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국책영화》를 둘러싸고

 

 

1937년 7. 7사변의 포성이 울렸다. 이 포성은 우리 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국의 로구교라는 이름도 없던 지역에서 터졌으나 그 진앙은 삽시에 조선으로 들이닥쳐 사람들의 생활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았다.

대륙침략열에 들뜬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세상의 모든것을 단숨에 짓부셔버릴듯 미친 말떼마냥 날뛰였다. 그 광기속에서 전시체제가 선포되고 1938년 2월에는 칙령 제95호가 공포되였다.

신문과 방송으로는 매일과 같이 지원병으로 나가라는 나발을 불어댔고 옷까지도 시누런 국방색으로 입으라고 강요하여 거리는 삽시에 군대련병장처럼 국방색으로 변하였다. 군가가 어지럽게 울려퍼지는 거리는 낮이면 가두행진, 밤에는 등불행진으로 부글부글 끓어번지였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타고 일제는 조선영화의 마지막숨통을 누르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녀배우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간교한 수법으로 조선영화의 영상을 흐리고 허약케 한 일제는 다음걸음으로는 《영화등록제》를 실시하여 각 영화회사들을 총독부에 꼼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놓을 계책을 꾸미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각 영화회사들은 일제에게 완전히 손과 발을 묶이운 상태에 처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는 1939년에는 《영화법령》이란것을 또다시 공포하였다. 이 《영화법령》은 총독부에 영화회사들을 묶어놓는것도 성차지 않아 아예 조선의 모든 영화회사들을 단일한 영화회사로 통합하고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을 미화분식하는 선전도구로 내몰자는데 있었다. 계통적으로 조선영화에 대하여 목조르기를 하던 일제는 이 《영화법령》이란 칼을 휘둘러 조선영화의 마지막명줄을 끊어놓고야말았다. 참으로 간악하기 그지없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였다.

허나 일제는 조선영화의 숨통을 끊어놓은것만으로도 성차지 않아 소위 《국책영화》제작에로 영화인들을 내몰았다. 《황국신민화》와 특별지원병제도를 요란하게 광고하면서 더 많은 조선청년들을 전쟁대포밥으로 끌어가려는것이 소위 《국책영화》의 진의도였다.

일제는 저들의 침략정책과 지원병제도를 선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이야기들을 꾸며내여 여론을 오도하였다.

제1차 지원병으로 화북전선에 나간 리인석상병이 《천황페하만세》를 웨치며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무훈담을 만들어 소학교 교과서에까지 올렸고 로일전쟁시기 철조망을 폭파한 《육탄3용사》요, 히로세중좌의 전함자폭정신이요 하면서 전쟁열을 퍼뜨리였다.

놈들은 또한 친일주구들을 앞장에 내세워 저들의 침략정책을 동조하는 사회적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애썼다.

지원병제도가 발표되자마자 《매일신보》에는 사장 리성근의 이름으로 이런 글이 나갔다.

《우리는 세계관을 뜯어고쳐야 한다. 우리들은 대일본국민이다. 아무런 공상도 허락치 않는다. 일본국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할뿐이다. 2500만의 살길은 이밖에 없다는것이다. 성전의 대의를 깨달으면 우리들의 적은 생명쯤 던지는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임효정이라는 조선녀인의 이름으로는 이런 망발을 늘어놓았다.

《왜 아들을 지원병으로 내놓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피까지, 우리의 몸까지 모든것을 이 전쟁에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서자생활을 완전히 버리고 천황페하의 적자로 나서자.》

일제는 이런 사회적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기 위하여 《지원병》, 《병정들》, 《젊은 자태》 등 군국주의영화들을 대대적으로 만들었고 조선주둔군 보도부에서는 《너와 나》라는 영화를 특별제작하려고 획책하였다.

이 영화제작은 일본에 건너가 영화업에 종사하다가 귀국한 허영(히나쓰 에이따로)이 맡았다. 친일매국주의사상이 골수에까지 차있던 그자는 어느 한 잡지사와의 회견에서 《너와 나》의 창작의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라는것은 일반내지인의 총칭이요, <나>라는것은 일반조선인의 총칭으로서 너와 나는 굳게 손을 잡고 <대동아공영권>의 초석이 되자는것을 의미한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자는 조선에 건너왔을 때 조선을 더 잘 알려면 지원병훈련소에 가보라는 성대총장의 말을 듣고 거기서 숙식하면서 느낀바를 영화화하였다고 력설하였다.

