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은막의 녀왕》-조선의 춘향이로

 

1930년대 중반기는 우리 나라 영화사의 견지에서 볼 때 무성영화시대로부터 유성영화시대에로 이행한 력사적시기라고 할수 있다.

주체10(1921)년 《월하의 맹세》로부터 막을 올린 무성영화는 근 15년간의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내놓아 우리 민족의 애국문화계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우리 민족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아리랑》을 비롯하여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잘 있거라》, 《류랑》, 《지하촌》, 《뿔빠진 황소》, 《암로》,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임자없는 나루배》…

이 진보적무성영화들은 일제통치하에 강요된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가능한껏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하였으며 은유적으로나 비유적수법으로라도 인민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고 애국주의정신을 심어주기 위한데로 지향되였었다.

그러나 무성영화시대가 순풍에 돛단것처럼 순탄하게 흐른것은 아니였다. 무성영화 한편한편을 창작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고행의 련속이라 할수 있었다.

출자주의 탐색, 자금과 필림의 부족, 일제의 무자비한 검열가위, 불비한 촬영기재, 배우들과 창작가들이 항시적으로 당해야 하는 기아와 병마…

오죽했으면 영화감독 리규환이가 어느 한 글에서 《조선영화제작은 고역에서 고역에로》라고 통탄하였겠는가.

그 고역속에서도 민족영화발전을 위하여 꾸준히 그리고 말없이 자신들을 바친 조선의 영화인들의 노력이 열매를 맺아 바야흐로 우리 나라에서도 유성영화시대가 도래하는 력사적사변이 이룩되였던것이다.

우리 나라의 첫 유성영화로는 《춘향전》이 선택되였다.

《춘향전》은 수백년간 구전되여오면서 다듬어지고 다듬어져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있고 그만큼 민족의 재보로 사랑하는 유명한 고전작품이다.

봉건적신분제도에 대한 강한 항거와 행복에 대한 우리 인민들의 소박한 념원 그리고 외유내강한 조선녀성의 아름다운 성격을 담은것으로 하여 민족적인 정취가 철철 흐르는 이 작품을 첫 유성영화로 택한 창작가들의 의도는 참으로 의미심장한것이였다.

당시는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독을 쓸대로 쓰면서 민족적인 모든것을 말살하려고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창작가들은 바로 이 엄혹한 시기에 온 민족이 다 알고 사랑하는 민족고전작품을 영화화하여 조선의 민족성을 과시함으로써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은근히 도전하려 했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를 둘러보면 이 시기에는 《조선팔경가》 , 《그네뛰는 처녀》 , 《목동과 처녀》 등을 비롯하여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자랑스럽게 노래하거나 민족적향취가 풍기는 생활을 경쾌하고 명랑한 선률에 담은 가요들이 수많이 창작되고있었다.

이 역시 수려한 조국산천과 민족의 아름다움을 더욱 높이 자랑하는것으로써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도전해나선 창작가들의 투쟁심리의 반영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이런 사회적배경속에서 《춘향전》이 우리 나라의 첫 유성영화로서의 고고성을 울리려 하였으니 이 작품에 대한 창작가들의 관심과 열의는 대단하였다.

영화대본은 진보적인 연극단체 《토월회》를 이끌고있던 박승희가 맡아 한달내에 완성하였다.

연출은 리명우가 담당하였다.

연출을 맡은 리명우와 온 창작집단의 관심은 춘향역을 누구에게 맡길것인가 하는 문제에 쏠리였다.

춘향은 송죽같은 절개와 지조를 지닌 외유내강한 조선녀인의 전형이다. 그러니 조선녀성의 부드러움과 아련함, 우아함과 현숙미를 다 갖춘 그야말로 아릿다운 절대가인이여야 했다.

과연 어느 녀배우가 이런 요구에 합당할것인가.

리명우는 우선 영화나 연극계의 녀배우들을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신일선?…

그는 도리머리를 하였다.

귀엽고 복스러운 얼굴이기는 하나 조선녀성의 부드러움과 현숙미가 엿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아리랑》이후 부호가의 후실로, 기생으로 염문을 파다하게 달고다니는터여서 춘향의 성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차홍녀?…

리명우는 연극무대에서 혜성적존재로 알려진 차홍녀의 자태를 머리속에 그려보았다.

조선민족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것으로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엇서나가던 시대의 흐름을 타고 당시 연극계에서는 《춘향전》을 무대에 올리였었다.

