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백합꽃은 은막에서 사라진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날이 갈수록 간고해지고 장기화되는 양상을 띠였다. 날만 밝으면 어느 전선을 돌파하였다고 귀아프게 불어대는 방송원의 목소리와는 달리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던 일제의 남방진출기세는 점점 진해갔다.

일제의 패망이 시간문제라는것은 어느정도의 판별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의문의 여지도 없는 사실로 인정되던 때였다. 이런 의미에서 만영의 연출가 시마즈가 《나의 꾀꼴새》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한 말은 매우 시사적이라고 할수 있었다.

할빈호텔에서 그는 동료들에게 이 영화의 창작의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꼭 망하네. 망하기때문에 좋은 예술영화를 남겨야 하네. 오래지 않아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겠는데 일본사람들에게 전쟁영화만 있는것이 아니라 유럽과 견줄수 있는 우수한 예술영화도 있다는걸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네. 이 영화를 만들어 그런 증거물로 삼자는걸세.》

1944년에 완성된 이 영화는 전시에는 맞지 않는 《허황한 가무영화》로 락인되여 상영되지 못하였지만 여하튼 그 제작의도는 리해할만 한것이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였으나 일제는 조선에서 여전히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영화제작에 더욱 열을 올리고있었다. 태평양전쟁의 열기로 하여 그 광증은 더욱 절정에 달하였으니 그 열파는 예봉을 비롯한 영화인들에게 직접적으로 들이닥쳐 그들의 생활을 송두리채 뒤흔들어놓고있었다.

당시 예봉은 심한 정신적고민에 시달리고있었다. 《너와 나》가 상영된 후부터 그는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증오하고 경원시하는듯 하여 밖에 나서기조차 두려웠다.

오늘도 그는 길가에서 한무리의 청년들과 부딪쳤다.

예봉을 알아본 청년들은 무작정 그를 둘러쌌다.

《예봉씨, 어쩌면 그런 영화에 다 나서는겁니까?》

《조선녀성의 전형이라고 자랑스러워하던 우리 영화애호가들의 기대를 허물지 말아주십시오.》

《조선치마저고리녀성인 예봉씨가 쪽발이놈의 녀편네역을 하다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왜놈영화에 또다시 얼굴을 내밀면 우리들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저저마다 떠드는 청년들의 격한 목소리는 예봉의 가슴을 칼로 푹푹 찌르는듯 하였다. 자기들이 사랑하는 녀배우가 왜놈들의 꼭두각시노릇 하는것이 분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한 청년들의 진정어린 마음들이였다.

예봉은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채 황황히 그자리를 피하였다. 그들과 더 마주서있다가는 금시 울음이 터질것만 같았던것이다.

휘청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집에 들어서니 우체부가 갖다놓고 간 편지 몇통이 또 퇴마루에 놓여있었다.

매일과 같이 날아드는 편지들이였다.

《국책영화》가 상영된 후 비발치듯 하는 비난의 목소리는 이런 편지들에서도 쏟아지고있었다. 인제는 편지를 뜯어보기조차 겁이 날 지경이였다. 그렇다고 안 뜯어볼수도 없었다.

기분없이 퇴마루에 걸터앉은 예봉은 호-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맨우에 놓인 편지봉투 하나를 집어들었다. 앞뒤를 살펴보았으나 발신인의 주소와 이름은 없었다. 사실 요즈음 그에게 오는 편지들은 대개가 다 그러하였다. 조심히 겉봉을 뜯고 종이를 펼치니 활달한 필체로 쓴 글들이 예봉을 꾸짖듯 안겨왔다.

《예봉씨,

예봉씨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젊은 영화애호가들의 이름으로 이 글월을 올립니다.

다시는 <국책영화>에 당신의 그 아름다운 자태가 비끼지 않기를 우리는 간절히 빕니다. 왜놈영화에 비쳐지는 당신의 모습을 보는것이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되는줄 아십니까. 우아한 조선녀성의 표본으로 높이높이 떠받들던 당신이 왜놈들에게 더럽혀진듯 하여 우리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숭배하던 고상한 우상이 와르르 무너진거지요. 왜 우리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고 기대를 저버리는것입니까?

당신까지 나서서 우리 조선청년들에게 왜놈들의 전장터에 나가 개처럼 죽으라고 호소할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당신의 몸에도 분명 조선사람의 피가 흐르고있겠지요? 그런데도 왜놈들과 한목소리로 합창을 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아무 영화에나 얼굴을 내밀고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겁니까?

