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제1편 눈물의 백합꽃

나어린 녀공

 

함흥은 조선봉건왕조시기 파란많은 력사의 진통과 자취가 어려있는 곳이다.

그러나 일제의 략탈적인 식민지경제정책으로 하여 급격히 들이닥친 근대의 물결은 어느덧 함흥을 공업의 중심지로 변색시키고있었다.

근대적인것과 력사적인것이 묘하게 어울려있는 기이한 도시가 바로 1920~1930년대의 함흥이라고 할수 있었다. 함흥제사공장과 흥남비료공장(당시)의 굴뚝들에서 괴물마냥 꾸역꾸역 뿜어져나오는 시커먼 연기들은 고색창연한 옛 도시의 상공을 뿌옇게 휩싸면서 력사의 이끼우에 사정없이 매캐한 재를 들씌우고있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도 자연히 그 연기속에 휘말려들지 않을수 없었으니 사람들은 어느새 그 공장들의 시꺼먼 아구리속에 삼키우고만 자기들의 운명을 인식하며 소스라쳐 놀라군 하였다.

예봉이네도 례외가 아니였다.

장진에서 돌아와보니 집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큰삼촌은 가족을 데리고 흥남으로 이사하였고 셋째삼촌과 고모는 아버지가 서울로 데려가고 둘째삼촌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조차 모르고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화봉이 셋이서 함흥에 나와 세방살이를 하고있었는데 하루 세끼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였다.

예봉은 로독도 풀겸 며칠동안 집안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장진에서 오느라 몸도 지쳤지만 심신이 더 피로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과의 상봉이 가져다준 기쁨도 한순간, 살길이 막막한 집안형편을 보느라니 울적하기만 하였다.

인제는 할아버지 무릎에서 어리광만 부릴 때가 아니였다. 세 식구를 먹여살려야 할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것을 그는 통절히 깨달았다. 오래동안 생각을 굴리던 그는 처녀들이 제일 취직하기 쉬운 곳이라는 제사공장으로 가리라고 결심하였다.

어느날 그는 자기의 결심을 할아버지에게 터놓았다. 할아버지는 펄쩍 뛰였다.

《너 정신이 있느냐. 제사공장이라는데가 어떤 곳이라고… 안된다.》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였다.

《제사공장은 감옥과 같은 곳이란다. 왜놈들이 총을 메고 녀공들을 감시하고 깡보리밥에 소금국과 무우쪼박을 먹이면서 하루 10시간씩 일을 시킨다는데 가뜩이나 약한 네가 견디여낼상싶으냐. 절대 안된다.》

그는 예봉이가 두말 못하게 잘라매였다.

그러나 예봉이 또한 집요하였다.

한번 결심한것을 절대로 흐트러뜨리지 않는 그였다.

《다른 녀자들이 다 일하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나요. 난 자신 있어요.》

그는 며칠을 두고 할아버지를 졸랐다.

문형섭로인도 더는 예봉이를 말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3살나던 그해 9월 예봉은 함흥제사공장의 녀공으로 취직하게 되였다.

 

*         *

 

붉은 벽돌로 높다랗게 담장을 빙 둘러막고 그우에 철조망까지 늘인 공장의 모습은 공장에 첫발을 들여놓은 예봉에게 말할수 없는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바로 이 원시적인 고역장에서 숱한 조선의 녀성들이 피땀을 빨리우며 시들어가고있었다.

합숙에 들어온 첫날밤이였다.

다다미를 깐 방에는 여러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다 한창나이의 언니벌들이였다.

12시간이상 되는 고역에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저녁을 먹기 바쁘게 잠자리에 쓰러졌다. 모든것이 서먹하기만 한 예봉은 한켠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눈치만 살피고있었다.

두무릎을 세운 우에 보퉁이를 올려놓은채 꾸어온 보리자루처럼 한쪽 구석에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이때 얼굴이 둥실한 한 녀자가 들어왔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그는 머리를 틀어올린것으로 보아 처녀는 아닌듯싶었다.

방으로 들어선 그는 구석에 앉아있는 예봉을 보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새로 취직한 애냐?》

예봉은 대답대신 고개를 푹 숙이였다. 외롭던지라 말을 걸어주는 그가 고마와 눈물이 다 찔끔 솟았다.