연극 《춘향전》이 동양극장에서 첫 막을 올리였을 때 그 주인공역을 수행한것이 바로 차홍녀였다.

리도령역에는 황철, 방자역에는 심영, 향단역에는 김련실, 춘향 어머니역에는 김선초로서 당대의 명배우들이 다 출연하다싶이하였다.

이들에 비하여 19살의 차홍녀는 너무도 애어린 신인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었다. 차분하고도 진실한 연기와 매혹적인 용모로 그는 일약 연극계의 혜성으로 솟아올랐다.

어느 한 잡지에서는 차홍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인테리풍의 안존하면서도 리지적인 미의 요소를 가진 그는 아무래도 혜성적출연이 아니라 할수 없었다.》

그는 춘향의 역으로 온 극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감옥에서 그가 피타는 목소리로 리도령을 부르며 자기 마음을 터놓을 때 극단의 원로인 리기세까지도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며 오래간만에 진짜 연극을 보았다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리명우는 왜 그런지 만족이 안갔다. 차홍녀는 역시 리지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좀 더 아련하고 부드러운 조선형의 미를 찾을수는 없을가?

그야말로 조선의 춘향이다운 적역을 골라 조선녀인의 아름다움을 만방에 떨치고싶은 리명우였다. 그만큼 그의 포부와 창조적열정은 대단하였다.

그는 연예계의 울타리를 벗어나 큰 판도에서 찾아보리라 결심하고 13도를 대상으로 춘향역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시 적임자를 고르지 못하였다.

이때 그의 고충을 헤아린 춘사 라운규가 문수일의 딸 예봉이가 어떤가고 건의하여왔다.

라운규의 튕김을 받는 순간 강렬한 충격이 그의 머리를 번쩍 하고 후려쳤다.

(옳다! 바로 예봉이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끓기 시작하였다. 《임자없는 나루배》에 출연하였던 예봉의 자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련하고 청초하면서도 현숙미가 풍기는 우아한 모습! 부드러움과 기품이 조화롭게 어울린 그야말로 조선형의 미였다. 그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시 춘사다운 감각과 시각이거던!)

창작적흥분으로 가슴이 달아오른 그는 그길로 촬영소로 달려나갔다. 그의 제의를 영화인들모두가 지지하여나섰다.

그리하여 림선규는 당분간 병치료하러 고향 시골로 내려가고 문예봉이만이 《춘향전》촬영을 위하여 서울에 남게 되였다.

 

*          *

 

남행렬차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기세좋게 달리고있다. 차창밖으로는 봄빛짙은 들판들이 연줄연줄 펼쳐지고있다. 렬차의 차창가에 앉아 그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예봉은 춘향의 역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뜻밖에도 춘향역을 맡고보니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아름답고 효성이 지극한, 그러면서도 지조와 절개가 송죽같은 조선의 춘향이를 내가 훌륭히 형상해낼수 있을가?

자신심보다도 겁부터 앞서는것을 어쩔수 없다. 매번 배역을 맡을때마다 이런 심리에 빠지군 하지만 춘향이라니 더욱 근심이 많다. 아직은 《임자없는 나루배》와 《무지개》등 몇편의 영화에 출연해본데 불과한 자기였다. 그에 비해 상대역들은 만만치 않은 명배우들이였다.

리도령역에는 미남으로 이름난 한일송이고 향단역에는 로재신, 방자역에는 리종철 기타 김련실, 김영숙 등 영화계의 중진들이였다.

연극 《춘향전》에서 향단의 역을 맡았던 김련실이만 보더라도 주체15(1926)년 녀학교시절에 벌써 라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멋지게 불러 무성영화의 견인력을 높이는데 적극 기여하였으며 《세 동무》, 《철인도》, 《임자없는 나루배》, 《종로》, 《홍길동전》 등 11편의 영화에 출연한 로련한 배우였다. 라운규와 함께 무성영화의 고행길을 같이 걸어온 그는 당시 녀배우들의 어머니격이라고 불리울만큼 영화출연, 무대출연의 경력이 오래고 연기가 능란한 당대의 인기배우였다.