예봉씨, 제발 우리가 숭배하던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와주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인생의 선택을 잘해야 할 때입니다. 일본천황이 우리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왜놈의 천황을 위해 죽을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니 예봉씨도 더는 그런 죄되는 놀음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봉씨를 아끼는 우리들의 마음을 잘 알아주십시오. …》

눈앞이 어질어질하여 예봉은 두눈을 꼭 감았다. 마치도 만사람의 눈길이 집중된 준엄한 심판대에 오른듯 한 착각이 들었다. 증오에 찬 눈길, 경멸하는 눈빛, 랭소가 가득한 비웃음… 자신의 얼굴에 그 모든것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는듯 그는 온몸이 오싹오싹해졌다.

어떻게 할것인가?…

천번만번 속으로 물어보는 말이였다.

화면에 다시 얼굴을 내민다는것은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자멸의 길이다. 다시는 그럴수 없다. 그렇다고 당장 영화에서 발을 뽑는다면 래일부터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시골에 내려간 아이들과 남편은 무엇으로 먹이고 공부시키며 병구완을 하는가.

이렇게도저렇게도 할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진 자신을 의식하며 예봉은 무서운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그저 조용히 이 세상에서 사라질수만 있다면…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공허감이 짙게 어렸다. 허나 그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하늘은 푸르디푸르다.…

문득 조심스레 대문을 밀며 황철이 들어섰다. 그도 역시 예봉과 같은 정신적고민을 안고있는지라 환하던 얼굴이 꺼칠해지고 빛나던 눈망울은 푹 꺼져있었다. 컴컴해진 그의 안색을 살피며 예봉은 말없이 자리를 권하였다. 그의 태도로 보아 좋은 일로 온것 같지 않았다.

황철은 묵묵히 담배 한대를 말아붙이였다. 가슴속의 시름을 연기로 뿜어내듯 한동안 담배만 뻑뻑 빨던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군부에서 예봉씨를 부르오.》

《왜요?》

《그 <사랑과 맹세>때문이지요. 오늘 나도 불러서 갔더니 정 버티기를 하면 좋지 않다고 위협이요. 예봉씨도 래일 당장 오라오.》

예봉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너와 나》촬영이 끝나자마자 일본군보도부에서는 예봉에게 《사랑과 맹세》라는 영화에 또 출연하라고 요구하였었다. 그 영화에서 일본놈들에게 시집가는 조선녀성의 역을 하라는것이였다.

예봉은 눈앞이 아뜩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고민속에 날을 보내는데 또다시 군국주의영화에 나선다는것은 정말 조선사람으로서는 못할짓이였다.

그래서 예봉은 남편의 병구완하러 시골에 가야 한다는 핑게로 하루하루 겨우 발뺌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오늘 또 사람을 보낸것이다. 예봉은 암담한 얼굴로 황철을 바라보았다. 황철역시 침침한 표정으로 담배만 태우고있었다. 연극 《춘향전》의 리도령으로 분장하여 수많은 관중들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단숨에 그러쥐던 어제날의 활기에 찬 모습은 간곳 없고 초췌하고 의기소침해진 모습이였다.

그들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황철이 무겁게 일어섰다.

《여하튼 결심을 잘하오.》

그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대문밖으로 사라졌다. 예봉도 더 붙잡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할 처지가 못되였던것이다.

 

*          *

 

한밤중에 림선규가 집으로 불쑥 들어섰다. 황철이 왔다간 일로 하여 마음이 산란하고 머리가 무거워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못 들고있던 예봉은 뜻밖에 나타난 남편이 너무도 반가와 그의 품에 몸을 던지며 울음부터 터치였다.

막혔던 물목을 터치듯 그동안 쌓인 괴로움과 고통을 울음으로 쏟아놓는 예봉을 붙안고 림선규는 한동안 말을 못하였다. 고지식하고 착하기만 한 예봉이 얼마나 괴로왔으면 이다지도 서러워하랴. 남편으로서 그를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이 가슴을 태운다.

무릇 녀인들이란 비바람, 찬서리를 다 막아주는 남편이라는 거목아래서 자기 삶의 보금자리를 펴는 연약한 꽃들이다. 하여 녀인들에게 있어서 남편은 하늘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데 내가 과연 예봉에게 그런 하늘, 그런 거목이 되여주었던가. 군국주의광풍이 불어치는 영화밭에 예봉을 홀로 세워두어 오가는 비바람을 다 맞게 하였다는 아픔이 가슴을 지지는것이였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큰 죄가 아닐수 없다.

