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우연인가, 행운인가

 

1920년대와 1930년대초 우리 나라에서는 연극풍이 불었다고 할만치 무수한 연극단체들이 조직되여 활동하고있었다.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지향하여 출범당시에는 기세들이 자못 만만치 않았지만 일제의 가혹한 민족문화말살정책의 된서리와 자금난으로 끊임없는 리합과 집산과정을 거치면서 난파를 뚫고 끝까지 버틴 연극단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의 연극단들이 하루살이 단명으로 그 존재를 마치였거나 도중에서 풍지박산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니 난파선에 몸을 실은것과도 같았던 연극인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 하는것은 당시의 가요 몇곡을 더듬어보아도 능히 짐작할수 있다.

 

        오늘은 이 마을에 천막을 치고

        래일은 저 마을에 포장을 치는

        시들은 갈대처럼 떠다니는 신세여

        바람찬 무대에서 울며 새우네

 

        지나는 거리 풀릇소리가 슬프다

        집없이 흘러흘러 찾아온 곳 어데냐

        모인건 한가족같건만 헤여져갈 그 운명

        극단아 류랑극단 가엾은 극단아

 

가요에서도 슬프게 노래되여있듯이 정처없이 흘러가는 떠돌이인생-이것이 바로 당시 연극인들의 운명이였다. 오죽했으면 《차디찬 타국 달을 마차우에 싣고서 향방없이 가리라》고 탄식을 하였겠는가.

예봉의 운명도 달리될수는 없었다.

좋든싫든간에, 예술적재능이 있건없건간에 연극인가정의 딸이라는것으로 하여 그의 일생은 이미 무대로 정해져있었던것이다.

무대우에 선 녀배우, 당시 이들의 운명처럼 기구하고 불행한것이 또 어데 있으랴. 연예계에 진출한 녀배우들은 거의가 다 출중한 미모로써뿐아니라 뛰여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로서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라 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능아들이 사회적으로는 매우 천시당하였으니 녀배우들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어떠했겠는가 하는것은 다음의 사실을 가지고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주체21(1932)년 4월 카프 연극부직속극단인 《신건설》이 창립되였을 때 녀류시인이였던 송계원(《개벽》사 기자)에게 찬조출연해달라고 요청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펄쩍 뛰며 《나는 아직 연극에 출연해야 할만큼 타락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호되게 딱 잘랐던것이다. 자칭 프로시인의 태도가 이러하였으니 일반 대중들의 녀배우에 대한 관점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회적으로 천시당하고 버림받던 녀배우들의 구슬픈 운명은 류행가요 《류랑극단》의 처량한 선률에 그대로 실려있다.

 

        밤깊은 무대뒤에 분을 씻는 아가씨

        제 팔자 남을 주고 남의 팔자 배우나

        오늘은 카츄샤요 래일밤은 춘향이

        가리라 정처없이 가리라 가리라

 

예봉의 미래를 말해주는듯싶은 류행가이다.

예봉은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극단의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름이 연구생이지 연기체계나 연기술에 대하여 누구 하나 똑똑히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단성사라는 극장의 무대뒤켠에서 연극을 구경하거나 배우들의 온갖 잡심부름을 들거나 극장청소를 하는 등 사실은 잡부나 다름없었다.

예봉은 자기에게 배우기질이 있는지 어쩐지는 알수 없었어도 연극에는 심취되여있었다. 함흥에서 연극 《눈물》을 본 다음부터 연극세계는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황홀한 세계였다.

그는 극장에서 제기되는 온갖 잡심부름을 다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연극을 보았다.

그 세계에만 빠져들면 세상만사를 다 잊고 마음껏 기뻐할수도 있고 슬퍼할수도 있었으며 증오할수도 있었다.

극단에서는 박승희의 창작품인 연극 《아리랑고개》를 더욱 세련시켜 공연하고있었다.

연극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어느 한 시골 지주집에 보통학교를 마친 머리가 총명하고 잘 생긴 청년이 머슴으로 들어온다. 부모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당장 살길이 막혀 지주집으로 온것이다. 머슴을 사는 나날에 청년은 지주딸이 공부하는 교과서를 빌려다가 틈틈이 자습을 하는데 오히려 지주딸보다 더 앞서나가고있으며 선생노릇도 할수 있을만큼 박식해진다. 그리하여 지주딸은 미남자이고 성격이 활달하며 아는것도 많은 머슴군청년을 사랑하게 된다.

