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류랑삼천리

 

진주 촉석루, 교교한 달빛이 어린 남강은 은빛금빛으로 일렁이며 이 강에 서린 민족의 얼과 기개에 대하여 말없이 하소하는듯 하다.

고요한 이 달밤에 촉석루에 오른 문예봉과 림선규는 하염없이 남강을 바라보고있었다.

나라를 지켜 순국한 애국명장들과 백성들의 기개가 지금도 어려있는듯 한 남강, 그래서 달빛이 흐르는 소연한 남강의 물소리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음과 통탄의 절절한 하소연으로 들리는것인가.

처절한 감정에 싸여있던 림선규는 조용히 너럭바위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바위가 바로 의암이요.》

《의기 론개가 적장을 안고 몸을 던졌다는…》

《그렇소. 의병장 김천일은 저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고 기생이던 론개까지 적장놈을 강물에 처박아 조선사람의 넋을 시위하였소. 그런데 왜놈들에게 끝내 나라를 빼앗겼으니 아마도 그 원한때문에 그들의 넋은 지금도 잠들지 못하고 이곳을 배회할거요.》

촉석루의 기둥을 쓰다듬는 림선규의 손은 떨리고있었다.

림선규의 울분과 절통한 심정은 그대로 예봉에게 옮겨져 그도 슬펐고 서러웠다. 적장을 그러안고 강물속에 몸을 던질 때 론개는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가? 자기의 부모를? 아니면 김천일의병장과 최경회 경상우도병사를? 아니 나라를 위해 한몸 바칠수 있게 되였다는 자랑스러움과 통쾌감이 아니였을가. 예봉의 생각은 끝없이 이어져갔다.

요즈음 예봉은 점점 생각깊은 녀인으로 변해가고있었다. 림선규의 영향이였다. 림선규와 교제할수록 예봉은 배우지 못하고 아는것이 별로 없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라운규에게서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진지한 태도를 배웠고 또 경탄하기도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그는 아버지벌되는 스승이였다. 그앞에서 자기는 너무도 어린 철부지라 자신의 수준을 두고 부끄럽다거나 창피한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며 그저 무턱대고 따르고 배우자는 열망뿐이였다.

그러나 림선규앞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한주일에 한편씩 대본을 써낸다는 그 재능도 재능이려니와 극단의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박식앞에서 예봉은 주눅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도 아는것이 없었고 지적면에서 초라하였다. 사실 책 한권 변변히 본것이 없지 않은가. 할아버지가 풍월로 들려주던 고전소설의 대목이나 익히고있는 자신을 돌이키며 그는 얼굴을 붉힐 때가 많았다. 하여 그는 림선규에게서 부지런히 책을 빌려다 읽었고 림선규 또한 그를 돕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예봉의 독서열은 무서웠다. 어떻게 하나 많이 배워 림선규와 짝지지 않으려는 승벽심으로 하여 그의 지적세계는 점차 풍부해져갔고 사색하는 힘도 자라고있었다. 나날이 변화되여가는 예봉을 바라보는것 또한 림선규의 즐거움이라 할수 있었다.

사랑으로 하여 서로 더 아름답게 가꾸어질 때 진정한 사랑의 보상을 받는다고 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사랑의 보상을 충분히 받으며 서로를 더욱 아름답게 키워가고있었다.

그러나 림선규의 내심에서는 보다 복잡한 그 무엇이 꿈틀거리고있었다.

이때까지 인정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예봉이 자기의 인정을 믿고 무작정 의탁하고 매달리는 그 처절한 심정을 눈물겹도록 감수하며 두어깨가 무거워짐을 날이 갈수록 절감하고있는 그였다. 저 숫되고 아련한 예봉을 내가 끝까지 지켜주고 일생을 책임져줄수 있을가? 때없이 그는 이런 질문을 자기자신에게 랭혹하게 들이댈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남모르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것이였다. 그것은 서서히 자기 몸을 갉아먹기 시작한 병마에 대한 공포때문이였다. 그는 페결핵을 앓고있었던것이다. 내 한몸도 어떻게 될지 가늠할수 없는 처지에서 예봉의 일생까지 망칠수 있다는 불안감은 항시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서리서리 감겨돌며 안정을 주지 않았다. 어느때인가 예봉에게도 그런 말을 조심히 비쳤다. 그러나 영 반응이 없었다. 예봉은 말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생긋 웃는것이였다.

