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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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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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는 강우에게서 왔다. 애청학원에서 유일한 사치품인 전화는 학생들이나 학업을 위해서는 아무런 필요도 없는것이였지만 실습장의 《상거래》를 위해서는 극히 필요한것이였다. 그래서 교감은 월급을 체불하고 교편물을 사는데는 관심이 없어도 전화료만은 정확하게 물고있다.

《영애한테 래일 가지 않겠소?》

얼마전에 지혜는 고향에서 정양하고있는 영애한테 한번 가보고싶다는 말을 강우에게 한적이 있다. 강우는 그것을 잊지 않고있었던것이다. 래일은 일요일이다.

《가을을 끝낸 농촌에 대해서 뭔가 쓰라고 하오. 같이 가겠지?》

지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강우와 함께 가는것은 기쁘기도 하였고 얼마간 난처하기도 하였다. 애청학원에 대해서, 학생들에 대해서 지혜는 자기가 새롭게 느끼고있는 모든것을 영애와 둘이서 나누고싶었다. 어째선지 강우가 끼우면 그 모든것을 말할수 없을것 같은 불안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한편 그렇게 생각하는것이 강우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내키지 않는 마음을 누르고 가겠다고 하였다.

《오늘은 시간이 없소?》

《수업이 필하면 가정방문을 가야 해요.》

지혜는 득찬이네 집에 가려고 득찬이와 약속까지 하였다.

《요다음으로 미룰수 없겠소? 만나고싶소.》

강우는 만나고싶다는 말을 아주 낮은 소리로 하였지만 가슴에 안겨오는 부드러운것이 있었다.

《꼭 가야 해요. 학생과 가기로 약속까지 했는데요.》

학생과의 약속은 지혜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것이였지만 강우에게는 리해되지 않는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우는 너그럽게 웃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럼, 래일 새벽 첫차로 갑시다. 내가 일찌기 지혜한테 가겠소.》

《네…》

지혜는 딴 선생들이 강우의 목소리를 들은것 같아 민망하였다. 그렇지만 강우와 함께 이야기하는 그 얼마동안은 마치 즐겁고 유쾌한 다른 세계를 거닌것 같았다. 아직도 그 따사로운 여운에 잠겨있는 가슴속이 조용히 고동친다.

《지금이 어느때라고 여직 파리가 살아있다니까.》

교장이 파리채로 책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옷깃에 스며 겨울을 날 근심이 가슴을 저리게 하는 때였다. 실습실에서는 대패질소리며 톱질소리들이 간단없이 들려왔다.

《김선생, 수업료 미납자가 열다섯이나 되니 어떻게 되였소?》

상두가 얼굴을 찡기고 영철선생에게 따진다. 영철은 담배만 뻑뻑 빨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영철선생, 들었소?》

《수업료요? 돈이 없으니 못 낼수밖에 있습니까?》

《그것도 대답이라고 하오?》

교감의 어성은 높아졌다. 영철도 오늘 가만있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모양이였다.

《생각해보시오. 밤늦도록 목공일을 하고 그애들이 언제 벌이를 해서 수업료를 내겠소? 부모에게 돈을 타서 수업료를 낼수 있는 딴 학교 학생과 다르다는것을 안선생이 몰라서 묻습니까?》

《딴 반에서는 그래도 다 들어왔소. 영철선생네 반만 목공을 하오?》

그러자 교장이 손을 저으며 참녜를 하였다.

《아아, 왜들 이러시오. 학생들이 들어도 그렇고 여기가 학교라는걸 잊지들 마오. 교감선생, 며칠 참아주면 안되겠소?》

《월사금이 제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라고 내가 이러고있습니까? 학교에 다니면 월사금을 내기마련이고 학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월사금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날자가 닷새나 지났은즉…》 하는 교감의 말을 영철선생의 더 큰소리가 뚝 잘라버린다.

