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종 장

 

눈이 내리고있었다. 푸름한 새벽하늘에 남실남실 흩날리던 싸락눈이 어느새 함박눈이 되여 펑펑 쏟아졌다. 서울의 탑골공원은 흰눈으로 소복단장을 하고있었다. 나무들의 아지마다 햇솜같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점차 가늘어지는 눈발속으로 로년기의 남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윽토록 마주보다가 반갑게 부둥켜안기도 하고 꽉 잡은 손을 젊은이들처럼 힘차게 흔들기도 하였다.

로인들의 수가 수십명가량 늘어났을 때 김현철과 연희를 앞세운 장필성이 나타났다. 그는 활기있게 씨엉씨엉 걸으며 로인들에게로 다가갔다.

오래간만이라느니, 한해가 다르게 몰라보게 늙었다느니 하며 서로 인사들을 나누고난 뒤 그가 김현철의 손을 잡아 내세우며 소개했다.

《김지우기자의 아들입니다. 현재 명동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합니다.》

《김현철입니다.》

김현철은 누구에게라 없이 늙은이들을 향해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로인들이 깜짝 놀라며 그를 둘러쌌다.

《정말 김지우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래도 지우가 자기의 피줄을 이어놓았구만.》

《암, 그래야지. 끌끌하게 자랐소. 지우가 저 모습을 보면 땅속에서도 벌떡 일어날지 몰라.》

김현철의 손을 잡아보고 어깨를 어루쓸며 로인들은 반가와했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도 김현철은 그들이 누구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장필성을 통해 그들이 아버지의 옛시절 동료들이며 한때 하나일보사에서 일했다는것 정도로 알고있었다.

김현철은 자기의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있는 그들이 무등 반갑고도 고마웠다.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것이 쉬임없이 솟구쳐 목이 꽉 메였다.

장필성은 김현철의 손을 놓지 못해하며 옛일을 추억하는 로인들을 남겨둔채 저만치에 떨어져 서있는 강정웅과 라경숙, 최세진에게로 다가갔다.

김현철이 연희와 함께 지옥같은 지하창고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지상에 올라서자 최세진과 그가 이끈 사람들이 함성을 울리며 에워쌌다.

며칠후 그가 응급치료를 받고 건강이 좀 회복된 후에 장필성이 조용히 만나자고 하였다. 그가 들려준 청천벽력같은 고백은 지금도 김현철의 귀전을 떠나지 않았다. 피눈물의 과거사였다. 그리고 이미 밝혀지기 시작한 또 하나의 진실이였다. …

이윽고 한대의 뻐스가 공원입구로 다가와 섰다. 사전에 예약했던 임대뻐스였다. 일행이 모두 오르자 뻐스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한산성의 동문을 벗어나 금복리의 야산자드락길주변에 이르러 뻐스가 멎었다.

뻐스에서 내린 일행은 숫눈을 밟으며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푸근푸근하던 눈이 다져지고 마지막 몇사람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서로 부축하며 올랐다. 수림속에 듬성듬성한 옛무덤들을 찾은 그들은 《<하나일보>사장 정영수지묘》라고 쓴 비석앞에 빙 둘러섰다.

30대 초엽의 나이에 이승과 하직한 젊은 사람의 초상이 어제날의 옛 동료들을 마주보며 반색의 미소를 짓는듯싶었다. 먼저 준비해온 제물들을 차리고 제를 지내였다.

이윽하여 장필성에게 등이 떠밀린 김현철이 나섰다. 그가 추도사를 읽게 된것이였다.

그는 《하나일보》를 창간해 민족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정영수사장이 군부파쑈독재세력에 의해 억울한 루명을 쓰고 처형된데 대해 언급하고 그것은 이 땅의 민심이 갈구해온 민주와 통일, 정의와 진리에 대한 유린말살이자 사형선고였다고 절규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의 명예회복은커녕 모해사건의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고 단죄하고나서 이것을 바로잡는 의미에서 《하나일보》사건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격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나라의 통일과 민주를 위해 한몸을 바치고도 미국과 그 하수인들에 의해 빨갱이로 매도당하고 무고한 희생을 강요당한 유명무명의 선렬들과 그 가족, 친척들의 원한에 찬 울부짖음이 우리들의 가슴을 천갈래만갈래로 찢고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때없이 들려오는 그 <두견새>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피타게 우리를 부르고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미국과 파쑈악당들을 묵인하면 래일에는 우리모두가 수천수만의 <두견새>가 될것이라는 처절한 교훈을 새겨주고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우에는 아직도 친미사대와 독재권력에 환장을 하여 동족대결을 부르짖는 보수패당들이 있습니다. 그자들은 한피줄을 이은 형제들에 대한 온갖 음해와 더러운 음모로 자기들의 정권야욕을 가리우려 하고있으며 이 땅의 모든것을 무참히 짓밟고있습니다. 지어 동족대결의 수치스러운 과거사까지도 전통이라고 떠들고있습니다. 그러나 그자들은 깨닫지 못하고있습니다.