허영의 말에서도 력력히 나타나지만 결국 《너와 나》라는 영화는 조선사람들도 천황의 백성이니 일본놈들과 같이 침략전쟁에 나가 피를 흘리라는것이였다.

그러기에 작품의 내용도 조선의 청년들이 지원병으로 나가 전장터에서 《용감히》싸워 《무훈》을 세우는 이야기로 엮어져있었다.

일제는 영화의 이러한 정치적의도를 가리우기 위하여 《조선영화는 조선만을 생각지 말고 내지까지도 상대하여야 발전성이 있다》느니, 《조선영화는 조선의 문화와 풍속, 기타의 정취와 향토색을 존중해야겠지만 내선일체에서 출발하여 내지와 대륙까지를 상대로 제작하여야 한다》느니 하면서 마치도 《너와 나》가 세계적무대에로 진출하는 조선영화의 새로운 출발점이라도 되는듯이 떠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미사려구뒤에 숨은 일제의 검은 속심을 헤아리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이 영화제작에 동원될것을 강요당한 조선영화인들은 모두 의기소침해졌고 어떻게 하나 빠질 구멍수만 찾았다. 누구도 친일적이고 매국적인 작품에 자기의 얼굴을 내밀려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군권을 동원하여 총칼로 위협하는 놈들앞에서 적수공권의 그들은 진퇴량난의 길에서 갈팡질팡하고있었다. 무작정 맞설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일영화에 출연하여 민족적량심을 더럽힐수도 없고…

이래저래 영화제작은 공회전의 헛바퀴를 돌리는 상황이 되였다.

그러나 일제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영화제작에 더욱 열을 올리며 박차를 가하였다. 놈들은 조선배우들의 동향을 눈치채고는 당시 노래와 영화에서는 일인자처럼 떠받들리우던 《만영》의 리향란(요시꼬)과 반도의 무희로 세계적명성을 얻고있던 최승희까지 출연시키기로 계획하였으며 수많은 일본영화인들도 현해탄을 건너오게 하였다. (최승희는 구실을 대고 영화출연을 회피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영화의 인기와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피동적인 조선배우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자는 수작질이였다.

이러한 정치적배경속에서 요시꼬가 서울로 초청되여왔고 문예봉과 첫 상봉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두 녀인의 상봉은 소란스러운 전란의 시대가 가져다준 불우한것이였다.…

당시를 거스르는 두 녀인의 눈에는 하염없는 추억의 물결이 실려있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시절이였던가. 눈만 뜨면 울려오던 싸이렌소리, 군화소리,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지원병들의 고함소리, 어디어디를 함락했다는 방송원의 열띤 음성…

온통 전쟁바람에 미쳐돌아가는듯 한 세월이였으며 두 녀인의 인생에서도 결코 무심히 스쳐지날 평범한 시절이 아니였다.

《너와 나》라는 영화가 군국주의시대의 사생아로 수치스럽게 태여나던 이 시기에 이 두 녀인도 자기들의 일생에서 결코 수월치 않은 대용단을 내려야 했다. 문예봉은 문예봉이대로, 요시꼬는 요시꼬대로…

허나 그 시대의 공기를 함께 마시고 산 두 녀인이였지만 그 선택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

 

*          *

 

문예봉은 농짝문을 열어젖히고 한창 옷가지들을 추리고있었다. 《너와 나》에 출연하라는 조선주둔군 사령부의 명령을 회피하여 시골로 내려갈 차비를 하고있는것이다.

림선규는 이미전에 예봉에게 결단코 《국책영화》에 출연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정 부득이한 경우에는 피신하라고까지 당부한바 있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한걸음 시골로 내려갔던것이다.

그런데 정작 떠나자고보니 이것저것 꾸려넣을것들이 많아 열심히 옷들을 간추리고있는데 갑자기 대문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였다.

