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제2편 백합꽃은 태양의 빛을 받다

영화예술의 원로

 

세월은 흘렸다.

내가 문예봉을 다시 만난것은 첫 상봉이 있은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1993년 가을경이였다.

그해 2월 12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랜 문화인들을 만나신 자리에 문예봉도 있었던것만큼 그에 대한 취재를 위해 나는 문예봉을 찾아갔었다.

그의 집은 보통강기슭에 자리잡은 고층살림집이였다.

공로있는 교육자, 과학자, 문화예술인들에게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배려하여주신 살림집이였다.

문예봉과 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에 흐른 세월도 그의 모습에는 자그마한 자취도 남기지 못한듯 80고개를 바라보는 로인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만큼 아직도 청초한 아름다움의 빛을 그대로 간직한 그였다.

그는 응접실로 나를 안내하였다.

선물받은 피아노와 한벽을 가득 채운 책장 그리고 손님접대용 쏘파가 놓여있을뿐 별다른 화려한 장식도 없이 담박한 감을 주는 방이였다. 평소에 지니고있는 그의 정결하고 검박한 성품을 그대로 느낄수 있었다.

벽의 정면에는 문예봉이 여러 대회들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들이 모셔져있었다.

나는 사진들 앞으로 다가갔다.

여러상의 사진들가운데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문예봉이 단독으로 찍은 사진과 몇몇 문화인들이 수령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이 유표하게 나의 눈길을 끌었다.

《아, 그때의 사진이구만요.》

나는 기록영화 《빛나는 삶의 품》의 한 장면을 회상하며 문예봉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대대로 전해야 할 우리 집의 귀중한 가보이지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막 목이 메여와서…》

눈시울을 붉히며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인제는 로년기에 들어선 그가 또다시 수령님을 뵈옵는 영광을 지니였으니 그 감격과 행복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얼마후 마음을 진정한 그는 잊지 못할 그날에 있었던 감격의 사연을 조용히 펼치였다. …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는 말이 있지만 문예봉은 그런 한가한 추억속에 자기를 내맡길수가 없었다.

말년에도 일을 잘하라고 명절때마다 선물을 보내주시고 기회가 있을적마다 영화인대표로 외국에도 파견해주시고 국가적인 대회들에도 빠짐없이 불러주시는 어버이수령님과 장군님의 거듭되는 사랑과 은정에 미처 보답을 못하는 죄책감으로 고민이 큰 그였다.

물론 그간 예술영화 《우리 웃집문제》, 《푸른 소나무》, 《생명수》, 《심장에 남는 사람》 등 수십편의 영화들에 출연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차지 않았다.

그의 소원은 지금 온 나라와 해외동포들속에서 폭풍같은 반향을 일으키면서 세계영화계를 뒤흔들어놓고있는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 출연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를 받으며 창작되고있는 이 작품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우리 인민의 민족사전반을 포괄하면서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에 관한 철학적종자를 무게있게 해명하고있는 대작으로서 그 폭과 심도에 있어서, 사상적내용과 예술성에 있어서 우리 나라 주체적영화예술의 총화이며 얼굴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다 이 작품에 참가하기를 소원하였고 단역이라도 맡으면 그것을 최대의 영예로 여기였다.

문예봉의 심정도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창작단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자기의 나이를 생각해보며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해보기도 하였지만 허전한 마음을 숨길수 없었다.

(성쌓고 남은 돌이라는건가?)

은근히 노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으나 부질없는 일이였다.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았던 그였다.

그러던 주체82(1993)년 2월 12일 그에게 또다시 영광의 시각이 찾아들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것이였다.

수령님을 뵈옵고싶은 열망으로 항상 가슴을 태우던 그는 수령님께서 부르신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만 눈물부터 앞섰다. 말년에 찾아든 행복이고 영광이여서 더욱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문예봉이 해당한 장소에 도착하니 거기에 낯익은 문화인들인 백인준(문예총중앙위원회 위원장), 신진순(문예총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원균(피바다가극단 단장), 조령출(조선문학창작사 작가), 유경애(번역영화제작단 배우) 등이 와있었다.

모두 오랜 문화인들이였다.