《그애들이 삯전을 받고 목공을 했다면 몇달치 수업료를 한꺼번에 내였을거요. 교감선생에게 묻겠소. 여기가 학원이요 아니면 강제로동소요? 학생들은 뼈대도 자라지 않은 소년들이요!》

《김선생! 하고싶은 말이라고 다하는것이 아니요.》

교장은 뜻밖에 세찬 목소리로 영철의 말을 막는다.

《교감선생도 참으시오. 학원이 가난하다나니 모두 마음이 사나와졌군. 웃사람이 참아야 하오. 영철선생, 이번 목공일이 좀 과한건 사실이요. 하지만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신탄값을 어디서 마련하겠소? 실습장만이라도 불을 피워야 하지 않겠소?》

《정 그러신다면 저의 월급에서 제해주시지요.》

《월급날은 아직 멀었소.》

상두가 쏘아붙인다.

《체불된 월급에서 말이요.》 하는 영철선생의 말은 도전적이였다. 제각기 자기 책상에서 일들을 하고있는 다른 선생들은 한마디도 비치지 않고 잠자코 있는것으로 영철교원을 두둔하고있는것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학원의 재정에 대해서 속을 쓰는것이야 나밖에 더 있소? 날염일때문에 또 좀 다녀봐야겠소.》

교감은 웃옷을 걸치고 영철교원을 쏘아보면서 나갔다. 교감이 리사장인 백창락에게 간다는것, 거기서 못다한 영철에 대한 분풀이로 그를 헐뜯을것이라는것을 교원들은 알고있었다. 이런 일자리나마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것을 뼈에 사무치게 알고있는 교원들은 무거운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있었다.

득찬의 집은 ㅅ구에서도 변두리인 산비탈에 다락처럼 층계를 이룬 판자집거리의 어중간쯤에 있었다.

《작년까지 우리 집은 저기 언덕우에 있었어요.》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듬성듬성 서있는 나무우듬지에 붉은 석양이 비껴있었다. 잡초만이 무성한 헐린 집터옆에 지금은 미제침략군의 훈련장이 있다.

《철거되였니?》

《네, 우리 집앞에는 돌배나무 하나가 있었어요. 지금도 있어요. 싱그럽고 맛이 있어요.》

지혜는 문뜩 겁이 났다.

《돌배 따러 가지 마.》

《나무밑둥이 가시철망밖에 있어도 안돼요?》

《그놈들은 그런걸 가리지 않아.》

《맛있는 돌배야요. 지금 굉장히 열렸을텐데…》

득찬은 한숨을 짓는다. 지혜는 그러는 득찬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집도, 돌배도, 석양이 비낀 언덕우의 정서도, 자기 땅에서 마음놓고 살수 있는 자유도 미군의 군화밑에 짓밟혀있는것이다. 지혜는 짓밟힌 득찬을 보호하듯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간 걷고나자 득찬은 왜 그런지 자주 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님, 우리 집에 꼭 가셔야 해요? 앞으로는 지각 안할게요, 네?! 선생님.》

지혜는 공연히 불안해하는 득찬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네가 지각한다고 가는건 아니야.》

《그럼 뭣하러 가셔요?》

지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하였다.

《교원은 학부형들과 알고지내야 한다. 그리고 아버님이 오래 앓고계신다는데 한번도 찾아뵙지 못해서야 도리가 아니지 않니?》

그러자 득찬은 바로 코앞에 있는 판자집을 가리켰다.

《이거예요!》

겉으로 보기에는 생각했던것보다 꽤 쓸만 하게 지은 집이였다. 돌과 흙으로 쌓은 담벽도 탐탁하였으며 지붕에도 청석돌이 얹혀있었고 문도 합판으로 만들어져 이 아근에서는 눈에 뜨이게 자기 모양을 갖추고있는 집이였다. 지혜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선생님 오셨어!》

《선생님이?》

처녀의 목소리였다. 방직공장에 다닌다는 누이일것이다. 뜻밖에도 누이는 4월에 복희와 함께 병원에 왔던 은실이였다.

