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흩날리는 락화들

 

조선영화라는 조그마한 목선이 세월의 바다우에 돛을 올린지도 어언 18년!

그러나 끝없이 밀려들어 후려치는 풍랑속에서 돛폭은 찢기고 목선은 금시 가라앉을듯 위태롭게 기우뚱거리고있었다. 초라하고 빈약한 목선을 단숨에 삼킬듯 달려드는 풍랑의 기세는 맹수마냥 사나왔다.

침몰이냐? 아니면 일본군함에 먹히우느냐? 운명적인 시각이 아닐수 없었다.

이러한 때인 주체28(1939)년 월간잡지 《신세기》2호에는 《조마경에 비쳐본 조선녀우들의 남편군상》이라는 해괴한 기사가 실려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은막을 통하여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있던 이름있는 녀배우들과 그 남편들에 대한 독설적인 인신공격으로 일관된 그 기사는 내용의 허위성은 물론 필체의 조야성으로 하여 사람들의 얼굴을 찡그리게 하였다. 어용보도수단들이 흔히 창출해내는 기만극치고는 야비함과 유치함의 농도가 도를 넘는것이였다.

동료들의 말을 듣고 잡지의 글줄을 읽어내려가는 문예봉은 너무도 치가 떨려 얼굴이 새파랗게 얼어들었다.

《…먼저 문예봉을 수술대에 올려놓는다. 그 녀는 자칭 영화계의 제일인자라고 호언하고있으나… 그 녀의 남편을 보려거든 서울 죽첨동에 있는 자칭 연극전당이라는 동양극장에 가보시라. 악취가 나는 계단을 거쳐 2층에 올라가면 제일 뒤좌석에서 자기 졸작의 각본에 도취하고있는 반미치광이를 볼것이다. 가라사대 림선규라 한다.

그는 지방순회극단에서 일을 봤는데 어쩌다가 절창을 연출한것이 인연으로 문예봉과 맺어진것이다. 페병으로 신음하더니 다시 기여나와 각본을 판매하고있는중이다.》

잡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것을 겨우 참으며 그는 남편의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방아래목의 앉은뱅이책상에서 남편은 여념없이 글을 쓰고있었다. 병색이 도는 창백한 안색이나 원고지에 정신을 쏟고있는 부드러운 눈은 웃고있었다. 작품속의 인물들과 마음을 나누는듯 얼굴에는 한없이 평온하고 유정한 빛이 흐른다. 그런데 어린애처럼 깨끗하고 착한 저이가 자기로 하여 이런 구정물을 뒤집어쓴것이다. 예봉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떻게 하면 이 오욕을 앙갚음할수 있을가.)

격분과 증오의 숯불이 서서히 타오르는 속에 예봉은 이 하나의 생각에 옴해버렸다.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예봉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림선규가 어느새 잡지를 집어들었다.

기사를 다 읽은 그는 흥미있다는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꽤 걸작인데! 괜찮아!》

그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예봉은 느물느물하는 남편에게 아연해진 눈총을 쏘았다. 별치 않은 일이라는듯 유모아식으로 대하는 그가 너무도 태평스러워보였다.

《아니 웃음이 나가세요?》

《웃음이 나지 않구. 이것 보오. 표현이 얼마나 기발하오. <다시 기여나와 각본을 판매한다.> 든가 <자기 졸작에 도취한다.>든가… 참 재미있지 않소?》

《당신은 정말 머리가 좀 어떻게 된게 아니예요?》

예봉은 약이 올라 얼굴이 다 새빨개졌다.

그러나 림선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다. 그는 잡지를 방바닥에 훌 던지고는 우쩍우쩍 기지개를 켰다.

《이런데 신경쓰지 마오. 별 시시한 일을 가지고…》

《시시하다니요? 온 세상에 이 글이 나갔는데 이런 모욕을 받고도 가만있는단 말이예요? 당장 가서 그 필자라는 작자와 해볼테예요.》

《글쎄 필요없다니까.》

림선규는 열이 올라 쌔근대는 예봉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며 또 빙긋이 웃었다. 너무도 순진한 예봉이가 민망스러울 지경이였다.

