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 3 장

4

 

일행은 열다섯명이다. 앞선 처녀들은 벌써 사과밭을 지나 지금 막 시내를 건느고있다. 무엇인가 쉼없이 재잘거리며 흘러가는 잔물결에 아침해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처녀들은 징검다리를 피해 고무신을 벗어들고 여울물을 헤가르며 맨발로 시내를 건는다. 그들의 해맑은 종아리들에 물방울들이 춤추듯 에워싼다.

지혜는 도흥령감과 함께 맨뒤에 섰다. 도흥령감은 상자 하나를 메고 왔는데 무거울것 같아 지혜가 얼마간 들어주겠다 해도 고집스럽게 거절한다. 힘이 장사인 덕대가 하도 민망해서 물었다.

《뭐길래 그래요?》

《나중에 안다.》

도흥령감은 그렇게 대답했을뿐이였다. 수리공젊은이들은 공연히 어린애들처럼 뜀박질하느라고 뒤늦어서 시내가에 다달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땀에 젖은 얼굴과 팔들을 찬물에 적신다. 그 차고도 신선한 촉감에 모두 탄성을 올린다. 처녀들은 벌써 둔덕에 올라 손을 흔든다.

《빨리 오셔요-》 하고 소리친것은 옥채와 은실이다. 호일이가 필경 그러는 은실을 보았으리라. 그는 첨벙첨벙 마구 달려갔다. 딴 수리공들은 뭐라고 호일을 놀려대고 물방울을 튕기면서 뒤따라갔다. 흰 물방울들이 줄지어 분수처럼 높이 솟는다. 그런데 헤덤비던 호일이가 모래밭에 올라가서 무엇엔가에 걸채여 어푸러졌다. 처녀애들의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맑은 공기를 흔들었다. 옥채의 웃음소리가 제일 높았다. 은실은 왜 그런지 옥채뒤에 숨듯이 서서 어딘가 민망한 웃음을 그리고 섰다. 호일은 어푸러진김에 쉬여간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가까이에 다가선 삼각산을 향해 《어이-》 하고 불러본다.

이른봄부터 별러온 산놀이였지만 가난한 주머니에서 나온 출자금이라 빨리 쌓이질 않아 6월이 다된 오늘에야 비로소 떨쳐나섰다. 그러나 어쨌든 지옥같은 작업장에서 해방된 그들은 가슴속이 활짝 열려진것 같으면서 자기들에게도 이런 즐거움이 있었던가싶어 벙벙해하기도 한다. 더구나 산중턱에서부터는 마치 속세에서 벗어난듯 공기가 이슬처럼 맑고 싱그러웠다. 벌써 해빛은 높이 떠올랐건만 수림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다만 긴 빛줄기만이 흘러들어 빛과 그늘의 황홀한 무늬를 짓고있다. 그들일행은 그 무늬속을 누비며 다니는 산신령이 된듯 지팽이 하나씩을 꺾어짚고 오솔길을 굽이쳐오른다.

산중턱에 다달은 일행은 지팽이를 놓고 동굴에서 흘러내려와 철철 넘쳐 흐르게 고인 쩡한 샘물에 목을 추기였다. 그리고나서 산마루까지의 마지막거리를 뜀박질로 바위를 타고 나무그늘밑을 지나 수리공젊은이들이 먼저 올라섰다. 호일은 높은 바위를 타고 오를 때 슬그머니 은실을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은실은 고개를 저으며 그 손을 받지 않았다. 눈치빠른 옥채가 그것을 발견하고 소리내여 웃는 바람에 멋적어진 호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승스럽게 제일먼저 올랐다.

그리고 시내가에서 그랬듯이 골짜기를 굽어보며 《어- 이》 하고 소리쳤다. 이번에는 호일의 목소리보다 은은한 메아리가 《어- 이》 하고 대답을 한다. 그바람에 더욱 걸음발을 다우쳐 산마루에 오른 처녀들도 모두 《어- 이》 하고 소리쳤다. 메아리는 동안을 두었다가도 반드시 대답을 하였다. 나중에는 어떤것이 메아리며 어떤것이 저들의 소리인지 분간할수 없어지도록 실컷 해본 처녀들과 수리공들은 바위며 풀밭에 주저앉았다.

《야- 좋구나!》

첩첩한 산마루를 넘어 멀리 서해가 보였다. 아득히 먼 수평선은 푸른 하늘에 잇닿아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한편으로는 서울거리가 멀리 굽어보였다. 저속에 곰팡내에 묻힌 무더운 판자집들이 그렇게도 많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그리고 솜먼지와 기계소리, 주먹과 과로속에 그들을 그렇게 시달리게 하는 도가니속같은 공장이 저속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여기 공기를 퍼다가 작업장에 가져갔으면…》

누군가가 웃는 낯으로 한탄을 하자 허우대가 크고 우락부락한 덕대가 볼부은 소리를 했다.

《가져가면 뭘 해? 그 땅딸보녀석이 다 휘저어서 더럽게 만들걸!》

도흥령감은 들고 온 상자를 땅에 내려놓지 않고 무릎에 놓은 후 서울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무던한 령감이였다. 얼굴빛은 항상 침울하였지만 워낙 말이 없어 누구도 그의 내심에 있는 슬픔이나 노기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는 지금도 진국로인의 성이 나서 하고있는 말을 그저 잠자코 듣고있다.

《내 살아생전에 그 땅딸보녀석이 뒈지는 꼴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자 덕대가 쩍 버그러진 어깨를 휙 돌리더니 코웃음을 치듯 말하였다.

