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영화계의 거성이 떨어지다

 

찌는듯 한 무더위가 계속되는 주체26(1937)년 8월초 어느날 예봉은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 관동의 컴컴한 뒤골목을 걸어가고있었다.

오래동안 심장병과 페결핵으로 신고하면서도 영화창작에 심혈을 쏟아붓던 라운규가 더는 자리에서 일어날것 같지 못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는 길이였다.

그동안 예술영화 《나그네》의 주인공역을 맡고 분주히 뛰여다니다가 이 소식을 들은 예봉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라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다니, 그 불같은분이…

예봉은 이 소식이 헛된 소문이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라운규가 거처하는 집은 담벽이 다 허물어져가는 남의 집 웃방이였다.

추녀가 금시 무너져내릴듯싶은 집앞에서 예봉은 잠시 주춤거렸다. 일생동안 영화를 위하여 피투성이싸움을 하여온 라선생이 이런 초라한 곳에 누워 앓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가슴이 쓰리고 아파 선뜻 문을 열수가 없었다.

집앞에서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예봉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둑시근한 방에서는 곰팡내와 고려약내가 뒤범벅이 되여 풍겨나왔다.

《선생님!》

예봉은 목메이는 소리로 그를 불렀다.

자리에 누워있던 라운규는 그를 알아보자 몸을 움쩍 일으켰다. 그의 손목을 꼭 잡는 라운규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괴여올랐다.

《예봉이 왔구만.》

예봉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도 몰라보게 변한 라운규의 모습이였다. 굽실굽실한 머리, 넓고 번듯한 이마, 사람을 거들떠보는듯 한 흰자위가 많은 이글이글한 눈! 참으로 정열과 지성이 넘쳐흐르던 성격적인 얼굴은 어디에 가고 지금 예봉의 앞에는 너무도 병약하고 쇠잔해진 늙은이가 있는것이다. 푹 꺼져 퀭해진 눈망울, 훌쭉해진 두볼에 깊이 패여진 주름살, 가늘어진 목…

딴사람같이 수척해진 그의 모습에 예봉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이름모를 분노가 가슴가득 차오른다. 누가 이분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예봉이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있는데 라운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머리를 떼자마자 된기침이 터져나와 가슴을 부여안고 한바탕 줄기침을 깇었다. 종이장처럼 해쓱한 얼굴에는 진땀이 보송보송 내돋고 입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병시중을 들어주던 현순영(현방란)이 급히 다가와 그의 입에서 피를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조심히 자리에 눕히였다.

기운이 빠진 라운규는 한동안 눈을 감고 움직이지 못했다.

예봉은 조용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곰팡내가 풍기는 방안에는 가구라고는 조그마한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댕그랗게 놓여있을뿐 서발막대기를 휘둘러도 거칠것이 없었다.

그러나 머리맡에는 두툼한 원고지와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예봉은 펼쳐진채로 있는 원고뭉테기를 조심히 끄당겼다. 그 원고지가 바로 라운규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미완성영화대본 《황무지》였다. 좀전까지도 추고작업을 하고있은듯 원고지마다에는 째고 덧쓴 라운규의 필적이 생생하였다.

한장두장 원고지를 읽고있는 사이에 라운규가 눈을 떴다. 슬픈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는 예봉을 한동안 말없이 올려다보던 라운규가 힘겹게 말을 떼였다.

《예봉이가 이렇게 와주어 정말 고맙구만.》

목소리마저 꺼져가는 초불마냥 가냘프기 그지없다.

《선생님, 정말 미안합니다. 이렇게 위독해지신줄도 모르고 전…》

예봉은 또 울먹거렸다.

《일없어, 나야 맨날 이런걸. 인제 인츰 일어나겠지.》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실지 자기가 병을 털고 일어나리라는 기대인지 아니면 생을 포기한 사람의 체념인지…

예봉은 가슴이 무둑해져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요즘 예봉이는 무얼 하고있나?》

라운규가 먼저 가느다란 소리로 물었다. 예봉은 그제야 무거운 마음을 털어버리고 기쁜 소식만을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출연하고있는 《나그네》에 대하여 열성스레 설명하였다.

…밀양강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어느 호젓한 마을에 복룡이라는 젊은 사나이가 아릿다운 안해와 귀여운 어린애를 데리고 살아가고있었다. 복룡이가 품팔이를 간 사이에 그 누군가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돈까지 빼앗아가며 설상가상으로 아이까지 심하게 앓게 된다. 안해는 눈물로 남편을 기다리고있는데 마을의 리발사 삼수가 녀인을 꾀여간다. 삼수가 안해를 유린하려고 하는 순간 마을에 들어선 복룡은 삼수를 죽이고 안해를 구원한다. 여기서 자기 아버지를 죽인것이 삼수라는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복룡은 이 사건으로 하여 감옥으로 끌려가며 기구한 인생의 나그네길에 오르게 된다. 언젠가는 다시 이 길로 그가 나그네처럼 돌아오리라는 소원을 가슴에 품고있는 안해의 눈가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작품의 내용을 설명한 예봉은 변사들의 흉내를 내며 첫머리의 해설문을 랑독하였다.

