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청춘의 길

(한 남조선대학생의 고백)

                                                                                     김 병 훈

(제 1 회)

 

 

순녀, 어떻게 지내오?

계절이 바뀌면서 가뜩이나 나빠졌던 몸이 요즈음은 내 걱정까지 겹치여 더 심하지나 않는지… 또 각혈이나 하지 않았는지… 당신의 병조는 더군다나 각혈하기 쉬운 부위에 있어놔서 주야로 마음을 놓을수가 없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당신곁으로 달음쳐가고싶어 가슴이 메여오르지만…

허나 나는 가지 못하오. 그대신에 이 편지를 쓰오. 더군다나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날수 있겠는지? 이 편지가 당신의 손에 들어갈무렵에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되여있을는지? 그것조차 기약할수가 없소.

순녀! 그렇다고 당신은 놀라지를 마오. 그대신 나는 지금까지 갈팡질팡하던 향방없는 오솔길을 버리고 참다운 삶의 길을 찾은것이요. 말하자면 아프고 저리기는 하나 무능력한 나의 량심과 심장을 감싸주고 자기 위안하던 그 보잘것없는 헌 누더기를 활짝 벗기여 노닥노닥 찢어 팽개치고 벌거벗은 량심과 심장을 백주에 그대로 내들고 떳떳이 살아갈 작정이란 말이요.

이제 나는 모든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려 하오. 그러나 무엇부터 쓸가?…

정작 사연을 쓰자니 가슴속에 북받치는 생각을 어떻게 쏟았으면 좋을지 걷잡을수가 없소. …

 

1

 

그날 저녁 어스러지는 서울역의 역홈에서 애타게 흔드는 당신의 손수건을 멀리 뒤에 남기고 떠난 영근이와 나는 두사람이나 겨우 앉을 나무걸상에 세사람씩 비집고 끼여앉아 밤새껏 남쪽으로 달리였소.

나는 역홈의 어스름속에 서있던 당신의 창백한 얼굴이며 눈물이 그렁한 눈동자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수선한 생각에 헤매이다가 새벽녘에야 깜박 잠이 들었소.

《진석이! 진석이!…》

누군가 다급히 흔드는 바람에 소스라쳐 깨여보니 영근이가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에 서있었소.

《진석이, 다 왔어!》

영근이도 방금 깬 모양으로 눈에는 아직 잠기가 가시지 않았소. 차창에는 푸릿한 새벽기운이 어리여있었소. 긴 기적소리가 울리자 창밖으로 신호탑이 휘딱 지나가고 렬차는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였소. 우리는 당황하여 선반에서 짐을 내리였소. 성안까지 가는 렬차를 갈아타려면 한시간나마 다시 기다려야 했소. 아직 겨울의 초입이라지만 동지 가까운 새벽의 추위는 꽤 맵짠편이였소. 일망무제의 무연한 벌판 한복판에 떠있는 외로운 섬같은 이 정거장 역홈에는 새벽녘의 매운 소슬바람만 불고있었소.

더군다나 외투를 걸치지 못한 나는 그 한기가 몹시 몸에 스며들었소. 그래도 우리는 어째선가 대합실에 들어가고싶지가 않았소. 아마 하늘과 땅도 미처 쳐다보고 굽어볼 경황없이 서울의 복새판속에서 삶에 짓쫓겨 살아오다가 이렇게 처음 무연한 벌판을 바라보며 맵짜기는 하나 싱그러운 바람을 쏘이며 마음속에까지도 스며드는듯 한 시골의 한적을 맛보게 되니 우리 두사람은 똑같이 마음속에 그 어떤 여유감을 느꼈던 모양이요.

영근이가 먼저 역홈의 전주대곁에다가 자기의 큰 가방을 털썩 내려놓으면서 나를 쳐다보았소. 나도 말없이 싱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나의 허름한 등산용배낭을 그옆에다 내려놓았소.