《땅딸보가 뒈진다고 다돼요? 더 사나운 놈이 감독으로 올지 누가 알아요? 일도 안하는 깡패녀석을 돈을 주어 기르는데야 로무자들 사정보라고 월급주겠어요?》

《그래도 어쨌든 뒈졌으면 좋겠다!》

진국로인이 대통으로 풀대를 후려갈기며 말하였다.

《나도 그래, 그녀석 죽었으면 좋겠어.》

경옥이가 입술을 깨물며 말한다.

《글쎄, 지혜는 말야, 공장주가 그놈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킨다고 하지만 아무리 시켜도 그녀석에게 손톱눈만 한 인정이라도 있으면 배고파 쓰러지게 된 사람을 주먹찜질하지는 않을거 안야? 그래도 봐줄게 안야?》

어째선지 말참견을 전혀 하지 않고 멀리 서해만 바라보고있던 옥채가 아름다운 얼굴을 돌려 경옥을 보았다.

《경옥이, 넌 아무래도 좀 아둔해. 그래 네가 삼년째 공장에 다니지만 인정있는 감독놈을 보았니? 점점 더 사나운 녀석들이 들어왔다는걸 생각 못해?》

경옥이는 옥채의 말이 옳다는것을 깨달았지만 자기를 아둔하다고 하는데 성이 났다.

《감독녀석들이 옥채 너더러야 뭐라기 그리 야단이냐?》

옥채는 왜 그런지 별안간 웃음을 거두고 잠자코 만다. 기태가 그러는 옥채곁에 다가가더니 웃으면서 과자 몇개를 먹으라고 주었다. 옥채는 말없이 그것을 받는다. 옥채에게는 감독들에게 받은 쓰라린 기억이 있었다.

감독들은 옥채의 미모에 누구나 침을 흘렸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옥채는 한 감독이 뭔가 구실을 붙여서 《참회실》이라는 빈방에 불러다가 치근거리는통에 참아내지 못하고 난생처음 사내의 뺨을 후려치고 손목을 물어뜯은 후 창문으로 뛰여넘었었다. 그리고는 공장을 그만두었던것이다. 그 기억이 옥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것이 아니라 그것때문에 공장을 그만두어 남수와 기태를 슬프게 하고 자기자신도 괴로움에 뒤채긴 생각을 하면 지금도 기력이 다 사라지는듯이 멍해지군 하는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은 그가 가장 괴롭힌 기태와 남수만이 알아준다. 옥채는 때마침 들려오는 지혜의 목소리에 애써 귀를 기울이며 가슴아픈 기억을 지워버린다.

《경옥이, 인정이 있는 감독이 따로 있을리 없어. 설사 인정이 있는 감독이 들어온다치자, 그는 며칠이 못 가서 공장주에게 쫓겨날거야. 우리가 쓰러져 죽을 때까지 때려모는 감독이 아닌 이상 공장주가 뭣때메 월급을 주고 기르겠어? 처음에는 인정이 있었다 해도 사나와지기마련이지. 공장주는…》

지혜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는 경옥이 하나에게 이야기하고있는것은 아니였다. 그들에게 원쑤가 누군가를 똑똑히 알게 하여야 하는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로무자가 되는 길을 택한 지혜가 해야 할 임무인것이다. 그는 타이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은실아, 네가 아무리 배고파도 쓰러질수조차 없도록 채찍질을 하기 위하여 공장주는 그런 놈들을 기르고있어.》

은실은 얼굴을 찌프렸다. 배가 고파 허덕이고있는 자기의 머리우로 피할길 없는 감독의 모가 난 주먹을 쳐다볼 때에 엄습하던 분노와 절망감이 되살아나서였다. 지혜는 또 다른 녀공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너를 한겻에 한번이상은 변소에도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야.》

그 녀공은 얼굴에 서글픈 미소를 그린다. 지혜는 경옥에게도 말하였다.

《경옥아, 너에게 넉대의 기대를 더 주면서도 임금은 한잎도 안 올려주기 위해서다.》

경옥에게도 자기가 지혜를 나무랐던 그때의 기억이 그대로 있다. 지혜의 말대로 지혜가 기대를 맡고 나가자 공장은 뒤이어 딴 견습공을 보내고 여전히 넉대의 기대를 더 맡게 하고있는것이다. 경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하루에 열세시간씩 로동한다는것이 될말이야? 우리는 소나 말이 아니야. 밥도 지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잠도 자리만큼은 자야 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휴식도 해야 해. 우리도 사람인 이상 가족들과 단란하게 즐길수 있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 책도 보고 영화구경도 할수 있어야 하는거야.》

경옥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조카하고 좀더 오래 즐길수 있는 그런 시간이 있었으면… 그가 조카를 애무할수 있는것은 지치고 피곤한 밤교대뿐이다. 낮교대가 되면 그애들이 깨여나기 전에 집을 나와야 하며 그애들이 잠든 뒤에 집에 돌아간다.

《지혜, 그런 과남한것은 고사하고 밥이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실컷 못 먹더라도 자식들이라도 실컷 먹였으면 좋겠다.》

청소부아주머니가 꺼지게 한숨을 지으며, 그러나 분노에 떨면서 말하였다. 그 말은 달콤한 공상속에서 재롱을 부리는 조카들과 함께 있던 경옥에게 정신이 펄쩍 들게 하였다. 실컷 휴식하고 책도 보고 영화구경도 하다니 꿈같은 생각이다.

《무엇때문에 불평들을 하고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왜들 자본가의 자식들로 태여나지 못했니? 우리 언니도 어머니도 공장에 다녔지만 로무자라는건 돈이 없다보니 돈있는 사람의 공장에서 붙어먹을수밖에 없어. 공연히 분수없이 굴지 말아야 해.》

소나 말처럼 일해도 좋으니 내 조카들이 굶지 않으면 된다고 경옥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기에게 억울한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지혜 말에 성이 났다.