《운명의 강이라고 불리워지는 밀양강과 더불어 살아가려 하니 거기엔 젊은이들에게 얽혀드는 조그마한 운명과 고뇌가 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제 목소리가… 그동안 퍽 나아진것 같지 않습니까?》

예봉은 우정 수선을 떨며 라운규에게 물었다. 자기의 목소리가 그닥지 못하여 연극배우로서는 전망이 없다고 한 그전날의 일을 념두에 둔것이였다.

예봉의 말뜻을 알아차린 라운규는 싱그레 웃으며 역시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도 화술은 락제야. 배우라면 그래도 황철이만 한 화술력은 있어야지.》

《선생님은 여전히 평가에선 린색하시군요. 황철씨하구야 어떻게 대비하겠어요?》

예봉은 응석부리듯 말하였다. 그는 될수록 라운규를 즐겁게 해주고싶었다. 그래서인지 생기가 되살아난듯 라운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난 지금도 번역극 <록사루와 시라노>를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나대신 시라노의 시를 읊어주었던 황철군의 음성을 잊을수 없어. 배우라면 누구나 다 그만한 음성과 화술을 가지고있어야지. 그런데 난 끝내 해내질 못했거던. 참, 그 음성이 부러웠어.》

나직한 목소리로 띠염띠염 말하는 그는 몇마디에 벌써 기력이 진한지 한동안 숨차하며 눈만 슴뻑이였다. 예전의 그 활기와 정력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뼈만 남은 얼굴에 숨이 차 헐떡이는 그의 모습을 차마 보기가 괴로왔다. 예봉은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였다.

그런데 라운규는 다시금 곡진하게 말하는것이였다.

《예봉이는 꼭 화술문제를 해결해야 해. 지금은 토키시대가 아닌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선생님말씀을 알겠어요.》

배우로서의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이렇듯 다심하게 마음을 쓰는 라운규의 진정이 후덥게 가슴을 친다.

예봉은 화제를 돌려 지금 의정부에 한창 건설중인 촬영소와 록음실에 대하여 신이 나게 이야기해주었다.

민충식이라는 영화를 좋아하는 부자가 서울에서 한 30리 떨어진 의정부에 있는 자기 땅을 촬영소와 록음실건설부지로 내주었다는것, 이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영화 《나그네》가 성공하면 갚기로 하고 빚을 내서 촬영소와 록음실건물을 짓고 기계와 설비도 사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생님, 록음실이랑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댔습니까. 이번에 촬영소와 록음실만 지어놓으면 우리도 자기의것을 가지게 된다고 모두들 얼마나 성수가 났는지 모릅니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라운규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피여올랐다.

《촬영기 하나 제것이 없어서 얼마나 수모와 천대를 받았나. 일본놈의것을 삯내서 쓰다나니 예봉은 한겨울에 동태귀신이 다될번 했댔지.》

라운규는 예봉을 뜻있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겨울에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때를 생각하니 새삼스레 몸이 오싹해졌다.

《정말 수고들 했소. 인제는 우리들이 그 귀중한것을 다 자기의것같이 지켜나가는게 중요하지. 나도 곧 회복되면 다시 본때있게 일해보겠소.》

신심에 넘친 그의 얼굴에 붉은빛이 점점이 퍼져나갔다. 억누를수 없는 강렬한 창작적의욕이 그의 가슴을 격동시켰던것이다.

언제나 피를 설설 끓이는 이 창조적열정이 아마도 시시각각 꺼져가는 그의 생을 지탱해주는 한점의 불꽃이 아닐가.

예봉은 삽시에 흥분하면서 생의 활력을 되찾은듯싶은 라운규의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몸은 병석에 매였어도 그의 정신만은 언제나 영화창작이라는 푸르른 대공을 향하여 힘차게 퍼덕이고있었던것이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말하듯이 영화를 위하여 태여났고 영화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친 영화광이 아닐수 없었다.

예봉은 기뻤다. 생의 의욕을 잃지 않은 은사의 모습은 겹쳐드는 생활고에 휘친거리며 눈물만 흘리던 예봉이자신에게도 여간만 큰 힘을 주는것이 아니였다.

그는 라운규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선생님, 인제 촬영소가 다 건설되면 모두들 선생님을 모셔가기로 합의했어요. 다음작품의 연출은 꼭 선생님이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푹 꺼진 라운규의 눈에 광채가 다시금 번쩍한다.

《<나그네>때도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려고 여기저기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선생님행처를 영 알수가 있어야지요.》

《그럴수 있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밥을 먹자니 할수 있나. <현성완일행>을 따라다니며 연극을 했어. 삼천리강산을 무른메주밟듯 돌아다니는 방랑극단이라 예봉이가 어떻게 나를 찾겠나.》

그는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곁에 앉아있는 현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하셨군요.》

예봉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현순영이 라운규와 동거하는 리유도 알만 했다. 《현성완일행》에 속해있는 기간 극단주의 딸이였던 현순영과 인연이 맺어진 모양이였다.

《<나그네>다음으로 무슨 작품을 준비하고있다구?》

예봉의 생각을 깨치며 라운규가 물었다.

《<보리피리>라는 작품이예요.》

《<보리피리>? <보리피리>라?…》

몇번이고 제목을 외우는 라운규의 눈에는 그윽한 정서가 피여올랐다.

무량한 감회에 젖어 그는 속삭이듯 말하였다.

