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2 장

4

 

최정택은 침대에 누운채 책을 펼쳐들었다. 밀렸던 독서를 설날에 벌충할 심산이였다. 하지만 마음이 산란해지며 첫줄부터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여느때없이 가슴에 서려드는 고독과 애수를 어찌할수 없었다. 방안엔 낮에도 밤에도 가실줄 모르는 정적만이 변함없이 깃들었다. 그 정적이 외로운 처지를 더욱 사무치게 깨우쳐주었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지으며 책을 덮어버렸다. 머리밑에 두손을 찌르고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설명절을 맞아 흥성거리던 평화시절의 자기 집 전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집에는 살틀한 안해가 있었고 귀여운 딸애가 있었다. 다른 집과 똑같이 설날이면 해종일 손님대접을 하였고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멎지 않았었다. 미닫이문을 빠금히 열고 어서 상을 놓으라고 눈짓을 하던 안해의 모습은 얼마나 행복에 겨웠던가. 세배를 온 학생들의 품에서 품으로 옮겨가며 재롱을 부리던 딸애의 웃음소리도 귀에 쟁쟁하고 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민요가락을 뽑아넘기던 안해의 노래소리도 금시 귀가에 들려오는듯 하였다. 하지만 그 모든것은 추억속에만 남아있을뿐이다. 가볍게 머리를 저어 환영을 털어버린 최정택은 현실적인 감각으로 되돌아오자 방금전보다 더 심한 서글픔에 잠겨버리였다.

출입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기척이 났다.

《들어오시오.》

최정택은 고독에서 빠져나오게 된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황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설날 아침에 이렇게 일찌기 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는게 잘 믿어지지 않았다.

조심히 문이 열리면서 김정일동지께서 선선한 표정으로 들어서시였다. 뒤따라 웬 처녀가 들어섰다. 최정택은 튕겨나듯 벌떡 일어섰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모자를 벗어드시고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시였다.

《선생님, 새해를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최정택은 목메인 소리로 답례를 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이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이 아침 찾으셔야 할 사람도 많고 돌봐야 할 일도 많으신 그이께서 자기에게 세배를 하러 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직껏 애수에 시달리던 가슴이 대뜸 밝아졌다.

《우리 동무들이 아직 안 왔댔습니까?》

《아직은… 자, 어서 저기 가 앉읍시다.》

최정택은 그이의 손을 이끌며 서둘렀다.

《선생님, 누가 왔는가 보십시오.》

김정일동지께서는 옆으로 비켜서며 뒤전에 서있는 처녀를 가리키시였다.

최정택은 그이께서 찾아오신것이 너무도 뜻밖이여서 그 처녀에게는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있었다. 그이의 말씀을 듣고서야 처녀쪽에 눈길을 보냈다. 처녀가 앞으로 나서며 소곳이 머리를 숙이였다.

《그새 안녕하셨어요?》

최정택은 그제야 처녀를 알아보았다.

《이게 누군가? 량기옥동무가 아닌가!》

두사람은 상대의 얼굴에서 병사시절의 모습을 확인하려는듯 손을 맞잡고 뚫어지게 마주보았다.

김정일동지께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최정택에게 말씀하시였다.

《이 처녀동무가 명식동무와 전쟁때 함께 싸운 전우랍니다. 명식동무한테서 소식을 듣고 선생님을 찾아왔답니다.》

《아, 그렇군. 명식동무와 기옥동무가 그런 사이였구만!》

최정택은 반가와서 어쩔줄을 몰랐다.

《명식동무가 방학에 이모네 집으로 가면서 아바이를… 아니, 선생님을 설날에 꼭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기옥은 부지불식간에 《아바이》라고 부른것이 쑥스러워서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최정택은 즐겁게 웃었다. 병사시절의 추억을 안고온 그에게서 전처럼 그렇게 불리우고싶기도 하였다.

《그래 동무는 지금 어데서 일하고있소?》

《건설사업소에서 미장을 하고있습니다.》

《참 좋은 일을 하누만. 자, 모두들 앉읍시다.》

최정택은 선자리에서 많은것을 물을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김정일동지와 기옥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외투를 벗어 말코지에 걸고 스스럼없이 침대에 걸터앉으시였다.