《쓸데없는 공론하지 말고 한잎이라도 벌 생각을 해!》 하는 경옥의 말에 한 녀공이 웃으며 약을 올리듯 빈정댔다.

《흥, 더 일하면 돈을 더 준다더냐?》

《어쨌든 쫓겨나지 않지. 공장에만 붙어있으면 시래기범벅이라도 먹는단말야. 그만둬봐라, 깡통차고 거리에 나설수밖에 더 있어? 지혜, 넌 왜 사람들을 자꾸만 들쑤셔대지? 누굴 해고당하게 하자는거냐? 제발 나는 건들지 마! 우리 언니가 너처럼 그러다가 쫓겨났어. 감독이 못살게 군다고 대들다가 쫓겨났단 말야. 그래서 큰 공장을 그만두고 작은 공장에 들어갔는데 원료가 없어 일하는 날보다 안하는 날이 더 많단 말야. 열세시간이면 어떠냐? 일감이 없어서 문을 닫군 하는 공장보다 월등하단 말이다. 공연히 불평들을 해서 뒤숭숭해지면 공장일도 잘 안되고 우리에게도 좋을게 쥐뿔도 없어.》

《아니, 이건 또 뭐야?》

우락부락한 덕대가 성낼 대신 한심해하는 어조로 말했다.

《실컷 자본가에게 아양을 떨어보라구. 하지만 네가 시집만 가면 당장 해고란 말이다. 공장주라는건 배가 남산만 해서 아무리 처먹어도 배부른줄 몰라. 쌀값이 작년보다 두배가 올랐는데 네 임금이 두배가 됐어? 요 맹추야!》

《듣기 싫어! 내가 왜 맹추야?》

경옥은 모든것에 신경질이 났다. 어쨌으면 좋단 말인가. 자본가놈들은 왜 제 배만 불린단 말인가. 동무들은 왜 이다지도 마음을 허비여놓는단 말인가?

지혜가 그 경옥의 두손을 꽉 잡더니 이렇게 타이른다.

《경옥이, 백사장놈이 우리 공장 하나에서 얼마나 짜내고있는지 알아? 우리 공장 전체 로무자들이 받는 임금의 200배나 되는 리익을 혼자 독차지하고있어. 그러니까 경옥이 네가 하루 13시간씩 일해서 받는 임금의 이십만배를 혼자서 가지고있단 말이다. 부당하지 않아? 그래도 해고당할것이 겁이 나서 매를 맞으면서도 참아야 해? 우리도 사람인데 말이다. 그뿐이냐? 너의 임금으로는 언제 가도 너의 조카를 추서게 못해. 배를 곯리면서 어떻게 추서겠니?》

《누가 부당하지 않다고 했어? 할수 없다고 했을뿐이야. 세상이 워낙 그렇게 고르롭지 못하게 돼먹었다고 했을뿐이야.》

경옥은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분을 더는 참을수 없는듯이 발딱 일어섰다. 그의 시야에 불현듯 서해가 아득히 멀리 펼쳐져있다.

《아, 답답하구나. 저 바다우로 날아라도 봤으면 좋겠다.》

지금 그는 모든 고통을 잊고 저 넓은 서해바다우로 날지 못하는것만이 안타까운것처럼 생각하면서 공연히 서글퍼졌다. 누가 지혜 말이 그르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오늘도 조카는 배고프다고 킹킹거릴것이며 언니는 10년이나 솜먼지를 먹고 그것때문에 기침을 깇고 피를 토한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의 안타까운 사정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만 뒤설레게 하지 않는가? 조카에게 배불리 먹일수만 있다면 나는 하루 열번을 채찍으로 맞으면서도 무슨 일이든 할것이다. 이십만배! 경옥은 그 아득한 수자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청소부아주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서 묻는다.

《그런데 순경들은 그 도둑놈들을 왜 붙잡아가지 않니?》

《한편이거던. 경찰도 군사깡패도…》

옥채가 그런 간단한 리치를 모르냐는듯이 일러준다.

《미국놈들도 한속이라던데?》

청소부아주머니가 겁나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옥채가 그말에 생긋 웃으며 대꾸하였다.

《군사깡패들두 그렇구, 리승만이두 그랬구, 다 미국놈한테 배워 한단 말예요. 그럴려구 우리 나라에 잔뜩 와있지 뭣때문에 지랄치며 와있어요?》

《난 그걸 모르겠단 말이다. 우리보다 잘사는 녀석들이 그만하면 됐지 무엇때문에 그러겠니?》

청소부아주머니가 이마살을 찌프리며 물었다. 옥채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본가들의 배가 남산만 하다면 미국놈의 배는 그 몇배가 된단 말예요. 미국놈만 쫓아내봐요. 그까짓 순경들이 다 뭐예요. 감독이구, 공장주녀석이구 <경옥아, 날 살려다구. > 하고 빌거란 말이요. 경옥아, 그럼 넌 어떻거지?》

《그녀석이 빈다고 내가 가만있을줄 알아.》

경옥은 팔딱 성을 냈다.

《그럼 됐어!》

옥채는 경옥의 어깨를 껴안는다. 모두가 싱글싱글 웃었다. 도흥령감만이 메고 온 상자를 붙안고 묵묵히 앉아 담배만 피우고있었다. 은실이가 뭔가 위로하듯 아까부터 령감의 곁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격한 목소리로 난데없이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아아, 이전처럼 한번 더 살아봤으면…》

《이북에서처럼 말이냐?》

도흥령감이 비로소 입을 열어 묻는다.

《네.》

그러자 청소부아주머니도 참견을 했다.