《임자없는 나루배》에 출연할 때와는 달리 그동안 예술적면에서 퍼그나 눈이 트고 성장한 예봉은 얼굴모습 하나로 춘향의 성격을 살릴수 없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춘향전》의 대목들을 회고해보기도 하고 《렬녀 춘향전》을 비롯한 책들을 닥치는대로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런 때에 한 연극단이 남원으로 순회공연을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예봉은 자기도 그들을 따라 남원으로 가보리라 작정하였다. 춘향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남원에 직접 가서 오작교도 건너보고 광한루에도 올라가 당시의 기분에 젖어보고싶었다. 그러면 당시의 춘향의 심리와 성격을 더 잘 체험할수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극단성원들과 함께 남행렬차에 몸을 실었던것이다.

남원에 도착한 극단은 며칠간 공연을 한 뒤 어느 하루를 택하여 유적구경을 떠났다. 예봉도 그들속에 섞이였다.

실버들 푸르른 봄날이라 오작교와 광한루는 따스한 봄볕속에 묻히여 조을듯이 고요하였다. 춘향이와 리도령이 건넜다는 오작교도 밟아보고 그들이 꿈결같이 만났다는 광한루에도 올라 예봉은 아득히 흘러간 그들의 옛자취를 더듬었다. 고색창연한 광한루기둥마다에도, 잡초가 돋은 오작교의 포석 하나하나에도 춘향과 리도령의 애틋한 사랑의 자취가 어려있는듯 보는것마다가 가슴을 설레게 하고 깊은 정회를 자아냈다.

옥에 갇혀 긴긴밤을 새울 때 춘향의 눈앞에는 아마도 이 봄날의 광한루와 오작교가 얼른거렸으리라. 떠난 님의 자취를 따라 그의 마음도 훨훨 날아만갔으려니 얼마나 애달픈 그리움에 젖어있었을것인가. 춘향이 피로 쓴듯 한 편지의 애끓는 구절구절이 저절로 가슴을 치는것이였다.

그날 극단배우들과 예봉은 광한루와 오작교를 배경으로 사진까지 찍었다.

기약없는 방랑극단의 고달픔을 짙어가는 이 봄날의 하루만이라도 풀어보려고 그들은 풀밭에 둘러앉아 간단한 다과회를 열었다.

오래간만에 자연에 묻히여 만시름을 다 풀어놓고 잔들을 기울이고있는데 일본경찰놈 하나가 나타났다.

경관모자를 삐딱하게 쓴 그놈은 배우들에게로 다가오더니 녀배우들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같이 가자는것이였다.

그중 나이많은 한 배우가 뭣때문인가고 물었다.

경관놈은 틀진 소리로 말하였다.

《오늘이 우리 경찰서장님 생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녀배우들이 노래도 하고 춤도 춰주면서 즐겁게 해주어야 한단 말이야.》

놈은 어서 일어나라고 녀배우들을 독촉하며 옆에 앉아있던 예봉의 손을 무작정 잡아일쿠려 했다,

엉겁결에 손을 잡히운 예봉은 얼굴이 새파래져 경관놈을 탁 뿌리쳤다. 말없이 쏘아보는 예봉의 서늘한 눈초리에 경관놈은 약간 주춤하며 손을 내렸다. 그러나 금시 눈알이 꼿꼿해졌다. 대일본제국의 경관에게 감히?… 순식간에 분위기가 긴장해졌다.

이런 분위기를 눙치려고 그중 숫기가 좋은 한 녀배우가 웃음띤 얼굴로 경관놈앞에 다가갔다.

《우린 연극배우들인지라 춤과 노래를 잘할줄 모릅니다. 그러니…》

허나 그 녀배우는 말을 끝맺을수가 없었다. 경관놈의 무지한 주먹이 그의 뺨으로 날아들었던것이다.

《무슨 말이나 많은가? 서장님분부면 다지. 배우나 기생이나 같구 같지 뭐야. 춤이나 추고 노래나 하는것들이…》

예봉은 참을수가 없었다. 그는 놈에게 대들었다.

《사람을 깔보지 말아요. 우린 기생이나 술집잡부가 아니란 말이예요.》

놈을 쏘아보는 예봉의 눈에는 증오의 빛이 서려있었다. 다른 녀배우들도 분격하여 자기들은 예술인이지 기생이 아니라고, 그러니 절대로 갈수 없다고 뻗대였다.

경관놈은 록록치 않은 녀배우들의 기세에 그만 눌리운 상이였다. 얼굴이 수수떡함지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씩씩대다가 김빠진 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두고보자.》

경관놈은 사라졌으나 배우들은 좀전의 명랑한 분위기를 되살릴수 없었다. 녀배우들이 침울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나니 자연히 다과회도 흐지부지되였다. 하루만이라도 근심없이 유쾌하게 자연을 즐기자던노릇이 그만 일본경관놈때문에 망쳐졌던것이다.