《거기서 무슨 병을 앓든 나는 선규씨의 사람이예요. 병을 같이 앓으면 되지 않아요?》

림선규는 더 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 가슴을 지졌다.

그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였다. 예봉의 숫눈같이 깨끗한 순정을 받고있는 자신이 행복자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그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할것 같은 위구심을 지닌 자기는 또한 불행한 사나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시 사랑은 모든것을 이기는 법이다. 류랑삼천리길에 그들의 애정은 더욱더 알차게 무르익어갔다.

달밝은 촉석루의 이밤도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에서 즐기고싶어 이렇듯 남모르게 오른것이다.

림선규는 촉석루며 남강에 깃든 력사의 옛 자취에 대하여 감명깊게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이야기에 심취될수록 예봉은 무겁게 굼니는 남강의 물소리가 마치도 오늘을 통탄하는 론개의 한숨소리인양 느껴지였다. 아마도 일본놈들에게 빼앗긴 이 산천을 바라보며 그는 자기의 넋이 속절없이 스러졌다고 통곡하지나 않을가.

《선규씨, 누구든지 여기 촉석루에 와서는 진주라 천리길을 불러보고야 간다지요.》

《그럴거요. 왜놈들의 검열때문에 내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촉석루의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몸부림친다는것이 바로 의미심장한 구절이 아니요. 사람들은 가사뒤에 숨은 애국적인 감정을 너무도 통절히 느끼기에 진주라 천리길을 애창하는거요. 왜놈들이 아무리 날쳐도 인민들의 감정이야 어디 가겠소. 그래서 나도 앞으로는 김옥균이나 이름난 력사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력사극을 더 많이 창작할 결심이요.》

《그래요?》

《이번에 호남지방을 돌아봐서 알겠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 나라요. 그런데 그걸 다 빼앗기고 산설고 물설은 이역땅으로 쫓겨다니는 우리 민족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막 타드는것 같소.》

좀체로 격하는 성미가 아닌 림선규이지만 이런 때에는 언제나 흥분하여 목소리가 높아진다.

조용히, 그윽하게 빛나던 그의 눈빛에도 열기가 번뜩인다.

예봉은 살며시 촉석루기둥에 기대여섰다. 그리고 림선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가

    촉석루의 달빛만은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이 심사를

    위로할줄 왜 모르나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가

    남강가에 외로이 모래알을 만질적에

    아 타향살이 설음인줄

    내 어이 몰랐던가

 

노래를 부르는 예봉의 눈앞에는 그동안 쉬임없이 흐르고흐른 류랑삼천리길이 선하게 펼쳐졌다.

바다물이 사철 푸르고 맑아 경치가 절승경개였던 부산, 그러나 여름철에도 시원하고 겨울에도 따뜻한 이곳은 왜놈들과 돈있는자들의 피서지로 흥청대고있었다.

그다음에는 동래온천, 거기는 겨울에도 딸기와 부루쌈을 먹는 곳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왜놈들과 매국노들이 우글거렸다.

밤나무 우거지고 울산타령으로 유명한 울산을 거쳐 려수, 포항, 광주, 전주, 목포 등 바다가를 끼고 돌면돌수록 수려하고 살기 좋은 조국산천에 대하여 얼마나 경탄했던가. 바다기슭에 하루종일 앉아있어도 싫증을 몰랐다. 그러나 푸른 파도 철썩이는 아름다운 바다도 설레이는 송림도 예봉이네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였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즐길 사이도 없이 마을과 마을을 방랑하며 가두선전으로 사람들을 모았고 가설포안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언제나 가난하고 초라하기만 한 식민지조선의 연극인들! 가두마차에 실린 연극인들의 심장속에 아무리 빼앗긴 조국과 수난당한 민족에 대한 의분이 끓어넘친다 한들 무대우에서나마 한바탕 풀어볼수도 없었으니 관객들과의 숨박곡질과 검열당국과의 눈치놀음이 그들의 숙명이 아니였던가.