예봉의 곁으로 다가온 그 녀자는 찬찬히 그를 뜯어보다가 《너 참 곱게 생겼구나. 몇살이냐?》 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13살이예요.》

예봉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직 어린애구나. 너의 부모들도 참 모질구나. 이런델 다 보내는걸 보니…》

한심하다는듯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런게 아니예요.》

예봉은 그의 오해가 싫어 급히 부정하였다.

《그럼?》

그 녀자가 다우쳐물었으나 예봉은 대답을 피하며 옷고름만 만지작거렸다.

신옥이라는 그 녀자는 더 묻기를 단념한듯 주섬주섬 잠자리를 펴면서 예봉에게 말하였다.

《어서 와 누워라. 잠을 자야 래일부터 일을 하지.》

예봉은 그의 곁으로 주춤주춤 다가가 보퉁이를 베고 한켠에 쪼그리고 누웠다. 그러는 예봉을 꼭 그러안으며 신옥은 모포를 덮어주었다.

《너 좀 꽁한 애로구나. 이제 인차 다 친해진단다.》

예봉에게 말을 시켜보려고 이것저것 묻던 신옥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가볍게 코를 골았다.

어둑시근한 방에서는 깊이 잠든 젊은 처녀들의 고달픈 숨소리만이 가득찼다.

예봉은 잠들수 없었다. 뙤창으로 흘러드는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느라니 저절로 마음이 서글퍼졌다.

공장정문에까지 따라오셨던 할아버지와 동생의 얼굴, 장진에 남은 어머니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며 못 견디게 가슴을 지지였다.

언제면 그들을 다시 만날수 있을가? 낯선 이곳에 얼마나 있어야 할가?

자기가 택한 길이였지만 이 순간에는 괜히 오지 않았나 하는 후회감이 스르르 가슴을 휘감는것이였다.

감옥을 련상시키는 공장담장과 철조망, 그 주위를 돌던 순찰병들을 생각하자 몸이 오싹해지며 가슴이 한줌만 해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심에다가 생소한 곳에 홀로 와있다는 고독감까지 겹치여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녀자합숙사감의 째진 소리와 함께 부산스런 하루가 시작되였다.

피곤이 채 풀리지 않아 선하품을 연방 하면서 처녀들은 대충 세면을 하고 식당으로 갔다.

예봉도 신옥의 뒤를 따라갔다. 식탁에는 어린애주먹만 한 깡보리밥 한덩이에 멀건 국, 김치 비슷한 무우 몇쪼각이 놓여있었다. 신통히도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밤을 새여 머리가 뗑한데다가 아직도 마음이 불안한 예봉인지라 밥이 당기지 않았다.

그는 몇술 뜨는둥마는둥하다가 술을 놓고말았다.

곁에서 부지런히 밥을 먹던 신옥이가 그를 보며 타일렀다.

《너 그렇게 입이 밭으면 몸이 견디지 못한다. 맛이 있건없건 꽝꽝 먹어야 해.》

그는 국그릇에다 밥을 털썩 말아주며 숟가락을 손에 쥐여주었다.

언니와도 같은 그 다심한 마음이 고마와 예봉은 다시금 숟가락을 들었다.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처녀들이 신옥에게 물었다.

《언니네 친척인가요?》

신옥은 웃으며 《그래.》하고 대답하였다.

《참 곱게 생겼구만요.》

그 말에 예봉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였다.

그런데 신옥은 자기가 칭찬이나 받은듯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렇지? 인제 더 크면 미인이 될수 있어.》

그러자 한 처녀가 핀잔조로 말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델 끌고왔어요? 미인이 되기 전에 일 나겠어요.》

신옥은 말문이 막혀 잠잠하였고 예봉은 더욱 머리를 구겨박았다.

남들에게서 곱다는 말을 처음 듣는바는 아니였지만 자기의 앞날을 걱정하여주는 그들의 말에서 예봉은 말할수 없는 충격을 받았던것이다.