《누가 왔니?》

아래목에서 병자의 목쉰 소리가 들렸다.

《득찬의 선생님이예요.》

《이거 원… 선생님이 이런 루추한데를 다…》

누데기속에서 수염에 가린 꺼칠하고 창백한 얼굴의 병자가 일어나 앉으려고 신음소리를 한다. 지혜는 달려가 그를 도로 눕히며 말하였다.

《누워계셔요. 무엇때문에 일어나시겠어요.》

병자의 가슴에는 뼈만이 남았는데 아무런 저항력이 없이 지혜가 눕히는대로 찢어진 얇은 담요에 툭 떨어졌다. 다만 푹 꺼진 볼우의 두눈만이 살아있었다.

《득찬이놈을 욕하지 말아주. 그애 잘못이 아니요. …》

《욕하지 않습니다. 득찬이는 아무것도 잘못한것이 없어요.》

《모두 이 애비 잘못이요. 아이들앞에 볼낯이 없소. 왜 고향땅을 버리고 이런 지옥속에를 왔겠소?… 아무리 한탄한들 인제 와서 소용이 있겠소만…》

병자는 몹시 기침을 깇었다. 기침이 멎고 한숨을 푹 쉬고나서도 안정하지 못하고 몸을 뒤채긴다.

《왜 세상이 이러냐? 속시원히 말 좀 해주려무나. 복희야!》

지혜는 놀라 웃목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저를 아시겠어요?… 연희가 저의 동생입니다.》

지혜는 어째선지 귀중한 친우를 오랜만에 만난것처럼 반가왔다. 채혈을 하던 때의 복희, 서준하의 집 뙤창으로 넘어간 강우네들을 구해준 복희, 복희에 대한 인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만나서 정말 반가와요.》

《복희야, 어서 속시원히 말해주려무나. 이북같은 정치가 여기서는 안되냐?》

《아버님, 너무 조급해하시면 안돼요.》

《복희야, 너는 좀 뭘 알고있나 했더니 우리 은실이나 마찬가지구나. 왜 조급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너는 다 몰라. 이북이 얼마나 살기 좋은덴가를 알고있지 못해.》

《은실에게 더러 들었어요.》

《흥, 은실이가 여덟살때 떠났다. 그애가 뭘 알아? …선생, 거기는 별천지요.》

병자의 눈이 천장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하였는데 그 시선에 꿈속을 더듬는듯 한 그윽한 빛발이 서려있다.

《좋은 밭이 있구, 물이 철철 넘는 논이 있구… 가을이면 가마니마다 옥백미가 쏟아졌다. 땅도 쌀도 다 농사군의것이였다. 잠뱅이바람의 머슴군이던 내가 난생처음 두루마기를 입고 나들이를 다녔어. 번뜻하게 살았다. 근심걱정없이 살았다. 꿀리는것 없이 뻐젓하게 살았다. 농사군이란 모두 땅임자들이니 뻐젓하고말고, 사람답게 살았단 말이다. 아이들은 죄다 학교에 보내고… 무너져내리는 초가이영대신 기와를 올리고… 자나깨나 마음이 흐뭇했어…》

병자의 목소리는 작아지다가 입속에서 중얼거리였는데 은실이가 지혜에게 속삭인다.

《선생님, 웃목으로 가요. 아버님은 잠드시기 시작하려나봐요.》

로인은 오직 꿈속에서만 편안히 살고있는것이다. 지혜가 생각하는 아득한 꿈나라 북이 아니라 로인에게는 거기서 숨쉬고 일하고 살고있던, 그리고 지금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허비기도 하는 육체의 한 부분인 그 꿈속에서 산다.

《선생님, 저는 나가도 되지요? 남수와 함께 구두닦기 나가요. 그애것으루 함께 닦아요.》

《그래…》

지혜는 민망해하는 득찬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그리였다.

《선생님, 그럼 오래 계시다 가셔야 해요. 제가 들어오거든 가셔요.》

지혜는 일어서 나가는 득찬의 등뒤를 대답없이 바래였다.