그들이 위대한 수령님 계시는 곳에 당도하자 수령님께서는 친히 홀에까지 나오시여 마중하시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고맙소, 고마워.》하시며 그들의 손을 일일이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감격에 겨워하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자, 그럼 이렇게 만난 기념으로 우선 사진부터 찍자구.》하시며 그들을 가까이에 부르시였다.

문화인들은 수령님을 모시고 개별적으로 한사람씩 사진을 찍고 또 집체적으로도 찍었다.

일생토록 잊지 못할 행복의 순간이였다.

사진을 찍은 후 수령님께서는 매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며 문학예술부문에서 오랜 기간 일하면서 많은 공로를 세운 로장들을 이렇게 만나니 매우 기쁘다고 못내 반가와하시였다.

자기들을 문학예술부문의 로장들이라고 불러주시는데 너무도 감격한 참가자들은 어떻게 감사의 말을 올려야 할지 몰라하였다.

친근한 미소를 띠우신 그이께서는 그들모두를 옆방으로 안내하시였다.

그들이 수령님을 따라 들어선 방에는 이미 오찬이 차려져있었다.

너무도 송구하여 선뜻 자리에 앉지 못하는 그들을 일일이 식탁에 불러앉히시며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시였다.

…며칠전에 피바다가극단에서 창조한 민속무용조곡 《계절의 노래》공연을 보시러 극장에 나가셨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원균을 보기만 하고 만나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것이 몹시 아쉬우시였다. 그래서 돌아오신 길로 그 일에 대하여 위대한 장군님과 전화로 이야기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김원균동무를 만날 때 문학예술부문의 오랜 일군들 몇명을 더 같이 만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그들모두의 이름을 하나하나 찍어주시였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 뜻깊은 자리가 마련된것이였다.

자기들이 받아안은 오늘의 이 무한한 행복의 순간이 바로 장군님의 세심한 사랑에 의하여 마련된것임을 알게 된 창작가, 예술인들은 또다시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젊음이 약동하던 청춘시절부터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문학예술사업에 몸바친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간절한 소원은 더 늙기 전에 수령님을 다시금 몸가까이에서 만나뵈옵는것이였다.

해방전 수난의 그 시기 가슴속의 꿈도 컸고 재능도 있었으나 마음껏 나래칠 하늘이 없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방랑하던 인생들이였다. 그러던 자기들을 위대한 수령님께서 품에 안으시여 참다운 인간으로 키워주시고 재능으로 나라를 떠받드는 대들보들로 내세워주시였으니 운명의 구세주이신 수령님을 꼭 다시 뵈옵고 고마움의 큰절을 드리고싶은것이 왜 말년의 소원이 아니였으랴.

그런데 가슴속깊이 고이 묻어두었던 그 소중한 념원을 위대한 장군님께서 풀어주시였던것이다.

너무도 웅심깊은 장군님의 사랑의 세계에 모두들 머리를 숙일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소박한 식탁에 둘러앉은 모습은 마치 친어버이를 모시고 즐겁게 담소하는 화목한 한가정을 련상시키였다.

그들은 첫 축배잔을 위대한 수령님의 건강을 축원하여 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맙다고 하시며 그들과 잔을 찧으시였다.

축배잔을 든 모두의 눈가마다에 격정의 눈물이 어리였다.

아, 저분이 있어 우리들의 인생이 빗나가지 않고 곧바른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른것이 아닌가. 목메이는 격정속에 자신들이 걸어온 기나긴 한생이 생동하게 돌이켜지는 순간이였다. 수령님의 은총속에 행복과 영광으로 수놓아진 인생의 자욱자욱들이…

이윽고 언감자국수가 들어왔다.

수령님께서는 모두에게 언감자국수를 권하시면서 이 국수는 특별히 마련한 언감자국수라고, 언감자국수는 자신한테 와야 맛볼수 있지 다른데서는 먹어보기 힘들거라고 하시면서 언감자국수와 관련되여있는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이야기를 감회깊이 들려주시였다.

오찬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바야흐로 무르익어갔다.

수령님의 소탈하신 인품에 창작가, 예술인들은 마음을 풀어놓고 허물없는 질문도 하고 마음껏 웃기도 하였다.