딸이 머슴을 열렬히 사랑하는것을 눈치챈 지주녀편네는 야단법석을 하며 량반가문을 더럽힌다고 펄펄 뛴다. 그러나 딸은 그 청년의 인품이 자기보다 더 높다고 하면서 배필을 맺아주고 그를 대학공부시키자고 간청한다.

어머니는 딸이 몸까지 바친게라고 여기고 마당에 세워놓은 비자루로 사정없이 때리는데 지주가 들어선다. 안해의 이야기를 들은 지주도 펄쩍 뛰며 길길이 날뛴다. 지주는 마을에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선손을 쓴다고 하면서 머슴을 집에서 내쫓는다. 머슴이 괴나리보짐을 지고 집을 나서는데 딸이 따라나가려 한다. 지주놈은 딸을 붙든다.

머슴이 아리랑고개라고 하는 언덕길로 사라질 때 민요 《아리랑》이 처량하게 흐르고 지주의 딸이 담밑에 서서 구슬프게 울고있는 장면에서 서서히 막이 내린다.

심각한 사회적문제성을 제기하지도 못하고 지주의 딸이 머슴을 짝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련정극이였지만 관중들의 애짭짤한 눈물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하였다.

예봉은 이 작품이 상연되는 전기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연극을 보았다. 그때 예봉의 가슴을 사로잡은것은 머슴군총각의 활달한 기질과 지주딸을 압도하는 박식이였다. 그 청년만큼 훌륭한 남자가 없어보일만큼 그 형상에 혹해버렸다.

더구나 예봉은 바야흐로 첫 련정의 감정이 새싹처럼 움트기 시작한 사춘기였으니 그의 부드러운 가슴속에 비껴든 머슴군총각의 모습은 너무도 강한 인상을 찍어놓았다.

어느새 예봉은 머슴군총각의 대사들을 몽땅 외워버렸다. 연극장면을 보지 않고서도 그는 대사들을 줄줄이 내리엮을수 있을만큼 작품세계와 함께 호흡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작품의 주인공역을 맡았던 남자배우(이름은 기억하고있지 못함.)가 급성충수염으로 병원에 실려간것이였다.

극단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날 예약된 관람권들은 이미 몽땅 팔린 뒤였다. 인제와서 공연을 취소시킬수는 없었다. 극장측에서 우선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극장측은 막대한 손해를 보는것이였다.

공연시간은 점점 박두하여오고 관람객들이 벌써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날따라 예봉은 화봉이가 앓아누워 그대신 영자의 애기를 업은채 무대뒤에서 심부름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모 영자가 숨을 할딱이며 뛰여오더니 여느때없이 반갑게 소리쳤다.

《여기 있는걸 그냥 찾았구나. 애를 이리 내고 빨리 분장실로 가봐.》

《무슨 일이예요?》

《가보면 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예봉을 독촉하며 그는 예봉의 등에서 급히 애기를 풀어안았다.

예봉이 뜨직한 걸음으로 분장실로 가는데 아버지 문수일이 마주 달려나오며 꽥 소리질렀다.

《왜 이리 꾸물거리느냐, 뛰여오지 않구.》

그는 잡아채듯 딸의 손목을 끌며 바삐 분장실문을 열었다.

분장실에는 여러명의 배우들이 근심어린 얼굴로 서성대고있었다. 예봉이 들어서자 모두의 눈길이 일제히 그에게 쏠리였다.

예봉은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머밋거렸다.

《저 애가 꽤 해낼가?》

누군가 미덥지 못한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그다음 서로 의견들을 나누는듯 한데 예봉의 귀에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얼굴만 화끈 달아올랐다.

잠시후 문수일이 손벽을 딱 치며 단호하게 말하였다.

《한번 시켜봅시다. 저 애가 대사는 다 통달했으니까.》

다른 배우들은 인제야 뭐 뾰족한 다른 수가 없으니 할수 없다는듯 동의하였다.