별치 않아보이는 현상이라도 그 밑바탕에는 곁에서는 보이지 않는 보다 심각한 내적요인이 있기마련이다. 오늘의 이 유치한 놀음도 그런것중의 하나일것이였다.

사실 림선규는 몇년전부터 은밀히 하나의 작품을 구상하고있었다.

그것은 주체25(1936)년 8월 여름철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경기에서 1등을 하여 세계를 들었다놓은 손기정을 원형으로 한 영화대본이였다.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마라손에서 단연 1등을 하여 조선민족의 기개를 떨쳤으나 시상식에 오른 그의 가슴에는 원통하게도 일본 일장기가 달려있었다. 짓밟힌 식민지민족의 슬픔과 치욕이 가슴을 치고 피가 거꾸로 솟는 장면이였다. 그리하여 《동아일보》의 애국적인 기자들은 석간신문 3면에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의 사진을 실으면서 가슴에 단 일장기를 단호히 지워버렸던것이다. 민족의 피가 식지 않았다는것을 과시한 애국적인 장거였다.

이 사건으로 총독부 경무국과 경기도 경찰부가 벌둥지 쑤셔놓은듯 발칵 뒤집히였다.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 《동아일보》사 사장과 주필, 편집국장, 사회부장, 사진부장, 서화반원들이 모두 체포되였으며 이틀후에는 미나미총독의 직접적인 지시로 《동아일보》가 무기한 정기처분을 받았다. 이것이 온 나라 사람들을 격동시킨 《일장기말소사건》이였다.

이 력사적사건은 림선규의 창작세계에 세찬 불길을 지펴놓았다. 더우기 주체26(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전투와 일제가 도발한 7. 7사변은 그의 머리를 다시한번 뒤흔들어놓았다. 《속세를 떠나서…》, 《페허우에 우는 충혼》, 《락화암과 사자수》, 《동학당》 등 애국주의를 주제로 한 력사극을 많이 쓴 그였다. 항시적으로 그의 가슴을 달구는 조국애, 민족애의 불길은 손기정사건을 접하자 더는 끌수 없는 화염으로 타올랐던것이다. 그리하여 조용히 작품창작을 추진시켜나가고있었는데 어느새 학무국이 냄새를 맡았다.

이러저러하게 압력의 그물을 조여오다가 이번에는 지면을 통하여 비렬한 인신공격작전까지 벌렸던것이다. 언론의 힘을 입어 그들부부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음모였다.

이런 내막을 너무도 잘 아는지라 림선규는 별로 놀라지 않았고 도리여 놈들의 유치함에 랭소를 보일뿐이였다.

(가소로운 놈들!)

강자만이 웃을수 있다는 격언 그대로였다.

그러나 추문은 추문대로 남고 상처는 상처대로 아픈 법이다.

야비한 인신공격으로 가득찬 이 기사는 가뜩이나 내성적인 예봉에게 아물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깊이 남기였다.

 

*            *

 

조선영화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비렬한 술책은 나에게 말할수 없는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녀성들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것이 바로 자신의 사회적명예보다도 녀성적인 인격이다. 특히 예로부터 현숙미를 으뜸으로 삼아오는 조선녀성들에게서 이것은 민족특유의 감정이라고까지 할수 있다.

그런데 간교하기 그지없는 일제놈들은 조선녀성들이 목숨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그 신성한 인격에 무지한 흙탕물을 들씌우는것으로 영화계에서 매장하려 하였으니 조선영화를 없애치우려는 일제의 독심은 얼마나 무섭고 악랄한것인가!

