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부. 영락

제 1 장. 391년 여름

 

4

 

길고 지루한 하루해가 지나가고 한여름의 짧은 밤이 들이닥쳤다.

훈훈한 바람이 누런빛을 띠고 설레이는 보리이삭을 살짝살짝 쓸어주며 지나쳤다.

산등성이에서는 볕에 타서 초들초들 시들어버린 쑥이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있었다.

온 하루 무더운 열풍에 시달린 대지는 생기를 되찾고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낮때의 무더위와 숨막힘, 아지랑이에 파묻혀 괴롭게 시달리던 대지가 이렇듯 짧은 밤이 들이닥치면 생의 활력을 되찾는듯싶었다.

밤새들이 먹이를 찾아 날개를 퍼덕이였고 개구리들이 밭뚝우에서 단조롭게 울어대고있었다.

먹물을 풀어놓은듯싶은 밤하늘에서는 이루 헤아릴수 없는 별들이 저저마다 반짝이며 대지를 정답게 굽어보고있었다.

하지만 남쪽땅 백제에서만은 짧은 밤도 안타깝고 끝이 없는 긴긴밤으로 맞고보내군 하였다.

백성들은 전쟁준비로 조세가 배로 껑충 뛰여올라 한탄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부역에 끌려나간 사람들은 밤이 깊도록 성돌을 져날랐다.

군역에 동원된 사람들 또한 장막안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주인의 손길을 안타깝게 기다릴 잡초가 무성한 곡식밭을 그려보군 하였다.

어디서나 그랬다. 나라의 방방곡곡 매 농가마다에서는 탄식소리만 높아갔고 고달픈 래일을 생각하며 사람들이 잠을 못 이루군 하였던것이다. 그래서 백제의 밤은 길었다. …

백제 좌장 진무는 진사왕의 부름을 받고 백제의 수도인 한산성으로 올라왔다. 진무는 조정의 령을 받고 지금 나라의 북변 관문인 관미성을 구축하는 공사를 감독하고있었다.

진무는 지금 나이가 마흔을 넘어선 오랜 로장이였다.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는 오랜 귀족가문에서 태여났지만 일찌기 군무에 종사하여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명성이 자자한 무장이였다.

고구려와 여러차례 싸워본 경험도 있고 서해건너 멀리 중원땅에 설치된 백제군의 태수를 지내면서 여러 이민족들과 대결해본 경험이 있는 로회한 책략가이기도 했다.

한때는 나라의 병권을 수중에 장악하였던 진무였지만 지금은 변방의 성이나 쌓는 감독관으로 지위가 굴러떨어진것이다.

력대로 백제는 진씨, 목씨, 해씨, 사씨 등 8대 성씨집단이 가장 유력하여 권력의 중추를 이루고있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5부귀족집단과 류사한 성격을 가진 귀족집단들로서 강력한 지반에 토대하여 왕권과 암암리에 맞섰다.

백제왕권 역시 이런 귀족집단을 옆구리에 끼지 못하면 나라를 통치할수 없는 사정으로 왕권과 귀족집단의 결탁이 이루어져있다.

백제를 제국으로 일으켜세운 근초고, 근구수왕시대에는 이 귀족집단이 강력한 왕권에 눌리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침류왕, 진사왕이 즉위하자 고개를 쳐들고 로골적으로 국정에 참여하게 된것이였다.

백제조정은 진씨, 목씨, 해씨, 사씨 등 귀족집단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말았다.

대체로 이 귀족집단들은 왕실과 혼인을 맺어 권력을 유지하군 하였다. 침류왕시기에는 진씨가 왕실과 사돈간이 되여 권력을 독점하였다면 진사왕이 즉위하면서 해씨가 왕과 인척을 맺어 전횡을 부렸다.

이 귀족집단들은 밖으로는 고구려에 도전하여 전쟁을 때없이 일으키고 안으로는 서로 물고 뜯는 추악한 권력다툼으로 날과 달을 맞고 보냈다. 진무는 이러한 씨족정치를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비록 진무 역시 진씨귀족집단의 한 성원이였지만 어느 한 성씨의 귀족집단이 왕을 끼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것을 견결히 반대하였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동족의 나라 고구려에서처럼 벼슬길을 열어놓아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있는 인재들을 적극 등용하고 도처에 벌려놓은 궁성건설과 사원증축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다. 또한 귀족들이 겨끔내기로 강탈해낸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며 조세를 감하고 령락된 백성들의 생활을 올려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진무가 백성들의 신역과 빈곤한 생활을 가슴아파하여 이러한 주장을 편것은 아니였다.

국력이 보다 강하고 비교적 통치질서가 바로잡힌 고구려와 대결하자면 내부의 단결, 즉 귀족들의 전횡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백제는 차츰 쇠약해졌다.

지금 진사왕을 끼고 나라의 권세를 흠뻑 손아귀에 틀어쥔 좌평 해루같은자는 수중에 가병들까지 거느리고 온갖 전횡을 다 부리는판이였다. 수십년이 지난 후날 해루의 손자 해구는 백제의 문주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이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는자 역시 4대 성씨의 하나인 달솔(2품벼슬) 진남, 진로 등이였다.

