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제2편 백합꽃은 태양의 빛을 받다

새 조선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의 탄생

 

조선예술영화촬영소구내에는 푸르싱싱한 한그루의 단풍나무가 서있다. 력사의 증견자인양 거연히 치솟은 단풍나무는 한여름에는 무성한 잎새들이 푸르게 단장되여 설레이고 가을이면 열정의 빛으로 붉게붉게 타오른다.

예술영화 《내 고향》이 고고성을 터치던 그 력사의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첫 예술영화의 탄생을 기념하여 손수 심으신 단풍나무이다.

세월은 흐르고흘러 야들야들한 잎새를 살랑대던 애어린 나무가 어느덧 소소리높은 거목으로 자라났으니 이 나무의 년륜들에는 우리 조선영화의 자랑찬 발전력사가 돌기돌기 새겨져있다.

사연깊은 이 나무를 볼 때마다 문예봉은 예술영화 《내 고향》이 태여나던 그 시기를 류다른 감흥속에 회억하군 하였다.

우리 공화국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

힘찬 고고성을 터치며 세상에 태여나던 환희의 그 시각을 위하여 우리 수령님께서 바치신 심혈과 로고를 어찌 다 헤아릴수 있으며 그 만단사연을 어찌 한두줄의 글에 다 옮길수 있으랴.

예술영화촬영소에 예봉이가 배치되였을 때에는 벌써 예술영화《고향》(가제)의 창작사업이 일정에 오른 때였다.

영화문학을 쓴 작가는 서울에서 문학활동을 하다가 수령님의 품에 안긴 김승구였다.

어느날 김승구는 예봉에게 자기가 《고향》이라는 영화문학을 쓰게 된 동기를 감명깊게 들려주었다.

해방된 조국에 두번째로 찾아든 어느 봄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금같은 시간을 내시여 몇몇 작가들을 친히 저택으로 부르시였는데 그속에는 김승구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전설처럼 들어오던 김일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온다는 흥분으로 가슴들을 들먹이던 작가들은 너무도 소탈하신 그이의 인품에 어느덧 긴장감도 다 풀리여 수령님께서 안내하시는 응접실로 스스럼없이 들어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정하신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시면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동무들의 요청을 받고 시간을 냈으니 글을 쓰는데 참고가 될 몇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준엄하였던 그 시기를 회상하시는듯 잠시 감회에 잠기시였다가 항일유격대는 세계 유격대력사에서 그 류례가 없는 간고하고 험난한 조건에서 싸웠다고 하시면서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고 부모처자곁을 떠나 이국땅에서 싸우다가 만주광야에 쓰러진 그들을 생각하면 정말 잠이 오지 않는다고, 오늘과 같은 날이면 더욱 그렇다고 감회깊게 말씀하시였다.

어느덧 수령님의 음성은 갈리시였고 그이의 안광에는 추연한 빛이 어려있었다.

작가들은 모두 숙연한 감정에 휩싸였다. 수령님의 아프신 심정이 그대로 작가들의 가슴에도 미쳐왔다.

울울창창한 천고의 밀림, 눈보라 사나운 만주광야, 걸음걸음 헤쳐가야 하는 험난한 길에 생사를 각오한 동지들을 타향의 이름없는 산언덕에 묻으며 그이께서 흘리신 피눈물은 그 얼마이랴.

수령님께서는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시였다. 어느덧 어둠이 깃든 창문으로는 포근한 봄바람이 스며들고있었다.

이윽고 작가들을 둘러보시며 수령님께서는 생각 깊으신 어조로 백두산에서 왜놈들과 싸우던 이야기를 하자면 아마 며칠밤이 걸려도 모자랄거라고 하시면서 무기를 수송하는 왜놈들을 치던 일들과 동네사람들이 떡을 치고 환영하던 일, 왜놈의 군대를 우리의 병기창이라고 부르던 일들을 이야기하시며 통쾌하게 웃으시였다.