공장이 생지옥이라더니 진짜일가? 괜히 오지 않았을가? 그의 공포심은 점점 더하여갔다.

 

*          *

 

작업장에서 예봉에게 차례진 일감은 큰 가마같은 뜨거운 물속에서 실을 건져내여 감는것이였다.

그런데 예봉의 키가 작다나니 작업대까지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광경을 보던 신옥이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자그마한 디딤돌을 고여주었다.

그우에 올라서서야 예봉은 겨우 물에 손을 잠글수 있었다.

더운 김이 확확 서려오르는 물속에 손을 잠그던 예봉은 앗 하고 비명을 지를번 하였다.

설설 끓는 물이 너무도 뜨거워 그는 소스라치듯 손을 빼였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옆에서 일하는 숱한 처녀들은 뜨겁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땀을 비오듯 쏟으면서도 뽀얗게 서린 김속에서 부지런히 실을 건져내여 감고있었다.

예봉은 눈을 꼭 감고 다시금 물속에 손을 잠그었다. 금시 손가락들이 타드는듯 참을수 없는 열기가 두손을 지지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물속에서 실을 건져내였다. 그리고 서툰 솜씨로 홈판에 천천히 감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온몸이 후줄근히 젖어들었다.

뽀얀 김이 서려있는 작업장은 하나의 큰 한증탕을 련상시켰으니 그속에서 처녀들은 땀으로 미역을 감으며 12시간이상의 고역을 치르고있었다.

고달픈 녀공생활의 첫걸음을 예봉은 이렇게 떼였다.

 

*           *

 

고된 로동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어느덧 한해가 지났다. 인제는 어지간히 실뽑는 일에 익숙이 되였으나 그대신 그의 몸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하루의 결근도 없이 꼬박 일해야 하루 10전씩 한달에 3원을 받아쥐나마나하였다.

그러나 그 돈을 꽁꽁 모아두었다가 한달에 한번씩 면회오는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기쁨이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자기의 힘으로 번 돈이라는 일종의 긍지랄가. 여하튼 그는 자기에게도 집안식구들을 먹여살릴수 있는 힘이 있다는 자신심을 가지게 되여 일에 더욱 열성을 내였다.

그러나 워낙 잔약하였던 그의 육체가 견디여내지 못하였다.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12월, 양력설을 며칠 앞둔 어느날 그는 그만 작업장에 쓰러지고말았다.

위병에 영양실조까지 겹치다나니 심한 빈혈이 왔던것이다. 정신을 잃은채 신옥의 등에 업혀 합숙으로 온 그는 그날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같은 호실의 처녀들이 걱정하며 여러모로 애를 썼으나 좀처럼 입맛이 돌아서지 않았다.

온기 하나 없는 다다미방에 홀로 누워있느라면 더욱 그리운것이 집이였다. 불시에 집으로 가고싶은 충동에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너무도 무섭게 변한 자기의 모습에 그만 진저리를 치고말았다.

우묵하게 패워들어간 눈, 살이 빠져 더욱 두드러지게 살아난 코마루, 시누렇게 변한 얼굴색…

한창나이 처녀들이 우글거리는 이 제사공장에서도 곱다는 말을 들어오던 자기의 얼굴이 너무도 흉하게 변한데 놀란 그는 그만 거울을 집어던지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말았다.

아릿한 눈물이 한방울두방울 눈귀에 맺혀 흐르며 베개를 적시였다.

이 모양으로 돌아가면 할아버지는 얼마나 가슴아파 우실가? 또 집안살림은 어떻게 하고?…

가난으로 인한 불행은 14살 소녀에게 이렇듯 너무도 엄청난 마음의 부담을 들씌우고있었다.

그래서 불행은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한다고 말하는것이다.

교대를 마친 신옥이가 자그마한 단지를 안고 들어섰다.

그는 푹 쓰고있는 예봉의 이불을 들치며 그를 안아일으켰다. 그러던 그는 예봉의 눈을 보자 가볍게 나무랐다.

《울기는 왜 울어 나약하게.》

그리고는 다정스레 《내가 맛있는것을 가져왔다. 어서 일어나서 밥을 먹자.》하고 말하였다.