백제의 형편이 이러할 때 진무의 주장은 귀족들의 감정에 거슬리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여 진무는 끝내 귀족들의 질시와 랭대속에 모해를 받고 병권마저 빼앗긴채 어설핀 외직으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진무는 이렇게 더 나가다가는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반드시 멸망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지금 백제는 고구려가 서북방의 강적들과 간고한 싸움을 하고있는 허한 틈을 타서 배신적인 공격을 들이대여 일시 승승장구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한갖 허상에 불과한것이였다.

고구려가 모든 국력을 다해 전면전에 진입한다면 어찌될것인가.

진무는 백제사람들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구려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고구려군의 싸움방식과 전략을 깊이 파악하고있으며 선진적인 통치방식에 크게 공감하고있었다.

진무는 결단을 내렸다.

조정안에서 귀족집단을 축출하고 진사왕을 설복하여 보다 강력한 왕권중심의 체계를 세우리라 결심했던것이다.

하여 북변의 관미성쌓기공사를 감독하는 한편 제 주위에 새로 일어서는 신진세력들을 시급히 집결시켰다.

무예가 출중하고 백성들속에서 인망이 높은자들과 전쟁에 참가해본 경험많은 무장들을 골라내여 자기 심복으로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가야세력을 끌어당겨 외부로부터의 후원을 삼기로 하였다.

가야 역시 여러 씨족귀족집단이 국정을 운영하는 낡은 통치방식의 소국련합체였다. 여기에서도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여 낡은 통치방식을 깨버리고 강력한 왕권에 의한 나라의 통치를 주장하고있었다.

진무는 이러한 세력을 손아래 끌어들여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려고 작정하였다. 그 계획이 거의 실현단계에 이른 이때 진사왕의 부름을 받고 한산성으로 올라오게 된것이였다.

한산성에 올라온 진무는 집에도 들리지 못하고 그간의 축성정형을 보고하려고 궁성부터 찾아갔다. 그러나 궁성수문장에게 진사왕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아무리 전갈을 넣어도 웬일인지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지금 나라의 권력을 한손아귀에 틀어쥐고있는 좌평 해루의 령으로 일체 궁성으로의 출입을 금한다는것이였다.

진무는 하는수없이 발걸음을 돌릴수밖에 없었다.

수문장따위와 다투어봐야 결말은 뻔했다.

진사왕도 좌우지하는 해루가 취한 조치라면 궁성안에 들어갈 도리가 더는 없었던것이였다. 진무는 자기가 없는새에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흐르고있음을 감촉했다. 왜 관미성공사장에서 나를 한산성으로 불러올리고 이렇듯 궁성출입을 거절하는것일가. 혹시 해루를 비롯한 귀족들이 교묘하게 파놓은 함정이 아닐가?!…

진무가 이런저런 착잡한 생각에 잠겨 저자거리를 걷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앞을 막아서는것이였다. 진무는 얼결에 고개를 쳐들다가 깜짝 놀랐다. 다부진 체격에 영특하게 잘생긴 중키의 사나이가 앞을 막아섰던것이다. 그는 진무의 부하인 연우였다.

연우는 아라의 문벌귀족집단출신의 무사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적자출신이 아니라 서자로 태여났다.

하여 그는 큰 문벌귀족의 혈통을 이었지만 가문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으며 방랑생활끝에 백제땅에까지 흘러들어와 진무의 수하에 들어오게 된것이였다.

진무는 연우의 영특함과 강의한 기질에 탄복하여 그를 수중에 거두었다. 연우 역시 백제의 로장 진무를 등에 업고 자신의 꿈을 이룰 결심밑에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된것이였다.

그동안 연우는 진무의 손발이 되여 궂은일, 마른일을 가리지 않았다.

진무의 뜻을 받들어 바다건너 멀리 중원에도 여러번 다녀오고 또 가야의 여러 귀족세력과의 줄을 이어주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말그대로 연우는 진무의 일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있지만 그는 또한 자기대로의 야망을 속에다 품고있는 사람이였다.

백제를 등에 업고 가야땅에 나의 왕조를 세우는것!

이것이 바로 당당한 문벌귀족의 혈통을 타고났으면서도 서자라는 한가지 리유로 아라땅에서 내쳐진 연우가 속에 깊이 묻어두고있는 야망이였다. 사람됨이 누구보다 듬직하고 꾀가 많은데다가 그 무예 또한 출중하여 연우는 진무의 높은 신임을 얻고있었다.

연우는 원래 몇달전에 진무에게 가야땅에 갔다오겠으니 말미를 달라고 하고는 아무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산성 저자거리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불쑥 나타났으니 진무가 깜짝 놀랄만도 한것이였다.

《네가 여긴 어인 일이냐?》

연우는 날카롭게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급히 진무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긴 주위가 혼잡하니 저기 주막집으로 가시오이다. 긴히 아뢸 말이 있소이다.》

진무는 연우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고는 더 묻지 않고 순순히 따라섰다.

그들이 왼쪽 골목길로 꺾어드니 장대우에 주기가 걸려있는것이 눈에 띄웠다. 여기가 아마 저자보러 나온 술군들이 이따금 들리군 하는 주막집인 모양이였다.

몸이 체소하고 삿갓을 얼굴이 가리도록 푹 눌러쓴자가 마중나왔다.

진무는 그의 허리에 매달려있는 쌍검을 보고서야 치희라는 처녀무사임을 알아보았다. 연우가 늘 수족처럼 데리고다니는 처녀였다.