 

*       *

 

신의주에 자리잡고있는 《아리랑》카페의 뒤골방에서 예봉은 흐느껴울고있었다. 술집으로 팔려간 고모 문숙방이 생각나서였다. 녀성적인 매력과 아름다운 목청으로 인기를 끌던 마음씨고운 고모! 그 고모가 극단을 위하여 술집으로 간것이였다.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울던 고모의 정상이 어려와 예봉은 다시금 눈물을 씻었다.

생각해보면 왜놈이 원쑤였다.

당시 문수일의 《연극시장》은 민족적색채가 뚜렷하고 일정한 사상적경향이 있는 력사극들을 많이 공연하여 관중들의 인기를 모으고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한 일제검열기관은 검질기게 극단의 목을 조이기 시작하였다. 사전에 극대본을 검열해달라고 보내여도 질질 끌며 승인하지 않았고 빈번히 공연도중에 뛰여들어 중지호각을 불어대였다. 그리고 극장주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공연계약을 맺지 못하도록 훼방을 놀았다.

문수일이 경찰서로 불리워다니는 일이 빈번하였고 공연을 못하다나니 극단은 결국 경영난으로 파산되고말았던것이다. 지금 연극단은 다시금 지두환의 《연극사》에 속해 잔명을 유지하고있었다.

허나 문수일은 락심하여 주저앉지 않았다. 일본놈들이 보란듯이 다시 일떠서고야말겠다는 서슬푸른 결심이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있었다.

참으로 파산된 《연극시장》을 다시 일떠세우려는 문수일의 욕망은 무서운것이였다.

일본놈들때문에 자신이 속박된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열두번씩이나 소스라쳐 깨여날 지경이였다.

문수일의 이런 절박한 심정과 극단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문숙방이 자진하여 술집에 가기로 하고 몸값을 미리 받아왔던것이다.

결국 극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것이였다.

당장 돈이 목에 걸린 문수일로서는 녀동생의 이런 처사를 말릴 형편도 못되였다. 아마 그때로서는 오히려 고마와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러나 그 돈으로 극단을 살리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한 3 000원가량이 더 있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묵돈을 쥘수 있을가?

《아리랑》카페의 한 방에서 문수일은 자나깨나 이 생각에 침식을 잊은채 골똘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데… 나에게는 왜 행운이 차례지지 않을가?

바로 이런 때 카페주인이 귀가 솔깃해지는 소식을 가지고왔다.

평양에서 유곽을 경영하는 사람이 예봉을 셋째첩으로 주면 3 000원은 문제없이 지불하겠다는것이였다.

이 제의를 받은 문수일은 귀가 솔깃해졌으나 잠시 망설이였다. 아무리 돈 3 000원이 목에 걸렸어도 딸을 첩으로 판다는것이 아버지로서는 차마 못할짓이였다. 극단에서 기둥은 그가 되여야 할텐데… 이리저리 모대기던 그는 처 영자의 의향을 물었다. 영자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찬성이였다.

《부자집에 시집가서 본인 호강하니 좋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극단을 꾸리니 좋고 꿩먹고 알먹긴데 뭘 망설일게 있어요? 전번 대구에서처럼 흐지부지하지 말고 이번에는 꼭 성사시키라요.》

영자는 매서운 눈초리를 할깃거리며 침을 놓았다. 지금도 영자는 대구에서 김해 대지주의 아들을 놓친것을 생각하면 분하여 견딜수가 없었다.

그 대지주의 아들은 예봉이만 주면 극단을 꾸릴수 있는 돈을 대겠다고 하였다. 문수일과 영자는 마음이 동하여 예봉에게 말을 비쳤으나 예봉은 죽으면죽었지 남의 첩으로는 안 간다고 딱 거절하였다. 그래도 아비라고 문수일이 뒤로 알아보니 그놈은 지독한 아편쟁이였다. 아무리 돈이 귀해도 아편쟁이한테 딸을 줄수는 없었다. 그래서 문수일은 예봉을 더 강박하지 않고 대구를 뜨고말았던것이다.

그 일이 영자에게는 두고두고 불만이였다. 아편쟁이이면 어떻고 병신이면 어떻단 말인가. 딸을 대지주집에 보내고 돈만 받으면 그만인데…

지금도 영자는 그때의 뒤틀려졌던 심사가 되살아났다.