예봉은 얼른 두눈굽을 훔치며 싫다고 도리머리를 하였다. 그러나 신옥은 가져온 자그마한 단지를 펼치며 밥그릇들을 차려놓았다. 그가 풀어놓은 단지에는 풋고추를 박은 조선된장이 하나가득 담겨져있었다.

그는 예봉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며 말하였다.

《입맛을 돋구는데는 된장이 제일이야. 어서 먹어.》

향긋한 장냄새가 예봉의 코를 찔렀다. 그는 불시에 밥을 먹고싶은 생각이 일어 된장단지부터 손이 갔다.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보관하였는지 새파란 풋고추가 박힌 된장맛은 꿀보다 더 달았다.

이때의 된장맛이 어찌나 잊혀지지 않았던지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그때일을 감회깊이 회상하군 하였다.

예봉이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신옥은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하였다.

《용타.》

그는 예봉의 등을 쓸어주었다.

《언니, 이 된장을 어데서 구했나요?》

밥을 먹던 예봉이가 가냘픈 소리로 물었다.

《어머니가 면희올 때 가져오셨어. 방금 가셨단다.》

《그래요?》

예봉이도 신옥의 어머니를 잘 안다.

예봉이와 신옥은 그사이 친자매간같이 자별한 사이가 되여버렸다. 하여 서로의 처지들도 터놓게 되였는데 신옥은 어느날엔가는 자기의 집으로 예봉을 데려간적도 있었다. 그때에야 예봉은 신옥이 시집간지 얼마 안되여 왜놈공사판에서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모시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시어머니에 대한 신옥의 효성은 이만저만 아니였고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정성 또한 극진하였다. 한달에 둬번씩 시어머니가 면회를 왔는데 신옥이가 예봉의 병을 걱정하자 풋고추를 넣은 된장을 보내왔던것이다.

예봉이가 밥 한공기를 다 먹자 신옥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며 칭찬하였다.

《병도 사람을 가려본단다. 억지로라도 밥을 먹으면서 이악하게 싸우면 저절로 물러간단 말이야. 울기만 하면 병도 너를 숙봐.》

《피-거짓말.》

오래간만에 예봉의 피기없는 얼굴에 가냘픈 웃음꽃이 폈다. 신옥이만 곁에 있으면 그는 모든 시름이 다 가셔지는것 같았다.

너무도 인정에 주린 그는 자기를 리해하는 신옥이를 만나자 무작정 그에게 매달리게 되였던것이다.

인정에는 인정으로 보답하는것이 사람의 천성이다.

신옥의 사심없는 사랑과 애정은 좀처럼 누구에게나 선뜻 정을 주지 못하던 예봉의 마음을 삽시에 녹여버렸다.

신옥이가 웃음어린 얼굴로 말하였다.

《거짓말은 무슨 거짓말, 너 전번에 파업할 때 칠녀언니 보았지? 사납게 날뛰던 놈들도 그 언니앞에서는 움츠러들지 않던. 병도 마찬가지야. 네가 맞받아나가면 병도 너를 무서워하며 스스로 물러가거던.》

신옥의 말은 예봉의 머리속에 몇달전에 있었던 일을 선히 떠올렸다.

그것은 예봉이가 공장에 와서 처음 겪어본 심각한 체험이였다.

일은 이렇게 벌어졌다.

공장의 왜놈감독 한놈이 눈독을 들이던 녀공이 제 요구에 응하지 않자 한밤중에 합숙방에 뛰여들어 그를 겁탈하려 하였다.

그 녀공이 죽기로 항거하자 악이 오른 왜놈감독은 그 처녀를 거의 반주검이 되도록 구타하고 도망쳤다.

녀공들이 들고일어나 처녀의 병치료와 왜놈감독을 해고시킬것을 요구하자 공장측은 아닌보살하면서 위자료 몇푼 쥐여주는것으로 어물쩍해버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공장 전체 녀공들이 총파업을 일으켰다.

예봉이도 언니들이 하는대로 일을 나가지 않고 합숙에서 버티였다.

그런데 3일째되는 날에 파업을 주관하였던 칠녀라는 처녀가 체포되였다.