진무는 은연중 치희를 대할 때마다 이상한 예감이 들군 하였다.

치희라는 계집 하나로 인해 연우의 운명이 뒤바뀔것만 같은 조바심이 끓어오르군 했던것이다.

치희가 고구려출신이여서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드는것일가?

아니면 처녀의 수심이 깃든 인상적인 검은 눈에서 그 어떤 운명의 앞날을 본것인가?!

아무리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 원인을 따져보았으나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연우를 몇번 만나 이제라도 치희를 멀리하라고 타일러도 보았으나 그는 설사 치희로 하여 불행에 빠진다고 해도 절대로 저버릴수 없다고 고집했다.

물론 진무는 그들 두사람이 어떻게 만난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연우가 치희를 수중에 거두게 된 그때일이 또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 당시 진무는 중원에 설치된 백제군의 태수직을 받고 바다를 건너갔었다.

그때 13살의 소년이던 연우도 진무를 따라 중원으로 가게 되였다.

당시 중원에 설치된 백제군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중원의 정치정세의 파동을 직접 겪어야 하는 국면에 처해있었다.

백제가 중원의 산동땅에 백제군을 설치한지도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성을 높이 쌓고 백제땅에서 백성들을 이주시켰으며 주둔군의 병력을 늘여 린접한 군, 현에까지 세력을 뻗치였다.

백제의 욕심으로서는 본국에 못지 않는 광대한 령토를 얻고싶었던것이다. 그러나 여러 이민족들이 서로 물고뜯는 소용돌이속에서 간신히 세력지반을 구축하였으나 이제 어떤 타격이 어디서부터 가해지겠는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백제는 근초고왕시대에 벌써 중원의 땅을 떼여가지고 거기에 거점을 두어 고구려를 앞뒤로 견제할 야망을 가지고있었다.

근구수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의 유주진출과 료서점령은 백제의 야망을 한껏 키질하는것으로 되였다.

하여 백제는 고구려군의 진공에 때를 맞추어 바다로 군사를 날라 료서땅의 일부를 점령하였으며 중원이 혼란된 틈을 리용하여 산동에로 그 거점을 옮겼다.

당시 북부중원지역에서는 한족이 아니라 북방이민족들이 서로 나라를 세우고 령토확장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때 륙지로는 고구려군이 진격해오고 바다쪽에서는 백제가 건너오니 북방 이민족들은 될수록이면 서로 충돌을 피하는 태도를 취하고있었다.

백제는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산동땅을 차지하자고 비래지인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이 백제군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백제조정에서는 항상 유능하고 로련한 무장을 태수로 선발하여 보내군 하였는데 지략이 출중한 진무가 태수의 인장을 받고 바다를 건너갔던것이다.

진무는 그때 아라출신의 총명하고 영특한 연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갔었다. 자식이 없는 진무에게 있어서 연우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다만 그 출신이 아라인의 혈통이라 서둘러 결심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진무는 연우를 아들처럼 끔찍이 위해주고 아껴주었다.

백제군의 태수로 부임된 진무는 전례를 따라 전진의 수도 업성을 찾아갔다.

당시 백제군과 이웃한 나라인 전진에 찾아가 자기가 이곳 태수로 부임된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업성의 객관에 머무르게 된 진무는 어느 하루 시간을 내여 저자거리를 돌아보려 연우와 함께 밖에 나갔다. 업성은 전통이 있는 오랜 도시였다. 한때 연나라의 수도로 번성하였으나 진나라군대의 공격으로 황페화되였다가 다시 진나라의 수도로 정해지면서부터 활기를 되찾은것이였다.

저자거리를 돌아보던 진무와 연우는 뜻밖의 광경에 부닥치게 되였다.

저자 한복판에서 대대적인 노예경매가 펼쳐진것이였다.

전쟁과 략탈로 붙잡혀온 여러 이민족의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여 팔려가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이때 그들의 눈길을 끈것은 너덜너덜하게 해진 고구려옷차림의 어린 처녀애였다. 병색이 도는 누런 얼굴에 찢어지고 해진 팔소매가 깡충 올라가고 치마는 무릎도 가리지 못하였다.

노예시장의 감독들이 휘두르는 채찍을 쳐다보는 처녀애의 검은 눈에 공포가 비꼈다. 너무도 애처롭고 비참한 모습이였다.

처녀애의 모습이 하도 처량해서인지 그 누구도 선뜻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도리질하며 물러서자 노예감독은 성이 독같이 나서 처녀애의 어린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

진무가 미처 말릴새도 없이 연우가 대우에 뛰여올랐다.

자기보다 체통이 두배는 됨즉한 노예감독을 때려눕히고 채찍을 빼앗아들더니 내리패기 시작했다. 연우의 행동은 어린 소년이 아니라 마치 드센 무사의 기세였다. 처녀애는 겁에 질린 검은 눈으로 바닥에 나딩굴며 비명을 지르는 노예감독과 성이 독같이 올라 채찍을 휘두르는 연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른 노예감독들이 눈이 뒤집혀 우르르 밀려 들었다. 싸움판이 커지자 진무도 하는수없이 개입해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순식간에 10여명의 노예감독들이 진무에게 얻어맞고 혼절하여 쓰러졌다.

