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2 장

2

 

오빈우는 송금석의 뒤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책상우에 놓인 잡지를 집어들었다. 자기의 론설이 실린 페지를 찾아 펼치자 느닷없이 가슴이 설레였다. 평소에 국내출판물에 실린 자기의 론설이나 작품을 볼 때와는 어쩐지 감정이 달랐다.

그는 애무어린 시선으로 활자를 더듬기 시작했다. 굳이 읽어볼 필요는 없었다. 정력을 다 기울여 쓴것이여서 매 문장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있었다. 자기의 사상과 지혜를 정확히 표현해준 글자와 부호들이 유정하게 느껴졌다.

(문자는 나의 충실한 노예이다.)

어느 문사가 그런 말을 했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인제는 나이탓으로 기억력이 감퇴되였다. 잘 아는 사람들도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난처한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창조적사고력은 줄지 않았다. 필력은 바야흐로 원숙기를 맞이했다. 이번의 론설이 그러한 자기 성장을 보여준것이다. 그는 피부색이 서로 다른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자기의 론설을 읽고 뜨겁게 공감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들이 만일 로동계급의 국제적위업을 위하여 청춘시절과 장년시절의 첫시기를 다 보낸 자기 오빈우의 경력을 안다면 그 공감이 더욱 클것이다. 일찌기 전문학교시절에 좌익서적들을 탐독한 그는 혁명에 대한 열정을 안고 대중속에 맑스-레닌주의를 보급해보려고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야학방에서 목에 피대를 세우고 《공산당선언》을 해설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리치를 깨닫지 못했다. 실망을 느낀 그는 너무도 뒤떨어진 조국에서는 혁명을 할수 없고 혁명가로서의 자기 성장도 할수 없다는 생각이 짙어갔다. 그러던차에 일제경찰에 체포될 위험이 닥치자 망명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에게는 젊은 안해와 태여난지 두달밖에 안되는 아들애가 있었다. 안해는 아기를 업고 야밤중에 집을 떠나는 남편을 따라 동구밖까지 나왔다. 오빈우는 리별을 서러워하며 울고있는 안해의 어깨에 살틀히 손을 얹었다.

《이제 나라를 찾고 다시 돌아오겠소. 그때까지 기다려주오.》

《언제면 그날이 와요. 언제면?…》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 하는가? 이제 발전된 나라들에서 로동계급의 혁명투쟁이 동시에 일어나 세계혁명이 승리하면 우리 나라는 자연히 해방될것이다. 그러나 전혀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안해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을 리해시킬수는 없었다.

안타까와하던 오빈우는 그저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때든지 왜놈들이 망할 날이 꼭 올테니까 그때면 당신을 잊지 않고 찾아오겠소. 그날까지 나를 기다려주오.》

얼결에 한 말이긴 하지만 진정이 어린듯싶은 그 약속이 안해의 마음을 다소나마 진정시킬수 있었다.

《언제… 까지나 당신을 기다… 리겠어요.》

안해는 흑흑 흐느끼며 가까스로 말을 번졌다.

