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3 장 어둠속의 동쪽

35

 

짬을 내여 김춘옥이 살해된 집이 있는 주택지구를 관할하는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가 김춘옥의 살해사건에 대해 물었을 때 홍콩경찰들은 시답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제기되고있는 수많은 사건처리에도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판인데 10여년전의 살인사건에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겠는가 하는 태도였다.

이미 예상하였던 김현철은 몇번 설득해보다가 나중에는 소위 관광의 천국으로 자부하는 홍콩에서 외국인이 살해된 사건을 10여년나마 방치한것도 모자라 그에 대한 취재마저 방해한다는 내용으로 항의기사를 내겠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제서야 경찰들은 심중한 기색으로 수군거리더니 미해결사건기록철을 가져다가 뒤적거렸다. 예견한바대로 그들은 시끄러운 기자때문에 사회적비난을 받느니 차라리 적당히 성의를 보여 빨리 돌려보내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것 같았다. 머리를 맞대고 수군대던 경찰들중 한사람이 김현철에게 다가왔다. 그는 사건조사가 아직까지 결속되지 못했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려줄수 없다고 딱 잘라맸다. 김현철은 당시 사건현장의 목격자와 연고자들 그리고 현장조사에 관여했던 수사관들이야 만날수 있지 않느냐고 들이댔다.

그러자 그는 난처한 기색으로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얼마후 다시 온 그는 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현장수사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조동되여 만날수 없지만 그후 은퇴한 수사팀의 책임자였던 형사는 만날수 있을거라고 하면서 인차 그의 거처지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김현철이 요구한 김춘옥사건과 관련된 연고자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장을 넘겨주었다. 김현철은 은퇴한 형사의 행처를 꼭 알려줄것을 거듭 당부하고는 그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는 실무대표단의 전날 활동내용을 현지보도기사로 전송한 다음 오찬에 참석해야 했으나 단장에게 량해를 구하고 일반취재를 구실로 거리에 나섰다.

홍콩은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다양한 삶의 모습이 혼합되여있는 곳이였다. 아편전쟁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였다가 150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러서야 자기 조국으로 되돌아올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오랜 전통이 식민지의 자취와 뒤섞여있었다. 홍콩은 유명한 관광의 도시였다. 거리를 붐비는 사람들가운데서 둘중의 한사람은 관광객이라고 할 정도였다.

김현철이 탄 택시는 어느새 바다가를 따라도는 침사취의 《련인의 거리》를 달리고있었다.

구룡반도는 홍콩에서 가장 흥미있는 지역중의 하나였다. 골목으로 접어들면 성냥갑처럼 생긴 낡은 살림집이 있는가 하면 큰길로 나오면 초고층의 호화건물들이 번쩍거렸다. 중국전통의 사원을 지나 혼잡을 이룬 야시장들과 식당들을 거쳐 택시가 20세기 초엽에 세워졌다는 시계탑을 돌고있을 때였다.

문득 운전사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며 누구에게 쫓기는가고 물었다.

《아니요. 무슨 일입니까?》

김현철이 묻자 운전사는 뒤차가 쫓아오는것 같다고 하였다. 김현철은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차가 보였다. 불안한 생각이 든 그는 운전사에게 돈을 더 줄테니 쫓아오는 차를 따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누군가가 자기를 따르고있다는 사실이 그를 고도로 긴장시켰다.

택시는 큰 거리를 벗어나 좁은 주택지구를 돌았다.

갈래가 많고 교통이 복잡한 어느 뒤골목에서 운전사는 끝내 뒤따르던 차를 따돌렸다.

《이젠 어디로 모실가요?》 하고 그가 묻자 김현철은 대답했다.

《다 왔습니다. 이곳에서 내리겠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김현철은 아래쪽으로 걸어내려갔다. 얼마쯤 가서는 사이길 반대쪽으로 건너섰다. 이때 빈차로 오는 다른 택시가 보이였다. 그는 손을 들어 세우고 급히 올랐다.

《라단거리로 갑시다.》

라단거리의 어구에서 내린 그는 차를 돌려보냈다.

이곳저곳 머리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주변을 곧잘 휘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그는 갈데 없는 관광객 같아보였다.

홍콩섬이 금융의 중심지라면 구룡반도는 상업의 중심지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억에 달하는 자금이 류통된다는 이곳의 뒤골목에도 서민들이 사는 동네가 있었고 그들을 위한 시장거리가 있었다. 크고작은 상점들과 식당들이 즐비한 이 거리는 한때 《황금의 거리》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호황을 누린적도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전자제품이며 넥타이, 손가방, 모자, 브로치 등 기념품들을 사느라고 상점들과 시장을 누비고있었다.

김현철은 각이한 새소리가 노래처럼 울려나오는 새상점으로 들어갔다.

홍콩사람들은 유난히도 새를 좋아했다. 그래서 아침 산보길에도 새조롱을 들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볼수 있다고 했다. 이 상점에는 희귀한 금강앵무로부터 시작하여 갖가지 새들이 나름대로 울며 홰를 치고있었다.

매장으로 다가간 김현철은 판매원과 몇마디 주고받은 후 매장 뒤문으로 돌아갔다.

파마머리를 한 중년의 녀인이 경계하는 눈길로 그를 맞이했다.

