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2 장

1

 

송금석이 총장을 찾아 서기실에 들어서니 무엇인가를 분주히 쓰고있던 복희가 머리를 들고 상냥한 미소로 반기였다. 총장실에 출입이 잦은 송금석은 이 녀서기와 잘 아는 사이였다. 묻기도 전에 복희가 먼저 말을 뗐다.

《총장선생님은 지금 고등교육성에서 나오신 손님과 담화중이예요. 좀 앉으세요.》

복희는 한마디 가볍게 던지고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처녀였다. 번듯한 이마와 긴 살눈섭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 도고한 인상을 풍겨주는 상큼한 코날과 얄팍하면서도 단정한 입술이 어느것 하나 빠진데 없이 흰 살결의 바탕우에 조화를 이루었다. 풍만한 체구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복희는 체소한 총장의 부족점을 메꾸기 위하여 여기에 앉아있는듯싶었다. 이 방에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은 처녀서기로부터 우선 황홀한 인상을 받고 총장앞에 나타나게 된다. 헌데 그에게 복희라는 이름만은 어울리지 않은것 같았다. 우아하고 세련된 용모에 비해볼 때 그 이름은 어쩐지 너무나 범상하게 들리였다. 어느 농촌마을에나 그런 이름을 가진 녀성이 두세명쯤 은 있을 정도로 흔해빠진 이름이기도 하였다. 귀맛이 화려한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것은 그의 부모들이 식견이 낮거나 딸의 미모를 예견할수 없었기때문이였을것이다.

이런 덧없는 생각을 좇고있던 송금석은 자기의 이전 이름 송이완역시 로씨야에서는 너무나 흔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을 하면서 로씨야식 이완이라는 이름을 아버지가 지어준 금석으로 바꾸었던것이다.

그는 쏘파 한복판에 주저앉으며 복희의 책상을 쳐다보았다. 넓은 책상 한귀에 신문과 잡지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총장에게 오는 정기간행물을 미처 전하지 못한듯싶었다.

《그 출판물을 좀 보아도 되겠소?》

송금석이 물었다.

《어서 보세요.》

복희는 얼핏 시선을 들어 선선히 승낙하고는 또다시 자기 일에 집념했다. 송금석은 움쭉 일어서서 출판물들을 통채로 들어다가 쏘파앞의 응접탁우에 놓았다. 다리를 겹놓고 다시 앉은 다음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국내출판물들은 물론 《쁘라우다》 등 외국신문들과 잡지들,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 《번역월간》같은 번역잡지들이 뒤섞여있었다. 잡지들사이에는 쏘련과 중국에서 오는 편지들도 끼워있었다. 그 나라들의 정계와 리론계에는 오빈우총장과 면식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송금석에게는 그 편지들이 오빈우총장의 대외적위신을 말해주는것처럼 생각되였다.

그는 먼저 쏘련신문 《쁘라우다》를 펼쳐들었다. 손에 마치는 감촉마저 정겨운 신문이였다. 오래전에 떠나온 잊지 못할 고장과 그곳에 있는 아버지의 소식이 글줄과 사진마다에 어린듯싶었다.

그는 신문을 다 읽고나서 쁘라하에서 출판되는 잡지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를 집어들었다. 두툼한 잡지의 연한 록색뚜껑을 번지고 차례부터 읽어내려갔다. 여러 나라의 당 및 국가지도자들과 권위있는 리론가들이 쓴 론설제목들이 빼곡이 차있었다. 유심히 글줄을 더듬던 송금석의 눈이 마지막 세번째 줄에서 굳어졌다. 오빈우총장이 쓴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은 국제적이다》라는 론설이 실렸던것이다.

《여기에 우리 총장선생의 론설이 실렸구만!》

송금석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돌발적으로 울린 그 목소리에 복희는 흠칫 놀라며 송금석쪽을 바라보았다. 송금석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하였다.

《총장선생은 바쁜 틈에도 여전히 국제혁명을 잊지 않고있군요!》

《론설이 훌륭한가요?》

복희가 홀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보나마나 이 론설은 세계적인 판도에서 독자들의 커다란 공감을 일으킬거요. 동무도 한번 읽어보시오.》

《난 국제혁명에 대해선 잘 몰라요. 아직 난 내 푼수에 맞게 〈조선문학〉잡지에 실리는 총장선생님의 서정시 애독자에 불과해요.》

오빈우는 《원방》이라는 필명으로 문학잡지들에 서정시도 썼던것이다. 송금석은 응당 총장의 모든 글들을 애독하여야 할 복희가 그의 서정시만을 읽는다는것이 유감스러웠다.