그런데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밤 2시경, 한창 단잠들을 자는데 경관 4~5명이 려관에 들이닥쳤다.

놈들은 배우들의 침실에 뛰여들어 그들을 마구 란타하며 손에 오라를 지웠다. 배우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러는가고 항거하자 놈들은 《불경죄》에 《불온사상류포죄》라고 뇌까렸다.

그이튿날부터 취조가 시작되였다.

예봉을 불러낸 경관놈은 처음부터 위협조로 나왔다.

《왜 잡혀왔는지 알겠는가?》

《모르겠어요.》

놈은 책상을 탕하고 내리쳤다.

《불경죄란 말이야, 불경죄!》

《불경죄요?》

《그렇단 말이다. 서장님이 오라면 곱다랗게 올것이지 왜 불손하게 맞서는가?》

《맞서다니요? 이미 다 말하지 않았나요. 우린 기생이 아니라 연극배우들이여서 춤출줄 모른다구요. 노래는 더 잘 못부르지요.》

《그게 바로 불손한 태도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것이지. 일본법에 맞서면 어떻게 되는줄 알아?》

경관놈은 눈을 부라리며 독을 썼다.

예봉은 어처구니없어 입을 다물고말았다. 조선인이라고 함부로 걸고드는 행위가 역하고 가증스러워 말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서장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공연히 트집을 걸며 보복을 하는것이 뻔한데 놈들과 사리를 따진다는것자체가 어리석은 일인것이였다.

그런데 경관놈의 입에서는 더 험악한 소리가 튀여나왔다.

《불온사상을 왜 선전했는가?》

《예?》

놈의 뚱딴지같은 질문에 예봉은 고개를 버쩍 들었다.

불온사상이라니?…

예봉의 놀란 표정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경관놈은 능청스런 웃음을 지으며 황당한 근거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연극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주인집녀자의 구박을 받아오면서도 참고참던 부엌데기가 더는 견딜수 없어 삯전이라고 준 돈을 땅바닥에 쥐여뿌리며 항거한다.

《세상에서 돈이면 단가 해요? 나도 사람이란 말이예요.》

이때 조명이 붉은색으로 그 녀자의 얼굴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 장면을 놓고 경관놈은 우선 일본천황이 만든 돈을 불손하게 내동댕이쳤으니 일본천황과 일본국가에 대한 반항이라는것, 또한 얼굴에 붉은 조명을 특별히 비친것은 적색사상을 은근히 강조하고 선전하였다는것이다. 너무도 터무니없는 트집이여서 예봉은 말이 다 안나왔다.

놈과 갑론을박하고싶지도 않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걸고드는 일본놈들의 보복심리는 이렇듯 유치하면서도 지독한것이였다.

《그 부엌데기역을 네가 했지?》

《아니예요.》

《그건 상관없어. 누가 했든 불온극단에 속해있는것만으로도 큰 죄가 되니까.》

서류철을 탁 덮으며 경관놈은 히쭉 웃었다. 아마도 사람들의 운명을 마구 쥐고 흔들수 있는 권력의 쾌감을 새삼스레 느낀듯 했다.

결국 연극단의 공연은 중지되고 10일간이나 류치장에서 시달리는 신세가 되였다. 경찰서장놈의 생일놀이에 안 갔다는 단 하나의 리유로 놈들은 이렇듯 지독한 보복을 가해왔던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주인노릇을 하는 일제의 날강도적횡포성은 이처럼 도를 넘는것이였다.

열흘후에야 배우들은 놈들의 손에서 풀려나왔다. 극단은 숱한 빚만 지고 알몸뚱이거지신세가 되여 서울로 돌아왔다. 예봉에게는 너무도 귀중한 체험이였다. 일본경관놈들에 대한 예봉의 증오는 곧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반항심으로 굳어져가고있었던것이다.

 

*          *

 

영화촬영 전기간 예봉의 가슴을 울려준것은 소녀시절 그에게 춘향에 대한 이야기를 옛말삼아 들려주던 할아버지의 음성이였다.

