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제2편 백합꽃은 태양의 빛을 받다

영화예술의 새로운 장과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

 

주체52(1963)년 6월 5일도 례사로운 날중의 하루였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정원의 나무들에도 신록이 짙어가고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에서 태양이 빛나던 이날이 바로 우리 나라 영화예술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력사의 날이였음을 그때는 누구도 미처 몰랐었다.

바로 이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령도의 자욱을 찍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마중나온 일군과 인사를 나누신후 정깊은 시선으로 촬영소구내를 둘러보시고나서 영화제작사업이 어떻게 되고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일군이 머뭇거리다가 이해에 들어와서 겨우 3편을 만들었다고 대답을 올리고는 고개를 숙이였다.

그해의 영화창작과제 20편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수자였던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존안에 근심어린 빛이 어리였다.

그이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촬영소에서 새로 만든 영화가 없는가고 자주 물으시는데 올해도 상반년이 다 지나가도록 영화를 몇편밖에 내놓지 못했다고 교시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여러 시간에 걸쳐 일군들에게 영화창작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킬수 있는 강령적인 교시를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수령님께서 날로 높아가는 우리 인민들의 영화에 대한 요구를 깊이 헤아리시고 당보의 사설과 같이 호소성이 높고 현실보다 앞서나가는 영화를 많이 만들데 대하여 간곡하게 교시하시였다고 하시면서 영화창작사업을 하루빨리 개선하여 수령님의 교시를 철저히 관철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영화예술부문앞에 나서는 중심과업은 수령님께 끝없이 충실한 자주적인간을 진실하게 그린 영화들을 창작하는것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전형문제를 새롭게 밝혀주신 독창적인 교시였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영화의 주인공이 시대의 전형이 되여야 한다고 말은 많이 하였지만 그 시대적전형이 과연 어떤 인간이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그 누구도 명확한 리론을 내놓지 못하고있었다.

바로 이런 때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우리 시대의 참다운 인간의 전형은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실한 자주적인간이여야 한다고 명확히 밝혀주심으로써 우리 시대 전형의 사상정신적특질이 밝혀지게 되였고 주인공문제해결의 기본열쇠를 찾아쥘수 있게 하였던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또한 당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문학예술의 엄중한 사태를 바로잡기 위한 고리가 작가, 예술인들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확립하는데 있다는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근본요구일뿐아니라 문학예술자체발전의 합법칙적요구이기도 하였다.

당시 당사상사업부문과 문학예술부문안에 기여든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영화를 보시고 주신 수령님의 교시를 제대로 전달하지도 않았고 교시를 전달하는 경우에도 제 말을 섞어가며 영화가 통과라느니, 불통과라느니 하고 외마디말로 대치해왔다. 지어 수령님의 교시를 외곡전달하거나 자기들의 그릇된 사상을 내려먹이였기때문에 작가, 예술인들이 수령님의 사상과 의도를 알수 없었던것이다.

이런 실태를 환히 꿰뚫어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전달침투하는 정연한 체계를 세우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주체적인 영화창작의 새로운 전환의 길을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밖에도 창작가, 예술인들의 기량을 높이는 문제와 함께 촬영소의 물질기술적토대를 튼튼히 꾸리고 창작가, 예술인들이 생활을 건전하게 하며 지도일군들의 역할을 높일데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영화창작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참으로 이날은 영화예술발전의 새로운 장이 펼쳐진 력사적인 전환의 날이였다.

온 나라와 전세계를 뒤흔들며 장엄하게 울려퍼졌던 영화혁명의 장엄한 포성의 서곡은 바로 이날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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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앙양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한 영화촬영소에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지도밑에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1, 2부)가 온 촬영소의 관심속에 창작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53(1964)년 11월 7일에 하신 교시 《혁명적문학예술을 창작할데 대하여》에서 제시된 강령적과업을 관철하기 위하여 선참으로 창작된 대작이였다.