그는 예봉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윽고 간단히 밤참을 끝낸 부부는 오래간만에 마주앉았다.

예봉에게서 그동안의 사연을 다 듣고난 림선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깊이 생각해보았는데 영화계에 발을 붙이고있는 한 그런 치욕을 피할 길은 없소. 이번 기회에 영화밭에서 아예 발을 뽑읍시다.》

예봉은 너무도 범상하게 흘러나오는 남편의 말에 와닥닥 놀랐다. 자기도 골백번 생각해본 일이였으나 정작 남편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자 이상한 감정이 가슴을 치는것이였다.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남편의 말이 씨원하기도 했으나 일생의 천직처럼 여기던 영화배우를 그만둔다는것자체가 현실적인 일처럼 안겨오지 않았다.

영화계에서 나오면 밥은 어떻게 벌어먹으며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시키나?…

종화를 공부시켜 훌륭한 인간으로 키우고싶은 예봉의 생각은 간절하였었다.

절대로 자기처럼 공부도 못한 인간으로 만들고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푼전을 쪼개가며 살림살이를 하고 남편의 병구완을 하는 속에서도 종화의 학비만은 떨구지 않은 예봉이였다. 그런데 인제 영화배우를 그만둔다면 종화의 공부는 끝장날것이다.

인차 대답을 못하는 예봉의 얼굴에서 그의 복잡한 심리를 꿰뚫어본 림선규는 차근차근 타일렀다.

《여보, 우리 집안에서 당신이 일을 그만둔다면 당장 식구들의 생계가 문제로 되는것만은 사실이요. 그러나 아무리 목숨이 귀하기로서니 왜놈들의 개노릇이야 할수 없지 않소. 내가 보건대도 일본놈들의 명은 이제 얼마 안 남았소. 히틀러의 패망이 시간문제인데 다음은 왜놈들 차례요. 라운규선생도 보천보에서 총성을 올린 일성장군에 대하여 얼마나 칭송했소. 그런데 그의 제자인 당신이 일본놈들의 편에 서서 군국주의영화에 계속 얼굴을 내민다면 아마 땅속에서도 라선생은 당신을 용서 안할거요.》

림선규의 준절한 말은 마디마디 예봉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준엄한 갈림길에서 바재이는 그를 림선규는 남편으로서 줄수 있는 가장 큰사랑으로 깨우치고있었다. 예봉의 운명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남편은 억세게 그의 손을 잡아 옳은 길로 이끌어가고있는것이다.

이러한 남편이기에 병약한 그였지만 예봉에게는 정신적으로 항상 의지하고 힘을 얻군 하는 마음의 기둥, 마음의 하늘이였던것이였다.

예봉은 나직하나 담찬 마음을 담아 말하였다.

《당신 시키는대로 하겠어요.》

그의 가슴속에 고이 잠재해있던 민족애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른것이였다.

 

*          *

 

며칠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들에는 문예봉의 은퇴성명이 일제히 실리였다.

그때를 회고하여 후날 예봉은 어느 한 출판물에 이렇게 썼었다.

《내가 천직으로 알던 영화배우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것은 일본영화에 출연하지 말아달라는 인민들의 수다한 권고와 나의 남편의 충고에 의하여 결심하였던것입니다.

사직서를 제출한 다음 영화사의 현관을 나올 때는 진정으로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어 <우리 말로 내가 하고픈 연기를 할수 있는 시절이 꼭 오리라>, 이런 기대와 희망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나의 생각과 행동이 옳았다는것을 재삼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옳은 인생의 선택이였다.

그의 은퇴성명은 사람들속에서 격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조선녀성의 상징으로 소중히 떠받들던 예봉의 깨끗한 마음을 다시금 확인한것으로 하여 감개무량해하였고 고마와하였다.

우리의 백합꽃은 역시 시들지 않았구나!

숱한 편지들이 그에게로 날아왔다.

자기들이 사랑한만큼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예봉에 대한 심심한 감사의 정과 찬양, 신뢰와 고무격려가 넘쳐 흐르는 편지들이였다.

예봉은 행복하였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긍지로 가슴은 부풀어올랐다.

그이후 은막에서 백합꽃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수 없었다. 백합꽃은 조용히 은막에서 사라져버린것이다.

허나 문예봉은 더욱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백의동포들의 심장속에 깊이깊이 새겨졌으니 백합꽃은 결코 사라진것이 아니였다. 민족이라는 영원한 토양우에 뿌리내린 꽃은 언제나 시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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