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제2편 백합꽃은 태양의 빛을 받다

포화속에서 창조된 예술영화 《소년빨찌산》

  

요시꼬: 문선생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놀랍고 감동적이예요. 전쟁과 예술에 관한 주석님의 사상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문예봉: 물론이예요.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 가렬한 전쟁시기에도 우리 예술부문을 하나하나 손잡아 이끌어주시였기에 전쟁의 불길속에서도 훌륭한 예술영화들이 많이 태여날수 있었습니다.

여느때는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 조선의 영화인들은 해냈거든요.

나: 전시의 첫 예술영화는 《소년빨찌산》이 아니였습니까?

문예봉: 옳습니다. 《소년빨찌산》이예요. 이 영화는 1951년 7월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의 쁘라하에서 진행된 제6차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까지 받았답니다.

요시꼬: 대단하군요. 조선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50년대에 나는 미국에 가있었어요. 일본 교민들을 위한 독창회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갔댔는데 헐리우드를 방문하고 챠플린도 소개받았댔지요. 그래서 국제영화축전이 쁘라하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습니다만 전쟁이 한창이던 조선에서 전시에 만든 영화를 가지고 영화축전에 참가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댔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문예봉: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자신들도 스스로 놀라게 되군 합니다. 그러나 수령님의 믿음과 기대, 사랑에 꼭 보답하고야말겠다는 드높은 열의가 힘이 되고 재능이 되여 우리들을 떠밀었어요.

이 영화는 일시적강점시기 고향땅에서 미국놈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안주탄광소년근위대원들의 투쟁을 내용으로 하였습니다. 그때 영화문학작가는 등잔불심지를 돋구어가며 작품을 썼고 연출가는 방공호속에서 연출대본을 완성했댔습니다. 연출대본이 다 완성되자 우리 창작단은 놈들의 폭격이 다른데보다 그리 심하지 않은 평북도 수풍발전소부근과 창성지구에서 촬영을 시작하였어요. 그때가 아마 51년 4월 25일경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주인공의 어머니역을 맡았습니다.

나: 《소년빨찌산》에는 주로 나어린 학생들이 많이 출연하지 않았습니까?

문예봉: 그래요. 그래서 곱절 더 힘들었어요. 소년빨찌산역을 담당할 배우들을 선발하기 위하여 반토굴교실에서 공부하고있던 학생들을 찾아 몇십리를 걸었는지 모릅니다. 맞춤한 인물의 학생을 선발한 다음에도 영화에 생소한 그들의 연기를 지도하느라고 밤들을 새웠어요.

요시꼬: 어린 아이들의 연기문제를 해결하자니 퍽 힘들었을거예요.

문예봉: 물론 기성배우들이 아니다보니 힘든것만은 사실이였어요.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직접 맛본 아이들인지라 나이보다 일찌기 마음들이 자랐다고 할가, 여하튼 그들은 미국놈들을 족치는 작품의 내용에 흥분하면서 연출가의 요구이상으로 연기를 잘하더군요. 아마도 엄혹한 조국의 환경이 아이들을 빨리 철들게 한것 같습니다.

나: 놈들의 폭격속에서 촬영하자니 참 어려웠겠습니다.

문예봉: 그래요. 촬영이자 곧 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어요. 야외촬영을 할 때는 항공감시초소를 여러곳에 세우고 대피할 방공호들을 마련해놓은 다음에야 촬영을 하군 했습니다.

특히 반사판이 적기에 발견되지 않게 하려고 정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지금도 소년빨찌산들이 5. 1절경축 집단체조를 하던 평화시기를 회상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일이 선합니다. 이날따라 미국놈들의 비행기가 어찌나 미친듯이 돌아치던지… 촬영장소 여기저기에 눈먼 폭탄들을 마구 떨구며 기승을 부리지 않겠습니까.

촬영해야 할 장면이 집단체조장면이라 수많은 학생들이 동원되였댔는데 정말 긴장되더군요. 놈들의 비행기만 뜨면 방공호로 달려가야 했는데 아슬아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놈들의 폭격이 너무 심하여 촬영을 미루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만약 폭격에 희생자라도 나면 큰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반항공대책을 철저히 세워놓고 촬영을 진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항공때문에 몇번씩 아이들을 방공호로 대피시켰다가 폭격이 뜸해지면 다시 모여놓고 촬영하기를 그 몇번… 정말 진땀이 나는 일이였습니다.