천금보다 귀중한 수령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작가들은 온 정신을 모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찌나 당시의 환경과 사실들을 생동하게 말씀하여주시는지 작가들의 눈앞에는 항일의 총성 드높던 그날의 전구들이 선명한 화폭으로 펼쳐지는듯싶었다.

무변광대한 백두밀림의 설레임소리가 그들의 귀가에 메아리쳐오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소연한 물소리와 우등불가에서 유격대원들이 부르던 사향가의 은은한 선률이 들려오는듯 하였다.

사랑하는 젖먹이어린애를 남의 집 울바자밑에 놓고 혁명의 길을 떠나던 녀대원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순간에조차 해방된 내 조국, 내 고향의 미래를 그려보며 밝은 웃음을 대지에 뿌리던 투사들의 숭고한 모습, 놈들에게 두눈을 빼앗기고도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웨치던 녀대원의 필승의 신념…

작가들은 격동되였다. 그들의 수첩은 어느덧 뜨거운 눈물로 얼룩지였다. 시인 조기천은 북받치는 격정을 이길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항일전선에서의 영명하신 수령님의 한없이 높은 권위와 위대한 영향력을 칭송하는 즉흥시를 읊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뜻깊은 이밤에 작가들은 수령님께서 헤쳐오신 항일혁명의 20성상을 걸음걸음 따라가며 심장속에 아로새기고있었으니 이밤이야말로 새 조선의 새 문학이 태동하는 력사의 시각이였다.

수령님께서 어느새 날이 새였다고 하시며 창문을 여실 때에야 작가들은 벌써 새날이 밝았음을 깨달았다. 재잘대는 새무리들의 지저귐소리를 들으며 작가들은 수령님을 모시고 정원으로 나왔다.

신선한 아침대기가 뿌듯이 페부에 스며들었다.

얼마나 뜻깊은 밤을 지새웠던가.

이 하루밤사이에 몸도 마음도 모든것이 우쭐 자란것만 같은 심정들이였다.

수령님의 바래움속에 저택을 나선 작가들은 인차 발길을 떼지 못하고 오래도록 저택쪽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난생처음 받아안은 격동과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그들의 가슴을 억제할수 없는 창작적희열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쓰자, 항일혁명투사들의 불굴의 영웅서사시를!

그리하여 김승구는 그즉시 붓을 달려 《고향》이라는 영화문학을 빠른 시일안에 창작하였던것이다.

영화문학 《고향》을 쓰게 된 이러한 창작적경위를 이야기해주는 김승구의 두눈은 흥분으로 하여 번쩍이고있었다. 그날밤에 받아안았던 격정과 감동이 그대로 되살아난듯.

허나 그는 인츰 시름겹게 말하였다.

《예봉동무, 허지만 내자신도 내 작품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단 말이요. 어딘가 모르게 미숙한게 도무지…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못견디게 가슴을 달구던 창작적인 감동그대로 원고지를 달렸는데 의도와 형상간에는 역시 거리가 멀구만. 재간이 아직 모자라는것 같소.》

그는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예봉은 김승구의 고민이 리해되였다. 영화문학 《고향》의 초고에 대한 심의가 매일과 같이 벌어지고있는 상황을 예봉도 잘 알고있었다.

빈번한 론의속에 일군들마다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면서 갑론을박하고있었으나 그 어느 의견도 작가를 공감시키지 못하고있었다.

김승구자신부터가 작품에 대한 확신이 없다보니 점점 더 혼란의 미궁속에 빠져들고있었던것이였다.

 

*           *

 

해빛도 찬란한 주체37(1948)년 6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다시 예술영화촬영소를 찾아주시였다. 마중나온 일군들의 인사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고향》이라는 영화문학을 써놓고도 작가가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기에 오늘 우정 시간을 내여 나왔다고, 우선 작가로부터 줄거리를 들어보자고 하시였다.

이리하여 김승구는 위대한 수령님께 영화문학의 줄거리를 말씀올리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자기가 쓴 작품이지만 수령님앞이라 처음에는 흥분이 앞서 조리있게 말씀드리지 못하다가 차츰 진정되면서 영화문학의 기본줄거리를 설명하여올리였다.