농짝문을 급히 닫고 마당가에 나서는데 벌써 일본경찰 3~4명이 대문을 걷어차며 들이닥치였다. 놈들은 예봉의 존재는 아랑곳없이 무작정 집으로 뛰여들었다.

방바닥 여기저기 널린 물건들이 눈에 뜨이자 한놈이 다짜고짜 소리치는것이였다.

《어디로 도망가려 했는가?》

예봉은 속이 띠끔했으나 아닌보살하였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 도망가겠어요? 짐을 좀 정리하댔어요.》

《거짓말 말아! 편지를 감추었지?》

《무슨 편지 말인가요?》

예봉은 실지로 의아해졌다. 허나 놈은 막무가내였다.

《시치미를 떼지 말아. 우린 다 안단 말이야.》

놈들의 수작이 점점 더 수상쩍었다. 놈들은 예봉을 세워놓고 한참동안 가택수색을 하였다. 그놈들의 무지한 손에서 남편의 책들이 날아나고 옷가지들이 마구 내동댕이쳐질 때 예봉은 치가 떨리도록 격분스러웠다.

그러나 시국이 시국이니만치 공연히 트집을 잡힐가보아 돌미륵처럼 굳어진채 놈들이 노는 꼴을 멀거니 보고만있었다. 무엇을 찾는지 온 집안을 발칵 뒤지며 돌아치던 놈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예봉을 끌고 경찰서로 갔다.

그리하여 예봉은 경찰서의 어느 한 방에서 놈들의 심문을 받았다.

그를 불러앉힌 경찰놈은 예봉의 얼굴을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급기야 자기의 직무를 깨달은듯 황황히 표정을 바꾸었다. 그놈은 엄숙한 분위기를 돋구려고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밑도끝도없이 《너와 나》에 출연하지 말라고 추동한 그 누군가의 편지를 내놓으라고 을러메였다.

예봉은 편지를 받은 일이 없다고 단마디로 잘랐다. 실지로 그런 편지를 받은 일이 없었던것도 사실이였다.

그러나 놈은 두눈을 부릅뜨고 위협하였다.

《편지를 내놓지 않으면 재미없어.》

예봉은 딱하였다. 받지 못한 편지를 어디서 내놓으라는것인가. 아무리 설명해도 경찰놈은 호락호락 물러설 차비가 아니였다.

《그럼 그건 다시 조사해볼 문제고… 그러면 영화에 출연하지 말라고 뒤에서 추동질한자가 있지?》

예봉은 부인하였다.

《없어요. 설사 있다고 해도 나는 누구의 추동질에 놀아날 사람이 아니예요.》

《그렇다면 왜 영화촬영에 나가지 않는가?》

《난 몸이 좀 불편해서 시골에 내려가 정양하려고 했습니다. 촬영단에도 그렇게 기별했는데요.》

예봉은 천연스레 내뻗치였다. 배심을 가지니 무서울것도 없었다.

경찰놈은 잡아먹을듯이 예봉을 쏘아보았다. 절대로 속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연극은 그만해. 여기는 무대가 아니란 말이야. 아무리 이름난 문예봉이라 해도 국책에 엇서면 용서가 없어. 지금은 전시이고 비상시국이라는걸 알지?》

《국책에 엇선것은 없는데요.》

《그러면 왜 국민복을 입지 않고 치마저고리를 계속 입고다니는가?》

어처구니없는 생트집에 예봉은 밸이 울컥 동하였다. 조선사람이 조선옷을 입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항차 나는 영원한 조선치마저고리녀성으로 은막에 남아있으리라 결심한바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놈들과 마주앉아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는 없었다. 자기들의 무지를 권력으로 보충하며 저돌적으로 날뛰는 무리들과는 론리와 진실이 통하지 않는 법이다. 무지한자에게 쥐여진 권력이상 무서운것이 또 어데 있는가.

예봉은 침묵하였다.

경찰놈은 여전히 으르렁거렸다. 왜 반항공훈련에 잘 나오지 않는가. 왜 이름을 일본성으로 바꾸지 않았는가. 왜 조선옷만 입고 다니는가. …

참다 못하여 예봉은 한마디 하였다.