오빈우는 그 모습이 가슴에 아프게 마쳐드는것을 의식하며 걸음을 뗐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팔로군에 입대하여 전선신문사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모스크바에 있는 제3국제당직속 동방근로자공산대학에 추천되여 공부를 하였다. 그 시절에 맑스-레닌주의를 본격적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였고 쏘련공산당력사를 비롯한 여러 부문의 사회정치학 과목들을 배웠다. 그때에 쏘련의 출판물들에 종종 글을 써냈다. 공부를 잘했을뿐더러 글재간도 있는 그는 동방근로자공산대학에서 제노라하였다. 그리하여 졸업후에는 제3국제당 본부에서 잡지편집을 맡아하였다. 그는 때때로 모스크바의 하늘밑에서 대륙에 덮이는 황혼을 바라보며 짜릿한 향수에 젖어들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만발한 살구꽃과 배꽃이 지붕우를 곱게 장식하던 고향집이 그리워지고 두고온 안해와 아들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청춘시절에 조국인 도이췰란드를 떠난 후로는 줄곧 빠리와 부류쎌, 런던에서 생의 말기까지 혁명활동을 한 맑스의 위대한 생애를 생각하며 가슴에 차오르는 향수를 애써 지워버렸다. 조국에 가보지 못하고 혁명을 위하여 싸우다가 이역의 대지에 묻힌들 무슨 한이 있으랴. 혁명가의 생애란 그런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머리속에서는 슬피 울며 그를 바래워준 안해에 대한 생각도 점차 사라져갔다. 동시에 일제의 강점밑에 신음하는 조국에 대한 생각도 희미해졌다. 그대신 세계무산계급의 마음의 조국은 위대한 쏘련이라는 의식이 생활적감정으로 굳어져갔다. 크레믈리의 붉은별을 바라보면 세계혁명의 앞길을 밝혀주는 광휘로운 빛발의 한가닥이 자기 몸에도 와닿는듯이 느껴졌고 쓰빠스끼종루에서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를 들을 때면 세계혁명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는듯이 느껴졌다. 한평생 그 붉은별을 바라보고 그 종소리를 들으며 살고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 념원을 거역하였다. 오빈우는 30년대 중엽에 제3국제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으로 다시 나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개인적인 념원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을 국제혁명의 리익에 복종시켜야 했다. 중국에 나온 그는 연안에 있는 항일군정대학에서 맑스-레닌주의를 강의했다. 그때에 왕수해를 알게 되였다. 왕수해는 그 대학의 학생이였는데 중년나이에 이르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일찌기 혁명에 참가하여 시련의 길을 걸어온 그는 사랑과 가정의 행복을 단념했던것이다. 군정대학에서는 로동계급의 위업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처녀로 빛나는 한생을 바친 로자 룩셈부르그에 비유하여 그를 《로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역시 비교적 안착된 평화로운 환경에서 학창의 나날이 흘러가자 때늦은 사랑의 갈망이 불타오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는 졸업을 앞둔 어느날 뜻밖에도 오빈우한테서 가슴을 흔드는 열렬한 사랑의 고백을 받자 쾌히 승낙했다. 그리하여 새 가정이 이루어졌다.

8. 15해방과 함께 왕수해를 데리고 귀국을 한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평양에 창설된 당간부양성기관에 배치되여 갓 사업을 시작했던 어느날에 불쑥 본처가 나타났다. 본처는 고생속에 아들애를 키우면서 그때껏 변함없이 남편을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였다. 옛정도 어언간 잊은데다 어느 모로 보나 자기와 아득한 차이를 가진 그가 안해의 명분으로 찾아왔다는게 푼수에 넘치는 일로 생각되여 언짢기도 하였다. 오빈우는 자기에게 이미 새로운 안해가 있다는것을 말하면서 너그러운 리해를 바랐다. 다행히 본처가 직장으로 찾아왔기때문에 왕수해는 이 사실을 몰랐다. 본처는 일이 글렀다는것을 깨닫고 원한과 저주를 안고 되돌아섰다. 오빈우는 얼마동안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인생길을 걸어온 혁명가의 생활로정에서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본처는 그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소식을 들으니 남편을 영영 잃은 그 녀인은 지금껏 살던 고장을 떠나 어데론가 가버렸고 다 자란 아들은 군대에 나갔다고 하였다. 그후에는 그들의 소식을 굳이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추억에서 깨여난 오빈우의 눈길속에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은 국제적이다》라는 론설제목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안겨왔다. 거기에는 국제혁명에 오랜 기간 자기를 바쳐왔다고 생각하는 그의 긍지가 비껴있었다. 그렇다. 이 오빈우는 일찌기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이 국제적임을 자각하고 조국을 떠나 그 위업에 헌신하여왔다. 글이란 필자자신이라고 한 말이 이래서 나왔을것이다. 혹시 이 론설을 다 성장한 아들이 읽을수 있지 않을가? 그녀석은 어떤 감정을 가질가? 짐작하기 어려웠다. 따져보니 아들 나이가 올해 서른하나이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그들 모자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있을가? 지금껏 오래동안 잊었던 그들 소식이 궁금해지는것은 이상스러운 일이다. 어언간 자기 인생을 돌이켜볼 나이에 이른탓인듯싶었다. 오빈우는 잡지를 펼쳐든채 손을 올려 희끗희끗해진 귀밑머리를 쓸어만졌다.

복희가 조용히 방안에 들어섰다.

《력사학부 강명호선생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로?》

오빈우는 손에 들었던 잡지를 책상우에 떨구며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래년도 연구과제때문에 총장선생님과 의논할 일이 있답니다.》

《연구과제?》

오빈우는 심드렁한 어조로 중얼거리였다. 오늘은 한두시간만이라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었다. 자기의 론설을 더듬어보며 남몰래 기쁨을 맛보고싶었다.

《돌려보내랍니까?》

복희가 이쪽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물었다. 오빈우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강명호는 년장자이다. 사업상용무로 찾아온 로학자를 구실을 붙여 돌려보낸다면 뒤소리들이 좋지 못할것이였다.

