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청춘의 길

(한 남조선대학생의 고백)

                                                                                     김 병 훈

(마지막회)

5

 

날은 밝았지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한 형편이였소. 마을에 가자니 이제는 그럴 용기가 없었고 그렇다고 서울로 올라갈 생각도 없구… 그런데 문득 영근이가 강태웅한테 찾아가자는것이였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자한테 가서 뭘 한단 말이요. 그 간악하고 교활한자에게 무엇을 치사스럽게 구걸하며, 또 그자가 그 구걸을 들어주겠소. 그것보다도 눈앞에 그자를 본다면 아마도 난 그냥 배겨낼수가 없을것이 뻔하였소. 그래서 나는 그만두자고 하는데 영근이는 부득부득 우기면서 혼자서 나갔소.

나는 영근이가 나간 뒤에 종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뒤따라나갔소.

멀리 바라보이는 면사무소앞에는 웬 일인지 고급승용차며 찦차들이 대여섯대나 주런이 늘어서있었소. 내가 면사무소에 거의 다가갔을 때 사무소현관문이 열리더니 한무리의 사람들이 쓸어나왔소. 맨앞에는 키가 훤칠한 양키장교를 중심으로 왼편에 약간 떨어져 강태웅이, 오른편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왜놈같이 코수염을 기른 신사가 한명 그리고 그뒤로 양키장교들과 《국방군》장교들, 웬 신사복차림의 사람들이 여라문명이나 떠들어대며 나왔소. 마당에 나서자마자 미군장교가 강태웅과 코수염신사의 어깨를 두손으로 짚으며 뭐이라 지껄이고 껄껄 웃자 모두들 따라서 한바탕 웃어대고나서 차에 갈라탔소. 이윽고 자동차들은 대가리를 들먹거리며 언덕배기를 미끄러 내려오더니 내곁을 지나가는것이였소. 두번째 차에 타고있던 강태웅이는 나를 보자 제법 벙긋이 웃으며 손까지 들어 흔들었소. 나는 그자의 무엇인가 행복에 겨워 벙글거리는 상판대기를 바라보자 울컥 밸굽이 뒤집히였으나 어쩌는 수가 없이 그놈을 쏘아볼뿐이였소. 자동차가 다 지나간 다음에 보니까 영근이가 면사무소현관앞에 우두커니 서있었소.

《단단히 들이댈라구 했네만 웬 놈의 양키놈들과 왜놈들까지 청해다놓구 법석대니 어디…》

영근이는 흘깃 내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소.

《밖으로 나올 때 붙잡고 몇마디 떼니까 나를 이내 한쪽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자기는 실정을 잘 몰랐노라고, 요즈음 개발사업추진때문에, 여기 뭐 큰 광산을 세운다나… 간밤도 새웠대. 그래서 이럭저럭 민생에 주의가 덜 돌렸는데 오늘래일로 일을 아퀴지으면 한번 돌아보고 대책을 세우겠노라고 하데. 흥, 그리구 뻔뻔스럽게 우리들더러 몽매한 농민들에게 국토개발의 유익성에 대해서도 틈틈이 해설해달라고 하더군.》

《그 간교한 자식이 또 무슨 꿍꿍이를?!…》

나는 멀리 사라져가는 자동차들의 동음속에 그 어떤 불길한것을 예감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소.

《좀 둬두고 봅세. 그 작자도 그냥 두면 래년엔 제땅에서 풀밖에 돋아날것 없다는건 알구있데.》

《글쎄, 그러니 양키요, 왜놈까지 끌어다가놓고 하는 그 꿍꿍이속을 누가 아나?》

《진석이, 하여튼 우리 일이나 계속하세.》

《그래, 또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약을 한봉지씩 내밀자나?》

《그럼 어쩌자나?》

나의 피발이 선 눈을 감히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영근이는 주섬주섬 왕진가방에다 짐을 챙겨넣는것이였소.

