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장

1

 

눈덮인 대지에 두텁게 깔렸던 안개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방금 걷힌 안개가 부드러운 자락으로 대학구내의 정원수줄기와 가지들을 쓰다듬으며 일매지게 서리꽃을 피웠다. 굵은 가지들사이로 내다보이는 넓은 공간에서는 성에가루가 뽀얗게 떠돌며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느샌가 이루어진 그 황홀한 설경에 놀라시였다. 방금전 대학마당에 들어서실 때까지만 하여도 안개때문에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 안개는 아름다운 서리꽃을 마련하는 자기의 신비로운 솜씨를 누가 훔쳐볼세라 짙은 장막을 드리웠댔는지도 모른다. 며칠째 몰아치던 눈보라도 오늘은 공손히 잠들었다.

그이께서는 유정한 시선으로 대학청사를 바라보시였다. 룡남산마루에 우뚝 솟아있는 웅장한 대학청사도 서리꽃을 들썼다. 흰눈이 엷게 덮인 지붕우에서 찬란한 아침해빛이 부서지며 반사광을 뿌렸다. 그이께서는 밤새움에 몰렸던 피곤이 삽시에 풀리는것을 느끼시였다. 당장 어데든 거창한 일판을 찾아 뛰여들고싶으신 욕망이 솟구쳤다. 이즈막 그이께서는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시였다. 학습에 뒤진 동무들의 시험준비를 도우시는 한편 이미전부터 붙안고 연구해온 학술문제에도 탐구의 사색을 거듭하시였다. 억제할 길 없는 열정에 심신을 불태우며 새벽별이 뜨는줄도 모르시였다. 창밖에서 눈보라가 우는 밤이면 더더욱 청신한 기운이 솟구치시였다. 봄을 마련하는 장엄한 진통이 한밤중에도 피를 끓게 했다. 그런데 이 아침엔 홀연 서리꽃이 피였다. 설경이 빚어내는 정취때문인지 그 무슨 경사라도 맞이할듯 한 예감이 드시여 오시던 길앞쪽으로 눈길을 드시였다.

방금 교재배포소에서 최정택교수가 나오고있었다.

후렁후렁하게 품이 넓은 곤색솜옷을 입고 가죽빛이 허옇게 바랜 털모자를 이마가 잠기게 눌러쓴 그는 묵직한 책묶음을 힘겹게 들고있었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무릎이 나온 검은색바지가랭이가 어설프게 두다리에 휘감겼다. 무거운 짐을 들고 눈덮인 언덕길을 내리닫는 교수는 비청거렸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가슴이 저릿해오는것을 느끼시였다. 전쟁때 헤여진 안해를 여직 찾지 못하고 홀로 사는 담임교원의 후줄근한 모습이 그이의 시야에 아프게 실려들었던것이다. 그이께서는 교수를 향해 앞으로 내달리시였다. 숫눈밑에 깔린 얼음이 미끄러워 몸을 가누기가 힘드시였다.

《아니… 정일동무! 넘어지겠소.》

어느새 그이를 발견한 최정택은 엉거주춤 짐을 놓고 허리도 못 편채 소리쳤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교수앞에서 걸음을 멈추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모자를 벗어들며 반겨 인사를 하시였다.

《오늘은 시험이 없는 날인데 무슨 일로 나왔소?》

최정택은 그이의 존안을 황홀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요즈음은 학기말시험이여서 시험이 없는 날에는 학생들이 대체로 집에서 공부를 하고 대학에는 나오지 않았던것이다.

《조선사시험준비를 하다가 강명호선생님께 문의하고싶은 문제가 있어서 나왔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미소를 머금고 밝은 어조로 대답하시였다.

《그랬댔군.》

최정택은 흰눈이 하얗게 덮인 정원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그런데 선생님, 이 책은 무슨 책입니까. 혹시 선생님께서 새로 쓰신 정치경제학교과서가 아닙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흰 종이로 꼼꼼히 싸서 묶은 책꾸레미우에 허리를 굽히며 물으시였다.

《그렇소, 드디여 출판이 되였소. 학급동무들에게 한권씩 나누어주려구 가져가는 길이요.》

최정택은 감출길 없는 기쁨으로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였다.

《선생님, 축하합니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이의 음성은 기쁨에 젖었다.

《고맙소. 정일동무의 극진한 지지가 없었더라면 난 아직 이 교과서집필을 끝내지 못했을거요. 정일동무는 주체가 철저히 선 교과서를 쓰라고 했었는데 바라던대로 교과서가 잘된것 같지 못하오.》

최정택은 회고에 잠기며 실눈을 지었다. 김정일동지께서 교과서집필을 고무해주시던 나날들이 그의 눈앞에 주마등같이 떠올랐다.