《가던 길에 득호랑 들어오라고 소리치고 가.》

은실이가 어머니처럼 살뜰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자 청동으로 만들어진듯 한 새까만 조무래기가 방문으로 불쑥 나타나며 웃었다.

《힝, 나 벌써 왔는데… 이거 부엌에 쏟고 멱감고 올게.》

그는 자기 몸뚱이처럼 새까만 석탄자루를 들어보이며 발씬 웃고 돌아섰다. 은실이가 질겁을 해서 소리쳤다.

《집에서 씻어, 추운데… 득호는 어디 갔니?》

《안 추워… 득호형은 조금 더 줏다가 오겠대. 오늘은 맨 석탄이야. 방직공장 보이라아저씨가 바뀌였대. 불때는게 서툴어서 그렇다나. 물긷기 힘든데 뭣땜에 부엌에서 감어? 누나 물긷기 좋아?》

그렇게 말하는 득만이는 여섯살이다. 그 나이에 벌써 생활의 고됨을 알고있었으며 뚫고나갈 힘을 스스로 기르고있으며 누나를 생각만 하는것이 아니라 생각하여 행동한다. 그런 나이에 지혜 자기는 무엇을 했던가? 소꿉놀이 아니면 인형을 사내라고 떼를 써서 부모를 속태운것, 백창락의 딸 신재는? 그의 장난감은 피아노, 하녀에게 짜증을 내는 작은 《녀왕》, 지혜는 죄지은 사람처럼 득찬의 어린 동생과 은실이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복희를 바라본다. 지혜는 자기 학생들의 마음속에서 생활에 대한 놀라운 판단이 어떻게 키워지는지를 비로소 알것 같았다. 이들은 철이 들자 곧 과로와 배고픔을 안다. 부모의 근심과 분노를 보고 느끼고 스스로도 체험하면서 자란다. 그런 그들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모멸감과 항거를 나이보다 빨리 리해한다.

《보이라아저씨를 칼치들이 찾으러 다닌대… 멱감고 올께.》

조무래기는 새까만 손등으로 코를 문대며 뛰여나갔다.

《보이라아저씨를?》 하고 말한 은실이는 심드렁한 표정이다.

《소문에는 이상한 말이 돌아요. 우리는 그럴분이 아니라고 했어요. 글쎄, 어떤 처녀와 좋아하다가 결혼하자고 하니까 도망갔다고… 복희언니, 그렇지 않지요?》

복희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는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갔다문 순경놈들이 잡으러 다니겠어요?》

복희는 그래도 대답없이 방심한듯 한 표정으로 그러는 은실이를 물끄러미 바라볼뿐이였다. 그러다가 별안간 지혜에게 말을 걸었다.

《지혜선생, 청이 하나 있어요. 들어주시리라 믿어요. 그러지 않아도 그것때문에 선생님을 뵈옵자고 하던 참이예요.》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서 자연 권범의 이야기는 지나쳐버렸지만 지혜의 머리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그대로 비껴있었다. 항상 쫓겨다녀야 하는 그였다.

《우리 방직공장에 야학을 차리기로 했어요. 지혜선생이 국어를 가르쳐주실수 없겠어요? 석달에 죄다 우리 글을 읽고 쓰도록… 신문 같은것을 볼수 있는 정도로 말입니다.》

밝은 표정이다.

《학생들은 직공인가요?》

《네, 처녀애도 로인도 청년도 있어요. …그것때문에 경찰의 주목을 받거나 그런 일은 없도록 우리가 하겠어요. 물론 좋아하지야 않겠지만 문화계몽사업은 승인을 하게 되여있으니까요. 교재만 그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지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혼자서 결정할수가 없다. 실습시간이 늦어질 때도 있고 어쨌든 교장의 승인도 받아야 하지만 마음이 끌린다.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줄기차게 버티여나가게 하는 그 생활에 접근할수 있다는 생각이다.