《예봉이도 백만장자의 집으로 들어가면 좋지요 뭐. 요즘은 정실이요, 소실이요 가리지도 않는 때야요. 들어가서 저만 똑똑히 굴면 그 재산이 다 제것이 되지 않으리. 예봉이를 위해서도 이번 일은 좋을거예요. 떠돌이연극쟁이에 비하겠어요.》

촉새처럼 쏙닥거리는 영자의 말에 문수일의 마음도 어느덧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영자의 말이 그럴상싶었다. 딸도 호강하고 나도 돈을 쥐면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 아닌가!

이튿날 예봉을 부른 문수일의 얼굴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언제한번 딸을 살뜰하게 쳐다본적이 없던 그의 눈에는 제법 아버지된 부드러움이 비껴있었다.

예봉은 싸늘한 표정으로 아버지앞에 나타났다. 물론 일본놈들때문에 극단이 파산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모를 그 지경으로까지 만들어야 하는가. 왜 아버지는 고모를 말리지 못하였는가.

그의 가슴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그들먹이 차있었다.

문수일역시 감정이 예민한 예술인인지라 예봉의 싸늘한 표정뒤에 숨은 적의의 감정을 모를수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탓할수는 없었다. 우선 예봉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고모때문에 너무 상심말아. 내가 말리지 못한것은 잘못이지만 인제 인츰 데려오려고 한다. 고모가 없이야 무슨 연극시장이겠니.》

예봉은 묵묵히 듣고만있었다.

잠시 예봉의 눈치를 살피던 문수일이 힘겹게 본론을 끄집어내였다.

《예봉아, 네가 아버지를 좀 도와야겠다.》

《?…》

예봉은 말없이 아버지를 응시하였다.

《너도 알다싶이 극단을 다시 꾸리려면 돈이 한 3 000원가량 요구된다. 약차한 돈이지. 그런데 그 돈을 대주겠다는 사람이 나섰구나.》

예봉은 속이 띠끔하였다. 짚이는데가 있었다. 전번처럼 또 나를? 아니나다를가 문수일의 입에서는 기가 막힌 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양의 대기업가가 너를 후실로 맞겠다는데 어떠냐?》

예봉의 얼굴에서 피기가 사라졌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총알같이 내쏘았다.

《싫어요!》

너무도 반발적인 행동이라 문수일과 영자는 처음 얼떨떨해졌다. 다소곳하기만 하던 예봉에게서 처음 보는 행동이였다.

영자가 먼저 기가 찬듯 종알거렸다.

《막돼먹기란, 쯧쯧… 아버지앞에서 버릇없이…》

그의 키질에 문수일이 벌컥 화를 내였다.

《이년아, 너 애비 말도 채 안듣고 무슨 대꾸질이냐?》

《더 들을것도 없어요. 난 남의 첩으로 죽어도 안가요.》

그의 불같은 눈총이 영자에게 겨누어졌다. 나더러 어머니의 원쑤이고 나의 원쑤인 영자 너와 같은 첩이 되란 말이지? 나에게서 가장 더럽고 수치스럽고 증오스러운것이 바로 첩이란 말인데 나더러 그런 첩이 되라고?… 너무도 억이 막혔다. 그의 눈앞에는 영자로 하여 빚어진 비극의 화폭들이 생생하니 되살아났다. 서슬까지 먹고 자결하려던 소박당한 어머니의 눈물진 얼굴과 장진산골에 방울방울 뿌려지던 피눈물의 자욱자욱, 동생 화봉의 코뼈를 부러뜨리던 영자의 독살스런 매질과 발길질, 거지에게 동냥주듯 비물에 던져주던 10전짜리 동전잎, 아버지와 딸사이를 리간시키는 쏙닥질…

예봉에게 있어서 첩이란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요괴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나더러 그런 요괴가 되라고?…

순간 림선규의 모습이 아프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자기가 이들앞에 그냥 서있는것자체가 림선규를 모욕하는 죄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밝아지며 힘이 용솟음치는것이였다.

예봉은 나가려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영자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때없이 그는 삽삽해졌다.