내가 분격을 터뜨리자 요시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요시꼬에게는 예봉이 당한 치욕이 별로 놀라운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던것이다. 《일만친선》이라는 정치극을 위하여 순진한 처녀였던 자기를 순간에 중국녀자로 변신시켜놓고 청춘시절을 우롱하여온 일본당국자들이고보면 조선녀배우들을 짓이기기 위한 사기극쯤은 눈 한번 깜빡 안하고 연출해낼것이였다. 입버릇처럼 부르짖는 《내선일체》, 《동조동근》, 《5족협화》의 연막으로 가리워진 침략야망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릴것이 없다는것이 일제의 배짱이였다.

야생말처럼 날뛰는 그 정치적발굽밑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운명이 짓이겨졌던가. 당시 요란하게 광고되였던 요시꼬자신에 대한 선전물의 일부가 허거프게 떠오른다.

《일본말로 리꼬랑, 중어로는 리향란이라고 부르는 그는 민국 8년생으로서 당년 21살이다. 그의 몸에서는 현대적인 이국정취가 풍기고있다. 일본사람들가운데서도 숭배자가 많은 그가 이번에 또다시 일본에 왔다. 이채가 풍기는 인물이다.》

《그는 봉천시장이 사랑하는 딸로서 베이징에서 자라고 일본학교에서 공부를 하여 일본말도 아주 잘한다. 일본, 만주, 중국 세 나라 말을 통달한 그야말로 흥성이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처녀다.》

일본처녀를 만주처녀로 둔갑시켜 정치적리익을 얻어보자는 그야말로 좀스럽기도 하고 졸렬하기도 한 속임수였다. 이 정치사기극의 《화려한 무대》에서 요시꼬는 혜성적존재로 인기의 최절정에 올라선듯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불행의 나락에 떨어졌다. 그는 자기를 죽이고 정치포스터로 살아야 할 기막힌 운명에 처하였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시꼬 또한 문예봉과 같이 군국주의정책의 희생자라고 할수 있었다.

《숱한 녀배우들이 제국정책의 희생물이 되였겠지요?》

예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것은 미인초라고 불리우던 김소영의 아릿다운 얼굴이다.

긴 속눈섭을 가진 선녀형의 미인이였던 김소영! 그는 《심청전》의 심청이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서울 배재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계에 진출한 그는 애수가 스민듯 한 모습으로 하여 심청의 역에 잘도 어울렸지만 그의 풍모 또한 심청 못지 않게 순진하고 진실하였다.

《심청전》을 촬영할 때의 일이다.

폭양이 내려쪼이는 삼복철에 우이동에서 야외촬영을 하였는데 너무도 날씨가 무더워 모두들 진이 빠져 헐떡이며 그늘만 찾았다. 그러나 김소영만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뙤약볕속에서 침착하게 자기 역을 수행하였다. 그날밤에는 촬영준비가 늦어져 촬영단 전원이 한밤을 꼬박 새웠다. 너무도 피곤하여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있을 때 김소영은 자신의 피로는 아랑곳없이 밝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영화를 위하여, 그리고 저의 성공을 위하여 이토록 애쓰시는데 정말 죽는 장면이 있으면 죽어보겠어요.》

진정으로 고마와하는 가식없는 이 말에 50~60명되는 성원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그들은 대번에 피로를 가시고 그날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냈었다.

순정의 녀인으로 불리우던 김소영의 성격적일단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수 있다.

그는 미술가청년과 결혼하여 가정생활을 했는데 남편은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무대미술가였다. 일제는 그를 주목하다가 불온사상을 가지고있다는 구실로 불의에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당하였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 사실을 걸고들며 악랄하게 김소영을 공격하였다.

《다음은 김소영을 수술대에 올려놓는다. 서양녀성의 특징인 속눈섭을 가졌다고 해서 주제넘게 본정통이나 종로통에 사진을 걸어놓고있는 박래형의 녀배우다. 16~17살때에 모극단에 있는 기술자와 놀아나서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지금 철창에 갇혀있는 몸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 김소영은 너무도 정신적타격이 커서 며칠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었다. 남편이 남기고 간 애기를 껴안고 서럽게 울기만 하였다.

