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제2편 백합꽃은 태양의 빛을 받다

신념의 대결

 

인천, 수원, 평택, 조치원을 거쳐 대전에서 공연을 끝낸 소편대는 서울에 도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진격하는 인민군대오와 함께 누비던 화선천리길에 있었던 가지가지 일들을 감개무량하게 되새겨보며 그들은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니 여러 편대로 나뉘여 활동하던 예술인들이 다 모여들고있었다.

서울에 들어서면서부터 문예봉의 마음을 무겁게 한것은 유경애에게 남편 류현의 희생소식을 어떻게 전할것인가 하는것이였다.

자기들이 도착한것을 알면 틀림없이 유경애가 달려올것인데 어쩐단 말인가. 혼자 속을 썩이며 바재이고있는데 유경애가 먼저 그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예봉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서글서글하던 눈매가 차거운 빛으로 번뜩이는것이 심상치 않았다.

(소식을 들었구나.)

직감되는 생각에 예봉은 어떻게 말을 떼야 할지 몰라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무언속에 몇초가 흘렀다.

그러나 말없이 마주보는 서로의 눈빛속에서 두 녀인은 말로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다 주고받았다.

유경애가 목갈린 음성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이가 희생되던 때의 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문예봉은 목이 메여오는것을 참으며 평택의 밤길에 있었던 사연을 띠염띠염 이야기해주었다.

황철과 부상자들을 후송한 그이튿날 평택군의 나지막한 뒤산에 류현과 정순모를 고이 안장하던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까지 눈물 한방울 없이 멍하니 듣고만있던 유경애가 그만에야 푹 꼬꾸라지며 대성통곡을 하는것이였다.

문예봉은 그를 위로할 생각도 못하고 같이 눈물만 흘리였다.

이윽고 유경애가 눈물을 씻으며 말하였다.

《언니, 다시는 울지 않겠어요. 미국놈들이 좋아하라구 내가 울고불고하겠나요. 놈들을 천백배로 복수하겠어요.》

깨끗이 눈물을 닦은 유경애의 눈에서는 결연한 빛이 뿜어져나오고있었다.

문예봉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마주잡은 두 녀인의 손은 불같이 뜨거웠다.

 

*           *

 

서울에서 문화선전대활동을 총화한 예술인들은 드디여 평양에 도착하였다.

미국놈들의 폭격에 상처를 입은 평양의 모습은 예술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허비였다.

촬영소도 여지없이 파괴되여 페허와 같았다.

그런데 후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공화국이 후퇴를 하다니?…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여기저기 알아보니 사실이 틀림없었다.

촬영소 소장이 직접 나타나 후퇴에 대한 지시를 내리였다.

영화인들이 소편대활동을 하면서 전선에 나가있는 기간 어디에 가서 무얼 하다왔는지는 모르나 소장의 몸에서는 전쟁을 겪는 사람의 체취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멋쟁이몸차림도 여전하고 깨끗이 다듬은 얼굴도 여전하였다.

그는 문예봉과는 쌀쌀한 표정으로 악수를 한번 나누는것으로 오래간만에 만난 인사를 대치하였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다른 배우들과는 어깨를 두드리며 각근히 친숙한 감을 보이였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소장의 거동이 쓰거워서 문예봉은 머리를 돌리고말았다.

그만 보면 생리적으로 반감과 구토감이 치밀어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음으로양으로 자기를 모해하며 못살게 군다는 개인적감정만이 아니였다.

웬일인지 공화국에 충실한체 하고 뛰여다니는 그의 자태가 진실하게 안겨오지 않았다.

시세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과 같다고 해야 할지…

여하튼 그 어떤 인생관과 신념도 없이 바람따라 돛다는격으로 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하면서 권모술수로 살아가는 정치매춘부라는 생각만은 지울수 없었다.

오후에 종업원들을 모여놓고 소장은 강계까지 후퇴해야 하는데 가족들은 다 떼두고 본인들만 가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들이 튀여나왔다.

세대주들을 믿고사는 가족들을 떼놓으면 그들은 어떻게 하라는건가. 가족들을 적구에 남겨놓으라는것은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종업원들이 항의하였으나 소장은 막무가내였다.