《어떻게 살아봤단 말이냐?》

《바다우를 훨훨 나는것처럼 말예요. 거기에는 미국놈들이 한놈도 없었어요.》

미국놈들이라고 할 때의 은실의 두눈에 비낀 빛발치는 적의, 지혜는 조용히 간청하듯 말했다. 모두가 공화국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렴.》

은실은 먼 어딘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모두 은실의 곁에 한걸음씩 다가가 어느덧 빙 둘러앉는다.

《우리 집은 장연에 있었어요. 나는 그때 인민학교에 다녔지요. 거기서는 국민학교라 하지 않고 인민학교라 하거든요. 우리 집에는 감나무도 있었고 토끼도 있었고 돼지도 치고 닭도 쳤고 복슬강아지도 있었어요.》

그때를 회상하여 마음이 멀리 날고있는 은실의 목소리는 모두의 마음을 잡아끌어 온넋을 기울이게 한다.

《우리는 농사를 지었으니까요. 해방이 되자 김일성장군님께서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땅을 주셨어요. 가을이 되면 백가마니가 넘는 벼를 광에 그득 쌓아넣지요. 벼를 다 쌓아넣고나면 아버지는 세루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이집저집 말돌이를 다니며 자랑을 하셨어요. 그렇지만 저녁이 되여 집에 돌아오실 때면 분해하셨어요. 동리에는 우리보다 더 많은 벼를 걷어들인 집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그 쌀을 다 뭘 했니?》

경옥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땅을 받은 첫해는 어머니가 재봉침을 사자 하시고 아버님이 라지오를 사자 하시여 다투시더니 다음해에는 죄다 샀어요. 초가집을 헐어 기와집을 짓구 제일 양지바른 사랑채를 나와 오빠가 공부하는 방으로 하였어요.》

은실은 눈을 감고 잠시 말을 끊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나는 명절때마다 뽑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구요. 그런데도 인민군대아저씨랑, 로동자아저씨들은 바쁜 철이 되면 농촌에 와서 모도 내주고 김도 매주고 벼가을도 해주었어요. … 아버지는 항상 저에게 타일러주셨지요. <은실아, 이게 모두 김일성장군님의 덕분이다. 그 은덕을 잊어서는 안된다. > 하구…》

은실의 앞가슴은 조용히 오르내리였다. 입가에는 서글픈 미소가 있었고 눈에는 정기가 있다.

《은실아, 그때 부르던 노래 하나 부르지? 춤을 추면 더욱 좋고…》

청소부아주머니가 간절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은실은 왜 그런지 잠시 멍해서 동무들을 둘러보다가 뜻밖에 선선히 일어섰다.

 

장하고나 우리들은 힘찬 근로자

새 세기를 창조하는 승리의 주인

자유기발 휘날리며 나아가나니

온 세계를 진감하는 단결의 웨침

동무들아 이 기세로 굳게 뭉치여

인민경제계획을 승리로 맺자

 

은실은 노래를 불렀다. 명랑하고 씩씩한 노래였으나 명랑하고 씩씩한 그것으로 해서 짓밟히고있는 그들의 가슴을 허빈다. 은실은 지금 노래를 부르고있다기보다 그 노래를 타고 오늘도 활짝 꽃피고있을 그의 고향으로 날아가고있는것이다. 그런 그는 노래를 끝내고도 한참 그대로 서있었다.

모두가 박수를 치자 동무들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그의 눈시울에 한방울의 눈물이 맺힌다.

《너는 철없을 때지만 조금이라도 그런데서 살아봤으니 좋겠다.》

청소부아주머니가 한숨을 짓는다.

《철없을 때 일이지만 나는 어느 하나도 잊지 않고있어요. 잊을수가 없는걸요. 견디기 힘들 때면 그때 생각을 해요. 언젠가 반드시 그런 때가 또 온다고…》

《그런데 무엇때문에 이런데를 왔지?》

호일이가 볼부은 소리로 묻는다.

《나보고는 그렇게 물어도 괜찮지만 우리 아버지보고는 그렇게 물어서는 안돼. 금방 땅을 치며 통곡할것이고 그렇게 되면 누구도 말릴수 없으니까.》

은실은 한숨을 쉬였다. 괴로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속은거야! 장연에다 원자탄을 터친다고 해서 피난나왔었는데 미국놈들이 비행기로 마구 폭탄을 퍼부어서 돌아갈 길이 막혔대. 지금도 술만 잡수시면 <이게 무슨 일이냐, 기와집을 버리고 판자집에서 살고 흰쌀밥을 버리고 시래기죽을 먹으며 이 고생을 하다니. 나는 인제 북으로 돌아갈래야 갈수 없는 몸이다. >라고 하셨어. 그런데 또 득찬이가…》

은실이는 목소리가 떨려 말을 멈춘다. 내심에 항상 불타고있는 사나운 증오의 불길을 지탱할수 없는듯 지혜의 두손을 그러쥐고 안깐힘을 쓴다.

《통일만 되면 그렇게 살수 있어.》

호일이가 얼굴을 불쑥 쳐들며 말했다. 은실이가 맥없이 묻는다.

《통일은 누가 선물로 갖다주나요?》

호일은 말문이 막혀 얼굴을 찡그리였다. 옆에서 듣고있던 덕대가 주먹으로 풀섶을 한대 갈기며 참견했다.

《미국놈들을 쳐부시면 된다고 아까 그러지 않았어?》

그러자 다른 수리공이 어정쩡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쳐부신단 말인가? 쳐부시기는커녕 쳐부시겠단 말만 해봐. 군사재판이나 무슨 <혁명재판>에 걸려 잘못하면 저승에 간다구. 헌병이니, 형사니, 순경이니, 그놈들의 앞잡이니… 뭐 그런게 오죽 많냐? 찍해도 잡아가고 짹해도 죽이는 판에…》

오늘은 어째선지 별로 말참견을 안하던 진국로인이 갑자기 대통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큰소리로 쏘아붙인다.

