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제2편 백합꽃은 태양의 빛을 받다

아, 우리 수령님

 

꿈과 같은 날들이 흐르고있었다. 너무도 거치른 세상풍파에 시달려온 예봉은 갑자기 찾아든 자기의 행복에 인차 익숙해질수가 없었다.

고생을 해본 사람만이 행복의 진가를 알듯이 예봉은 날에 날마다 걸음걸음 찾아오는 행복의 수레를 눈물에 젖어 마중하는 심정이였다.

어제는 새로 배치받은 예술영화촬영소를 돌아보았다. 영화촬영장이라면 가장 더러운 곳중의 하나라는 기성관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예봉이가 들어선 예술영화촬영소는 이러한 기성관념을 뒤집어엎은 놀라운 광경을 펼쳐보이였다.

해방된지 얼마 안되였는데도 대록음실, 소록음실, 편집실 등이 그쯘하게 꾸려져있었고 10대의 촬영기와 7음을 단번에 록음할수 있는 록음기가 번쩍이고있었다. 필림현상소는 한창 건설중이였다.

물론 현대적으로 꾸려진 오늘의 촬영소와는 대비도 안되지만 그때로서는 예봉의 머리가 핑 돌 정도로 훌륭하게 꾸려진 촬영소라 할수 있었다.

갓 해방된 조국에서 예술영화촬영소가 이렇듯 훌륭한 면모를 갖추고 빠른 기일안에 일떠서게 된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의 손길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건당, 건국, 건군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시고 분망한 나날을 보내시던 그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문화인들은 문화전선의 투사로 되여야 한다》 등 여러 로작들에서 민족문화건설방침을 뚜렷이 제시하여주시였다. 특히 민족영화예술발전에 깊은 관심을 돌리신 그이께서는 주체35(1946)년 2월 5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선전부에 영화반을 내오도록 하시였고 그에 토대하여 다음해 2월 6일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결정으로 나라의 첫 예술영화촬영기지인 국립영화촬영소(당시)를 창립하여주시였다. 그때 일군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나라의 사정을 고려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5만원의 예산서를 올려보내였다. 그런데 수령님께서는 5만원이라는 수자를 지우시고 10만원이라고 써넣어주시였다. 5만원의 예산서를 10만원으로 고쳐주신 수령님의 그 숭고한 뜻을 헤아리며 일군들은 얼마나 목이 메였던가.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현지에 나오시여 촬영소위치까지 잡아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촬영소는 번잡한 도시중심에 건설하지 말고 조용하고 경치좋은 교외에 정하여야 창작가들과 예술인들의 창작사업과 휴식을 원만히 보장할수 있다고 가르쳐주시면서 일제시기 삼공양말공장이 자리잡고있던 자리에 촬영소터전을 잡아주시였다.

이렇듯 촬영소를 창립하여주시고 또 터전까지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6(1947)년 3월과 7월에 또다시 촬영소건설현장을 찾아주시여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그 보장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한나라를 령도하시는 수령님께서 일개 촬영소건설에 필요한 자재문제에까지 관심을 돌려주셨다는 사실은 예봉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예봉은 촬영소의 윤기나는 촬영기재 하나하나를 무심히 볼수 없었다. 번쩍이는 모든것들이 다 수령님의 높으신 뜻과 사랑의 손길이 어려있는 너무도 귀중하고 너무도 값높은 나라의 재부들이였던것이다.

번들거리는 촬영기재들을 조심스레 쓸어보는 예봉의 눈에는 저도모르게 뜨거운것이 고이였다. 촬영기재 하나 변변한것이 없어 일본놈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대한추위에도 홑옷을 입고 얼음물속으로 뛰여들어야 했던 어제날의 비극이 가슴을 저미였다. 병들어 누워있으면서도 어쩌다 예술인들이 푼전을 모아 록음실을 꾸린다는 말을 듣고 그리도 기뻐하며 그것이 다 우리의것이니 잘 지켜야 한다고 두눈을 번쩍이며 당부하던 춘사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만약 그가 살아서 오늘의 이 모든것을 볼수 있다면 아마도 그는 너무 기뻐 소리치며 춤을 추었을것이다.

오늘의 이 행복을 보지 못하고 원통하게 스러져간 해방전 동료영화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예봉은 가슴아픈 한순간을 체험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또 새집을 배정받았다.