그의 말인즉 그 많은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가다가는 예정된 기일까지 후퇴를 보장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촬영소의 부담도 그만큼 과중해진다는것이였다.

현재 촬영소의 힘으로는 가족들까지 다 책임질수 없는 형편이라고 우는 소리를 해댔다.

가족들을 떨구고 간다는것은 예봉이로서도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

노상 병으로 앓고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나만 갈수 있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일이였다.

그런데 종업원들을 더욱 격분시킨것은 가족들을 떼놓으라고 강박하다싶이 내려먹이는 소장자신은 가족은 물론 식모까지도 다 데리고 후퇴한다는 사실이였다.

배우들속에서 쉬쉬 돌아가는 소리가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임을 직접 목격하게 된 예봉은 더는 참을수 없어 허정숙 문화선전상을 찾아갔다.

격분에 떨면서 촬영소의 사태를 이야기하는 예봉의 말을 다 들은 허정숙 문화선전상은 그자리에서 전화로 촬영소 소장을 찾았다.

《소장동무! 동무는 왜 후퇴조직사업을 당에서 하라는대로 하지 않는가요?》

첫마디부터 날카롭게 추궁하는 문화선전상의 목소리에는 상대방을 대번에 제압하는 위엄이 풍기였다.

《아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리해가 안 간다는듯 우정 얼떠름한체 하는 소장의 비굴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지금이 어느때라고 아직도 연극이요? 더 길게 말할새가 없습니다. 당장 촬영소가족들까지 다 후퇴할수 있도록 조직사업을 다시 하시오. 당에서는 가족들을 남겨두라고 지시한적이 없어요.

후퇴조직사업정형을 저녁에 내가 직접 다시 보고받겠습니다. 알겠어요?》

단호하고도 엄격한 문화선전상의 지시에 소장은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날밤 촬영소종업원들은 가족들까지 다 데리고 서평양조차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벌써 그들을 태우려고 자동차들이 여러대 대기하고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영화예술인들을 포함한 문화선전대원들의 후퇴정형을 친히 료해하시고 후퇴로정까지 정해주시였으며 뒤이어 여러대의 화물차까지 보내주시였던것이다.

한대의 자동차라도 더 전선으로 보내야 할 준엄한 시기였다.

그런데도 수령님께서 이렇게 영화예술인들의 후퇴를 위하여 여러대의 화물차까지 보내주시였으니 그 감격을 무슨 말로 표현할수 있으랴.

영화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누를길 없어하며 기어이 수령님과 당을 따라 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결심들을 품고 간고한 후퇴의 길에 올랐다.

 

*           *

 

간고한 후퇴의 로정이였다.

순천에서는 폭격에 다리가 끊어져 자동차로 더는 갈수가 없었다.

주민부락에 흩어져 하루밤을 새웠는데도 다리가 복구되자면 며칠이 걸린다 하여 그날부터 걷기 시작하였다.

행군도중에 촬영소차를 만나 아이들과 환자들만 태우고 본인들은 계속 도보행진을 하였다.

희천에 도착하여서야 헤여졌던 가족들과 다시 만났는데 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희천굴간에서 나쁜 놈들이 촬영소차를 폭파시키는 바람에 싣고오던 이부자리, 옷가지, 쌀 등이 몽땅 날아났던것이다.

그야말로 알몸뚱이가 된 가족들이였다.

그러나 락심하지 않고 그들은 다시금 북행길에 올라 걷고 또 걸었다.

단순한 후퇴가 아니였다.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당과 공화국에 대한 믿음, 승리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따라나설수도 없는 길이였다.

시련에 찬 이 시각이 매 사람들의 신념과 충실성, 지조를 검열하는 시금석으로 될것이였다.

후퇴의 마지막로정인 강계에 도착한 촬영소종업원들에게서 제일 급한것이 식량문제였다.

숱한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였고 어른들도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여기까지 오다나니 지칠대로 지쳤다.