《이름은 춘향이요, 효행은 무쌍이요, 장중보옥같이 길러내니 인자함이 기린이라. 이때 사또 자제 리도령은 이팔이요…》

할아버지의 인자하신 그 음성이 감미로운 자장가의 선률마냥 끝없이 실려와 춘향의 아름다운 넋을 그의 가슴속에 심어주는듯 했다. 춘향이처럼 되기를 기원하던 할아버지의 사려깊은 눈빛! 그 눈빛에 실린 사랑과 소원을 음미해보느라면 자신도 어느덧 춘향의 심리세계에로 깊숙이 이끌려가는듯…

춘향의 기쁨도 그의 기쁨이요, 춘향의 슬픔도 그의 슬픔이였다.

춘향이가 리몽룡과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에서 예봉은 림선규와 사랑을 나누던 진주 촉석루를 생각하였다.

달빛을 받아 황홀하게 일렁이던 남강의 물결, 론개의 넋이 살아숨쉬는듯 하던 의암을 바라보며 애국의 마음을 심어주던 림선규의 열정의 목소리…

춘향과 리몽룡의 리별장면을 촬영할 때 예봉의 눈앞에는 림선규와 헤여져 피눈물을 흘리던 방랑극단의 무대들이 선히 밟혀왔다. 얼마나 그립고 애타던 나날들이였던가. 그 시절을 떠올리자 촬영기앞이라는 생각은 뒤전으로 밀려나고 저절로 눈물이 샘솟듯 하는것이였다. 그때의 예봉의 슬픔과 비애는 리몽룡을 리별한 춘향의 슬픔과 다를바 없었던것이다.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항거-그것은 예봉이 너무도 처절하게 체험한 생활이라 할수 있었다.

림선규가 병이 있고 재력이 없다고 그리도 혼사를 반대하던 아버지의 작태! 죽음을 각오하고 맞섰던 그날의 분노가 되살아났다. 게다가 그의 가슴을 더욱 격동시킨것은 남원에서 겪은 일본경관놈들의 행위였다. 제놈들의 더러운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없는 죄까지 들씌워 류치장에 가두었던 놈들의 행위야말로 변학도의 횡포와 무엇이 다른가. 일본놈들에 대한 예봉의 증오는 춘향의 분노로 환원되여 불줄기처럼 터져올랐다.

이렇게 놓고보면 예봉이가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행로와 생활체험이 그대로 춘향이 역의 밑거름이 되였다고 할수 있다. 그가 걸음걸음 겪은 수난에 찬 생활체험들이 앙금이 되고 응어리가 되여 생동한 연기로 재현되였던것이다.

예봉은 영화촬영 전기간 깊은 자감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는 연기를 하였다기보다 자기가 체험한 심리를 그대로 진실하게 펼쳐보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문예봉의 고유한 연기적특징은 인물의 복잡한 심리세계를 소박하고도 섬세하게 드러낼줄 아는 내면적인 연기솜씨라고 할수 있다. 바로 그 특징적인 연기술이 이 《춘향전》에서 남김없이 선명하게 발휘되였으며 천성적이라고 할수 있는 부드럽고 선량한 성격미와 자연스럽게 조화되여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상적으로 그려보던 조선의 춘향이가 은막속에 실물로 태여났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30년대에 문예봉이 창조한 춘향의 성격은 그의 실생활로부터 흘러나온 체험의 결정물이라고도 할수 있을것이다.

 

*           *

 

나는 우리 나라의 첫 유성영화 《춘향전》을 보지 못한 새세대이다.

그러나 주체69(1980)년에 각색된 《춘향전》은 그야말로 깊은 감명속에 보았었다.

사랑가의 은은한 선률속에 천연색으로 펼쳐지는 춘향과 리몽룡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 매 화면마다 흐르는 고상한 정서와 우아한 민족생활의 향취는 사람들을 푹 취하게 만들었다.

나의 이 속생각을 짐작한듯 문예봉이 말하였다.

《아마 선생도 현대의 <춘향전>을 보셨겠지만 첫 유성영화로 만들어졌던 <춘향전>과는 하늘과 땅차이라 해야 할것입니다. 평생을 은막과 함께 살아온 제가 체험한바에 의하면 명작이란 결코 저절로 태여나는것이 아니라는것입니다. 시대가 명작을 낳는다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천재적인 령도가 있어야 명작이 태여날수 있다고 저는 단언합니다.

지금의 <춘향전>이 력사물영화의 본보기로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있는것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세심한 지도를 떼여놓고는 결코 생각할수 없지요. 이것은 내가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엄연한 생활의 진실입니다.