《며칠 생각하게 해주세요. 혼자서 결정할수도 없고…》

《우리는 선생님이 거절하시지 않으리라고 믿었어요.》

《복희언니, 정말 정선생님이 처녀를…》

은실이는 그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였다. 복희는 무엇인가 결심한듯 되물었다.

《은실이, 정선생님이 훌륭한분이라는걸 믿어?》

《믿어요.》

《그럼 끝까지 믿어야지. 정선생님이 그런분이겠냐 말이다. 로무자들이 정선생님을 따르고있다는것을 알고 헐뜯으려는 나쁜 놈들의 작간이다. 은실이, 그런데 속아서 자기편 사람들을 의심한다는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믿어요. 믿기때문에 속이 탔던거예요. 지금 마음이 편해요. 부디 어디 계시건 무사하시기를 빌어요.》

복희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며 묵묵히 앉아있었다. 지혜가 문뜩 물었다.

《득찬이도 연희도 실습이 늦어 고되여 하지요?》

은실이도 복희도 얼른 대답을 하지 않다가 복희가 천천히 말하였다.

《너무 늦어요.》

《워낙 학원이 재정난에 허덕이다나니…》

그 말에 복희가 지혜의 얼굴을 주시한다.

《지혜선생, …단순히 학원의 재정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알아보셔야 해요. 공부를 하고싶어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고된 로동에 시달리고있는 아이들을 그대로 보고있어서는 안돼요. 지난 여름만 해도 달 반이나 되는 방학동안 학생들은 하루도 놀지 못하고 우리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했어요. 그 품삯으로 담벽에 회칠도 할수 없었던가요? 지구의를 마련할 밑천도 안돼서 선생님이 자작 만드셔야 했던가요? 알아보셔야 합니다.》

복희는 정림에게 대들던 그때처럼 점점 더 격해지면서 상대방의 가슴을 허비여놓기도 한다.

《선생님, 저희들은 선생님이 학생들의 지나친 로동에 가슴아파하신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밤늦도록 일하면서 고생을 나누고있다는것도 압니다. 하지만 밑없는 항아리에 물붓기입니다. 가슴아파하신다고 학생들이 편안해지는것은 아니지 않아요? 학과시간을 침범하거나 밤늦게까지 일을 시키거나 하는 일이 없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왜 교감이나 백창락이와 싸우지 않는지, 학생들이 번 돈에 대해서 왜 따지고들지 않는지 리해할수가 없어요. 그런 용기를 가진 선생님이 한분도 안 계시다는것은 섭섭한 일이예요.》

《복희언니, 지혜선생만 탓하지 마셔요.》

《탓하는것이 아니야. 부탁하고있어. 나의 연희와 너의 득찬이를 위해 부탁하고있다.》

《학원선생들만 잘못인가요? 세상은 어디나 그러기마련 아니예요? 공장도 마찬가지…》

《세상이 어디나 다 그런건 아니다. 아버님더러 물어봐!》

《이북이요? 그곳과 여기는 달라요. 주추돌부터 달라요.》

《그 말은 옳아. 주추돌부터 다르지. 여기는 남의 등을 쳐먹으며 호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법>으로 다스리고있지. 그렇다면 주추돌부터 고쳐야지.》

지혜는 수업료때문에 일어났던 교감과 영철선생의 말다툼을 생각하였다. 선생들은 마음뿐 겉으로는 두둔을 하지 못하였다. 용기가 없어서? 처자를 생각하여 용기를 눌러버렸단 말인가?

