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43

  

곽동수가 연희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돌아서려던 그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문을 밀어보았다. 열쇠는 채워져있지 않았는데 방은 텅 비여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책상우에 놓여있는 연희의 손전화기를 발견했다.

혹시 어디 나가면서 잊고 간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예감은 좋지 않았다. 그는 손전화기의 통화기록을 살폈다. 마지막 통화기록을 보는 순간 곽동수의 머리속으로 번개불이 쳤다.

그가 급히 방에서 나오는데 맞은켠 복도에서 승강기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사람들이 쓸어나왔다. 형사들이였다. 그들은 곧장 곽동수에게로 다가왔다.

《오래간만이군.》

그의 앞에 와 멈춰선 형사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차겁게 말했다.

《곽동수, 너를 김현철기자랍치 및 살인교사혐의로 체포한다!》

어느결에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형사님, 무슨 오해가 있은것 같습니다.》

곽동수의 말에 형사는 히죽히죽 웃었다.

《그건 조사해보면 알겠지.》

곽동수는 자기가 음모에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바로 이 위급한 순간에… 정말 교활무쌍한자들이였다. 자기들의 범죄를 곽동수에게 슬쩍 넘겨씌운것이였다. 이것도 사전에 준비된것일수 있었다. 곽동수는 속이 탔다.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 수갑을 차고 형사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선 곽동수의 모습은 라경숙이며 강정웅, 장필성 등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들을 위안하며 곽동수는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더 급한게 있습니다.》

곽동수는 형사의 손을 통해 연희의 손전화기를 장필성에게 전하며 덧붙였다.

《좀전에 따님이 김기자와 통화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그한테 가있을지도 모릅니다.》

《뭐요?!》

누구보다도 장필성이 펄쩍 뛰였다. 김현철의 곁에 있다는것은 연희가 죽음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는것을 의미했던것이다.

형사가 곽동수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강정웅이 앞을 막아섰다.

《김기자의 실종신고는 우리가 하였는데 어째서 이 사람을 잡아가는거요?》

형사는 곽동수의 구속령장을 내보였다.

《우리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러는줄 아십니까? 이미 곽동수가 홍콩에서부터 김기자를 미행하였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저녁부터 곽동수는 이 호텔에 김기자를 감금했고 그가 호텔을 탈출하자 거리에서 택시를 리용하여 랍치하였다는 신고도 들어왔습니다.》

《이건 터무니없는 날조요!》

《미안하지만 신부님! 우리는 지금 공무집행중에 있습니다.》

형사는 랭랭한 어조로 위협하듯 말했다.

곽동수가 나서며 다급히 말했다.

《김기자와 장연희씨를 빨리 구원해야 합니다. 그들이 위험합니다. 또 그들이 무사해야 내가 무죄라는것도 립증할수 있습니다.》

그가 끌려나간 뒤 방안에는 오래도록 납덩이같은 침묵이 흘렀다.

장필성은 아직도 딸의 입김이 느껴지는듯 한 손전화기를 안타깝게 쓸어만졌다.

(귀여운 내 딸아! 넌 대체 어디에 있느냐? 왜 이 아비와는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너 혼자 그 무서운 곳으로 갔단 말이냐? 어째서? 과연 내가 어떻게 해야 너를 구원할수 있겠느냐!)

장필성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비록 실종된 현철이와 통화한 기록은 남아있지만 이것 하나로 연희도 랍치되였다고 가정하는것은 무리입니다. 우선 모두 밖에 나가 연희부터 찾아봅시다.》

강정웅이 위로하였으나 장필성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 아닙니다.》

장필성은 사람들의 만류도 마다하고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강정웅의 권고대로 곽동수가 남겨놓고 간 사내 한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

비틀거리며 거리에 나선 장필성은 곧장 리도희를 찾아갔다.

리도희는 깜짝 놀랐다.

《자네가 예고도 없이 웬 일인가? 어디 편치않은가? 얼굴빛이 좋지 않구만.》

장필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에 내가 보았던 자료! 그걸 아직 건사하고있소?》

리도희의 시선은 꼿꼿해졌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을 하오? 대체 무슨 일이 생겼소?》

《김현철기자가 실종되였네.》

《그렇게 됐군. 역시 그 사건때문인가?》

《그뿐이 아니네.》

장필성은 울먹거리는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내 딸도 좀전에 사라졌소.》

《뭐요? 그게 무슨 소린가? 어디서? 어떻게?》

리도희가 다급히 물었다. 장필성은 전후사연을 설명했다.

《딸애는 사라지고 실종된 김기자와 마지막통화를 한 기록이 남아있었소. 김기자가 스스로 전화할리는 만무해. 분명 그를 랍치한자들의 소행이야. 천진한 그애가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지도 모르고 찾아갔구려.》

리도희는 그의 주글주글한 손을 꼭 쥐고 어떻게 위로할지 몰랐다. 장필성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앞만 바라보며 실성한듯이 말을 계속했다.