수령님께서는 김승구가 설명하여드리는 기본줄거리를 끝까지 다 들어주시였다.

(어떤 결론을 주실가?)

설명을 끝낸 김승구는 초조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그이를 우러렀다. 자기 작품의 운명이 판가름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생각에 축축히 내돋는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는 그의 손은 떨렸다.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그이께서 어떤 결론을 주실가 하고 가슴들을 조이고있는데 수령님께서는 영화문학이 그만하면 괜찮다고 시원하게 말씀하시였다.

순간 방안에 드리웠던 긴장된 공기가 금시 풀리는듯 좌중의 분위기가 삽시에 흥그러워졌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이 작품의 본질적결함과 그 수정방향에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영화의 본질적인 결함은 주인공들의 생활을 그리지 못하고 전투장면만 장황하게 늘어놓은데 있다. 이 작품은 우리 인민이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투쟁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있는것만큼 인민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는데 중심을 두고 만들어야 한다. 우리 인민의 애국주의교양에 이바지하려면 주인공들의 애국심을 잘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무장으로 적을 치는것을 보여주는것도 중요하지만 주인공의 애국심을 그리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 영화문학에서는 주인공이 일제와 지주, 자본가를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우는것만 그렸지 그가 왜 싸움의 길에 나서게 되였는가 하는것을 잘 보여주지 못하였다. 다시말하여 주인공의 애국심이 어떻게 생겨나고 그것이 원쑤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표현되였는가 하는것을 깊이있게 그리지 못하였다. 이 영화문학에서 주인공의 애국심을 잘 형상하려면 그가 자기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일제나 지주, 자본가들의 착취적본성과 악랄성을 깨닫고 그들과 끝까지 싸워 조국을 찾아야 사랑하는 고향땅에서 부모형제들과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사상이 진실하게 안겨오게 그려야 한다.…

수령님의 말씀을 구절구절 새기는 김승구는 눈앞이 확 트이는듯 한 감을 느끼였다.

바로 이것이였다! 자기의 창조물을 놓고 그 무엇인가 부족하고 미흡한 점이 많다는 느낌은 강했으나 무엇때문인지를 몰라 얼마나 안타깝게 모대기였던가.

그의 작품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는 많았어도 작품을 살릴수 있는 명쾌한 대안을 내놓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아무리 병신자식이라도 제 자식은 곱다는 말과 같이 자기가 창작해낸 영화문학이 미숙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일종의 애착과 미련을 가지고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던 그의 정신적고민은 이 순간에 끝장이 났다.

병신자식의 병명이 확진되였으니 수술칼만 정확히 대면 성공이다!

김승구는 끓어오르는 창작적앙양과 확신을 가지고 작품수정에 달라붙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3일에는 드디여 창작단이 현지촬영을 위하여 함흥으로 떠났다.

주인공 관필의 역에 유원준이였고 예봉은 그의 애인인 옥단의 역을 맡았다. 관필의 어머니역은 유경애, 옥단의 어머니역을 문정복, 순철역에 류현, 지주역에 태을민, 지주아들 인달역에 박학이였다. 연출은 강홍식이 맡았다.

새 조선의 첫 예술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쁨과 긍지로 모두들 사기가 충천하였다.

함흥에서 근 5개월간이나 현지촬영을 할 때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투사들을 직접 파견하시여 예술인들이 유격대원들의 생활과 성격을 잘 알고 형상할수 있게 도와주도록 하시였다.

함흥에서 현지촬영을 마친 창작단은 평양에 올라와 관필과 옥단의 집 실내촬영을 마치고 드디여 첫 필림을 완성하였다는 보고를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였다,

《지금도 예술영화 <내 고향>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우리 수령님의 모습부터 떠오르군 한답니다. 이 영화를 놓고 아마 우리 수령님처럼 마음쓰신분은 없을겁니다.

첫 필림이 완성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촬영소에 또다시 나오시여 친히 영화를 보아주시였습니다.