남조선인민들의 반미구국투쟁을 반영한 조국통일주제의 이 작품에서 문예봉은 인덕병원 원장(영애의 어머니)의 역을 맡았다. 영화문학에는 백인준, 연출에 전운봉, 오병초, 주역은 엄길선, 최부실 등이였다.

영화는 1960년 4. 19봉기로부터 일제의 재침책동을 반대하는 1962년 6. 3투쟁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시대적배경으로 하면서 새 제도, 새 정치, 새 생활을 요구하여 항쟁에 떨쳐나선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반미구국투쟁을 감명깊이 펼쳐보이고있다.

영화는 남조선청년들과 인민들이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찾고 희망을 꽃피우자면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며 남조선혁명에 힘차게 떨쳐나서야 한다는 사상을 힘있게 천명하고있다.

남조선인민들에게 있어서 혁명만이 살길이며 반미구국투쟁만이 조국통일의 길이라는 진리를 생활적으로 확인하고있는데 이 작품이 가지는 의의가 있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사상예술적으로 커다란 의의가 있는 이 작품을 혁명적대작으로 완성하는것으로부터 예술영화에 대한 지도를 시작하시였다.

그이께서 지도하시는 첫 작품창작에 참가하는 창작가, 예술인들의 열의는 드높았다.

특히 문예봉은 이 영화에서 이전에 맡았던 역들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중산계급인테리녀성의 역형상을 맡은것으로 하여 남달리 흥분하고있었다.

이전에는 대체로 근로출신의 농촌처녀와 어머니역들을 수행했었다. 그 인물들의 생활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생활들이고 낯익은 성격들이여서 어렵지 않게 역형상을 할수 있었다.

그러나 혜경의 역은 달랐다.

혜경은 일찌기 남편을 왜놈들에게 잃은 후 인덕병원을 차려놓고 외동딸의 행복만을 바라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테리녀성이다. 그는 미제가 판을 치는 남조선사회의 반동성과 사회적모순, 불의에 대하여 잘 알고있으나 그에 반항하거나 투쟁하기보다는 사회와 담을 쌓고 개인의 울타리속에서 《안온》과 《행복》을 찾으려는 매우 소극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하여 그는 진명과 딸 영애가 가까와지는것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애쓰며 진명을 따라 투쟁의 광장으로 나서려는 영애의 앞길을 강하게 막아나선다. 그러나 그도 생활의 흐름속에서 진명과 영애를 점차 리해하게 되며 그들의 투쟁에 공감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주는 인물로 성장발전하게 된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혜경의 초기성격과 그의 곡절많은 성격발전과정을 연구하면서 예봉은 섬세한 내면심리연기로써만 그의 성격을 살릴수 있음을 포착하였다.

외면적으로는 조용하고 부드러우나 딸과 인덕병원을 위하여서는 두려움을 모르고 이악스레 나서는 녀인, 안온한 행복에 대한 리상과 피투성이현실과의 모순으로 하여 고민의 세계에서 모대기는 인테리녀성, 그야말로 복잡한 심리세계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세련된 내면적연기로써만 역형상의 성공을 담보하는 성격이라 할수 있었다.

문예봉은 자신이 체험하여보지 못한 인테리녀성의 형상을 위하여 무척 고심하였고 진지한 연구를 거듭하였다.

문예봉뿐만아니라 영화창작단전체가 위대한 수령님의 11월 7일교시관철을 위한 이 영화제작에 총돌격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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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53(1964)년 12월 8일 우리 나라 영화예술발전에서 또 하나의 봉우리로 되는 특기할 사변의 날이 도래하였다.

이날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지도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를 여시기 위하여 예술영화촬영소에 나오신것이였다.

그때 《성장의 길에서》창작단성원들은 남다른 흥분과 긴장의 최절정에 달해있었다. 수령님께 실지촬영장면을 보여드리게 되였기때문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2호촬영장에 들어서시였을 때 연출가의 구령에 따라 촬영을 시작하였다.

인덕병원장면이였다.