정말 어떻게 하나?… 나도 아무런 방책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소. 그렇다고 가슴이 폭탄같이 금방 툭 터져버릴것 같은 이 상태를 가만히 앉아서 새길수도 없는노릇이였소. 나는 할수없이 그의 뒤를 따라걸었소.

고양리로 들어서는 참에 만성이네 집부터 들렸으나 어둑컴컴한 방안에서는 찬기운만 돌았소. 어디 가서 안해를 찾기나 했는지?…

거기서부터 우리는 또 가가호호 방문하기 시작하였소. 나는 그저 기계적으로 따라다니며 청진기를 대고 무엇인가 병력서에다 긁적거리고 약을 봉지에 싸서 내주고 그리고 일어났소.

나는 감히 사람들의 누렇게 된 얼굴을 마주 바라보질 못했소. 금방 굶어서 어느 시각에 죽을지 모를 이 사람들의 허덕이는 심장에 청진기를 내밀 때, 감히 그 앙상한 갈비뼈우에 손을 대고 두드려 궁근 소리를 들을 때, 그리고 감히 그들앞에 한봉지의 약을 내밀 때 문득 소스라치게 가련하고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발견하며 낯이 확확 달아올라 견딜수가 없었소.

나는 누구를 속이자는건가, 저 사랑하는 겨레들을? 나자신을? 고통에 허덕이는 이 땅을?… 그 귀중한 모두를 다 속이고있는게 아닌가!

아- 과연 이 꼴이 되려고 나는 그토록 간고한 나날을 뚫고 몸부림치며 살아왔던가!

순녀! 그렇지 않소?!

당신도 잘 알다싶이 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지 않았소. 세살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고 그후 어머니는 몇푼의 가산을 팔아 타면기 한대를 사놓고 일군 한사람을 데리고 진종일 솜먼지속에서 돌아갔지. 그러다가 그만 어머님도 끝내 페결핵에 걸리여 3년을 신음하다가 내가 중학에 들어간 그해에 세상을 뜨셨지. 그런데 돌아가신 그날에 세창병원 원장은 집달리를 시켜서 어머님의 치료비라고 하면서 타면기를 실어가고 집에다가는 빨간 딱지를 붙이지 않았댔소.

처음에 나는 앞이 캄캄하여 동생의 손을 마주잡고 울기만 했지. 그때 이웃이던 인정깊은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이 함께 울어주고 힘없는 우리 형제를 도와주고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신세가 된 우리 형제를 당신네 집에 데려다주었지.

나는 그때 이내 입을 앙다물었소. 꼭 성공해보자. 죽기내기를 해서라도 성공해보자. 그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여튼 나는 입을 앙다물고 구두닦기궤짝을 둘러메고 네거리에 나섰소.

처음에는 《구두닦으쇼!》하는 고함소리가 구걸하는 소리같아 목구멍에서 터져나가질 않았지. 그러나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여, 집에서 배를 그러안고 기다릴 동생을 생각하여 눈물을 삼키며 소리를 질렀소.

눈보라 휘몰아치는 네거리에서 호- 호- 입김으로 손가락을 녹이며 솔질을 하던 생각, 흙매닥질을 한 구두를 다 닦아주고 돈을 내라니까 징박은 구두바닥으로 내 이마를 밀어 넘어뜨리던 양키병사들…

그러다가 그후 지금까지 10년 가까운 세월 신문배달을 했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에 시오리, 밤에 시오리 미친놈같이 네거리를 뛰여다니다가 학교나 도서관 같은데 가앉으면 온몸이 땅속에 꺼져들어가는듯이 노긋해지며 잠이 오고, 때로는 강의가 끝난 후 걸상에서 일어나다가 그냥 앞이 캄캄하여 쓰러진적은 몇번이던가!

어느 부자집에서는 신문배달하러 간 나를 도적놈이라고 란장을 쳤소. 그 전날에 도적을 맞혔는데 틀림없이 집이 빈 틈에 내가 왔다가 훔쳐갔다는것이였소.