《총장선생의 문필활동은 문단에서보다 정치리론계에서 더 눈부시다고 할수 있소. 앞으로는 총장선생의 정치리론론설들도 읽어보시오. 그러면 서정시에서 받는것보다 못지 않는 정서적흥분도 느끼게 될거요. 왜냐하면 총장선생의 론설들은 딱딱하기 이를데 없는 다른 필자들의 론설과 구별되기때문이요. 론리적인것과 형상적인것이 조화롭게 결합되여있단 말이요.》

간막이문이 열리더니 중절모를 쓴 손님이 나왔다. 복희가 출판물들을 서둘러 걷어안고 총장이 있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이윽고 다시 나오더니 송금석더러 어서 들어가보라고 하였다.

오빈우는 책상에 마주앉은채로 송금석을 맞이했다. 각종 문건과 책들이 쌓인 널다란 책상과 대조되는 그의 몸집은 더욱 작아보이였다. 하지만 총장의 시원하게 벗어진 주름진 이마와 조용히 빛나는 눈동자엔 높은 지성과 재기가 흐르고있었다.

송금석은 앞상밑에 밀어넣은 의자를 끄당겨놓고 앉았다. 그는 방금 서기가 가져다놓은 책상 한귀의 출판물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서기실에서 보았는데 총장선생의 론설이 실렸더군요.》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에 앞서 그 론설이 어떻게 집필되고 발표되였는지 알고싶었다. 오빈우는 맨우에 있는 잡지를 집어들며 대견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의 론설이 실린 페지를 펼치는 그의 눈이 그윽히 빛났다.

《국내출판물도 아니고 국제적인 성격의 잡지에 낼 글이여서 특별히 애를 썼는데 반향이 어떻겠는지 모르겠소.》

《그렇게 야심작으로 쓰셨으니 응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겁니다. 그런데 그 론설은 언제 쓰셨습니까?》

《지난 가을 모스크바에 갔을 때 썼소.》

오빈우는 그때를 회고하며 실눈을 지었다. 지난 11월에 모스크바에서 각국 공산당 및 로동당대표회의가 열렸다. 오빈우는 그 회의와 관련하여 몇달전부터 쏘련에 가있었다. 그때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편집성원들과도 접촉하게 되였는데 그들의 청탁에 의하여 그 론설을 썼던것이다.

《그러니까 〈모스크바성명〉의 정신을 반영하여 그 론설을 쓰셨군요.》

송금석이 말했다. 《모스크바성명》은 각국 공산당 및 로동당대표회의에서 채택된 기본문건이였다.

《회의가 열리기 두달전에 썼던것만큼 그 성명의 내용을 직접 반영하지는 못했소. 그러나 그 성명에서 천명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통일단결을 지향하는 취지에선 별반 거리가 없소. 유감스럽게도 오늘 국제공산주의운동내에서는 의견상이가 표면화되기 시작했소.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세계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이 국제적이라는 맑스의 유훈에 충실할것을 호소하고싶었소. 원고를 보더니 잡지편집부에서는 별다른 의견이 없이 공감을 했소. 그 잡지의 편집성원들은 여러 나라의 권위있는 맑스-레닌주의리론가들이요. 송금석선생도 틈이 나면 읽고 조언을 주시오.》

《읽겠습니다. 우리 학부의 교원들과 학생들도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론설을 송금석선생이 그렇게 중히 여겨주니 고맙기 그지없소. 후에 론설에 대한 의견들이 제기되면 기탄없이 전해주시오. 지난 시기 내 글들을 읽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소.》

《몰리해로부터 오는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야 없지요.》

《난 자기의 글을 비평한다고 해서 몰리해로 속단하거나 나쁜 감정을 품는 속된 인간은 아니요. 론적은 원쑤가 아니라 가까운 벗일수도 있소.》

오빈우는 진지한 어조로 말하였다. 설상 그는 비평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랜 문필생활에서 겪을것을 다 겪은 그는 그 분야에서 자기의 격을 갖출줄 알았다.

자존심이 강한 송금석에게는 총장의 말이 지나친 훈시로 들리였다. 높은 직급에 오래 있으면 총장과 같이 풍부한 지식과 고결한 인격을 가진 사람도 상대가 누구인가를 고려함이 없이 상식적인 훈계를 하는데 버릇되는것일가? 그는 총장을 면바로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오빈우도 약간 기분이 들뜬김에 그만 지나친 설교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인차 화제를 돌리였다.