한 일군의 안내로 대문을 열고 새집으로 들어서던 예봉은 너무도 놀라와 그자리에 굳어져버리였다. 이것이 정녕 내 집이란 말인가.

유리창이 번쩍거리는 마루방이 첫눈에 안겨왔다. 번들거리는 마루, 복도로 통한 널직한 두칸의 온돌방, 부엌, 창고 등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이 꾸려진 아담한 단층가옥이였다. 집앞에는 자그마한 터밭도 있었다.

예봉은 선뜻 마루에 올라설수 없었다.

집없는 설음을 뼈속까지 체험해본 예봉이였다.

하기에 이 집이 정말 자기네 집이라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과분한 행복이였다.

제집이 없어 서울거리 그 어느 골목인들 헤매지 않은 곳이 있었던가. 뒤거리를 누비며 세방살이, 려관방살이로 하루하루 떠돌이하던 때가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온몸이 얼어들던 랭돌방, 무더위와 모기, 빈대성화에 잠못 들던 다락방, 집세를 독촉하던 주인집녀자들의 랭정한 눈초리, 비내리는 거리로 애달프게 끌고가던 손달구지…

예봉의 두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였다. 떨리는 손으로 마루며 유리창들을 조심스레 쓸어만지는 그의 동그란 두어깨는 소리없이 오르내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손수 마련하여주신 내 삶의 보금자리! 모든것이 소중하고 모든것이 뜻깊었다. 그이의 은덕에 보답해야 한다는 일념이 가슴속에서 활활 타번지였다.

그이튿날부터 예봉은 촬영소건설장에서 낮과 밤을 보내였다. 수령님의 손길이 어려있는 촬영소건설장에 자기의 적은 구슬땀이나마 깡그리 바쳐가고싶은것이 예봉의 진심이였다.

 

*          *

 

행운은 항상 소리없이 조용히 찾아드는 법이다.

예봉이 태양의 빛을 받아 이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나던 운명의 전환점-행운의 그 시각도 례사로운 어느 평범한 날에 이루어졌다.

주체37(1948)년 8월 22일,

예봉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오붓이 모여앉아 점심을 방금 끝냈는데 촬영소의 한 일군이 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봉동무, 빨리 차비를 하고 촬영소로 나갑시다.》

《?…》

의아해하는 예봉에게 일군은 천만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촬영소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예봉을 직접 부르신다는것이였다.

처음에는 그의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떻게 나를 다 아실가? 놀라움에 어리둥절해진 예봉을 재촉하며 일군은 제먼저 대문을 나섰다.

그제야 자신을 수습한 예봉은 옷매무시도 바로잡지 못한채 촬영소로 달음박질쳤다. 일군의 뒤를 따라 숨이 차게 촬영소구내로 들어서는데 어느새 수령님께서 그를 향하여 마주 걸어나오시는것이 아닌가.

예봉은 송구스러워 인사도 변변히 드리지 못하였다. 몸둘바를 몰라 허둥대는 예봉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우렁우렁하신 음성으로 문예봉동무를 만나니 반갑다고, 북조선으로 들어온것을 환영한다고 하시며 아이들을 데리고 38°선을 넘어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 순간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하여야 할지…

감격스럽고 기쁘고 황송하고 그리고 또 죄스럽고…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속에서도 경탄의 감정만은 너무도 세차게 그의 심장을 흔들어놓고있었다.

그이의 온몸에서 발산하며 뿜어져나오는 약동하는 젊음, 환하신 얼굴에 한가득 어려있는 태양의 미소…

너무도 젊으시고 너무도 빛나는 그 모습에 눈이 부시여 예봉은 감히 그이를 정면으로 우러를념을 내지 못하였다. 격정의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심장만이 금시 튀여나올듯 쿵쿵거리는데 어느덧 눈앞이 뽀얗게 흐려지는것이였다.

오래전부터 그이의 존함을 전설처럼 들으며 신뢰하여오던 문예봉이였다. 축지법을 쓰시며 일본놈들을 삼대베듯 쓸어버리신다는 그이를 얼마나 흠모하였고 얼마나 그이의 품에 안기기를 기원하였던가. 그런데 온 민족이 태양으로 우러르는 그이께서 한갖 녀배우에 불과한 자기를 이렇게 직접 부르시여 따뜻하게 대해주실줄은 꿈에서도 상상조차 못해본 예봉이였다. 이 영광, 이 행복이 너무도 분에 넘치여 예봉은 마치 꿈을 꾸는듯싶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다시 집은 잡았는가고 다정하게 물으시였다.