칠녀는 늘씬한 체격에 삼단같은 검은 머리채를 허리까지 치렁치렁 드리운 활달한 처녀였다.

포승에 묶이운채 경관들에게 끌려가면서도 그는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없이 녀공들에게 왜놈들의 멸시와 천대에 순응하지 말라고 웨치는것이였다.

그 웨침소리는 오래도록 예봉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의 당당한 모습은 영원히 잊을수 없는 모습으로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던것이다.

지금도 칠녀언니를 생각하면 놈들에게 굴복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가 체포되자 파업도 어느새 흐지부지되여버렸고 다시금 왜놈감독들의 채찍밑에 녀공들은 고역장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예봉은 그토록 견결한것 같던 언니들이 칠녀가 체포되자 하나둘 흐트러지며 왜놈들의 요구대로 순순히 응하는것이 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제일 나어린 그로서는 어찌할수도 없었다.

그저 언니들이 하는대로 따라할뿐이였다.

그러나 칠녀언니의 모습은 그에게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겼으니 아무때건 자기에게 그 누군가가 못되게 놀면 칠녀언니처럼 당당하게 맞서 싸우리라는 속다짐만은 깊이깊이 굳어지고있었다.

 

*           *

 

새해 정초부터 예봉은 다시 작업장으로 나갔다.

아직도 채 추서지 못한 몸이라 일하기가 한결 힘들었다. 휘친거리는 몸을 겨우 다잡고 부지런히 실을 골라잡던 그는 너무도 손가락이 쓰리고 아파 저도모르게 물속에서 손을 꺼내고말았다.

누워있는 며칠사이에 겨우 아물었던 딱지가 다시 터져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르고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마디들이 너무도 쓰리고 아파 그는 한동안 손가락을 싸쥐고 주물렀다.

물크러질대로 물크러진 손가락들이였다.

이때 공장적으로 제일 못되기로 소문난 왜년감독이 예봉을 띠여보았다.

손을 문지르고있는 예봉을 잡아먹을듯 쏘아보던 왜년감독은 다짜고짜 다가와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쪼꼬만 년이 일은 안하고 뭘해?》

순간적으로 가해진 타격에 정신이 아찔해진 예봉은 비칠거리다가 그만 디딤돌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나딩굴었다.

물이 질벅한 바닥이라 예봉의 온몸은 순식간에 물참봉이 되여버렸다.

표독스럽게 그를 쏘아보던 왜년감독은 이번에는 그가 감아놓은 홈판을 두드리며 트집을 잡았다.

《실감은 꼬락서니가 이게 뭐야? 왜 이리 고르롭지 못해?》

옆의 처녀들이 부축해서야 예봉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예봉의 가슴속에서는 왜년감독에 대한 증오의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그년앞에서 맥없이 나딩굴었던 자신이 수치스러울만큼 이런 모욕을 가한 감독년에 대한 용서할수 없는 감정이 어린 그의 가슴을 태웠다.

그는 매서운 눈길로 감독년을 마주 쏘아보았다.

문득 칠녀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칠녀언니처럼 당당해야지!

그는 속으로 다짐하며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들이대였다.

《내가 일을 잘못하였다면 배워주어야지 때리기는 왜 때려요? 무슨 권리로 사람을 때려요?》

주눅이 들어 빌붙을줄 알았던 예봉이가 이렇게 대들자 왜년감독은 잠시 어리뻥뻥해졌다가 급기야 꽥 소리를 질렀다.

《꼭대기에 피도 안마른 년이 무슨 대답질이야?》

그러면서 감독년은 다시금 그의 볼을 힘껏 때리였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파란 불찌들이 튕겨오르는듯 눈앞이 아찔해졌다.

여태껏 그 누구에게서도 매를 맞아보지 못한 예봉은 너무도 분하여 울음조차 나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팔팔 타는 눈길로 왜년감독을 쏘아보던 그는 누가 어쩔사이없이 왜년이 들고있던 회초리를 홱 나꿔채서 끓는 가마물에 훌 집어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물이 흐르는 치마자락을 탁탁 털며 웨쳤다.

《왜 자꾸 때려요? 공장에서 나가면 되지 않아요.》

그는 오연한 자세로 홱 돌따서 작업장을 나와버렸다.