주인공 진명이 병원의 응접실에 들어와 영애에게 비밀서적을 부탁하면서 둘이 함께 병원창고로 나가는 장면, 영애의 어머니 혜경이가 딸을 불러 자기 집이 경찰들에게 감시를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장을 유심히 보아주시던 수령님께서는 촬영이 끝나자 배우들을 대견스레 바라보시면서 아주 잘한다고 치하하여주시였다.

사실상 문예봉을 비롯하여 그때 출연한 배우들은 수령님앞이라 더 잘하려고 애썼으나 마음과는 달리 흥분되고 긴장감이 앞서다나니 그이께 만족을 드릴만큼 훌륭하게 연기를 한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자식들의 조그마한 성과도 크게 기뻐하고 내세워주고싶어하시는 친어버이심정으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미흡한 연기를 오히려 높이 칭찬하여주시였다.

친어버이의 후더운 사랑과 인정이 가슴에 푹푹 안겨와 배우들은 감격의 눈물로 눈시울들을 적시였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분장실, 록음실, 편집실을 비롯하여 촬영소의 모든 일터, 모든 초소들을 다 돌아보시면서 영화제작사업의 전공정을 료해하신 후 력사적인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석단에 나오시자 우뢰와 같은 만세소리가 온 장내를 뒤흔들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교양, 계급교양에 이바지할 혁명적영화를 더 많이 만들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촬영소가 창립된지 아직 20년이 못되지만 그동안 영화촬영소일군들이 많은 일을 하였다고 치하하시면서 오늘 여기 와서 잘 꾸려진 영화촬영소와 정력적으로 일하는 예술인들의 모습을 보니 매우 기쁘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최근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시면서 예술영화 《정방공》, 《붉은 꽃》, 《백일홍》, 《새 세대》, 《대지의 아들》, 《끝없어라 나의 희망》 등 우수한 영화들을 한편한편 꼽아주시였다.

회의에 참가한 영화인들은 너나없이 숨소리마저 죽이고 그이의 말씀 구절구절을 심장에 새기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당중앙위원회는 예술영화촬영소일군들의 사업에 대하여, 특히 최근시기 영화창작에서 이룩한 성과에 대하여 매우 만족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였을 때 장내의 여기저기서 흐느낌소리가 일어났다.

수령님께서는 최근 영화예술부문에서 커다란 성과가 이룩되고 우리 나라 영화가 높은 수준에 올라서게 된것은 영화예술부문 일군들이 당의 옳바른 문예정책을 심장으로 받들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 온갖 애로와 난관을 용감히 이겨내면서 적극 투쟁한 결과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영화예술인들은 혁명적예술인이라는 고상한 칭호를 받을만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순간 문예봉의 가슴은 뭉클해지면서 눈앞이 콱 흐려졌다.

혁명적예술인!

얼마나 고상하고 영예로운 칭호인가.

지난날 먹고 살기 위하여 영화화면에 얼굴을 비치면서 기구한 운명의 가시덤불길을 걷던 최하층의 인생이 바로 영화인들이였다. 영화업자들에게 얽매여 젊어 한때는 청춘과 미모를 팔고 나이들면 가차없이 버림을 받는 생명을 가진 상품이고 노예였던 자기들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수령님의 품에 안기여 오늘은 당사상전선의 전초선에 굳건히 선 혁명적예술인들이라는 고귀한 칭호를 받아안고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까지 참가하고있으니 그 어느 나라 예술인들이 이렇듯 크나큰 정치적신임을 받아안은 일이 있었던가.

삽시에 회의장은 영화인들의 흐느낌소리로 가득찼다.

감격에 겨운 예술인들이 두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념도 않고 마음속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여기저기서 흐느끼고있었던것이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근로자들속에서 혁명교양, 계급교양을 결정적으로 강화하는데서 혁명적영화가 노는 중요한 역할에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혁명적영화창작을 위한 방향과 방도들을 뚜렷이 밝혀주시였다.