이 땅에서 미국의 막후통치는 이미 파산에 직면하였으며 보수세력이 위기수습용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약국의 감초처럼 써먹군 하는 반북모략극인 <북풍>이라는것도 이제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것을! …》

김현철은 숨을 크게 내쉬였다. 그리고 자기의 말을 확증이라도 하려는듯 지나간 최근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대통령》선거는 마지막까지 첨예한 대결속에 흘러갔다.

아직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총적으로는 6.15공동선언을 고수, 지지하는 민주개혁세력과 미국의 비호속에 《정권》탈취를 노리는 보수세력간의 대결구도로 전개되였다.

보수계층은 본격적인 유세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민주개혁세력후보에게 《극좌분자》, 《미국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반미분자》의 딱지를 붙여놓고 판에 박은 《색갈론》으로 비방중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유일후보를 내세운 개혁세력진영에서 일시 대혼란이 일어났다. 유세 전기간 중도세력임을 표방하면서 진보세력의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환심을 얻으려고 후보직까지 사퇴하고 단일후보를 지지해나섰던자가 미국의 지령에 따라 불시에 탈퇴를 선언하고는 로골적으로 보수세력에게 가붙었던것이다.

그 소식에 접했을 때 김현철은 이가 갈렸다. 처음부터 보수계층을 부추겨 개혁세력후보를 《용공분자》로 매도하다 못해 어제날의 《랍북미수극》을 방불케 하는 또 하나의 특대형사기모략극을 펼쳐놓은 미국의 술책에 분격해서였다.

이때 미국의 교활한 음모와 그 사환군들의 배신협잡행위에 환멸을 느낄대로 느낀 민중이 일시에 들고일어났다.

가뜩이나 온 남녘땅을 휩쓴 대중적인 반미초불시위로 정면을 호되게 얻어맞은 미국이라는 괴물의 뒤통수에 민중의 이름으로 드센 철추가 가해졌다.

마지막 표결직전까지 희세의 기만극을 펼쳐놓고 승리를 장담하며 기고만장하여 때이르게 샴팡을 터뜨리고있던 미국과 보수세력은 예상을 뒤집은 개표결과에 기절초풍하고말았다.

미국이 조대풍까지 줴버리며 이악하게 밀어준 보수야당후보가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를 수직관계로부터 수평관계로 만들겠다고 공약한 민주개혁후보가 당선된것이였다. 그것이 선포되자 서울주재 미국대사관과 보수야당의 본거지는 순식간에 초상집으로 되여버렸다.

선거판세를 역전시킨 비결을 두고 사회여론은 《반미가 친미를 심판한것》이라고 평했다. 선거가 끝난지 10여일이 지난 12월 31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50만의 민중이 참가한 대규모적인 반미초불시위가 진행되여 그것을 뚜렷이 실증해보였다. …

김현철은 확신에 넘쳐 소리높이 웨쳤다.

《그렇습니다. 정의와 진리가 언제이건 승리한다는것은 력사가 보여주는 철리입니다. 이 땅에서 여직껏 감행되여온 미국과 우익보수패당의 반인륜적이며 반민족적인 반공, 반북모략소동과 동족대결의 수치스러운 력사를 완전히 끝장낼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정영수사장뿐만아니라 반공이라는 동족대결관념에 의해 빚어진 이 땅의 모든 비극적인 과거와 력사를 재규명하고 바로잡아나감으로써 지금도 반북모략을 유일한 생존수단으로 삼고있는 미국과 친미사대보수세력에게 력사의 무자비한 판결을 내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후대들에게 화목하고 단합된 온 겨레의 보금자리인 하나의 통일국가를 넘겨주기 위해 끝까지 나아갈것입니다!》

그의 연설에 호응하여 격동적인 박수갈채가 뒤따랐다.

이어 진상규명추진위원회의 결성을 지지하는 서명들이 진행되였다.

최세진이 김현철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친 몸은 정말 괜찮나?》

김현철은 미소를 지었다.