문수일이 딸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오늘 공연에서는 네가 머슴군역을 해야겠다.》

예봉은 너무도 뜻밖의 말에 화닥닥 놀라며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난 못해요.》

문수일은 엄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아이들 놀음이 아니다. 그만큼 연극을 보았으면 할수 있다. 대사가 생각나지 않으면 뒤에서 다 읽어주지 않으리.》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난 정말 자신 없어요.》

예봉은 애원하다싶이 간청하였다. 자기가 그 숱한 사람들앞에 나선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다리가 후두두 떨리고 속이 한줌만 하게 죄여들었다.

게다가 언제 연습이나 한번 해보았는가.

그는 무작정 그자리를 피하려고 몸을 홱 돌려 문가로 뛰여갔다. 그러나 어느새 문수일이 그를 붙잡았다.

《이년이! 너 정 말 안듣겠니?》

어느새 그의 손이 예봉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예봉은 볼을 싸쥐고 풀썩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동료배우들이 문수일을 나무라며 예봉을 얼리였다. 예봉은 자기가 아무리 발버둥질하여도 결코 벗어나지 못하리라는것을 깨달았다.

지주딸역을 하는 녀배우가 예봉을 살뜰하게 일으켜세우며 옆방으로 데리고갔다.

《남들은 주인공역을 하고싶어도 못해서 안달이란다. …넌 호박이 제발로 굴러들어왔는데 왜 뿌리치는거냐. 이런 행운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돼.》

그는 예봉의 눈물을 닦아주며 차근차근 타일렀다. 그리고는 도랑과 가마밑재를 기름에 갠것으로 눈섭을 그리고 분장을 시켜주었다.

분장을 끝내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바지저고리차림에 수건을 질끈 동인 미동소년이 서있는것이 아닌가.

다른 배우들은 예봉의 기분을 돋구어주느라고 덕담들을 눌어놓으며 한바탕 추어주었다.

예봉은 떨리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제발 공연시간이 빨리 오지 않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무정하게도 시간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연극시간을 알리는 징소리가 길게 울리였다. 드디여 운명의 시각이 온것이다.

그는 등을 떠미는 아버지의 손길을 어렴풋이 느끼며 수백쌍의 눈들이 집중된 무대우에 나섰다. 운명적인 첫 무대였다.

무대경험이 전혀 없는지라 한순간 당황함과 어색함을 숨길수 없었다. 손은 어떻게 건사해야 할지… 그는 허둥거렸다. 상대역을 하는 배우가 대사를 엮으면서 매섭게 눈총을 쏘았다. 예봉은 정신이 버쩍 들었다. 자신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후려치였다.

(이렇게 무대에 나선바에야 잘해보아야지.)

독한 마음으로 그는 입술을 옥물었다.

차츰 마음의 안정을 느끼며 역의 세계에 끌려들기 시작하였다. 무대간막이뒤에서 대사를 읽어줄 필요조차 없었다. 예봉의 입에서는 주인공의 대사가 자연스럽게 술술 흘러나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던 문수일의 긴장된 얼굴에 느슨한 미소가 피여오르고 극단 감독과 배우들도 서로 만족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요란한 박수갈채소리와 함께 드디여 막이 내렸다.

극단배우들이 밀려와 예봉을 둘러싸고 서로마다 칭찬하였다.

예봉의 온몸은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예봉이, 성공이야!》

처음으로 무대에 선 자기를 고무하여주는 칭찬의 말이라는것을 느끼면서도 그 고마운 마음들에 눈물이 났다. 자기가 그들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때 지주역을 맡았던 배우가 호탕하게 웃으며 뛰여왔다.

《여, 예봉이, 경사났어. 극장뒤로 가보라구. 글쎄 기생학교에 있는 녀자들 셋이 인력거까지 대기시켜놓고 예봉일 찾는다네. 서로 제가 모셔가겠다고 막 승강이질이야.》

예봉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발깃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담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배우는 예봉의 그러한 모습이 더 재미있다는듯 다시금 너털웃음을 치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공연한 미동이 너무도 자기들의 가슴을 설레게 해서 그 녀자들이 하루밤 모시겠다는게야. 잠을 못자겠다나. 하하하…》

요란한 웃음이 터졌다. 예봉은 얼굴이 수수떡처럼 붉어졌다.