영화를 보신 수령님께서는 리기영이 쓴 장편소설의 이름도 <고향>인데 소설제목과 같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하시면서 제목을 좀더 친근하게 <내 고향>이라고 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받고 우리모두는 아, 하고 저도모르게 감탄들을 하였어요.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의 얼굴이고 영화의 사상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고향>하면 얼마나 일반적이고 범박합니까. 그러나 <내 고향>이라고 하면 자기 조국, 자기 고향을 끝없이 사랑하고 자기 운명처럼 귀중히 여기는 우리 인민들의 구체적인 애국심이 절절하게 안겨오지 않습니까. 당시로 말하면 해방된 인민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조국과 굳게 련결시키면서 수령님께서 찾아주신 새 조선을 줄곧 <내 나라>, <내 조국>이라고 친근하게 부르고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내 고향>이라는 이 짧은 제목속에 벌써 해방된 새 조국의 벅찬 현실과 우리 인민들의 끓어넘치는 환희와 감격, 애국주의감정이 생동하게 집약화되여있는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소위 예술가라고 자처하던 우리모두는 스승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이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영화의 제목 하나를 놓고도 벌써 류사성과 일반성을 피하고 주제사상이 명백히 천명될수 있는 기본고리를 잡아주시였던것입니다.

수령님께서는 <내 고향>이라는 영화의 제목에 맞게 내용을 수정할 방도까지 명확히 가르쳐주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조국애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부모처자와 나서자란 자기 고향, 고향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열렬한 사랑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는것, 그러기에 지난날 항일유격대원들은 일제를 쳐부시는 어려운 투쟁속에서도 그리운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처자에 대하여 늘 생각하였으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시에 담아 읊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주인공도 바로 그런 대원의 한사람이라는것, 그러니 그가 대원들앞에서 자기 고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야 하며 어머니와 사랑하는 처녀도 생각하는것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던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을 보다 진실하고 풍부하게 형상할수 있는 구체적인 가르치심이 아닙니까, 우리들은 형상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영화수정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인공 관필이가 우등불가에서 대원들에게 자기 고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장면과 유격전의 어려운 정황속에서도 <애인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고향, 어머니와 동생들이 울고있는 내 고향> 을 생각하는 장면, 국내공작에 파견되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때 자기 집을 바라보면서도 들리지 않고 대오로 돌아오는 극적행동선들이 보충되였습니다.

이렇게 고쳐놓고보니 항일혁명투사들이 일제를 반대하는 싸움에서 언제나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을 발휘하게 된 정신적원천이 감명깊게 생활적으로 안겨오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정된 필림을 다시 수령님께 올리였는데 수령님께서는 그해 6월 중순에 시간을 내시여 다시 영화를 보아주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영화제목을 <내 고향> 이라고 고치고 일부 장면들을 수정보충하니 영화가 친근감을 주고 보여주려는 사상이 명백해졌다고 치하하시였습니다. 그이께서는 또한 수정보충한 장면들을 하나하나 실례로 드시면서 조국애를 진실하게 형상하였다고, 항일유격대원들의 투쟁모습과 생활이 비교적 진실하게 형상되였다고 만족해하시였다는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은근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드디여 영화가 완성되였다는 안도감도 없지 않아 있었구요.

인제는 그만하면 사상예술적으로 손색이 없으니 하루빨리 공화국의 첫 예술영화를 세상에 공포하고싶은 심정들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각이 너무도 짧았다는것을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으며 통절하게 느끼게 되였어요.》

문예봉은 수십년세월이 흘러간 오늘에도 그때의 교시사상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하면서 그날에 하신 수령님의 말씀내용을 들려주었다.

영화를 보신 수령님께서는 우선 조국의 해방과 함께 주인공 관필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것으로 영화가 끝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주인공이 고향에 돌아와 새 조국건설에 헌신하는 내용을 더 넣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영화의 제목이 《내 고향》인것만큼 주인공이 조국의 해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마을사람들의 앞장에 서서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는 내용이 있어야 영화의 교양적가치가 더 커진다는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또한 관필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과거 피눈물속에 살아온 마을농민들이 토지개혁의 혜택으로 땅을 분여받고 기뻐하며 마음껏 제땅에서 농사를 짓는 장면도 보여주어야 항일유격대원들이 무엇을 위하여 그처럼 간고한 투쟁을 하였는가 하는 사상적내용이 부각될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또한 우리 나라의 독특한 농촌풍경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충하여 넣되 영화의 주제사상을 살리는 방향에서 넣을데 대하여서까지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영화를 보시고 수령님께서 중요하게 지적하신것은 인물들의 성격을 진실하게 형상할데 대한 문제였다.