최정택은 선채로 서성거리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 식료품상점에 나가서 뭘 좀 사다놓는것인데 합숙에 손님들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껏 가장 귀중히 여겨온 귀빈들한테 명절음식 하나 대접하지 못하고 궁상스런 모양만 보여주는게 가슴아파서 그대로 서있을수가 없었다. 아, 김정일동무가 찾아준 이 자리에 안해와 딸애가 함께 있다면 내 집은 인생의 봄동산으로 되였을것이다. 여보, 당신은 지금 어데 있소, 이 무슨 억울한 일이요?…

최정택은 금시 눈물을 보일것 같아 문쪽으로 돌아섰다.

《내 잠간 밖에 나갔다올테니 그동안 이야기들을 나누시오.》

김정일동지께서 그가 무엇때문에 서두르는지를 짐작하시고 얼른 일어서시였다.

《선생님, 앉아계십시오. 제가 좀 마련해온게 있습니다.》

나들이차림을 하려던 최정택은 얼굴을 붉히며 엉거주춤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손수 식탁을 차리려고 주위를 둘러보시였다. 합숙방에 식탁이 있을리 없었다. 그이의 시선이 책상에 멎었다.

《선생님, 책상을 좀 쓰겠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책꽂이를 내려놓고 책상을 들어다 침대앞에 놓으시였다. 량기옥은 이런 일엔 녀성인 자기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무엇을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난색을 짓고 서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들고오신 가방에서 술병과 통졸임을 꺼내 상우에 놓으시였다. 당과류들과 사과도 있었다. 삽시에 식탁이 챙겨졌다.

《선생님, 앉으십시오.》

상앞에 의자를 끄당겨놓으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미안하고 황송한 마음을 누를길 없어하는 최정택에게 자리를 권하시였다. 최정택은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기옥은 치마폭을 감싸며 조심히 침대에 앉았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맑은 유리잔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술을 따라 최정택교수에게 드리시였다.

《선생님, 새해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렇게 축원하고보니 가슴에 넘치는 심정에 비해서는 너무도 범상한 설인사처럼 생각되시였다. 혈전의 나날에는 병사의 충정심과 량심이 어떤것인가를 보여주며 용감히 싸웠고 오늘에는 교단에서 가족을 잃은 상실의 비애를 이겨가며 누구보다 먼저 주체가 선 새 교과서를 쓴 최정택교수였다. 이처럼 성실하고 훌륭한 스승에게 가장 뜨거운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싶으셨고 새해에는 그가 사생활에서 불행을 가시고 부디 행복하기를 간절히 축복하고싶으시였다.

최정택은 일어서서 김정일동지의 두손에 정성스레 받들린 술잔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가슴도 눈굽도 일시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고맙습니다. 정일동무!》

술잔을 두손에 들고 떨리는 입술에 조심히 가져다댔다. 단숨에 마시고싶었다. 애수와 번민, 고독과 공허가 한잔술에 깡그리 불타버릴것 같았다. 그는 메여오는 목을 열려고 마른침을 삼키고나서 마시기 시작했다. 달고 향기로운 술이 짜릿하게 식도를 자극했다. 따뜻한 정이 대뜸 혈관을 타고 심장에 마쳐들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최정택이 비워놓은 술잔을 기옥의 앞으로 밀어놓으시였다.

《기옥동무도 선생님께 한잔 부으십시오.》

기옥은 얼른 일어서서 자기가 들고온 술병의 마개를 따고 잔에 부었다. 처녀는 군대시절에 배운대로 차렷자세를 취했다. 왼팔은 꼿꼿이 펴 치마옆 혼솔에 붙이고 오른손으로 잔을 추켜들었다. 전선에서 명절을 맞을 때마다 하던 식 그대로였다.

《상등병동지, 새해를 축하합니다.》

처녀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중사동지!》

최정택도 정중한 자세로 술잔을 받아들었다. 전화의 나날에 있었던 잊지 못할 하많은 추억을 깨우쳐주는 축배였다.

이윽고 해묵은 정적이 가셔진 방안에 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즐거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웃음소리가 울리였다. 이야기는 주로 교수와 처녀사이에 오가고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들의 해후담을 조용히 듣고계시였다. 지난날의 부상병과 간호원의 감회가 그이의 흥미를 끌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되여 그때 병사로 싸웠나요?》

전선생활의 기억을 펼쳐가던 끝에 문득 생각난듯이 처녀는 이렇게 물었다. 전쟁시기의 《상등병아바이》가 대학교원이였다는 사실이 아무리 생각해도 사뭇 놀라왔던것이다.