홍콩경찰이 넘겨준 연고자명단에 김춘옥의 집 가정부로 올라있는 녀성이였다.

김현철은 명함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1987년당시 살해당한 김춘옥녀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한줄로 알고있습니다.》

그는 김현철의 명함장을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눈살을 쪼프리고 상대를 흘낏 쳐다보고는 자리를 권했다.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는 태도였다.

김현철은 한동안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녀인을 지켜보았다. 잠시 궁싯거리던 녀인은 마지못해 코맹맹이소리로 물었다.

《오래전의 일인데 왜 지금 묻습니까?》

김현철은 제꺽 말을 받았다.

《가족측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녀인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김현철은 간청조로 덧붙였다.

《가족에게 진실을 알려준다고 생각하십시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망설이던 녀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 그 사건에 대해 별로 아는게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것은 이미 그때 경찰에 다 얘기하였습니다.》

《전 경찰이 아니라 기자랍니다. 그러니 다시 말씀해주실수야 있지 않겠습니까?》

말없이 수긍하는듯 했지만 묻는 말에만 대답하겠다는 기색이 력연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김현철은 긴장해하는 녀인의 속을 눙칠수 있는 말을 고르느라 애썼다.

《부인에게도 딸이 있는지요? 자식으로, 형제로 하여 마음고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여있답니다. 그들이 바라는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제 자식, 제 누이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사실뿐입니다. 이를테면 진실을 바라며 가슴을 태우고있단 말입니다.》

녀인은 고개를 수그리며 머리를 쓸어만지였다. 진달래꽃을 형상한 머리빈침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녀인이 마침내 말꼭지를 뗐다.

《그 녀자는 내 막내동생벌이였어요. 눈길을 끌만큼 잘 생긴 녀자도 아닌데 참 이상하게 살았고 이상하게 죽었지요.》

김현철은 놓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그것을 말씀해주십시오.》

녀인은 여전히 바닥에 눈길을 박은채로 말했다.

《나만이 느낀건지도 모릅니다. 홍콩이라는 땅에 돈을 벌려온 녀자가 반년도 못되여 식당을 내왔으니 놀랍고 남자들을 수많이 대상했으니 어느 손에 잘못되였는지 알수 없는데다가 또 그것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니 이상하다는거예요.》

《문태석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던데요.》

《그런 사람 이름은 들었지만 전 본 일이 없습니다.》

《가정부로 일했는데도 말인가요?》

녀인의 얼굴로는 야릇한 미소가 알릴듯말듯 스쳐지나갔다. 김현철은 그것을 보면서 김춘옥과 그와의 사이에 좋지 못한 사연이 있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봤겠지요. 춘옥의 소개대로 한다면 문태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난 적어도 세사람은 만났어요. 그때마다 춘옥인 왜 왔던가 하는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셨고 마신 다음엔 히스테리를 부렸어요.》

김현철은 미간을 쪼프렸다. 김춘옥이라는 녀성이 겪어온 해외생활의 한 측면을 포착한감을 느꼈기때문이였다. 그것은 인위적인 환경속에서 그 어떤 강요된 생활임을 련상케 하는것이였다. 섬찍한 의혹이 머리속을 스쳤다.

김현철은 유도질문으로 넘어갔다.

《김춘옥녀성은 어려서부터 못해본 고생이 없었습니다. 하도 가난하고 어려운 집안을 건져보려고 돈벌이를 위해 남의 나라 땅에까지 왔다는것만은 알고있습니다. 그런 녀자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식당을 차릴수 있었을가요?》

녀인은 처음으로 김현철과 눈길이 부딪쳤다.

《내가 앞서 이야기한것처럼 춘옥인 이상하게 살았고 이상하게 죽었어요. 여기 홍콩에선 이상하다기보다 괴상한 일들이 매일 매 시각 벌어져요. 기자선생도 주의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전 할 말을 다했습니다.》

녀인의 태도는 정말로 더이상 아는것이 없는것인지 아니면 취재에 더 응할 생각이 없는것인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보면 취재를 중도에서 거부하는듯 한 그 처사에 김현철은 아연해지고말았다. 하긴 누가 살인사건과 관련한 증언을 하는것을 꺼리지 않겠는가.

김현철은 오늘은 이쯤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상점을 나선 그는 조금 더 내려가다가 비교적 큰 매점에 들어갔다. 별로 살 물건은 없었으나 출입구에 서있는 대형벽거울에 잠시 서서 옷맵시를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뒤쪽을 살피고있었다. 뒤따르는자는 없는것 같았다.

김현철은 그 매점앞을 지나가는 뻐스에 올랐고 다시 차를 갈아타면서 한시간후에야 호텔로 돌아왔다.

무심결에 접수구를 지나치는데 안내원이 조심스럽게 불러세우더니 웬 녀인이 찾아와 홀에서 기다린다고 알려주었다.

김현철은 의아하여 눈을 껌벅이다가 물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요?》

안내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물었다.

《젊은 녀인입니까?》

《예.》

김현철은 호실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굴렸다.

(누구일가?)

좀전에 만났던 새상점의 파마머리녀인이 얼핏 떠올랐다. 혹시 그가 잊었던 그 무엇이 갑자기 생각나서 누군가를 보낸것은 아닐가?

그는 안내원이 가리켜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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