수령님께서는 관필의 어머니가 지주의 아들인 인달이한테서 모욕을 당하고 우물가에 홀로 나와앉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놓고 지적하시면서 어머니의 성격을 그렇게 형상하면 안된다는것, 물론 관필의 어머니가 일제의 가혹한 착취와 압박을 받으며 살자니 피눈물나는 때도 많았을것이지만 인달의 포악한 행동에 대하여 분격할대신 눈물이나 흘리면서 쓸쓸하게 앉아있게 형상한것은 압제자들에게 항거하여 용감하게 맞서싸운 우리 인민의 성격적특질에 맞지 않는다는것, 그러기에 원쑤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우리 인민들의 특질을 옳게 살려 형상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또한 일제의 침략적본성과 잔인성, 포악성과 교활성 등도 잘 그려야 한다고 교시하시면서 영화에서는 일본놈들을 지내 머저리로 그리였는데 그놈들이 그런 멍텅구리라면 우리가 왜 그렇게 간고한 싸움을 하였겠는가고 하시였다.

적대적갈등을 취급한 작품들에서 계급적원쑤들의 반동적본질을 사실주의적으로 옳게 전형화할데 대한 중요한 말씀이였다.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고 우리는 자책감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수령님의 교시에 비추어 작품을 분석해보면 얼마나 고쳐야 할 결함들이 많습니까.

민주주의혁명에서 근본으로 되는 인민정권의 수립과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을 넣어 새 조국의 벅찬 현실을 보여줄데 대한 문제, 풍경묘사를 잘하여 민족적특성과 향취를 살릴데 대한 문제, 인물들의 전형화문제 등 정말 영화에서 기본을 이루는 사상미학적문제들에서 걸린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습니다. 영화의 결함들이 선명하게 안겨오더군요. 그런데 우리는 병신자식을 만들어놓고도 기뻐했으니…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사상을 깊이 파악하지 못하고 수령님께서 지적하신 부분들만을 고치면 된다는 근시안적인 사고방식과 영화를 빨리 내놓으려는 조급성에 사로잡혀있었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보다는 당시 우리 창작가, 예술인들의 수준에 관한 문제였다고 봅니다. 저를 포함하여 창작단성원들의 정치적안목과 지성세계, 예술적자질이 너무 어렸거든요.

그러니 수령님께서 하나를 깨우쳐주시면 겨우 하나를 따라서는격이였지요. 하나를 대주면 열, 백은 몰라도 둘, 셋이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하나를 대주면 하나를 하고 둘을 대주면 둘을 해놓는 형편이였으니 우리 수령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지금도 물론 수령님의 높으신 의도에 맞게 영화를 척척 만들어내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당당하게 자부할수는 없으나 <내 고향> 을 만들 때에는 그야말로 소학교학생이나 다름없는 우리들이였어요.》

자책이 스민 문예봉의 말에 나도 공감되는바가 없지 않았다.

《내 고향》을 두고 하신 당시의 수령님의 교시들을 연구하여보면 수령님께서는 빼앗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인류의 가장 숭고한 리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승리를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다 바쳐싸운 1930년대 조선혁명가들의 고귀한 정신세계와 그들의 혁명적세계관 형성발전과정을 진실하게 그릴것을 요구하고계시였다.

그러나 당시 영화문학을 쓴 작가 김승구나 연출가 강홍식을 비롯한 창작가들과 배우들모두가 사상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그런 숭고한 세계를 그리기에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었다.