《연극의 머슴군총각이 글쎄 애어린 우리 예봉인줄 알았다면 아마 그 녀자들이 까무러칠거야.》

또다시 배우들은 폭소를 터치였다.

예봉의 첫 무대는 성공한셈이였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성공이라고 할수 있었다.

관중들은 연극에 새로 출연한 머슴군총각의 아직 세련되지 못한 연기형상보다도 그 아름답고 순진스러워보이는 모습에 더 반하여버렸던것이다.

처녀처럼 고운 청년이 출연한다는 소식은 날개가 돋힌듯 사람들속에 퍼져 그이튿날부터 공연을 보러 오는 관람객들의 수는 곱절로 부쩍 늘어났다. 연극의 내용보다도 새로 나타난 청년의 얼굴을 보러 오는 축들이 더 많았다. 극장주나 극단성원들은 대만족이였다. 예봉의 존재로 하여 극단의 성가가 더 올라간셈이였다.

주인공을 하던 남자배우가 완쾌되였으나 예봉을 주역으로 계속 출연시키였다.

예봉의 첫 무대생활은 이런 희비극속에서 시작되였다.

 

*          *

 

《예봉선생은 배우로서는 운이 트인셈입니다. 첫 출연에서부터 주인공으로 성공하였으니 말입니다.》

무대에 처음으로 오르던 예봉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으며 나는 우스개소리로 한마디 하였다.

사실 그 시기 첫 출연에서부터 주인공으로 성공한다는것은 쉽게 이루어질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봉건적인 도제관계가 심하던 때인지라 그 재능이 인정되고 주역으로 출연하는 배우가 되자면 그야말로 살을 저미고 혀를 깨무는 치욕의 시궁창을 헤쳐야 했다. 그러고도 끝내 솟아오르지 못하고 스러져간 인생들은 그 얼마였던가.

어느 한 연극인의 회상을 통해서도 알수 있지만 그 시기 연구생들이 어쩌다 한번 차례지는 단역에 출연하여 재능을 나타내면 《고년 썩 잘해.》하는 칭찬아닌 욕이 고작이였다.

우리 나라에서 명배우로 명성을 떨친 인민배우 한진섭의 경우를 보아도 연극단에서 그가 한 일이란 연극의 검열대본(경찰서에 제출할것)을 쓰는것, 극단이 가는 곳마다에서 세길이나 네길되는 땅을 파고 가설포를 두르는 일이였다.

희미한 등불밑에서 검열대본을 깨알처럼 박아써야 했던 눈내리는 밤, 가설포를 어깨에 둘러메고 주역배우들의 트렁크를 들어주며 술심부름으로 밤을 새우는 나날들이 연구생의 생활이였다.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 황철에게도 그저 웃어넘어갈수 없는 일화가 있다.

황철이라 하면 국립연극단 연출가, 총장, 교육문화성(당시) 부상을 력임한 유명한 연극인으로 우리 인민들이 애정깊이 추억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황철도 해방전 그 시기에는 하루 15전씩의 《야찬대》로 연명하며 무대뒤에서 잔심부름에 내몰리던 이름없는 연구생이였다.

남달리 훌륭한 육체적조건과 독특한 화술재능을 가지고있었으나 언제 솟구쳐오를지 막막하기만 하던 그때 강홍식이 그를 동정하여 도와나섰다.

해방후 우리 나라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의 연출가였던 강홍식은 그때 벌써 가수를 겸한 연극인으로서 팔방미인격인 연예계의 총아였다.

잡지 《삼천리》의 지면에서 복혜숙이 강홍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것이 우연치 않다.

《남자로서는 강홍식이 제일이다.

<나물캐러 간다.>하고 무대에서 처녀총각을 외울 때에는 그 륙척키, 20관 몸집이 격에 맞지 않지만 위풍당당한 호남아이다. 서양에 내놓아도 그쪽 일류신사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것이다.》

이런 강홍식이였기에 마음 또한 쪼물짝하지 않고 넓었던것 같다.

《토월회》에서 《쟝 발쟝》연극을 할 때였다.

어느날 연극의 주인공역을 맡았던 강홍식이 갑자기 없어졌다. 공연을 방금 시작하려는찰나에 주인공이 없어졌으니 극단에서는 대소동이 일어났다. 극단주의 얼굴이 새까매져 까무러칠 지경이 되였는데 불쑥 황철이 나서며 《내가 한번 해보겠소.》하고 자청하였다.