노예시장은 삽시에 대혼란에 빠졌다. 서로 밀고 닥치는 혼란속에서 노예들이 집단적으로 도주하였다. 혼란은 군사들이 동원되여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말을 몰아 저자거리를 빠져나온 진무는 대노하여 연우를 질책하려고 돌아섰으나 연우가 안고있는 처녀애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시며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제는 이웃나라와의 선린을 깨뜨렸으니 한시바삐 이 자리를 빠져나가 백제군으로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진무는 연우에게 처녀애를 제갈데로 보내주고 빨리 떠나자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연우는 처녀애도 함께 데려가게 해달라고 무릎꿇고 간청하는것이였다. 진무는 연우의 간절한 기대가 담긴 눈을 보고는 쓴입을 다시며 물러섰다.

어쨌든 적대관계에 있는 고구려출신 처녀애라고 해도 피를 나는 동족이였던것이다.

한편으로는 어려서 가문의 버림을 받고 쫓겨나 모진 방랑생활을 거친 저 연우에게도 이런 따뜻하고 다심한 구석이 있다는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무는 무사에게 있어서 동정은 금물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무사는 오직 무자비한 검이 되여야 한다고 여기고있었던것이다.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 적을 죽여야 하는것이 무사이다.

이것은 진무가 전쟁터에서 체득한 생리였다.

처녀애는 자기 이름도 또 부모가 누구인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다만 기억나는것은 맹광이라는 오빠가 하나 있었다는것, 얼굴에 칼자리가 있는 한 사나이가 자기만을 남겨두고 오빠와 함께 떠났다는것밖에 몰랐다. 오빠와 함께 떠나간 얼굴에 칼자리가 있는 사나이가 자기의 손에 나무로 깎은 자그마한 나무칼을 쥐여준것만을 기억했다. 처녀애가 겪은 악몽과도 같은 지난날의 추억은 연우의 가슴속에 동정의 불길을 일으켰다.

처녀애는 진나라군사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그후로는 하루하루가 치욕과 고통의 련속이였다. 온 중원땅으로 팔려다니며 어린 나이에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

처녀애의 지난날을 들은 연우는 자기가 수중에 거두겠다고 진무에게 청을 드렸다.

진무는 처녀애의 출신이 그닥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연우의 청이라 수락할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처녀에게 치희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처녀애의 여린 몸에 가해진 불행과 고통의 모진 운명을 통해 연우는 자기의 지난날을 찾아보았던것이다.

연우는 치희와 10년세월을 함께 하였다.

치희는 연우에게서 검술을 배웠으며 사나이들도 견디기 힘든 곤난과 시련의 고비고비를 헤쳐왔다.

어려서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했던 몸이라 그에게서는 녀성의 다심한 감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늘 원한서린 검은 눈에 비애와 증오를 가득 담고 이 세상을 살아오는듯 했다.

오직 연우를 하늘같이 여기며 그의 말이라면 지옥이라도 웃으며 들어갈 녀자였다.

치희는 진무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연우에게로 돌아섰다.

《분부하신대로 사람들을 불렀나이다.》

연우는 진무를 주막집안으로 안내하였다.

주막집안에 발을 들여놓으며 진무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막집안에 가득 들어차있는자들이 여느 술군들같지 않아보였던것이다. 진무의 불안을 연우가 가셔주었다.

《제 수하사람들이오이다. 다락방으로 오르시지요.》

다락방에 올라 탁을 마주하고앉자 심부름군이 차잔을 놓고 물러갔다.

《대관절 웬일이냐? 가야에서 언제 왔느냐?》

진무가 성급하게 물어보는데 연우는 태연하게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탁에 내려놓았다.

《댁에 가셔서는 안되오이다.》

《?!》

진무가 성급하게 입을 열려고 하자 연우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켰다.

《장군, 한산성에서 어인 일로 부르신지 아시나이까?》

《난 어명으로 성쌓기정형을 보고하러 올라온 길이다.》

진무는 연우의 입가에 차거운 미소가 훑어지나가는것을 보고 전률을 느꼈다.

연우는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진무를 바라보았다.

《지금 장군의 댁은 해루의 명령으로 일체 출입이 금지되여있소이다.

해루는 장군을 모살할 계책을 꾸며놓고 한산성으로 부른것이오이다.》

진무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리 해루가 조정을 쥐고흔드는 권력자라고 해도 백주에 공공연히 자기를 모살하려 한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해루의 속심은 설사 그렇다쳐도 진사왕이 승낙했을리 만무하다. 무슨 음모가 꾸며지는것이 분명했다.

진무는 연우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 말은 믿을수가 없다. 해루가 설사 날 해치려고 해도 진사왕은 그에 응할수가 없을것이다. 내 이길로 다시 궁성에 찾아가 전후사연을 까밝혀놓겠다.》

연우는 한참동안 침묵만 지키고 앉았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 꿈에서 깨시오이다. 이젠 누구도 장군의 편을 들지 않을것이오이다. 조정은 해루가 완전히 장악하였소이다. 진사왕은…어제밤에 승하하셨소이다.》

진무는 갑자기 자객이 들이닥쳐 칼에 찔렸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것이였다. 진사왕이 죽다니?!

왕을 움직여 귀족집단을 제어하고 강력한 왕권을 마련하여 백제를 일으켜세우려는 꿈이 여기서 깨여지고마는가. 진무는 발밑이 통채로 무너져내리는듯 한 환각에 빠졌다. 진사왕마저 세상을 떠난 이 판국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

진무가 탁자모서리를 으스러지게 틀어잡는데 연우가 침착하게 말을 건네였다.