순녀, 그래도 나는 참아야 했고 이런 말을 사랑하는 당신에게조차 아직 한 일이 없었소. 오직 그날을 위하여, 《성공》하여 나의 리상을 실현할 그날을 위하여 나는 마치 내 몸의 피와 열기와 온갖 인간다운 긍지를 일시 어딘가 깊은 땅속에 묻어둔것처럼 살아야 했소.

순녀, 그러나 이러한 나자신과 관련된 고통이나 모욕이라면 지금이라도 또 참을 용의가 있소. 그러나 그날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히여 허벼대는것은 당신에 대한 생각이였소.

내가 대학입학을 앞두고 입학금때문에 절망에 빠졌을 때 어느날 밤 당신이 문득 희색이 도는 얼굴로 뛰여들어 불쑥 내놓던 한뭉치의 돈… 그러나 어째선가 바르르 떨리던 그 손… 당신은 나를 위하여 제사공장에 몸을 팔고 3년간 계약금을 받아다주었지!…

순녀, 가슴이 터지오. 그래도 당신은 받지 않겠다고 도로 내미는 내 손을 꼭 쥐고 눈물을 흘리며 웃었지.

《일없어요. 이것이 제 행복이예요. 당신이 성공하여 의사가 되고 그렇게도 꿈꾸던대로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면!… 그때 하다못해 나는 간호원이라도 되여 당신을 도우며 당신을 바라볼수만 있대도… 난, 난 행복해요.》

이렇게 속삭이며 웃어주던 순녀! 그러나 그 감옥같은 공장에서 결핵을 만나고 각혈을 하고… 그러면서도 나에게 피묻은 푼전을 아껴 보태준 순녀!

순녀, 무엇을 더 말할수 있겠소. 이렇게 나는 인간의 모든 면모, 모든 귀중한것을 희생하면서 철면피하고 파렴치하게 리상을 성취하려고 아득바득 살아왔건만 정작 숙망하던 그 청진기를 들고 리상을 실현하고저 첫걸음마를 떼자고보니 그것은 희극배우와 같은 시대착오를 범한것이 아니고 무엇이요.

살이 피둥피둥 져서 정력의 소모처를 몰라 온갖 패륜과 향락을 다 저지르던 끝에 그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뒤골목을 찾는 부자년놈들의 《병》을 몰래 봐주고 받은 몇푼을 가지고 이 시골에 내려와 금방 굶어죽어가는 사람에게 약 한봉지를 내미는 내 몰골이 가관이 아니고 무엇이요?!

나는 이러한 자신에 대한 모멸감때문에 모대기면서 영근이의 뒤를 얼없이 따라다니였소.

《영근이, 우리 이 낯간지러운 위선을 그만두세.》

나는 어느 집에선가 치료를 끝내고 길에 나섰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소.

《위선이라니?…》

영근이가 돌아서면서 이렇게 반문하였으나 그 역시 어떤 확고한 신념이 있는 어조는 아니였소.

《굶어죽는 사람에게 청진기를 내대고 약봉지를 주는게 위선이 아닌가!》

내가 격하여 대답하자 영근이도 낯이 벌개지면서 말이 막히여 어물거렸소.

《그럼, 어떻게 하자는건가?》

영근이가 난처한듯이 중얼거렸소.

《어떻게 하자느냐구?》

나두 당황하였소. 그럼 정말 어떻게 한단 말인가?… 희망과 신념이 졸지에 다 무너져버렸으니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우리는 길복판에 서서 황량한 마을과 마을앞의 넓은 벌판을 멍하니 바라볼뿐이였소.

순녀, 그때였소.

《대학생!-》하고 누군가가 뒤에서 다급히 부르면서 달려오는것이였소. 돌아다보니 어제 우리가 치료해드린 그 로인이 허둥거리며 달려오고있었소. 우리는 로인에게로 마주 달려갔소. 로인은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눈물만 흘리고 서있었소.

《젊은이들, 만성이 처가… 목을…》

로인은 목이 메여 말도 제대로 못 이었소.

《뭐, 뭐-라구요?!》

나는 여태껏 가슴속에 차오르던것이 한꺼번에 터지는듯이 부르짖었소. 우리는 로인이 가리키는 뒤산으로 달려올라갔소.