《1차남진때 남해안까지 정치공작을 나갔던 나는 후퇴를 하면서 상부의 승인을 받고 인민군대에 입대하려고 했소. 후퇴를 하는 인민군구분대를 만나서 그런 소원을 말했지만 번번이 뜻을 이를수가 없었소. 지휘관들마다 내가 대학교원이라는것을 알고는 퇴짜를 놓았소. 대학선생님을 병사로 입대시켜 보병총을 메울수는 없다는것이였소. 그런데 하루는 뜻을 이를수 있는 기회가 왔소. 태백산줄기와 소백산줄기가 어울리는 어느 산중이라고 생각되는데 샘터에서 인민군중대가 휴식을 하고있었소. 대오에는 부상병들과 환자들도 있었소. 중대는 그들을 위해 적들의 야전위생차를 습격하고 로획해온 의약품들을 놓고 영어로 된 설명서를 읽을수가 없어서 안타까워하던중이였소. 곁에서 기웃해보던 나는 약품의 설명서들을 번역해주었소. 그때 군인동무들이 어찌나 고마워하던지. … 그들은 나에게 전쟁전에 무슨 일을 하였는가고 물었소. 나는 기어코 입대를 하여야겠다는 속심이 있었던지라 중앙은행에서 사무원으로 있었다고 꾸며댔소. 그랬더니 지휘관이 제쪽에서 먼저 중대의 위생병으로 함께 싸우지 않겠는가고 했소. 그래서 마침내 소원을 풀고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병사로 싸울수 있었소.》

최정택은 흔연한 미소를 짓고 범상한 일처럼 말하였다. 하지만 처녀는 감동어린 두눈을 반짝이며 나직이 탄성을 터치였다.

《그랬댔군요!》

하더니만 문득 생각난듯 밝은 표정으로 되돌아가며 품속에서 종이에 정히 싼것을 꺼내놓았다.

《사단군의소에서 작별할 때 제가 선생님에게 미처 드리지 못한 맹세문이예요.》

《맹세문?》

최정택은 영문을 몰라 무심코 되받아외웠다.

《군단수훈식장에서 선생님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 올리려고 썼던 맹세문입니다. 제가 건사했댔습니다.》

최정택은 서둘러 맹세문을 펼쳐들며 가볍게 부르짖었다.

《그 맹세문이란 말이지?!》

멀리 흘러간 포화의 나날이 다시 이어지는듯싶어 엄숙한 기분에 휩싸였다. 종이는 보풀이 일고 글자들은 퇴색해버렸으나 군데군데 얼룩진 피자국은 뚜렷하였다. 전투장에서 자신이 흘린 피의 흔적이였다.

《그런데 동무가 아직 이걸 간직해두었으니 참 놀라운 일이구만.》

최정택은 맹세문에서 눈길을 돌며 말했다.

《선생님을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는 일생동안 간직해둘 생각이였습니다. 그 맹세문은 저에게 늘 힘을 주군 했답니다. 우리 건설사업소가 대극장을 짓고있던 지난해 봄이였어요. 다른 작업반에서 계획대로 미장작업을 못해서 전반적인 공사에 지장을 주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맹세문을 보여주면서 우리 작업반동무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감격해서 호응해나섰습니다.》

《아무튼 소중히 간수해주어서 고맙소.》

최정택은 잃었던 보물을 다시 찾은듯싶어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이윽고 량기옥은 두분이 할 이야기가 많으리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전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왜 벌써?》

《오후 3시에 대극장에서 동무들과 함께 새해축하공연을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들이 지은 극장에서 하는 공연이여서 꼭 가보고싶었습니다.》

《그렇다니 하는 수가 없구만.》

최정택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량기옥은 김정일동지께와 교수에게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를 바래우고 자리에 도로 앉으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책상우에서 맹세문을 집어드시였다. 위험에 처한 조국을 두고 그가 자각하였던 공민적의무감과 병사의 량심은 얼마나 고결하고 순결하였는가. 맹세문의 글발과 피자욱은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그의 충정을 실물로 보여주고있다. 그 불타는 심장과 피의 맹세가 오늘도 당의 뜻을 받들어 꿋꿋이 살아가도록 추동하고있다.