좋은 집에 들었다고 말씀드리려 했으나 목안에 무엇인가 그들먹이 메여올라 인차 답변을 올리지 못하였다.

흥분된 그의 심정을 대변하여 옆에 서있던 일군이 수령님께서 돌아보신 그 집에 들었다고 대답을 올리였다.

그이께서는 매우 반가와하시며 다시금 예봉에게 새로 살림을 펴자면 곤난한 점들이 한두가지가 아닐거라고 하시며 무슨 애로되는 점은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자애에 넘치신 그이의 친근하신 음성과 미소어린 눈길은 예봉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듯 어느새 가슴에 그득했던 어려움이 스르르 녹아버리는것이였다.

예봉은 진정에 넘쳐 말씀올리였다.

《없습니다. 국가에서 이불을 비롯해서 아이들의 학용품까지 다 보장해주니 정말 아무 불편도 없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렇다면 마음이 놓인다고, 인민정권의 배려로 근심걱정없이 생활하고있다니 자신께서도 기쁘다고 하시며 불편한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언제든지 당을 찾아와 제기하라고, 그러면 가능한껏 모든것을 풀어보자고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친자식의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다심한 친어버이정이 넘쳐 흐르는 말씀이시였다.

예봉은 눈앞이 뿌잇해져 얼른 고개를 숙이였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따뜻하고 후더운 인정을 받아보지 못한 그로서는 수령님의 말씀 한마디한마디가 너무도 뜨거운 사랑의 불덩어리로 되여 가슴을 달구었던것이다.

그는 친어버이품에 안긴 아이처럼 자꾸 울먹거려지는 가슴을 겨우 다잡고있었다. 아, 얼마나 친근하고 자애로운 우리 수령님이신가.

백두산을 울리는 호령 한마디에 100만관동군을 쥐락펴락하신다는 그이를 위엄에 찬 장군으로만 표상하고있던 예봉이였다.

그러나 예봉의 앞에 서계시는 수령님은 너무도 젊고젊으신분이시였고 진실하고 뜨거운 인정미로 사람의 마음을 대번에 자석처럼 끌어당기시는 인간중의 인간이시였다.

당시를 회고하는 문예봉의 얼굴에는 그때의 감격이 되살아난듯 불그레한 홍조가 피여올랐다.

왜 그렇지 않으랴.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그날을 기점으로 하여 그의 운명은 그야말로 급변하지 않았던가.

눈물속에 시들어가던 백합꽃이 드디여 태양의 빛을 받은것이다.

문예봉자신도 자기의 생애에서 이날이 가지는 의미를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허나 그이후 자신이 걸어온 행복으로 수놓아진 인생행로를 돌이켜볼 때 그 첫걸음이 바로 8월의 태양이 눈부시던 그날의 영화촬영소구내에서부터 시작되였음을 뿌듯이 절감하군 하는 그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외국의 어느 한 인사가 회상록에 인간태양을 보았다고 쓴 구절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그 글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나의 심정과 그리도 같을가 하고 감탄하였댔답니다. 사실 수령님을 처음 만나뵙던 때의 저의 심정은 꼭 태양을 마주한것 같았으니까요. 그때는 저도 별로 아는것이 없고 여러모로 미숙한 때여서 그저 감각적으로 느낀바였지만 그후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정말 수령님은 인간세상의 위대한 태양이시구나 하는것을 실감하군 합니다. 태양은 빛과 열이라는 두가지 속성이 있지 않습니까. 태양의 열이라 함은 물론 그이께서 지니고계시는 뜨거운 인간애가 아니겠습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그이를 단 한번만이라도 뵈온 사람들은 모두 그 빛과 열에 넋을 잃고 인간태양을 본듯 신뢰하고 우러르며 따르게 된다고 저는 종종 생각하군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수령님앞에 처음 나섰을 때 제가 몸건사를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댄것은 사실 마음속에 뭉쳐있던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더 컸기때문이였어요.

이미전에 말한바도 있지만 일제때 저는 본의는 아니더라도 여하튼 <군용렬차> 나  <너와 나> 와 같은 군국주의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던 수치스러운 몸입니다.

수령님께서 백두산에서 왜놈들과 혈전을 벌리실 때 나는 그 왜놈들의 정치적꼭두각시노릇을 하였으니 죄중에도 큰죄를 진셈이였지요. 그래서 더 몸둘바를 몰라 쩔쩔맸던겁니다.