뒤산중턱 마을이 잘 내려다보이는 큰 소나무에 만성의 처는 목을 매달았소. 만성이와 마을사람들이 부랴부랴 몸을 풀어내렸소. 우리는 세밀하게 진찰해보았으나 벌써 며칠전에 죽은 몸이였소.

만성이는 실성한 사람같이 앉아서 죽은 안해의 감지 못한 고요한 눈을 넋없이 바라보고있었소. 마을사람들이 도와서 시체를 묻어주었소. 그리고도 만성이는 물론 마을사람들은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았소. 묘앞에 멍청하고 앉아있던 만성이가 문득 혼자소리처럼 무덤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소.

《읍에 들어갔다가 강태웅네 식모를 만났는데 나흘전에 저 미물같은것이 뭣하려구 강태웅이를 찾아갔더래요. 그 집에서 종살이할 때 태웅에게 갖은 수모를 다 겪은 처지에 뭣하러 그 귀축같은 놈에게!… 하기야 여북해서 갔겠소마는… 그래 강태웅이에게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구원해주십사 하고 애원을 했던 모양이요. 그런데 그 백정같은 놈이 느물느물 웃으면서 하는 말이 <흥, 이제야 와서 비는군. 왜 그때 처녀때 내 말 들어서 씨나 받아주었더라면 팔자가 늘어졌지. 거지같은 녀석 따라가지 말구. 그래 지금이라도 하루밤 수청들어볼 생각 있나? 하하하…>하면서 뜨락이 들썩하게 껄껄거리더라는군요. 그 말에 처는 그만 미친 사람같이 뛰쳐나가더래요.》

이렇게 말하고난 만성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검붉은 독기가 피여오르고 흡뜬 두눈에 불꽃이 튀기 시작하였소. 그는 자리에서 벌떡 뛰쳐일어났소.

《그놈과 결판을 내구말겠다! 음, 이 짐승같은 놈, 네놈을!》

만성이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산아래로 뛰쳐내려갔소.

《으음! 그놈을 당장!…》

이렇게 신음소리같이 웨치면서 젊은 농민 한사람이 만성의 뒤를 따랐소.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가자!》하고 저마다 웨치며 달려내려갔고 우리도 그뒤를 따랐소.

《여보게들, 좀 기다리게. 기다려!-》

누군가 뒤에서 소리치는 바람에 돌아다보니 아까 그 로인이 당황하여 손을 저으며 따라 내려오고있었소.

로인의 말인즉 무턱대고 몰려내려갈것이 아니라 일을 잘 짜서 때를 잡아가지고 들이대자는것이였소.

《땅과 량식을 받아내든가 아니면 그놈과 사생결단을 내든가. 죽기야 매일반이네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바에야 잘 짜가지고 힘을 합쳐야 할게 아닌가!》

만성이와 로인 그리고 아까 그 젊은이 그리고 우리 둘이 강태웅이와의 싸움을 짜는, 말하자면 준비위원으로 지목되였소. 만성이의 얼굴에는 다소 아쉬워하는 빛도 돌았으나 한편 활기가 넘치고 눈은 그냥 번득번득 불타고있었소.

그날 밤 열시가 넘은 때에야 우리는 만성이네 집에서 거사할 의논을 끝냈소.

우리 두사람은 강태웅이의 동태를 정탐하러 읍거리를 향하여 떠났소.

캄캄한 벌판, 찬바람… 그러나 우리 두사람의 온몸은 홧홧 달아오르고 있었소. 읍으로 들어서는 산굽이를 돌자 맞은편 언덕우에 불빛이 환하고 그 불빛속에 뾰족한 양옥지붕이 바라보이였소. 아마 발동기로 전기를 켜는 모양으로 둥둥둥 하는 동음이 소란스레 울리여 온 마을에 퍼졌소. 문득 발걸음을 멈춘 영근이가 내 손목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이발을 갈았소.