그때 문예봉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흥이 너무도 컸던지라 솔직한 심정그대로 수령님께 회고록에서 어떻게 그 먼 옛일들을 상세히 다 기억하고계시는지 정말 탄복하였다고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동무들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으면서 자신의 기억력에 탄복하였다고 하는데 자신께서는 아직 기억력이 좋다고, 당력사연구소 소장도 자신의 기억력에 대하여 놀라와하고있다고 하시며 해방전 잡지 《개벽》에 실렸던 기사내용과 제2차 북만원정때 있은 사실들을 생동하게 이야기해주시였다.

참가자들은 그이의 이야기에 심취되여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문예봉에게 시선을 돌리신 수령님께서는 문예봉동무는 아직도 50대같이 젊어보인다고 하시며 소탈하게 웃으시였다.

문예봉은 너무도 황송하여 몸둘바를 몰랐다.

자기를 만나실적마다 젊다고, 처녀같다고 기뻐하시는 그이이시였다.

수령님의 말씀을 받아안을 때마다 늙지 말고 언제나 청춘의 기백으로 예술창조사업을 잘하라는 고무와 당부로 받아안군 하였지만 그 기대에 보답 못하는 죄책감이 더 큰 그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수령님께 겨우 말씀을 올리였다.

수령님과 장군님의 사랑만 받고 기쁨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손을 저으시며 해방직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만드는데 참가하였는데 그거면 대단하다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의 과찬의 말씀에 문예봉의 마음은 더욱 송구해졌다. 별로 한일도 없는 자기를 그토록 치하하여주시다니…

고마움과 황송함에 목메여 문예봉은 용기를 내여 말씀올리였다.

수령님, 제 <민족과 운명>에 꼭 출연하여 수령님의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수령님께서는 만족하신듯 환하게 웃으시였다. 그를 바라보시는 수령님의 존안에 무척 대견해하는 빛이 어리시였다.

이어 수령님께서는 김원균을 바라보시며 《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지은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오늘 그를 만난것이 정말 기쁘다고 하시였다.

또한 유경애가 소설랑독을 아주 잘하는데 대하여 그리고 해방직후부터 녀성사업을 해온 신진순과 수많은 노래, 극작품들을 창작한 조령출의 공로에 대하여서도 일일이 다 평가하여주시였다.

수령님의 과분한 치하를 받고 흥분한 그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들이 지은 시도 랑송하고 노래도 부르겠다고 청을 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늙은이들이 시를 랑송하고 노래를 부르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제멋이 있다고 몹시 기뻐하시였다.

흥취가 오른 문화인들은 저마다 자기의 재간을 펼치였다.

유경애가 먼저 시 《어머니의 당부》 중에서 몇련을 추려 랑송하였다.

그의 랑송이 끝나자 수령님께서는 제일먼저 박수를 쳐주시며 아주 잘한다고, 그 시를 종이에 써서 주고가라고 말씀하시였다.

너무 감격한 유경애는 《수령님, 고맙습니다. 손자를 꼭 작곡가로 키워 수령님과 장군님을 칭송하는 노래를 많이 짓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올리였다.

이어 조령출이 자신이 지은 송가 《위대한 명절》을 랑송하였고 김원균이 해방직후에 작곡한 노래 《조선행진곡》을 불렀다. 백인준은 1947년도에 지은 시를 랑송하였다.

수령님께서는 모두에게 고맙다고 거듭 사의를 표하시면서 조령출이 랑송한 송가도 자신에게 주고가라고 이르시였다.

그때 문예봉은 수령님앞에 불러드릴 노래 하나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스러워 바늘방석에 앉은 심정이였다.

수령님을 뵈옵는 이런 뜻깊은 좌석에서나마 그이께 짧은 휴식의 한때, 기쁨의 한시각을 보장해드리지 못하는 내가 무슨 배우란 말인가.

끝없는 자책감으로 옥죄이는 마음을 부여안고 그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모두가 합창으로 《오직 한마음》을 부른 후 그는 사죄의 마음을 담아 수령님께 말씀을 올리였다.

수령님, 노래 하나 변변히 준비하지 못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손자들을 수령님과 장군님께 충실한 충신들로 키워 이 죄를 보상하겠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일없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자식이 몇인가고 물으시였다.

《아들딸 셋에 손자, 손녀가 6명입니다.》

문예봉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대단한 밑천을 가지고있는 셈이라고, 그 자식들을 다 김정일동지께 충실한 충신, 효자들로 키우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였다.