《젊은것들이 그러니까 무골충이란 말이다. 흥, 알긴 잘도 안다! 아, 그래 권세를 가진 놈들과 싸우는 녀석이 상이나 받을줄 알고 한다더냐? 감옥에 가는게 무서워 떨기만 하고 앉아있음 만사가 다 잘될줄 아냐? 네 녀석같은 무골충들이 소나 말처럼 때려몰아도 죽었소 하고 기는 시늉을 하니까 공장주녀석이 또 새로운 꿍꿍이를 하고있단 말이다. 임금을 또 낮출 궁리를 한단 말이다.》

《임금을 낮춰요?》

여러 사람이 일제히 물었다.

《낮추다마다, 20등급제가 생긴단 말이다. 그 등급놀음이 임금을 낮추자는 수작이지 뭐냐?》

《왜 낮춰요? 왜 낮아져요?》

경옥이가 얼굴이 해쓱해서 달려들것처럼 덤비였다.

《지금은 10등급이지?… 기태, 자네 좀 설명하게. 어찌 까다롭게 만들었는지 내 머리에는 그 꿍꿍이속이 선한데도 말로 외울수가 없거던…》

기태가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10등급 아닙니까. 그런데 20등급이 되니까 한등급이 두등급으로 나뉜단 말입니다. 그래서 가령 지금 1등급에 열명이 있다고 하면 20등급이 될 때에는 5명만 1등급이고 나머지는 2등급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장주는 지금 1등급값과 20등급이 된 다음의 1등급의 값을 같이한단 말입니다. 알겠어요?》

그 말을 듣자 경옥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것처럼 선뜩하였다.

《아니, 그럼 어떻게 사나 말예요. 지금 임금으로도 죽지 못해 사는데…》

불쌍한 언니, 가련한 조카, 공장주란 정말이지 너무하구나. 기계를 사들여서 공장은 더 커지는데 임금을 올리지는 못할망정 낮추다니? 그는 공장이 확장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은근히 마음이 든든해지기까지 하였었다. 공장이 커지면 사람을 더 받아야 하니 경옥이 자기의 일자리는 더욱 든든해진다고. 그런데 임금을 낮추다니…

《그런 법이 어데 있어요? 그런 법이…》

경옥은 울상이 되여 부르짖었다.

《경옥이야 일자리만 떼우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 하잖았어?》

한 녀공이 인제 와서 울상을 하는것이 아니꼽다는듯이 비꼬았다.

《그래도 분수가 있지 않어? 제놈이 기르는 개 한마리가 한달동안 먹어대는 품이 내가 십년동안 버는 돈에 맞먹는다는데 그게 될말이니?》

경옥은 임금을 낮추겠다고 한것이 그 녀공이기나 한것처럼 대들었다.

지혜는 그 경옥의 편을 들었다.

《경옥이 말이 옳아, 분수가 없어. 그러니 가만있을수 없지 않어?》

《지혜, 넌 왜 사람의 마음을 허비여놓니? 가만 안 있으면 어쩐단 말이냐?》

경옥은 눈이 둥그래서 웨쳤다.

《그것도 모르겠니? 싸우지 뭐, 왜 임금을 낮추는가고 대들지 뭐.》

옥채가 그리 큰일도 아니라는듯 웃으며 말한다. 경옥이가 아연한 표정

으로 묻는다.《싸우다니? 당장 목달아날 소리 함부로 해?》

《혼자서 싸우지 말고 힘을 합해서 싸워야 하지 뭐.》

옥채에게는 아무것도 까다로울것이 없는 모양이였다. 이번에는 호일이가 가만있지 않았다.

《힘을 어떻게 합하는건지, 합해서 어떻게 싸우면 되는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요.》

그는 벌떡 일어서기까지 하면서 소리를 쳤다. 기태가 그의 팔소매를 잡아당겨 앉히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야 할게 아니냐? 소리만 치지 말고 머리로 생각하란 말이다.》

《네 머리가 나보다 낫다면 네 생각을 말하란 말이다.》

호일은 찌뿌둥해 앉으며 대꾸하였다. 기태는 미소를 그리였다.

《남이 싸울 때 너도 싸우겠니?》

《시시한것 다 묻네. 안 싸울 사람이 묻겠는가?》

《싸우는것이 이렇게 산놀이하듯 즐거운것은 아니겠지? 코가 터질수도 있고 힘이 부쳐 두려움에 떨수도 있다. 아까 누가 말했듯이 상대방은 돈

과 권세와 헌병과 경찰과 그 무시무시한것들을 다 가지고있으니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수도 있다.》

호일은 지혜와 기태를 번갈아보더니 되물었다.

《너는 그런것과 싸울 각오가 있단 말이냐?》

《있구말구.》

기태의 태연하나 힘있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너의 아버님이 굶어도 말이냐?》

기태의 아버지는 몇해전부터 중풍에 걸려 바깥출입을 못한다. 기태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진국로인이 성이 나서 소리를 친다.

《이 시라소니야! 언제는 굶지 않았냐?》

기태는 천천히 어떤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가슴아프지만 그런 각오도 있다.》

기태의 조용한 그 한마디는 모두의 가슴을 불현듯 세차게 흔들었다. 진국로인이 잠시 기침을 깇다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싸우는것보다 낫단 말이냐? 네녀석들이 지금처럼 일하다가는 언젠가 골병이 들어 앓아누울거다. 그런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가슴이 안 아픈줄 아냐? 원통하기는 마찬가지야. 그래도 싸우는 아들을 보는편에 사는 값이 있단 말이다.》

별안간 호일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쓰고있던 모자를 땅에 집어던지면서 웨치였다.