혁명가가 아닌 그들이 혁명가들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그린다는것이 힘에 부치는 일이였던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기에 총포소리 요란한 전투장면이 있어야 혁명적생활이 반영되고 애절한 눈물이 있어야 문학의 견인력이 살아있는것으로 인식하고있는 형편이였다.

이러한 낡은 미학관에 물젖은 그들을 수령님께서는 탓하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일깨워주시고 가르쳐주시면서 인간중에서도 가장 참되고 고상한 인간인 혁명가들을 그리는 혁명문학의 새로운 형상세계에로 그들을 한걸음한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 고향》의 창조과정은 창작가, 예술인들이 위대한 스승밑에서 새 조선의 혁명적예술인들로 새롭게 태여나는 새삶의 출발점이였다고 할수 있었다.

이 영화창작에 참가하였던 그들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대비하여보면 그것이 엄연한 생활의 진리임을 알수 있다.

우선 작가 김승구를 보더라도 《내 고향》의 미숙한 초고를 써놓고 갈팡질팡 모대기였었다.

그러나 그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속에서 성장한 그 나날에 예술영화 《뜨거운 심정》, 《보통강반에 깃든 이야기》, 《그는 우리와 함께 있다》,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 《돈화의 수림속에서》, 《춘향전》 등 무게있는 작품들을 련이어 창작하여 조선영화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관록있는 작가로 한생을 빛내일수 있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나는 조선의 작가라면 조국을 알고 혁명선렬들의 고귀한 품성을 배워 우리의 아름답고 고귀한 그 모든것을 발견하고 귀중히 여길줄 아는 눈과 마음을 지니는것이 작가적품격을 갖추는것이라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하군 하였습니다.… 수령을 잘 만나고 수령을 잘 모셔야 나라가 흥하고 인생의 꽃이 핀다! 이것이 내 한생의 총화이고 내 인생의 문학적탐구로 얻은 진리입니다.》

주인공역을 맡았던 유원준의 경우도 이와 다를바 없었다.

해방전 막벌이군로동자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그는 연극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허나 연극배우가 되려는 그의 소원은 이루어질수 없는 한갖 공상에 지나지 않았으니 인력거를 끄는 아버지의 비지땀과 삯빨래로 허리펼사이 없는 어머니의 가냘픈 두손으로는 도저히 가정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이였다.

그러던 그의 희망은 해방이 되여서야 비로소 성취되게 되였다.

1946년부터 연극무대에 나섰던 그는 8. 15해방 2주년예술축전에서 연기상을 받게 되였고 이것을 계기로 예술영화촬영소에 소환되였다.

그리하여 《내 고향》의 주인공역을 맡게 되였다.

그러나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할뿐아니라 항일유격대원들의 생활을 모르는것으로 하여 역창조가 쉽지 않았다.

비상한 각오와 열정을 안고 창조사업에 달라붙었으나 역형상이 잘되지 않아 고민도 하면서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고있을 때 수령님께서는 친히 항일혁명투사들을 파견하여 그를 도와주도록 하시였다.

이처럼 수령님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속에서 《내 고향》으로부터 영화배우로서의 첫 걸음을 뗀 그는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정치공작대원으로 남진하는 인민군대오와 함께 락동강계선까지 주저없이 달려나갔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풀뿌리를 집어삼키고 짚신을 끌면서 수천리길을 걸어 수령님의 품에 안기는 혁명적예술인으로 성장하였다.

 주체55(1966)년 1월 19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가장 준엄하고 어려운 때에 나와 운명을 같이할수 있는가고 물으시면서 나는 동무들을 믿는다고, 우리함께 수령님의 뜻대로 영화예술에서부터 혁명을 일으켜보자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영원히 한길에서》라는 친필을 새긴 기념사진까지 그에게 안겨주시였다.

이처럼 절세위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손길아래서 그는 《밝은 태양아래서》, 《최학신의 일가》, 《춘향전》, 《위대한 품》 등 100여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하여 주체영화예술발전에 특출한 공로를 세운 김일성훈장수훈자, 로력영웅, 인민배우로서 세계적인 명배우로 자라났던것이다.