《들여보내오.》

오빈우는 언짢은 마음을 눅잦히며 짐짓 범상스레 말했다. 복희가 물러가자 강명호가 들어섰다. 그는 어마어마하게 큰 방에는 관심이 없는듯 총장을 면바로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빈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먼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바쁘시겠지만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용건이 절박한것인듯 강명호는 다소 흥분된 기색이였다.

《자, 어서 앉으십시오.》

오빈우는 자기 자리를 비워두고 앞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우람진 체구에 강개한 인상을 풍기는 강명호와 마주앉자 여느때없이 자기가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는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며 친절히 물었다.

《래년도 연구과제때문에 오셨다지요?》

《그렇습니다.》

《래년도 연구과제야 이미 학부와 연구소들에서 락착되여 비준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걸 변경시켜야 할 사정이 생겼습니다.》

오빈우는 강명호의 얼굴을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엊그제 비준한 연구과제를 변경시키겠다니 도무지 리해할수 없었다. 설사 변경시켜야 할 까닭이 있다 해도 학부장이 올것이지 일개 교원인 강명호가 들고다닐 필요는 없는것이다.

《학부장선생은 어데 갔습니까?》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과제를 달리 세우자고 제기한 사람이 나니까…》

《그렇더라도 년로하신 선생님이 걸음을 하시도록 할것이 아니라 학부장이 와야지요.》

오빈우는 얼결에 이마를 찌프리고 금시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력사학부장의 처사가 괘씸했다. 그는 한번 비준된 년간연구과제를 변경시키는것이 수월치 않다는것을 남들보다 잘 알고있다. 년로한 강명호의 고집을 자기가 꺾을수 없으니까 총장에게 보낸것이 아닐가? 당장 력사학부장을 전화로 찾으려다가 강명호의 얼굴에 신중한 빛이 흐르는것을 띄여보고 마지못해 받자를 하였다.

《어떤 문젤 새로 연구하자는겁니까?》

《이미 학부에서 제출한 연구과제중에서 고대 우리 나라의 원시종족과 북방대륙의 원시종족들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과제를 빼고 그대신 구석기시대유적발굴문제를 넣으려고 합니다.》

사업수첩을 펼치고 펜을 들었던 오빈우는 의혹이 실린 눈길로 강명호를 쳐다보았다. 력사학부가 전번에 설정한 연구과제를 오빈우는 적극 지지한바 있었다. 력사는 오늘의 시점에서 평가되고 연구되여야 한다. 대륙의 선진적인 사회주의나라를 따라배워야 할 오늘의 조건에서 력사학부가 이미 제기한 연구과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것이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광활한 북방의 대륙에서 뻗어내렸음을 력사연원적으로 립증하는 문제는 현시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리익의 견지에서 보아도 절실히 필요한것이였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왕청같이 구석기시대유적발굴을 연구과제로 하겠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우리 나라 령토엔 없다고 확증된 구석기시대유적을 굳이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류진화발전사를 깊이 연구한 선진국가들의 학계에서도 우리 민족을 알따이계 북방종족의 한 갈래라고 공인하고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선뜻 수긍한 강명호는 통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그렇게 교과서도 썼고 강의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시대유적이 있을수 있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무슨 고고학적발견이라도 하셨는가요?》

《부끄럽게도 내 스스로가 그런 확신에 도달한것이 아닙니다. 구석기시대 존재여부문제는 우리 민족의 시원과 관련되는 문제인것만큼 응당 사학자의 한사람으로 깊은 연구를 하여야 했었으나 어리석게도 나는 남의 주장에 맹종하여왔습니다. 지난번 조선사시험장에서 정경과 김정일동무의 견해를 듣고서야 비로소 나는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시대유적이 있을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동안 나는 김정일동무가 구석기시대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 참고한 문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나니 확신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강명호의 검버섯이 돋은 얼굴에 경건한 빛이 어리였다.

오빈우는 로학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생각했다. 지난해 입학식때 해외출장중이였던 그는 귀국한 후에 그이를 만나뵈온적이 있었다. 김정일동지의 입학은 대학의 영광이였고 총장에게도 크나큰 자랑이였다. 오빈우는 첫 담화에서 김정일동지의 겸허한 성품과 깊은 사색의 세계를 엿보았다. 그후에도 송금석을 비롯한 여러 교원들의 입을 통하여 김정일동지의 비범한 인품과 뛰여난 예지에 대하여 익히 들었다. 송금석은 김정일학생이 선행리론에도 깊은 리해에 도달했다면서 앞으로 세계적인 맑스-레닌주의리론가로 되리라고 하였다. 오빈우는 그이의 장래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자기도 포함한 우리 나라의 맑스-레닌주의리론진이 그 누구도 필적할수 없는 높이에 이를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런 의의도 없다고 생각되는 구석기시대문제를 연구한다니 오빈우로서는 놀라움과 실망을 누를길 없었다.