《참, 그런데 무슨 일로 왔소?》

《일전에 찾아와 말씀드렸던 정치경제학교과서문제때문에 왔습니다.》

송금석은 표정을 바꾸며 당당한 어조로 말하였다.

오빈우는 책상 한쪽구석에 놓여있는 최정택의 정치경제학교과서를 앞으로 끄당겼다.

《그간 내 최정택선생의 교과서를 읽어보았소. 그 교과서로 강의를 해보니까 반응이 크게 일어난다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총장선생님의 결론을 받고싶어 왔습니다.》

송금석은 오빈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빈우는 미간을 찌프리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부학부장선생도 그 교과서심의에서 찬성을 하였다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교과서가 출판배포된 오늘에 와서도 선생부터가 확고히 자기 주장을 세워야지. 내가 알기엔 그 교과서에 대한 의견을 많이 가지는 학자들이 바로 경제학부에 있소. 하기야 그럴수밖에 없는 일이지. 정치경제학이 전대학적인 공통과목이기는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야 그 학부에 있으니까.》

오빈우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네 학부에서 제기된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총장한테까지 들고다니는 송금석의 처사가 자못 불쾌했다. 일단 교과서심의를 할 때 찬성을 하였으면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말아야지 뒤소리가 많다고 하여 그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오빈우는 말마디에 그루를 박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대학 교수의 손에서 대학교과서가 씌여진것은 대단히 기쁘고 장한 일이요. 나는 이제부터 모든 학부들에서 필요한 교과서들을 우리 교수들이 집필하는 된바람을 일으키려고 하오. 우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언제까지나 다른 나라 대학교과서들을 번역해서 리용하겠소.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일을 더는 계속할수가 없소. 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교육사업을 할 때에도 체험하였지만 조선학생들은 다른 민족의 학생들보다 실력이 앞섰소. 하긴 송금석선생도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로모노쏘브명칭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최우수생으로 졸업했지.》

《총장선생님도 동방근로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할 때 실력이 뛰여나지 않았습니까.》

송금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응대했다.

오빈우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불쾌한 눈길을 송금석에게 던지였다. 웃사람이 아래사람을 칭찬하는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지만 아래사람이 웃사람의 실력이나 성과를 찬양하는것은 일종의 아첨이라고 할수 있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오래동안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여오는 오빈우는 제일 타매하여야 할것이 아첨이라고 여기였다. 일군은 응당 인격과 사업성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지 직권에 의한 아첨을 받는것은 더없이 너절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그만큼 자기의 실력과 투쟁경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총장의 얼굴에서 불쾌한 표정을 본 송금석은 그만 칭찬에 들떠서 분수없이 낯간지스러운 소리를 하였다는것을 깨닫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총장선생님, 최정택교수의 교과서에 대한 선생님의 소견은 어떻습니까?》

《나는 이번에 그 교수를 새롭게 알게 된것 같소. 실력이 높은 학자요. 과학적분석과 론리적전개가 대단히 놀라웠소. 다른 사회주의나라들의 성과와 경험을 완전히 배제한 부족점이 없지 않지만 대학교과서로 별로 손색이 없소. 고등교육성에서도 다 보는것이 있어서 배포를 승인했겠지만 교과서의 내용에만 매달리지 말고 종전대로 앞선 사회주의나라들의 성과와 경험들을 잘 알려주도록 하여야 하오. 내 직접 최정택선생을 불러서 주의를 주겠지만 학부행정에서도 그의 강의가 근시안적으로 빗나가지 않도록 특별히 관심을 돌려야 하겠소.》

《알겠습니다.》

송금석은 활기있게 대답하였다.

오빈우는 그에게 미더운 시선을 보내며 타이르듯 말했다.

《대학교수들은 강의를 할뿐아니라 글도 많이 써내야 하오. 실상 문필활동을 할줄 모르는 학자는 학자가 아니요. 선생은 이번 〈모스크바성명〉의 정신에 근거해서 사회주의나라들의 경제통합문제를 가지고 무게있는 론문을 하나 쓰는것이 좋겠소. 맑스가 일찌기 천명하다싶이 인류사회에는 경제법칙만이 작용하오. 〈전세계프로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라는 불멸의 구호에 따라 사회주의나라들 호상간 경제협력을 오늘날 더욱 확대하고 발전시켜야 할것이요.》

《인차 론문을 쓸테니 총장선생님이 한번 봐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오빈우는 흔연히 수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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