《<보리피리>라는 말을 들으니 어릴적 회령에서 <보리느테>를 먹던 생각이 나누만.》

《보리느테요?》

《그래, 보리느테… 보리느테란 다른게 아니구 물알이 든 보리이삭을 껍질채로 망에 갈아서 풀뿌리에 얼버무려 죽처럼 끓인 음식이야. 그걸 먹으면 목이 너무 깔깔해서 안먹겠다고 어릴적엔 투정질도 많이 했지. 어른들도 넘기기 힘든데 어린것들이야 오죽하겠나. 허나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들과 동네친구들속에서 마음껏 뛰놀던 그때가 정말 편했어.》

라운규는 한줄기 저녁해발이 밝게 비쳐드는 조그만 뙤창가로 하염없는 눈길을 던지였다. 저녁 잔광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주고있었다.

사실 《보리피리》라는 너무도 향토적이고 정겨운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라운규의 마음은 그리운 고향 회령으로 훨훨 날아가고있었다.

회령 3미의 하나인 하얀 백살구꽃이 구름처럼 피여나 황홀한 절경을 이루는 회령마을! 꽃피는 계절이면 린근동네사람들까지 모두 모여와 회령천과 팔을천에 발을 잠그고 떨어지는 꽃잎들을 흐르는 물에 하나, 둘 띄워보내며 만복을 기원했었다. 맑은 물이 감도는 강가에서 모래무치와 야래, 열묵어들을 잡아서 고추장에 푹 찍어 어석어석 씹어먹던 어린시절의 추억은 또 얼마나 소중한것인가. 《아리랑》필림을 가지고 금의환향하듯 고향땅을 찾았을 때 마을사람들은 마치 영웅이나 되는것처럼 청진까지 마중나와 그를 맞아들였고 성대한 환영회까지 마련해주었었다. 고향사람들의 그 정겨운 모습과 수려한 고향산천을 생의 숨결로 고이 가슴에 지닌채 3. 1 만세도 웨쳤고 이국땅의 눈바람도 맞았고 독립군의 총대도 쥐여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모든것을 영화에 담으려고 영화인생으로서의 고행길을 걸어왔다. 그 가시덤불길에서 가슴을 지지는 애향심으로 밤을 밝힌적은 또 얼마였던가.

지그시 눈을 감은 라운규의 귀가로는 어린시절 가슴을 이상하게 흔들던 철도공부들의 구슬픈 노래선률이 아득히 울려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철도부역에 끌려나온 공부들이 철로를 닦으며 부르던 못잊을 그 애연한 노래선률! 거기에는 짓밟힌 인민의 원한이 가슴저리도록 스며있었고 부역에 나갔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그만 미쳐버린 기막힌 사연도 다 실려있었다. 하기에 라운규는 이 노래선률에서 충동을 받고 일제강점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에 대한 강한 반항심으로 일관된 《아리랑》을 창작하였던것이다.

영화는 서울에서 사립전문학교를 다니던 최영진이 《학생소요》에 참가하였다는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고향에 내려와 자기 누이동생을 놓고 친구 윤현구와 결투하는 지주의 마름 오기호를 낫으로 찔러죽이고 《아리랑》의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며 일제놈들에게 잡혀가는 이야기를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영화는 《개와 고양이》, 《광인 최영진》, 《내 마음은 어디에 두고》, 《그리운 사람끼리》, 《풍년놀이》, 《에필로그》 (종결부) 등의 자막순서로 내용을 전개하고있다.

《개와 고양이》란 자막속에 화면이 펼쳐지면 주인공 최영진과 이 마을의 지주마름인 오기호가 은막에 나타난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원쑤지간이다. 서로 두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영진이와 오기호, 연자방아를 사이에 두고 쫓기는 오기호, 그래도 뒤를 쫓는 영진… 어느날 오기호는 논길에서 최영진을 만나 이 논두렁에서 저 논두렁으로 피해다니다 못해 지주 천상인네 집까지 쫓기여와서 하인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지주놈은 미친 놈을 집에다 가두고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호령한다.

《광인 최영진》에서는 영진의 광기가 더 두드러지게 형상된다.

영진이가 《아리랑》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있을 때 일본순사가 마을에 청소검열을 한답시고 나왔다가 너풀너풀 춤을 추는 영진을 보고 우습다고 껄껄 웃는다. 영진은 순사에게 달려들며 《여기 있던 떡 어떻게 했어? 네가 다 먹었지? 너는 도적이다!》하며 소리친다.

라운규는 마음속에 품고있던 반일감정을 이렇게 미친 영진의 말을 빌어 표현했던것이다.

다시금 환각에 빠진 영진의 머리에 환상장면이 펼쳐진다.

끝없이 넓은 황막한 사막에서 한 젊은 나그네가 갈증을 만나 물을 찾고있다. 이때 부유한 상인이 큼직한 물병을 메고 그곳을 지나간다.

상인은 달려와 물을 청하는 나그네에게 돈이 없다는것을 알고 거절한다.

이때 한쌍의 젊은 남녀가 그곳으로 지나가다가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상인은 이들에게도 물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녀인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시오. 그리고 나를 따르면 물을 주겠소.》

갈증을 참을수 없었던 녀인은 상인의 말에 주춤거리다가 동요한다. 이것을 본 나그네는 참지 못하고 상인에게 달려든다. 그들사이에 벌어지는 치렬한 격투, 끝내 상인은 죽고 나그네는 승리한다. 이리하여 물은 그들의 소유로 된다.