《나도 그럴테다. 자, 말해라.》

기태는 일어선 호일을 다시 끌어앉히고 벗어버린 모자도 씌워주었다.

《당장은 힘든것이 없다. 오늘 코가 터지는것도 아니고 래일 너의 아버님이 굶지도 않는다. 우선은 우리 서로가 한마음이 돼야 한다.》

《지금은 뭐 모두가 서로 틀렸단 말이냐?》

《틀린게야 없지…》

기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가 불쑥 이렇게 참견을 하였다.

《마음이 합쳐지면 자본가가 저절로 뒈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 말 옳다. 저절로 뒈지지 않는다.》

기태는 말을 계속하였다.

《마음을 합한다는것이 기쁠 때, 슬플 때 함께 기뻐하고 슬퍼한다고 다되는것은 아니니까. 싸울 때도 함께 발벗고 나서는 결심이 합쳐져야 한단 말이다.》

《결심만 한다고 다돼?》

《호일이녀석 우물채 들어마시겠다.》

진국로인이 대통을 입에 문채 말했다.

《마음만 합쳐놓으면 필요할 때 일제히 일떠설수 있단 말이다.》

《그게 그리 쉽소?》

청소부아주머니가 한탄을 한다.

《쉽지 않아두 하잔 말이다!》

호일이가 덤벼치듯 고아댔다. 화제가 거기까지 도달하자 모두 긴장한 빛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지혜는 기태를 쳐다보았다.

이 산놀이가 도달해야 할 목적의 절정에 도달하고있다는것을 느끼면서 지혜의 눈에도 긴장의 빛이 어리였다. 옥채, 은실이, 호일이, 덕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옥은 아직 다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 자각이 시간에 달려있을뿐이라는것만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밖의 녀공들, 수리공들 역시 그렇다. 지혜는 말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부치는것은 기태가 도와줄것이다.

《쉽지 않다는 아주머니말씀 옳아요. 쉽지 않아두 해야 한다는 호일의 말도 옳아요. 그러니 우리는 힘든 일이지만 꼭 해야 한다는 결심을 두고두고 자꾸만 다져야 해요. 처음에는 무섭기도 하고 공연한 생각같기도 하지요. 그런 생각들을 이를 악물고 털어버려야 해요. 우리는 우리가 이대로 참기만 한다면 굶고 병들고 죽을수도 있다는것을 다 알고있지 않아요? 경옥이도 그걸 알고있지? 그렇지만 경옥은 조카나 언니가 지금보다 더 불쌍해질것 같아 그것이 두려워 미처 싸울 결심을 못하고있어요. 경옥이 혼자라면 누구보다 앞장에 서리라는것을 우리는 알고있어요.》

《지혜, 너는 왜 글쎄 자꾸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니? 그러지 않아도 내 가슴은 쓰린데…》

경옥은 신경질이 나서 소리쳤다.

《마음이 아픈것은 너만이 아니야. 생각해보려무나. 기태씨 아버님은 중풍에 앓고계셔. 은실이 아버지도 앓고계시고… 게다가 은실에게는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어. 그리고 또… 왜 너의 가슴만 아프겠니?》

지혜는 묻듯이 경옥을 바라보았으나 경옥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잠자코 있다.

《그러니 마음을 다져야 해. 자기 마음은 자기가 강하게 만들어야 해.》

지혜는 자기 역시 그 결심을 매일처럼 굳게굳게 다지고있다.

《우리는 여기 열다섯명이 있어요. 우선 우리 열다섯명이 마음을 합치자요. 다 함께 결심을 하잔 말이야요. …》

진국로인이 때마침 지혜를 도와나선다.

《두려울게 뭐 있나? 예서 더 나빠질게 뭐가 있기에 두렵겠나. 응? 감옥에서 죽으나 기계밑에 쓰러져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야! 살려거든 사람의 값이 있게 살아야 해!》

호일이가 또 일어선다. 또 모자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소리쳤다.

《맹세를 하잔 말이다!》

지혜는 한껏 긴장한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사람들의 두눈에 비낀 광채를 똑똑히 포착한 지혜는 뜨거운 피가 용솟는듯 한 격한 감동을 느끼였다. 그렇듯 쓰라린 나날속에서 짓밟혀 신음하고있는 이들의 가슴속에 인간된 용기와 엄숙한 헌신이 맥맥히 살아있는것이다. 지혜는 격동을 누르듯 두주먹을 가슴에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결심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해선 안돼요. 우리를 무서워하는 원쑤놈들은 우리의 마음을 탐지하려고 갖은짓을 다하고있어요. 그러니 결심은 이악스럽게 가슴에 꼭 간직하고 더 굳세게 다져야 해요. 우리 마음을 놈들이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요.》

그때 은실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 맹세를 다져요. 맹세를 깨뜨리는 사람은 사람의 값어치가 없어요. 우리모두 마음속에서 다져요.》

모두 빛나는 눈들로 서로들 바라보았다. 경옥이만이 불안한 시선으로 동무들을 둘러보며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난 어쩌면 좋니?》

지혜는 뜨거운 손으로 경옥의 차디찬 손을 잡아주었다.

《경옥이도 맹세를 어기지 않는다는것을 나는 알아!》

그들은 흰쌀밥이 든 밥곽을 꺼내여 점심을 먹었다.

《기름이 찰찰 도는구나, 찬이 소용없어… 왜 이렇게 밥이 빨리 목구멍에 넘어가니?》

청소부아주머니가 어쩔줄 몰라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따금 목이 메였다. 집안식구들 생각이 나서였다.