그러나 수령님께서는 나의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 민족영화발전을 위하여 수고한 공로자마냥 떠받들어주시면서 해방후 처음으로 만드는 새 영화(《내 고향》)의 주역을 맡았다니 연기를 잘하라고 고무하여주시는것이 아닙니까.

활화산처럼 뜨거웁고 바다마냥 넓으신 그이의 사랑과 포옹력앞에서 나의 불미스러운 과거는 어느덧 활활 다 타버리고 나는 새로운 인간으로 태여났던겁니다. 그래서 태양을 위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새삼스런 눈으로 문예봉을 쳐다보았다.

놀라왔다. 그가 마치 철학가처럼 보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인차 나는 수긍이 갔다.

문예봉은 아마 자신의 체험과 오늘까지 걸어온 인생행로를 놓고 그런 의미깊은 생활철학을 도출해냈으리라. 그것은 허공에 뜬 미사려구나 현란한 말재간이 아니라 실생활체험으로부터 도달한 진리이기에 그만큼 값진것이였다.

문예봉의 회고담은 요시꼬에게도 충격적이였다.

그도 예봉과 같은 체험이 있었고 예봉과 같은 인생결론에 도달하였던것이다.

…자유민주당 유지의원단의 한 성원으로 일성주석님의 접견을 받으러 가는 요시꼬의 심정은 자못 복잡하고 긴장되여있었다.

그가 인제 만나야 할분은 바로 항일유격대를 거느리시고 일제를 타승하신 일성장군이시다.

그런데 요시꼬자신은 《리향란》의 이름을 가진 가수로 만주와 조선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던 관동군에 종군하여 노래를 불렀던 죄스런 몸인것이다. 그러기에 대표단일행도 그의 옛상처를 건드릴가보아 과거생활에 대하여서는 일체 입밖에 내지 않고 오직 참의원 의원 오다까 요시꼬라고만 불렀다.

(그이께서 나를 알아보시면 어쩌나? 아니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인제는…)

불안과 위구, 행여나 하는 자기위안과 조바심으로 긴장감은 극도에 달하였다.

차창밖으로는 끝없이 흘러가는 록음이 중천에 비치는 태양빛을 받아 은백색으로 변하기도 하면서 다채로운 풍경을 펼쳐놓았지만 한가지 생각에 골똘한 그는 그것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승용차는 대동강이 굽어보이는 정갈한 건물안에 들어섰다.

일성주석님께서는 현관문앞에까지 나오시여 대표단일행을 기다리고계시였다.

천천히 걸어나오신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우시고 매사람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처음 만나는 기념으로 사진부터 먼저 찍자고 말씀하시며 대표단성원들을 옆에 세우시였다.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내시여 대표단을 접견하여주신 그이께서는 접견이 끝날무렵 어느 한 방으로 그들을 안내하시였다.

그 방에는 대표단일행을 위한 특별연회상이 차려져있었다.

대표단으로서는 미처 상상도 못했던 환대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연회가 무르녹을무렵이였다. 일성주석님께서 앞탁에 앉아있는 요시꼬에게 미소어린 눈길을 보내시면서 부드럽게 지난날의 리향란이 아닌가고 물으시였다.

순간 요시꼬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눈앞이 아찔해진 그는 허둥거리며 어쩔줄 몰라하였다. 솔직한 말로 당장 방안에서 뛰쳐나가고싶기도 했고 식탁밑에 기여들어가서라도 자기의 존재를 숨기고싶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싶다는 말은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이리라.

좌중의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리는것을 느끼며 그는 홧홧 달아오르는 얼굴을 숙인채 아무 대답도 올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을 만나고보니 옛벗을 본것처럼 감회가 새롭다고, 당신의 이름을 당시의 잡지와 영화를 통하여 보고 들었다고 하시는 주석님의 따뜻한 음성이 다시금 귀가에 울려왔다.

요시꼬는 정신이 휙 내둘리우는 감을 느끼며 두손을 꼭 모아쥐고 중얼거리였다.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뒤이어 몇마디 말을 더한듯싶으나 당황한 김에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전혀 기억할수 없었다.

몸둘바를 몰라 쩔쩔매는 그를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던 수령님께서는 오다까선생! 인생에는 일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것입니다라고 하시며 소탈하게 웃으시였다.

