자기와 봉국이가 두손을 맞잡고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입학후에도 그들은 입학시험때처럼 한책상에 앉게 되였다. 봉국은 무척 친절하고 다정하게 선희를 대하였다. 선희는 그의 다정한 속삭임에 접하면 가슴이 잔잔히 설레이였다. 하지만 때때로 자기의 그러한 감정에 두려움을 느끼였다. 할아버지는 첫 등교를 하는 날 아침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남과 같이 잠자고 남과 같이 생활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은 도저히 과학의 상상봉에 오를수 없다. 과학탐구는 게으름과 유혹을 허용하지 않고 완강한 노력과 의지를 요구하는 법이다. 이를 명심하여라.》

선희는 할아버지의 다심한 그 훈계를 명심하려고 애썼다. 학문탐구에 전심을 하여야 할 자기가 벌써부터 남동무와의 교제에 시간과 정열을 랑비하여서는 안되였다. 그는 봉국이와의 관계가 우정의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최근에 와서는 봉국을 되도록 덤덤히 대하려고 애썼으며 단둘이 있게 될 경우가 생기면 의식적으로 피하였다. 그가 함께 영화구경이나 연극관람을 하자고 하여도 적당한 구실을 대고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봉국은 그저께 또다시 설날 아침 9시경에 예술극장앞에서 만나 발레극 《백조의 호수》를 함께 보자고 하였다. 선희는 한참이나 생각을 굴리던 끝에 그의 요구에 응하기로 하였다. 이번까지 거절하기도 딱하였고 설을 그와 함께 쇠고싶은 욕망도 있었다.

머리단장을 끝낸 선희는 외투를 입고 거리에 나섰다. 며칠동안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한결 풀리여서 겨울날씨치고는 퍽 온화했다. 거리는 명절차림을 한 사람들로 흥성거리였다. 예술극장앞에 이르니 봉국이가 벌써 와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짧게 대답한 봉국은 극장벽에 써붙인 공연시간을 눈으로 가리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명절이여서 오늘은 오전에도 공연을 하는줄 알았는데 오후 2시부터 공연을 하누만.》

선희는 재고 또 재서 온 길인데 공연을 하지 않는다니 저으기 서운했다.

《선희동무, 발레는 후에 보기로 하고 우리 함께 거리를 걷지 않겠소?》

선희의 눈을 면바로 들여다보는 봉국의 눈에 간절한 빛이 흘렀다. 선희는 그 눈빛에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는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극장앞을 떠나 유보도로 나갔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는 은근한 이야기를 나눌 장소로 적당치 않았다. 그들은 대동강유보도로 꺾어들었다. 유보도에는 여러쌍의 청춘남녀들이 거닐고있었다. 선희와 봉국은 다른 남녀들과 엇갈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한동안 그들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봉국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무는 왜 점점 나를 멀리하오? 깊이 사귀여서는 안될 그런 사람으로 내가 여겨지오?》

괴로움에 짓눌린 목소리였다. 선희는 겁질린 눈을 크게 뜨며 황황히 부정했다.

《아니예요. 그런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왜 나를 멀리하려고 하는거요?》

봉국은 다시금 선희의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처녀의 내심을 기어이 알아내려는듯싶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놀러다니다가 학습에 지장을 받을가봐 겁이 났댔어요.》

선희는 숨김없이 터놓고보니 무거운 부담에서 벗어난듯 하였다. 지금껏 마음을 괴롭히던 번민이 한순간에 사라지는듯싶었다. 그러나 금시 어두워지는 봉국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말했다.

《우리 할아버진 대학시절에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학습에 완강한 노력을 기울일 때에만 성공할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훈계에는 금욕주의적인 진부한것이 있소.)

봉국은 이런 말이 불쑥 혀끝까지 튀여나오는것을 꿀꺽 삼켰다. 선희는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벗어나 무슨 말인가 다정히 속삭이고싶었다.

《오늘 우리가 구경하려던 발레극 〈백조의 호수〉는 어떤 내용인가요?》

《베기체브와 젤쩨르가 대본을 쓰고 유명한 작곡가 챠이꼽스끼가 작곡을 한거지. 1895년에 뻬쩨르부르그에서 처음 공연된 작품인데…》하고 봉국은 조리있게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의 정다운 목소리를 통하여 작품의 줄거리를 듣고있는 선희는 무대우에 펼쳐진 생동한 형상을 보는것 같은 감흥을 느꼈다. 유보도를 걷기 시작한 그들은 어느덧 옥류교를 가까이 하고있었다. 선희는 오랜 시간을 거닐었으나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걸음걸음 봄볕과도 같은 따사로움이 혈관속으로 포근히 스며드는것 같았다.

정오의 고동이 울리였다.

봉국은 놀라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내가 깜박 잊었댔구만.》

갑자기 당황해하는 봉국을 선희는 얼없이 바라보았다. 영문을 알수 없었다.

《오늘 점심에 담임선생님에게 세배하러 가자고 동무들과 약속을 했댔는데 …》

봉국은 난감하여 중얼거리였다.

《언제 그런 약속을 했댔어요?》

《어제 저녁에.》

《그런데 그 약속을 잊고있었단 말이예요?》

선희는 원망스레 물었으나 자기도 커다란 실책을 저지른듯 한 자책을 느꼈다. 필경 자기와 함께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거니는통에 봉국은 그 약속을 까맣게 잊었을것이다. 자기 역시 한심했다. 설을 맞으면서 최정택선생님에게 세배를 하러 갈 생각을 못했던것이다. 얼굴이 뜨거워났다.

《오늘이라도 우리 함께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겠어요?》

《설날에 아무 마련도 없이 빈손으로 어떻게 가겠소.》

《그럼 오후에라도 가자요.》

《오후에는 송금석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오시겠다고 하였소.》

《설날에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지 거꾸로 선생님이 찾아오는 법이 어데 있어요?》

《부학부장선생님은 나를 찾아오는게 아니라 우리 어머니한테 온다오. 그 선생님은 한때 우리 어머니와 함께 무역성에 계셨댔소.》

《그래요. 어쩌면 좋아요.》

선희는 안타깝게 속삭였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것 같았다. 하지만 봉국의 사정때문에 헤여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묵묵히 걷다가 눈인사를 나누고 각기 자기 집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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