그후 그는 80고령의 나이로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로동계급편)에 출연하여 세계적인 명연기로 주인공 강태관역을 훌륭히 수행하고 순직함으로써 값있는 한생을 빛나게 총화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에 대하여 유원준동무는 수령님과 당의 품속에서 우리 당력사, 우리 혁명력사와 더불어 성장하면서 자기 재능을 다 바쳐 충실히 복무한 잊을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의 한생에는 수령님과 우리 당의 문학예술령도사와 뜨거운 사랑이 그대로 체현되여있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관필의 어머니역을 수행한 유경애와 옥단의 어머니역을 맡았던 문정복도 다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민배우들로 성장하였다.

특히 유경애는 독특한 화술과 소설랑독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특별히 기쁨을 드린 공로있는 배우로 되였으니 그들모두는 인간이 올라설수 있는 최고의 삶의 절정에 올라선것이였다.

 한번 믿으신 사람은 끝까지 책임지고 참된 삶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그들은 이렇듯 우리 민족영화사와 더불어 길이길이 영생하는 값높은 삶의 언덕에 올라섰으니 그 첫 걸음은 《내 고향》에서부터 시작된것이였다.

 

*           *

 

문예봉은 자신이 맡은 옥단이 역을 훌륭하게 형상하기 위하여 무척 고심하였다.

옥단이는 소박하고 마음씨 어질고 효성이 극진한 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예봉이가 해방전에 형상하였던 녀인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으나 사상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형의 성격이였다.

그는 소박하면서도 외유내강하였고 새 사회를 열렬히 동경하며 미래에 대하여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있는 처녀이다.

그는 유격대로 떠나간 관필에 대한 사랑으로 하여 계급적으로 눈뜨고 각성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가혹한 난관도 유혹도 물리쳐버리는 강한 처녀인것이다.

관필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사랑도 외적으로가 아니라 관필의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보살핌으로 은근히 표현되는 사랑이다.

영화전반에 조선녀성의 미와 정서가 짙게 흘러나오도록 하자면 바로 옥단이의 이 아름다운 성격을 잘 살려야 했다.

예봉은 옥단의 성격을 진실하게 형상하기 위하여 사색하고 또 사색하였으며 무진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새것의 창조는 낡은것에 대한 도전을 전제로 한다. 옥단의 형상을 무르익혀나가는 나날에 그는 낡은 기성의 연기틀을 대담하게 마스고 옥단의 성격과 자신의 성격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내성적이고 섬세한 심리연기로 생활적인 진실감을 살리는데 모를 박았다. 옥단의 성격이 참신한 성격이였던것만큼 참신한 형상만이 용납되였던것이다.

수정완성된 《내 고향》의 기본줄거리는 다음과 같았다.

…3. 1인민봉기때 일제놈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은 관필이는 어머니와 동생 관식이와 함께 최경천지주놈의 집에서 눈물겨운 소작살이를 한다.

어느날 관필이는 동생 관식이가 지주놈의 아들 인달의 짐을 지고오는것을 보자 너무도 분하여 동생을 때리고 인달이놈까지 멨다꽂는다.

이것이 《죄》가 되여 관필이는 감옥에 끌려가는데 그곳에서 항일혁명투사 김학준을 알게 된다.

그의 꾸준한 교양과 영향속에서 혁명의 눈을 뜨게 된 관필은 탈옥한 후 유격대에 입대하며 항일무장투쟁의 불길속에서 혁명가로, 능숙한 지하공작원으로 성장한다.

관필은 눈덮인 산속에서 통강냉이를 삶아먹으면서 간고한 유격전을 벌리는 어려운 속에서도 《…애인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내 고향, 어머니와 동생들이 울고있는 고향》을 언제나 잊지 않는다.

관필의 어머니는 유격대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과정에 생활의 온갖 고통속에서 점차 계급적으로 각성하며 옥단은 인달이놈의 유혹과 행패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관필이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관필은 조국의 해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민주주의혁명의 앞장에서 고향사람들을 이끈다.