우렁우렁하게 울리는 그이의 말씀은 천근만근의 무게를 가지고 요시꼬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쿵쿵 울리였다.

인생에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다!

말하자면 인생길에는 이러저러한 일도 있을수 있으니 흘러간 과거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는 깊은 뜻이 담겨진 금언이시였다.

요시꼬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맑게 고이였다.

조선인민에게, 더우기 김일성주석님앞에 지은 죄로 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는 그의 심중을 속속들이 헤아리시고 아픈 상처를 따뜻이 어루만져주시는 그이! 주석님의 이 대해같은 포옹력과 관용성은 얼마나 숭고한 인간미에 바탕을 두고있는것인가. 그이는 진정 인간에게 밝은 빛과 웃음을 주시는 인간세계의 태양이시구나.

뜨겁게 맥박치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요시꼬는 젖어드는 눈길을 들어 주석님을 우러러 보았다. 자애로운 그이의 영상이 환하도록 시야에 안겨든다.

(주석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심장으로 속삭이였다.

이윽고 여러 대표단성원들의 청으로 요시꼬는 일성주석님께 노래를 불러드리려고 일어섰다.

제일먼저 기뻐하시며 박수를 쳐주시는 주석님께 조선민요 《도라지》를 불러드리고싶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다나니 가사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도라지》대신 일본민요를 부르기로 하였다.

주석님께 공손히 절을 하고 노래를 부르려 입을 뗐으나 흥분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겨우 첫 소절을 뗀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우아하게 부르려고 애를 썼으나 가슴속에는 자꾸만 뜨거운것이 치밀어 눈앞이 흐려와 곡조를 제대로 잡을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감각하였다.

(주석님! 저는 주석님께서 변변치 못한 저의 노래를 왜 끝까지 들어주시는지 너무도 잘 압니다. 인제는 전문가수도 아니고 다 늙은 제가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잘 부르겠습니까. 주석님을 모신 이 행복한 좌석에서 수치스러운 지난날때문에 송구해하는 저의 아픈 마음을 풀어주시려고 이렇듯 마음을 쓰시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어느덧 노래가 끝나고 박수소리가 일었다.

주석님께서 제일먼저 박수를 쳐주시였다.

요시꼬는 그이께 감사의 절을 거듭 올리였다.

그런데 주석님께서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천천히 그한테로 걸어오시며 정말 노래를 잘 불렀다고, 그런 의미에서 축배를 들자고 하시는것이 아닌가.

주석님과 요시꼬의 축배잔이 찬란한 빛을 받으며 맞찧어졌다. 좌중에서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요시꼬에게 있어서 어지러운 흙탕으로 얼룩졌던 과거의 반생이 티 한점 없이 깨끗이 씻어져내리는 운명적인 순간이였다.

태양의 빛과 열은 이렇듯 위대한것이다.…

당시의 감정세계에 푹 잠긴 요시꼬는 생각깊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칼바람이 몰아칠 때는 외투깃을 추켜세우고 허리를 구부리지만 따뜻한 해빛을 받으면 자연히 덧옷을 벗는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정말 옳은 말이예요. 그때의 나의 심정도 이자 방금 문선생이 말한바와 같이 태양의 빛을 받아안은것만 같았어요. 정말 일성주석님은 태양 같으신분이예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두 녀인의 체험세계와 그로부터의 결론은 이처럼 너무도 꼭 같은것이였다.

뿌듯이 차오르는 벅찬 감동과 긍지가 나의 온몸을 휩쌌다. 구세대에 속하는 이들과는 달리 태여나자부터 수령님의 품-태양의 품에 안기여 고스란히 성장해온 나에게는 그들과 같은 슬픔과 고통, 치욕과 번민의 반생은 없었다. 참으로 행복한 시대에 태여나 행복한 삶을 누리는 복받은 세대이니 은혜로운 태양의 빛발속에서 줄달음쳐갈 나의 미래는 또 얼마나 찬란한것인가.

나는 머리를 들어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서는 밝고밝은 따사로운 태양의 빛이 한껏 쏟아져내리고있었다.

 

*          *

 

《이날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행운중의 행운의 날이라고 할수 있었어요.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 그리고 어리신 지도자동지를 다같이 뵈왔거든요.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흰샤쯔에 곤색치마를 입으신 수수한 모습으로 어리신 자제분의 손목을 꼭 잡고 서계시더군요. 나는 정신없이 그이만을 바라보았댔습니다.