《많이 나았습니다.》

《그래, 참 다행이네. 이제 보니 자넨 몰라보게 성장했더군. 또 실로 큰일을 했고…》

김현철은 머리를 저었다. 단순한 겸손이 아니였다. 사실 그 큰일이란 그 혼자가 한 일이 아니였다. 최세진과 강정웅, 장필성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민중이 단합되여 이룩한 승리였다. 결국 파쑈독재의 회귀를 꿈꾸던 미국과 극우익보수세력의 망상은 산산이 붕괴되고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옛꿈을 버리지 못하고 반성이 아니라 새로운 음모를 꾸미면서 더욱 악랄하게 파쑈독재의 망령을 되살리려고 발악하고있을것이다. 하기에 자주와 민주, 통일의 앞길에는 시련과 위기가 가셔지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그가 웨친것처럼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승리할것이며 바로 그들의 편에 있는것이였다.

김현철은 래일에 대한 굳은 확신을 안고 사람들의 손과 손을 힘있게 맞잡았다.

이윽고 산을 내린 그들은 다시 뻐스에 다가갔다.

로인들을 부축하며 뻐스로 오르려던 김현철은 곁으로 다가오는 낯익은 사나이의 모습을 보았다. 곽동수였다.

《오빠!》 하고 연희가 그를 반겼다.

곽동수를 포옹하며 김현철은 기쁜 어조로 물었다.

《언제 출옥했습니까?》

《방금 나오는 길입니다.》

곽동수는 웃었다.

《연희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곳으로 간다더군요.》

김현철은 진정을 담아 말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평생 잊지 않을것입니다.》

곽동수는 그런 말을 말라고 손을 저었다.

《김기자에 대한 살인미수혐의로 수배되였던 리기철이라는 놈은 이미 해외로 달아났다더군요. 그런 악당을 놓치다니… 내가 감옥에 갇혀있지만 않았어도 반드시 붙잡는것인데… 참, 아쉽게 되였습니다.》

그는 연희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계속했다.

《이번에 정말 큰걸 얻었습니다. 혈혈단신이던 나에게 누이동생이 생겼으니까요. 앞으로도 연희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빠로 살 결심입니다.》

정겹게 연희를 바라보던 곽동수는 결혼식초청장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김현철과 연희는 오래도록 그를 바래웠다.

어느결에 함박눈이 또다시 펑펑 쏟아졌다.

아득한 눈발속을 바라보며 연희가 나직이 물었다.

《이제 무엇부터 하실셈이예요?》

김현철은 아무 대답도 않고 먼 눈발속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자기의 아버지가 하려다가 한으로 남겨놓은 일이였다. 그리고 비명에 떠나간 어머니의 피맺힌 원한을 푸는 길이기도 했다. 악당들에게 붙잡혀 캄캄한 지하창고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한초한초 생명을 태워가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아무리 두려워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였다.

《무슨 생각을 하오?》

김현철이 연희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연희는 연한 눈시울에 해맑은 미소를 담뿍 실으며 속삭였다.

《앞으로 현철씨에게 어떤 보험이 필요할가 하고 따져보는중이예요.》

김현철이 호탕하게 웃자 연희는 그의 어깨에 달아오른 얼굴을 묻었다.

김현철은 하얀 눈발속에 우중충한 산봉우리를 돌아보았다. 저 산너머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무덤에도, 멀리 춘천의 어느 산속에 외로이 있을 어머니의 무덤우에도 흰눈이 소복이 덮이고있을것이다. 여느때없이 부모들의 모습이 그리워났다.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혈육의 정이였다.

(아버지, 보고계십니까? 지금 제곁에 서있는 이 사람, 이 처녀를 저는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어떻게 사망하였는지 아십니까?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피덩이였던 나를 성당에 떨궈두고 밤중에 산을 넘다가 피살되였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먼저 바쳤답니다. … 아버지, 지금 내곁에 있는 이 처녀도 어머니를 꼭 닮았습니다. 제가 그리워한 어머니의 사랑을 나에게 이어준 처녀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해 그러했듯이 나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던졌던 처녀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에게 진실한 사랑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앞으로 이 처녀와 한생을 함께 하렵니다. 아버지, 이제 겨울이 가고 청명이 오면 아버님과 어머님을 양지바른 곳에 모시겠습니다. 그때 다시한번 우리를 축복해주십시오.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불의에 굴하지 않은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아버지가 전하지 못한 진실을 이제는 우리들이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눈발속에 두렵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그 길을 김현철은 연희와 함께 갈것이다. 분렬된 민족의 비극을 끝장내고 밝은 태양을 마중하는 그 길로 연희와 손잡고 끝까지 갈것이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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