《얘, 다시 잘 생각해보렴. 딸로서 아버지를 살릴 생각도 해야지.》

《내가 꼭 남의 첩이 돼야 아버지를 살릴수 있는가요?》

《첩은 또 무슨 첩… 대기업가의 마나님이 될텐데, 귀부인이 된대두. 다 못가서 몸살이다. 굴러오는 복을 차던져두 분수가 있지. 넌 아직 철이 없다.》

영자의 사설에 예봉은 눈살이 꼿곳해졌다.

《그렇게 좋은 자리면 거기서 가지요.》

예봉은 오연하게 웨치며 홱 돌아섰다.

《뭐야? 이년이!》

문수일이 어느새 예봉의 머리채를 휘여잡고 귀쌈을 갈겼다. 예봉은 얼굴을 싸쥐고 비칠거렸다.

《쌍년이 보자보자하니까. 어디 두구보자. 누가 이기나.》

노기충천한 문수일이 다시금 예봉을 후려치였다.

 

*       *

 

3달이 지났다. 그동안 예봉은 어느 하루도 아버지와 영자의 시달림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문수일은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예봉은 함구무언으로 항거해나섰다.

예상외로 딸이 독하게 나오자 문수일은 아연하여 어쩔바를 몰랐다. 온 극단이 문수일을 비난하였다. 극단주인 지두환까지도 문수일에게 단념하라고 권고하였다.

사실 예봉에게 야욕을 품고 첩으로 요구한자는 평양에서 큰 유곽을 경영하는 포주인데 유명한 난봉군이요, 악한이였다. 그의 손에 구겨지고 찢겨진 녀인들이 그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던 그자는 《임자없는 나루배》에 출연한 예봉의 자태에 그만 넋을 잃고말았다. 방금 봉오리를 터치기 시작한 순정의 애어린 꽃송이를 꺾어보고싶은 욕망에 그는 《아리랑》카페주인을 내세워 부지런히 문수일의 마음을 낚고있었다.

그러나 예봉의 항거에 일은 좀처럼 진척되지 못하고 앉은방아를 찧고있는 꼴이였다.

몸도 수척해지고 마음도 지친 예봉은 자기 방에서 독서로 마음을 달래고있었다. 잡지를 뒤적이던 그는 한 녀인의 자살기록에 대한 글에 눈을 모았다. 진주태생이라는데로부터 호기심을 가지고 기사를 읽어내려가던 예봉은 너무도 참혹한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본 이름은 분옥, 기생학교의 기생이였다가 400원의 몸값에 만주에 팔려갔다. 그는 내몽골지방의 료리집인 홍안루에서 기생을 하다가 도문에 팔리워 18살 어린 나이에 밀수업자들에게 몸을 파는 창부로 되였다. 무지막지한 밀수업자들에게 시달려 몸이 상하자 손님을 못 받는다고 먹을것도 주지 않았다. 분옥은 기자에게 《처음으로 이곳에서 밥을 먹고 살아가는것이 죽는것보다 더 쓰라리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실토정하고있었다. 양재물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주인은 깨여지기 쉬운 상품이라 생각하고 분옥을 500원에 목단강쪽의 화류계로 또 팔아치웠다. 한달만에 화류병에 걸려 독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3달만에 영고탑에 다시 팔리자 또 죽으려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못하였다. 현재는 이수진이란 곳에 팔려왔는데 5년동안에 팔려다닌 곳이 열아홉곳! 자살미수한것이 열두번! 기자도 그의 가긍한 정상을 전하면서 이렇게 통탄하고있었다.

《하느님은 불쌍한 분옥에게 죽음의 자유까지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빚은 처음 올 때 400원이던것이 지금은 놀라지 마시라. 1 200여원! 5년동안 아름다운 청춘을 수백명의 수욕에 짓밟히고도 죽지 못하는 이 산송장! 이 젊은 창부의 일생이 류리방황하는 불쌍한 조선농촌의 가엾은 자녀들의 한쪼각 가엾은 력사일것이다. 인제는 자연히 병들어 죽을 때를 기다릴수밖에 없지요. 하고 외로이 웃음짓는 그 얼굴이 나의 머리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는다.》