이윽하여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 50년동안 우리 당의 문예정책을 높의 받들고 많은 일을 하여온 그들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며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축하한다고 거듭 치하하여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들에게 이제는 나이도 많은만큼 자식들과 후대들의 교양에 깊은 관심을 돌려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어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그것이 중요한 과업이라고 이르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문무와 충효를 겸하신 김정일동지의 걸출한 령도자로서의 풍모에 대하여, 그이께서 베푸시는 광폭정치의 정당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자식들과 후대들을 김정일동지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며 그이께 충정다하도록 할데 대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근 50년간을 당을 따라 충정다해온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넘친 행복의 순간은 이렇게 흘렀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품속에서는 인생의 로년기, 황혼기란 있을수 없었으니 그 시절을 후대들을 위하여 더욱 불길처럼 타번져야 하는 단풍잎들의 세계라 할수 있었다.

 

*            *

 

봄바람도 고요를 깨치기 저어하듯 숨을 죽이는 영생의 언덕, 애국렬사릉이다. 나는 지금 문예봉의 묘소앞에 서있다.

비석에 부각된 돌사진에서 기품있고 우아한 모습의 문예봉이 그윽한 눈매로 나를 바라보고있다.

《문예봉녀사.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비문은 극히 짧아도 그 글발들은 나를 깊은 사색의 세계에로 이끌어갔다.

곡절도 많았던 한 녀인의 일생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영생에 대하여…

그는 주체88(1999)년 3월 26일에 82살의 고령으로 생을 마치였다.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참 아까운 배우를 잃었다고 매우 애석해하시면서 문예봉동무는 해방전부터 예술활동을 한 영화예술의 원로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영화예술의 원로!

영화인으로서 받을수 있는 최상의 값높은 평가였다.

무정하고 포악한 아버지와 연약한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울면서 황초령을 내리던 눈물녀, 방랑극단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떠다니던 연극쟁이, 병든 남편과 오롱조롱한 아이들을 먹여살리느라 은막에 얼굴을 팔며 세방살이에 쫓기던 가난뱅이녀배우…

이것이 바로 해방전 문예봉의 모습이였다.

그러던 그가 오늘에는 영화예술의 원로라는 값높은 칭호속에 영생의 언덕에 올랐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한 렬사들, 애국자들과 나란히 그는 지금 자기의 재능과 정열, 땀과 노력을 다 바친 사랑하는 조국의 산야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있다.

사랑을 담아 그리고 긍지를 담아…

그의 모습을 보느라니 나의 뇌리에는 문예봉의 유가족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올린 편지의 한구절이 우렷이 떠오른다.

《…위대한 장군님의 추억속에 있는것만도 행복하고 영광스러운데 영화예술의 원로라 하시며 몸소 화환을 보내주시고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배려하여주시였으니 전사의 영생이란 정녕 장군님께서 주시는 생입니다. …》

그렇다.

문예봉의 영생, 그것은 바로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신 값높은 생이였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속에서 문예봉은 영생을 얻은것이였다.

릉우에서 울리는 숭엄한 음악선률이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선렬들의 넋의 울림인듯, 영원한 생의 메아리인듯…

 

몇해후에 문예봉의 수기와 요시꼬의 회상록이 세상에 나왔다.

그들은 《소화》시대라고 불리우던 수난의 그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세월 자신들이 걸어온 곡절많은 인생행로에 대하여 감회깊이 돌이키고있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애를 통하여 각자가 도출한 결론은 너무도 판이하였다.

요시꼬의 회상록은 한마디로 말하여 아시아인민들앞에 자신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반성이였고 용서를 비는 속죄록이였다.

허나 문예봉의 수기는?…

그것은 그야말로 태양에 대한 다함없는 찬가, 해님에 대한 신뢰와 경모의 마음을 진정의 꽃다발로 엮은 인간이 읊을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진심의 송가였다.

아, 어찌하여 동시대인들인 두 녀인이 생의 말년에 남긴 운명의 선률은 이토록 다른것인가.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푸르른 하늘을 한껏 쳐다보았다.

밝은 태양의 빛발이 눈이 부시도록 쏟아져내린다.

아, 위대한 태양! 고마운 해님!

뜨거운 눈물이 나의 눈굽을 조용히 적시였다.

 

련재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4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5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6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7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8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9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0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2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3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4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5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6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7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8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9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0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2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3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4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5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6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7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8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9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0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2회)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