《진석이, 저걸 그저!…》

나는 그의 손을 꽉 마주잡았소.

려인숙에 들어서니 마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아직도 일군들이 분주히 부엌으로 드나들고 칼도마 두드리는 소리, 고기볶는 냄새… 눈이 돌 지경이였소.

마당에서 일군들에게 무엇인가 연송 잔소리를 들씌우며 지휘하고있던 주인녀자가 그 징글스러운 금이발을 해죽거리며 마주 달려왔소.

《아이참! 인제들이야 오셔. 참, 발들두 짧으시지. 아까 면장님이 우정 우리 집에 들리셔서 학생들 들어오면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해달란다구 전갈하라 하셨는데…》

《연회라구요?! 그래, 무슨 경사가 나서 연회를 차린답디까?》

나는 밸굽이 뒤틀리는것을 참으면서 물었소.

《아유, 것두 모르셔요. 하기야… 이만저만한 경사겠어요. 그 량반 대통운이 텄지요. 글쎄, 일본량반들한테 땅을 시세보다 다섯곱이나 더 쳐서 받구 몽땅 팔았다우. 이 땅이 태반 강주사껀데 그러니 얼마가 되우?! 게다가 그 값두 일본 <하꾸라이>상품을 배로 실어다가 준다니까 거기서 또 멋들어진 장사를 하구요. 이제 여기엔 일본사람들이 땅깝대기를 벗기구 무슨 큰 로천광산을 세운대요. 아유, 고 녀학생첩년 쨀쨀거리는게 미워서 죽을번 했어. 그저 돈벼락을 뒤집어쓰구 살게 되였다니까! 어휴, 어떤 년의 팔자는…》

《뭐, 뭐라구? 왜놈들에게 땅을 팔아?!》

영근이가 하두 격하여 소리를 질렀소. 나는 가슴속에서 타번지는 불길을 억제하면서 영근이를 보고 눈짓하였소. 그제야 그도 격분을 새기느라고 씨근거리면서 우리들의 골방쪽으로 돌아섰소.

순녀, 강태웅의 정체는 바로 그러하였소. 그놈은 왜놈에게 제땅을 팔아넘기느라고 《국토재건》과 《개발》을 떠벌이고 돌아갔으며 그것을 예견하였기때문에 지난가을 농민들에게서 종곡마저 싹 긁어들였던것이요.

알아보니 그놈은 이삼일내로 계약이 끝나고 돈을 받으면 이 벽촌을 툭툭 털어버리고 서울로 올라가 이른바 박정희의 여당을 만드는 일에 한몫 볼것이며 앞으로 《국회》의원립후보로까지 나설 꿍꿍이라 하오.

더구나 참을수 없는것은 읍에 있는 큰 량곡창고는 그놈의 쌀창고인데 겨레가 굶어죽고있는 판에 창고채로 그 쌀을 몽땅 왜놈들에게 팔아넘겼다는것이요.

꼭대기에서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날도적놈들이 판을 치고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그 리상이나 청진기가 무슨 소용에 닿는 물건짝이겠소. 가물에 터진 메마른 땅을 적셔보겠다고 짜낸 한방울의 눈물과 다를게 뭐요.

이곳 농민들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소. 백주에 저 날도적놈이 양키를 끼고 왜놈에게 땅을 팔아넘겼으니 이 엄동에 먹을것, 입을것도 없이, 설한풍 가릴 추녀밑조차 없이 한지에 내쫓긴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리는 주인녀편네에게 늦게나마 연회에 가봐야겠다고 얼버무려놓고 그 길로 고양리에 되돌아와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주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마을에는 부산부두에서 세사람의 로동자들이 방금 내려와있었소. 고맙게도 이곳의 긴박한 형편을 알고 달려온것이였소. 그들과 다시 계획을 빈틈없이 짜고 이제 들고나갈 투쟁구호도 결정하였소.

우리는 놈들이 연회를 마치고 잠에 들었을 새벽녘에 강태웅이네 집을 둘러싸고 요구조건을 들이댈 작정을 하였소.