참으로 이날에 하신 그이의 연설은 혁명적영화예술발전의 대강을 밝히신 위대한 리정표였으며 그이의 현지지도는 영화예술발전의 승리적전진을 확고히 담보하여주는 력사적인 현지지도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평범한 배우들이 올리는 의견까지 다 들어주시면서 영화예술발전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실 때 어느덧 밖에는 어둠이 깃들고 밤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리고있었다.

어둠이 짙어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문예봉은 이제 수령님께서 저 눈을 맞으며 가셔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촬영소정문을 나서실 때 구내길은 흰눈일색으로 단장되여있었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눈내리는 깊은 밤이였지만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뜻깊은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그이께서 타신 승용차는 정문밖 멀리로 사라졌으나 촬영소구내에서 울려퍼지는 만세의 환호성은 좀처럼 잦아들줄 몰랐다.

우리 나라 영화사와 우리 영화인들의 운명에서 특기할 사변의 날, 영광의 날이였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린 이틀후인 주체53(1964)년 12월 10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문학예술부문 일군들앞에서 《혁명적인 문학예술작품창작에 모든 힘을 집중하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이 연설에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가 소집된것은 예술영화촬영소에 있어서 대경사이며 전체 문학예술부문 일군들의 크나큰 영광이라고 하시면서 수령님의 다함없는 믿음과 크나큰 은정에 높은 창작적성과로 보답할데 대하여 호소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혁명적인 문학예술작품을 더 많이 창작하자!》, 이것이 오늘 우리 당이 문학예술부문앞에 제기하는 구호라고 하시면서 혁명적문학예술작품의 기본사명과 주제령역을 밝혀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밑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와 교시가 있은 후 혁명적영화창작에서는 거세찬 혁신의 열풍이 일어났고 그 열풍을 따라 혁명적영화예술의 새로운 전성기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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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영화창작의 새로운 열풍은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창작으로부터 폭발하였다.

창작단의 드높은 열의와 앙양된 기세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가 있은지 한주일만에 제1부의 작업필림을 완성하는 기적을 낳았다.

영화창작의 전기간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를 받은 작품이였지만 진작 그이께 작업필림을 올린 후에는 어떤 평가를 내리실지 몰라 모두가 긴장되고 초조한 마음들이였다. 어딘가모르게 미흡한 점이 있는것 같으면서도 자기가 낳은 자식은 다 고와보인다는 말처럼 작품이 그만하면 미끈한것 같기도 하다는 위안속에서 창작단성원들은 이제나저제나 그이의 평가만을 기다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53(1964)년 12월 17일 영화의 작업필림을 보시고 영화의 수정방향에 대한 명확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우선 영화가 전반적으로 속도가 느리고 처지는 감을 주는데 그것을 고칠 방도는 영화편집을 다시 하는데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영애의 아버지가 적들에게 붙잡혀가는 회상장면과 반복되는 항쟁장면을 찍어주시면서 회상장면을 길게 주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하면 오히려 극을 집중시키고 전반적인 흐름도 좋아질수 있다고, 또한 항쟁장면도 반복되는 화면을 빼고 간결하게 편집을 다시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편집을 잘하는 일군들의 방조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남조선현실을 그린 작품인데 반미사상이 약하게 형상된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오동훈의 죽음장면을 실례로 드시였다.

영화의 작업필림에는 괴뢰경찰이 오동훈이를 쏴죽이는것으로 설정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장군님께서는 오동훈이를 미제침략자들이 쏴죽이는것으로 형상하여야 인민들에게 반미감정을 더 높여줄수 있으며 그 죽음이 주인공의 성격발전에서 큰 계기로 되게 할수 있다는것과 극성의 견지에서 보아도 극이 더 살아날수 있다는데 대하여 명철하게 가르쳐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창작가들은 정치적식견이 너무도 낮은 자신들에 대하여 얼굴을 붉히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창작가들은 오동훈을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죽이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면서 주저하였을뿐 그가 누구의 손에 어떻게 죽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그래서 작품의 극을 살린다고 하면서 오동훈이 괴뢰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것으로 어정쩡하게 형상하였던것이다.