《방학이 끝나 학급동무들이 돌아오면 이 맹세문에 깃든 사연을 알려주겠습니다. 모두들 감동할것입니다.》

그이께서는 잠시 지켜보던 맹세문에서 눈길을 들며 흥분이 어린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무슨 특별한 이야기라고… 그때 병사들은 다 그랬소. 내가 한 일은 별치 않지만 그 전투에 대해서는 알아둘 점이 있소.》

최정택은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했다.

《그 전투가 그렇게 어렵게 치러진건 교조주의자들탓이였소. 다 알고있는 일이지만 51년 여름에 견고한 진지방어에로 이전할데 대한 최고사령관동지의 방침이 계시였소. 이에 따라 아군부대들은 전반적전선에서 영구갱도를 굴설했소. 그런데 우리 부대의 린접사단 사단장은 다른 나라에서 배워온 이른바 운동전을 고집하면서 갱도전을 하지 않았소. 수훈식장으로 가다가 내가 겪은 그 전투도 무모한 〈운동전〉의 하나였소. 허술한 은페호와 전호에서 적들의 항공타격과 포사격을 당한 그 중대는 놈들의 보병과 접전하기 전에 벌써 적지 않은 희생을 냈소. 그러니 어찌겠소. 병사들은 백병전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소. 병사의 량심을 지켜 죽음을 각오하는 수밖에 없었단 말이요. 최고사령관동지의 가르치심대로 했더라면 아까운 병사들을 잃지 않고도 크게 이길수 있었는데… 교조주의가 병사들을 죽였소. 참 그 교조주의자처럼 남의식으로 싸웠더라면 우린 미제의 대병력과의 싸움에서 이길수 없었을것이고 또 살아남지도 못했을거요. 정일동무도 알겠지만 참 어려웠소. 우리한테 비행기가 제대로 있었소? 땅크가 제대로 있었소? 수령님께서 우리 식 전법을 창시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린 민족적비극을 또 겪을번 했소.》

김정일동지께서는 호흡이 가빠오는듯 한 느낌을 받으며 넥타이매듭을 늘구시였다. 심각한 문제가, 영원히 잊지 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문제가 그 전투의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정택이 세운 위훈이 빛을 잃게 되지는 않을것이다. 다만 교조주의자들에 의하여 빚어진 후과를 최정택과 같은 충실한 병사들이 생명과 피로 보상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일이 통분하시였다.

《선생님의 체험담은 교조주의, 사대주의가 우리 혁명에 어떤 손실을 끼쳤는가를 심각하게 체험하게 하는 산 증거입니다. 선생님이 누구보다먼저 우리 식의 정치경제학교과서를 쓰신 일이 리해가 갑니다.》

그이께서는 뜨거운 눈길로 교수를 바라보시였다.

교조주의, 사대주의의 후과가 어떤것인지를 피로써 체험한 최정택교수였기에 주체를 세울데 대한 당의 의도를 남먼저 받아들였을것이였다.

《물론 그렇기도 하오. 하지만 실지로 날 채찍질한건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세울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강령적인 로작이였소.》

《선생님,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전 이번에 새 교과서를 읽고 얼마나 많은것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벌써 다 읽었구만. 됐소. 오늘은 명절이긴 하지만 날 찾아준 기회에 책에 대한 의견을 좀 주오. 내용이나 서술에서 느낀 점들을 솔직히 말해줄수 없겠소?》

교수는 눈앞에 놓인 술병들을 약간 옆으로 밀어놓으며 책상우에 팔굽을 짚고 그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만일 량기옥이가 없었더라면 진작 교과서에 대한 의견부터 물었을것이다. 늘 시간이 모자라시는 김정일동지한테 아무때고 무작정 틈을 내달라고 할수도 없었다. 오늘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였다.

《제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사회주의정치경제학교과서가 나온것은 참으로 혁신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에 모두 우리의 현실자료를 인용한것도 좋았고 개념과 범주들의 풀이가 리해하기 쉽게 우리 식으로 씌여진 점들도 좋았습니다. 번역교재대신에 선생님의 교과서를 배우게 된것이 정말 기쁨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진정으로 기쁨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교수의 집필성과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싶으신 심정이 앞섰던것이다.