모두들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극단에 들어온지 한달밖에 안된 애숭이가!…

그러나 울며겨자먹기였다.

할수없이 극단주는 황철을 출연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의 연기는 강홍식을 훨씬 릉가하였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였다.

황철은 대번에 연극계의 혜성으로 솟아올랐다.

공연이 끝난 으슥한 무대뒤에서 두사람은 꽉 부둥켜안았다. 친우를 위하여 우정 자취를 감추었던 강홍식은 황철의 어깨를 툭 치며 만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 성공을 축하하네. 인제부터 마음껏 나래쳐보라구.》

그저 웃어넘길수 없는 일화라고 할수 있다. 친우를 위한 강홍식의 마음도 뜨겁지만 그런 희비극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당시 연극인들의 처지가 더 눈물겹게 안겨온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문예봉의 첫 무대출연은 우연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것이다.

나의 속생각을 짐작한듯 문예봉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물론 지금 회고해보면 그때 저같은 생둥이가 주역을 맡았다는것자체가 쉽게 차례지는 기회가 아니였지요.

사실 그때 저의 연기라는것이 얼마나 서툴고 유치했겠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어처구니도 없어요. 관중들은 아마 저를 동정하여 박수를 보냈을거예요. 36년에 이 작품이 다시 영화로 각색되였는데 제가 또 주역을 맡게 되였지요. 나도 그렇고 영화제작자들도 해본 경험이 있어서 쉽게 성공할줄 예측했댔는데 쓰디쓴 실패작이 되고말았어요. 평론계에서는 저의 연기에 대하여 벌거벗고 환도 찬것 같다는 혹평이였지요. 호호…

이러나저러나간에 여하튼 장선생의 말대로 첫 연극무대에서 운이 트인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지 나의 운이 좋았다면 그 서툰 출연으로 라운규선생의 주목을 끌었다는 점입니다.》

《아, 라운규선생이요?》

나의 입에서는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라운규라 하면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 나라 영화사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이름있는 인물이 아닌가.

《라운규선생은 우리 민족영화의 개척자, 선구자라고 할수 있는 재능있는 예술인이 아닙니까.》

《그래요. 흔히 인생의 초행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에 따라 인생의 방향각이 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예술생활도 라운규선생의 이름을 떼여놓고는 생각할수 없지요. 아버지 문수일때문에 억지로 들어선 예술의 길이였지만 진짜 예술을 알도록 깨우쳐주고 이끌어준 은사는 라운규선생이였습니다.》

추억의 돛을 달고 세월의 년륜을 거슬러오르는 문예봉의 마음은 자못 감개무량하였다.

예봉의 눈앞에는 서울 종로구 3정목에 있는 단성사로 출근할 때면 꼭 그곳에 나타나군 하던 라운규의 모습이 지금도 선히 떠오른다.

흰 양복에 흰 모자를 쓰고 상체를 약간 뒤로 제낀채 항상 정열의 불덩어리가 이글거리는 눈길로 사람들의 심장을 꿰뚫어보는듯 하던 라운규!

물론 문예봉은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후에야 그가 아버지의 친우이며 《아리랑》으로 이름이 높은 라운규선생이라는것을 알았다.

예봉이가 단성사에서 첫 무대를 밟던 그 시기가 라운규로서는 창작생활의 침체기, 시련기였다.

주체15(1926)년에 《아리랑》한편으로 일약 영화계의 거성으로 등장한 라운규는 계속하여 《풍운아》를 내놓았고 다음해에는 일본인인 요도야를 출자주로 하는 《조선씨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하고 자신의 영화회사인 《라운규프로닥숀》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들쥐》, 《금붕어》, 《잘 있거라》를 창작하였으며 련이어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벙어리 삼룡이》등을 창작하였다.

량적으로나 질적으로 볼 때 이렇게 영화를 만든 영화인은 아마 해방전 우리 나라에서 라운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자금난과 일제총독부의 검열과 간섭으로 영화회사를 해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창작으로 고민하던 라운규는 다시 솟구쳐보려고 《원방각사》간판을 내걸고 《아리랑후편》, 《철인도》, 《도적놈》등을 제작하였으나 주요화면들이 총독부검열관의 손에서 무자비한 가위밥이 되다보니 실패를 면할수 없었다.