《이봐요. 우리의 계돈으루 몇달에 한번이라도 한집씩 흰쌀밥을 선물할수 없을가?》

한 녀공이 조심스럽게 동무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모두 계돈을 맡아가지고있는 옥채를 본다. 옥채는 잠시 생각하더니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할수 있어!》

사람들의 얼굴에 말할수 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빛이 비꼈다.

《그날 얼마나 좋겠니?》

그들의 머리에 흰쌀밥을 먹는 식구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눈을 감는다. 밥을 먹고나서도 오래동안 말없이 그저 흰구름이 송이송이 떠도는 하늘과 첩첩한 산봉우리너머 아득한 서해를 바라보고있었다.

《이걸 내놓을 때가 됐나보다.》

도흥령감이 한장의 신문지를 땅우에 펴더니 소중히 무릎에 올려놓고있던 상자를 그우에 올려놓으면서 조용히 젊은이들을 둘러본다. 워낙 말이 없고 양순하기 이를데없는 령감이여서 모두 의아해서 쳐다본다.

《기태의 아버지 춘보령감이 보낸거네. 몸이 성하다면 자기가 들고 왔을것이지만 나를 주면서 신신당부하더군. <여기 살구가 있어. 그런데 보통살구가 아니야. 이걸 나눠주기 전에 어떤 살구라는걸 꼭 말하라구. >, 그 령감은 외구 또 외웠다네.》

《기태형, 집앞에 있는 살구나무에서 딴거지요?》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그렇지, 그 살구나무의 살구지. 그 집안에서 이 살구를 얼마나 정성껏 가꾸는지 젊은이들도 다 알겠지? 보통살구가 아니기때문에 그렇게 가꾼다네. 이 살구는 북쪽에서 온 살구야. …》

《이북에서요?》

은실이가 와락 다가서며 물었다. 도흥령감은 그런 은실을 쓰다듬듯 하는 눈길로 바라본다.

《은실아, 만경대에서 온거란다.》

《아아, 만경대!》

은실은 더 아무 말도 못하고 도흥령감의 기름때에 절고 마디진 손을 희고 부드러운 두손으로 잡았다. 그들은 은실이와 도흥령감이 어째서 그토록 감동에 젖어하는지 다 알지는 못하였지만 어떤 엄숙한 사연이 있으리라는것을 느끼면서 두사람을 주시하였다. 도흥령감은 말하였다.

《기태의 형은 어부였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고기잡이를 하고있을거다만 요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다. 그녀석이 몇해전에 어떤 선주밑에서 조기잡으러 나갔다가 그만 풍랑을 만났었다는구나. 돛대가 부러지고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는데 게다가 비까지 억수로 쏟아지고 뢰성벽력도 치고 일곱명의 어부는 천신만고 다섯시간을 견디였지만 날이 저물어갈무렵… 새롭게 밀려드는 산더미같은 파도에 배전까지 깨여지자 고기밥이 될것을 각오했더란다. 그래서 서로를 동여매기 시작했지. 어부들에게는 자기들의 시체라도 찾으라고 죽을 림박에는 그렇게 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간신히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가싶었는데 대줄기같은 비발을 뚫고 파도꼭대기로 제일먼저 보인것이 바로 공화국의 기발이라지 않니. 배운게 없는 일곱사람은 천지신명에게 엎드려 감사의 절을 했단다.

공화국배는 그것이 큰 배든 작은 배든 아무리 위험한 정황에서도 그네들이 잡은 물고기를 바다에 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조난당한 배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법이 없다는것을 남조선어부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일곱사람은 그렇게 해서 살아났더란다. 기태 형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오각별 빛나는 람홍색 그 기발이 눈앞에 우렷이 떠오른다고 하지. 그 기발이 어부들을 살려주었어.》

도흥령감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면서 입을 다물고있다.

《그래서 그 다음 어부들은 어떻게 되였나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구나. 오각별이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말할 때 그녀석의 얼굴이 말이다. 그저 고맙게 생각해서만 아니지. 자기가 이 세상에 이전과는 다르게 훌륭하게 태여났다고 생각하는것 같았어.》

사람들은 잠자코 듣기만 한다.

《그도 그럴것이, 두달이나 이북에 묵었다는구나. 풍랑속에서 그중 세사람이 몸을 다쳤는데 기태 형도 다리를 상했었지. 병원에 스무날이나 입원해서 고쳤다는데 본시 가지고있던 가슴앓이까지도 고쳐주었다는구나. 그리고나서도 한달 반이나 구경을 하고 거기 사람들과 사귀고 그랬다지 않니.》

은실이가 가슴을 움켜잡고 선참 신음소리를 내였다.

《병원에 스무날이나 있으면서 좋은 약이란 약은 죄다 쓰고 흰쌀밥에 고기, 닭알을 먹으며 있었다는데 값은 한푼도 받지 않더라지 않니? 그건 그애가 손님격이라 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거기 사람들도 모두 돈을 안내더라지 않겠니. 게다가 월급은 월급대로 받으면서 병을 고치더란다.》

《정말이예요?》

경옥이가 유난히 큰소리로 물었다.