《선생님, 전 방금 그 어떤 경사로운 시각이 다가오는듯 한 예감을 느끼였습니다. 우리의 첫 정치경제학교과서가 나온건 정말 기쁜 일입니다. 선생님, 좀 보십시오. 우리 대학이 서리꽃속에 묻혔습니다. 얼마나 정성스레 장식했습니까. 얼마나 깨끗한 꽃입니까. 선생님을 축하하려고 서리꽃이 활짝 폈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대학정원에 가득찬 서리꽃을 한아름 다발로 엮어 최정택교수에게 안겨주고싶은 심정을 금할수가 없으시였다.

정일동무는 사계절중에서도 겨울철을 제일 좋아한다지?》

최정택은 그이의 시선을 따라 대학의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겨울의 자연을 류달리 좋아하시였다. 2월의 백두산에서 탄생하시여 그런지도 몰랐다. 유년시절의 기억속에는 천지를 휩쓸며 뢰성을 불러오는 눈보라의 장쾌한 모습과 서리꽃이 하얗게 핀 고요한 소백수골짜기의 아름다운 풍치가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그래서인지 엄혹한것과 부드러운것, 호방한것과 온화한것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겨울이 어느 계절보다 좋았다.

정일동무가 대학에 입학하던 때가 어제같은데 벌써 한학기가 지나갔소. 나한텐 정말 즐겁고도 의의깊은 나날이였소. 그 나날이 있어 새 교과서를 쓸수 있었소.》

최정택은 김정일동지에 대한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가십시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먼저 책꾸레미를 드시였다.

《같이 들기요.》

최정택이 황황히 따라섰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와 책꾸레미를 맞들고 걸음을 옮기시였다. 발밑에서는 눈밟히는 소리가 상쾌하게 울렸다. 정원의 새들이 나무가지를 흔들며 나래칠 때마다 하얀 눈가루가 이마전에 떨어졌다.

그이께서는 무심결에 책표지에 찍힌 《최정택 저》라는 글발을 띄여보시였다. 문득 선생님의 부인이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가? 하는 생각이 드시였다.

언젠가 최정택을 찾아 교직원합숙에 들리신적이 있었다. 복도를 총총히 걸으시던 그이께서는 세면장옆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시였다. 내의바람으로 머리에 세면수건을 동인 최정택이 빨래감이 담긴 대야를 들고 맞은편에서 걸어오고있었던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것을 보신듯싶으시였다. 이름있는 교수가 격에 어울리지 않게 빨래감을 들고다닌다 하더라도 그에게 가정이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웃어버릴수 있는 범상한 일이였다. 그러나 부인을 잃은 불행한 교수의 모습이여서 련민의 정이 치미는것을 어쩔수가 없으시였다. 동시에 난감한 정황에 부딪쳤다는 생각이 드시였다. 채광이 좋지 못한 복도는 어둑시근하여서 그가 아직 못 보았을수도 있었다. 궁색한 모습으로 학생과 마주서면 교수가 난처해할것 같아서 슬며시 돌아서시려는데 어느결에 그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아니, 정일동무가 어떻게 왔소?》

가까이로 다가오는 교수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어색해하는 기색이 엇갈렸다.

《책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묻고싶은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읽으시던 책에 얼핏 스친 영국의 한 고전경제학자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으셨던것이다. 독서를 하거나 강의를 받다가 의문이 생기거나 깊이 납득되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어이 해명을 보고야마시는 김정일동지이시였다.

그래서 전에도 종종 강좌실을 찾아가 최정택교수에게 학술문제를 문의하군 하시였다.

《그럼 어서 내 방으로 갑시다.》

어느새 거북한 기색을 가셔버린 최정택교수가 빨래감이 담긴 대야를 다른 손에 옮겨쥐며 선선한 낯색으로 서둘렀다.

《선생님, 시간이 없겠는데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다니…》

김정일동지께서는 팔을 잡아 이끄는 교수를 따라 그의 호실로 가시였다. 방안에 들어서시자 옷장 옆구석에 놓인 식기와 남비뚜껑사이로 비죽이 솟은 숟가락꼭지가 눈길에 마쳐들었다. 최정택교수는 그 무슨 사정으로 합숙식당에 가지 못할 때면 자취도 하는 모양이다. 새삼스럽게 방주인의 고독한 생활흔적이 엿보여서 다시금 가슴이 아릿해오시였다.

《어서 앉으시오.》

교수는 침대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머리에 동였던 수건을 풀고 옷장속에서 와이샤쯔를 꺼내입었다. 침대곁의 쪽걸상에 앉으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책상우에 면도칼과 함께 놓인 동그란 손거울의 뒤등 유리밑에 사진이 끼여있는것을 보고 무심히 집어드시였다. 사진은 누르스름하게 퇴색했지만 세사람의 밝은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보다 무척 젊어보이는 최정택은 흐뭇한 기색으로 어덴가를 아득히 바라보는데 그에게 어깨를 꼭 기대인 녀인은 흰 이를 드러내며 방싯이 웃고있었다. 엄마의 품에 안긴 젖먹이는 꽃송이를 들고 방실거렸다.