자막 《내 마음은 어디에 두고》에서는 지주네 하인들이 영진을 결박해가지고 그의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펼쳐진다.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라고 안타까이 영진의 가슴을 쥐여흔드는데 영진은 《아리랑》을 즐겁게 부르며 그놈들이 내 마음을 빼앗아갔다고 웨친다.

이때 박선생이 친구 현구가 온다는 소식을 알려주나 영진은 알아듣지 못한다.

한편 영희네 집에는 오기호가 와서 빚진 돈 300원을 갚든지 아니면 영희를 달라고 강요한다.

《그리운 사람끼리》에서는 현구를 환영하는 마을사람들이 멍석우에서 음식을 서로 나눈다.

여전히 영진은 친우 현구를 알아보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현구와 영희는 마을사람들이 다 흩어져간 다음에야 둘이 만나 서로의 그리움을 나눈다.

한편 오기호는 최로인을 불러다가 빚을 물든가 영희와의 혼인을 승낙하든가 어서 결심을 채택하라고 다시금 독촉한다.

《풍년놀이》자막이 새겨지면 들판에서 풍년놀이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지붕에 올라가 풍년놀이를 보던 영진은 마당에 내려와 낫을 찾아들고 놋양푼을 두드리며 춤을 춘다. 그리고 벌판으로 달려나간다.

한편 집에 홀로 남은 영희가 현구의 사진을 꺼내보며 행복에 젖어있을 때 오기호가 들어온다. 집이 비여있는것을 안 놈은 영희를 겁탈하려고 달려든다. 영희는 놈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반항한다. 이때 현구가 들어와 오기호사이에 격투가 벌어진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지붕에 올라간 영진은 두사람의 격투를 흥겨운 춤으로 보면서 깨여진 양푼을 두드리기까지 한다.

오기호와의 격투에서 주력이 딸린 현구가 쓰러질 지경이 된 때에 영진의 머리에는 사막의 환상장면이 또다시 떠오른다. 그에게는 두사람의 격투가 상인과 젊은 나그네와의 싸움으로 안겨오면서 나그네가 상인에게 깔리워 죽어가는것으로 보인다.

지붕에서 뛰여내린 영진은 낫을 들고 《상인》에게 달려든다. 마을사람들이 영희와 함께 달려왔을 때는 이미 오기호가 시체가 된 뒤였다.

《에필로그》에서는 영진이 경관에게 체포되여가는 장면을 그리고있다.

영진은 오기호를 죽이고난 후에야 맑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그는 경관의 손에 붙들려가면서 마을사람들에게 이렇게 웨친다.

《동리의 여러분! 나는 한동안 죽었던 몸으로 이제야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웃음으로 나를 보내주십시오. 여러분이 우시는걸 보면 나는 참으로 견딜수가 없습니다. 이 몸이 이 강산 삼천리에 태여났기때문에 미쳤으며 사람을 죽이였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내가 일상 부른 그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내주십시오.》

쓸쓸한 촌락에 저녁바람이 소리없이 불어칠 때 처량한 《아리랑》의 노래와 함께 영진의 자태는 멀고먼 산길로 아득히 사라진다.

라운규는 《아리랑》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자신을 의식한다.

《아리랑》을 창작할 때 전신에 끓어오르던 그 열정이 지금도 툭툭 가슴을 치는것이다. 그 작품이 세상에 나가 돈이 되거나말거나 세상사람들이 좋다거나말거나 오직 몸전체의 열과 힘을 깡그리 다 바쳐 민족의 정신과 기개가 차넘치는 작품을 만들자는 순정뿐이였다. 그래서 그 한편에 자랑할만 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득 담아놓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실망하지 말자. <아리랑고개>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고 피타는 웨침을 터치고저 몸부림치던 창작적흥분이 지금도 가슴을 끓인다.

사랑하는 고향과 조국을 타고앉아 살판치는 일제놈들은 꼭 망한다는 사상을 장쾌하게 뿜어내지 못하고 미친 영진의 입을 통하여 《진시황도 죽었다지!》하는 은유적대사로 대치하면서 태질이라도 하고싶었던 그때의 그 절통한 심정과 고뇌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황막한 사막의 상인은 왜놈을 상징하여 까마귀같은 시꺼먼 옷을 입히고 한쌍의 젊은이와 나그네는 조선사람을 상징하여 흰옷을 입혔으나 일제의 검열이라는 매눈을 피하여 힘껏 터치고싶었던 작품의 사상도 결국은 다음과 같은 나그네의 심리토로로 대치할수밖에 없었다.

《싸워야 한다. 애원할것이 아니라 싸워야 한다. 싸워서 승리하는데서만이 생명을 구원받을수 있다.》

그러나 관중들은 그 말뒤에 숨은 피타는 웨침을 너무도 력력히 알아들었으니 격동의 눈물속에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갈채를 올리며 영화관이 떠나갈듯 환호를 터쳤다. 그때로부터 급속히 류행되는 《아리랑》의 선률을 타고 온 나라에는 《아리랑》의 열풍이 일어났다.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도 아리랑, 리별의 슬픔도 아리랑, 일제를 야유하는 감정도 아리랑, 조국광복의 념원도 아리랑에 태워 불렀었다. 그야말로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생활과 운명의 상징으로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라운규는 지금도 《아리랑》과 《풍운아》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피가 끓어오른다. 그 작품이자 곧 자신이였던것이다.