그이께서는 이 작품 하나를 위해서만도 수십차례의 가르치심을 주시였고 배우선발로부터 물질기술적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다 풀어주시였습니다. 작품의 종자는 무엇이며 춘향과 리도령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것인가, 화면의 배치와 감정조직 지어는 인물의 대사 한마디에 이르기까지 정말 창작가들과 무릎을 마주하시고 하나하나 일깨워주다싶이하시였지요. 물론 영화자막에는 숱한 창작가들과 배우들의 이름이 올랐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창조자는 친애하는 그이이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허나 그이께서는 작품의 성과를 모두 우리 창조집단에 돌리셨어요. 나이관계로 나는 리도령의 어머니역을 맡았지만 창작 전기간 내내 흥분상태에 있었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아득히 흘러간 옛시절에 고생스럽게 첫 유성영화의 닻을 올리던 때가 생각키워서였지요.》

문예봉의 얼굴에는 첫 유성영화 《춘향전》을 민족영화의 얼굴로 만들어보려고 고심하던 그때의 정경이 되살아난듯 깊은 감회에 젖어있었다.

이때 그저 묵묵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만있던 요시꼬가 큰눈을 빛내이며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나도 문선생의 <춘향전>을 직접 본 사람입니다. <너와 나>의 촬영차로 서울에 갔을 때 문선생이 출연한 영화를 비롯해서 숱한 조선영화들을 보았는데 <춘향전>과 <수업료>가 제일 인상적이더군요. <수업료>를 보면서는 어찌나 울었던지…》

사실 요시꼬는 《춘향전》과 《수업료》등의 영화들을 보면서 조선의 민족영화에 대하여 깊은 리해를 가지였고 감탄도 했었다.

특히 《은막의 녀왕》으로 불리우던 문예봉에 대해 동업자로서의 특별한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가 출연한 《춘향전》을 보고서는 그만 넋을 잃고말았다.

우아하고 아릿답고 그러면서도 현숙한 기품이 엿보이는 청초한 조선미인의 전형을 보는듯 하여 속으로 얼마나 감탄했던가.

그가 잘 아는 한 일본인청년은 《춘향전》을 보고는 춘향의 모습에 매혹되여 밤새 잠을 다 못 잤다고 실토한바도 있었다. 사실 그때 예봉의 자태에 반한것은 비단 그 일본인청년뿐만이 아니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예봉을 선망하였고 그에 대한 풍문이 전설처럼 나돌았다.

지금도 뭇사람들을 현혹시키던 왕년의 모습이 스러지지 않은 문예봉이였다.

《문선생은 이제라도 분장만 잘하면 그때의 춘향이 모습을 그대로 되살릴것 같습니다.》

요시꼬의 말에 우리 셋은 다같이 웃었다.

《그래요?》

《그렇지 않구요. 지금도 내 기억에는 문선생이 리도령과 <러부신>하던 장면이 생생한데요 뭐. 참 좋더군요.》

어떤 장면을 념두에 두었을가? 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여 예봉을 바라보았다.

《아, 식사장면 말이군요. 참 사연있는 장면이지요.》

문예봉은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춘향전》촬영당시 리명우를 비롯한 제작단성원들이 제일 고심한 문제는 춘향과 리도령의 사랑을 어떻게 조선적인 맛이 나게 형상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당시에는 서방영화들에 대한 환상이 많은 때여서 그들의 연기를 숭상하는것이 하나의 류행처럼 되고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영화인들은 사랑장면도 사나이가 녀인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금시 죽어가는 소리로 애걸복걸하거나 두 련인이 포옹하든가 아니면 마라손경주하듯 바다가를 냅다달리는 서방식이라야 때벗이한 형상으로 인정하고있었다.

그러나 그런 서방식으로는 형상하지 말자는것이 《춘향전》창작집단의 일치한 견해였다.

서방식형상은 조선식이 아니여서 춘향과 리도령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뿐만아니라 관중들의 구미에도 맞지 않을것이다. 철저히 조선적인 맛이 나는 조선식으로 하자! 이것이 리명우를 비롯한 창작가들의 구호였다. 그러나 실지 형상단계에서 그것은 그리 헐한 일이 아니였기에 창작가들의 고심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렇게저렇게 론의가 많을 때 연극계의 원로라고 할수 있는 리기세가 다음과 같은 형상방안을 내놓았다.