그런데 불쾌한 소식이 전해져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후퇴하여온 숱한 종업원들이 기아와 추위에 떨고있는데 촬영소 소장은 승용차안에 식모까지 태우고 가족들과 함께 흰쌀밥을 해먹으며 풍청댄다는것이였다.

설마? 예봉은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였다.

소장의 아들녀석이 승용차안을 부럽게 들여다보는 아이들에게 《거지 같은것들, 콱 먹으라.》고 하면서 흰쌀밥덩이를 던지였던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집에는 흰쌀밥이 많으니 버릴것 없이 너희들에게 주겠어. 배고프면 또 오라.》고 지껄이였다.

아이들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예봉은 주저없이 소장을 찾아갔다.

예봉의 표표한 기상에 약간 놀라며 소장은 반갑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요?》

《소장동지, 지금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래서?》

소장은 그가 말도 채 하기 전에 눈을 치뜨며 대번에 반문조로 나왔다. 도전적인 자세였다. 네가 도대체 뭐라고? 하는 속대사가 력력히 풍기였다.

입술을 감빨던 예봉은 마음을 도슬러먹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겁니다. 촬영소에 차도 한대 있는데 이 근방 농촌에 나가 쌀을 구해올수 있지 않습니까. 우선 사람들을 먹여살려야…》

《동무가 뭐길래 이 소장보고 이래라저래라 훈시질이요? 이 소장은 뭐 바지저고리인줄 아오? 누구 등을 믿고 안하무인이야?》

역스럽게 내뱉는 소장의 말이 몹시도 귀에 거슬렸다.

누구의 등을 믿다니? 대책은 세우지 않고있다가 의견을 제기하면 모욕으로 받아들여?…

반발심이 용수철처럼 튕겨났으나 예봉은 지그시 마음을 눌렀다.

우선 그를 설복해야 했다.

《소장동무가 대책을 세우지 않고있기에 의견을 제기하는것 아닙니까. 이건 나개인뿐만이 아니라 촬영소종업원들의 한결같은 의견입니다.》

《흥!》

소장은 코방귀를 뀌였다.

《촬영소라? 지금이 어느때라고 촬영소 같은 소릴 다하고있소? 한심들 하지.》

진한 랭소가 그의 입가를 스치였다.

《예?》

《너무 한심해서 하는 소리요. 지금 촬영소가 어디에 있다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들고다니오?》

너무도 뜻밖의 말에 예봉은 말문이 콱 막히였다. 촬영소가 없다니?

겨우 누르고있던 반발심이 폭발하였다. 그는 총알같이 내쏘았다.

《소장이 있는데가 촬영소지 다른데가 촬영소겠습니까?》

《소장이 있는데가 촬영소라? 순진하오, 순진해. 공화국이 다 망했는데 무슨 촬영소타령이요?》

비웃음을 잔뜩 담은 그는 한심하다는듯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

《뭐라구요? 공화국이 망했다구요?》

《그렇소.》

소장은 태연하게 내뱉았다.

예봉은 너무도 가슴이 떨리고 격분이 끓어올라 두주먹을 부르쥐고 웨치듯 대들었다.

조선로동당이 있고 수령님께서 계시는데 공화국이 왜 망한단 말이예요?》

예봉은 찌를듯이 소장을 쏘아보았다.

자기의 내장까지 꿰뚫어보는듯 쏘아보는 예봉의 도전적인 태도에 소장은 더욱 기가 올랐다.

《지금 사태가 어떻게 번져지는지 알기나 하고 말공부질이요? 초산에 미군락하산부대가 한벌 쫙 깔렸소. 우린 속히 압록강을 건너야 할 판이요. 압록강을 건너간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머리가 있으면 좀 사고할줄도 알아야지. 흥, 인제는 어디 가서 빌어먹으려고 해도 빌어먹을데도 없소. 현실이 바로 이러한데 뭐가 어찌고 어째…》

《그럼 소장동무는 왜 여기까지 후퇴해왔어요?》

《우에서 하라니까 한거지 별수 있소? 말은 바른대로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줄 알았으면 애당초 여기까지 고생하면서 올 필요도 없었단 말이요.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뭐요?》

《그러면 미국놈들이 들어온 곳에 그대로 있어야 옳다는겁니까?》

《뭐요?》

급소를 찔리운 소장은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정말 까다롭게 놀겠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사람을 잡자고들어. 내 언제부터 묻자던건데 누구 등을 믿고 그리 뻣뻣하오? 김책이나 허정숙이를 믿고 그러오?》

소장은 질시에 찬 눈초리로 예봉을 흘겨보았다.