《국민복 살 돈이 없어서 그럽니다. 난 치마저고리 하나밖에 없는 단벌치기예요.》

《거짓말 말아. 유명한 배우가 옷살 돈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국민복을 입기 싫어서 하는 수작인줄 다 안단 말이다. 천황페하의 대동아정책에 엇서자는 심보이지 뭐야.》

《내 혼자서 가족을 벌어먹이자니 돈이 어디 있습니까. 남편은 병자가 돼서 약값만 대자 해도 숨이 차답니다.》

예봉은 놈들의 코에 걸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 가난한 집사정을 핑게대며 변명하였다.

그의 말을 한참 듣고있던 경찰놈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놈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포악스럽게 뇌까렸다.

《더 길게 말할게 없다. 래일부터 당장 영화촬영에 나가라. 군부의 명령이다. 만약 거부했다가는 전시법에 따라 처리한다.》

경찰놈은 마지막말의 의미를 강조하듯 옆구리의 권총을 뽑아 책상우에 탕 하고 놓았다. 번들번들한 권총이 차거운 빛을 발산한다.

예봉은 더이상 뻗댈 필요를 느끼지 않아 조용히 일어섰다. 그가 문가로 걸어가는데 요란하게 빼람을 닫는 소리와 함께 《센진노 쿠세니(조선인인 주제에)》하는 비웃음이 잔뜩 서린 목소리가 울려왔다.

예봉은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조선사람이라고 내놓고 멸시하는 놈의 상판대기를 쳐갈기고싶었으나 그는 눈을 꼭 감았다. 입만 벌리면 《동조동근》, 《내선일체》를 념불처럼 외우는 놈들의 진짜속심은 바로 저런것이였다.

그러면서도 뭐 다 같은 천황의 적자이라구? 구토감을 겨우 참으며 예봉은 경찰서문을 나섰다. 격분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쥐고 그는 한동안 향방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서고보니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바닥이였다. 종로네거리에 초연히 서있는 문예봉을 알아보고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친근한 미소로 혹은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으나 예봉은 한동안 그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멍하니 서있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어디로 갈것인가.

그러다가 수많은 눈들이 자기를 주시하고있는것을 비로소 느끼고는 황황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마음은 어지럽기만 하였다. 만약 내가 영화에 출연한다면 저 사람들을 보고 어서 지원병으로 나가 전쟁의 불구뎅이속에서 죽으라고 선동하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죄악이다.

지금은 선망이 담긴 따뜻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저 부드러운 눈길들이 그때면 삽시에 증오의 화살이 되여 날아올것이다.

가슴을 압박하는 죄의식에 예봉은 몸을 떨었다. 생각만 해도 무섭고 진저리나는 일이였다.

그는 이밤으로 멀리멀리 달아나 어머니가 계시는 장진골안에 깊숙이 숨으리라 결심하고 부리나케 걸음을 다그쳤다. 일단 결심이 서니 마음이 급해졌다. 한초가 새로왔다.

그러나 예봉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날 저녁무렵 시꺼먼 군용트럭 한대가 그의 집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강제련행하다싶이 예봉을 잡아태우고 시외로 질주하였다. 그 트럭안에는 여러명의 낯익은 배우들이 컴컴한 얼굴로 앉아들있었다.

군부에서는 《너와 나》를 대하는 조선배우들의 거부적인 태도를 포착하고 주구들을 내세워 집집을 돌며 강제로 그들을 끌어내였던것이다.

그들을 태운 트럭은 시외 양주군에 자리잡고있던 지원병훈련소를 향하여 만속력으로 달리였다.

 

*          *

 

서울에 도착한 요시꼬의 눈앞에는 너무도 놀라운 현실이 펼쳐지고있었다.

한편의 영화제작을 위하여 예술계가 다 떨쳐나선듯 한 인상이였다.

조선인배우들과 일본인배우들의 공동출연도 놀라왔지만 영화제작에 하루 천여명씩 동원되는데는 경악할 정도였다. 이 많은 인원을 군사령부가 전적으로 맡아서 보장하였다.