춘향과 리도령을 상앞에 마주앉아 식사를 시키되 서로 권하면서 밥 한숟갈을 춘향의 입에 가져다대면 춘향이 수줍어하며 받아먹게 하자는것이였다.

창작가들전원이 환성을 올리였다.

그리하여 부용당에서 춘향과 리도령이 밥상에 마주앉아 정을 나누는 장면을 촬영하였는데 이 장면에서 문예봉이 수줍음이 뒤엉킨 사랑의 감정을 내면적인 심리로 잘 형상하여 성공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이 장면은 조선적인 맛이 나는 사랑장면으로 관중들의 대호평을 받았다.

《그때는 정말 영화를 잘 만들어보자고 모든 사람들이 지혜와 힘을 다 합쳤댔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가지 의견을 내놓아 찬성을 받았지요.

유년시절 아버지 문수일이 서모를 데리고 집에 내려왔을 때 토방우에 그들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있던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이상한 충격을 받았던겁니다. 그들사이가 너무도 가깝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가슴을 치면서 어머니가 막 불쌍했거든요.

그때의 경우를 생각해서 나는 춘향의 집 퇴마루에 춘향과 리도령의 갖신이 가지런히 놓인 장면을 삽입하면 그들의 깊은 사랑이 말없이도 관중들에게 더 잘 표현되리라고 주장했댔습니다.》

《생각납니다. 조선식퇴마루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두컬레의 신발이였지요. 영화적으로 성공한 세부라고 생각했댔습니다. 근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기억속에 있는것을 보면 참으로 성공장면이라고 할수 있지요. 은막과 더불어 력사에 길이 남는다는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가요?》

요시꼬가 감동깊이 하는 말이였다.

《물론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때의 형상들이 설익고 유치한 점들이 없은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 민족적인것을 살리려고 애썼던 당시 창작가들의 고심과 탐구의 자취가 어려있었다는 점에서는 평가할만 한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예봉의 말은 옳은것이였다.

당시로 말하면 우리 말과 글까지 빼앗고 우리 민족자체를 동화시키려고 일제가 발악하고있던 때였다.

조선의 모든것이 스러지던 그 시기 그래도 조선의 춘향이를 은막에 되살려내여 민족의 아름다움을 시위하려던 당대 창작가들의 의도에는 참으로 처절한 그 무엇이 흐르고있었다.

인민들의 마음은 말 없이도 서로 통하는 법이다. 창작가들의 이런 절통한 심리가 군중들에게 전달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춘향전》이 경성발성영화촬영소의 제1회 작품으로 첫 상영되였을 때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폭발적이였다.

물론 영화에 결함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처음으로 만들어진 유성영화이다보니 배우들의 입놀림과 대사가 잘 맞지 않는 화면들도 있었고 변사의 해설을 도입하면서 대사를 될수록 넣지 않는 방향에서 제작되였다. 또한 화면음악을 쓰면서 양악기를 썼다든가 시대적환경과 배경에 맞지 않게 전선대가 보이기도 하고 양옥집이 나타나기도 했다. 생활적인 전제를 잘 깔아주지 못하고 돌발적으로 결과를 강조한다든가 영화적인 수법보다도 무대적인 특성이 나타나는것으로 하여 일부 비평가들의 론의거리로 된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관중들은 그런것에 개의치 않았다. 《춘향전》을 통하여 민족적인 정취를 마음껏 호흡하는 그것만으로도 관중들은 대만족이였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춘향의 모습이 은막에 비쳐졌을 때 관중들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야! 하고 환성을 올리였다.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부드럽고 은근한 조선녀성의 그 모습에 취하여 관중들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감각하지 못하고 춘향의 자취를 따라 울고웃으며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군 하였다.

춘향이 리도령과 리별할 때 영화관은 울음바다로 변하였고 암행어사로 된 리몽룡과 상봉할 때에는 손벽이 터져라 울리는 박수소리에 영화관이 떠나갈듯 하였다.

《춘향전》을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련일 초만원을 이루었고 대경사가 난것만큼이나 들끓었다. 반면에 일본영화나 눅거리련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텅텅 비다싶이하였다.

조선적인것에 대한 열렬한 호응! 이것은 조선을 짓밟은 일제에 대한 은페된 형태의 반항이였다.

유성영화 《춘향전》의 인기와 더불어 문예봉의 명성 또한 최절정에 올라섰다.