그런데 그이께서는 대번에 이 장면의 결함을 꿰뚫어보시고 지적하시였던것이다.

그이의 말씀을 듣고보니 미제침략자들과의 투쟁을 전면에 내놓아야 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있었다는것이 너무도 명백하게 안겨왔다.

참가자들은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였다. 너무도 심한 자책감에 온몸이 굳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한 인간의 죽음을 놓고도 정치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형상할줄 아는 높은 정치적식견과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것을 그들모두는 심장으로 느끼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영화에 설정된 애정관계를 혁명의 견지에서 잘 그릴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애정관계를 혁명을 위한 사랑으로 그리는가 아니면 세속적인 사랑으로 그리는가 하는데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고 하시면서 진명과 영애의 사랑이 혁명사업과 결부되게 대사형상을 고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이외에도 그이께서는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 《나의 별》이 부르기도 쉽고 듣기도 좋다고 치하하시면서 영애가 노래를 부르는 화면과 다른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듣고 생각에 잠겨있는 화면을 교차시켜 주도록 구체적인 대안까지 세워주시였다. 영화에서 좋은 노래는 관중이 충분히 감상할수 있게 주어야 극적감흥을 가지게 된다는것이 그이의 지론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제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도 영화의 첫 머리에 남독창으로 힘있게 주어야 한다고 하시였다. 사실 노래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는 그이께서 몸소 수정완성시켜주신 노래로서 그이의 지도와 심혈을 떼여놓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님께서는 후날 그 노래에 대하여 회고하시는 자리에서 가사에 《사나이 이 세상에 한번 태여나 나 하나의 안락을 찾다가 말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뜻이 정말 깊다고, 가사에는 수령님이나 당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내용이 아주 좋다고 모든 성과를 창작가들의 공로로 돌려주시였다.

그이의 교시를 받아안은 창작가들은 신심에 넘쳐 수정작업에 달라붙었다.

하여 다음해 1월에 영화의 제1부를 어버이수령님께 올리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54(1965)년 1월 31일 《성장의 길에서》 제1부의 첫 필림을 보시고 영화창작일군들에게 귀중한 교시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화의 연출, 연기, 촬영, 음악, 편집이 다 잘되였으며 영화의 흐름도 좋다고 높이 치하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극적정황이 자연스럽고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주며 인물들의 성격묘사도 잘되였다고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특히 주인공역을 한 배우(엄길선)가 아주 연기를 잘한다시며 수집어할 때는 수집어하고 울어야 할 때는 울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고 치하하시였다.

또한 영화의 주제가도 좋다고 하시면서 자본가가 《장학금》으로 학생들을 유인하려고 하는 장면과 동훈이를 매수하려 하다가 실패하자 그를 죽이는 설정이 좋다고 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으면서 창작가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대로 동훈이의 운명을 처리한것이 얼마나 옳은것이였는가를 페부로 절감하였다.

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영화에서 반드시 고쳐야 할 부족점들에 대하여 지적하여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우선 영화에 반미사상이 약하게 반영된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소경아이의 동생이 미국놈의 찦차에 깔려죽는 비극적장면을 실례드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미국놈의 찦차가 지나가던 아이를 깔아죽이고 달아나는것을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격분하고 증오할대신 침묵하고 무표정하게 서있는데 이렇게 되면 남반부인민들이 모두 무맥한 사람으로 보일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 장면 하나를 통하여서도 오늘 남반부인민들이 미국놈들한테 얼마나 모진 멸시와 천대를 받고있는가 하는것을 생동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또한 영화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우정관계를 명확히 그릴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당시 영화에는 진명과 동훈의 우정관계를 강조하던 나머지 동훈이가 《공납금》을 물지 못하여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자 진명이가 동훈이에게 내가 로동을 하여 학비를 벌어줄테니 네가 먼저 학교에 다니라, 다음에는 네가 나를 도와주면 우리는 차례차례로 공부를 할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고 지어 진명이가 자기 피까지 팔아 동훈의 《공납금》을 마련하는 생활까지 있었다.