그이는장군다운 엄엄한 모습이 아니라 무척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였어요. 그렇지만 나에게는 웃음을 담뿍 담으신 그이의 안광이 참으로 신비스럽게만 느껴지더군요. 다정하고 부드러우신가 하면 생기발랄하고 열정적이시고…

여하튼 그분께서 지니신 인간적매력은 대단하였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인상적인 웃음을 지으시고 나에게 아이들은 몇인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고 다정하게 물으시였습니다.

어렵게만 여기던 어머님께서 스스럼없이 물어주시니 어떻게 송구스럽던지… 나는 막내를 내놓고는 3명이 이곳에 학교가 없기때문에 시내학교에 다닌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안색을 흐리시며 <학교가 퍽 멀군요. 얼마나 걱정스럽겠어요.> 하고 나이상으로 통학거리를 두고 근심하시는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나도 아이들이 먼 거리를 걸어 학교에 다니는것때문에 걱정되는바가 없지는 않았으나 3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마음껏 공부하는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대견하여 통학거리같은것은 크게 생각지도 않고있었어요. 그런데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대뜸 부모들도 미처 생각지 않고있던 통학거리에 대하여 헤아리시는것 아닙니까. 저는 속으로 놀랐습니다. 김정숙어머님의 그 꾸밈새 없으신 진정에 말입니다. 진실은 화려한 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비껴있는것이 아닙니까.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은 비록 짧으셨어도 거기에 담겨진 진정은 대번에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뒤흔들어놓더군요.

어려움은 어느새 다 달아나고 무작정 마음을 터놓고싶고 따르고싶은 충동이 막 불같이 일었습니다.

후날에도 종종 그때를 돌이켜보지만 아마도 첫 상봉때에 벌써 나는 김정숙어머님의 인간상에 완전히 매혹되였던가봅니다. 그 어떤 론리적추리의 귀결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심장의 가르침이였지요.

깊은 감동에 젖어 아무말도 못하고있는데 어머님께서는 다시금 당부하시는것이였습니다.

<예봉동무, 이자 방금 장군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곤난한 일이 있으면 당에 다 제기하세요. 나를 찾아와서 말해도 좋구요.

요즈음 장군님께서는 새 조선의 첫 예술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주 여기에 나와 의논하고계십니다. 예봉동무야 오랜 영화배우인데 응당 이 사업에 앞장서야지요.>

믿음과 기대가 담긴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해방전 내가 출연한 영화들이라는게 사실 얼마나 볼품없는 작품들이였습니까. 나자신을 보아도 벌어먹기 위해 할수없이 무대와 은막에 나선것이지 그 어떤 예술적인 리상이나 안목이 있는것도 아니였지요. 그런데도 어머님께서는 이처럼 오랜 영화인이라고 내세워주시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더군요. 꼭같은 녀성의 몸으로 그이께서는 나라를 찾으려고 총을 잡고 만주광야를 넘나드셨는데 나는 영화필림에 얼굴이나 비치며 제집식구들의 생계유지만을 위해 버둥거렸다고 생각하니 그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어디에 비기겠나요. 그런데도 어머님께서는 오히려 나에게 새 조선의 영화창작에서 기둥이 되라고 고무격려하시고 믿음을 주시니 그 숭고한 인품에 제가 왜 머리를 숙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날 나는 위대한 수령님과 존경하는 어머님, 어리신 지도자동지를 모시고 기록영화 <38선> 을 감상하는 영광을 또 받아안았습니다.

지금의 종합영사실(당시의 대록음실)에서 시사회가 있었는데 수령님을 따로 모실 의자 하나 변변한것이 없었어요. 긴 의자들을 붙여놓고 동행한 일군들과 촬영소일군들이랑 다같이 영화를 보았는데 나는 김정숙어머님의 곁에 앉게 되였습니다.

거듭 베풀어주시는 영광에 머리가 핑 돌 지경이 된 나에게는 흘러가는 기록영화화면은 눈에 들어오지조차 않았습니다. 오직 곁에 앉아계시는 김정숙동지께로만 온 정신이 쏠려있었지요. 그러기에 영화를 보시던 어리신 지도자동지께서 어머님의 귀가에 대고 영화가 재미없다고 속삭이시는 귀속말까지 다 들을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영화가 끝나고 장내에 불이 켜졌습니다.