김정일학생이 구석기시대문제를 연구한단 말이지요, 구석기문제를…》

두눈을 깊이 감았다 뜬 오빈우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난 김정일학생이 그런 가설을 내놓을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설이 우리 혁명에 리익이 되는게 뭐가 있습니까. 물론 천재적인 예지를 타고난 사람은 늘 기성리론의 령역을 비좁게 생각하며 불편을 느끼게 되여있습니다. 탐구에 대한 욕망으로 심장이 타오르는걸 걷잡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게 청년기에 이른 천재의 특질이지요. 이렇게 놓고볼 때 나나 강선생님은 무얼해야 하겠습니까. 천재의 거대한 잠재력을 헛된 방향에 소비하지 않도록 고스란히 지켜주는게 우리의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난 강선생님이 자중하시길 권고합니다. 어디까지나 스승은 스승이고 학도는 학도가 아니겠습니까. 한평생 획득한 관록과 교원이라는 직분을 망각하지 말아야지요.》

《총장선생이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난 시험장에서 충격이 너무 커서 무얼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나는 김정일학생의 탁견에 어쩔수없이 동감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았습니다. 곡절많은 한생을 살아오면서 우리 겨레의 력사를 지켜오느라고 했지만 여태껏 남의 조상의 묘에 절을 한것 같은 허무한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이런 변이라구야…》

오빈우는 회한이 짙게 서리는 강명호를 바라보며 탄식을 하더니 어조를 바꾸며 뒤를 이었다.

《누구보다 학술적고집이 세고 학권이 높으신 선생님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민족이 알따이계 북방종족의 한 갈래라는 엄연한 력사적사실을 억지로 뒤집어놓아서 리익이 될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 민족이 대륙과 인연이 없이 동떨어진 민족, 본래부터 협소한 반도에서 기원한 민족이라는것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뭔가 말입니다. 강선생님은 확실히 학술적신념의 균형을 잃었습니다.》

온화하던 오빈우의 두눈에 불꽃이 어려 번뜩이였다. 그는 강명호의 대답을 기다리며 입술을 사려물었다. 체소한 그의 육체가 바위처럼 굳어져 차거운 서슬을 풍기였다.

《옳습니다. 학술적신념이 균형을 잃었지요. 하지만 그건 순간이였습니다. 나는 지금 새로운 신념의 궤도를 찾았습니다. 옳은 길에 비로소 들어선 심정이란 말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건 두고봐야 알 일이요. 하지만 내 한가지만 권고하겠습니다. 사대주의풍조가 아직 휩쓸고있는 대학형편에서 총장선생이 바로잡아야 할것이 많은것 같은데 때를 놓치지 말길 바랍니다. 그건 그렇구… 어쨌든 래년도 연구과제는 바꿔야 하겠습니다. 난 구석기시대유적을 우리 나라의 령토안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늦게나마 우리 겨레의 진짜 뿌리를 찾아야겠단 말입니다.》

강명호는 결연한 빛이 흐르는 눈길로 오빈우를 마주보며 말하였다.

그의 결심을 굽힐수 없다는게 확연히 느껴졌다.

《음…》

오빈우는 신음소리를 터뜨리며 곧추 쳐들었던 머리를 힘겹게 떨어뜨렸다.

《무서운 일입니다. 여생을 모험에 맡기다니… 리해해주십시오. 난 어쩔수없이 총장의 직권을 행사해야 하겠습니다. 난 총장으로서 강선생님은 지금 우리 대학에 적을 둔 교원이란걸 상기시킵니다.》

《그러니 난 총장선생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할 의무밖에 없다 그 말씀인가요?》

강명호는 서리가 덮인 눈섭을 떨며 부르짖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구석기시대유적발굴사업은 고고학연구소의 사업령역에 속하기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고고학연구소에 진작 찾아갔댔습니다.》

《고고학연구소 소장은 물론 반대를 하였겠지요. 도성호선생은 가능한것과 불가능한것을 가릴줄 아는 학자니까.》

오빈우는 필경 강명호가 고고학연구소에서 반박을 당하고 돌아왔으리라고 넘겨짚으며 그렇게 말했다. 해방전에 웨나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에 오쓰와르드 멘긴의 《문화권론》을 신봉해온 도성호는 우리 나라의 원시사회가 알따이문화권에 속해있었다고 주장해왔었다.