하소할 곳 없는 설음에 예봉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김소영의 모습이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그후 그는 일본에서 젊은 나이로 곡절많은 일생을 마치고말았다.

바야흐로 활짝 피여나 영화계를 아름답게 장식하려던 한떨기 꽃이 짓이겨진 모양이였다.

놈들의 공격은 현순영(현방란)에게도 퍼부어졌다. 어여쁘다기보다 잘난 얼굴로 특색을 보이던 현순영! 그는 당시 이름난 연극인이였던 현성완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무대를 밟았고 녀학교를 나온 비교적 지성있는 녀성이였다. 그는 순박하고 온화한 품성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있었다.

연출가 리규환은 그를 박꽃에 비기면서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현양은 여름철의 폭양을 무릅쓰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박덩이의 결실을 보기 위하여 버티고 방긋 웃고있는 박꽃과 같은 녀자이다.》

사실 박꽃은 사람들의 눈을 끌수 있는 화려한 빛도 가지지 못했고 그렇다고 하여 이채로운 향기를 내뿜는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수수한 꽃이다. 그러나 다른 꽃들에는 비할바가 아닌 커다란 박덩이를 열매로 내놓는 덕성있는 꽃이였으니 그 꽃에 비유한 현순영의 품성이 어떠하리라는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것이다. 페결핵으로 신음하는 라운규의 반려가 되여 숨지는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해주었고 장례까지 치르어준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인간적풍모를 력력히 알수 있다.

라운규가 사망한 후에는 그를 못잊어 며칠씩이나 단식을 하였다는 설이 나돌 정도로 그는 라운규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녀성이였다. 이러한 그를 눈에 든 가시같이 여기던 일제는 그의 인격을 깎아내리는것으로써 라운규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현순영도 은막에서 제거하려 하였던것이다.

놈들은 악랄하게 그를 공격하였다.

《다음은 문제삼기도 창피한 현순영이다. 기생에서 녀급, 녀급에서 인제는 녀배우로 승격한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이다. 한동안 실련인가 발광인가로 칼모틴을 먹고 자살소동을 일으켜 애꿎은 신문기자에게 특종감을 제공해준 다재다능한 녀자로 한때 운동선수이던 김 아무개와 이러쿵저러쿵하더니 어느새 영화감독 김모와 또다시 염문을 퍼뜨리다가 요즘엔 어느 부호의 아들과 다방출입이 잦다. 이러고보면 어느게 진짜남편인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현순영이 라운규의 안해였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있으면서도 그를 기생출신으로, 련애쟁이로 몰아붙인것은 그를 창녀처럼 묘사함으로써 조선영화계의 거성이였던 라운규의 명예에 흙탕칠을 하며 아울러 조선영화계자체를 어지러운자들의 란무장으로 매도하려는 흉심이 깔려있었다.

하여 조준사격을 하듯 조선영화계의 이름난 명사들만을 꼭꼭 골라가며 인신공격의 총질을 해대는 일본놈들때문에 수많은 녀배우들과 그 남편들이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썼다.

이러한 사태앞에서 예술인들모두가 분격하여 들고일어났다.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여론이 물끓듯 하는 가운데 배우들은 《신세기》편집부에 몰려가 필자를 대라고 들이댔다. 처음에는 모르쇠를 하던 편집부에서도 배우들의 기세에 눌리워 등기로 보내온 글을 내놓으며 김대즙이란 이름과 주소를 대주었다. 물론 그 주소로 달려가보니 그런 사람은 없었다. 일제의 간교한 조작극이였던것이다.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당시의 일을 이야기해주던 문예봉이 문득 나에게 물었다.

《선생은 윤심덕사건을 잘 아실테지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당대의 이름난 가수 윤심덕이 애인이였던 김우진(김수산)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비화는 널리 알려져있었다. 당시의 여론은 이루어질수 없었던 사랑때문에 두 청춘남녀가 자살하였다는 견해가 압도적이였다.