《조선영화의 백합꽃》으로 불리우던 그의 인기는 더욱더 상승되여 《은막의 녀왕》으로까지 떠받들리웠다.

문예봉은 한동안 공공장소와 네거리를 지나다니기가 어려울 지경이였다.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저저마다 그를 보겠다고 사방에서 욱 밀려들군 하였다.

《춘향이다!》

《과시 춘향이답게 생겼군!》

《실지 춘향이도 저렇게 생겼을가.》

《아니, 춘향이보다 더 고운것 같애.》

사람들이 너무나 그를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아 그는 외딴길로 다니거나 무더위삼복철에도 머리수건을 쓰고 다니기까지 하였다.

사람들의 이런 환대를 받을 때마다 문예봉은 목메이는 감격으로 가슴을 들먹이였다.

영화평론가들이 공정하게 평했듯이 향단역을 한 로재신이나 방자역을 맡은 리종철의 로숙한 연기에 비하여 문예봉자신의 연기가 특별히 두드러지게 빛난것은 아니였다.

그런데도 관중들이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것은 문예봉자신에 대한 찬사라기보다 오래간만에 가슴뻐근히 스미도록 맛보게 된 민족적정취에 대한 인민들의 눈물겨운 감사의 정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일제의 발굽밑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민족적인것에 대한 애타는 갈망, 그것을 되찾으려는 인민들의 숨길수 없는 의지, 이 모든 감정들이 바로 《춘향전》에 대한 폭발적인 열광으로 터져올랐던것이다.

인민들의 이런 감정을 뿌듯이 받아안으며 예봉은 라운규선생이 말하던 진정한 영화의 세계에 적으나마 발을 잠근것 같은 자기를 의식하며 행복감에 휩싸이는것이였다.

《임자없는 나루배》이후 《춘향전》을 전후로 하여 예봉은 《춘풍》, 《무지개》, 《아리랑고개》, 《장화홍련전》 등 여러 작품들에서 주인공역을 수행했지만 이번 작품에서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고심하지는 않았었다.

그저 영화를 만들어 돈을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많이 작용했다고 할가, 여하튼 창조적열의보다 직업의식이 많이 작용하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만큼 그 영화들에 대한 관중들의 반향역시 미적지근하였다.

허나 《춘향전》은 달랐다. 작품에 대한 열광적인 환호성은 대번에 예봉을 일약 조선의 춘향이로, 《은막의 녀왕》으로 올려세웠던것이다.

이를 통하여 예봉은 영화예술과 배우직업에 대하여 더욱더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였다.

영화는 결코 시시껄렁한 련애담이나 늘어놓고 배부른자들의 저속한 취미나 자극하는 오락물로 되여서는 안되는것이다.

민족의 토양우에서 인민들과 하나로 호흡하는 그런 영화만이 인민들의 사랑을 받을수 있고 그런 민족의 영화와 더불어 영화인으로서의 존재도 빛이 나는것이다.

《임자없는 나루배》나 《춘향전》을 통하여 예봉은 이것을 절감하였다. 민족영화발전에 몸바치려는 예봉의 결심은 이때 더한층 굳어졌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가혹한 세월은 그 귀중한 마음을 고스란히 지켜갈수 없게 하였으니 식민지영화인들이 걸어가는 창조의 길은 그야말로 가시덤불길이였다.

 

*          *

 

《춘향전》은 문예봉과 참으로 인연이 깊은 작품이다.

우리 나라 첫 유성영화의 춘향이로 분장한 이후 그는 장구한 조선영화사의 년대기속에 기록된 거의 모든 《춘향전》들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흔적을 남기였다.

나이관계로 리도령의 어머니역을 형상했지만 왕년의 청초한 춘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는 그의 은근하고 현숙미 풍기는 연기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예술영화 《은비녀》의 현지촬영을 위하여 일본에 갔을 때에도 숱한 동포들과 일본인들이 문예봉을 찾아와 해방전 《춘향전》을 감상했던 옛일들을 회상하며 깊은 감회들을 나누었다.

내가 알기에도 해방전 조선영화사상 그 보급과 인기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했던 작품은 《아리랑》과 《임자없는 나루배》 그리고 《춘향전》이였다.

이 영화들은 일본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까지 상영되여 민족영화의 얼과 기개를 시위하였다.

그 《춘향전》과 더불어 문예봉은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조선녀성의 상징인 춘향의 모습으로 깊이 아로새겨져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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