우리는 담배를 붙여물고 서서 먼 벌판을 바라보았소. 벌판은 아직도 엷은 어둠속에 잠기여 잠을 덜 깨고있었으나 아득히 먼 벌판끝의 동녘은 희끄무레 틔여오고있었소.

그렇게 한참 서있노라니 문득 먼길을 떠났구나 하는 려수라고 할가, 뭐이라고 할가 그러한 어수선한 생각들이 일시에 가슴속에 차오르는것이였소.

《진석이, 자넨 뭘 그렇게 생각하나?…》

영근이가 느닷없이 고개를 돌리고 이윽히 나를 바라보다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물었소.

《뭘 생각하느냐구?… 뭐 거저 두루… 별생각이 없네. 자넨 그래, 뭘 생각하나?》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되물었소.

《나 말인가?》

《그래…》

영근이는 거의 타들어간 담배를 연거퍼 몇모금 뻐금뻐금 빨았소. 그의 손이 무엇때문인지 좀 떨리고있었소.

《난 말일세, 뭐라고 할가… 기쁨이라고 할가, 불안이라고 할가… 하여튼 이제는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한 리상을 실현하는 첫걸음을 떼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들먹거리게 해서… 마음을 걷잡을수가 없네.》

영근이의 총명하게 생긴 작은 눈이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보았소.

《그래, 자넨 어떤가?》

《글쎄, 난 별로…》

《글쎄라니, 또 그 소린가? 병주고 약주는 위선이라는…》

영근이는 못마땅한듯이 다그쳐대는것이였소. 나는 정작 이렇게 길을 떠나서도 내내 가슴 한구석에서 꾸물거리면서 어디라 없이 초조와 불안을 자아내게 하던 생각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좀 당황하였소.

그렇지만 그때 그보다도 나의 가슴속에 가득차오르는 생각은 영근이와 마찬가지로 만난을 뚫고라도 훌륭한 의사가 되여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리라던 리상의 실현을 눈앞에 보게 된다는 기쁨이였소.

《아니, 뭐 그런것도 아닐세.》

《그럼 좋아. 하지만 진석이, 자넨 매사에 너무 심각해서 탈이야… 그래, 그럼 순녀씨 생각이라도 했나?》

《순녀라구?… 음, 글쎄…》

영근이는 나를 흘깃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먼 벌판을 바라보며 말했소.

《아마 이 썩어빠진 남녘땅에서 순녀같이 참된 처녀 그리고 자네들같이 참다운 사랑을 발견한다는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세. 자넨 순녀를 귀중히 여겨야 하네. 순녀를 위해서라도 자넨 우리의 이번 계획에서 동요할 권리가 없단 말이야.》

영근이가 조용하게 하는 한마디한마디의 말은 내 페부속에까지 스며 드는것 같았소.

순녀, 참으로 그렇소. 우리의 이번 려행은 떠날 때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그대로의 단순한 졸업을 앞둔 마지막실습행각은 아니였소. 더군다나 우리 둘이 따로 떨어져 이렇게 멀리 궁벽한 땅을 찾아 떠난것은 단순히 무의촌들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병걸림사태를 연구하고 치료해주며 보건위생계몽이나 해주려는 목적만은 아니였소. 우리에겐 당신이 들으면 놀랄만 한 큰 계획이 따로 있었다는것을 고백해야겠소. 모든 계획을 다 짜놓고나서 문득 당신을 놀래우고 기쁘게 해주려고 우리는 《음모》했던것이요.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병으로 여의고나서 크면 꼭 의사가 되여 이 세상에서 병으로 죽는 사람을 없이 하겠다던 나의 꿈, 나의 꿈을 들을 때마다 함께 얼굴을 붉히며 흥분해주던 순녀… 팔자에 타고나지 못한 공부를 하느라고 겪은 눈물겨운 나날의 이야기… 이제 와서 이런것들을 새삼스럽게 회상할 필요가 있겠소.