이 형상을 놓고 수령님께서는 촌에서 홀로 살며 굶주리는 자기 어머니도 돌보지 못하고있는 진명이가 자기 처지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겠는가, 그들사이의 우정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인도주의적우정관계인데 만일 인도주의적우정이 그처럼 깊은것이라면 사회주의사회에서의 혁명적동지애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만일 옥녀가 자기의 애인인 동훈이를 위하여 피를 판다면 타당할수 있기때문에 그것을 보고 진명이가 로동을 하여 번 돈으로 학비를 보태주는것으로 묘사하는것이 좋을것이라고 형상대안까지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애의 성격을 잘 형상할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시면서 영애는 민족적량심을 가진 의사의 딸이다, 그는 중산계급출신인것만큼 미군의 만행을 보고 민족적량심에 자극을 받을수 있다, 그는 남조선사회에 대하여 혐오를 느낄수도 있고 녀자이기때문에 참상을 목격하면 눈을 감고 무서워할수도 있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시여 수령님께서는 조선소년이 미군찦차에 깔려죽는 참상을 목격하는 장면에서 영애가 강한 충동을 받고 민족적분노를 느끼게 하여야 하며 그다음에 응접실에서 염세적인 노래를 부르게 하여야 한다는것, 어머니에게 하는 대사에서 영애가 오늘 거리에서 가슴아픈 참상을 보았는데 그것을 랭정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말함으로써 남조선사회에 대한 혐오감을 표시하여야 한다는것을 가르쳐주시였다.

또한 영애의 형상에서 애정면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혁명사업에 인입하는 방향에서 끌고나가되 진명이가 경찰놈들에게 쫓기여 영애네집 창고에 숨어있다가 떠날 때의 장면을 잘 형상하면 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영애가 떠나는 진명에게 더 할말이 없는가고 하면서 몹시 안타까와할 때 진명이가 영애에게 이 책을 독서회책임자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을 하게 하고 영애가 그 비밀서적을 학생독서회책임자에게 전하면서 그가 놈들에게 체포되였다는것을 알리게 하면 진명에게서 받은 첫 과업을 수행하는것으로 되고 영애는 혁명의 길에 끌어들이는것으로 된다고 그 방도까지 가르쳐주시였다.

그리고 영애가 감옥에서 진명을 면회할 때도 진명에게 당신이 준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말하도록 하면 진명이가 감옥에서도 조직이 살아있다는것을 알고 용기와 신심을 가지고 견결히 투쟁할수 있으며 감방벽에 《조국통일만세!》라는 구호까지 쓸수 있다고 하시였다.

이외에도 수령님께서는 대자본가의 사무실장치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관련한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은 창작단성원들은 눈앞이 확 트이는듯 하였다. 영화의 수정대안이 너무도 명백히 그리고 환하게 그려졌기때문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받은 다음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창작적열의와 흥분으로 충만된 창작가들을 만나주시고 수령님의 교시대로 영화를 훌륭하게 수정완성할 구체적인 대안을 세워주시였다.

실로 예술영화화면에 바쳐진 절세위인들의 심혈과 로고를 그 어디에 비길수 있겠는가.

나는 꿈많은 중학시절에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를 보았었다.

청춘의 문어구에 서있던 그때 영화를 보고 받았던 감동과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아직도 그때의 감흥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며칠동안 영화의 세계에서 깨여나지 못하였고 장면장면들을 눈앞에 떠올리며 흥분으로 밤을 지새웠었다. 그때 우리들의 노래수첩마다에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 씌여지군 한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가들인 《나의 별》과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였다.

그 노래들을 부르며 진명이네들처럼 조국을 위하여 청춘을 바칠 결심으로 얼마나 가슴들을 끓이였던가.