《아리랑》이후 꽃에서 꽃술을 떼여가듯이 영화의 사상적알맹이만을 꼭꼭 거세해치우는 일제의 검열에 맞서 영화속의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또 얼마나 고심분투하였던가.

《북행》이라는 두 글자를 통하여 사회주의쏘련에 대한 동경과 길림바람을 맞고싶었던 념원을 토설한 《풍운아》, 총잡은 독립군의 모습을 통하여 반일투쟁사상을 웨친 《사랑을 찾아서》, 기관차를 맞받아 도끼를 휘두르는 춘삼의 모습으로 일제에 대한 강한 반항정신을 심어준 《임자없는 나루배》…

그러나 하고싶었던 말을 다 할수가 없었고 만들고싶었던 영화를 마음대로 제작할수 없었던 식민지영화인의 통한은 가실 길이 없었다.

《예봉이, 내가 일생을 바쳐 만들고싶었던 영화가 무엇인지 아나? 100권짜리 장편영화야. 미국 연출가 그리피스는 1916년에 80권짜리 영화 <편협성>을 계획하고 14권으로 끝장내고말았지만 나는 3. 1운동내용을 가진 세계적인 영화를 꼭 만들려고 생각했댔지. 영화의 첫머리에 독립만세운동의 33인과 안중근, 리준, 안창호, 김구 같은 애국렬사들의 사진을 화면에 담으면서 몽양 려운형선생이 일본의 심장부 도꾜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웨쳐 일본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력사적사실을 3. 1운동의 이야기와 결부시켜 엮어나가면 멋들어진 영화가 될수 있다고 보았지.》

《선생님, 정말 대단한 걸작을 구상하고계셨군요.》

예봉은 진정으로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라운규선생의 심장에 이런 웅대한 계획이 잠재하여있었다는 사실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생활고와 병마, 일제의 검열과 자금난과 같은 암초들만 없었다면 라운규선생은 그 영화제작을 지금까지 가슴에만 묻어두고있지는 않았을것이였다.

모든것이 아쉽고 안타까왔다. 라운규는 그야말로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우한 영화인, 영화재사임에 틀림없었다.

《선생님, 모든것이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이 빨리 일어나셔야 그 영화도 만들수 있을텐데…》

그러나 의외로 라운규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무슨 생각에 골똘한듯 한참 침묵하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아니야, 예봉이. 요즘 나는 생각을 달리했어.》

《네?》

《예봉이도 그 소식을 들었겠지?》

《무슨 소식말입니까?》

《6월 4일 보천보소식말이네.》

《아, 듣지 않구요. 온 서울바닥이 들썩했는걸요.》

예봉은 그때의 흥분이 되살아나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때 일성장군님께서 대부대를 거느리시고 보천보를 들이쳤다는 소식은 석간신문 2면 상단에 큰 활자로 보도되였었다.

《공산군 대부대 월경 습래, 주재소 등 관공서에 총화, 4일 오후 갑산 보천보에서》

두줄밖에 안되는 짤막한 보도기사였으나 그 글이 온 나라에 던진 충격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였다.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와 당당히 맞서 정면대결을 선포한 이 장쾌한 전투소식은 삽시에 인민들의 가슴을 민족재생의 환희로 들끓게 하였고 생의 희망을 가지게 하였다.

이 력사적사변은 라운규의 심장을 거대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번지게 하였다. 그는 심장이 금시 터지는듯 한 흥분을 체험하였다. 일생동안 그의 창작적의욕을 불러일으키면서 어슴푸레한 덩어리로 꿈틀거리던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태워도 죽을줄 모르는 불가사리!》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던것이다.

사실 라운규는 33살의 나이로 극악한 《무단통치》의 제창자인 일본 륙군대장 다나까, 조선군사령관 우쯔노미야를 비롯하여 총독부 정무총감 등 군부, 정계의 거물들과 당당히 맞서 1912년에 침몰된 《타이태니크》호의 실례를 들어가며 《조선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력설하고 일본이 꼭 망할 날이 있다고 웨친 려운형을 민족의 영웅으로 보았고 그의 장거에서 커다란 창작적흥분을 느끼고있었다. 그러나 보천보전투소식은 그의 창작적구상을 삽시에 뒤집어엎는 사변으로 되였다. 화려한 연설과 빈 구호로써가 아니라 직접 손에 무장을 잡고 실력으로 일제와 당당히 맞선 김일성장군의 투쟁모습이야말로 일제의 총칼앞에서도 굴할줄 모르고 휘여들지 않는 조선의 기상, 조선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병석에서도 그는 가슴을 툭툭 치는 창작적흥분으로 진정할줄 몰랐다. 당장 일어나서 붓을 들고싶은 욕망이 불같았으나 그는 지그시 자기의 흥분을 눌렀다. 아직은 자신의 준비가 너무도 부족하다는것을 절감하고있었던것이다. 이 작품은 즉흥적인 흥분으로 단시일내에 써내갈길 성격의 작품이 아닌것이다.

그래서 그는 병석에서도 《황무지》를 추고하는 한편 그의 온넋을 사로잡았던 《불가사리》를 보천보의 불길로 승화시키는 창작적구상을 무르익히고있었던것이다.