사진은 전쟁전에 교수의 가정이 얼마나 단란하고 행복했는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생활은 흔적없이 사라져버리고 이 사진만이 흘러간 시절의 추억을 가슴저리게 깨우쳐줄것이였다.

이날 교수에게서 안해와 헤여진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으신 그이께서는 그길로 내무성 주소안내소를 찾아가시였다. 스승의 가족을 찾아달라는 열렬한 호소에 감동된 중좌는 그후 대학에 와서 교수부인의 사진을 복사해갔다. 그러면서 두해전에 이미 교수부인의 행처를 알아보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다시한번 노력해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오늘까지 소식이 없었다. 교과서가 출판된 오늘 그 경사를 가족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선생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달픈 마음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부인은 고등교육을 받은 약전기술자로 전쟁전에 방송국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남편의 학술적성과가 어떤 가치를 갖고있는지 충분히 리해할것이다. 옛정을 잊지 못했을 그 녀인은 오늘의 학술적성과를 자신의것 이상으로 기뻐하며 남편에게 가장 살뜰하고 절절한 축하를 보내줄것이다. 교과서를 펼쳐보는 그의 얼굴에는 사진에서 본것 이상의 환희로운 웃음이 필것이다. 딸애도 살아있다면 인제는 아버지의 성과를 기뻐할줄 아는 철든 소녀로 자랐을것이다.

이 땅에 살아있다면 벌써 나타났을 그들이 종무소식인걸 보면 무슨 곡절이 있는게 분명했다. 문득 그이의 눈앞에 꽃송이를 들고 방싯거리는 사진속 아기의 모습과 밝은 웃음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안기는 모습이 엇바뀌며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교수에게는 교과서출판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줄 안해와 딸애가 없다. 그들의 심정까지를 합쳐서 학급학생들이 래일 선생님을 축하해주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시던 그이께서는 책꾸레미를 맞잡은 교수가 지칫거리는통에 다심한 상념에서 깨여나시였다.

《조심하십시오.》

그이께서 얼른 교수를 부축하시였다. 최정택은 그이께서 이끄시는대로 몸을 가누고나서 앞이 잘 안 보이는듯 눈을 슴벅이였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할듯 하더니 애틋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선생님이 이렇게 교과서를 가져오시는줄을 미리 알지 못한것이 아쉽습니다.》

그이께서 혼자말처럼 조용히 하시는 말씀이였다.

《무슨 그렇게 소문낼 일이라구.》

《아닙니다. 오늘은 정말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진작 알았다면 사진기를 가져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대학설경을 배경으로 선생님의 사진을 한장 찍어드리는걸 그랬습니다. 선생님의 정치경제학교과서가 나온걸 기념해서 말입니다.》

그이께서는 진정으로 아쉬운 심정이시였다. 래일은 잊지 말고 사진기를 가져다가 교수가 학급동무들에게 교과서를 나누어주는 순간을 기념으로 찍어두리라 속다짐하시였다.

강좌실에 이르러 책꾸레미를 방바닥에 내려놓은 최정택은 뻐근해진 팔을 굽혀보며 히죽이 웃었다.

《내 혼자선 단번에 나르기가 어려울번 했소. 래일 조선사시험을 쳐야 할 정일동무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서 안됐소.》

그는 허리를 굽혀 책꾸레미에서 교과서 한권을 뽑아들었다.

《날라오느라고 수고를 했는데 먼저 받아주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번 방학에 꼭 읽겠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값진 선물처럼 두손으로 소중히 받으시였다. 이제 학기말시험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다른 책을 뒤로 미루더라도 이 책부터 읽어보실 생각이였다.

정일동무가 이번 방학에 그 책을 보겠다니 내 한가지 부탁을 해도 좋을가?》

최정택이 눈웃음을 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서 그러십시오.》

《읽은 후에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주오. 아직은 미흡한 점들이 많은 교과서요.》

최정택은 거절하지 말아달라는듯 간절한 소원의 뜻이 어린 눈길로 그이를 바라보았다.

《저야 배우는 학생인데 무슨 의견을 드릴수 있겠습니까.》

《너무 그러지 마오. 내 진정으로 하는 부탁이요.》

《선생님께서 정 그러시니 후에 읽은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속하기요.》

최정택은 다시금 정겨운 감정에 휩싸이며 간절히 말했다.

《우리 동무들이 선생님의 책을 받으면 무척 좋아들 할겁니다. 그럼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래일 조선사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쟁취하길 바라오.》

최정택은 강좌실을 나서시는 그이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그저 기쁘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는 경건한 심정에 잠겨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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