결국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그날 촬영을 끝냈는데 만세라도 부르고싶은 심정이였습니다. 촬영이 끝난 다음 보니 우리 배우들은 물론 연출가와 촬영가들의 옷은 온통 땀과 먼지투성이로 매닥질되여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였습니다.

요시꼬: 정말 영웅적이라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군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리해하기 힘든 전혀 새로운 세계입니다. 사실 폭격속에서 촬영한다는것이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 우선 나부터도 그런 정황이라면 모든것을 포기했을겁니다. 자본주의나라 배우들이야 돈과 명예때문에 배우노릇을 하는데 생명을 잃은 다음에야 그 모든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문예봉: 요시꼬선생의 말대로 자본주의나라 예술인들이야 개인의 명예와 돈벌이가 목적인데 무엇때문에 생명을 걸고 모험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술인들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이 아니라 조국의 명예와 운명이 더 귀중한것입니다. 조국의 운명속에 나개인의 운명도 있으니까요. 그때 우리 영화인들은 수령님의 교시대로 전쟁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인민군대와 인민들에게 한시바삐 그 훌륭한 영화를 보여주어 그들을 더욱 힘있게 고무하려는 하나의 열망에 불타있었어요. 영화를 만들면서 우리들은 자신들을 다 전호속에서 싸우는 전사들로 생각했댔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한카드한카드 필림을 완성하여나갔어요. 그래서 촬영을 시작한지 두달도 채 못되는 6월말경에 완성된 필림을 수령님께 올릴수 있었습니다.

요시꼬: 전쟁때문에 몹시 바쁘셨을 주석님께서 영화의 첫 필림까지 보아주셨단 말입니까?

문예봉: 그래요.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이 완성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 2시에 석수가 떨어지는 갱도영사실에서 통나무의자에 앉으시여 영화를 보시였다고 합니다. 먼동이 훤히 터오는 새벽까지 말이예요.

요시꼬: 문선생의 말을 들으니 나도 생각키우는것이 있구만요. 우리 대표단이 주석님의 접견을 받을 때 그이께서는 글쎄 나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1940년에 만든 《그 이름 만대에 전하라》라는 영화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당시 내가 출연한 영화들가운데서 그중 경향이 좋은 영화였는데 아편을 반대하여 싸운 림측서에 대한 내용이였어요. 그 영화에서 나는 아편의 해독성을 노래한 《사탕파는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었드랬어요.

나: 우리 수령님께서는 혁명에 나서신 첫시기부터 문학예술을 혁명투쟁의 중요한 무기로 보시였습니다.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피바다》도 다 수령님께서 몸소 창작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이예요.

요시꼬: 참으로 생각되는바가 많습니다. 문선생과 장선생의 말을 들을수록 더욱 나의 한생이 허무하게 생각되는군요.

그 좋은 처녀시절을 군국주의자들의 정치적롱락물로 무대와 은막에서 웃음과 노래를 팔다가 그후에는 오직 개인의 성공과 먹고살기 위하여 실력과 노력의 세계라는 무대와 영화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지칠대로 지쳐 밀려난 나였지요. 사회와 인민을 위한것은 고사하고 줄곧 나 하나만을 위하여 벼랑우를 걸어가는것과 같은 긴장한 인생을 보냈으나 결국 차례진것은 락심과 절망뿐이였지요. 정말 허무하다는 생각을 털어버릴수가 없어요.

그러나 문선생은 얼마나 나와 대조되는 길을 걸어왔습니까.

일성주석님의 지도를 받으며 조국과 인민을 위한데 예술적재능을 다 바쳐왔으니 시대가 알고 인민이 아는 정말 행복한 예술인의 한생입니다.

문예봉: 오다까선생의 말이 옳습니다.

수령님을 떠나서 이 문예봉이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소년빨찌산》을 보아주시는 석상에서도 그이께서는 나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또다시 주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영화의 첫시작부터 노래가 들어가니 아주 좋다고 하시면서 소년들이 용감하게 싸우는 장면은 좋으나 어머니의 형상이 잘 안되였다고 지적하시였습니다. 그때 나는 주인공의 어머니역으로 분장했댔는데 아들이 사형장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연기형상을 잘하지 못하였댔습니다. 강의한 어머니를 그린다고 하면서 아들이 놈들에게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것으로 형상했거든요. 수령님께서는 이 장면을 보시면서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하시였다는겁니다.