자기의 창작적구상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라운규의 눈에서는 병자답지 않게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는 항상 이렇게 흥분하는것이다.

예봉은 오직 영화에 대해서만 사색하고 또 사색하는 열정의 인간 라운규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병석에 누워서도 그는 민족적인 의의를 가지는 장편영화에 대하여 구상하고있는데 자기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인정극의 세계에서 헤매고있지 않는가.

예술은 항상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 라운규의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창작세계였다. 예봉은 한시바삐 라운규선생이 구상하고있는 줄거리가 굵직하고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장쾌한 걸작창작에 몸바치고싶은 창작적충동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보천보의 총성을 소재로 한 영화라면 얼마나 뜻이 깊은 작품으로 될것인가. 말만 들어도 저절로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칠줄 모르는 이야기속에 퍼그나 시간이 흘렀다.

라운규의 기운이 너무 빠진듯 하여 예봉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시간이 나는대로 또 오겠습니다.》

작별인사를 하려니 또다시 예봉의 목은 메여올랐다. 라운규는 근심말라는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서글픈 감정이 너무도 진하게 어려있어 차마 그를 마주볼수가 없었다. 그를 다시 보면 눈물이 또 날것 같아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문지방을 나섰다. 몇발자국을 떼는데 등뒤에서 《예봉이!》하고 라운규가 그를 불러세웠다. 예봉은 급히 돌따서 그에게로 달려갔다.

라운규는 그의 아래우모습을 새삼스레 훑어보며 말하였다.

《예봉이는 뒤걸음새가 부드럽구만. 그리구 얼굴이 좀 긴축이니까 촬영기를 우에서 아래로 찍으면 안되겠어. 키와 촬영기가 평행이 되게 찍어야 좋을거야. 그리구 얼굴색이 캄캄하니까 그것을 주의하라구. 촬영가, 조명사들에게 잊지 말구 일러두란 말이야. 예봉이, 우리 죽을 때까지 영화를 놓지 말자구.》

예봉의 손을 다시금 꼭 잡는 그의 손은 불같이 뜨거웠다. 입을 열면 금시 울음이 왁 터질것만 같아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만을 끄덕이였다. 웬일인지 그의 유언을 듣는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조이는것이였다.

혹시나 이분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것이나 아닐가?

머리에 갈마드는 별의별 불안한 생각에 예봉은 몇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라운규의 곁을 떠났다.

어둑어둑한 저녁 마당가에 서서 오래도록 예봉을 바래우며 손을 젓는 라운규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고있었다.

 

*          *

 

그때로부터 며칠후인 주체26(1937)년 8월 10일 《동아일보》석간에는 라운규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실려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떨어진 명성, 눈물의 아리랑 주인공 라운규 금일 요절

조선영화계의 뚜렷한 존재로서 영화 <아리랑> 한편만으로도 조선의 방방곡곡에 알려지지 않은데가 없는 라운규씨가 얼마전부터 병석에 눕게 되여 일반 영화팬들은 큰 기대를 가진채 씨의 건강회복을 초조히 기다리고있던바 드디여 금 8월 9일 오전 1시 관동 70번지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씨는 조선영화의 발생초기부터 나서서 배우로, 감독으로 많은 활약을 하여오는 동안 거친 가시덤불의 길을 헤쳐가기에 갖은 고초를 겪은 공로자의 한사람으로서 최근 영화계에도 점차 유력한 기업자의 진출을 보게 되여 앞날의 서광이 비쳐오는 이때에 뜻하는 새아침을 맞이하지 못하고 새벽하늘의 한개 뚜렷한 별이 떨어진것을 일반팬은 여간 애석히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한다. …》

예봉은 남편이 있는 시골에서 라운규의 부고를 들었다. 병문안 갔던것이 며칠전 일인데 이렇게도 빨리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그는 부고가 실린 신문을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신문에는 곱게 수정한 젊은 시절의 라운규의 사진이 굵직하게 두른 검은 테두리안에 실려있었다. 자기를 쳐다보는듯 한 그 인상적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예봉의 얼굴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신문을 점점이 적시였다.

라운규가 세상을 떠나던 날은 몹시 무더운 여름날이였다. 그가 누워있는 방의 마루에서는 관동 의사와 윤봉춘이 장기를 두며 그를 동무해주고있었다. 라운규는 그날밤에도 작품을 구상하면서 윤봉춘과 진지하게 토론도 하였다. 그러다가 밤 12시가 지나서 사라지는 연기마냥 36살의 젊은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였던것이다. 그는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였다. 평소에 그가 하였던 모든 말들이 그의 유언으로 된셈이였다.

라운규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하늘도 무심치 않아 그의 3일장을 지내는 날에는 종일토록 궂은비가 내리였다. 그러나 조객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송곡을 대신하여 아리랑이 구슬프게 주악되는 가운데 친우들이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까지 나갔다. 집에서부터 묘지에 이르는 긴 구간에는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없이 수많은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눈물로 그를 전송하였다.

그의 묘에는 《고 춘사 라운규의 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우여곡절에 찬 라운규의 영화인생은 이렇게 끝이 났다. 영화재사의 단거리인생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단거리기간에 장거리인생에 맞먹는 공적을 영화계에 쌓아올렸으니 그는 불같은 정열로 인생의 하루하루를 연소시켜나갔던것이다.

문예봉의 추억담을 감명깊게 듣고있던 요시꼬가 문득 문예봉에게 물었다.