《자넨 내 심정을 알지? … 그때 나도 위협을 받았네. 그까짓 나 하나의 생명이라면 주저할것도 없었네. 하지만 나에겐 딸이 있지 않나. 그자들이 내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할수 있다고 위협했었지. … 단순한 위협이 아니였네. 실지 내 딸애와 함께 등교하던 녀학생 하나가 의문의 차사고를 당했으니까! 그래서… 바로 그래서 난 그 기사를 바로 쓸수 없었소. 그 어떤 진실도 내 딸의 생명보다는 귀중하지 않았으니까. 헌데 10년도 지난 오늘에 와서 이게 뭐요? 왜 아직도 내가 이런 위협을 당해야 하오? 내가 무슨 죄가 있어 한생을 이렇게 숨막히게 살아야 하오? 원통하오. 원망스럽소. … 하긴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소? 내스스로 이런 세월을 묵인하고 용납해온셈인걸. 정말이지 나자신을 용서할수가 없소.》

리도희가 그의 등을 어루쓸며 말했다.

《우리가 그때 백척간두에서 한발을 내짚는 용기만 가졌어도 일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그때 끝장을 보지 못한 나약성과 타협이 오늘을 불러왔구려. 김기자가 나를 만나고 간 뒤에 나 역시 밤잠을 제대로 잘수 없었소. 지금도 우리는 그날의 소름끼치는 악몽속에 살고있지 않소?》

이윽고 안방으로 들어갔던 리도희가 작은 트렁크를 들고나왔다. …

장필성이 떠나간 후 리도희는 서재로 돌아와 진정제를 먹었다. 그리고는 나른한 몸을 쏘파에 실었다. 이제 저 트렁크가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올것이다. 나약하다고 혹은 비겁했다고 힐난할지도 모른다.

싱가포르에서 문태석《랍북미수》사건과 관련하여 작성했던 내부문건사본과 안기부와의 비밀대화록을 자의대로 루출한 죄를 물어 감옥으로 끌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은근히 두려워하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했던 그때가 드디여 온것이다. 하긴 이 땅우에 미국의 요구와 리익만을 절대시하는 독재권력을 미화분식하기 위한 꼭두각시외교의 력사가 흘러간것이 어째서 이 리도희 개인만의 잘못이란 말인가!

… 장필성이 트렁크를 들고 호텔방안에 들어섰을 때 최세진과 그가 데려온 신문사 편집부장이라는 사람이 김현철이 남기고 간 자료들을 보고있었다.

그런데 그와도 구면인 부장의 얼굴빛은 왜서인지 침침해보였다.

장필성이 그의 앞에 트렁크를 펼쳐놓자 그는 의아하여 올려다보았다.

장필성은 그에게 말했다.

《나도 한뉘 기자로 늙은 몸이라 자네가 지금 무얼 우려하는지 짐작이 가네. 이걸 보라구. 이건 문태석랍북미수사건을 빨리 결속하고 기자회견을 하라는 안기부의 공문사본들이요. 그리고 이것은 문태석을 심문했던 초기자료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안기부가 외교관들을 협박한 록음물들이요. 이런 증거면 안기부의 사건개입을 완전히 립증할수 있소.》

장필성이 넘겨준 자료를 깐깐히 살펴본 부장의 얼굴은 그제서야 확 밝아졌다.

《어디서 이런 보물을 얻었습니까? 이젠 됐습니다! 사실 김기자가 목숨을 걸고 구해온 자료들이 객관적이고 귀중하기는 하지만 당국의 공식수사과정을 거친것이 아니다보니 반대여론을 설득시키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던중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건사본과 자료들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매사에 빈틈이 없어보이는 그가 또다시 머뭇거리자 장필성이 격려했다.

《공문서사본들이라 후일이 념려되겠지? 괜찮소. 이 문건사본을 자의대로 루출한 죄는 우리 늙은이들이 질테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오. 이젠 우리도 이전처럼 살지 않을것이요.》

장필성이 말을 마치자 방안의 공기가 확 달라지는듯 했다. 최세진이 다가와 말없이 그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그리고는 부장에게로 돌아섰다.

《진정 우리가 후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겠나? 온 겨레가 일일천추로 바라마지 않는 민족의 단합과 통일, 평화번영이지. 이 길에서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더 기다리겠나?!》

그의 말을 지지하듯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힘있게 끄덕이였다. 부장이 최세진의 손우에 자기의 손을 얹으며 자책조로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잠시 주저했네. 죽음을 각오하고 진실을 밝히려고 애쓴 현철군과 이분들을 보기가 참으로 민망하네. 이제는 더이상 주저하지 않겠네. 민중이 갈망하는 이 땅의 정의와 량심을, 참다운 언론의 모습을 세상에 반드시 알릴 결심이네. 나를 믿어주게.》

그는 자료들을 모아 자기의 가방에 넣고는 급히 사라졌다.

류다른 눈빛으로 최세진과 장필성을 번갈아 바라보던 강정웅신부가 한마디 던졌다.

《거짓은 문틈으로 새여들어오고 진리는 대문을 활짝 열고 당당히 들어온다는 말이 있지요. 진정 거짓의 검으로는 진실을 벨수 없는 법입니다.》

그때 방안의 전화종이 요란스레 울렸다.

최세진이 수화기를 들자 낯선 사나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라지 마시오. 난 김현철기자가 있는 곳을 알고있는 사람입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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