영화의 마지막부분에는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하시고 평양에 개선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빛나는 영상이 정중히 모셔진다. …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완성된 이 영화를 보시고 매우 만족해하시며 해방후 처음 나온 예술영화인데 잘되였다고, 우리의 손으로 만든것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셈이라고, 영화예술인들이 노력한 보람이 크다고 교시하시였다.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은 창작가, 예술인들은 모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작품을 어찌 우리 창작가들이 만든 작품이라고 할수 있으랴. 수령님 아니시였던들 이 영화가 태여나기나 하였겠는가. 영화에 바치신 수령님의 로고를 큰 산에 비긴다면 그들의 노력은 자그마한 조약돌에나 비길수 있을런지.

허나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헌신과 로고는 다 덮어두시고 모든 성과와 영예를 창작가, 예술인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계시는것이다.

주체38(1949)년 6월 30일,

이날은 내 나라의 첫 예술영화가 드디여 수령님의 치하와 축복속에 고고성을 울린 력사의 날이라 할수 있었다.

창작가, 예술인들은 모진 진통끝에 첫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를 듣는 어머니와도 같은 환희와 기쁨에 휩싸였고 수령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들을 들먹이였다.

그날저녁 예봉은 울렁이는 마음을 안고 촬영소마당가에 서있는 단풍나무로 조용히 다가갔다.

아직도 애어린 나무에서는 파아란 잎새들이 살랑대고있었다.

정다운 나무잎새들을 매만지노라니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모습이 무척도 그리워졌다.

이 단풍나무에는 예술영화 《내 고향》을 위하여 바치신 어버이수령님의 로고와 심혈, 우리 나라 영화예술의 찬란한 미래를 축복하여주시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고귀한 뜻이 어려있었다.

하여 《내 고향》이 수령님께 기쁨을 드린 이날 예봉의 발걸음은 저절로 이 나무로 향해졌던것이다.

《그날 단풍나무아래서 나는 많은것을 생각하였댔습니다. 그때 가장 강하게 내 가슴을 친것은 예술영화 <내 고향> 과 함께 영화배우로서의 나도 새 출발선에 들어섰다는 느낌이였습니다.

진정한 예술창조의 길은 이제부터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고 뻐근해지더군요.

그러나 그때 저는 얼마나 큰 영광이 저를 기다리고있는지 몰랐어요. 글쎄 그해 10월 수령님께서는 저와 유경애, 문정복 등 <내 고향> 에 출연한 주요배우들을 연회장에 불러주시였답니다. 그이께서는 몸소 우리들에게 축배잔을 들려주시면서 <내 고향> 을 정말 잘 만들었다고 또다시 치하해주시는것 아닙니까.

영화인으로서 이런 행복과 영광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화국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이 세상에 나오자 인민들속에서는 그야말로 폭풍과 같은 반향이 일어났다.

《내 고향》열풍이 일어났다고 하여야 할 정도로 어디 가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뿐이였고 영화관마다 인산인해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일제식민지통치의 기나긴 암흑세월을 헤쳐온 조선사람들은 그때 제 나라 배우들이 출연하는 조선말로 된 영화, 제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담은 영화를 보고싶어하였다.

이것은 자기의 말과 글까지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피눈물나는 노예살이를 하다가 망국노의 멍에를 벗어던진 당시 우리 인민들의 절절한 념원이였다.

우리 인민들의 이 념원이 바로 예술영화 《내 고향》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실현되였던것이다.

특히 영화는 우리 민족의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신 항일유격대의 참모습을 화면을 통하여 처음으로 보여준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기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내 고향》을 창조하던 나날에 수령님과 어머님을 모시고 예술영화촬영소에 나오시였던 때를 감회깊이 회고하시면서 예술영화 《내 고향》은 우리 나라에서 해방후에 만든 첫 예술영화로서 조선영화사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예술영화 《내 고향》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 만든 첫 예술영화로서 항일혁명투쟁을 취급하고있다는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문예봉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면서 나는 생각하였다.

예술영화 《내 고향》은 주체적영화예술의 개시를 알리는 장엄한 력사의 첫 포성이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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