물론 장성군 군수의 벼슬을 지낸바 있는 김우진의 아버지 김성규가 배우 윤심덕과의 결혼을 결사반대한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한데는 보다 심각한 다른 사회적요인이 있었다.

문예봉은 과거를 거슬러가며 그 사실의 진상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었다.

《윤심덕은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댔지요. 그러다가 <조선총독부>자금으로 우에노음악학교를 다녔는데 이것이 바로 운명의 올가미라고 할수 있었답니다.

윤심덕이가 가수로 두각을 나타내자 총독부 학무국장이 그를 불러다놓고 <조선총독부>의 촉탁가수로 되라고 강박했다는겁니다. 사실 촉탁가수가 되면 일본 관직자들의 먹자판에 끌리워가서 노래도 불러야 하는데 그러느라면 자연히 놈들의 유흥의 희생물이 되는 길을 피할수 없지요. 그래서 윤심덕이 처음에는 거절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는데 끈질긴 강박과 위협이 뒤따랐어요. 총독부의 비용으로 공부를 했는데 그에 보답해야 되지 않는가, 일본노래를 많이 불러서 조선사람들에게 보급해라, 그렇지 않으면 학비를 몽땅 변상해야 한다는 등 정말 못살게 굴었는가봅니다.

그래서 그는 일본에 레코드취입을 갔다가 돌아온 후에 생각해보겠다고 시간적여유를 얻었지요. 그때 극작가 김우진이 몰래 그를 따라 일본에 갔던거예요.》

《희곡 <산돼지>의 작가 말이지요?》

《그래요. 그는 윤심덕을 무척 사랑했던가봐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심덕과의 사랑을 성취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장선생도 <사의 찬미>라는 류행가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노래는 윤심덕이 로씨야곡 <다뉴브강>에 자기의 심정을 담아 가사를 붙인 노래로서 한때 상당히 류행되였댔지요. 그 노래를 비롯하여 10여곡을 레코드에 취입한 후 귀국의 배길에 올랐다가 윤심덕이 불시에 바다물에 뛰여들었지요. 그를 구원하려고 김우진도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아쉽게도 둘 다 구원되지 못했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요. 놈들은 그들의 죽음이 마치 비련때문인듯이 여론을 내돌렸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내막을 잘 알고있었답니다. 윤심덕이 비록 일제와 맞서 싸울만 한 사상은 못 가지고있었어도 조선사람으로서의 량심은 있었던거예요. 그래서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거지요.》

흥분한 예봉의 말소리가 격해졌다. 나도 흥분되였다. 애젊은 청춘들을 죽음에로 내몬 일제에 대한 증오가 가슴을 쳤다. 아마도 검푸른 바다물에 몸을 던진 그들의 령혼은 지금도 그곳을 배회하며 일제를 저주하리라.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깊은 생각에 잠겨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였다.

예술계에 불어치는 일제의 광풍속에서 하나둘 떨어져 흩날리는 락화들! 아름다운 꽃, 어여쁜 꽃, 청초한 꽃들이 가엾게 떨어져 진창속에 나딩군다. 나에게는 왜 그런지 녀배우들의 운명이 그 락화들의 모습으로 련상되였다.

당시 예술계에 나섰던 녀배우들치고 재사가 아닌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뛰여난 미모와 출중한 가창력을 가진 다재다능의 인재들이였다고 할수 있다.

인민배우 김련실을 보더라도 그는 당시 이름난 영화 및 연극배우였을뿐아니라 1920년대에 벌써 《아리랑》의 주제가를 육성으로 불렀고 1930년대에 《세동무》, 《장한몽가》를 《빅타》레코드에 취입한 가수였다.

인민배우 김선영도 《바람》, 《방아타령》 등의 노래를 《리갈》레코드에 취입한 명가수였으며 최승희 또한 유명한 무용가이면서도 가수였다.