《장군, 고정하시오이다.》

진무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들어 연우를 노려보았다.

《나라의 임금이 승하하였으면 응당 부고부터 선포되여야겠는데 어찌 이리 조용한것이냐?》

《진사왕은 오랜 병환으로 침석에 누워계셨소이다. 승하하시기 전에 장군을 만나려고 애를 쓰셨는가보오이다. 해루가 이것을 한사코 막았사옵나이다. …》

진무가 한손을 들어 연우의 말허리를 잘랐다.

《해루가 제아무리 포악한자라고 해도 임금의 의도를 어기는 리유가 있을것이다. 그것이 뭔지 알고있느냐?》

《왕위계승때문인줄로 아오이다. 진사왕은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소이다. 그러니 다음왕대는 어차피 아신에게 넘겨질것은 불보듯 뻔한 리치가 아니오이까. 아신은… 장군의… 외조카이지요.》

연우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진무는 연우의 말을 듣고서야 모든 환각에서 깨여났다.

이제는 모든것이 명백해졌다.

진사왕이 다음왕위를 계승할 자손이 없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진사왕의 친조카인 아신이 왕위에 오르게 될것이였다.

이렇게 되면 아신의 외삼촌인 진무가 다시 높이 등용될것이고 해씨를 비롯한 귀족집단들이 조정에서 축출될것은 자명한 일이였던것이다.

바로 이러한 리유로 하여 해루는 진사왕의 부고를 알리지 못하게 궁성출입을 금했으며 나중에는 진무를 제거하려고까지 나섰던것이였다.

진무는 조바심에 미쳐 죽을것만 같았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있다가는 해루에게 피해를 당할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것이였다.

자기자신이 당하는것쯤은 그리 무서울것이 없었다.

그러나 실지 해루가 아신의 목숨까지 노린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와닿자 가슴이 싸늘해졌다.

진무는 아신이 나이가 어리다는 리유로 친삼촌인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시골에 쫓겨내려가있지만 남달리 총명하고 굳센 성격만은 잃지 않고있는 인물이라고 믿고있었다.

진무는 외조카인 아신을 어렸을 때부터 무척 사랑했다.

아신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다나니 외가집에서 자라다싶이 하였는데 외삼촌인 진무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후 진무가 조정에서 영향력을 잃으면서부터 아신도 운명의 곡절을 겪었다. 그런데 해루를 비롯한 귀족들이 아신에게까지 음모의 검은 마수를 뻗친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아신을 없애고 어디 출신인지 알수 없는자를 하나 내세워 백제의 정통을 잇게 한다면 이 나라 사직이 롱락당할것이다.

진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함정에 빠진 호랑이처럼 방안을 비좁게 맴돌며 으르렁거렸다.

《해루 이놈, 기다려라. 내 이제 곧 네놈의 목을 쳐서 이 원한을 갚겠다.》

연우가 다가와 진무를 진정시켰다.

《장군, 고정하시오이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오이다. 계책을 정하여 대세를 바로잡아야 하오이다.》

진무는 연우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이 상태에서는 다른 길이란 없다. 내 이길로 해루를 찾아 목을 치겠다. 그것이 내가 살 방도이다.》

연우는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장군, 그건 무모한짓이오이다. 수중에 병권이 없이 어찌 해루와 그 무리를 쓸어버릴수 있겠소이까. 서뿔리 몸을 드러냈다가는 오히려 저쪽의 좋은 일만 해줄것이오이다.》

《네 생각은 무엇이냐?》

《우선 급선무는 아신을 모셔오는것이지요. 제 수하들을 데리고 웅진(공주)에 있는 아신을 찾아가시오이다. 해루가 자객을 파하기 전에 한발 앞질러야 하오이다.》

진무는 입을 다시였다.

《설사 아신을 데려온다고 해도 해루가 그냥 두지 않을것이다.》

연우는 얼음장같이 차거운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장군, 제 의견을 따라주시오이다. 전 이때까지 틀리는 판단을 해본적이 없소이다. 장군의 힘이 모두 진한것은 아니오이다. 해루는… 제가… 처치하겠소이다.》

진무는 놀라서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치 연우가 아닌 딴 사람을 보듯 새삼스럽게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나와 헤여진 후로 가야땅에 가있은줄로 알고있었는데 그동안 줄곧 한산성에 머물러있었느냐?》

연우는 진무의 이런 물음에 고개를 저어보였다.

《여기엔 치희만 떨구어두고 저는 아라에 갔다왔소이다.》

《그럼 어째서 한산성에 다시 돌아왔느냐?》

《장군의 신상이 걱정되여서지요. 실은 해루가 딴 마음을 먹고있다는것을 알아낸것이 치희였소이다. 해루가 수상한자들과 작당하여 음모를 꾸미고있다는것을 그 집 녀종을 매수하여 내탐해낸 치희가 제게 알려주어 급히 아라로 내려가 무리를 규합하게 된것이지요. 장군이 뜻을 이를수 있게 말이오이다. …》

진무는 한동안 넋을 잃고 연우를 바라만 보다가 꿈에서 깨여난것처럼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우, 내가 널 헛 키우지 않았구나. … 넌 자신이 맹호가 되였다는것을 내게 똑똑히 보여주었다.》

동남풍이 세게 불었다. 먼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밤동안에 기세가 좀 숙어지는듯 하더니 새벽녘이 되자 방향을 바꾸어 서해의 뜨거운 기운을 몰아왔다.