배우들은 전부 시외 양주군에 있는 지원병훈련소에서 집단숙식시키면서 시내야외촬영이 제기될 때에는 인원과 촬영도구들의 운반을 위하여 경춘철도를 림시 승차하거나 발차회수를 늘이기까지 하였다. 일본에서나 만주에서나 한편의 영화제작을 위하여 기차가 림시증차되는 례는 있어본 일도 없고 또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여서 요시꼬의 놀라움은 극도에 달하였다. 더우기 녀신백화점과 3월백화점에서 배우들의 의상을 전부 해결하여주고 경전회사에서는 시외촬영시에 전등을 가설하여주는 등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후원들을 하였다.

어느날에는 륙군특별지원병 훈련생들의 제1기 졸업식이 총독과 도지사를 비롯한 군사령관, 장관들의 참가하에 진행되였는데 이 실제장면을 촬영하여 영화에 삽입하였다.

허영은 요시꼬에게 총독을 비롯한 거물급장관들의 실제모습까지도 필림에 담게 되였다고 기뻐하면서 큰 수확이라고, 지상의 영광이라고 감격해하였다.

그동안 숱한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요시꼬는 이렇게 큰 규모와 당국의 직접적인 후원하에 제작되는 영화는 처음 보았다. 그는 은근히 감동되였고 마음이 설레였다. 자신이 맡은 만주처녀의 역을 잘해보리라 마음도 다지였다. 일본배우들과 더우기 문예봉을 비롯한 조선인배우들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발휘해보고싶은 경쟁심리의 발동이라고도 할수 있었지만 제국의 정책수행에 한몫 하겠다는 소위 《국민적자각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1941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을 위하여》, 《만주를 위하여》라는 대의명분으로 전선위문공연도 많이 한 그였다. 그때의 요시꼬로서는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제가 뿌려놓은 군국주의독소를 마시며 자라난 세대로서 일제에 의하여 중국, 조선인민들이 겪는 불행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였던것이다. 영화배우, 독창가수로 이름을 날리고있는 리향란이란 자기의 존재자체가 군국주의정책이 빚어낸 인위적인 허상이라는데 대해서는 더구나 깨달을수가 없었다.

조선의 배우들중에 그의 관심을 끈것은 문예봉과 김신재였다.

문예봉은 조선영화계의 별이라는 의미에서였고 김신재는 포동포동하게 귀여운 모습과 함께 일본말을 제일 잘하는것으로써 그의 눈길을 끌었다.

서울에 와서 요시꼬는 문예봉이 출연한 여러편의 영화를 보고 속으로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수업료》를 보면서는 눈물도 많이 흘렸었다.

문예봉의 내심적인 연기와 조선적인 자태는 요시꼬에게 강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기품이 있어보이는 실제모습이 그대로 반영된듯 한 화면형상이여서 배우의 연기라기보다 현실의 인간을 그대로 보는것만 같았다. 화면의 모습이자 곧 그의 실제모습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러한 그에게 호감을 가진 요시꼬는 문예봉과 깊이 사귀여보려고 애썼으나 문예봉의 마음의 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언제나 말이 없고 조용한 그의 모습은 흐트러질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요시꼬는 뜻밖의 광경에 부닥치였다.

조선인배우들을 한방에 모여놓고 한창 대사연습을 시키고있는 광경이였다.

문예봉은 한켠구석에 조용히 앉아 연습을 하는지마는지 대본을 쥔채 눈을 내리감고있다. 대사록음을 책임진 일본인록음사가 예봉에게 대본의 한 대목을 발음시켰다. 별로 힘든 대사도 아닌데 예봉은 떠듬거리며 잘 외우지를 못했다. 몇번씩 반복연습시켰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화가 난 록음사는 대본을 집어던지며 짜증을 내였다.

《그래가지고도 무슨 명배우라고… 반도인들이란 참…》

물론 일본말로 웅얼거렸지만 요시꼬는 당황하여 얼른 문예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문예봉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랭정해보이는 얼굴빛이 한층 더 표표해졌다고 할가.

록음사는 더 말하기 시끄럽다는듯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예봉은 연습을 잘하겠다거나 미안하다거나 하는 사정의 말 한마디없이 그대로 홱 돌따섰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오연한 자세로 걸어나가는 그의 뒤모습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록음사는 옆에 앉아있는 한 일본인배우의 옆구리를 툭 치며 예봉을 눈짓했다.