《용기를 길러야 해요. 정의는 터지고 깨지는 싸움이 없이 이루어지지 못해요.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워야 한다는 말을 지혜선생도 알고계시지 않으셔요?》 하는 복희의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지혜는 복희를 주시한다. 가슴속에 뒤설레는 많은 의문을 복희의 그 단순한 말이 다 해결해주지 못하기때문이다. 지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복희는 선생들을 다 리해하고있지 못해요. 그들이 단순히 용기가 없어서만 그랬다고는 생각할수 없어요. 싸움은 이겨야 하지 않겠어요? 당장은 자기의 목이 달아난다쳐도 앞날에는 바랬던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승리해서 교감이 쫓겨난다고 해요. 그럼 다른 교감이 들어오겠지요? 그 다른 교감은 안상두보다 좋은 사람일수도 있지만 더 나쁜 사람일수도 있어요. 아무리 좋은 사람이였대도 며칠이 안 가 안상두처럼 되리라는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예요. 백창락이 학교운영위원회 리사장인 이상 그의 승인없이 어떠한 교감도 들어올수가 없으니까요. …》

복희는 놀라는 시선으로 지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지혜선생님말씀 옳아요. 믿음과 승산이 없이 싸워서는 안되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결론이 싸움을 포기하는것이 될수는 없지 않아요? 패배할것만을 생각해서 참지 말아야 하는것을 참을 때, 그래서 우리가 한걸음 더 양보할 때 그자들은 반드시 우리에게 또다시 두걸음 뒤로 물러설것을 강요할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궁극에는 앉아서 죽게… 지혜선생, 우리가 그 학교에 다니던 칠팔년전만 해도 실습이 오늘처럼 혹독하지는 않았어요. 학교모양이 오늘처럼 참담하지는 않았어요.》

문뜩 지혜의 가슴에 복희와 자기와의 생각의 차이점이 절망부터 생각하는가, 뚫고나갈 앞길을 생각하는가에 있지 않는가 하는 깨달음이 빛발처럼 비끼였다. 복희는 지혜의 두눈에 비쳐진 불꽃에 어떤 충격을 느낀듯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선 부당한 처사들의 진상을 알아내야 해요.》

별안간 복희의 얼굴이 해쓱해지더니 바르르 떨면서 이마에 작은 땀방울들이 수없이 맺혔다.

《복희언니, 왜 그러셔요?》

은실이가 복희의 싸늘해진 손을 주물며 헤덤비였다. 지혜는 복희의 맥을 짚어보고 증상을 여러모로 살펴본 후 무엇때문이라는것을 판단한다.

《은실이, 뜨거운 물 좀 있었으면…》

《득만이는 누나 생각을 해서 찬물에 멱감으려…》

복희가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요. 그애도 더운물에 감으면 되는데 조그만게 고집불통이 돼서 그러죠.》

은실이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지혜는 낮은 소리로 복희에게 말하였다.

《안정하셔야겠어요. 그러다가 류산할수도 있어요, 복희!》

복희는 조금도 부끄럼없이 지혜를 쳐다본다.

《저는 결혼했어요. 하지만 공장에서 알면 그날로 쫓겨나야 해요. 그러니 선생님도 저의 비밀을 지켜주세요.》

복희는 그이상 자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혜도 더 묻지 않았다. 그대신 학원이야기를 계속한다.

《지혜선생, 영철선생하고 또 영철선생과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잠자코있던 다른 선생들과 이야기해보세요. 혼자서 대들면 상처만 남아도 여럿이 힘을 합한다면 이길수도 있어요. 리승만이가 거꾸러지리라고 4월전까지 상상인들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겼어요!》

은실이가 물을 떠가지고 들어왔다. 복희는 손과 발을 씻으면서 조용히 말하였다.

《손발을 씻었더니 속이 편해졌어…》

득만이가 입술이 새파래서 들어왔다. 몸을 씻었다고 하지만 석탄먼지는 피부속까지 배여든듯 그대로 가무잡잡한 손을 아버지담요밑으로 쑥 들이민다.

《누나, 아버지가 또 북에 대한 꿈을 꾸나봐. 웃고계셔.》

득만이도 즐거운듯이 웃는다. 그것은 이 집안의 온 식구가 가난과 불행을 이겨나가게 하는 기둥이였다. 고된 로동과 빈궁을 줄기차게 맞받아나가는 그의 학생들, 그들의 생생한 힘, 지혜는 자기가 어떤 새로운 세계와 맞서있다는것을 느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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