거미줄같이 늘여진 일제의 검열제도와 자금난, 이 두가지가 암초였고 그로서는 도저히 넘을수 없는 성벽이였다.

이리하여 일시적으로 그는 영화계를 떠나 연극계에 몸을 잠그었다.

연극계로 떠나던 날 동료들이 차린 송별연에서 그는 이렇게 울분을 터치였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이토록 영화계에 몸바쳐 투신하였던가! 나는 우리 민족의 문화계몽을 위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아, 가슴이 터진다! 가슴이 터진다!》

영화계를 떠나 극단에서 생활하던 그 시기의 생활을 놓고 라운규는 이렇게 말한적도 있다.

《어떤 친구는 날더러 2류, 3류극단을 찾아서 시골 다닌다고 타락했다고 욕하지요. 그러나 내가 연극을 안했으면 굶어죽었거나 도적질밖에 할것이 없었겠지요. 생활이 쪼들려 어떻게 할수 없으니까 부득이 시골극단을 찾아다니는거지요. 그래서 다문 며칠 먹을 밑천이라도 벌어가지고는 서울 올라와서 영화를 만들지요. 내 생활은 이처럼 비참합니다.》

예봉이 라운규를 만났던 시기는 바로 그가 이러한 처지에 놓인 때였다.

라운규는 거리에서 극장으로,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다니면서 영화제작에 돈을 대줄 출자주를 탐색하였고 이따금 단성사에 들려 연극연습을 보아주면서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당시 영화인들은 사무실조차 없어서 시내 각 극장들에 모이군 했던것이다.

영화를 떠나 연극계에서 방황하던 시기였으나 영화에 대한 남다른 정열은 라운규의 가슴속에서 용암처럼 끓고있었다.

력사영화 《개화당이문》의 구상을 그는 이때에 무르익히고있었다.

1884년 12월 4일 개화파의 지도자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을 소재로 한 력사극영화였다.

조선근대화의 꿈을 안고 거사를 단행한 33살의 김옥균을 형상하자면 그의 성격이 가지는 력사적진보성과 제한성, 개화당의 실체와 그 역할, 정변의 배경과 실패원인 등 거창한 력사적내용에 대한 분석평가가 있어야 했고 당시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는 의상과 소도구, 분장, 장치, 미술, 연기자들 등 그 어느 영화보다 많은 고심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그 어느때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라운규가 이 힘에 부친 영화를 창작하려고 했던 목적은 무엇이였던가.

그는 자기의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와서 탄식만 한다면 그런 낡고 썩은 옛이야기를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것만이 개화가 아니다. 력사란 언제든지 움직인다. 갑신년에만 개화당이 필요하였던것이 아니라 세상은 아직 컴컴하다. …

그 시대에 필요하였다가 죽은 김옥균을 다시 살리지 못할터이니 이 시대에 필요한 김옥균이를 많이 만들자. …

수백만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이 개화당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싶다.

이 사건을 영화화하는것이 기본목적의 만분의 일에라도 달할수 있다면 나는 만족하겠다.》

그의 이 수기에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도 반드시 김옥균과 같은 영웅남아가 등단해야 한다는 열띤 주장과 실패하는 김옥균이가 아니라 성공하는 애국충신들을 많이 만들어 후세에 가서라도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열렬한 애국심의 분출을 볼수 있다.

이런 웅지를 품고 작품의 구상을 무르익히던 바로 그때 라운규는 단성사의 무대에 오른 문예봉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문수일의 딸이라 하여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의 연기를 주시하던 라운규는 비록 연극배우로서는 치명적이라 할만치 목소리가 좋지 못하고 연기가 서툰 점은 있어도 순진하고 진실감이 력력히 어려오는 청초한 그 모습에 그만 강한 인상을 받았다.

기성 녀배우들에게서 찾기 어려웠던 청신한 그 무엇을 신선하게 느끼는 라운규의 머리속에는 구상단계에 있는 작품에서 단 한명 등장하는 녀인의 성격과 모습의 륜곽이 선명하게 그려지는것이였다.