왜년감독은 너무도 돌발적인 사태앞에서 한동안 넋을 잃고 서있었다. 조그마한 계집애라고 얕보고 달려들었다가 큰 랑패를 본것이다.

합숙으로 뛰여들어온 예봉은 곧장 집으로 갈 생각으로 부리나케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교대작업을 하고 쉬고있던 신옥이와 몇몇 처녀들이 무슨 일인가고 눈이 휘둥그래서 물었다.

예봉은 격하여 방금 있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난 그들은 모두 예봉을 춰주었다.

《그년에게는 좀 본때를 보여야 해.》

《우리 예봉이가 인젠 제법인데…》

저녁에 작업장에서 돌아온 다른 처녀들도 입을 모아 예봉이가 대단하더라고 떠들었다.

그러면서도 공장에서 나가는것은 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왜년감독이 예봉을 찾아왔다.

그는 자기 성격이 원래 급해서 그랬는데 리해하라고 예봉을 달래기 시작하였다.

몇달전의 파업을 겨우 눅잦혔는데 자기때문에 다시 소동이 일어날가보아 퍽 겁먹은 눈치였다.

그럴수록 예봉은 더욱 도고해졌다.

래일부터 다시 작업장으로 나오라고 애걸하다싶이하는 왜년감독의 말을 단호히 일축해버리며 그는 랭정하게 말하였다.

《난 공장에서 나가겠으니 더 길게 말할게 없어요.》

그런데 그이튿날 우연하게도 할아버지 문형섭이 면회를 왔다.

그는 몹시 상한 손녀의 모습을 보고 너무도 놀라 온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파리하다못해 노랑꽃이 핀 얼굴, 너무도 여위여 훌 불면 날아갈것만 같은 몸…

그는 그길로 손녀의 손을 잡아끌고 공장문을 나섰다. 더는 이 지옥속에 손녀를 둬둘수 없었던것이다.

녀공생활 1년 4개월만에 예봉은 위병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병든 몸이 되여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다.

 

*           *

 

《문선생이 녀공생활까지 했을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댔어요. 가정적으로도 그렇고 참 불행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셨군요.》

나직이 말하는 요시꼬의 얼굴에는 동정과 련민의 정이 그득하였다.

《나혼자만이 당한 불행이 아니지요. 나라를 빼앗겼던 그 시절 조선녀성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온걸요.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고있는 그 신옥언니를 보아도 그렇지요.

공장을 나온지 몇해후에 연극공연하러 함흥에 갔던 길에 신옥언니를 찾아보니 그가 없더군요. 글쎄 함흥제사공장에서 영등포방직공장으로 팔려갔다가 거기서 페병으로 사망했다는게 아니겠어요.

그 충격으로 시어머니도 인차 돌아가시고…

그 언니를 따라 놀러갔던 옛집에까지 찾아갔댔는데 집은 없고 그자리에는 풀대만이 무성하더군요. 그 언니의 시체를 왜놈들이 불태워없애는 바람에 시체도 못 찾아 봉분도 없었어요.

그 옛집터자리에서 어떻게나 울었던지…》

옛일을 더듬는 문예봉의 두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맺히였다.

정말로 그의 어린시절은 눈물과만 인연이 얽혀졌는지 듣느니 그저 눈물나는 이야기뿐이였다.

우리 셋은 한동안 제마끔의 생각에 잠겨 침묵하였다.

나의 눈앞에는 불현듯 예술영화 《붉은 꽃》, 《다시 찾은 이름》에서 형상된 문예봉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주아들놈이 던지는 밤송이에 맞아 두눈을 잃은 딸애를 붙안고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어머니(《붉은 꽃》), 지주놈에게 속히워 배를 타고 떠나가는 어린 딸애를 부르며 정신없이 강물로 뛰여들던 어머니 (《다시 찾은 이름》)의 모습!

사람들을 울리던 그 역형상들은 단순히 연기라기보다 바로 문예봉자신이 걸어온 눈물겨운 실생활체험의 진실한 반영이 아니였을가.

생활의 진실은 체험속에서만 터득되는 값비싼 열매이다.