지금도 이 영화는 우리 인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기있는 영화들중의 하나로 되고있다.

그러나 그때 우리들은 이 영화가 어떻게 그처럼 훌륭하게 창작되였는가 하는 깊은 사연에 대하여서는 알지 못하였었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그때까지 우리들이 그토록 사랑하였던 노래의 한구절한구절에도, 우리들의 심장을 그토록 설레게 하였던 영화의 장면들 하나에도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뜨거운 손길이 깃들어있었음을 당시의 직접적인 체험자였던 문예봉으로부터 듣고보니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지는것이였다.

과연 어느 나라, 어느 령도자가 한편의 영화를 위하여 이토록 창작가들보다 더 큰 심혈과 로고를 쏟아부은 실례가 있었던가.

우리 영화사의 갈피갈피속에 진한 자욱으로 수놓아져있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거룩한 자취를 되새기며 나는 문예봉에게 물었다.

《<성장의 길에서>는 우리 나라 영화예술을 새로운 단계에로 끌어올린 또 하나의 뚜렷한 령마루가 아니였습니까?》

《옳아요. 위대한분들의 세심한 지도를 받은 이 영화창작을 계기로 영화예술부문에서는 새로운 전성기가 펼쳐졌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비범한 예지와 정력적인 지도로 방대한 창작전투를 진두에서 이끄시였습니다.

그이께서는 <반동작품>으로 락인되였던 <최학신의 일가>의 종자도 새롭게 잡아주시고 창작전과정을 지도하시여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시켜주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이>의 창작을 지도하시였고 다른 편으로는 <유격대의 오형제>창작을 포치하시고 동시에 <밝은 태양아래서>를 비롯한 여러편의 대작전투를 틀어쥐고 밀고나가시였습니다. 정말 그때 우리는 일하는 보람이 컸어요. 예술영화촬영소가 생긴이래 그렇게 큰 작품들을 안고 여러개의 창작단이 일시에 움직인 례는 없었으니까요.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가 바로 영화혁명의 서곡이 울리던 력사의 나날들이였어요.》

문예봉의 눈에 진한 감회의 물결이 일렁이였다.

예술의 천재, 음악의 거장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천재적인 예지의 빛발아래 바야흐로 영화혁명이라는 거대한 사변이 태동하고있던 력사의 나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내 고향》을 창작하던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성장의 길에서》를 기점으로 장군님의 지도를 받으며 우리 영화예술이 또다시 새로운 단계에로 비약하는 력사의 시기들을 직접 체험하고 목격하고 동참한 문예봉은 얼마나 행복한 인간인가.

《선생님은 정말 행복하신분입니다. 절세위인들의 지도를 받으며 우리 영화사의 페지마다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나의 말에 문예봉의 고요하던 두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의 얼굴에 뜻있는 미소가 흘렀다.

《그래요. 정말 옳은 말입니다. 은막과 더불어 흘러온 70평생을 뒤돌아볼 때 나는 일생을 후회해본적이 없습니다. 조국과 인민앞에 그 무엇을 남겼다는 긍지랄가 여하튼 삶의 보람을 느낀답니다.》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이 한껏 어린 그의 말은 나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그렇다! 문예봉은 영화에 바친 자기의 일생을 놓고 자부할수 있을것이다.

무성영화시대를 대표하는 《임자없는 나루배》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나라의 첫 유성영화 《춘향전》, 공화국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 전쟁시기의 첫 예술영화 《소년빨찌산》, 전후의 첫 예술영화 《빨찌산처녀》 그리고 영화예술부문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첫 지도작품인 《성장의 길에서》…

이렇게 꼽아보면 문예봉은 조선영화의 매 단계를 대표하는 첫 영화들마다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영화사의 페지들을 빛나게 장식하였던것이다.

그의 행적이자 곧 우리 나라 영화사라고 할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 해외교포가 그를 두고 산 조선영화사라고 하지 않았을가. …

무척 존경이 갔다. 그리고 부러웠다.