《기태 형은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이라고는 매를 맞는 한이 있어도 해본적이 없는 애다. 그애가 한달 반이나 다니면서 보고 들은 꿈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 외우겠니? 우리들이야 상상도 못할 별천지지… 방직공장이야기 하나만 하마. 공장이라기보다 공원이라더구나. 깨끗하고 밝은 작업장에서 나들이옷 같은 연보라빛 달린옷우에 앞가슴까지 치는 흰 앞치마를 입은 직조공들은 나비같더란다. 모두 어찌도 상냥하고 똑똑해보이는지 기태 형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서있었다지 않니. 뜰에는 수림이 우거지고 련못이 있고 분수가 있고 그게 락원이지 뭐겠냐? 감독은 없구 작업반장이나 기사는 있지만서두 로동자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웃고 롱담도 하고 해서 높낮은것을 구별할수가 없었다는구나. 공장안에는 어린애어머니들을 위해 아이들을 맡아 보아주는 탁아소가 있는데 고운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이 포동포동 살이 쪄서 무슨 고관대작의 귀염둥이처럼 자라고있더란다. 일이 끝나면 로동자들은 커다란 극장이나 문화회관들에서 가야금도 타고 춤도 추더라지. 처음에는 무슨 배우들인가 했는데 작업장에서 천을 짜던 처녀들이라지 않니. 그뿐이겠니, 공장안에는 또 커다란 병원이 있구 학교까지 있더라는구나.》

《학교가 왜 공장에 있어요? 설마 직공들이 다니지는 않을테지요?》

《그럼 누가 다니겠냐? 너 호일이가 거기 있었더라면 여덟시간 일하고 공장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하구 밤에는 학교에 가서 기술도 배우고 좀 좋았겠냐? 그뿐이냐, 로동자들은 공장의 주인은 자기들이라면서 기계도 작업장도 정말 알뜰히 거두더란다. 작업이 필하면 오늘 우리는 천을 몇필 짰고 실은 얼마를 썼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일했다 하고 저들이 척척 따져가며 하더라는구나.》

《임금은 매달 꼭꼭 준다던가요?》 하는 누군가의 물음에 양순한 도흥령감이 대답을 미처 하기도 전에 진국로인이 대통으로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쳤다.

《저녀석이 잠꼬대를 하구있구나. 거기는 여기와 다른 별천지란 말이다.》

《춤도 추고 학교에 다니고 돈을 받으며 병을 고치고 게다가 8시간 일하구… 거기는 공장주가 없어요? 직공들이 그렇게 맘대로 살게…》

《주인이 왜 없겠니. 주인이 바로 로동자란 말이다.》

《땅의 주인은 농사군이구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예요. 우리들, 어린애들보고는 미래의 꽃봉오리라고 하였어요.》

은실이가 안개낀 먼 서해를 바라보며 혼자소리처럼 말하였다. 그러자 경옥이가 자기의 두무릎을 꽉 그러안으며 애타게 부르짖었다.

《우리도 그런 세상에 하루만이라도 있어보았으면…》

모두 오래동안 흥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살구이야기를 하자. 기태 형은 어느날 만경대에 갔더란다. 은실아, 너 만경대에 가보았겠지?》

《가보았어요. 김일성장군님께서 탄생하시고 어린시절을 보내신 아름답고 유서깊은 고장…》

은실은 눈을 감는다. 가지런한 살눈섭에 이슬이 맺혔다.

《기태 형은 우리들이 자나깨나 흠모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탄생하신 생가에도 갔었다는구나. 장군님께서 항상 다니시던 그 길을 걷고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더란다. 그래서 모두 생가앞에서 떠날줄을 모르고있었다지 않니? 기태 형은 만경대를 떠나고싶지 않아 저려오는 가슴에 그곳 살구씨를 품고 왔더란다. 춘보령감이 집앞에 정성들여 묻었지. 싹이 나오고 잎이 자라고 가지가 퍼지더니 살구가 열리였다. 꽃이 피고 살구가 열렸을 때 그 사연을 아는 우리들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리라…》

도흥령감은 다시 말을 이었다.

《춘보령감은 늘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봄이 돼서 그 살구나무에 새잎이 돋을 때면 마치 장군님께서 거친 주름살들을 어루만져주시는듯 하고 활짝 꽃이 피면 한평생에 별로 즐거워보지 못한 늙은 가슴에 기쁨을 안겨주시는것 같다구.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기가 그이를 제일 몸가까이 모시고있다고 자랑도 한다.》

도흥령감은 상자를 열어제꼈다. 귀한 살구알들은 하나하나 희고 깨끗한 종이에 싸있었다. …

이윽고 안개낀 먼바다에 저녁노을이 비꼈다.

《야, 장관이구나.》

누군가가 산꼭대기에 우뚝 서서 그렇게 말했다. 서해 저편으로 붉은 저녁해가 지고있었다. 처음에는 한끝이 안개속에 잠겼다. 그러자 해는 미끄러져들어가는듯 반원형이 되고 차츰 작아졌지만 노을은 마지막정열로 더욱 붉게 탔다. 이윽고 재빛안개가 그 모든것을 신비하게 감싸면서 서서히 퍼지고있었다.

그들은 귀로에 올랐다. 서로가 올 때보다 몇갑절이나 다정해졌다는것을 느끼였다. 뿐만아니라 무엇인가 가치가 있었다는것도 느낀다. 산기슭에 거의 다달았을 때 경옥은 앓음소리처럼 이렇게 말하였다.

《거기서 살았으면… 그래서 언니의 병도 고치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조카들을 보았으면…》

옥채가 그러는 경옥의 팔을 꼭 낀다. 지혜는 오늘의 모임을 빛내여준 도흥령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기꺼운 흥분속에서 처녀들과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뜻있는 날들이 계속되고있구나!)

지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여지기 아쉬운 시외의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키였다.

《삐라종이는 준비되였습니까?》

기태가 지혜옆에 바싹 다가서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두사람은 동료들보다 몇발자욱 뒤떨어져있었다.

《네.》

며칠전 기태는 지혜에게 또 하나의 과업을 맡기였다. 지혜의 첫 삐라공작이다. 지혜는 삐라초안을 써서 기태에게 보냈었다.

《몇자 고쳤습니다. 이대로 쓰겠어요.》

《음료수칸에 붙이는것 아시겠지요?》

《네.》

《그리고 밤에는 예정했던대로 거기서 모임을 가집시다.》

두사람은 곧 동료들을 따라잡았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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