그자리에는 기록영화를 만든 창작가들도 있어 매우 긴장된 분위기였습니다. 누구도 선뜻 영화에 대하여 이렇다저렇다 의견을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록영화 <38선> 이 가지고있는 우점과 결함들에 대하여 명철하게 지적하여주시면서 기록영화와 관련된 강령적인 교시를 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기록영화 <38선> 이 해방후 상반되는 길을 걷고있는 남북조선현실을 보여주면서 분계선의 철페를 호소한것은 매우 의의있는 문제를 취급한것이라고 평가하시면서 우리 인민들을 교양하고 세계인민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공개하는데서 중요한 작용을 할수 있다고 치하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영화가 가지고있는 결함들도 하나하나 말씀하여주시였는데 가장 중요한 결함은 기록영화의 생명인 실재성을 상실한것이라고 하시였습니다.

그 실례로 그이께서는 해방전의 사실들과 일부 현실자료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찍은 장면들을 렬거하시였습니다.

내 보기에도 일부 장면들은 군중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찍었다는것이 알리는 정도였으니 기록영화맛이 나지 않은것은 응당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해방후 38°선을 경계로 인공적으로 량단되여 상반되는 길을 걷고있는 북조선과 남조선의 현실을 대조적으로 보여주지 못한것과 과거의 조선사람들이 일제침략자들에게 대항도 못하고 맥없이 죽어가는것처럼 그린 장면을 지적하시면서 일제의 귀축같은 만행을 보여주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싸우는 우리 인민의 용감한 투쟁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쳐주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또 다른 하나의 잘못은 우리 인민군대가 리승만괴뢰군과 맞서 싸우는 군대로 묘사한것이라고 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인민군대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외래제국주의침략세력과 국내반동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무장력인것만큼 이 기록영화에서도 응당 우리 인민군대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습니다.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좌중을 둘러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기록영화에서 이런 심중한 결함이 발로된 원인은 영화창작가들의 정치실무적자질이 낮은데 있다고 하시면서 영화예술인들속에서 정치실무적자질을 높이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습니다.

참으로 <38선> 만이 아니라 기록영화창작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고귀한 가르치심이였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날 수령님께서는 동행한 일군들과 촬영소일군들에게 새 조선의 첫 예술영화로 창작되고있는 <고향> (《내 고향》)에 대하여서도 강령적인 교시를 주시였다고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작품에 조선인민의 반일투쟁과 해방후 새 사회건설을 위한 투쟁을 내용으로 담았다면 매우 훌륭하다고 하시면서 배우의 연기가 특히 중요한만큼 주역을 우수한 배우들이 담당하여 인물의 성격과 생활을 잘 살려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는것이였습니다.

또한 촬영소일군들에게 우리 배우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지난봄에 배우들의 주택을 돌아보았는데 집이 크지 않더라고, 배우들의 집에 손님들도 올수 있고 외국기자들도 찾아올수 있는것만큼 주택을 좀 더 크게 지어주라고 교시하시였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모든것이 꿈만 같은 일이였습니다. 수령님의 이런 사랑과 보살핌앞에서 어느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기세는 충천하였습니다.

수령님의 현지지도이후 실내촬영장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였고 예술영화 <고향> (《내 고향》)창작에 모두 달라붙었지요.

김책동지는 매일과 같이 촬영소에 나와 창작사업을 지도하였습니다. 영화예술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당인민학교(당시)가 건설된것도 그때였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남북조선총선거를 계기로 남조선에서 박학, 유경애, 문정복, 태을민 등 수많은 배우들과 예술인들이 수령님의 품을 찾아 북으로 들어왔습니다. 나의 남편 림선규도 그때 같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얼싸안고 상봉의 기쁨을 나누었고 새 조선의 영화창작사업에서 기둥들이 되자고 결의들을 다지였지요.

그해 9월 9일에 공화국이 선포되고 위대한 수령님을 내각수상으로 추대하는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력사적인 사변이 있었습니다. 새벽 3시부터 밤늦게까지 기발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우리 예술인들은 하당골안이 좁다하게 행진하면서 새 조국의 탄생을 경축하였어요. 정말 잊을수 없는 날과 달이였습니다. 일하고 일해도 힘든줄을 몰랐고 가슴은 벅차기만 했던 때였지요. 민주건설의 초행길에 들어선 내 조국의 힘찬 발걸음에 맞추어 우리 새 조선의 영화도 수령님의 뜨거운 손길아래서 바야흐로 첫 고고성을 터치려고 태동하고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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