그런데 순녀, 그즈음 나를 괴롭히고 동요시킨것은 영근이 말마따나 결국 나의 리상이라는게 겨레들이 도탄에 빠진 참혹한 이 땅의 현실에서 무능한 지식인이 자기 량심이나 위안해보려는 약주는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적이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나를 괴롭힌것은 졸업장을 받고난 뒤의 전망문제였다는것을 고백해야겠소.

나를 기다리는 병원이 있는가?… 대학졸업장을 들고 어디로 갈것인가?… 눈앞에 정작 졸업이 다가오자 이 생각은 절실한것으로 되여 나의 온몸을 못견디게 달구어대는것이였소.

이렇게 고민하던차에 하루는 영근이가 나를 찾아왔소. 그는 무엇때문엔가 몹시 망설이다가 졸업하구서 보잘것은 없지만 자기 아버지가 남겨놓은 병원에 와서 함께 일해주지 않겠는가라고 떠듬떠듬 의향을 묻는것이였소. 뜻밖의 그의 제의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으나 나는 두마디 대답으로 쾌히 승낙해버렸소.

영근이의 부친은 훌륭한분이였소. 당신도 알다싶이 영근이는 나와 중학때부터 동창이 아니였소! 이따금 그와 함께 병원으로 놀러 간 일이 있었소.

부친은 몸집이 자그마하고 심한 근시라 렌즈알같이 생긴 안경을 끼고 얼핏 보기에는 좀 무뚝뚝하게 생긴 호인이였는데 해종일이라도 지친 기색이 없이 연방 쓸어드는 빈민들을 진찰하고 약을 주고 수술칼로 상처를 째주군 하였소. 얼마간의 자산을 그 일에 깡그리 바쳐버리고 나중에는 거의 파산하게 된 살림집과 함께 작은 병원 하나를 남긴채 재작년에 불의에 뇌출혈로 작고하신 로인이요. 언젠가는 한번 가니까 마침 환자가 뜸해서 신문을 읽고계셨는데 돌연히 신문을 팽개치며 주먹으로 탕하고 책상을 내리쳤소.

《음… 이 인두겁을 쓴 짐승 같은것들이?!…》하며 치를 부르르 떨었소. 흡뜬 두눈에는 분노의 빛이 타오르고있었소.

신문에는 《치료비 없다고 내쫓아 원한의 신음소리 한시간만에 절명!…》

이라는 기사가 실려있었소. 로인은 우리 두사람의 어깨를 두팔로 꽉 그러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세가 왔다고 통탄하더니 이렇게 타일렀소.

《의술이란 인술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것이니 귀천을 가려서는 안되고 더군다나 사리사욕과 공명이 있어서 그것으로 사람의 생명을 롱락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아무때고 벼락을 맞느니라 벼락을!…》

그러한 뜻높은이의 병원을 다시 일으켜세우며 우리의 꿈을 실현한다는것이 어찌 나의 심장을 격동시키지 않았겠소.

영근이와 나는 갖은 계획을 다 짜게 되였소. 그가운데는 당신을 제사 공장에서 데려내다가 우리들의 병원에서 간호원을 시킬 계획도 있었단 말이요. 그것이 얼마나 큰 나의 기쁨이였겠는지는 당신조차도 상상하기 힘들것이요. 당신의 병치료도 할수 있고… 아니, 그보다도 우리가 어려서부터 꿈꾸어온 그 리상을, 비록 그 앞길에 열고개 천굽이 험한 길이 있다한들 둘이 함께 손을 맞잡고 이루어나간다는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소!

그러나 최근에 와서 우리의 계획에는 변동이 생기였소. 처음 계획은 서울에서 성북동에 있는 영근이네 병원을 그대로 쓸 작정이였는데 요즈음에 와서 우리는 령남의 한 벽촌으로 옮기기로 하였던것이요. 평생 가야 약 한봉지, 주사바늘 한번 꿰보지 못하고 인구의 90프로이상이나 만성질환에 걸려 죽어가는 무의면, 무의촌의 겨레들! 이 가슴아픈 소식에 온몸을 괴롭히다가 우리는 끝내 서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소. 그래서 이 실습은 사실 그 자리를 잡기 위한 터닦기를 떠난셈이였소.