《센진노 쿠세니…》

그리고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연기를 후-하고 내뿜었다.

일본말을 배워주려 그자리에 앉아있던 요시꼬는 그 조야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혹시 예봉씨가 듣지나 않았을가?

그러나 록음사의 말따위는 상관할바가 아니라는듯 예봉은 일언반구없이 제자리에 가앉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눈을 내리감는다.

요시꼬에게는 그 태도가 별로 이상하게 안겨왔다. 죽이겠으면 죽여라 하는 일종의 무언의 항거 비슷한 도전적인 태도를 느꼈던것이다.

그리하여 그이튿날 경기고등학교마당에서 문예봉을 만나 동정을 표시하였었는데 의외에도 문예봉이 흔연한 표정으로 점잖게 반격을 가해왔던것이다.

 

*          *

 

《그런 일이 있었지요. 생각나요. 아마 내가 퍼그나 쌀쌀하게 요시꼬선생을 대한듯 한데…》

《그래요. 난 사실 조선의 유명한 배우가 하찮은 록음사한테서 모욕당하는것이 안되여 동정했던거예요. 그런데 문선생은 점잖게 웃으면서 소리없이 나를 날카롭게 질책하는것 같더군요.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잊혀지지 않는 일이였습니다. 인기와 명성속에 국적불명의 녀인으로 둥둥 떠있던 당시의 저에게 일종의 채찍을 휘두른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두 녀인은 뜻있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미소하였다.

로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는 두 녀인의 얼굴이였지만 흘러간 세월의 자욱인양 눈가나 이마에는 어쩔수 없는 주름살이 곱게 잡혀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주름살들에는 복잡다단한 세월을 거쳐온 그들의 고뇌와 슬픔, 눈물의 하많은 사연들이 비껴있으리라.

두 녀인을 바라보는 나의 가슴은 저려올랐다.

어찌보면 시대를 잘못 만난 가인들이라 할수 있었다. 《너와 나》가 제작되던 그 시기가 문예봉의 생애에서는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일것이였다. 비록 강요에 의한것이였지만 마음에도 없는 영화에 출연하여 일제의 군국주의정책에 리용된것은 결코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 아니였던가.

일생을 아름다움과 현숙미를 풍기는 조선녀성의 전형으로 은막을 장식하려던 그의 깨끗한 넋에 일제는 사정없이 오욕의 먹물을 들씌웠던것이다. 비단 문예봉뿐이 아니라 적지 않은 명배우들이 그때 이런 치욕을 당했었다,

나라가 없는탓이였다. 오랑캐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다나니 자기 성과 이름, 말까지 빼앗긴채 서투른 왜말을 옮기면서 영화에 얼굴을 삐쳐야 하는 비극적인 처지에 굴러떨어졌던것이다.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이고 고통이였다.

력사를 거슬러올라가면 남의 나라를 강탈하고 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자들은 많았어도 그 나라의 성과 이름, 말까지도 빼앗으려고 날뛴 그런 지독한 제국주의는 없었다. 그런데 왜놈들은 조선의 모든것을 강탈하다못해 나중에는 말까지 빼앗으려고 악착스레 날뛰였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연극무대에는 조선옷을 입은 춘향과 도령이 서투른 왜말로 사랑을 속삭이는 기막힌 장면이 펼쳐졌고 레코드에서는 왜놈의 노래만이 흘러나오고 《삼천리》,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 잡지전부가 일본말로 출판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살벌한 공기속에서 문예봉을 비롯한 영화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고뇌와 몸부림이 나에게는 리해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욕의 진탕속에서 헤여나려고 아무리 발버둥쳤으나 그들을 지켜주고 안아줄 품이 없었기에 그네들의 깨끗한 넋과 마음들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나중에는 일제의 칼에 마구 란도질당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던것이다.

《너와 나》에 동원되였던 배우들은 다시금 또 다른 군국주의영화에 출연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을 강요당하였다.

대륙침략에 미쳐날뛰던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이렇듯 조선영화인들의 생애에도 아물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깊숙이 남기였으며 그들의 명예에 흙탕칠을 마구 해댔던것이다. 참으로 암흑과 같은 시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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