기사옆에는 분옥의 사진까지 실려있었는데 기생이 되기 전의 모습인지 퍼그나 복스럽고 아름다운 얼굴이였다. 아직 눈물이라는것이 뭔지 모르는듯 생기에 넘쳐있는 그 얼굴을 보느라니 저도모르게 눈앞이 흐려지는것이였다. 저 분옥이가 과연 자기의 비참한 미래를 상상이나 했으랴! 머나먼 간도땅에서 뭇사내들의 무지스러운 손길에 짓이겨지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량한 그 모습을 떠올리며 예봉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진저리를 쳤다. 아버지는 바로 나에게 분옥이와 같은 운명을 강요하는것이 아닌가. 분옥이를 팔아넘긴 주인놈이나 나를 사겠다는 유곽주인놈이나 다 같고같은 놈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봉은 극단을 파산시켜 자기를 이런 운명에 몰아넣은 일본놈들에 대한 증오와 극단을 위해서는 못할짓이 없을것 같은 아버지에 대한 격분으로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이때 지두환의 세 자매중 예봉이와 제일 친한 동무인 지경순이 찾아왔다.

지경순은 예봉의 처지를 잘 아는지라 살그머니 들어와 여러모로 그를 위로하다가 비밀이야기를 하듯 속삭이였다.

《너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어제 대들이로 싸웠어.》

《왜?》

《너때문이지 뭐.》

《나때문에 너의 아버지가 왜 싸운단 말이야?》

《네 문제때문에 그렇게 되였지 뭐. 글쎄 우리 아버지가 그만 너와 림선규씨 관계를 이야기했더구나. 그래서 너의 아버지가 더 펄펄 뛰였대. 인제 무슨 불벼락이 내릴지 몰라. 너의 아버진 림선규씨에 대해서 코웃음치더래.》

지경순이 돌아간지 이윽했으나 예봉은 한동안 그 자세로 앉아있었다. 림선규까지 꺼들었으니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 무섭고 두려웠다. 때마침 림선규가 지금 시골고향에 가있는것이 다행이였다.

그러나 어차피 깨진 사발이였다. 차라리 잘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봉은 아버지와 어떻게 또 대결할것인가에 대해 골똘하였다.

그날밤 문수일은 예봉을 불렀다. 기상은 험악하였다.

《더 긴말 할게 없다. 내 인제 그 선규녀석을 요정내지 않나 봐라. 그리구 너 래일 당장 떠날 차비를 해. 이 애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그 페병쟁이녀석에게 너를 줄수 없어. 극단이 이 지경이 된것도 다 그 녀석때문이야. 하필이면 왜놈들의 눈에 걸리는 작품들만 골라골라 쓰더니만…》

문수일은 발을 탕탕 구르며 모든 역증을 림선규에게 쏟아부었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새파래서 대드는 예봉이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였다. 언제 저렇게 독한 계집애로 변했는가! 자신의 무력감이 인정될수록 림선규에 대한 미움이 극도로 치받쳤다. 그 녀석을 등대고 저년이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뻗대기를 하고있지 않는가.

문수일은 기가 나서 소래기를 질렀다.

《보기 싫다. 어서 썩 나가라. 난 이미 저쪽 주인과 약조를 했고 돈도 받았으니 네가 아무리 뻗쳐도 소용없어. 아무렴 내가 제 딸 하나 휘여잡지 못하는 바보같애?》

탕탕 내쏘는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말에 예봉은 머리를 들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모든것이 다 끝장일것 같았다. 그는 품속에 간직하고있던 분옥에 대한 기사를 아버지앞에 내밀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정 이 딸을 분옥이처럼 만들고싶어요?》

갑자기 잡지를 내미는 바람에 문수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데 어느덧 울음젖은 목소리로 예봉이가 하소하고있었다.

《아버지가 정 이러시면 나도 분옥이처럼 망하고말거예요.》

예봉은 더 참지 못하고 왕-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나갔다.

딸의 세찬 울음소리는 문수일의 가슴을 쩡하게 흔들어놓았다. 어쨌든 그는 예봉의 아버지였던것이다. 그는 예봉이가 내놓고 간 잡지를 집어들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한 어린 처녀의 수난기를 읽어내려가는 문수일의 가슴에 어떤 파동이 일어났는지는 딱히 알수 없다. 그러나 그이후 문수일이 더는 예봉이를 그 일로 괴롭히지 않은것만은 사실이였다.

허나 폭풍전야의 정적이였다. 부녀간에는 도저히 서로 타협할수 없는 림선규의 문제가 남아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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