그러니 떠날 때의 우리의 기분이라는것은 선구자만이 느낄수 있는 도고하고 긍지에 찬것이였다는것은 말할것도 없소. 더군다나 이 모든 계획을 다 성숙시켜놓고나서 당신에게 고백했을 때에 당신이 기뻐할것을 생각하면 나는 금방 가슴속에서 심장이 튀여나오는듯싶었소.

혼잡하여 숨막히는 차칸에서는 미처 떠오르지 않던 이러한 생각들이 넓은 벌판을 바라보면서 영근이와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차츰 가슴속에 넘쳐나기 시작하는것이였소. 그래서 나는 영근이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소.

《동요라니, 영근이! 우리가 뭐 하루이틀 다져온 계획인가!… 자네나 아버지의 병원을 털어버리고 시골에 내려오는데 서글픈 생각이나 안 들겠는지 걱정일세.》

《허허, 이 친구 되넘겨씌우려드는군그래. 하하하…》

우리는 가슴이 후련하도록 웃었소. 정말이지 가슴속이 시원하게 트이는것 같았소.

(그렇다! 동요라니, 천만의 말씀이다. 외세가 판을 치고 그 앞잡이들의 횡포에 못이겨 도탄속에서 헤매이는 이 땅, 나의 겨레들의 고통을 다만 얼마만큼이라도 덜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을것이며 일생 목숨을 걸고 이 길에서 드팀없이 살리라!)

이런 생각들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치밀어오르는것이였소.

《진석이, …솔직한 말이네만 자네가 말하는 그런 생각이 영 안 드는것도 아니네. 글쎄, 서울을 떠난다는건 대수롭지 않아. 그까짓 나서자란 거리라는것뿐이지 숨막히는 서울거리보다는 이 향촌이 훨씬 기분이 좋네. 하지만 난 지금, 앞으로 농민들이 우리 사업을 리해해주겠는지, 병원을 운영할만 한 힘과 경제력을 우리가 꾸려댈수 있겠는지, 그리고 또 일생을 영영 벽촌에 파묻는다는것이… 여보게, 나약한 생각이라고 비웃지 말게. 하지만 괜찮아, 나도 의지를 굽히지 않으려네. 또 자네와 같은 산전수전 다 겪은 믿음직한 친구도 있으니까…》

영근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러한 말은 나를 감동시켰소.

《여보게, 자네나 나나 막상 처음 걸어보는 이 길에서 왜 그런 불안이 안 생기겠나. 우리 서로 의지하고 힘을 합쳐서 이 길을 뚫고나가세!》

우리는 손을 굳게 마주잡았소. 그러자 우리는 서로의 손을 통해 가슴속깊이에까지 뜨거운 우정이 뭉글뭉글 흘러드는것을 느꼈소.

《여보게, 그럴것없이 이번 실습에서 터를 잡거든 졸업을 기다리지 말구 먼저 병원건물은 팔아버리고 치료시설은 꾸려서 우리 어머니와 순녀씨를 달아서 시골루 내려보내세. 우리가 졸업하구 내려갈 동안 병원살림 꾸리는것도 돌봐주고 또 순녀씬 료양치료도 겸하구…》

영근이는 나의 손을 꼭 잡은채 이렇게 간곡히 말하는것이였소.

《그렇게 한다면야 여북 좋겠나!…》

우리는 역홈에 앉은채 추운줄도,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병원을 꾸릴 방도며 우리들의 병원에 도입할 독특한 치료조직체계며, 자금원천문제 그리고 당면하여 실습기간에 해야 할 위생보건계몽, 조사연구사업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열을 돋구어 론쟁까지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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