아들이 사형장으로 끌려나가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눈물이 없을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아무리 애국심이 강하고 적에 대한 증오심이 높다고 하더라도 자기 아들이 적들에게 끌려 사형장으로 나가는데 맹숭맹숭하게 그냥 보낼수 없다, 어머니의 심정으로서는 도저히 그럴수 없다, 동무들이 아마 강의한 어머니를 그린다고 하여 정치성 일면만 강조한것 같은데 예술작품에서는 정치성과 예술성이 잘 결합되여야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수 있다, 어머니의 형상을 좀더 진실하게 하였더라면 좋았을것이라고 말입니다.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받은 나는 정말 얼굴을 들수 없었습니다.

수령님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고 또다시 심려를 끼쳤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아프게 하더군요. 구체적인 생활과 감정을 떠나 추상적으로 정치성 일면만 강조하면서 어머니형상을 딱딱하게 한것이 어찌 연출가의 잘못만이겠습니까. 연기의 담당자는 나인데 나자체가 어머니의 성격파악을 잘하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데 매달린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분발하였습니다. 우리 창작단성원들은 수령님께서 지적하여주신 부분들을 빠른 시일안에 시정하기 위한 전투를 벌리였습니다.

나: 그 영화를 촬영할 때 수령님께서는 중국에까지 가서 촬영하도록 배려를 베푸시지 않았습니까.

문예봉: 옳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야외촬영은 수풍이나 창성지구에서 하고 실내촬영은 중국 장춘영화촬영소에서 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습니다. 모든 조건이 불비한 속에서 영화를 만드는 우리들이 폭격에 상할가봐 중국에 들여보내주신 그이께서는 예술인들이 그곳에서 토질병에 걸릴가봐 념려하시여 쌀과 기름, 햇미역까지 보내주시였습니다. 그이의 사랑이 깃든 후방물자를 실은 자동차를 부둥켜안고 우리들은 목이 메여 울고 또 울었습니다.

모든것이 긴장한 전쟁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역땅에서 영화제작을 하는 우리들을 생각하시여 밀가루며 사탕가루, 당과류는 물론 고추장, 된장까지 보내주신 그 사랑을 어찌 친부모의 사랑에만 비기겠습니까. 이 사실에 대하여 중국의 예술인들도 몹시 감탄하였댔습니다.

전시의 첫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은 이렇게 수령님의 뜨거운 손길아래 태여났습니다.

이 영화는 높은 전투성과 호소성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대를 크게 고무하였고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영화는 대량 복사되여 전선과 후방으로 보급되였습니다. 그후 중국어로 번역되여 중국의 도시들과 지방들에서도 성황리에 상영되였고 앞에서도 이야기한바와 같이 제6차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도 받게 되였습니다.

나: 문선생님은 그 영화제작이후에 공훈배우칭호를 수여받지 않았습니까?

문예봉: 그렇다고 할수 있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주체41(1952)년 6월 4일에 예술인들에게 명예칭호를 수여할데 대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정령이 발표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10여명의 예술인들에게 공훈배우칭호가 수여되였는데 나도 거기에 속해있었어요. 말하자면 우리 공화국의 첫 공훈배우라고 할수 있습니다.

요시꼬: 정말 행복스러웠겠습니다.

문예봉: 솔직한 말로 행복하기도 했지만 송구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사실 제가 뭐 별로 크게 한 일이 있습니까.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내세워주시였으니 그런 영광을 지닐수 있은게 아닙니까. 나뿐이 아니였습니다. 《소년빨찌산》의 담당연출가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고급양복지까지 보내주었고 이 영화제작에 공로있는 성원들에게는 모두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안겨주시였습니다.

요시꼬: 전쟁이라고 하면 죽음과 파괴를 먼저 생각하지요. 그러나 조선에서는 전쟁시기에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였구만요. 그 요인이 어데 있는지 잘 알것 같애요. 참으로 일성주석님은 예술의 천재이실뿐아니라 창조의 영재이시군요.

문예봉: 옳습니다. 수령님의 손길아래서 우리 영화인들은 전쟁시기에만도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또다시 전선으로》, 《정찰병》 등 5편의 예술영화와 106편의 시보 및 기록영화들을 만들었습니다. 그중에서 수령님께서 직접 지도하신 영화만도 99편이나 된답니다.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가 훌륭한 예술영화로 완성된 과정 하나만을 보아도 수령님께서 영화 한편한편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이시였는가를 잘 알수 있을것입니다.