개화당을 도와나서는 녀인의 인물과 성격에 대하여 모색하고 고심하던 때 문예봉의 자태는 그의 머리에 섬광과 같은 불꽃을 일으켰다.

그는 무릎을 쳤다.

(옳다. 그 녀인의 성격은 바로 저것이다!)

그이튿날 라운규는 단성사로 나가 문예봉을 만났다.

이름난 라운규앞이라 예봉은 몹시도 어려워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였다. 수줍어하는 그 자태가 더 큰 매력이였다.

《예봉이 연극하는것을 보았소. 첫 출연치고는 괜찮더군.》

라운규의 칭찬에 예봉은 더욱 머리를 수그리며 얼굴을 붉히였다.

자기의 서툰 연기를 이분이 보셨구나 하고 생각하니 창피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는 예봉이를 대견하게 바라보던 라운규는 그를 옆자리에 앉히며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런데 예봉이, 머슴군총각의 성격을 더 옳게 파악하고 연기를 해야 해. 예봉은 지금 지주딸이 머슴군총각을 사랑한다는것만 생각하면서 총각이 너무 끌려들어가는듯이 연기하고있단 말이요. 맹목적이다싶이… 그게 아니요. 머슴군총각에게도 어느 정도 지각이 있고 자존심이 있소. 무턱대고 끌려가는것이 아니란 말이야. 지주의 딸이 짝사랑을 한다는것을 알지만 자신의 신분적처지로 결코 사랑이 성취될수 없다는것을 알고있기때문에 어느 정도 좀 도도해야 하고 머슴군총각이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내심을 잘 표현해야 머슴군청년의 성격이 더 살아날수 있소. 자, 실례로 지주딸이 공책과 연필을 가져왔을 때 말이요. 그때는 이렇게 행동해야 해.》

라운규는 몇대목의 연기를 직접 보여주며 구체적으로 지도까지 하였다.

예봉은 그의 지도를 성심껏 받아들이였다.

거북하던 마음도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극단을 떠나면서 라운규는 예봉에게 다심한 어조로 말하였다.

《연극을 계속하려면 예봉이는 화술문제부터 해결해야 돼. 그런 목소리로는 연극무대를 끝까지 지탱할수 없어. 나도 무대에 나서면서 회령사투리때문에 많은 애를 먹었소. 무대를 통하여 이 결함을 적극 고쳐나가고있는중이란 말이요. 사일런트(무성영화)때와는 달리 인제부터는 토키(유성영화)시대이기때문에 화술문제가 더욱 중요하오. 꼭 명심하라구.》

라운규의 말에는 진심이 깔려있었다.

사실 이 화술문제는 라운규의 고민거리이기도 하였다.

언젠가 복혜숙에게서 단단히 아픈 말을 들은것이 큰 자극적계기로 되였던것이다.

복혜숙이라 하면 당시 재능있는 영화배우로, 가수로 이름이 있던 녀인이다.

라운규는 자기의 사투리를 고치기 위한데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라운규처럼 동료들의 충고나 비판에 허심한 사람도 드물것이다.

자기의 약점을 깨달은이상 그는 그것을 퇴치하는 길에 주저없이 나섰다.

자기의 이런 교훈이 있어 라운규는 예봉에게도 진심의 권고를 주었던것이다.

헤여지기 앞서 라운규는 예봉을 다시금 유심히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예봉이, 앞으로 함께 일할 때가 꼭 있을게야.》

예봉은 그저 수줍게 웃을뿐이였다. 그가 한 말의 뜻을 아직은 리해할수 없는 그였다.

연극계에서는 아직도 풋병아리에 불과한 자기가 라운규선생과 같은분과 일하게 된다는것은 생각조차 못해본 일이였다. 하늘의 별을 바라는 공상이라고나 할지…

그러나 그때 예봉은 이 라운규로 하여 자기의 운명이 영화로 결정지어지며 한생이 은막과 함께 흘러가게 되리라는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있었다.

허지만 그날은 빨리도 왔다.

 

련재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4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5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6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8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9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0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2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3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4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5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6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7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8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19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0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2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3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4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5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6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7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8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29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0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1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제32회)
[장편실화소설]백합꽃 (마지막회)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