그러니 일제시기 불행에 허덕이던 조선녀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진실하게 창조한 문예봉의 역형상들에는 바로 그가 겪은 불행과 고통의 지난날들이 우렷이 비껴있었다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펴나가던 나는 문득 요시꼬의 어린시절은 어떻게 흘렀을가 하는 야릇한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그는 불행하지 않았으리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듯 한 요시꼬에게 한마디 비쳤다.

《요시꼬선생의 어린시절은 물론 행복했겠지요?》

돌발적인 나의 질문에 잠간 큰 눈을 굴리던 그는 빙긋이 웃었다.

나의 속마음이 짐작된다는 의미가 온 얼굴에 씌여져있었다.

《무척도 반발적인 질문인데요. 장선생의 마음이 충분히 리해됩니다. 응당 그럴수 있지요. 숱한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피땀의 대가로 일본인들이 풍청거린것은 속일수 없는 력사의 진실인걸요.》

요시꼬는 문예봉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해보았다.

어린시절을 돌이키려니 제일먼저 눈앞에 펼쳐지는것이 봉천(심양)시가지의 이채로운 정경이였다.

청나라 흥망의 증견자인양 력사의 무게가 느껴지던 청태조 누르하치와 태종의 고궁과 릉묘가 자리잡고있었으나 그와는 선명히 대조되게 시내중심부에는 중국인거리, 일본인거리, 유럽식거리들이 밀집되여 번화가를 이루고있던 봉천!

국제적분위기가 농후하던 이 도시에서 그의 어린시절이 흘렀다.

무순에서 14살되는 설날 그는 리제춘장군의 양딸로 되는 의식을 치르었다.

그날아침 요시꼬는 두손을 소매에 찌르고 머리를 무릎에 가져다붙이며 중국식으로 세번 리제춘장군에게 절을 하였다. 그다음 세배하러온 손님들의 옹위속에 장군이 부어주는 술잔을 다 비우고 다시 장군에게 술을 부어올렸다.

이런 례식으로써 요시꼬는 정식 리제춘장군의 양딸이 되였으며 《리향란》이란 이름을 받게 되였다.

일찌기 만주에 흘러들어 만철회사에서 일하던 요시꼬의 아버지는 딸을 정치가의 서기로 키울 목적이였다.

그리하여 이미전부터 인맥관계가 깊었던 리제춘장군에게 딸의 교육을 맡겼으며 장차로는 유명한 정치가 번육계에게 보내여 류학시킬 결심이였다. (후에 요시꼬는 다시 번육계의 양딸로 번숙화란 이름을 가지였었다.)

아버지의 이런 《웅대한 계획》에 따라 요시꼬는 만주에서 이름이 높던 군벌 리제춘장군의 딸로 되여 봉천녀자상업학교에서 공부에 열중하게 되였고 중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였다.

페결핵을 앓은 후 료양기간에는 일류급의 가극배우 뽀뜨레쏘바부인에게서 개별음악교수를 받았다.

그 부인에게서 요시꼬는 후날 그토록 그를 유명케 한 새의 지저귐소리같은 떨림창법을 터득하게 되였던것이다.

한마디로 요시꼬자신의 어린시절은 미래라는 창공을 드높이 날기 위하여 깃을 다듬은 행복한 준비기였다.

그러나 문예봉은? …

그에게서 미래란것은 없었다. 오직 현재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이 있을뿐이였다.

요시꼬는 자신의 행복하였던 어린시절의 하루하루가 문예봉이 방울방울 흘린 눈물의 대가로 이루어진것이나 아닐가 하는 일종의 죄의식에 사로잡힘을 어쩔수 없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실시한 가혹한 식민지통치와 략탈정책의 올가미속에서 조선의 매 가정과 인간들이 파탄과 멸망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질 때 그 대가로 일본이 살쪄갔고 일본인들의 생활이 날로 윤택해져갔다는것은 움직일수 없는 력사적사실이 아니였던가.

그 시대에 문예봉이 살고 요시꼬가 살았으니 종주국민과 식민지인의 생활은 이처럼 하늘과 땅처럼 달랐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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