《가만, 내 마음을 미리 한마디 해야 할것 같구만. 앞으로 당의 정책적요구에 맞게 그 교과서를 좀더 훌륭히 완성하는데 정일동무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이요. 나는 정일동무가 누구보다도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의 진수를 깊이 체득하고있다는것을 알고있소. 우리야 교원과 학생이라는 관념을 떠나서 이미 학술문제를 여러번 론의하지 않았소.》

최정택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저되시였다. 실상 교과서를 보고 느낀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성과에 비해 너무도 작은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정일동무, 어서 기탄없이 말하오.》

《선생님이 정 그러시니 교과서를 읽고 아쉽게 생각되는 점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의견을 어디까지나 참고로 해주십시오.》

《그렇게 합시다.》

최정택은 선선히 수긍했지만 얼굴에 벌써부터 진지한 빛을 그리였다.

《어떤 문제들에 대한 분석은 수령님의 사상에 철저히 기초하지 못하다보니 사실과 맞지 않게 전개된것 같았습니다.》

《사실과 맞지 않다니 어서 말해주오. 어서…》

최정택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여러차례 심의를 거치였으나 그런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해온 사람은 없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단정한 자세로 교수의 충분한 리해를 바라며 조용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저는 새 교과서에 명백치 못한 문제들이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의 로작들도 다시 깊이 연구해보고 선행리론도 읽어보았습니다. 례하면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 대한 문제입니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정권문제에 대한 선행리론에서는 제기되지도 않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있어보지도 못한 새형의 정권입니다. 이 정권은 과도기과업을 수행한 프로레타리아독재정권이 아니라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업을 수행한 인민민주주의독재정권이였습니다.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하십니까?》

그이께서는 말씀을 중단하시고 의논조로 물으시였다.

최정택은 얼른 대답을 못하였다.

교과서에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해설하면서 로동계급의 정권형태에 대한 선행리론을 해방직후 우리 나라 현실에 구현한것이라고 하였고 그를 과도기과업을 수행한 프로레타리아독재정권형태에 포함시켰었다. 그런데 방금 그이의 설명을 듣고보니 잘못 서술하였다는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였다. 일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끝까지 그이의 견해를 듣고싶은 생각이 앞서서 대답을 뒤로 미루었다.

《또 무엇이 사실과 맞지 않소? 어느 대목이요?》

《또 한가지, 실례로 농업협동화문제를 들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잘 아시다싶이 선행리론에서는 사회주의공업화를 실현한 다음에야 농업집단화를 실현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당은 이에 구애됨이 없이 기술적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데 대한 방침을 제기하고 빛나게 해결하였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교과서가 서술되였으면 하는 생각도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교과서에는 사회주의농업협동화보다 사회주의공업화문제를 먼저 취급했지.》

최정택은 자탄조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히였다.

《선생님, 제 개인의 소견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실것은 없습니다.》

《아니, 정일동무의 말을 듣고보니 생각되는바가 많소. 교과서의 전반내용을 두고 다시 검토해보아야 하겠소. 또 다른 의견은 없소?》

《저도 수령님의 로작들을 보다 깊이 연구해보고 생각되는 점들을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후에 다시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주오.》

《방학기간이지만 선생님을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정일동무의 귀중한 시간을 턱없이 빼앗는것으로 되지 않을가?》

《그런 말씀은 오히려 제가 선생님께 드려야 할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학급에서 선생님을 찾아와 깨우침을 제일 많이 받는 학생은 저일것입니다.》

최정택은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입가에 따뜻한 웃음을 그리였다.

《선생님, 인제는 교과서 이야기를 그만하고 술이나 드십시오.》

그이께서는 앞으로 교수의 사업성과를 축복하고싶으시여 상우에 놓인채로 있는 술병을 끄당기시였다. 성실하고 재능있는 학자인 최정택교수는 조만간에 정치경제학교과서를 주체가 확고히 선것으로 완성할것이다.

《자, 어서 받으십시오.》

그이께서는 술잔에 넘치도록 부은 술을 조심히 들어 교수에게 드리시였다.

교수는 사양치 않고 받아마시였다.

《오늘은 나에게 참으로 뜻깊은 설날이요.》

그는 끝없이 마음이 밝아지는것을 느끼며 행복에 겨워 말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러한 교수를 보는것이 무등 기쁘시였다.

그이께서는 접시우의 안주를 권하고나서 다시 잔에 술을 따르시였다.

창문으로 흘러드는 해빛이 술잔속에 아롱지며 잠겨들었다. 티없이 맑은 술이 금시 불길이 되여 타오를듯 불그스레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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