후더운 김이 강연안의 산들과 등성이들을 감쌌다.

숲속의 훤한 공지의 찔레나무옆에 두 사나이가 마주서있었다.

하나는 체격이 우람한 나이 마흔이 넘은 사나이요, 마주선 사람은 30대의 젊은이였다.

젊은 사람의 눈길이 매의 눈처럼 사납게 번뜩이고있었다.

나이든 사나이는 백제좌장 진무이고 젊은이는 왕족의 한사람이며 진무의 외조카인 아신이였다.

멀지 않은 곳의 갈밭속에서 수오리가 거쉰 소리로 짝을 부르고있었다. 아신이 서있는 뒤쪽의 물푸레나무가 훈훈한 바람에 록색잎사귀들을 살랑살랑 흔들제 아득히 먼곳에서 뻐꾹새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진무는 거의 간청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러고있을수가 없소이다. 왕자전하께서는 한시바삐 한산성으로 올라가 어라하(왕)의 자리에 오르셔야 하오이다.》

아신은 여전히 진무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고개를 쳐들고 자연의 현묘한 음향세계에만 귀를 기울이고 서있었다.

진무는 거칠게 호흡을 하면서도 용케 자기를 자제하고있다가 아신이 고개를 자기쪽으로 돌려서야 또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전하는 반드시 어라하의 자리에 오르셔야 하오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고 고구려의 압제에서 우리 백제를 구원해야 하오이다.》

아신은 얼굴을 찌프렸다. 이마에 시퍼런 피줄이 일어서서 꿈틀거렸다. 그의 기색에는 바라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떠맡았을 때의 성가스러움이 짙게 비껴있었다.

마침내 아신은 침묵을 깨였다.

《외삼촌께서는 이 조카를 제상에 놓을 제물로 만들려오이까. 흥, 어라하라… 백성의 부모가 되여 천하를 다스린다?!… 난 싫소이다. 다른 왕족들중에 누군가를 선택해주시오이다. 이런 산골에서 산수를 벗하며 지내는것이 한결 마음이 편안하오이다.》

진무는 한동안 아연해있다가 한참만에야 비로소 제정신을 수습하였다. 그의 입에서 격해진 말마디들이 튀여나왔다.

《전하, 전하를 대신하여 누가 이 나라 사직을 지켜낸단 말이오이까?》

아신은 여전히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언젠가 외숙부님은 내게 검술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검은 다루는자에 따라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쓴다고 말입니다. 외삼촌은 지금 날 보고 그런 검이 되라고 하는군요. 필요할 때 꺼내들고 그렇지 않으면 벽상우에나 걸어두는 검을…》

진무는 무릎을 털썩 끓어앉았다.

《전하, 저를 그렇게 믿지 못하겠나이까. 전 외삼촌으로서가 아니라 신하로서 왕자전하를 찾아온 길이오이다. 지금 해루가 궁성의 출입을 금하고 진사왕의 부고를 숨기고있소이다. 저들의 꼭두각시가 될 어라하를 내세워 이 나라 사직을 롱락하려 하나이다. 결단을 내리시오이다. 천하에 백제를 구원할분은 아신전하 한분이오이다.》

아신은 두눈을 꼭 감고 고개를 쳐들었다. 해빛이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지고있었다. 그의 표정은 고요했으나 내심으로는 세찬 격랑을 일으키고있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진무의 청을 받아들일것인가, 아니면?…

그는 지금 두갈래 길우에서 방황하고있는것이였다.

그의 앞에 놓인 두갈래 길이라는것도 옛말에 나오는 길과 같은것이다. 하나는 자기가 죽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살수 있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외아들은 죽지만 자기는 살수 있는 길이였다.

두 길 다 걷지 말아야 할 위험천만한 길인것이다.

진무의 도움으로 어라하가 된다?! 그러면 그후의 일은 어찌할것인가. …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되여 그들이 움직이는대로 움직이여야만 하는가. …

진무의 청을 거절한다면?! 그때는 해루라든가 다른 귀족들의 손에 죽을수도 있는것이다. 아신은 눈을 떴다.

여전히 진무는 앞에 부복하고있었다.

아신의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설 잡도리가 아니였다.

마침내 아신은 결심을 내리였다.

(어차피 두 길중에 하나는 택하여야 한다. 그러면 어떤 길을 택할것인가?…)

아신은 앞에 부복하고있는 진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외삼촌께서는 이젠 일어나시오이다.》

《전하가 결심하기 전엔 죽어도 물러설수 없소이다.》

아신은 태도를 바꾸었다.

《그럼 내가 어라하가 된다는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소이까?》

진무는 검을 빼여들고 단호하게 제 목에 갖다대였다.

《제 목을 걸고 장담하겠소이다. 만약 전하께서 이 목을 요구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겠나이다.》

사납게 눈을 부릅뜬 아신의 두눈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아신은 회의적인 태도를 일시에 버리고 얼음장같은 말마디들을 내뱉았다.

《진무장군, 평생 그 목을 나를 위해 내놓을수 있으시겠소?》

순간 진무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서리를 쳤지만 여전히 한본새로 머리를 조아렸다.