《나도 처음은 도성호선생이 반대를 하리라고 생각했댔습니다. 그런데 김정일학생이 탐구한 과학적근거들을 전해듣더니 그도 경탄하면서 좀 생각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거 모를 소리군요.》

오빈우는 뜻밖이여서 고개를 약간 기웃하며 미심쩍은 눈길로 강명호를 치떠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도성호가 그렇게 나올리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학술상견해의 차이가 많았던 관계로 도성호선생을 좋게 여겨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구석기시대문제를 론의하면서는 그에게서 학자적인 량심을 보았습니다. 그 역시 진리를 지향하는 학자이니만큼 움직일수 없는 과학적진리앞에서 허심하고 공정했습니다.》

《아무튼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고고학연구소에서 구석기시대유적을 탐사해보라고 하지요.》

《우리는 그날 의논하기를 우리 대학 력사학부와 고고학연구소가 힘을 합치자고 했습니다. 민족사의 첫머리가 심히 외곡되였음을 깨닫게 된 이상에는 력사학계의 어느 학자나 학도도 가만히 있을수 없습니다! 총장선생, 깊이 생각하시고 학부의 연구과제를 바꾸도록 해주십시오.》

강명호는 말을 마치고나서 끓어오르는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해 앞상우에 올려놓은 두주먹을 꽉 그러쥐였다.

《선생님의 심정은 알만 합니다.》

오빈우는 천천히 작은 배를 내여밀어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였다.

《강선생님, 부디 고정하시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맑스-레닌주의는 전인류가 공산주의사회에서 살게 될 때 국가는 물론 민족의 조락도 예언하고있습니다. 우리는 력사가 미래에로 지정해준 운명의 길에서 탈선하지 말아야 합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립장에서 력사를 연구해서는 안됩니다.

인제는 지나간 일이지만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고구려 제왕들을 민족의 영웅들로 평가하였다가 심각한 비판을 받은 일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 선생님에게서 그때의 민족주의적력사관의 잔영이 아직 남아있는것을 보고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오빈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다시였다. 강명호는 쪼프린 눈으로 그를 겨누어보았다. 총장의 말대로 그런 일이 있었다. 그는 5년전에 《고구려성립과 강성의 웅도》 라는 제목으로 력대 고구려왕들의 업적을 서술하는 론문을 썼다. 고구려를 일떠세운 동명왕을 신화시대에서 력사시대에로의 전환기에 배달겨레가 낳은 첫 신화적영웅으로 묘사했다.

뛰여난 지혜와 무예를 갖춘 광개토왕에 대해서는 남정북정의 칼을 들어 천하를 주름잡으며 고구려의 령토를 넓힌 눈부신 성좌라고 하였다.

그 기상을 이어받아 당태종의 침략적야망을 꺾어놓은 연개소문은 애국의 기개를 떨친 력사의 풍운아였다고 하였다.

론문은 글줄마다에 커다란 민족적긍지감과 애국의 열정이 굽이치고있었다. 그러나 론문에는 력사발전에서 인민대중의 역할을 응당한 높이에서 강조하지 못한 부족점이 없지 않았다.

일부 일군들은 그 부족점을 확대하여 문제를 크게 세우고 대학적인 비판토론회를 조직하였다. 론문의 결함을 인정한 강명호는 성근히 자기비판을 했었다. 그런데 그때의 지나간 일을 굳이 상기시키면서 구석기시대유적을 발굴하려는 자기의 의도에 민족주의사학자의 딱지를 붙이려는 총장을 보자 강명호는 노기가 치밀었다. 흰 눈섭이 다시금 꿈틀거리고 넓은 대머리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참, 총장선생은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헌데 5년전에 썼던 내 론문과 구석기시대유적발굴문제는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가 아닐가요? 구석기는 제왕들이 없던 태고적의 평범한 우리 선조들이 만든것입니다.》

강명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말마디에 그루를 박았다.

《아무튼 나는 구석기발굴계획을 승인할수 없습니다.》

오빈우는 더 론의하고싶지 않다는듯 단호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명호도 따라일어섰다.

《안녕히 계십시오. 내가 여기에 괜히 왔지요.》 강명호는 허연 머리를 높이 쳐들고 나들문쪽으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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