《문선생은 후까가와라는 연출가를 모르십니까?》

《왜 모르겠어요. 35년경엔가 그가 서울에 와서 리규환선생과 함께 《무지개》를 합작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댔는걸요.》

《아, 그래요?》

요시꼬는 무척 반가와하였다.

《40년경에 내가 후까가와씨를 만난적이 있었는데 그가 조선의 유명한 감독이며 배우인 라운규씨에 대하여 대단하게 평가했던 기억이 나서 그럽니다. 매우 박식한분이라고 두고두고 외우더군요.》

《아마 그랬을겁니다. 당시 일본공산당기관지 <아까하다>기자들을 비롯해서 숱한 외국예술인들과 기자들도 조선에 오면 꼭 라운규선생을 찾았고 그와의 기자회견을 요구하군 했습니다. <아리랑>과 더불어 조선의 영화계를 대표하는분으로 내외에 널리 알려져있었으니까요.》

나는 일본인연출가와 라운규와의 상봉에 대단한 호기심이 동했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라운규에 대하여 그처럼 감복했을가.

흥미있어하는 나의 눈치를 채였는지 요시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35년 일본일활촬영소 영화연출가로 일하던 후까가와는 리규환과 《무지개》를 합작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다.

《무지개》는 《영화시대》라는 잡지에 련재하였던 《새벽》이라는 영화를 수정하여 제작한 영화인데 효성을 주제로 한 흔해빠진 인정세태극이였다.

근 한달동안 촬영을 마친 후까가와는 귀국에 앞서 라운규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의 유명한 연출가이며 배우인 춘사를 직접 만나보고싶었던것이다. 그리하여 리규환의 주선으로 종로거리 어느 료정에서 라운규는 후까가와일행과 마주앉게 되였다.

초면인사가 오고가고 합작영화에 대한 여담들이 있은 후 세계영화추세에 대한 이러저러한 견해들을 서로 나누었다.

후까가와는 소위 내지인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혀있었던지라 제멋에 겨워 자기 견해를 력설하다가 문득 말머리를 돌리였다.

《라선생의 출생년대는 언제던가요?》

《1901년생이지요.》

《아!》

그는 자기 이마를 탁 치며 환성을 올리였다.

《역시 신통합니다.》

라운규는 물론 동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후까가와는 자기의 유식을 뽐낼 기회가 온것이 기쁘다는듯이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내리엮었다.

《미국의 헐리우드왕이라고 불리우는 클라크 케이블을 아시겠지요? 영화 <그린사막>의 주인공말입니다. 그가 바로 1901년생이지요. 그리고 로씨야의 유명한 연출가 돈스꼬이도 1901년생, 미국의 만화연출가 월트 디즈니, 이딸리아의 배우이며 연출가인 빅또리오 데 씨까도 1901년생이랍니다. 그런데 조선의 유명한 영화인인 라선생도 역시 1901년생이고보면 참으로 1901년이야말로 영화세계에서 범상치 않은 해라고 할수 있지 않습니까. <인물은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타고나야 한다>는 그리스의 격언이 참으로 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까가와는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듯 머리를 갑삭거리였다. 그의 온몸에서는 자기의 박식을 시위하였다는 자부심이 차넘치고있었다.

차를 마시며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라운규가 조용히 차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에는 모파쌍의 <비게덩어리>를 영화로 만든 로씨야의 유명한 연출가 미하일 롬도 1901년생인데요.》

《아, 그렇습니까?》

후까가와의 눈이 커졌다.

《만약 일본의 유명한 연출가 고쇼 헤이노스께와 녀배우 구리시마 수미꼬가 1년 먼저 출생하고 로씨야의 풍자영화연출가 메드베드낀과 에스빠냐의 유명한 연출가 부류엘이 1년후에 태여났다면 아마 재사다출년설을 주장하는 후까가와군의 <인물목록>이 더 화려하게 장식되였을건데 참 아쉽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들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후까가와만은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경탄의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고보면 나의 세계인물목록은 라선생에게 빼앗긴셈이 되였군요.》

결국 라운규앞에서 후까가와는 항복한셈이였다.

《그때의 일이 얼마나 지울수 없는 인상으로 남았던지 후까가와는 두고두고 라운규선생을 다재다능하고 박식한 조선의 영화재사로 회상하였답니다.》

외국인인 요시꼬의 입에서 옛 은사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니 예봉의 마음은 더욱 감개무량하였다.

민족영화를 위하여 일생 피투성이싸움을 하여온 그가 끝내 아리랑고개를 넘지 못하고 이름없는 산야에 묻힌것을 생각하면 한스럽기 그지없었다. 일제의 가혹한 검열제도때문에 자기가 하고싶은 1%의 말한마디를 위하여 99%의 창작적사색과 열정, 지혜를 바쳐 영화속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고심참담의 길에서 그의 육체와 정신은 지칠대로 지쳤고 마침내는 식민지영화인의 가슴저미는 통한속에서 기구한 한생을 마쳤던것이다.