그는 예봉의 급소를 찔렀다고 속으로 쾌재를 올리였다.

예봉은 격분보다 오히려 가소로움을 느끼며 마음이 편해짐을 흐뭇이 감각하였다.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였던것이다. 멸시의 감정이 통쾌하게 가슴을 적셔내리며 별스레 소장이 눈아래로 내려다보이였다.

소장이라는 감투를 벗겨버리면 인간적으로는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

그 어떤 신념도 인간적인 성실성도 없이 시세에 따라 변색하면서 살아가려는 기생충, 쟁인바치! 월급쟁이!

멸시감을 감추지 않으며 예봉은 의젓이 말하였다.

《난 그 어떤 개인의 등을 믿어본적이 없어요.

오직 일성장군님과 당을 믿을뿐이요. 그래서 우리 공화국의 승리도 믿는거구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림이 없이 도고한 자세로 한마디한마디 그루를 박아 내쏘는 예봉의 가슴은 소장의 따귀를 후려친것만큼이나 후련해졌다.

문득 남천강다리에서 수령님을 뵈옵던 정경이 가슴뭉클하게 안겨온다.

아, 그날의 들국화꽃다발!

그날에 풍기던 들국화의 연연한 향기가 그의 가슴을 뭉클 적셔주는듯싶었다.

예봉은 후더워지는 가슴을 안고 홱 돌따섰다.

이따위 인간과 더 마주서있고싶지 않았다.

그가 오연히 걸음을 떼는데 소장이 그를 불러세웠다.

뭐가 켕기는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은근히 다가붙었다.

《예봉동무, 이자 우리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서로 없었던것으로 합시다. 피차에 서로 쌓여있던 감정들이 앞서서 곱지 않은 소리들이 오고갔는데 감정적으로 한 말을 가지고 신경을 쓰지 맙시다.

나도 동무도 서로 리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이 아니요.》

예봉이앞에 쏟아놓은 자기의 속심을 급급히 감정상의 보자기에 씌워 어물쩍해보려는 소장의 넉두리가 너무도 메스꺼워 예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감정상의 문제라니? 감정상의 문제가 되여 공화국이 어찌고저찌고 했는가?…

말은 곧 그 사람이다. 땅에 쏟아놓은 물을 다시 담을수 있는가?

뒤가 켕긴 소장이 뭐라고 횡설수설하며 자기 변명의 긴말을 늘어놓았지만 예봉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가슴속에 땅땅 새겨놓은것은 단 하나, 조국의 운명이 가장 어려운 이 시각에 소장은 딴마음을 먹고있었다는 사실이였다.

이것은 결코 그 어떤 미사려구로 감쌀수도 없고 지워버릴수도 없는, 그래서 반드시 계산되여야 할 소장의 신념문제였다.

예봉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라치웠다.

《더 길게 말하지 맙시다. 소장동무, 쏟아놓은 물을 다시 주어담을수는 없지요.》

너무도 많은 의미를 담고있는 예봉의 서느러운 눈초리앞에서 소장도 더는 입을 열지 못하였다.

결국 신념의 대결이라 할수 있었다.

바다물을 다 마셔보아야 짠맛을 아는것이 아니다. 한모금이면 충분한것이다.

력사는 언제나 공정한 법이다.

해방전에 벌써 일제에게 전향하여 본색을 감추고 줄곧 반당반혁명의 길을 걸어온 소장은 전쟁시기의 일이 켕기여 그후 문예봉을 모해하려고 여러모로 책동하였다.

그러나 치렬한 사상투쟁의 격류속에서 반당종파분자로서의 정체가 폭로되여 그자는 당과 공화국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가렬한 전쟁의 불길은 문예봉을 더욱더 강철같은 신념의 인간, 의지의 인간으로 벼리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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