시대와 조국앞에 뚜렷한 자욱을 시기마다 남기며 살아온 그의 아름답고 소중하고 빛나는 삶이…

깊은 사색에 잠긴 나의 속마음을 어느새 알아챘는지 문예봉이 뜨겁게 말하였다.

《장선생, 비옥한 토양과 자양분이 있어야 알찬 열매가 맺히듯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따사로운 품속에서는 누구나가 다 빛나는 삶을 누릴수 있다는것이 내가 찾은 생의 진리예요.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를 생각할 때면 나는 영화제목에서부터 그 어떤 운명적인것을 느끼군 한답니다. 사실 그 영화창작을 계기로 우리 영화예술은 지도자동지께서 펼쳐주신 새로운 영화세계에 들어섰고 영화인들은 새로운 혁명적영화예술인들로 성장발전하였거든요. 영화의 주인공들도 성장하였지만 그 역을 맡았던 우리 영화인들도 인간적으로나 예술적수준에서나 새로운 사람들로 태여나 조국의 귀중한 존재들로 된겁니다.》

과연 뜻깊은 말이였다.

위대한 스승밑에서 제구실 못하는 제자는 없는 법이다.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주인공역을 수행한 엄길선의 놀라운 발전이나 영화문학작가 백인준의 빛나는 삶이 이를 뚜렷이 실증하여주고있는것이 아닌가!

로동자출신의 평범한 배우였던 엄길선이 우리 인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배우로 자라난것도 위대한 수령님들의 친어버이손길에 이끌려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지도를 받으며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무척도 달라진 그의 풍모를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를 촬영할 때였다,

5. 1절경축장면을 찍기로 한 전날밤에 엄길선이 그만 병으로 쓰러졌다.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까지 치는 그를 바라보며 창작단성원들은 그 장면촬영을 미루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이튿날 엄길선이 말을 타고 촬영장에 나타난것이 아닌가. 밤새 고열에 시달린 그의 얼굴은 말이 아니였다. 그의 몸상태가 아직 정상이 아니라는것을 직감한 창작단성원들은 촬영을 서두르는 그를 만류하며 어서 병치료를 마저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엄길선은 머리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원형인물이였다면 어떻게 했겠소.》

창작단성원들은 가슴이 찡하여 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역인물을 맡은 배우로서가 아니라 영화의 원형인 항일혁명투사 오중흡동지처럼 살며 투쟁하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였다.

원형인물의 사상정신세계를 따라배워 혁명적예술인이 되려고 자신을 부단히 채찍질하며 수양해나가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혁명가들을 키워내는 위대한 품에 대하여 더욱 깊이 느끼게 되였다.

이러한 성장과정을 거쳐 그는 수많은 혁명영화들을 연출하여 우리 영화의 보물고를 빛내인 관록있는 연출가로, 후일에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의 직책까지 맡아한 원숙한 일군으로 자라났다.

영화문학작가 백인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밑에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를 창작하는 과정에 작가로서의 눈을 번쩍 뜬 그는 《최학신의 일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화문학들을 련이어 써내는 혁명적영화문학작가로서뿐아니라 당에서 시를 쓰라면 시를 쓰고 혁명가극을 창작하라면 혁명가극대본을, 노래를 지으라면 주옥같은 명가사들을 써내는 다재다능한 세계적인 대문호로 솟아올랐다. 후일에는 그 역시 문예총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직책을 력임하면서 조국통일성업에 헌신분투한 저명한 인사로 세계사회계의 각광을 받았다.

참으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비길데 없는 행운을 받아안은 복받은 조선의 영화예술인들이였다.

그 사랑, 그 믿음을 심장으로 새기였기에 우리의 영화예술인들은 1970년대에 영화혁명의 장엄한 포성으로 세계를 놀래우며 문학예술의 일대 전성기를 찬란히 펼쳐놓았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빛나는 예지와 걸출한 령도, 위대한 사랑과 믿음이 위대한 현실을 안아왔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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