《왜놈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땅과 쌀을 내라!》

《군사<정권>은 물러가라!》

《미군 나가라!》

이미 구호판도 다 써놓았고 시간만 되면 온 마을이 떨쳐나서 읍으로 들어갈것이요.

만일 우리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라도 결단을 내고야말 작정이요.

 

×

 

이제 떠나야 할 시각도 멀지 않았는가 보오. 나는 서둘러서 이 편지를 끝내야 하겠소.

순녀, 이리하여 나는 그토록 뼈를 갉아내는듯 한 고난에 가득찬 길을 거쳐 얻으려 하던 리상을 일조에 내던지고 이 준엄한, 앉아서 죽느냐 싸워서 이기느냐, 너냐 우리냐 하는 싸움의 길에 들어섰소.

진리와 벗은 가까운데에 있었소.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라 생활속에 바로 내 힘으로 구원한다고 망상했던 그 겨레들속에 있었소. 이 땅에는 더러운 탁류만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 광명의 날을 향하여 맑은 샘이 솟구치고있었소. 이 암흑의 땅의 밑바닥에 흐르는 모든 샘줄기들을 합치고 모아 하나의 거센 흐름을 이룬다면 우리는 《구악》과 《신악》 그리고 그 죄악을 이 땅에 심어준 양키들을 다 휩쓸어버릴수 있소. 그리고 정말 참다운 행복한 생활을 꾸릴수 있소. 무엇때문에 우리는 밤낮 북녘의 이야기를 환상의 세계로 동경만 해야 하며 우리들자신이 그런 세계를 쟁취할수는 없단 말이요!

나의 리상은 새로운 투쟁의 날개를 달고 퍼덕이며 나래치기 시작하였소. 다시한번 4. 19의 날은 올것이며 그때에 우리는 결코 어중이떠중이한테 우리 피의 대가를 넘겨주지 말고 우리들자신, 만성이나 당신이나 나나 자기의것으로 틀어쥐고야말것이요.

나는 소리소리 높이여 이렇게 웨치고싶소.

겨레들이여! 불모의 이 땅에서 생을 받은 불행한 청춘들이여! 살기가 고통스러울수록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원쑤를 즐겁게 해주지 말라! 죽음을 각오한 다음에야 총칼인들 무서우랴. 모두 일어나 손잡고 싸우자! 후손들에게는 절대로 우리와 같은 운명을, 생지옥을 물려줄수 없다! 청춘이 약동하는 이 동가슴으로 죄악의 아성을 무너뜨리자! 우리의 단결된 힘으로 이 땅에서 미제를 기어이 몰아내고 북과 남의 겨레가 하나로 모여사는 그날을 앞당겨오자! 이것이 오늘 이 땅에서 생을 받은 우리 청춘들의 오직 한가닥 길이다!…

사연은 끝이 없으나 인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는 떠나야겠기에 펜을 놓아야겠소.

사랑하는 순녀, 당신은 내 편지를 읽고 내가 택한 이 길을 잘 리해해주며 함께 걸어주리라 생각하오.

언제 당신과 다시 만날수 있겠는지. 북에서처럼 궁전같은 병원에서 치료비도 받지 않고 사랑하는 겨레들의 장생불로를 위하여 정력껏 일해볼수 있는 행복한 그날은 언제 오며 우리 그날에 서로 만날수 있겠는지…

아니, 반드시 그날은 올것이요. 내가 못 본다면 나의 형제들이, 우리 세대가 못 본다면 우리 후대가 볼것이요.

순녀, 그날을 위하여 싸우기요. 당신이 나를 그처럼 사랑해주었은즉 내가 택한 그 길을 함께 걸어주어야 하오. 만일 눈앞에 둔 이 싸움에서 내게 그 어떤 불행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굴하지 말고 내 뜻을 따라주오.

순녀, 이것이 우리들의 참다운 사랑이며 우리들의 길이요.

그날을 믿소. 다시 만날 때까지…

 

                                                                        1962. 12. 2. 령남에서, 김진석

 

주체52(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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