그들의 회고담을 들으며 나는 나대로 라운규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라운규-그는 재능있는 영화작가이고 연출가이며 유능한 배우로서 민족이 낳은 영화재사임에 틀림없다. 영화작가로서의 그의 특징을 한마디로 찍는다면 당대사회의 모순과 첨예한 갈등이 무엇인가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인민들의 생활과 진실하게 결부하여 반영하는 창작적재능이라고 할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항상 갈등이 명백하고 격동적이다. 《아리랑》에서 형상된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과 최영진과 오기호의 노려보는 얼굴, 최영진에게서 쫓겨 달아나는 오기호, 아라비아상인놈과 나그네와의 격투… 계급적대립이 얼마나 명확하게 안겨오는 형상들인가.

영화연출가로서의 그의 특징은 그가 활용한 영화적수법의 다양성을 두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아리랑》, 《사랑을 찾아서》에서 절절하게 안겨오는 서사적운률과 격동성의 맥박, 《들쥐》, 《금붕어》에서 터져나오는 경쾌하고도 풍자적인 웃음, 그런가 하면 《풍운아》, 《벙어리 삼룡이》, 《잘 있거라》, 《사나이》에서 연연한 애수속에 울려나오는 철학적고백…

참으로 그는 대조와 비유, 음악적선률 등을 능숙하게 배합하면서 연출가자신이 사건속에 직접 뛰여들어가 주인공과 함께 격동적으로 호흡하면서 정열이 맥박치는 화면을 창조하는 열정의 예술인이였다. 일단 쓴 영화대본은 그의 머리속에서 벌써 화면으로 련결되여있었고 배우의 세밀한 동작까지를 포함한 영화의 전모가 명확하게 완성되여있었다. 그러기에 촬영기 1대에 은판지 몇장으로 《아리랑》촬영을 단 14일만에 끝내는 기적을 창조하였던것이다.

그는 또한 어떠한 성격과 나이의 역이라도 능숙하게 형상하는 만능의 배우이기도 하였다.

《심청》의 심봉사역으로부터 《아리랑》의 최영진, 《풍운아》의 박 니꼴라이, 《임자없는 나루배》의 춘삼… 그는 자기가 썼거나 연출한 거의 모든 작품의 주역을 자신이 담당하여 훌륭한 성격을 창조하였었다. 해방전 우리 나라 영화사상 라운규만큼 영화를 만든 영화인은 없었다.

사실 민족수난의 암운이 칠칠이 드리웠던 그 시기에 민족영화의 대표작이라고 할수 있는 《아리랑》을 비롯하여 《풍운아》, 《잘 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개화당이문》, 《임자없는 나루배》, 《아리랑후편》, 《아리랑 3편》, 《오몽녀》 등 수십편의 영화를 창작하여 민족영화사에 기여한 라운규의 공적은 경이적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마다에서 민족적, 계급적울분을 터뜨리며 아리랑고개를 넘자고 아무리 피타게 웨쳤어도 그자신부터 그 고개를 넘을수 있는 길을 알지 못했고 또 찾지도 못했으니 그의 웨침은 그저 시대에 도전하는 반항아의 절통하고 목메인 항거의 메아리로 그치고말았던것이다. 여기에 바로 라운규의 고민이 있고 비극이 있는것이다.

금강석도 태양의 빛을 받아야 번쩍일수 있듯이 재사도 걸출한 수령의 손길을 받아야만 그 재능을 활짝 꽃피울수 있는것이다.

만약 라운규가 일찌기 위대한 수령님의 손길을 받을수만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의 인생궤도는 달리 뻗었을지 모른다. 시대의 반항아, 풍운아가 아니라 총을 쥐고 아리랑고개를 넘는 혁명가 - 예술인으로 될수도 있었을것이다. 혁명시인 김혁이처럼…

이런 생각에 잠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듯 문예봉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라운규선생과 같은 아까운분이 시대를 잘못 만나 자기의 재능을 활짝 펴보지 못하고 스러진것을 생각하면 정말 통분합니다. 만약 그가 오늘과 같이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사랑의 손길을 받았다면 정말 큰일을 해놓았을것입니다. 지난날 그와 같이 연예계에서 고생을 하던 숱한 예술인들이 수령님품에 안겨 주체영화의 대화원을 가꾸어나가는 인재들로 자라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은 진실이였다. 내앞에 앉아있는 문예봉을 비롯하여 김련실, 김선영, 강홍식, 심영, 한진섭, 황철, 남궁련, 유경애, 문정복, 엄미화 등 수많은 유명무명의 예술인들이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품속에서 주체조선의 예술을 떠받들어나가는 거목들로 자라나지 않았는가.

아마 춘사 라운규가 살아있었더라면 이들의 전렬에 당당히 서있었을것이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많은것이 잊혀지기마련이다. 그가 파란곡절에 찬 영화인생을 마친지도 어느덧 반세기! 무정한 세월의 이끼속에 어느덧 가족들과 친지들, 동료들의 기억에서도 점차 그의 이름은 삭막해지고있었다.

그렇지만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께서만은 민족영화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잊지 않으시고 민족영화의 개척자로, 일본영화와 당당히 맞서 우리 민족의 슬기와 지혜를 빛내인 애국적예술인으로 높이 평가하시였으니 그는 로동당시대에 와서야 《아리랑》과 더불어 영생의 언덕에 오른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품속에서 영생을 얻은 라운규!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를 불우한 식민지영화인이라기보다 사후에 영생을 되찾은 행복한 영화인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역시 영생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대지에 자그마한 땀방울이라도 뿌렸을 때 태양의 빛에 의하여 발산되는 눈부신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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