《백제의 왕실과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는 이 한몸 서슴없이 바치려니 믿어의심치 마시오이다.》

 

고요한게 어쩐지 무시무시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밤의 장막이 또다시 백제의 수도 한산성을 무겁게 짓눌렀다.

저자거리를 따라 주런이 늘어선 집들은 숨막힐듯싶은 먹장구름이 낮게 짓눌러서인지 두억시니마냥 거밋거밋 드러났다.

굴뚝속같은 어두운 골목길에 두개의 그림자가 치솟았다.

어느 모모한 귀족집의 대문가에 걸린 희미한 등불에 그들의 모습이 잠간 비꼈다 사라졌다. 둘 다 이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얼굴을 감추느라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있었다.

하나는 체격이 다부지다면 다른 한쪽은 키가 작고 체소했다.

허리에 장검을 하나씩 차고있어 살기가 감돌았다.

골목길을 삵의 걸음으로 걷던 두 그림자는 별안간 재빨리 갈라지더니 담벽옆의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였다.

아마 순라병인듯 다섯명의 군사가 홰를 들고 골목길로 지나쳤다.

체격이 다부진자가 순라병들이 사라진쪽에 귀를 기울이고있다가 짧게 말을 던졌다.

《이젠 됐다. 빨리 가자.》

그들은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에 들어서서 한참동안 동정을 살피더니 인적기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들었다.

그들의 앞에 궁궐같은 집이 불쑥 자태를 드러냈다.

좌평 해루의 집이였다. 두사람은 뒤담쪽으로 에돌아가서 담옆에 뿌리박고있는 느티나무앞에 멎어섰다.

체격이 다부진 사람이 품안에서 닷발되는 바줄을 꺼내들고 끝에 돌맹이를 매단 다음 휘휘 둘러서는 올려던졌다.

나무가지에 줄을 건 다음 그것을 타고 담우에 올라선 그 사람은 담벽밑 어둠속에 남은 사람을 향해 나직하게 당부했다.

《치희야, 너는 들어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그는 밑에서 뭐라고 대꾸하는것을 더 듣지 않고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큰 몸을 바스락소리 하나 내지 않고 가볍게 후원마당에 내려선 그는 허리춤을 더듬어 검을 빼여들고는 살금살금 본채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연우였다. 진무의 령으로 해루를 처치할 자객의 임무를 받은것이였다.

백제조정은 물론이요, 왕까지 쥐고흔들던 해루쯤 되면 그 호위의 삼엄함이 궁성에 못지 않은것이였다.

하여 연우는 밖에 치희를 떨구어두고 단신으로 해루의 집에 잠입한것이였다. 연우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그 위치가 본채에서 문을 열고 내다보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불리한 자리라는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몸을 굴리여 후원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아니나다를가 두명의 호위무사가 검을 빼들고는 살금살금 다가오고있었다. 그들이 멈추어서서 속삭이는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분명 여기 어디선가 소리가 났어.》

《잘못 들은것이겠지. 누가 감히 해루어른의 댁에 침입한단 말인가.》

《무슨 소릴 하는거야. 지금 사랑방에서 어르신의 심복들이 모두 모여 대사를 론하는줄 몰라?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한밤중에 이 고생이 아닌가.》

그들은 더이상 기척을 느끼지 못하자 투덜거리면서 본채옆으로 돌아갔다. 연우는 호위무사들이 주고받는 말을 통하여 해루와 그 심복들이 사랑채에 모여 새 왕을 내세울 모의를 벌리고있음을 깨달았다.

해루의 심복들이 모두 모여있다면 때를 잘못 고른셈이였다.

하지만 오늘 밤중으로 해루를 꼭 없애치워야만 했다. 만일 그들이 새 왕을 내세우고 조정을 꾸리고나면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고말것이다.

그다음에 일을 치르어봤댔자 반역의 루명이나 쓰고 백제를 분렬시킬뿐이였다. 연우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차림새를 갖추고 사랑채에 조용히 다가서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여기에 숨어 해루가 나타나기만을 한정없이 기다릴수도 없는 몸이였다.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아마 야경을 도는지 호위무사 하나가 초롱불을 손에 들고 본채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연우는 순간적으로 결심을 하고 상대앞까지 굴러가서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화닥닥 놀라 뒤걸음치는자의 목을 베여버렸다. 그리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잡아서 조용히 눕히였다.

죽은자의 옷을 벗기고 시체를 본채마루밑으로 굴려넣은 연우는 호위무사의 차림으로 초롱불을 들고 태연히 사랑채쪽을 향해 걸었다. 사랑채앞에는 두명의 호위무사만이 버티고 서있는데 연우를 제 동료로 여겼는지 주의를 돌리지 않는것이였다.

연우는 뒤로 돌아가 귀를 기울이고 섰다.

안에서 열기띤 말마디들이 새여나오고있었다.

《…아직도 아신과 진무의 행방을 찾지 못했느냐?》

《진무의 집앞에 수하들을 잠복시켜놓은지 이미 오랬소이다.》

《이런 어리석을데라구야. … 그래 진무가 제 죽을 함정인지도 모르고 범의 아가리에 들어오겠는가?》

《좌평어른, 고정하시오이다. 래일 진사왕의 <유서>를 조정에 공개하고 왕위책봉을 바꾸고보면 아신과 진무가 무슨 수로 이것을 막겠소이까?》

연우는 바싹 긴장하여 다음말을 기다렸다.