그 영화는 주체41(1952)년 1월초에 첫 필림이 완성되였는데 초기제목은 《조국을 위하여》였습니다. 소박한 갱도영사실에서 영화창작가들과 몇명의 지도일군들과 함께 영화를 보신 그이께서는 우선 영화의 제목부터 의견을 주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영화의 제목이 《조국을 위하여》인데 제목에 비하면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고 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단지 싸움을 잘하는것만으로 영웅이 되는듯이 그렸는데 영화에서는 개인영웅주의가 아니라 집단적영웅주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습니다.

얼마나 심오한 말씀입니까.

당시 영화창작가들은 주인공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그린다고 하면서 주인공 한사람만을 내세우고 그만이 싸우는것처럼 그려놓았던것입니다. 인민군용사들의 대중적영웅주의가 전쟁을 이기는 기본힘으로 되고있던 전쟁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형상이였지요.

수령님께서는 영화에 나오는 지휘관의 형상이 잘 안된데 대하여서도 지적하시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지휘관이 땅굴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 장면을 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휘관들은 저렇지 않다고,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지휘관은 선두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사실 전쟁시기 돌격전의 선두에는 언제나 지휘관들이 서있었고 그들이 웨치는 《나를 따라 앞으로!》의 돌격명령에 따라 승리의 진격로가 열려지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작가들이 전쟁의 이런 현실과 인민군대의 우월성을 깊이 연구하지 않다나니 그런 결함들이 나타났던것입니다. 더구나 영화에는 애정문제가 있어야 흥미있다는 낡은 미학관에 사로잡혀 인민군전사와 간호원처녀와의 사랑관계를 진하게 끌고나감으로써 마치 사랑문제가 전시의 기본문제의 하나인듯 한 인상까지 주었댔지요. 여기에 대해서도 수령님께서는 병원에서의 사랑관계가 전사들의 교양에 그리 좋을것 같지 않다고 깨우쳐주시며 미국놈들의 폭격에 조선이 재더미가 되였다는것은 전세계가 다 아는데 병원을 왜 그렇게 화려하게 찍었는가고 지적하시였습니다. 놈들의 폭탄속에서도 조선인민은 굴하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강조하기 위한 창작가들의 주관적인 생각은 결국 진실을 외곡하고 현실을 미화분식한 결과를 초래하였던것입니다. 모든것이 어려운 전시의 형편에서 국가의 물자와 재정을 많이 들여 찍은 영화가 이렇게 결함투성이가 되고말았으니 창작가들과 일군들은 얼굴을 들수가 없었습니다.

락심하여 의기소침해있는 창작가들을 둘러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일하느라면 오유도 범할수 있는데 잘못을 고치면 된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영화화면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영화는 당의 의도와 꼭 맞아야 하고 또 정치성과 예술성이 높아야 한다, 동무들은 영화예술이 다른 모든 예술보다 가장 우월하다는것을 알아야 한다고 깨우쳐주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자책감에 모대기는 창작가들에게 영화의 내용은 어떻게 되여야 하며 인물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며 제목은 될수록 소박하고 내용에 맞게 달아야 한다는 등 구체적인 수정방향까지 가르쳐주시였습니다.

그 좌석에 참가하였던 허정숙 문화선전상동지가 후일에 수령님의 교시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해주었는데 그날 그는 수령님의 교시를 받고보니 마치 앞을 막았던 짙은 연막이 활짝 걷히고 답답하던 가슴에 청신한 기운이 확 쓸어드는듯 한 기분이였다고 말하더군요.

영화시사를 끝내고 최고사령부건물앞으로 모두 나오자 수령님께서는 다시금 최고사령부건물을 가리키시면서 나라의 최고사령부도 이런 집에 있는데 동무들이 만든 영화에 나오는 야전병원은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그래서 누가 믿겠는가,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시였답니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가슴깊이 새기고 창작가들은 한장면한장면 품을 들여 영화를 다시 찍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또다시 전선으로》라는 제목으로 수정완성된 영화를 다시금 수령님께 올렸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치하하시면서 조국의 촌토를 지키는 우리 인민의 영웅적투쟁모습을 훌륭히 형상하였으며 우리 인민군대전투원들의 영웅적기개와 혁명적락관주의를 잘 묘사하였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창작에 참가한 일군들을 크게 표창하며 《로동신문》을 통해 영화를 널리 소개선전하도록 하시였습니다.

이 영화도 제7차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받았어요. 정말 전쟁의 불길속에서도 우리의 영화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애쓰신 위대한 수령님의 심혈과 로고에 대하여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수령님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는것이 우리의 전시영화입니다.

요시꼬: 위인의 정치는 언제나 위대한 현실을 낳는 법이지요.

조선에 와서 나는 매 시각마다 이 진리를 절감하군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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