리애리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명한 연극배우였을뿐아니라 막간가수로도 이름이 높았다.

김소랑이 이끄는 《취성좌》는 리애리수때문에 인기를 독점하는 형편이였다. 광고에 《연극공연막간에 명배우, 명가수 리애리수양의 독창》이라고 쓰면 연극은 흥미없어도 리애리수의 노래를 듣기 위하여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와 관람표를 바닥내는 정도였다.

그는 일제에게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황성옛터》를 애창곡으로 선정하고 가슴스미도록 부르군 하여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레코드에도 취입되여 전국적판도에서 급격히 보급되였다. 결코 스러질수 없었던 민족적울분의 표현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자 일제는 이 노래가 인민들의 민족적감정을 불러일으킬수 있다고 단정하고 《금곡령》을 내렸으며 리애리수에게는 《불온가수》라는 딱지를 붙여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다. 리애리수는 사랑에서의 실패와 일제의 탄압에 더는 견딜수 없어 음독자살을 기도하였고 그후 예술계를 단념하는것으로써 《황성옛터》의 《금곡령》에 항거하였다.

비극배우로 널리 알려져있던 전옥도 이름난 가수였다. 그러나 《앞남산에서》, 《이역에 우는 마음》 등 일제의 비위에 거슬리는 노래들을 불렀다고 하여 그의 노래가 취입된 레코드전부를 몰수당하는 횡포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전옥도 그후 더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영화배우들중에는 안금향이라는 녀배우도 있었다.

일찌기 부모를 다 잃은 그는 어린 동생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기생학교의 기생으로 있으면서 노래와 춤을 팔았다. 그러다가 연출가 홍개명의 권고로 《고려영화사》에 들어가 《철마》에 출연하였다. 일명 《혈마》라고도 한 이 영화는 당시 경상북도 대구에서 살던 친일지주 장씨의 착취상과 전횡을 폭로한 실화에 가까운 영화였다.

장씨는 경상도지방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였는데 어떻게나 농민들의 등가죽을 악착스레 벗겨내였는지 《흡혈귀》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고도 그놈은 대구일대의 여러 공장들을 거머쥐고 로동자들의 피땀을 짜내였고 고리대금으로도 돈을 긁어모았다.

그때 창작가들은 이놈의 실재한 생활내용을 담은 영화를 창작하였다.

그 영화는 생활내용의 진실성으로 하여 근 3달동안 수많은 관람자들의 절찬속에 상영되였다. 영화의 인기가 올라감에 따라 그 소문이 파다히 퍼져 장씨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였다. 자기 생활과 꼭같은 영화가 나왔다는 풍문을 듣고 그놈은 일부러 서울에 올라와 영화를 보게 되였는데 사건과 일화는 물론 이름까지도 자기와 비슷하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놈은 노발대발하면서 명예훼손죄로 이 영화를 일제경찰에 기소하였다. 그러자 검찰측은 때를 만난듯 일방적으로 영화에 대해 《상영금지령》을 내리였다. 자기의 모든 정력을 다 바친 영화가 상영금지되자 안금향은 너무도 통분하여 그만 자리에 앓아눕기까지 하였다. 며칠간 모대기며 고민하던 그는 영화계를 단호히 탈퇴하는것으로써 일제의 탄압에 맞섰다.

이렇듯 명성있는 녀배우들이 하나둘 은막에서 사라지다보니 영화계는 앙상한 나무가지마냥 더욱 쓸쓸하고 초라해졌다. 일제가 바라던 그대로 되여가는 판이였다. 석양지는 가을저녁마냥 영화계에는 쓸쓸한 락조가 드리웠다. 미구하여 어둠의 나락이 들이닥칠것이였다.

마지막숨을 몰아쉬는 조선의 영화계, 시들어가는 배우들의 운명…

나의 귀가에는 그 령혼들이 웨치는 피타는 복수의 절규가 먼곳의 메아리처럼 은은히 울려오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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