해루가 입을 다시는듯 하더니 불쾌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건 한갖 수단에 불과한것이지 목적은 아니다. 아신과 진무가 이 세상에 없어야만이 우리의 목적이 달성된다.》

연우는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안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더는 말소리가 밖으로 새여나오지 않았다.

순간 본채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마 호위무사의 시체가 발견된 모양이였다.

연우는 더 지체하지 않고 문을 박차며 안으로 뛰여들었다.

탁자를 마주하고앉은 네명의 사나이가 질겁하여 뒤걸음쳤다.

《누…누구냐?》

창황중에도 몸집이 비둔한 사나이가 검을 뽑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좌평 해루였다.

연우는 두어걸음만에 해루의 면전에 뛰여들며 검을 후려쳤다.

《으…윽-》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며 해루의 큰 몸집이 천천히 넘어갔다. 다른자들이 정신을 차렸을적에는 이미 해루의 숨이 넘어간 뒤였다. 남은 세명이 칼을 빼여들고 달려들었으나 연우의 적수가 못되였다. 둘을 좌우로 베고 정면으로 달려드는자의 가슴을 직선으로 힘껏 찔렀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가자 밖을 지켜섰던 호위무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여들었다.

연우는 문옆에 미리 잔뜩 노리고있다가 앞에서 들어오는자의 가슴을 발로 힘껏 올리차며 밖으로 뛰여나갔다.

《자객이다!》

본채쪽에서 세명이 미친놈처럼 소리치며 검을 빼여들고서 정신없이 뛰여왔다.

사방에서 홰불들이 우왕좌왕하며 사랑채를 향해 다가오고있었다.

연우는 네명의 무사에게 둘러싸인채 검을 비껴들고 서있었다.

어차피 조용히 빠져나가기는 이미 그른것이고 사생결단을 해야 했다.

호위무사들도 무예실력이 출중한자들이라 절대로 덤비지 않았다.

어쨌든 수적으로나 또 처한 상황에서 불리한것은 연우였기때문이였다. 호위무사들중 셋은 검을 들었으나 나머지 한명은 거의 사람키만 한 쇠봉을 들고있었다. 그자는 쇠봉으로 연우의 머리를 겨누고는 발을 지싯거리며 조금씩 다가섰다.

연우는 검을 든 손을 척 내리떨군 자세로 서있었다.

얼핏 보기엔 형세에 짓눌려 모든것을 체념한듯 했으나 빈틈이 하나도 없고 물면처럼 고요한 자세였다. 이러한 연우의 자세에는 마치 벼랑우에서 굴러내리려는 바위돌과도 같은 무서운 힘이 숨겨져있었다.

호위무사들은 서뿔리 덤벼들지 않고 연우의 주위를 빙빙 돌며 한치한치 다가들었다. 달빛을 등지고 서있는것이 연우에게 유리한 조건을 조성해주고있었다.

그의 뒤켠에는 사랑채가 거밋하게 솟아있고 앞은 넓은 마당이였다.

연우는 사랑채의 그림자속에 파묻힌채 달빛에 드러난 호위무사들의 자태만을 노려보고있었다.

이윽고 검을 든 세명의 호위무사가 동시에 연우를 공격했다.

둘은 발걸음을 크게 떼여 정면으로 짓쳐들어오며 연우의 머리를 바라고 검을 힘껏 내리쳤으며 한명은 측면에서 옆구리를 급습했다.

순간 연우는 허리를 휘청 숙이며 머리우에서 떨어지는 칼날을 피하는 동시에 한편 검을 곧추 세워들고 옆으로 파고드는자의 몸통을 베였다.

공격에서 실패하여 반대켠으로 빠져나간자들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기 전에 연우는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해들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상처를 입은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렇게 세명을 단 한번의 반공격으로 베고나서 연우는 몸을 돌리는 순간 무엇인가 머리우로 휙 떨어지는 륙감에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맞받았다. 순간 칼날의 중둥이가 부러져나가며 공격당한 힘에 못이겨 연우는 땅에 나딩굴었다.

쇠봉든자의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였다.

그자는 쇠봉을 윙윙 소리가 나게 휘둘러대며 재차 연우를 공격했다.

연우가 일어설 사이를 두지 않고 누운 자리에서 박살낼 속심이였다.

연우의 머리우에 쇠봉이 떨어질 아슬아슬한 순간 갑자기 그자는 봉을 맥없이 떨구더니 털썩 무릎을 끓고 연우의 몸우에 엎어졌다.

연우가 일어서며 그자의 멱살을 잡아일으켜보니 목에 한뽐길이의 치희의 단검이 꽂혀있었다.

《어디 다치신데는 없으시오이까?》

《그만큼 들어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굳이 여기까지 들어온단 말이냐.》

연우의 꾸중을 들으며 치희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말없이 서있었다. 방금전에 단검을 던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다.

홰불들이 들이닥쳤다. 마당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시체들과 검을 들고 서있는 자객들의 모습을 본 하인들은 들고온 홰불을 집어던지고 황급히 달아나버렸다.

연우는 부러진 검을 집어던지고나서 침울하게 말하였다.

《이젠 모든것이 끝났다. 가야사람이 백제의 새 왕을 세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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